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커플로그
[지크라그] 가장 특별한
Hewa
2017. 4. 24. 04:59
* 둘다 틀어주시면 감사합니다. 하나는 레이니 무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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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년 이맘 때 즈음이 되면 항상 받곤 하는 편지들이 있다. 눈에 익은 부엉이가 물어다 준 편지를 라그렛은 느릿한 손놀림으로 받았다. 제 할 일을 마친 부엉이가 몇 번 푸드덕거리며 날개짓을 하더니 먼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모습에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꽤 길었다. 이내 라그렛은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편지의 내용은 뻔했기에 구태여 그걸 확인하기 위해 편지를 펼치는 것조차 수고롭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매년 똑같은 내용으로 쓰이는 답장을 보내는 행동은 더더욱 수고로웠다. 올해의 답장에는 내년부터 이런 편지 보내지 말라는 문구를 덧붙여 놓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라그렛은 침구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런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들은 대개 매년 고집스레 똑같은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니, 그런 내용으로 답장을 보낸다고 해봤자 딱히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지만 말이다. 짧은 손짓으로 양피지와 깃펜을 가져왔다. 양피지 위에 글씨가 수놓아지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필요 없다, 와 이런 편지도 필요 없다. 짧은 두 문장이 연이여 쓰였다.
라그렛은 반듯하게 접어 봉투 안에 넣은 편지를 들고 창문 근처의 새장으로 다가갔다. 이른 시간인지라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까만 부엉이가 눈에 들어왔다. 새장 문을 열고 손등으로 날개를 간질이자 부엉이의 눈이 뜨였다. 라그렛은 밖으로 머리를 들이민 부엉이의 부리에 편지봉투를 물려주었다. 잠이 많고 게으른 부엉이지만 제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잘 아는 똑똑한 놈이다. 잽싸게 편지봉투를 입에 문 부엉이는 열어둔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부엉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시선을 돌려, 침대 위에 올려둔 편지를 눈에 담았다. 간단한 안부와 필요한 것을 묻는 형식적인 편지였다. 오늘 하루 종일, 그리고 내일까지 비슷한 내용의 것이 잔뜩 도착할 터다. 올해도 편지들과 답장에 시달릴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권태로움에 시달리고 만다. 라그렛은 바닥으로 편지를 대충 치워두고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제게로 또 하나의 편지가 오고 있다는 것도, 그 편지는 더더욱 귀찮은 내용인 것도 모르는 채로 라그렛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래서 셀레브리티는 피곤하다니까, 하며.
2.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나라에도 어쨌든 봄은 오기 마련이다. 봄이 깊어가고 여름을 준비하기 시작할 영국의 4월, 그 끝무렵. 다른 계절보다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빈도가 잦은 건 사실이었으나, 영국인 게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듯 런던에는 심심치않게 비가 내렸다. 3월의 바람과 4월의 비가 5월의 꽃을 피게 한다지. 그렇다면 4월에 피는 꽃은 비를 받아내며 피어나는 꽃일까.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라그렛은 유려한 손짓으로 지팡이를 품 속에 넣으며 마법부 중앙홀로 들어섰다. 많이들 퇴근한 후의 시간이라 이따금 오가는 사람을 빼면 넓은 홀의 구석 벽에 혼자 기대어 서 있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저를 흘끔거리는 시선이 완전히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고, 애초에 없으면 허전하다 느낄 정도로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그런 시선을 익숙하게 여겼다. 호와 불호에 대해 따지자면 전자에 가까웠지만.
어찌되었든 빨리 와준다면 좋을텐데. 오러 사무국은 야근을 너무 많이 시킨다며 라그렛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앙다문 입술 틈새로 새어나온 한숨 뒤로 어렴풋 빗소리가 들려왔다. 제 몸에도 비냄새가 스민 것 같았다. 지크프리트가 올 때 즈음에는 비가 그쳤으면 한다. 라그렛은 적당히 비가 오는 지금 같은 날을 좋아했으나, 적어도 그가 알기에 지크프리트 위버는 맑은 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랬다. 누군가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던가. 그 말대로 저가 태어난 4월을 잔인한 달이라 여겼던 때가 분명히 존재했다. 이제는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어디까지나 과거에 불과한 생각이었다. 지금의 감상으로 누군가가 4월에 대해 묻는다면, 두 사람을 위해 그려놓은 듯한 달이라 생각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하곤 했다. 달의 반절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반절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계절. 이제는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으리라.
"선배?"
그닥 길진 않았던 기다림의 끝. 뜻밖에도 목소리는 뚫어져라 보고있던 승강기가 아니라 옆쪽의, 저가 들어왔던 마법부 입구에서 들려왔다. 라그렛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돌렸다. 홀딱 젖은 채로 저를 보고있는 지크프리트가 눈에 들어왔다. 올 때 즈음에는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무색하게도, 아직까지 많이 오는 모양이었다.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라그렛은 픽 웃어버렸다. 오랫동안 벽에 붙어있던 등을 떼내고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조용한 홀 안에 구두굽 소리만 울려퍼지던 1초, 2초, 3초. 이윽고 발을 뗀 지크프리트는 곧장 달려가 라그렛을 와락 껴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 흠뻑 젖어있다는 걸 깨닫고 곧장 놓아버렸지만 말이다. 라그렛은 잠시 웃어버리고는 자신 쪽에서 지크프리트를 안아버렸다. 습한 비냄새 너머로 본래부터 존재감이 옅었던 체향을 잡아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에게 닿지 않도록 팔을 멀리 움직여 물기를 탈탈 털어낸 후에야 그를 마주 안았다.
"비 많이 맞았네. 외근 다녀오는 길?"
"응… 혼자 뒷정리를 맡았더니 생각보다 늦어졌어요."
지크프리트는 어색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라그렛은 작게 혀를 차고는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헤짚어놓다간 물기를 털어주었다. 말려줄 목적이라면 지팡이를 꺼내는 게 나았겠지만.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감겨오는 머리칼의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 좋았으면 좋았지. 어느새 꼬옥 감은 눈두덩 위를 엄지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다가 그대로 손을 올려 지크프리트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여전히 감고 있는 눈 위에 부드럽게 입술을 부비고, 드러난 이마에도 입을 맞추고. 애교스럽게 볼을 부비고 나서야 지크프리트는 반 정도 눈을 떠보였다.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거리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원래 그런 건 후배들한테 시키는거야. 몇년 차인데 아직도 요령이 없네." 작게 소근거리자 칭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지크프리트는 선배가 오늘 늦는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투덜거렸다. 여전히 웃는 표정을 하고 있는 라그렛은 삐죽 튀어나온 입술 위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떨어져나갔다. 그러자 결국 지크프리트의 표정은 다시금 풀어져버린다. 결국 이럴거면서. 키득거리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허리를 당겨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 늦을거라고 어제 저녁부터 잔뜩 칭얼거렸던 사람이 어쩐 일이에요?"
"도망쳤지. 술자리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선배가 빠지면 안 되는 자리였던거 아닌가."
라그렛은 흠, 소리를 내고는 괜시리 시선을 한 번 피해버렸다. 지크프리트는 그런 라그렛의 볼을 스치듯 매만졌다. 금세 라그렛은 그 손 위로 제 손을 올려 꽉 맞잡았다.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길 밑으로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지 지크프리트의 입술이 열렸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어 라그렛은 그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짧게 겹쳤다가 뗐다.
"퇴근은?"
"금방 정리하고 올게요."
잠시의 시간도 아쉬웠다. 맞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고는 라그렛은 미련이 잔뜩 남은 눈으로 가만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웃음 소리를 흘리며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어깨를 잡더니 볼 위에 쪽, 소리를 내며 입맞췄다. 잠깐만 더 기다려달라는 속삭임은 덤이었다. 그런 주제에 떨어져나가는 손길은 마찬가지로 미련을 뚝뚝 흘리고 있지 않나. 어린 연인이 어른스럽게 굴려는 것에 대해 무어라 할 이유는 없었고, 그건 그것대로 귀엽게 느껴지기만 해서. 지크프리트가 저를 스쳐지나갈 때까지도 딱히 지적은 않았다. 언제까지 귀여울 생각이냐는 둥의 실없는 생각만 흘릴 뿐이었다. 괜히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오는 건 참을 수가 없어서 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시야 안에서 지크프리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즈음에야 라그렛은 다시금 벽에 기댔다. 바로 지금처럼 기다림마저 즐거워질 때가 종종 있었다.
3.
"그런데 정말로 혼자 쏙 빠져나와도 괜찮았던 거예요? …아, 또 말 안 듣는다. 안으로 좀 들어와봐요."
나랑 붙어있기 싫어요? 시무룩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말에 라그렛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성인 남성 둘에 우산은 하나. 하나를 가져왔다는 건 속셈이 있다는 게 뻔히 보이는 일인데 저리 말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붙어있고 싶어서 딸랑 하나만 가져온 거잖아.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눌러 참고는 라그렛은 한참이나 키득거렸다.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붙어있고 싶다는 흑심과 별개로, 연인이 비에 젖는 걸 원하진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몇 번 더 웃음 소리를 흘리고는 부러 더 몸을 붙이더니 팔짱까지 꼈다. 이제 됐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까처럼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빠르게 누그러졌다. "이렇게 귀여워서 어쩐담." 여전히 웃음기 섞인 말에 지크프리트는 못 들은 채를 했다. 그마저도 귀엽게 보인다는 말을 라그렛은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대신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걱정이 많네. 다들 집에 일찍 갈 수 있어서 오히려 좋을걸. 아니면 자기들끼리 놀고 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선배 생일 파티인데."
"답장으로 필요 없다고까지 말해뒀다니까. 생일 파티 해줄거라고 전날에 통보하는 사람이 어딨어? 애인 있는 것도 알면서. 늦게까지 붙잡아두려는 못된 심보들이잖아, 아주."
결국 지크프리트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럼, 당연하지. 퉁명스럽게 이어지는 말에 지크프리트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제 팔짱을 낀 라그렛을 제 쪽으로 더 당겼다. 저항없이 자연스레 당겨져오는 게 퍽 사랑스럽다. 샛노란 눈동자가 지크프리트를 향했다.
"응, 그런 거면 안 되죠."
"왜?"
"선배는 저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요."
무심코 이유를 물었던 라그렛은 눈을 깜빡였다. 지크프리트는 자기가 뭐 잘못 말했냐는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교차하는 시간이 꽤 길게 늘어지고. 느리게 옮기던 발걸음도 우뚝 멈추어섰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손에 쥐어져있던 우산을 제 손으로 가져왔다. 다른 손으로는 그대로 그를 벽 쪽으로 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뒷걸음질하던 지크프리트의 등이 벽에 닿았다. 갸웃하며 저를 빤히 쳐다보는 행동에 라그렛은 그 어깨를 꾹 잡았다. 까만 우산 아래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친 건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라그렛의 손으로 옮겨졌던 우산이 천천히 기울어지다가, 이내 스르르 땅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비게 된 손으로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껴안았다. 입맞춤이 더 깊어졌다. 몸 위로 토도독 빗방울이 떨어지고, 체온이 식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술이 겹쳐지고 혀가 얽히며 두 사람의 온기로 자꾸만 달아올랐다. 갈 곳을 잃었던 손이, 팔이 제 허리에 감기자 라그렛은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고개를 틀어 몇 번이고 연인의 혀와 입 안을 탐했다. 숨이 부족해질 때까지 조금도 밀어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술이 떼어지고, 더운 숨이 오갔다.
"집 앞인데 그새를 못참았어요?"
"…네가 너무 사랑스러운 말을 하니까."
빗줄기 아래에서 톡 이마를 맞대며 라그렛은 작게 웅얼거렸다. 저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요, 라. 몇 번이나 속으로 곱씹었다. 그런 말을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욕심이 생기면 죽이려고만 하는 아이였다. 적어도, 제 기억 속에선. 그래서 그 말이 이렇게 기쁠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한 욕심이라도 부려줬으면 했다. 지크프리트는 머쓱한 듯 제 뒷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빗물에 젖어가는 라그렛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연인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데, 그렇게 묶였다는 이유로 이런 말을 하게 돼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그치만, 저는 선배가 조금이라도 더 즐겁고 행복해하는 쪽이 좋아요. 꼭 제 곁이 아니라도요."
라그렛은 한 번 크게 숨을 토해냈다. 연인이 되었으니 이제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라고. 말을 삼켰다. 대신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바보야."
아닌데요……. 가늘게 이어진 대꾸에 웃음을 참으며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더 세게 안았다. 안 놓아줄 듯이 안아버렸다. 도저히 저가 느끼는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겠어서. 한때 똑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그랬다. 그래서 다른 이유 때문도 있었지만 이 이유 때문으로도 지크프리트 위버와의 관계에 있어서 저가 잘 한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곤 했다. 이제는 더이상 하지 않는 고민이다. 설령 잘 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저가 꼭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다짐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네 곁이 아닌 곳에서 행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그러하니 너도 그럴 것이라 믿기로 했다. 제 행복 안에 지크프리트 위버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응."
그렇네요. 뒷말은 속으로만 하고 지크프리트 또한 제게 기대오는 라그렛을 꽉 껴안았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지금보다 더 사랑스러워지면 어쩌지. 그럼 나는 받아버려서 가지게 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감정이 두근거리는 묘한 감각 속에서 라그렛은 눈을 감았다. 뒷머리를 쓸어주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잠시 제 몸을 맡겼다. 이어진 정적.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진 않았으나 어쩐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느낌 후에야 지크프리트는 입을 열었다. 오래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선배. 응. 이제 들어가요. 응. 짤막한 대꾸만 입에 담으며 라그렛은 자꾸만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눈 앞의 어린 연인에게라도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4.
3월의 바람과 4월의 비가 5월의 꽃을 피게 한다. 그렇다면 4월에 피어나는 꽃은 제 몸으로 비를 받아내며 피어나는 꽃이 맞다. 꽃의 계절이라는 5월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을 뿐이었다. 5월의 꽃보다 강인하고, 그렇기에 이따금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게 4월의 꽃이었다. 제 생각으로 낸 결론이었다. 라그렛은 머리에 남아있는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잡생각을 이어나갔다. 지크프리트는 그런 라그렛을 물끄럼 바라보다가 침대 위에 놓여진 빈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라그렛은 그를 한 번 흘끔 보고는 손을 꼬옥 맞잡아주었다. 제 머리에 대충 올려두었던 수건도 치워버렸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탓인지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곧 12시, 날이 바뀔 때를 앞둔 시각. 길게 한숨을 내쉬곤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여전히 손은 맞잡은 채였다.
"곧 선배 생일인데 해줄 수 있는게 없네요."
"뭔가를 해줘야만 하는 것도 아닌걸."
"그치만 생일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난 날인걸. 그냥 지나가면 속상해요."
제 볼에 입술을 부벼오는 느낌에 라그렛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손을 들어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강아지 마냥 머리를 부벼오자 다시금 웃음이 새어나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를 좋아한다. 지크프리트 위버가 라그렛 블랙로즈를 좋아하게 된 것도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라그렛에게는 가장 특별했다. 그 또한 지크프리트를 아주 많이 좋아했기에. 지크가 라그를 좋아한다니, 라그에게 있어서는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다. 한때 좋아하고 싶지 않아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너무나도 좋아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할 정도로 좋아했고, 또 사랑했다. 그 사실이 지금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할 뿐이었다. 머릿속과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많은 말들을 생략하며 라그렛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해야 할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관계였다.
"애초에 해줄 수 있는 게 왜 없어. 막상 생일이 되면 많이 해줄거면서."
"으응… 아, 12시다."
지크프리트의 시선이 짧게 시계에 머물렀다가 다시 제 연인에게로 돌아왔다. 이어질 말을 벌써 몇 번이나 들어왔는지. 그닥 가깝지 않았던 시절에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은 이상하리만치 꼬박꼬박 챙겼던 소년이 있다. 그런 소년을 끝내 사랑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일 축하해요, 선배. 오늘은 더 사랑해요."
"그럼 나도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도록 할까."
그게 뭐냐며 웃는 입술에 가볍게 입맞춰주었다. 입술에 닿는 온기마저 사랑스러워서.
"네가 있어서 사랑이 있고, 또 네가 있어서 행복이 있는 거야. 그냥… 그거로 충분한 거니까."
"……좋은 말이에요. 어디서 알아온 말이에요?"
"내가 지은 말이면 어쩌려고. 알아보면 알 수 있을걸. 진짜 그런 걸 어쩐담."
4월에 피어나는 꽃은 비를 맞고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 강인하고 아름답다고. 그렇다면 4월의 제라늄은 그만큼 더 강인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는 의미가 아닐지. 라그렛은 어쩐지 오늘 하루만은 장미가 아니라 제라늄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렇지만 사실, 네가 나를 보며 떠올리는 꽃이 장미라면 그저 장미여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