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Unlight

[아이에바]

Hewa 2015. 4. 19. 02:24

지나치게 고요한 일상이 반복됐다. 언제 어디서든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야 할 전시인데도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이따금 반사이드 군과 국경지대에서 마찰하는 일은 있었지만, 피비린내 나는 상황으로 까지는 번지지 않았다. 어찌 생각해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지속되는 전쟁에 군사들은 차츰 지쳐가고 있었으므로. 하나같이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아픔을 호소했다. 그란데레니아의 군 수뇌부는 오랜 고민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적군도 이쪽과 별반 다른 상황이 되지 못한다고. 그렇지 않은 이상 이렇게 오랫동안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협약 없는 무기한의 휴전이 시작되었다. 비록 언제 깨어질지 알 수 없고,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평화였지만…….

대부분의 군인들은 이 상황에 기뻐하고있었다. 확대파의 사람들도 장기전에 잠시의 휴식은 필요한 법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긴해도 자그마한 불만을 품고 있는 자 쯤이야 물론 있었다. 그 중에는 군견이라 불리우는 청년─ 실상 전장 위에서의 그 모습은 늑대에 더 가까웠지만, 도 있었다.
아이자크 로스바르드는 굉장히 따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질 않아 전장에서 날뛸 수가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이미 이런 평화보다는 피가 흩뿌려지는 전장에 더 익숙해져있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딱히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는게 문제였다. 이따금 그에게로 위에서 내려오거나 아래에서 올라오는 서류들이 있었는데, 그것이라도 결제하려 마음을 먹으면 금새 맹우라는 작자가 빼앗아가 에바리스트 바르트, 대결. 이라 서명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에바리스트는 불만을 표출해내는 아이자크를 보며 픽 웃어버리기만 했다. 아이자크는 그런 그에게 입을 삐쭉 내밀어보이며 투덜거렸지만, 그러다가도 문득 드는 생각에 금방 얼굴이 풀리곤 했다. 할 일이 없으면 어떠하랴. 이렇게 아무런 걱정 없이 함께 있을 수 있는데. 그래, 그것 하나는 정말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아이자크는 이 평화를 통해 본인의 진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했다. 에바리스트를 지키고, 보좌하고, 지켜보는 일. 그것에만 신경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피어오르는 불만을 재깍재깍 지워주곤 했다.

적과는 잠정적으로 휴전 상태였지만 그란데레니아 내부에서의 전쟁은 그렇지 못했다. 확대파와 통제파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물론 통제파는 점점 무너져가고 있는 상황. 통제파는 최후의 발악이라는 듯 확대파의 떠오르는 샛별인 에바리스트에게 불청객을 보내곤 했다. 지금으로썬 그런 때가 아이자크가 검을 제대로 뽑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었다. 물론 상황은 적의 수에 따라 짧으면 눈치 채지도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길어봤자 5분 이내로 정리되었다. 굳이 에바리스트가 나서지 않아도 그러했다. 암살자들을 베어나가는 아이자크의 모습은 전장 위에서의 그보다 더 잔혹했고, 동시에 더 즐거워보였다.

"시시하네."

검을 떨구며 아이자크가 빙긋 웃었다. 에바리스트는 그런 아이자크를 힐끔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 하는 것으로 반응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당황하거나, 아이자크에게 고마움을 표할 에바리스트는 아니었다. 이것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아이자크의 행동 또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아이자크를 보며 에바리스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갑을 벗고, 맨 손으로 그의 뺨을 두어번 쓰다듬었다. 묻어나오는 피는 물론 아이자크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자크는 그런 에바리스트를 쳐다보더니 뺨에 닿아온 그 손을 잡고 묻은 피를 핥았다. 그리고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수고했으니까 상이라도 주시지?"
"몸풀기도 안됐을텐데."

에바리스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잠시 별 생각없이 아이자크를 주시하던 에바리스트가 갑작스레 움찔했다. 아이자크에게 잡혀있는 손 끝에서 따끔거리는 느낌이 느껴졌다. 아이자크가 슬쩍 손가락 끝의 살점을 물어뜯어 피를 낸 것이었다. 상처가 혀로 꾹꾹 눌리는 느낌은 썩 좋지 못했다. 손 끝에 입을 맞춘 채로,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꽤나 진중해보일지도 모르는 광경이어다. 허나 적어도 에바리스트에게는 이것이 꽤나 저열한 행위라고 받아들여졌다. 흡혈귀도 아니고 말이지. 속으로 작게 중얼거린 그였지만 굳이 아이자크를 말리려 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만 보이는 호의인지, 아니면 말린다고 들을 아이자크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바리스트는 그저 가만히 자신의 피를 할짝이고 있는 아이자크를 시선을 내리깔아 바라볼 뿐이었다.

"상은 그거로 만족하나?"

이윽고 아이자크가 그 손을 놓아주자 에바리스트가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이자크는 그런 에바리스트와 잠시 시선을 맞추더니, 이내 장난스럽게 웃었다. 설마, 하고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들리자 에바리스트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어질 행동이야 뻔히 보였다. 겹쳐지는 입술. 얽혀가는 혀에서는 비릿한 혈향이 났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것이었다. 고작 해봤자 작게 물어뜯긴 상처일 뿐이었다. 피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째서 이리 선명하게 혈향이 느껴지는 것인지. 누군가 혀를 깨물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었다. 혀가 얽히고 섥히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넥타이를 끌러내리는 손을 에바리스트가 잡아 저지했다. 틈을 내주면 안되는 녀석이다. 맞닿아있던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에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에바리스트는 잡고 있던 아이자크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내리깔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허튼 짓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아이자크는 말없이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묘한 기류를 없애야 이 상황을 빠져나갈텐데, 도저히 지워질 기미가 없어서 에바리스트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꽉 잡아 더이상의 행동을 저지하고 있던 손은 어느새 자유를 되찾아 옷을 풀어헤쳐가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닿아오는 입술의 느낌에 에바리스트가 흣, 하고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한번 관계에 응해주는 것 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느정도의 육체관계는 에바리스트 자신에게도 필요했으니. 그저 이런 환경이 달갑지 못한 것 뿐이었다.
집무실에서 관계를 가진 것은 이미 수차례 있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꺼리는 이유라, 불편하다던가 하는 문제는 일단 둘째였다. 제일 큰 문제는 그 모습을 남에게 들킨 것이 수차례였다는 것이다. 이따금 까마득히 아래에 있는 부하에게 보여지기도 했고, 상관에게 들키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무엇인지 집무실에서 관계만 가지면 여러 용건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다. 얼마나 반복된 일이냐고 묻는다면, 아무리 급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에바리스트 바르트 대위의 집무실에 들를 때에는 세번 노크하고 안에서 그의 허락이 들린 뒤에 그 안으로 들어서자는 군 내부의 암묵적인 룰이 생겼을 정도였다. 그것을 아이자크나 에바리스트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부하에게 들키는 것이라면 나았다. 처벌을 두려워해 입도 벙끗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정 불안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상관에게 들키는 경우가 난감했을 뿐이었다. 이따금 그것으로 약점을 잡히기도 했고, 은근히 비꽈지기도 햇으니 에바리스트에게는 이만 저만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만들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이 말이었다. 아이자크,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쳇, 하고는 고개를 들어 에바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알았다고, 알았어."

……물론 꼭 그것 때문만이라고 하기 보다는, 시체들 사이에서 하는 취향이 없다는 것 쯤이야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