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진우]
썩 유쾌한 발걸음은 아니었다. 한진우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에는 그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른 방법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오지 않았을 장소다. 그의 주치의가 자신이기는 했지만, 한진우는 이 곳에 사적으로는 단 한번도 온 적이 없었다. 그저 공적으로, 주치의라는 이름으로만 드나들었을 뿐이었다.
그가 깨어있는 모습을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언제나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그를 마취시켜달라고 부탁했고, 매번 그 상태로 진료를 진행했다. 그와 한진우 사이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그를 충분히 이해해주었다. 주치의 된 사람으로서 절대로 이러면 안 되는 것이 맞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 준 주변 사람들에게 한진우는 굉장히 많이 고마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진우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자고 있는 그가 아닌, 깨어 있는 그가 말이다. 정확히는 그의 자문이. 살인사건을 해결 하는데 자존심이 어디 있겠는가. 자존심을 떠난 복잡한 관계이긴 했지만, 한진우는 자신이 그에게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후에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지 모르는 일이니, 미리미리 적응 해 두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평생 적응 할 리는 없겠지만.
익숙하지만 낯선 병실의 문 앞에 서서 한진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둘이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했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새삼스럽게 그의 생존이 현실로 와닿았다. 그가 죽기를 원했는가. 솔직히 말하면 그랬다. 그에 대한 문제와 만나게 될 때면 한진우는 의사의 본분을 잊곤 했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사가 사람이 죽기를 바라다니, 안 될 생각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한진우는 병실의 문을 열어 젖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은 착각일까. 일부러 눈을 질끈 감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정말로,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어라."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다.
"주치의 선생님이잖아. 어째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네?"
놀리는 듯한 어조에 한진우는 눈을 떴다. 그 날과 하나 달라지지 않은 얼굴이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상처가 없다는 점이 그나마 달라진 것일까.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한진우는 그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이미 여기에 오기로 마음 먹었던 순간부터 자존심은 접어 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매번 올 때마다 재워 놓기만 했으면서 오늘은 어쩐 일이야."
"이러고 싶지 않았던 건 나니까 그딴 말투 집어 치워."
다시 한 번 살풋, 아직도 섬뜩하게 빛나고 있던 눈이 웃는다.
"내 말투는 원래 이래, 진우야."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기억이 안 나나 보구나? 길게 말을 덧붙이는 정하윤에 한진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