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Original] 권재현

Hewa 2015. 4. 25. 04:04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반장으로 뽑히고 나서 얼마 안 된, 3월 말 즈음의 일이었을까.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때즈음이라고 기억한다. 학기 초, 물밀듯이 쏟아진 숙제들을 칠판에 적어놓으며 할 일 없는 저녁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느 남고와 다르지 않게 반은 굉장히 시끄러웠고, 이따금 우당탕 하고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별로 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묵묵히 칠판에 글씨만 써 내려가고 있었다. 슬슬 팔이 아파올 때 쯤, 갑작스럽게 앞문이 거칠게 열렸다. 당연히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딱 봐도 험악한 인상이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니가 이 반 반장이냐?"

그런데요, 하고 대꾸하기도 전에 멱살이 잡아 올려졌다. 당시의 나는 또래에 비해 조금 작은 키였고, 상대는 꽤 컸다. 저쯤 되면 190cm 가까이 되려나. 멱살을 잡히고 있던 그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명찰을 보니 3학년 선배였다. 그 탓인지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삽시간에 얼어붙었고, 누구 하나 말리러 나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무서웠던가. 딱히 그렇진 않았다. 그저 당황스러웠을 뿐. 그리고 때릴 거라면 헤드폰은 건드리지 말아줬으면 하는 실없는 생각 또한 있었다.

"도대체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이야기인 즉슨, 점심 시간에 1학년들이 저를 치고 가놓고는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이거, 그 자리에서 사과했다면 할복이라도 하라고 했을 법한 기세인데. 선생님을 부르기 위해 뒷문으로 슬금슬금 나가던 부반장은 그 뒤에 서 있던 다른 선배들에게 덜미를 잡혔다. 자, 그러면 이런 상황에선 뭐라고 해야 하더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뭐가 죄송한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17세의 권재현은 제법, 다른 또래들처럼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게 저희 반 아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데요?"

그 말 한마디에 반 아이들의 표정이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사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설령 정말로 우리반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죄가 되나. 남고의 점심시간에 일어난 일인데. 상대의 뒤편으로 서기 녀석이 그냥 죄송하다고 말 해, 하고 입모양으로 말한다. 맨 끝의 미친놈아, 는 퍽 정겨운 덧붙힘이다.

"얼굴이라도 보셨어요?"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당연한 수순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꽤 아프다. 헤드폰은? 좋아, 별 문제 없군. 돌아간 고개를 다시 똑바로 했다. 이쯤 되면 납작 엎드려서 설설 기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오산이다. 별로 부당한 대우에 똑바로 말해야 한다는 정의감도 없었고, 제대로 후드려 맞을지도 모르는 한 아이를 감싸주겠다는 반장으로서의 책임감도 없었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다.

"그리고 정작 당사자는 안 찾고 애꿎은 반장에게 화풀이 하는 거, 되게 꼴사나워요."

상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것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본다. 그 행동이 오히려 더 상대를 자극할 것임은 알고 있었으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다. 한마디 더 하려고 한 순간 바닥으로 내팽겨쳐졌다. 무자비한 폭력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 쯤이라 충분히 예상했기에 이를 악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제법 나이스 타이밍이다.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운 순간은 이후 2학년, 3학년때까지 통틀어서 그 때가 유일할 것이다.

원래부터 성질이 고약한 선배라고 했다. 정확히는 복학생인데, 이전에도 여러번 후배들과 폭력 미수 사건을 만들어내곤 했다고. 이번 일도 그 짧은 저녁 시간에 앞반들을 다 돌고 우리반까지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참 할 짓도 없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꾸지람을 들을 줄 알았다. 현장 목격자─ 그러니까 반 아이들의 증언 때문이었을까. 때문이 아니라, 아마 그 덕이 맞을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냐면, 양호실까지 다녀 온 이후 확연하게 달라진 내 취급 때문이다. 떠밀려서 반장이 되어버린 평범한 학생에서, 도대체 소문이 어떻게 난 것인지 전교에서 거의 영웅 취급이었다. 그 날 야자가 끝나고 나서는 헹가래까지 당했으니, 뭘 더 말할까.

그렇게 고등학교 3년, 고정 반장이 되어버린 것 또한 아마 이 사건 때문일 터다.


//


“별로 관심 없는데.”

딱 잘라 한 말에 돌아오는 건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재현은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그저 진심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고 또 나름대로 고민에 빠지는 것이, 사실 그런 것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거다. 저가 생각하기에도 정말로 재미없게 살고 있는 지라, 그런 거에라도 관심을 가져보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니가 그래서 맨날 재미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런지라 이건 꽤나 정곡이다. 하기사, 1년 쯤 같이 지내보면 누구나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취미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할 일 없는 주말만 되면 넋이 빠진 채로 지내는 게 권재현 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관심 없다고 말했음에도 응해줄 의향은 충분했다. 바로 그 할 일 없는 주말이 이번 주말이었으므로.
보통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라 한다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야 정상인데 재현은 그러질 못했다. 애초에 경영학과에 들어온 것도 기업을 물려받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끝내 꺾인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기업을 물려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른 취직자리를 알아보는 방법도 있으나, 과연 경쟁 업체 사장의 아들을 받아 줄 곳이 있을 런지. 영 엄두도 나지 않아 재현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다보니 그는 동기들과 다르게 붕 떠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안 가겠다고? 솔직히 넌 연예인 만나게 해주겠다고 꼬셔도 안 넘어올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니.”

핸드폰 배경 화면의 메모란에 짧게 이번 주말, 정오. 라고 메모를 남긴 후 재현은 풀 죽은 채로 중얼거리던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라는 고작 두 글자에 얼굴이 화색이 도는 걸 보며 재현은 어쩐지 멋쩍어졌다. 생각해보면 그 재미없는 놈 매번 데리고 다녀 주는 것도 용했다. 그것도 4년째. 하기사, 고등학교 때에도 그런 녀석이 있긴 했다. 따라 다니는 게 지칠 정도로 끼고 다녀 주었던 친구가 한 명씩. 딱 그렇게 한 명씩인 걸 보면 챙겨주고 싶다는 인상은 없나본데, 그렇다면 그냥 그들의 오지랖 넓은 성격 때문일까. 재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근데 누구누구 가는데?”
“너랑, 나랑 여자 후배 두 명. 물론 사실 너만 있으면 돼.”
“…무슨 뜻이야?”

그는 잠시 음, 하며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니가 부려 먹기 제일 편하거든.”

…그런 이유냐. 재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해야 할 일이나 눈앞에 놓인 일이 있다면 일단 해놓고 봐야 하는 성격이 유별나긴 했다. 어쩐지 봉사 활동에 같이 가자는 제의를 자주 받았던 이유도 이거 때문일까. 편하긴 했겠다.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저의 잘못이렸다. 재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촬영장 잡일로 부려 먹히는 건가. 뭘 하게 될지 제대로 상상은 되지 않지만.

“어디서 만나?”
“그냥 학교 앞에서 기다려. 나름 촬영은 촬영이라고, 장소 퍼지는 건 좀 그런지 나도 아직 제대로 못 들었거든.”

학교 앞, 이라고 메모를 끝마치고 재현은 휴대폰 화면을 껐다. 어차피 잊진 않겠지만 굳이 가장 자주 보는 곳에 메모를 남겨 놓는 행동은 일종의 습관적 행동이었다.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언제나 손은 핸드폰으로 향했고, 배경화면에 띄워져 있는 그런 일정을 보고 있자면 적어도 저 날에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기에 굳이 따지자면 좋은 습관 축에 든다고 재현은 생각했다.

그럼 나 수업 있어서 간다, 하고는 휘적휘적 다리를 움직여 동방에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재현은 문득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든 상관은 없다만. 갑작스럽게 든 궁금증은 끝내 재현이 메모를 마치고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다시 집어 메시지를 보내게 만들었다.

* * *



완연한 여름, 날씨는 퍽 더웠던 거로 기억한다. 재현은 딱히 더위를 심하게 타는 체질은 아니었으나, 민상현은 부단히도 덥다며 짜증을 냈다. 그럴 때면 재현은 그와 고교 시절의 친구를 비교해보며, 성격이 비슷하긴 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소개 시켜주면 제법 재밌을지도, 하다가 그 생각은 금방 관둬버렸다. 닮은 사람끼리는 최고의 콤비임과 동시에 최악의 짝꿍이라고 어느 날 재준이 했던 말이 기억나서였다. 심리학도가 하는 그런 류의 말은 꾸며낸 말이든 아니든 묘하게 설득력을 가지기 마련이다. 물론 그것은 둘째 치고, 재현이 제 이복형의 말을 믿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맹목적으로 믿는 상대가 아닌가.
더위를 타지 않는 체질이라 하더라도 한여름의 햇빛은 불쾌지수를 높여주기엔 충분했다. 한창 드라마 촬영이 진행 되고 있는 카페 안을 보며, 재현은 차라리 들어가 있기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릴없이 했다. 하지만 이내 학생! 하고 인력을, 정확히는 잡일꾼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몸이야 말로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건 저밖에 남지 않은 게다. 연예인 구경 시켜준다는 말에 껌뻑 속은―어쨌든 밀착 만남이 아닐 뿐이지 구경은 맞긴 하지만― 두 여 후배는 촬영 소식은 어디서 들었는지 도착 직전부터 몰려 있었던 구경 인파에 섞여 버린 지 오래였고, 이 일정을 주선한 상현이라는 놈은 촬영 관계자라는 제 삼촌과 이야기를 나누기 바빠 보였다. 어쩐지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기분이라, 재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여자애들처럼 배우 머리꼭지라고 보겠다고 저 인파에 뛰어들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 속이라니, 생각만 해도 덥다.

한바탕 또 촬영 장비 옮기는 데에 동원되었다 온 재현은 뻐근해진 몸을 풀기 위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래도 뭐, 비싼 장비를 건드리는 일이니 굳이 따지자면 저가 제일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관계자들도 자칫 망가트릴까 노심초사 하는데, 재현의 경우에는 고장 내버린다면 별 생각 없이 배상이 가능하니 그러했다. 그렇다고 무성의하게 일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실없는 생각일 뿐이다. 재현은 고개를 돌려 아직도 촬영이 한창인 카페 안을 바라보았다. 슬슬 마무리되어 간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다. 간단한 장면인데 쓸데없이 오래 걸렸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일은 열심히 했냐?”

멀리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상현을 보며 재현은 이번엔 정말로 배신감을 느끼고 말았다. 덥다며 짜증 부리던 녀석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듯한, 심지어 상쾌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라니. 꼴에 그래도 부려먹기만 한 게 미안해졌는지 아이스티를 건네 오기에, 재현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괜히 그를 흘겨보는 게다. 하기야 부려먹기 편하다고 했는데도 따라온 건 저였다. 누굴 원망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삐졌냐는 물음에는 또 답 해주지 않았다.

“괜히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보니 삼촌이랑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어쩔 수 없었던 건데.”
“그것도 변명이라고 하냐.”

목이 많이 탔던 모양인지 일회용 플라스틱 컵은 금세 비워졌다. 스태프들이 그를 가엽게 여겨 넘겨줬던 생수도 줄 때마다 다 마셨던 것 같은데. 얼음 여러 개만 남은 컵 안을 재현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상현은 그런 그를 보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영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재현을 훑어보았다. 재현은 여전히 빨대에 입술을 댄 채로 그런 상현을 멀뚱히 쳐다볼 뿐이다. 상현은 아예 팔짱까지 껴버렸다.

“여자 스태프들이 아주 줄기차게 너 누구냐고 물어봤다더라.”

재현은 슬쩍 눈을 크게 떠보였다. 전혀 몰랐다. 일을 도울 때에는 오로지 거기에만 매진했고, 멍하니 서 있을 때에는 더운 햇빛 때문에 넋이 나가 있었으니 눈치 채지 못했던 게 어느 정도는 당연하지 않을까. 유독 여 스태프들이 자주 부른 것 같기도 한데, 그 정도는 무거운 걸 옮기기 힘든 여자들이니까 그럴 만도 하고. 잠시 곰곰이 몇 시간 사이의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재현은 그냥 어깨를 으쓱 하고 말았다. 관심이 없기에 딱히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다.

“뭐, 이건 각설 하고. 촬영 끝나고 삼촌이 너 좀 보자시더라.”
“날 왜?”
“낸들 어떻게 알아. 뭐, 스태프 누나들 소개 시켜 주시려는 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건 좀 사양하고 싶다. 재현은 일단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가신 일은 싫었다. 애초에 연애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었고, 저를 좋아해준다고 해도 그것을 돌려줄 수 있을 리가 없기에 가급적 그런 류의 만남은 피하고 싶었다. 애초에 저와 관련된다면 불행해진다는 강박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딱 한 명을 제외하고 모든 연락을 끊어버린 그였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도 물론 그렇게 할 생각이었고. 눈앞에 상현과는 과연, 내년에 연락을 주고받고 있을까.
잠시 심란함에 잠겨 있던 재현은 문득 들고 있던 빈 일회용 컵을 상현에게 내밀었다. 네가 버려줄 거지? 다소 뜬금없는 말에 상현은 멍청하니 재현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방치한 것도, 부려 먹은 것도 정말 미안하긴 한 모양인지 어이없다는 듯 헛웃으면서도 순순히 그것을 받아주는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