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네일] 200Days
느릿하게 눈을 뜬 네일은 흐릿한 시야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머리맡을 짚어 안경을 찾아내 썼다. 그러고 저를 끌어안은 채로 여전히 잠들어 있는 연인의 얼굴을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잠이 다 달아났을 즈음, 네일은 살짝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를 조금 넘은 시각. 저녁을 먹고 들어오자마자 피곤에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으니, 두 세 시간 즈음 잔 모양이었다. 옷은 갈아입고 잤어야 했는데. 네일은 손을 뻗어 엘리후의 셔츠 단추를 두어개 즈음 풀어주었다. 불편하지 않도록. 이내 색색 숨을 내쉬며 자고 있는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슬며시 품에서 빠져나갔다. 깨어나면 곤란하니 아주 조심스럽게. 사실 그대로 더 자더라도 별 상관없긴 했으나, 어쩐지 깨어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네일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작진 않았는데 여전히 곤히 잠들어있는 걸 보면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원래도 그리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작게 미소를 띠며 네일은 엘리후의 볼을 약하게 쿡쿡 찔렀다. 구경을 잔뜩 다닐 만한 곳으로 같이 여행을 온 건 처음이라, 너무 들떠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른 낮부터 여기저기 끌고 다녔던 걸 떠올리며 네일은 계속 찌르던 볼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깨는 걸 바라지는 않았기에 금방 손을 거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엘리후가 바르작거리며 작게 소리를 냈으나 깨지는 않은 듯했다.
딸려있는 발코니의 문을 열자 제법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방금 전 옷을 갈아입으며 대충 의자에 걸쳐놨던 겉옷을 걸치고, 발코니로 나가자 탁 트인 바다가 한 눈에 보였다. 날이 저문 지가 한참이라 모래사장은 한산했다. 밤바다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는 모양인지 느릿하게 산책을 하고 있는 이들을 빼면. 내일은 좀 적당히 돌아다니고, 이 시간에 같이 바닷가를 걸어봐야겠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일은 혹여 방 안으로 들어가는 찬 공기에 그가 감기에라도 걸릴까 싶어 발코니의 문을 닫았다. 그러고 난간에 기대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꽤나 기분이 좋았다. 가끔씩은 따뜻한 바람이 아니라 찬바람인 편이 더 기분 좋기 마련이었다.
바다는 좋아했으나, 해가 떠 있을 동안에는 전혀 발을 들이지 않았다. 저나 연인이나 사람이 많은 걸 싫어했으면 싫어했지 즐기는 편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제대로 보려면 해가 떠 있을 때, 햇빛에 물이 반짝이는 걸 보아야 하는 게 맞는데. 인파에 밀려 스트레스를 받는 것 보다야 그나마 조용한 곳에서 연인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았다. 이렇게 밤의 바다를 보는 것도 제법 괜찮기도 하고. 일부러 바다가 보이는 곳에 숙소를 구한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혼자 밤바다를 내다보고 있기를 한참. 뒤에서 저를 끌어당기는 팔에 네일은 몸에 힘을 풀고 가볍게 그의 품에 제 몸을 내주었다. 이내 제 어깨에 얼굴을 묻어오고, 몸을 부벼오며 귓가에서 끄응거리는 소리에 네일은 작게 웃고 말았다. 손을 올려 엘리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그 손에도 머리를 부벼왔다. 안고 있으면서도 기대고 있는데, 평소보다도 그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피로의 누적때문인 듯싶었다. 이럴 것 같아서 일부러 깨우지 않은 거였는데.
“네일─”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자 네일은 응, 응. 하며 애 어르는 듯한 느낌으로 제 허리를 껴안고 있는 손을 잡아 올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 손으로 엘리후는 네일의 입술을 두어번 만지작거렸다. 뭘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기에, 네일은 고개를 돌려 제 어깨에 턱을 걸친 채로 있는 엘리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맞대었다. 그대로 한두 번 부비고 떼어내자, 눈에 나 졸리다. 고 쓰여 있는 주제에 기분은 좋은지 눈앞에서 푸스스 웃어보였다.
“안 자고 뭐해.”
“잘 시간은 아니잖아?”
이내 엘리후는 작게 신음하고는 허리를 펴 기대고 있는 몸을 제대로 하고, 네일을 제 품 안에 더 세게 안았다. “내 품 안에서 잘만 자고 있었으면서.” 귓가에 속삭이며 귀에 입을 맞추고, 또 볼에도 입을 맞추자 네일이 간지러운지 키득거렸다. 허리를 껴안고 있는 두 팔 중 한 팔은 움직여 네일과 손을 맞잡고, 자다 깨서 정리도 하지 않은지라 평소보다도 더 난잡하고 약간 뻗친 채인 네일의 뒷머리에 엘리후는 제 코를 대고 몇 번 부볐다. 희미하게 나는 체취가 기분 좋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또한.
“그냥. 바깥 구경이 조금 하고 싶어져서.”
“춥진 않고?”
“방금 전까진 조금 추웠는데, 지금은 별로.”
느긋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엘리후는 고개를 내려 네일의 뒷목에도 입을 맞추었다. 여전히 연인의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의 손으로 장난스레 허리를 쓰다듬자, 그 손마저도 잡혀서는 내려졌다. 엘리후는 쿡쿡 웃으며 흘끔 네일을 쳐다보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면 어쩔 줄 몰라하곤 했는데, 이리 변하긴 했어도 제법 귀엽지 않나. 저를 쏘아보다가도 눈이 마주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이는 걸 보며 엘리후는 다시금 네일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영 졸음이 가시질 않았다.
“나 졸린데, 네일.”
“들어가서 더 자.”
“재워줘.”
너도 더 자고. 하며 괜한 어리광을 부려오자 네일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피곤해서 이러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지만 아직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조금 미안한 일이었다. 제 볼을 간질이고 있는 엘리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네일은 고개를 돌려 그의 정수리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럼 조금만 있다가.”
불만스러운 시선이 저를 향해왔으나 유쾌하게 무시하고, 네일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햇빛 대신 달빛을 비추고 있는 분위기가 데이트하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았다. 제게 매달려서 칭얼거리고 있는 걸 보니 역시 오늘은 무리겠고, 내일로. 다음 날의 일정 끝에 속으로 끼워두며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내리감았다. 바람이 꽤 차게 느껴졌는지 뒤에서 엘리후가 저를 더 끌어안아왔다. 자기가 추워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추위를 잘 타는 연인을 걱정해준 건지. 둘 다 일지도 모르겠다며 네일은 속으로 계속 피식거렸다.
계속 제게 부비적거리며 들어가서 더 자자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또 무시하고. 한 번은 어르고 달래며 여기저기에 쪽쪽거리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네일은 갑자기 눈앞의 넓디넓은 하늘에 펑, 하고 터지는 불꽃에 반사적으로 몸을 크게 떨었다. 소리가 꽤 컸는지 한참 네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엘리후 또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까보다 더 큰 불꽃이 터지고, 몇 초의 간격을 두고 그 양 옆으로 조금 작은 불꽃이 터져 하늘을 여러 빛깔로 수놓았다. 어디서 폭죽을 쏘아 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일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눈만 깜빡이며 계속해서 터지는 불꽃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작게 엘리, 하고 제 연인을 불렀다. 엘리후는 눈을 데룩 굴려 네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쁘지.”
“응.”
자연스럽게 답하며 엘리후는 네가 더. 하며 작게 덧붙였다. 그걸 들었는지, 못들은 척 하는 건지. 네일은 별 반응을 하지 않았는데, 귀 끝까지 빨개진 걸 보니 들어놓고 못들은 척 하는 것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렇게 알기 쉬워서야. 잔뜩 붉어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엘리후는 그 귓가에 소곤소곤,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네가 더 예뻐.”
“…수작 부리긴.”
진짠데. 끝으로 귓가에 웃음소리를 흘리곤 엘리후는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불꽃놀이도 예쁘긴 하지만, 역시 이쪽이 더. 시선은 터지고 있는 불꽃에 여전히 고정된 채로 엘리후는 네일의 볼을 손가락 끝으로 간질였다. 아까처럼 잡아 내리지 않는 걸 보면 분위기에 취한 듯, 그리고 딱히 싫지도 않은가 보다. 네일이 쓰고 있는 안경을 톡, 건드려 내리자 네일은 손을 움직여 안경을 바로 올려 썼다. “장난치지 말고.” 작게 중얼거리며 그제야 엘리후의 손을 꼭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우리도 내일 폭죽 사서 쏴보자.”
“애도 아니고.”
“뭐 어때.”
“흐음. 딱히 폭죽 살 필요는 없지 않아?”
맞잡고 있는 손을 움직여 네일의 손으로 지팡이를 쥐는 흉내를 내자 네일은 그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폭죽 쏘는 거랑 마법은 조금 다른 맛이 있거든.”
“쏴본 적은 있어?”
“……아니.”
갑자기 풀이 죽는 걸 보며 엘리후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네일은 괜히 그런 엘리후를 쏘아보았고, 그제야 겨우 웃음을 멈추며 엘리후는 다시금 네일의 손을 꽉 맞잡고 자신 쪽으로 움직여 아까 네일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쏴본 적이 없는 것이야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고, 어떻게 하던 별 상관은 없었으나. 장난스레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입을 맞춰가며 엘리후는 조금 늦게 대꾸했다.
“네가 원한다면 나도 좋아.”
“응.”
네일은 평소와는 다르게 밝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새끼손가락까지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자, 네일은 주먹을 꽉 쥐어 더 이상 입 맞추지 못하게 해버렸다. 물론 그런다고 스킨십을 관둘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다른 쪽 손으로 네일의 턱을 잡고 고개를 돌리게 해, 슬며시 입술을 맞대었다. 애들 마냥 맞대고 부비는 게 아니라 그대로 겹치자 자연스럽게 네일은 입술을 벌려주었다. 그 안쪽으로 제 혀를 밀어 넣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네일의 혀와 그대로 얽히게 했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 때문에 혀와 혀가 뒤섞이는 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렸으나. 그대로 꽤 길게 이어진 딥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떼어지자 둘은 숨을 교환하듯 여전히 마주보는 채로 말없이 숨을 골랐다.
“가끔 보면 다 컸는데도 어린애 같단 말이지.”
“내 어릴 때 본 적 있는 사람처럼 얘기하네.”
“열일곱도 충분히 어릴 때라고 생각하는데.”
“그 땐 너도 열일곱 살이었어.”
한 마디도 안지며 대꾸해오자 엘리후는 그냥 고개만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네일은 그런 그를 뒤로하고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열일곱. 그 한 해에는 꿈을 꾸는 듯 살았고,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는 행복이라는 게 꿈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실존하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열일곱의 그 날, 엘리후가 고백의 대답 대신 입을 맞추어줬을 때부터 행복은 쭈욱 이어지고 있다며. 다시금 되새기자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와서, 네일은 잡고 있지 않은 손을 올려 제 입가를 가렸다. 어느새 불꽃놀이도 끝나, 깜깜한 밤하늘은 다시금 조용히 가라앉았다.
“슬슬 들어가자, 엘리.”
“나 잠 다 깼는데.”
잡고 있는 손을 놓고, 네일은 뒤돌아 슬쩍 까치발을 들고 엘리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네일은 말을 마치고 바로 지나쳐갔으나, 그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는 없어서. “잠 오게 해줄게, 그럼.” 그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해보며 엘리후는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금세 픽 웃고는 네일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간에 제멋대로란 말이지. 물론 싫진 않았다.
발코니 문을 닫고 제게로 다가오는 엘리후를 보며 네일은 가만히 제 두 팔을 벌렸다. 엘리후는 그런 네일을 꽉 끌어안고, 그대로 밀어서 뒤로 눕혀버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네일은 아까부터 자꾸만 키득거리며 그런 엘리후의 품에서 작게 바르작거렸다. 거부의 뜻은 절대로 아니고, 오히려 이건 이것대로 보채는 것이라. 엘리후는 슬며시 네일이 걸치고 있는 겉옷을 벗겨내고, 네일 또한 그런 그를 따라 손을 뻗어 하나씩 연인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