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

Poem 1

Hewa 2015. 4. 25. 00:11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中 <숲>, 김연수


눈동자 속에 숲으로 가는 길이 있다 너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는 새벽이 있다


서늘한 달이 자신을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서

모든 신비는 시작되고 그리고 다만 하나의 숲


숲 속으로 들어가 너는 나올 줄을 모른다 하늘은

푸르게 바뀌고 공기는 점점 더 투명해지는데 너는


너의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검은 머리칼처럼 나뭇잎, 숲 속을 가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 너의 비밀은

나를 바라보고 불빛처럼 반짝이는 너의 눈동자


눈동자 속에 숲으로 가는 길이 있다 너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는 새벽이 있다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 곳으로 모으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 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은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시, 이상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엘리베이터를 쏘아라, 함기석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멈추고 사내가 오른다

사내는 어느 살인사건에 관해 독백한다

엘리베이터가 5층을 통과한다

피살자는 화장실 좌변기에 앉은 채로 살해됐죠

엘리베이터가 4층을 통과한다

총알이 피살자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는데

엘리베이터가 3층을 통과한다

살인자는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느 샐러리맨였죠

엘리베이터가 2층을 통과한다

살인자는 도시생활의 억압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엘리베이터가 1층을 통과한다

사건 전날밤 살인자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어머니께 용서의 긴 편지를 썼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에서 멈추고 사내가 내린다

사내는 몹시 지쳐 있고 우울해보인다

당신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던 때가 없었나요?

사내는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본다

살인자는 자주 거울을 보며 살인을 결심했죠

사내는 좌변기에 앉아 쓸쓸히 독백한다

살인자가 피살자인 그 사건은 이제 시작됩니다

사내는 권총을 꺼내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댄다

가볍게 방아쇠를 당겨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