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R5 이후 날조
* 아이자크 R5가 나오기 전 썼던 글입니다.
심장이 차갑게 식어만 가는 느낌이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데 어째서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것인지. 그의 죽음은 아이자크에게 있어서는 죽음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아이자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특히 에바리스트에 대한 직감은 더더욱. 이번에는 제발 틀리기를, 그 때의 감각과 다르지 않은 기분이 틀리기를.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달려나오던 손가락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초조함에 물어뜯은 상처에서 나온 피였다. 그리고, 겨우겨우 도착한 그의 곁… 그의 피. 세상이 무너진다. 모든 것이 차갑게 식어간다. 주변을 메우고 있던 공기도, 자신도, 에바리스트도.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한쪽 눈이 시리다.
*
웃음소리. 누구의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이미 부질없다. 이내 따라 웃는다. 그 모습을 보며 다른 이들은 공포에 떤다. 하지만 아이자크는 그것에 대해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이제 자신을 공포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가오는 사람은 모두 한 켠에 고이고이 쌓아놓은 벌건 물체에 겁부터 먹고 도망쳐버린다. 아마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사실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든 것을 찢어 죽여버렸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에바리스트 뿐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에 에바리스트가 사라진 이상, 아이자크는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했다.
웃음소리는 기억 속의 것이었다. 포레스트힐이 사라지던 그 날의 것이었다. 에바리스트가 소용돌이 속 생물에 의해 죽임당했다, 고. 몸에 닿아 느껴지는 뜨거운 액체는 그의 피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어렸을 적의 몇초동안에도 들었던 웃음소리였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에바리스트를 지키지 못한 것을 비웃는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25살의 자신이었다. 그리고 레지멘트에 입대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었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에바리스트를 지키려 했었으니까. 그리고 언제나 그를 지켰었다. 지금의 목소리는 그 때의 자신이었다. 어째서 지키지 못했어? 나는 눈 하나를 버리면서까지 그를 지켰는데. 목소리는 아이자크를 비웃고 책망했다.
아이자크는 만 하루만에 움직였다. 무릎에 가지런히 뉘인 에바리스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온기를 느꼈다. 그것은 필시 착각이겠지만 아이자크는 행복해했다. 조심스럽게 그를 안아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묵직하게 느껴져서 아이자크는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당연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식 웃은 아이자크는 마치 에바리스트는 잠시 잠들어 있는 것이라는 양, 조심스레 그 시신을 안은 채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제국 밖으로 나서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시체는 이상하리만치 깨끗했다. 찬 공기에 방치되어있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이자크의 지극정성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바리스트의 장례식에 별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조문객도, 허례허식 가득한 화환도 필요 없었다. 차갑게 식은 육신 하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친우, 그리고 둘만을 위한 공간이면 충분했다. 그곳은 옛날, 두사람이 태어나고 처음으로 만났던 포레스트힐이었다. 이곳을 집어삼킨 소용돌이는 레지멘트에 의해 소멸되었지만, 생존자로 단 둘만을 남긴 마을은 여전히 폐허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워지면 이곳으로 돌아오자고, 단 둘이서 고향을 재건하자고, 그런 흘러 지나가는 약속을 했었다. 이제와선 부질없는 날의 기억이었다.
포레스트 힐은 그 날, 부유정 안에서 바라보던 그 때와 하나 변하지 않은 채였다. 무너진 채 그대로인 건물들은 낡아있었다. 그것에 아이자크는 별다른 회의감을 가지진 않았다. 어차피 에바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느낄 향수도 그다지 없었다. 부모님이 그립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잠시나의 감정이었다. 이미 아이자크의 안에서는 에바리스트 바르트만이 존재했다. 그만이 유일한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아이자크는 도착하자마자 소중하게 껴안고있던 시신을 폐허가 된 저택 안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참 차가운 볼을 쓰다듬기만 했다.
"돌아왔어, 에바."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그 자신의 목소리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아이자크는 헛웃음쳤다. 그가 세상에 없는 이상 자신의 존재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왜 너는 그때 떠나자는 나의 말에 고개를 저었을까. 왜 우리는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을까.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의 옆에 꿇어 앉은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울고있었던가? 아니. 아이자크 로스바르드는 울지 않았다. 그를 지키지 못한 자신의 탓이다. 너무 늦어버린 자신의 탓이다. 그를 두고 홀로 있던 자신의 탓이다. 그렇기에 눈물을 흘릴 가치조차 없다고, 아이자크는 계속해서 자신을 깎아내렸다.
얼마 뒤에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그리고 고개를 든 곳에는 에바리스트의 시체는 온데간데 없었고, 익숙하고 그리운 아이가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꿇어 앉아있는 아이자크의 목을 꽉 끌어안는 소년. 소년은 미소짓고있었다. 「이제 괜찮아, 아이자크.」귓가에 들려오는 속삭임에 아이자크도 웃었다.
이윽고 아이자크 로스바르드는 에바리스트 바르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
어느 날, 포레스트힐 옛 영주의 저택 안으로 한 청년이 또래의 흑발 청년을 안은채 들어섰다. 안겨있는 청년은 차갑게 식은 시체였다. 살아있는 사람을 다루듯 눈부신 금발을 가진 그 청년은 시신을 내려놓고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몇시간이 지났는지, 하루가 지났는지, 일주일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시신과 청년은 자취를 감추었다. 여전히 흉흉한 분위기만이 감도는 포레스트힐. 청년이 다녀간 뒤에 달라진 것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생긴 자그마한 무덤이었다. 그 언덕은 옛날, 영주의 아들과 하인의 아들이 마지막으로 정말로 아무런 근심없이 뛰놀았던 장소였다. 그 둘은 포레스트힐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리고 눈부신 금발을 가진 청년이 포레스트힐에서 사라진 그 날, 아이자크 로스바르드가 그란데레니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