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닌 에디트, 테이트 워커] Past,
눈을 뜨면 항상 하얀 천장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시아닌 에디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 병원 특유의 싸한 약냄새가 나지 않는 것만은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런 것은 청년이 된 그를 괴롭힐 것이 분명했으므로. 시아닌은 그 남자를 병원에서 처음 만났었다. 소독약 냄새로 가득 메워진 병실, 그 안에서. 그 기억은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행복했던 기억이었을텐데. 갑작스레 벌어진 일들은 시아닌의 정신을 망가뜨렸고, 그 기억의 빛깔마저 퇴색시켰다. 적어도 정신병원에서는 약냄새는 나지 않았으니, 그것이 그를 버티게 만들었다. 하루하루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은 느꼈으나, 지금은 기계적인 삶이 저에게 더 좋으리라. 잠에서 깨어나고, 일어나서 간단하게 세안을 하고, 상담을 받고, 심리치료, 식사, 다시 잠……. 그게 편했다. 그것이 그를 살게 만들었다.
그렇게 1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병원 내의 사람들도 전혀 사귀지 않았다. 이따금 그는 쫓기는 꿈을 꾸었고, 검은색 인영을 보았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외부와 자신을 철저하게 차단시킨 탓에 그의 생사는 알 수 없었으나─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죽었거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죽었어도 살아있어도 그는 평생 저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 날의 일을 시아닌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밤, 구치소, 그의 목을 조르던 자신. 기분이 어땠냐며 묻던 그. 떠올린 날에는 항상 악몽을 꿨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늘도 시아닌은 고개를 젓는다. 에디트의 이름을 빌린 친구는 저를 퍽 쉽게도 찾아냈다. 나름 용을 써서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반년이 넘게,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아 방문을 거절하고 있었다. 아마 그 성격을 떠올리자면, 병원까지 오긴 했으나 저를 만나고 가지 못한 것이 수십 번은 될 것이라. 시아닌은 텅 비고 하얀 방 안에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포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저를 아껴주는 마음이야 알겠지만은. 오늘도 침대에 몸을 뉘여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일 또한 오늘과 똑같은 하루임을 기원하면서.
그리고 애석히도 그 다음날은 똑같은 하루가 될 수 없었더랬다.
"야, 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야?!"
"저기. 이러시면 안 되구요, 보호자님… 환자는 아직 안정을……."
병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두개가 모두 아는 목소리였다. 하나는 매일같이 듣는 전담 간호사의 것, 또 하나는. 시아닌은 떴던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너, 걔 좀 멀리하는 게 어때." 예전의 그 목소리가 했던 말을 따랐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문득 시아닌은 픽 웃었다. 배신이 두려웠으나, 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그마저 믿지 못하게 된 건 아니었다. 그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저.
"시아닌. 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벌써 1년이나 지났어. 네 부모님이나, 우리 생각은 안 해?"
그저…….
"보호자님!"
"아 좀, 조용히 좀 있어봐요!"
망가진 내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서. 단지 그뿐이었기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다리를 움직였다. 손에 닿는 문고리의 느낌이 제법 서늘했다. 그대로 돌려 문을 안쪽으로 당겼다.
"이 자식을 좀 만나야 한다니까…"
"테이트."
1년. 잊을 수 없는 얼굴이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본다. 이리 놀라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시아닌은 옅게 웃었다. 잔뜩 화가 나있었던 표정이 순식간에 걱정으로 바뀐다. 까만 눈동자에 저가 비춰지는 것이 문득 두려워져서, 시아닌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간호사도 적잖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시아닌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짧은 말에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치로 시아닌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볼게요." 그 말이 떨어지자 간호사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 하다가, 둘을 면회실로 안내했다.
"니가 언제부터 내 보호자였어?"
"그런거에 태클을 걸 때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장난스레 주고받는 말은 1년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서, 그것만은 시아닌에게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1년의 병원 생활 중 처음으로 와보는 면회실이었다. 조용하고, 깔끔했다. 시아닌은 두어번 눈을 꿈뻑이고 자리에 앉았다. 테이트 또한 잠시 머뭇거리는 듯 싶다가, 그 반대편에 앉았다. 이렇게 마주할 사이는 아니었는데. 1년의 세월이 둘에게 거리감이라도 만들어버린 듯,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시아닌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가 있었고, 테이트는 하염없이 제 내려진 손만 쳐다봤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였다. 그저 말을 고르고만 있을 뿐. 먼저 입을 연 쪽은 시아닌이었다.
"기업은 네가 물려받는 게 낫겠다."
"…무슨 개소리야."
"병원이야. 욕은 그만 하자."
테이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시아닌을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찌푸려진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폈다. 오랜 시간 에디트의 지원을 받아오며 살아온 건 사실이었지만, 저가 받은 교육은 어디까지나 직속 비서 정도의 자리에 불과했다. 시아닌의 부모님은 저를 아들처럼 여겼고, 아들이 이런 상태라면 충분히 저에게 그 자리가 돌아올 수 있는 것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저는 양자 아닌 양자였고, 애초에 테이트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시아닌에게만은.
"애초부터 별로 나한테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어. 네가 더 잘 할걸. 부모님을,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니까."
─이러다 싸울지도 모르겠다, 며. 테이트는 애써 목소리를 꾹 눌러 참았다. 1년만에 겨우 만났는데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시아닌은 그런 테이트를 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많이 변했구나, 싶다.
"그때 네 말을 들을 걸 그랬지."
"옛날 얘기를 해서 뭐하겠어."
느릿한 한숨이 면회실 안을 채웠다. 전염이라도 된 마냥 시아닌도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에 대한 감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나보다. 몇 년을 이용당했는데도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아니면 정말로 친구라고 생각했기에 의심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 저가 '친구'라는 단어에 유독 약한 것을 시아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친구를 만들지 않고 일부러 사람을 멀리해왔던 것이 아니던가. 정말 간도 쓸개도 다 빼서 줘버릴까봐. 적어도 의심을 모두 거둬버릴 정도의 정은 주었더랬다. 그 시절의 시아닌 에디트는.
"야."
"응?"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거야."
겨우 마주했던 시선을 떨군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테이트 또한 별로 대답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듯, 되묻지는 않았다.
"…나, 만나러는 와도 되는건가."
"……응. 앞으로는 피하지 않을게."
적어도 너는.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소꿉 친구이자, 형제와도 같은 이를 보며 시아닌은 웃었다. 나머지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문득 시아닌은 줄곧 느껴지던 시선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눈 앞에 테이트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고, 정말로 어느정도 괜찮아졌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지. 기왕이면 전자였으면 한다. 괜찮아진게 더 좋은 것 아니냐며 누가 묻는다면, 아직은 나갈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시아닌,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던 테이트는 그냥 그대로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고 말을 참아버렸다. 해버린 말은 절대로 주워담을 수 없기에. 그저, 삼켜버릴 뿐. 1년을 기다려서 겨우 만났다.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는게 하염없이 두려웠다. 시아닌은 부러 그 말을 되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 않는─혹은 못하는─ 말에는 항상 이유가 있기 마련이므로.
"계속 와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부탁할게. 그리 말하며 시아닌은 빙긋 웃는다. 테이트는 그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