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커플로그

[지크라그] 감기

Hewa 2016. 9. 30. 04:38


  제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손길에 라그렛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보이는 건 당연하게도 익숙한 얼굴이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윽고 한숨 소리를 뒤로 하고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문제라면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 정도. 두어번 입술을 달싹이던 라그렛은 결국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한참 동안 머리칼을 쓸어넘겨주며 식은땀을 닦아주던 손이 스르륵 내려가 라그렛의 목 여기저기를 손가락 끝으로 살살 매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나온 건 한숨도, 목소리도 아닌 잔기침 몇 번이었다. 작게 인상을 쓰고 제 입을 가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지크프리트는 손을 거두었다. 작게나마 찌푸려진 미간을 펴주기 위해 또 뻗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라그렛은 딱히 그 손길들 하나하나를 저지하려 들진 않았다. 평소보다도 나른하게 풀린, 밝은 노란색 눈동자가 지크프리트를 향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두어번 더 콜록거리고 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그마저도 상당히 잠겨있었지만.

  "언제 왔어."
  "목소리, 잠겼어요."
  "……언제 왔냐니까."

  저마저도 제 잠긴 목소리가 낯설어서, 라그렛은 제 목을 오른손으로 약하게 감싸 엄지 손가락으로 목울대를 꾹꾹 눌렀다. 그런다고 목소리가 돌아올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라그렛은 잔뜩 인상을 써버렸다. 잔뜩 잠겨버린 제 목소리도, 물음에 답하지 않는 지크프리트 위버도. 어쩐지 다 맘에 들지 않고 불만스럽기만 해서.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가. 그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크프리트는 허리를 숙여 한껏 찌푸려진 미간에 가볍게 쪽, 하고 입맞추었다. 다시금 새까만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이마에도 입맞추고. 라그렛은 목 깊은 안쪽에서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방금 왔어요." 늦은 대답에 두 손이 뻗어진다. 저보다도 더 하얀 목에 감싸안듯 걸쳐져, 그대로 제 쪽으로 당겼다. 힘 하나 들어가지 않은 몸짓임에도 불구하고 지크프리트는 생각보다도 더 쉽게 끌려왔다. 어정쩡하게 제 옆에 누운 연인의 품에 머리를 부비며 라그렛은 옅은 숨을 내쉬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어리광이다. 제 체온이 올라간 덕에 서늘하게 느껴지는 옷깃의 감촉이 제법 좋았다. 그보다는 확실히 연인의 품이라는 점에서 더 좋은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러기를 한참. 약하게 옷깃을 붙잡고 부비적거리던 라그렛은 고개를 들어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저를 보고 있었던 모양인 선홍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 아파."
  "알아요. 이렇게 티를 내고 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상태가 안 좋다는 걸 깨달은 건 어제 저녁 즈음이었고, 안 좋은 걸 넘어서 정상이 아니라는 것까지 깨달은 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라그렛은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여느때처럼 배웅해주고 난 이후의 기억이 없다. 정확히는 드문드문 끊겨 있다. 그 때 완전히 방전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다른 일정이 없는 날이었어서 다행이지. 끊긴 부분의 기억은 이러하다. 비척거리며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깨어버리고. 식은땀에 젖어있는데도 자꾸만 으슬으슬 추워서 괜히 더 이불을 당겨 덮었더랬다. 그러다가 또 잠들고, 깨고. 세번째로 깬 게 바로 지금이다. 만 하루를 잠으로만 보낸 거다. 어지간히 아프긴 한 모양이지. 그래도, 침대에서 자꾸만 바르작거리느라 엉망이 된 검은색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손길은 몸이 안 좋은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좋기만 했다. 라그렛은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저를 보고 있는 선홍색 눈동자. 피곤에 절어있는 눈가 위로 걱정이 띄워져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그냥 감긴데 뭘. 컨디션 관리를 못 한 것 뿐이야."

  나 답지 않은 짓이지.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한 뒤에는 또 몇 번의 콜록거리는 소리. 체질부터 건강하기로 타고났고, 어릴 적부터 컨디션 관리는 습관처럼 몸에 배여 있었다. 가벼운 감기조차 걸리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만큼 무리해야할만한 일이 생겼다거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다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 이상은 말이다. 전자의 경우는 사실 그런 일 없을 거다, 라고 취급해도 될 정도이니 보통 라그렛이 아프다면 후자의 이유였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허나 이번에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계절이 넘어가는 무렵, 보통 사람들이 으레 한 번씩 다 앓고 지나가는 가벼운 감기에 저까지 걸려버린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저가 풀려있다는 뜻이 되겠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아픈 걸 핑계로 맘껏 어리광 부릴 수 있는 건 좋은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언제는 눈치 봐가면서 어리광을 부렸냐, 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할 말은 없었지만. 어차피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어리광을 부리는 상대는 눈 앞의 연인 뿐이었다.
  아무튼. 제법 진정성을 담은 눈으로 저를 보며 그리 말해오니 믿을 수밖에 없지 않나. 애초에 믿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품에 안긴 라그렛에게선 미열이 느껴졌다. 고열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심해야 할까. 열을 조금이라도 낮춰주어야겠다 싶어서 지크프리트는 슬쩍 라그렛을 밀어냈다. 그러자 힘이 하나도 들어가있지 않은 손에 갑작스레 힘이 들어가며 옷깃을 더 당기는 게 아닌가. 옷깃을 붙잡는 것에서 끝나지도 않고, 라그렛은 그대로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제 것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어린아이 마냥. 겨우 한 번 약하게 밀어낸 것 가지고 약이라도 올랐는지, 가늘게 뜨인 눈이 지크프리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읽어낼 수 있다. 가지 말라고, 그리 제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물수건이라도 놔줄까, 했어요."
  "그런 거 필요 없어."

  딱잘라 말하며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더 당겨 안았다. ……아픈 사람의 뜻이 그러하다니 어쩔 수 있나.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다가, 지크프리트도 그런 라그렛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제 걸 놓칠까봐 갑작스레 세워졌던 날은 어디갔는지, 금세 표정이 풀어져선 라그렛은 눈을 감았다. 앞머리칼에 입맞추던 입술이 내려져 그렇게 감긴 눈가에도 입맞추고, 콧잔등과 볼에까지. 조금 더 움직여 열기를 머금은 제 입술에 다다르자 라그렛은 슬쩍 고개를 돌려 지크프리트의 입술을 피해버렸다. 감기 옮아. 상관 없어요. 내가 상관 있어. 말다툼 아닌 짧은 말다툼 끝에 결국 져준 건 라그렛이었고, 막상 입술과 입술이 겹쳐지고 나니 좋다고 제 입 안과 혀를 내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네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봤자 짧은 키스로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또 저를 배려한답시고 이런 식인게 분명했다. 싫진 않았지만 글쎄, 가끔씩은 불만스러울 때가 있기 마련이다. 떨어져나가는 입술에 이번에는 저가 먼저 입술을 겹쳐버리며 깊게 입맞추었다. 숨이 찰 때까지. 그러고나서 입을 떼니, 감기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 숨을 쉬기가 힘들어서 라그렛은 자꾸만 숨을 몰아쉬었다. 입 안에 고인 타액을 삼키는 것마저도 제법 힘이 들어 보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걱정스럽다는 시선이 그에게 닿는다.

  "괜찮아요?"
  "……물 마시고 싶어."
  "갖다줄게요."
  "됐어, 괜찮아."

  어쩌라는건지. 여전히 저를 꾹 붙잡은 손을 보며 지크프리트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이대로 잘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저도 다시금 고쳐 안으며 라그렛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나른함 때문인지 금세 감기는 눈 위로 다시금 가볍게 입맞춰주고. 어쩐지 열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걸 본인도 느끼는 모양인지 라그렛은 자꾸만 더 지크프리트의 품에 파고들었다.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는 와중에도. 더위 많이 타는 사람인데, 덥지도 않은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해줘야할지도 모르겠고. 사실 저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사람을 억지로 떼내어서 뭔가를 해주기도 좀 그랬다.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라그렛의 머리칼과 얼굴 여기저기에 입맞춰주며 지크프리트는 그냥 그런 그를 더 소중히 껴안았다.

  "……나 잠들어도, 어디 가지 마."

  놓지도 말고….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숙여 그런 라그렛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어디 안 가요. 놓지도 않을 거구요. 그제야 라그렛은 작게나마 미소짓는다. 응, 하고 짧게 대꾸한 뒤의 라그렛은 묘하게 조금 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로 뭔가를 해줄 수는 없겠다 싶다. 당장은 그저 편하게 잠들 수 있도록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라그렛은 잠에 빠져들었고, 감기 때문인지 색색거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지크프리트의 귓가를 간질였다. 단지 그 뿐. 마주보고 누운 것도 아니고 제 품에 안겨있는 이상 베개를 베게 하기는 힘들어서. 베개 대신 팔 하나를 벨 수 있도록 내주고, 남은 팔로는 가만히 감싸안았다. 그러고 고개를 숙이니 미열 때문인지 약하게나마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또 가볍게 쪽, 하고. 잘자요. 하고 귓가에 속삭이니 으응, 하고 대답처럼 웅얼거리는 잠꼬대가 퍽 귀여웠더랬다. 그래서 지크프리트도 그냥 그대로 눈을 꼭 감아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