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Unlight

[군견조 합작] 페어

Hewa 2015. 4. 19. 02:32

어린 에바리스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분명히 손을 꽉 잡고 있었는데, 아이자크가 사라져 버렸다. 도망치다가 놓쳐버린걸까. 에바리스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폐허가 된 포레스트 힐. 가옥들은 무너져 있었고, 언젠가 함께 다니자고 이야기 했던 학교도 없어져 버렸다. 함께 지냈던 저택도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아직 어린 에바리스트에게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이어서, 그대로 소년은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의 비명소리라는 것이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에바리스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아이자크를 찾아야 했다. 눈을 뜬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도망쳐왔던 길을 따라 달렸다.
아이자크는 이제 단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 그를 두고, 홀로 도망갈 수는 없었다. 위험하다는 것은 에바리스트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그나마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가지고 있을 인간도 아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었다. 괴물의 손에 들린 손도끼에 사람이 찢겨져 나가는 것을 에바리스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절로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에바리스트는 그대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소리를 내면 위험했지만, 아이자크를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자크!"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가 폐허가 된 포레스트 힐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금세 주위의 모든 소리가 자신의 목소리뿐이라는 것을, 에바리스트는 금방 깨달았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언젠가 멎어 있었다. 어린 소년의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찰박, 하는 소리는 분명 핏물을 밟은 소리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발자국 소리가 아니었다. 에바리스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살아야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선대 대대로 다스린 소중한 포레스트 힐이었다. 에바리스트의 마을이었다. 자신마저 죽어버리면, 포레스트 힐은 영영 주인을 잃은 폐허가 되어버릴 것이다. 에바리스트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부터 몇 번이나, 에바리스트의 아버지는 소년에게 언젠가 네가 품고 지켜 나갈 마을이라고 포레스트 힐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해줬었다. 지금, 빛바랜 추억을 품에 안고 에바리스트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뛰기 시작했다. 반 쯤 무너진 건물에 몸을 숨겼다. 잔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숨은 에바리스트는 숨을 죽였다. 사방이 고요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그럴수록 에바리스트의 심장은 더 크게, 빠르게 뛰었다. 정말로 여기서 죽어버리는걸까. 아이자크는 살아있는걸까. 에바리스트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무엇을 잘못하였나,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에 에바리스트는 혀까지 깨물었다. 볼도 꼬집어보았다. 하지만 무너진 포레스트 힐은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에바리스트는 겨우겨우 몸을 웅크려,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절로 눈물이 나왔다.

이윽고 발소리는 에바리스트가 숨어있는 바로 앞에 멈추었다. 조금 더 몸을 틀면 에바리스트가 보이게 될 것이 뻔했다. 숨죽여 울던 에바리스트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자신이 죽은 모습이 상상 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에바리스트의 귓가에 들려왔고, 어린 소년은 눈을 꽉 감았다.

─키에엑!

하지만 그 뒤로 느껴지는 것은 절단 당한 감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후두둑, 하고 무언가가 몸 위로 떨어졌다. 공포심에 가득 찬 에바리스트는 바들바들 떨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을 감고 있어서 알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고요해진 주변. 소년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그곳에 존재한 것은, 알 수 없는 나라의 군복을 입은 채 괴물의 시체를 난도질 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눈부신 금발. 에바리스트는 눈을 크게 뜨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청년이 에바리스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쪽 눈은 안대를 하고 있었다. 청년은 들고 있던 검을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에바리스트에게 다가왔다. 공포심에 질린 에바리스트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년의 보폭이 조금 더 빨랐다. 에바리스트는 다시 한 번 눈을 꽉 감아버렸다. 죽임 당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몸을 지배했다.

하지만 청년은 뜻밖에도 에바리스트를 끌어안았다. 에바리스트는 그 따뜻한 감각에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다행이야, 에바……. 이번엔 구할 수 있었어."

청년은 알지 못할 이야기를 중얼거리면서, 어린 에바리스트를 품에 더 꽉 끌어안았다.

*

하늘은 마치 핏빛으로 물들어있는 듯 했다. 청년은 소용돌이의 영향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어린 에바리스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소용돌이가 무엇인지, 코어가 무엇인지 청년 또한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어렴풋 그런 이야기를 소년 시절 들은 적이 있었기에, 똑같이 에바리스트에게 전한 것뿐이었다.
청년은 검에 묻은 피를 탁탁 털어냈다. 어린 소년은 자신의 얼굴에까지 튄 피를 손으로 닦아내고, 물끄러미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소년은 마음이 진정된 듯 했다. 그리고 눈부신 금발의 청년에게, 찾아야 하는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청년은, 단숨에 그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청년은 기억하고 있었다. 무너지던 포레스트힐, 그러니까 현재. 눈앞의 어린 에바리스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어렸던 자신의 손을 잡고 도망쳤던 것을.

아이자크는 무릎을 굽혀 에바리스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형도 그러면 레지멘트에요?"

아이자크는 어깨만 으쓱 할 뿐이었다. 과거, 레지멘트 였던 시절이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자크에게는 빛바랜 추억이었다. 에바리스트는 아무래도 소년이 아는 아이자크가 있다는 레지멘트로 왜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는지, 그것이 의문인 듯 했다. 하지만 사실, 청년 아이자크도 소년 아이자크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지 못했다. 본래대로라면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의 손을 잡고 도망쳐야 했고, 난쟁이에게 발각 당했을 때에 베른하드와 미리안에게 발견돼 구해졌어야 했다. 아이자크는 뒤돌아 점점 멀어지고 있는 포레스트 힐을 바라보았다. 폐허가 된 마을에서 떠나고 있는 콜벳이 보였다.

미래를 바꾸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 아이자크는 알지 못했다. 당장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었다. 아이자크는 이미 한 번 에바리스트를 잃었다. 자신의 실수로 에바리스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계속 에바리스트의 곁에 머물렀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 아이자크는 생각했다. 에바리스트의 시신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아이자크, 청년이 정신 차리고 나니 기억 속의 그 곳. 포레스트 힐에 서 있었다. 익숙한 폐허와 끔찍한 비명소리.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선명하게 떠올랐고, 동시에 영주의 어린 아들 에바리스트 바르트가 생각났다. 그와 동시에 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괴물들을 베어 나가면서 소년을 찾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를 구해냈다. 만약 이것으로 인해서 미래가 바뀐다 하더라도 아이자크는 상관없었다. 에바리스트를 지키지 못하는 미래만 아니라면, 그 어떤 미래라도 아이자크에게는 행복한 미래일 테니까.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아이자크는 주변의 땔감을 모아 익숙하게 불을 지폈다. 그것을 보며 에바리스트는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영주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편이었다고 하지만, 이런 경험은 아무래도 처음이었다. 불 가까이 가 앉은 에바리스트는 물끄러미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을 쳐다보았다. 저택 안에서 부모님과, 아이자크와 도란도란 앉아 이야기 하곤 했던 벽난로 앞의 온기와 하나 다르지 않아서, 에바리스트는 울적해졌다. 무릎을 모아 끌어안고, 시선을 내리 깐 소년을 보며 아이자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찍 자. 안전한 곳으로 가려면 꽤 오랫동안 걸어야 할거야."
"안전한 곳이 존재 할까요?"
"글쎄……. 정녕 안전한 곳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소용돌이가 언제 습격할지 모르지."

소용돌이는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갑작스레 생성되곤 했다. 만약 소용돌이의 생성 원인과 생성 시기, 생성 위치를 미리 알았더라면 이 시대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도 수많은 비극을 겪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에바리스트가 억울한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이자크 또한 에바리스트의 시신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이자크 로스바르드는 눈을 감았다. 청년의 말을 들은 에바리스트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결국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하지만 소년은 울지 않았다. 정확히는, 울 수 없었다. 눈을 뜬 아이자크는 소년의 머리카락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너에게는 내 옆이 가장 안전한 장소니까. 내가 꼭 지켜줄게, 에바."

꼭 지켜줄게…… 청년의 말을 속으로 되새기며 소년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면 썩 이상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출신도,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이름만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에바리스트를 어깨에 기대게 한 아이자크 또한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이번에는 지키고 말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로 잃지 않을 것이다. 에바리스트는 금세 스르르 잠들었고, 아이자크에게는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아이자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반짝였다.




덜덜, 떨고 있는 소년을 아이자크는 꽉 끌어안았다. 에바리스트의 떨리는 시선은 아이자크의 팔에 닿아 있었다. 상처. 자신 때문에 생긴 상처였다. 자신을 지키려다가 입고 만 상처였다. 잘도 다친 팔을 이끌고 괴물들을 베어나간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를 꾸중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행이야,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오히려 에바리스트가 더 화를 내고 싶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상처는 꽤나 깊었고, 상처를 중심으로 옷의 천에 피가 점점 퍼져 나가고 있었다. 에바리스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상처를 움켜잡았다. 피를 멎게 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만해, 에바. 피 묻잖아."
"말하지 마요, 말하면 안돼요. 저기, 죄송해요. 죄송… 미안해요…"

그것은 본래의 그에게서 조차 듣지 못한 말이어서, 아이자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은 에바리스트에게서 사과를 듣고 싶어 했던가. 당연한 것이지만, 아이자크는 그것에 대해서만은 당연스럽게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에게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조금 욕심낸 것이 있다면 가끔씩 한번이나마 고개 돌려 바라봐주는 것 정도였다. 어느 순간부터 에바리스트는 그것조차도 해주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아이자크가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다. 비록 그것으로 인하여 서로가 반목하게 되었지만, 아이자크가 후회하는 것은 자신이 에바리스트의 곁을 떠났었다는 것뿐이었다.

"착하지, 에바."

머리칼을 쓰다듬는 그 손길이 슬플 정도로 상냥하고 다정해서, 에바리스트는 결국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이자크는 자책했다. 자신의 실수였다. 습격을 받았던 그 때에, 에바리스트를 차라리 옆에 꽉 붙혀두어야 했다. 어째서 자신은 에바리스트를 혼자 도망치게 하려 했던 것인지. 덕분에 에바리스트가 위험했지 않았나. 이미 자신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어서,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점점 의식이 가물가물해져 가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아직 당신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린 소년은 새액 새액 숨을 내쉬며, 청년의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만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지독한 무기력함이 소년을 집어삼켰다. 입버릇처럼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던 청년이었다. 정말로 자신 대신 상처 입을 줄이야. 에바리스트의 말에 아이자크는 작게 웃었다. 어린 소년의 뺨을 어루만지며 아이자크는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누구냐면…"

가물가물 해지는 시선을 바로잡으며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의 얼굴에 묻은 자신의 피를 닦아주었다. 에바리스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마 말문이 턱 막혀버려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조차 알지 못했다. 새삼 깨달은 것이지만, 이 시절의 우리가 겪은 일들은 아직 어렸던 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든 일들이었다.

"잊지 마 에바. 내 이름은 아이자크, 아이자크 로스바르드야."

그리고 이번에도 변하지 않은 사실은, 나는 또 한 번 주어진 기회에서 내가 죽어버린 탓에 너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

다시 한 번 눈을 뜬 후에는, 어두컴컴한 세계였다. 기본적으로 아이자크는 사후 세계를 안 믿는 축이었으나, 어딜 보아도 저승이 분명했기에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은 한순간의 판단 미스로 다시 한 번 주어진 기회를 그대로 발로 차 버렸다.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만약 에바리스트를 다시 만난다면, 그 얼굴을 볼 낯짝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것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하는 이야기지만……. 작은 한숨이 텅 빈 공간에 맴돌았다. 당연하지만, 에바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구나.

갑작스레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에 아이자크가 고개를 치들었다. 벽안이 경계의 빛을 띠며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주위가 온통 까만 공간에서, 아이자크는 일단 검을 빼들었다. 아이자크의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될 무렵에서야 목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만약 네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목소리는 늙은 여인 같기도 했고, 젊은 여성 같기도 했으며, 아직 어린 소녀 같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이자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묘한 목소리였다.

"무슨 헛소리를, 모습부터 드러내시지?"

─네게 기회를 줄 수 있다.

그 말에 검을 잡은 아이자크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에바리스트 바르트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네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기회를 잡는다면, 너는 그에 대한 전생의 기억을 모두 잃을 것이다.
─그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이지. 그 기억을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너에게 달려 있다.
─선택할 것인가?

"그 제안이 거짓말일 가능성은?"

한참이 지나도 아이자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자크는 혀를 찼다. 제 말만 하고 사라지는 전령이다, 이 말인가. 참으로 쓸모없는 존재 아닌가. 하지만 아이자크의 선택은 당연했다. 에바리스트를 만날 수 있는, 아마도 정말로 마지막일 기회. 이번은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직감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 제안을 붙잡지 않는다면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평생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을 에바리스트의 죽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에바를 잊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아이자크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검은색으로 텅 빈 공간에 무언가의 형상이 나타났다. 거대한 해골. 살 하나 붙어있지 않은 공포스러운 형상이었다. 하지만 아이자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생물도 봐오지 않았던가, 자신은. 그리고 이것보다 더한 참극도 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이 참혹했던, 맹우의 죽음 또한. 선택은 진작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기에 아이자크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해골의 형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에바를 만날 수 있도록 해줘."

눈부신 금발을 가진 청년은, 작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