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6th 배포본] 계획도시
0.
"꽤 재밌는 세상이 되어 버렸지, 클라우드."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클라우드는 눈을 떴다.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아파왔다. 결국 인상까지 쓰며 그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 쪽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크리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는 존재하지 않는 데도, 마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는 마법유저였기에 클라우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눈이 마주치자 크리스는 옅게 미소 짓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클라우드는 결국 포기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깨질 듯이 아파 오던 머리도 서서히 괜찮아지고 있었다. 살짝 비틀거리며 섰다. 벽을 짚으려고 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도저히 지면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허공에 떠 있는 듯 했는데, 조심스럽게 발을 들어 땅을 디디자 바닥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들었다.
시야는 끝도 보이지 않는 흰색으로 메워져 있었다. 클라우드는 화이트 아웃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연상해냈다.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조금 오래 걸어 크리스와 멀리 떨어졌음에도 그의 형상은 똑똑하게 보였으니까. 결국 클라우드는 다시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는 마치 그림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재미있는 세상이라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눈이 부시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하얗기만 한 공간은 어쩐지 불쾌감만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다시 한 번 클라우드와 크리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크리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깍지를 껴 그 위에 제 턱을 올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해 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리는 더 깨질 듯이 아파왔다. 결국 클라우드는 다시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여전히 크리스는 말없이, 마치 그를 관찰하는 것처럼 쳐다 볼 뿐이었다.
"뭔가 말 좀 해보시죠, 크리스. 대체 여긴 뭡니까?"
"그러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반응이었다. 여유롭게 대충 대꾸하는 크리스에 클라우드는 괜히 더 조급해져 버렸다. 기억은 없었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공간에는 자신과 크리스 뿐이다. 의미심장하게 웃고만 있는 그를 보며 클라우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무언가 말 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클라우드는 일어서서 뒤돌았다. 조금 더 걸어 볼 생각이었다.
"일어나는 게 늦었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하지만 그 말에 클라우드는 우뚝 멈춰 섰다. 돌아보자 투명한 무언가에 앉아 있던 것 같았던 그가 일어섰다. 그리고 세 걸음 정도 걷다가 멈추더니, 손을 뻗었다. 핀 손바닥은 애매한 위치에 멈춰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닿아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놀라서, 클라우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손바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내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던 거리를 좁혀 클라우드 또한 손바닥을 펴고 손을 뻗었다. 머지않아 툭 막혀버렸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손을 펴 거울에 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크리스와 같은 위치에서 막힌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사이에 두꺼운 유리라도 있는 마냥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의 거리가 꽤 멀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크리스가 마법을 썼다고 하더라도, 무엇 때문에 이런 것을 했겠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클라우드는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나는 갇혀 있는 거야. 그렇게 좁진 않은데, 뒤도 이렇게 막혀 있더라고."
"어째서……?"
"물어 봤자야.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으니까. 마법도 사용 되지 않아."
금세 손을 거둔 크리스에 클라우드 또한 손을 거두었다. 어째서 그는 갇혀 있고 자신은 자유로운가. 아니, 사실은 자신 또한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고개만 돌려 뒤쪽에 하염없이 펼쳐져 있는 하얀 공간을 클라우드는 주시했다. 앞이 이런 식으로 막혀 있다면 뒤 또한 끝이 있지 않겠는가. 나가는 통로이든, 무엇이든. 클라우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 크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자유로운 게 맞아. 그리고 네가 있는 그 뒤, 아마 끝도 없을 걸."
가봤자야, 하고 짧게 덧붙이고 크리스는 다시 아까 앉아 있었던 위치에 똑같이 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익숙해 보였다. 클라우드는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라고 했던 크리스의 말을 떠올려냈다. 그는 얼마동안이나 여기서 있었던 걸까. 정신을 잃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자신이 정신을 차리기 전의 상황을 상상해보다가 섬뜩해져서 클라우드는 자신의 한 쪽 팔을 잡았다. 그는 홀로 무엇을 했을지.
"타임 쉬프트 디스펜서가 작동을 했지."
그 말에 마치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듯 클라우드의 눈앞에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기억을 못하는 것이야 당연했다. 프로그래밍 되어 있던 대로 소멸당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깨닫자 지끈거려 오던 머리도 완전히 괜찮아졌다. 클라우드는 작게 헛웃음을 뱉어냈다.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하였고, 자신마저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긴 세월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클라우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크리스와 자신이 함께 존재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크리스는 아까부터 자신이 하는 생각을 읽고 있는 듯한 말만을 하고 있었다.
"실패 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뭣하군. 오작동이라고 해 둘까? 아무튼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나는 여기에 이렇게 갇혔고, 너는 거기에 그렇게."
그렇다면 여기는 아무 것도 아닌 세계라는 말이다.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자신은 실패했고, 패배자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클라우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자신에게 참 잔인한 세상이다. 차라리 그냥 죽여 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서 무엇을 하라는 말인지.
"그래. 넌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 했어."
꼭 그렇게 촌철살인 안 해주셔도 되는데요, 하고 말 하려 한 클라우드는 그냥 아랫입술을 꾹 깨물기만 했다. 자신의 생각이 그에게 들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굳이 말로 전할 필요는 없었다. 그대로 클라우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화풀이를 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스의 말대로 마법조차 사용 되지 않는 세계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다를 지도 모르지."
클라우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웃는 낯짝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말만을 하고 있다. "조금 제대로 말 해주면 안 됩니까?" 미간을 찌푸리며 클라우드가 되묻자 크리스는 잠시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조금 후에 입을 열었다.
"실험이라고 할까, 연구라고 할까. 이런 쪽에는 네가 더 빠삭할테니 마음대로 생각 하고, 아무튼 그런 걸 해 볼까 해."
깍지를 껴 맞잡은 두 손을 꼬고 있는 다리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로 크리스가 작게 웃었다. 이런 세계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실험 도구도 없었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종이나 필기구도 없었다. 그런 비슷한 행위조차 할 수 있을 리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클라우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그의 장난을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너야, 클라우드. 조금 배가 아프긴 하지만."
"……예?"
"타임 쉬프트 디스펜서에는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담겨 있지. 그리고 그것의 토대는 400년 전에 빼앗기긴 했지만, 내 마법이고."
다 알고 있는 것을 굳이 설명해주며 크리스는 몸을 기대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것만 같았지만 아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그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생각 또한 읽혔는지 크리스가 한 손으로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꼬여버린 모양이야." 장난도, 거짓말도 아닌 듯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별 미련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연구를 진행할 사람은 너, 동시에 피실험자도 너야. 나는 실험자도 아니고 관찰자겠지. 이 자리에 앉아서 너를 관찰하는 일밖에 할 수 없으니까."
크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모든 게 결핍되어 있다니까요. 입술만 달싹이는 클라우드를 보며 크리스는 어느 정도의 텀을 두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거절해도 괜찮아. 권리는 너한테 있고, 나는 강요하고 싶더라도 그러지 못하거든."
"이번엔 말로 하도록 하죠. 제대로 좀 말해주세요."
그러자 크리스가 유쾌하게 웃었다. 클라우드에게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인데 그는 꽤나 즐거워보였다. 무엇이? 자신이 곤혹스러워 하는 것이? 그 정도로 악취미였던가, 이 사람은. 이내 클라우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더라도 이런 공간에 오랫동안 있게 된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백의 공간. 자신 또한 미쳐버리게 될까.
"나는 미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크리스는 일어나 고개를 위로 올렸다. 위로도, 밑으로도,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은 공백만이 가득했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대로 크리스는 눈을 감았다.
"400년을 살고 보면 무슨 상황이 되던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걸지도. 애초에 나는 그렇게 살아야 했지만, 아마 그 정도 살게 된다면 누구든 그럴 거야. 조금 말을 빨리 할 테니 집중해서 들어."
클라우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쪽 눈만을 뜨고 클라우드를 바라보던 크리스는 그 반응을 보고 나서야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내 마법을 바탕으로 한 디스펜서야. 오작동을 했더라도 이거로 끝이 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렇게 갇혀 있는데도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했지. 한계는 있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하나를 알아냈어. 시간을 돌리는 능력은 남아 있다는 것. 바로 디스펜서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했던 원동력인 너에게 말이야."
어느새 고개를 똑바로 하고 한 손의 검지 손가락을 펴 자신을 가리키는 크리스에 클라우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클라우드는 천천히 그 말을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실험인지, 연구인지 아무튼 간단해. 너는 네가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네가 지키고자 했던 동료들의 죽음을 막는다. 디스펜서가 작동하지 않게 한다. 네가 원하는 세계를 찾을 때까지 무한하게 반복할 수 있어. 중도에 포기하더라도, 뭐. 결국 네 마음대로고."
그가 어떻게 알아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의 마법이니 어렴풋이 깨달았을 수도 있겠다. 어때? 하며 물어오는 크리스. 클라우드는 잠시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가,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무한하게 존재하는 기회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 말이다. 크리스는 더 이상의 말도, 재촉도 없이 클라우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목소리가 떨렸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생각 해. 네가 돌아가고 싶은 때를 기억해 내."
햇수를 세는 것을 언젠가부터 포기했던 인생을 클라우드는 떠올려냈다. 호문클루스였기에 가질 수 있었던 기억력을 총 동원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기억을 훑어냈다. 그렇다면, 맨 처음 돌아갈 것은 똑같이 맨 처음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크리스가 빙긋 웃었다. "승낙할 줄 알았어." 작게 입모양으로만 그가 중얼거렸다.
"제목은 뭐로 할래? 네가 실험자고, 동시에 피실험자야. 네가 지어."
굳이 그런 것을 지어야 할까. 별로 상관은 없다고 판단했지만, 클라우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많이 지나지 않아 대답했다.
"계획도시, 로 하죠."
―네 마음대로 하도록 해. 옅은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두 번째 세계가 시작됐다.
Ing.
첫 번째 루프 지점은 가장 처음이었다.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클라우드는 아직 조그마했던 시절로 돌아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얀 공간이 아닌 밀실에 앉아 있었다. 레이븐도, 루나도 만나기 전, 홀로 앉아서 알지 못할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며, 이상한 훈련들을 받았을 때다. 그는 단박에 기억 해 낼 수 있었다. 정말로 악몽 같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클라우드는 판단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그 시절을 버텼다.
레이븐이 인간성을 잃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잃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똑같은 삶은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릿하게 지나갔고, '그날'이 지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정보를 모을 필요는 없었다. 애초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 심증뿐이었던 것은 확증으로 만들었고, 이전 루나에게 들켰던 때를 기억해 내 매사에 행동을 더더욱 조심히 했다.
일단 레이븐의 자살을 막기로 했다. 그가 진실을 알게 되는 루트를 모두 차단했다. 정해진 운명에 대한 절망으로 그가 자살을 택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2030년의 겨울이 되었다. 이것으로 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부터 잘못 된 것일까. 클라우드는 레이븐의 죽음을 통보 받았다. 어째서? 이번에도 자살이었다. 모든 것을 차단했을 텐데. 그제야 클라우드는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실을 알았던 것도 한 몫 했겠지만, 그의 자살에는 또 다른 큰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가 인간성을 되찾았다는 것. 클라우드는 작게 헛웃음을 쳤다. 애초부터 그는 함지존을 통한 마지막 살인을 완수하고, 자신 또한 사라져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티팩트, 다시 시작하는 시계는 또 한 번 완성되었다. 레이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클라우드에게 완전한 세계가 되지 못한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찾아서. 클라우드는 다시 한 번 세계를 뛰어 넘었다.
두 번째 루프 지점은 '그날'의 이전이었다. 그렇다면 레이븐이 맨 처음 인간성을 잃게 되는 것 자체를 막으면 된다. 클라우드는 자신이 그를 어떻게 해 보겠다며 이카루스와 연금술사 노인을 설득했다.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요청은 겨우겨우 승낙되었고, 그가 레이븐을 맡았다. 그에게 레이븐은 무슨 꿍꿍이냐고 물었지만 클라우드는 아무런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이미 두 번을 잃었다. 더 이상은 잃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살인에도 검은 마나가 찬다는 사실쯤이야 첫 번째 삶에서 검증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살인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레이븐에게 넘어가는 의뢰들의 일부분을 일단 14번이 아티팩트를 훔쳐 달아나 안전하게 된 루나에게 넘겼다. 아무도 모르게. 이번에는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또다시 변수가 생겨버렸다. 레이븐이 다시 시작하는 검을 되찾아왔다. 당연했다. 레이븐이 그 날, 크림슨 로브를 죽이지 못한 이유는 서로의 검은 마나로는 서로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크림슨 로브의 검은 마나를 레이븐에게 이식하는 것을 막은 게 바로 자신이다. 처음부터의 오류였다. 결국 다시 한 번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 세계를 뛰어 넘었다.
세 번째 루프 지점은 레이븐이 윤필규를 조달자로 쓰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그가 검은 마나를 이식 받지 못하게 한 것은 그대로 하고, 맨 처음 함지존을 발견해 그를 처리하러 갈 때에 레이븐과 동행했다. 이카루스를 대적할 함지율을 이 때 만나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틈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크림슨 로브의 처리는 자신이 맡고, 레이븐에게 함지존을 맡겼다. 당연하지만 크림슨 로브를 죽이지는 않았다. 죽인 것으로 위장하고, 그를 도망 보냈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고, 네가 우리와 대적할 힘을 갖게 되기 전까지는 들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클라우드는 레이븐에게 연락을 넣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닿지가 않았다. 무슨 일일까. 결국 그는 직접 레이븐을 찾으러 나설 수밖에 없었다. 레이븐은, 함지율을 만났다. 함지존은 그의 손으로 직접 처리한 이후였다. 그 장면을 목격한 함지율은 당연하지만 그 때처럼 폭주했다. 클라우드는 레이븐을 데리고 도망쳤다. 그 꼬마는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분명히 크림슨 로브가 돌아와서 그를 챙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은 맞아 떨어졌고, 한동안은 잠잠했다. 그런 줄 알았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클라우드가 최대한 줄였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살인을 감행한 레이븐의 정신 상태는 굉장히 불안정했다. 보이지 않는 결함이 생긴 것이다. 애초부터 그는 자살 시도를 몇 번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호문클루스였기에 실패만 해왔다. 그리고 또 하나, 레이븐은 유독이나 어린 아이에게 약했다. 함지율과의 만남은 가뜩이나 불안한 레이븐의 정신 상태를 건드렸다. 레이븐은, 루나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루나는 몇 번이나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레이븐은 차라리 그게 나를 돕는 일이라며 그녀를 설득했다. 루나는 누구보다도 레이븐을 아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자신을 돕는 일이라는 말에 그의 부탁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레이븐은 또다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클라우드는 이번에도 실패했다.
―그럼 그렇게 간단할 줄 알았어?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는 클라우드에게, 백색의 공간에서 크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클라우드는 픽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고작 세 번이다. 포기 할 수는 없다. 이미 시작한 이상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실패했다. 하지만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클라우드. 너에게는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 더 있어. 나는 어디까지나 관찰자니까 개입할 수는 없겠지. 염두 해두고, 네가 찾도록 해. 분명히 도움이 될테니까.
그의 조언을 새겨들으며 클라우드는 또 한 번 세계를 뛰어넘는다.
Last?
크리스가 말한, 자신의 또 다른 능력이란 도시를 뜻하는 것이었다. 모든 일이 벌어진 이 도시 말이다. 자신 자체가 도시였다. 근본적 시스템부터 시작해서, 도시를 구성하는 특정한 요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가령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법조차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정전시킨다던지, 건축을 막는다던지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쓸모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나쁘진 않았다. 처음 자신이 실험에 붙였던 계획도시라는 이름이 더더욱 어울리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클라우드는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와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레이븐은 높은 곳을 좋아했기에, 일부러 만든 고층 빌딩이었다. 도시에는 썩 어울리지 않았고 민원도 많았지만, 어차피 만든 이후에는 클라우드의 손을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클라우드도 제법 자주 찾곤 했다.
벌써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세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레이븐을 구하려는 시도들은 모두 레이븐 때문에 무산되었다. 언제나 이번에는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레이븐이 변수를 만들어냈다. 클라우드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참으로 잔인하지 않은가. 그를 구하려고 하는데, 그가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진실을 일찍 알려버리면 그것에 삶의 끈을 놓아버렸고, 희망을 심어주더라도 더 썬의 손으로나, 아니면 다른 이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마치 그를 구할 수 없다고 세계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클라우드는 고개를 저었다. 서서히 지쳐가고 있음을 느꼈다.
"클라우드."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클라우드는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의 루프를 반복하며 지겹게 들은 목소리다. 크리스는 400년을 살았는데, 자신은 과연 얼마나 살았을까. 이미 루프 횟수를 세는 걸 포기한 이상 제대로 알 길은 없었다. 비슷할 거라고 추측 할 뿐이었다. 400년 정도 살게 된다면 누구든 좋던 싫던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가게 된다고, 크리스가 처음 말 했었다. 클라우드는 그의 기분을 제법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죽지 못하는 삶이다. 그 또한 그랬을 것이다. 또한, 그러고 있을 것이고.
"미안. 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네. 가볼게."
그는 혼자 있는 것을 선호했기에 클라우드는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었다. 옥상의 문을 닫고 들어 온 레이븐의 시선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클라우드를 좇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반경에서 멀어져갈 때 쯤, 그의 팔을 잡았다. 클라우드는 살짝 놀란 표정을 하고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널 만나러 온 거야."
"여기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고?"
레이븐은 어깨를 으쓱 했다. 그렇게 오래 봐 왔는데 도무지 예상이 되지 않는 녀석이다. 하기사, 예상이 되었더라면 애초에 그의 모든 돌발 행동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클라우드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아쉬울 노릇이다. 백색 공간의 크리스 처럼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조금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난간에 기대는 레이븐에 클라우드 또한 그의 옆으로 가 그처럼 난간에 기대었다.
"기분이 어때."
의미심장한 물음에 클라우드는 "무슨 뜻이야?" 하고 되물었다. 백색 공간의 크리스 또한 이런 화법이 특기였는데. 새삼스럽게 그를 떠올리며 클라우드는 고개를 돌려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잠시 레이븐은 대꾸 없이 아래만을 내려다보았다. 그 자체로도 꽤나 아찔한 광경이다.
"부탁이 있어."
레이븐이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레이븐은 인간성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처음 생처럼 클라우드가 찾아주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레이븐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죽여줘."
순간 클라우드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을 눈치 챈 레이븐은 또다시 말이 없다. 적어도 레이븐이 자신에게 자신의 죽음을 부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억 상에는 그랬다. 이내 클라우드는 픽 웃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모양인지 레이븐은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몇 번이나 반복한 건 너였지."
그만 둘 생각은 없는 거야? 하는 물음에 클라우드는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루프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몇 번이나, 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적어도 이번에 처음 안 것은 아닐 테다. 알고 있었다면 자신의 죽음을 피하려고 해주는 건 안 됐던 걸까. 어쩐지 레이븐이 야속해졌다.
"그만 두기를 원해?"
"의무감에 하는 거라면 그만 둬."
클라우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넘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눈을 뜬 레이븐은 여전히 무덤덤한 채로 클라우드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하필이면 의지가 약해졌을 지금, 레이븐이 안 좋은 곳을 건드리고 말았다. 이대로 포기해버릴까. 그가 구하고자 하는 인물이 그만 두라는 말을 입에 담자 클라우드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많이 약해졌구나. 속으로 자조했다.
"클라우드."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이 들려온다. 클라우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나를 정말로 구하고 싶다면 포기하지 마."
그만 두라더니, 이번에는 포기 하지 말라고 말한다. 잔인한 처사다. 슬슬 세상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모든 것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클라우드는 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너를 돕지 않을 거야. 죽고 싶으면 죽을 거고, 죽이고 싶으면 죽일 거야. 모든 조건은 똑같아."
이내 클라우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하지 않나. 클라우드는 저도 모르게 레이븐의 목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가했다. 하지만 레이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레이븐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클라우드는 손에 힘을 뺐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자책했다.
"설사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나를 구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 할 가능성이 몇 백만, 몇 천만, 몇 억중에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포기하지 마."
옅은 숨소리가 섞인 채로 레이븐이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대꾸 않는 클라우드를 향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나도 네가 나를 구해주는 세계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까."
억지로 피하고 있던 푸른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클라우드는 작게 웃었다. 아까 헛웃음을 뱉어냈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예의 언제나 짓곤 하던 그 미소였다.
"분부대로."
클라우드는 다시 한 번, 몇 번째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횟수에 하나를 더하여 세계를 뛰어넘는다.
―Rest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