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Unlight

[아이에바] Winter meets...

Hewa 2015. 4. 19. 02:22
평소와 달랐던 그 눈동자를 기억한다. 불안하게 떨리며 나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를 기억한다. 어째서일까, 답지 않게 무리하면서까지 급하게 맞춰오던 너.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거, 네가 더 잘 알고있잖아. 속으로 몇번이고 너에게 묻는다.  이러는 네가 이질적이라던가, 낯설어서 싫다던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그런 너를 보고있자니 마음 한 켠이 너무 괴로웠다. 어째서 억지로 맞춰주면서까지 갈구하는걸까. 그만하자고 달래보아도 너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네가 물기 서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가끔 네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그럴리가 없다는걸 알고 있는데도……. ─너는 그 말을 한 뒤에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무엇이 너를 불안하게 만든걸까. 내가 느껴야 할 불안감을 왜 네가 느끼고있는걸까.

"에바."

부름에 응답하듯 아이자크의 품에 기대어있던 에바리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역시 자는게 아니었구나. 끝끝내 지쳐서 눈을 감아버리긴 했어도 에바리스트가 쉽게 잠들지는 못할거라고 아이자크는 생각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머리칼을 쓸어넘겨 정리해주며 아이자크가 문득 짖궂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던 에바리스트는 다시 그의 품에 고개를 묻어버렸다. 아이자크는 슬쩍 시선을 떨구고 있다가 드러난 뒷목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하지만 밀어내지도, 쳐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닿은 입술을 통해 느껴지는 온기를 즐기듯 에바리스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역시나, 이런 너는 꽤나 낯설다. 아이자크가 소름이 오소소 돋은 뒷목에서 제 입술을 떼어냈다.

"……그런게 아니야."

에바리스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앞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자크는 그 말을 들으려 굳이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사실 꼭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아도 에바리스트가 어떤 말을 꺼낼지 지금 상황에서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한참이나 열기가 묶여있던 실내는 조금씩 찬 공기에 잠식되어갔다. 사라져가는 열기가 어쩐지 조금 아쉬워져서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를 더 꼭 끌어안았다. 36.5℃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평범한 체온.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온기. 제 것과 다름이 없을 터인데, 별 다를 것이 없는 그 온도를 아이자크는 좋아했다. 네 것이니까. 점점 비인간적으로 물들어가는 너에게서 느낄 수 있는, 하나 달라지지 않은─

"두렵다던가, 무섭다던가. 그런게 아니야."

피곤에 푹 잠겨있는 금안을 아이자크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긋이 눈이 감겼다가 떠졌다. 그리고 작은 한숨이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머물었다. 누구에게서 그 한숨이 나온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짧게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 다시 에바리스트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정적만이 맴돌 뿐이었다. 에바리스트는 한참이나 뒷말 없이, 가끔 두어번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차라리 평소처럼 아이자크가 재촉이라도 해주었으면 나았을텐데.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를 마주 바라보며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종잡지 못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자크였다.

"내 시야 안에서 사라지지 마, 아이자크 로스바르드."

묘하게 그의 가슴을 쿡 찌르는 말이었다.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그렇게나 망설였던건지. 아이자크는 피식 웃었다. 가끔 이런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이, 꽤나 색다르다고 해야 할까.

"오늘 많이 이상하네, 너."
"…꿈자리가 사나웠던 것 뿐이야."

─그러니까, 오늘만. 작게 속삭이며 에바리스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자크는 고개를 숙여 까만 머리칼에 입맞추고, 이어서 이마에 입맞춘 뒤 천천히 내려가 그 감은 눈 위에까지 입맞추었다. 진작에 이렇게 기대어주었으면 맘 썩을 일도 없었을텐데. 아이자크는 속으로 에바리스트를 타박했다. 그리고 끝내 에바리스트 본인이 먼저 꺾지 않는 이상은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는 자기 자신도 타박했다. 아무래도 에바리스트 바르트의 약점이 아이자크 로스바르드인 것, 반대로 아이자크 로스바르드의 약점 또한 에바리스트 바르트인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으로 꼽아 세기조차 버거워질 정도로 오랜 세월을 맹우라는 이름 하에 그정도로 서로에게 귀속되어 시간은 흘러갔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게 서로에게 귀속되어 살아갈테지.

"목줄을 풀어주지 않는 이상 개는 도망가지 않아, 에바."
"풀어준다면 도망가겠다는 말인가?"
"너 있지, 눈에 띌 정도로 불안해하고있어. 조심하라구?"

동문서답이었다.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채 아이자크가 웃기만 했다. 그리고 이내 짧게 덧붙혔다. 물론 나에게만은 조심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말에 에바리스트는 헛웃음쳤다. 굳이 물었던 것을 되묻지는 않았다. 그저 잠시 손을 뻗어 아이자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에바리스트에게 다시 잠들 생각은 없어보였다. 하기사 잠들락하면 계속 아이자크가 말을 시켜댔으니, 잠을 청하는 것 자체를 포기할 만도 했다. 그래. 나쁜 꿈을 꿀 바에야 차라리 밤을 지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에바리스트를 제 품에 기대게 한 채 문득 아이자크가 입을 열었다.

"있지, 에바. 너 많이 변했어."
"알고있어."
"가끔씩은 그래서 네가 이질적이게 느껴지곤 해."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 금색 눈동자가 아이자크를 주시했다. 남아있던 열기때문에 채우지않고 풀러두었던 에바리스트의 셔츠 단추 두어개를 느릿하게 채워나가며 아이자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은 에바리스트 또한 충분히 느끼고있었다. 하지만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위로 치고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자신을 잃어야 할 필요성이 있으니까. 설사 그것이 인간성까지 잃게 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해온 것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고. 지금까지 아무런 말 없이 모든 것을 따라준 아이자크였기에 에바리스트는 맹우 또한 이해해 줄 것이라고 당연하게 판단해버렸다. 하지만 아이자크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맹우로서의 이해일 뿐, 그 이상의 감정을 가져버린 아이자크 로스바르드로서는─ 아아.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던걸까.

"네가 내가 아는 에바리스트가 아니게 되는거, 싫었어. 그리고 싫어."
"아이자크."
"나에게만은 변하지 말았어야지."

아이자크가 쓰게 웃었다. 그 웃음에서 알지 못한 감정을 에바리스트는 느끼고 말았다. 복잡하고 미묘해서 차마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그런 감정을. 그가 저렇게 말할 정도로 자신은 변해가고 있었던가. 자신이 차마 체감하지 못했던 것을 아이자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느껴버렸다 이건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전쟁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이 전장 위에서 두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서로 뿐이었다. 그걸 에바리스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외면할 정도로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뒤따라오는 아이자크를 생각하지도 못했다. 맹우. 함께 가자고 약속한 시절. 누구보다 가까웠던 서로의 관계. 함께 쌓아온 추억. 무엇 하나 빠짐없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 그런 것을 때문에 아이자크에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꼬여버린걸까. 차마 뒷말은 채 뱉어내지 못하고 에바리스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의 위치에서,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남에게 감정을 품는 것은 썩 좋지 못하다. 치명적인 약점으로 남에게 짚히기 쉬우니까. 하지만 아주 잠시동안 아이자크에게만은 마음을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작은 한숨이 앙다물린 입술 틈새에서 새어나왔다. 에바리스트는 쩍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대충 바닥에 던져두었던 안경을 썼다. 그것을 아이자크는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단 둘이 있을 때는 이렇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바리스트가 흘끔 아이자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갑작스레 귀에 닿아오는 입술의 감촉에 놀란듯 몸을 떨었다. 아이자크가 그 반응에 작게 키득거리며웃었다. 그는 무어라 하려는 에바리스트의 입술 위에 제 검지 손가락을 올려다 둔 두고는, 파르르 떨리는 볼을 쓰다듬었다. 안경 너머의 금안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어있었다. 장난을 더 쳐볼까, 했지만 그랬다간 정말 나중에 겉잡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아이자크는 꾹 참았다.

"아직은 내가 아는 에바니까. 단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이렇게 남아줘."
"아이자크, 너…"
"반쯤 장난이었는데 네가 진지하게 나오길래."

계속 키득거리는 아이자크를 밀어내며 에바리스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이런 식으로 완벽하게 아이자크의 페이스에 말려들 때가 있었다. 진지해져버렸던 자신에게 한심하다고 질책을 보내며 에바리스트는 다시 털썩, 하고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수면 위로 떠올라버린 아릿한 감정을 다시 깊숙히 밀어넣어버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평생 숨기고 있다가, 그가 먼저 세상을 뜬다면 옅어져가는 숨결 앞에서 토해내야 할 감정이었다. 자신이 먼저 생각을 뜬다면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감정이라는 것이 그 안에 있었다. 화났냐며 풀죽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이자크에게 에바리스트는 작게 고개를 저어주었다. 어쩌다가 이런 식의 감정으로 서로에 대한 감정이 발전해버린 것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두 손으로도 세지 못할 세월을 서로만을 믿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로 인해 피어났을 신뢰라는 감정과 이것은 다른 류였다.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먼 훗날, 되도록이면 그런 상황은 피해야 하겠지만─ 언젠가 아이자크를 버려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므로. 에바리스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이자크를 흘겨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변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겠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러했다. 질책하는듯한 에바리스트의 말에 아이자크가 머쓱한듯 웃었다. 처음부터 에바리스트를 놀릴 생각이었던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 변화에 하나하나 반응해주는게 어쩐지 미묘한 기분이 들어서 그랬던 것 뿐이었다. 그의 말대로 아이자크도 굉장히 많이 변했다. 어린 시절, 맑은 벽안으로 에바리스트를 바라보던 소년은 이제 없었다. 부쩍 커버린, 순수를 잃은 청년만이 에바리스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은 에바리스트 또한 그것을 안타까워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자크를 그렇게 만든건 간접적으로 에바리스트 본인이었으니까. 그 사실은 회피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나도 알고있어."

아이자크의 대꾸는 무미건조했다. 변화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에바리스트처럼, 아이자크도 자신의 변화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는 잔혹성을 보여야했다. 쉽사리 위협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망설임없이 베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잔인해져야한다. 그 과정에서 살육을 즐기게 된 점은 아이자크 본인도 굉장히 유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변해가는 자신을 보면서 에바리스트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혹여 자신과 같은, 그런 씁쓸한 기분을 느꼈을까. 그가 아닌 이상 그가 느꼈을 감정들을 아이자크가 알 방도는 없었다. 그저 그도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상대의 변화에 대해 일말의 아쉬움이라도 느껴주었으면─ 할 뿐이었다. 그저 그러한 작은 소망이었다.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에게 바라는 것이 그뿐이었다

"그래도 내가 네 곁에 있으리란건 영원히 변하지 않겠지."

그렇게 말하고 아이자크는 어깨를 으쓱, 했다. 너도 그래주기만 하면 돼. 굳이 목소리로 뱉어내지 않더라도 충분히 전해질 말이었다. 그래, 서로가 어떤 식으로 변하든 상관없었다. 곁을 지켜주기만 한다면, 한번 맞잡은 손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서로 낯선 모습으로 변해가더라도, 그것에 조바심내고 어색해할지도 모르지만. 네 눈동자가 나만을, 내 눈동자가 너만을 쫓는다면야. 그럼 우리는 영원히 함께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아이자크는 만족했다. 적어도 마음이 엇갈리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가끔은 나도 내가 이해되지 않아. 어쩌다 너에게 이렇게 매여버린건지."
"…나도 네가 이해 안돼."
"그러시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이해고 뭐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에바리스트는 꽉 닫혀있던 문을 열어젖히고 아이자크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빗줄기가 꽤나 약해져있었다. 아마 조금 더 있으면 완전히 그칠 것이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잔뜩 껴있는 먹구름도 모두 걷힐 것이다. 슬슬 다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더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같이 갈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한 것인지. 몸도 마음도 지치고 만신창이였지만 서로에게 기대고 위로받으며 연명했던 그 시절이 있었다. 그 때 제국을 앞에 두고 말했었던, 지금보다 앳되었던 에바리스트가 겹쳐보인 것은 아이자크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달라지긴 했지만 또 마냥 달라졌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 눈동자에 눈을 맞춰주며 아이자크가 살짝 미소지었다.

"물론. 같이 가드릴게요,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