엘리네일
오늘따라 더 안 깨네. 가만히 자는 얼굴을 쳐다보던 네일은 손을 뻗어 엘리후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보통 이러면 잠결에라도 제 손을 잡아오던데. 아니면 얼굴을 부빈다던지. 이리 깨지 않는 것도 꽤나 색달라서, 네일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보였다. 자는 척 하는 건 확실히 아닌 것 같고. 네일은 손을 거두고 조금 벌어져있던 거리를 좁혔다. 그대로 이마를 툭, 하고 맞대니 체온이 전해지는 기분이 제법 좋았다. 저의 체온이 엘리후에게로, 엘리후의 체온이 저에게로. 그리 생각하니 나른해지는 느낌이라 네일은 슬쩍 눈을 감았다. 엘리후와 함께 하는 이런 느긋한 아침은 항상 좋았다. 이 아침이 영원히 끝나지 않더라도 행복할 것만 같아서. 그래도 앞으로는 평생 이리 지내겠지. 아까 지었던 웃음 그대로 네일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나저나, 이래도 깨지 않는다니. 슬슬 색다름에서 놀라움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혹시 아픈 건 아닌가, 싶어서 맞대고 있던 이마를 떼어내고 그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보니 딱히 열이 있는 건 같진 않았다. 아픈 게 아니라면 다행이긴 한데. 네일은 가까이에서 엘리후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며 고민을 시작했다. 어제 낮부터, 밤에, 새벽에……. 한참을 그러다, 뒤늦게 이유를 깨닫자마자 네일은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양 볼에 두 손을 올리고 한참이나 문지르던 네일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피곤하겠지. 저가 이렇게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도 신기할 지경인데.
─물론, 그리 생각하자 마자 허리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네일은 끄응. 하고 신음하며 다시금 침대에 엎어져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이게 무슨 꼴이람. 평소보다 더 무리한 것은 엘리후는 둘째치고, 저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잠시 잊고 있었더랬다. 그 전에 아침 분위기에 취해선 그리 …해댄 것도 까먹고 있었으니. 그만 좀 하라니까, 하는 말을 듣지도 않던 것을 이제야 기억해냈다. 아마도 저가 먼저 지쳐 기절하듯 잠든 것 같은데. 그러니 까먹고 있었을만도 하지, 하며 잠시 속으로 자기위로를 해보고. 갈수록 더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에 네일은 얼굴을 베개에 몇 번이나 부볐다. 그대로 계속 말렸다면 엘리후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멈췄을 만도 한데. 분명히 결국 저마저 분위기를 타, 말린다는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게 분명했다. 설마 조르진 않았겠지. 새벽의 중간 즈음부터 기억이 흐릿했다.
저 혼자 이 난리법석을 떨었는데도 깰 생각을 않는 엘리후를 보며, 네일은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얼굴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설마 조르진 않았겠지, 했지만. 조금 더, 더 해줘. 그리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 있어서. 제 착각이라면 좋겠건만. 네일은 고개만 돌려 엘리후의 얼굴을 다시 빤히 쳐다봤다. 그냥 생각을 않는 쪽이 편할 듯 싶다. 엘리후가 깨서 뭔가 말한다면… 그때는 어쩐담. 상상만으로도 심란해지는 상황이다. 저를 놀리는 걸 그리 좋아하는 엘리후니, 기억하고 있다면 분명히 말하겠지.
그리 속으로 심란해하고 있다가, 네일은 문득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켰다. 옆의 서랍 위를 더듬으니 바로 안경이 손에 잡혔다. 도수가 꽤 높긴 한데, 지금은 자고 있으니 별 상관 없겠지. 네일은 제 안경을 잠시 내려다보다, 몸을 돌려 아직 자고 있는 엘리후에게 조심스럽게 씌워주었다. 그러고 한참을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 말도, 생각도 없이. 1, 2분 정도 지났을까. 한참만에 처음 한 생각은 이러나 저러나 잘 생겼네. 그 다음에 한 생각은 이것도 잘 어울리네. 그리고나서 또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엘리후가 조금씩 잠에서 깨어나는 것도 모른 채.
"네일?"
아.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란 네일은 급하게 손을 뻗었다. 안경, 벗겨야 하는데. 네일의 손이 얼굴에 닿기도 전에 엘리후는 눈을 떴다. 그리고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어지러워.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들으며 네일은 한숨을 푹 내쉬고, 늦게나마 씌워놓았던 안경을 벗겨주었다. 엘리후는 어지럼증이 가시지 않은, 그리고 아직 반 쯤 덜 깬 눈으로 네일을 쳐다보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 말도 없는 것에 어쩐지 불안해졌는지,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그런 엘리후의 눈치를 한참 보기만 했다. 얼마 안 가 엘리후의 시선이 네일이 들고 있는 안경에 닿았고, 이내 피식 웃었다.
"뭐 한거야?"
"…아니, 그냥."
"언제든 써달라고 하면 써줄텐데."
깨어있을 땐 어지럽잖아. 그리 말하니 엘리후는 팔을 뻗어 가만히 네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도수 없는 거, 원래 쓰던 거 있잖아. 쓰던 안경 잘 안 버리면서. 그 말에 네일은 그렇네, 하고 다소 멍청하게 대꾸했다. 그나저나 그러는 건 또 어떻게 안 것인지. 물론 버리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귀기 시작한 후부터는, 모든 것에 기억이. 추억이 새겨져 있으니까. 안경을 씌워주거나 벗겨주었던, 그런 사소한 것일지라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좋았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눈이 잘 보이는 쪽이 더 좋다. 안경을 쓰면, 안경알에 눈이 가려지니까.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이기에 네일은 속으로 꾹 삼켰다. 써줘? 하는 말에 그저 고개를 두어번 저을 뿐.
"옷이나 입어."
자고있을 땐 이불에 가려져서 잘 몰랐는데. 아마 저가 먼저 기절하듯 잠들고, 그 뒤에 엘리후 또한 저를 끌어안고 잠든 모양이었다. 네일이 제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반대로 하고, 딴청을 피우니 엘리후는 슬쩍 얼굴을 가까이 하며 눈을 접어 웃었다. 싫은데. 일부러 내는 은근한 목소리에 네일은 어쩐지 제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싫지는 않음에도, 베개를 잡아 그 얼굴을 꾹 누르며 밀어냈다. …환한 때에 아무리 상체만이어도 나체를 보는 건 아직 좀 부끄럽다고. 익숙해져야 할 것인데,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엘리후는 뭐가 그리 좋은지 아직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베개를 치워냈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이불을 던져버릴 기색으로 쳐다보는 네일에게 알았어, 알았어. 하고 대꾸하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차마 사심을 숨기질 못한 눈이 저도 모르게 고정됐음은. 등 돌린 채 있으니 모르겠지만. 그러다 문득, 네일은 엘리후의 등에 상처가 제법 많은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 정확히는 열려고 했다. 새벽의 일을 다시금 기억해내지 못했더라면. 다 내가 낸 거잖아. 네일은 작게 신음하며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러다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그렇게 긴 건 아닌거같은데.
"왜 그러고 있어?"
어느새 옷을 다 입은 엘리후가 고개를 갸웃, 하며 네일의 어깨를 잡아왔다. 그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네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그럼 됐고."
엘리후는 슬쩍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이내 별 것 아니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네일은 다시 한 번 제 손톱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고 툭 말을 뱉어냈다.
"엘리, 나 손톱 좀 깎을까?"
"응?"
다소 뜬금없는 물음이긴 했다. 딱히 뜻을 알아줘봤자…… 분명히 또 놀릴 게 뻔하기도 하고. 그럴 바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 그저 속으로만 상처 내는 건 싫으니 깎아야겠다. 그리 중얼거릴 뿐. 눈을 깜빡이며 저를 쳐다보는, 정확히는 어떤 뜻인지 묻고 있는 듯한 엘리후에 네일은 으응. 하고는 고개를 다시금 휘휘 저었다. 그냥 해 본 소리였어. 그러고는 다소 급한 몸놀림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조금 어색한 목소리로 오늘 아침은 뭘 먹는담. 괜히 주제를 돌리듯, 그리 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