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마틴 - 24시간 합작]
릭 톰슨이 이른 아침 마틴 챌피를 찾았을 때, 그는 한가로이 서류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릭은 허탈감, 어이없음 사이에 알량한 안심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마틴은 언제나처럼 눈까지 예쁘게 접어 예의 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와 하나 다르지 않은 마틴에 릭은 허황된 기대를 품었고 동시에 전전긍긍했다. 서로 모순된 감정들이 릭의 머릿속에 맴도는 사이에 마틴이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릭."
허나 릭 톰슨에게는 절대로 좋은 아침, 그 이전에 좋은 날 일수가 없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브리튼 섬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나라였다. 그리고 그런 나라일수록 안의 소문은 빠르게 돈다는 사실은 릭은 오랜 여행의 결과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은근히 폐쇄적인 능력자 집단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마틴 챌피가 24시간 후 죽는다는 사실은 재단과 회사를 넘어 연합에까지 쫙 퍼진지 오래였다. 어트랙티브, 그 코드명에 걸맞게 그를 찾는 이는 많았으나 마틴의 모습은 재단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릭 또한 한 번 허탕을 치고 그의 집으로 직접 찾아온 차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집에 앉아서 하는 일이 서류 정리라니. 워커 홀릭도 이런 워커 홀릭이 또 없다. 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틴을 멍하니 바라 볼 뿐이었다. 마틴은 그런 릭을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좀 있으면 다 끝나는데, 이르지만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러 갈까요?"
마틴 챌피의 마지막 24시간은 새벽녘에 시작됐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12시간보다는 길테지만, 20시간보다는 짧다. 릭은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당사자인 마틴은 도대체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말 해주면 안 되겠소?"
"네?"
"지금이라도 거짓말이라고 말해주면 안되겠냐고 물었소."
한순간 마틴의 표정이 굳어졌음을 릭은 쉽게 포착할 수 있었다. 애초에 마틴이 재단이 아닌 제 집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는 게 그 소문이 진실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곧 있으면 끝나요."
"마틴."
"같이 점심 먹어요, 릭."
그리고 이내 마틴은 다시금 웃는다. 릭은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고작 만 하루로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는 마틴 챌피도 릭 톰슨도 알 수 없었다. 허나 시간은 흘러가고,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 채로 마틴의 마지막 날은 조금 느즈막하게 시작되었다.
* * *
"여기 한 번 더 오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릭은 떨떠름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언제 왔었는지는 확실히 기억에 잔존하고 있다. 워커 홀린 마틴 챌피가 처음으로 저를 위해 휴가를 내주었을 때 왔던 곳이다. 분위기도 맛도 마음에 들었었으니 충분히 그런 말을 했을 법도 하다. 릭은 시선을 돌려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도, 마틴도 식당마저 하나 바뀌지 않아 마치 그때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허나 이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조금 더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릭은 잠시 착잡한 표정으로 맞은편의 마틴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하더라도 이렇게 느낄 것이다. 방법은, 그저 마틴이 하자고 하는 것에 최대한 집중하는 일 뿐이다.
영양가 없는 대화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마친 둘은 다음으로 브리튼 섬의 말단에 다달았다. 애석히도 척박한 섬나라 영국의 바다는 그리 예쁘진 않았다. 하지만 딱히 마틴에게서는 아쉽다는 기색을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편이 더 마음에 드는 듯 했다. 더 예쁜 바다가 세상에 많은데 뭐이러 이런 곳으로 오자 했냐며 투덜거렸던 릭도 마틴이 그렇다면 만족할 수 있었다. 하기사, 예쁘지 않은 바다에는 그만큼의 다른 매력이 있는 법이다. 마틴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리라.
"릭은 왜 물에 발 담그는 걸 싫어하는 지 모르겠어요."
모래사장에 앉아 발을 물에 담그고 저를 돌아보는 마틴을 보며 릭은 심드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만은 응해달라는 표정의 마틴에 릭은 결국 져 줄 수밖에 없었다. 절로 발걸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모래를 밟고 마틴의 옆에 선 릭은 그대로 털썩 주저 앉았다. 가지런히 신발과 양말을 벗어 내려놓은 릭은 저를 향하는 따가운 마틴의 시선에 맨 발을 물에 담갔다. 차갑게 올라오는 느낌이 썩 좋진 않다.
하지만 모래 위에 올려 놓은 손 위에 제 손을 겹쳐오는 마틴은, 좋지 않을 리가 없다.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오는 그에 릭은 옅게 웃고 말았다.
대화 없는 시간이 얼마간 흘러갔다. 갑작스럽게 마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릭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마틴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마틴은 그상태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바다 쪽으로 향했다. 당연하지만, 잡을 수밖에 없다. 따라 일어난 릭은 무릎 밑까지 물에 잠긴 마틴의 팔을 잡았다.
"갑자기 뭐 하는…"
마틴이 고개를 돌려 웃더니 그대로 릭을 밀어 물 속에 빠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물에 빠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버린 릭은 어안이 벙벙한 채였고, 마틴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여전히 미소 지은 채로 그런 릭을 내려다봤다. 제대로 당했다. 릭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물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어때요, 기분이?"
"이런 장난은 재미 없소."
삐진 아이마냥 투덜거리던 릭은 제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눈으로 좇다가, 이내 씩 웃었다. 갑자기 변한 그의 표정에 마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서로를 바라만 보다가, 마틴의 표정은 순간 사색이 되었고 몸을 피하려 했다. "생각 읽는 건 반칙 아니오!" 릭이 언성을 높였고, 마틴이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일어나 팔을 뻗어 마틴이 아까 저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물 속으로 빠트렸다. 허나 빨리 알아차리기도 했고, 당하고만 있을 마틴도 아니지 않나. 넘어지는 순간 릭의 팔을 잡고 그와 함께 그대로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장난은 재미있구요?"
둘 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마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 기분은, 꽤나 괜찮다.
"굳이 젖은 걸 보자면 나보다 그대가 젖은 걸 보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니오?"
마틴은 가만히 릭의 목을 끌어안고 당겼다. 가까운 거리에서 호흡이 오간다. 가능하다면 계속 이 시간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로, 행복했다. 굳이 그의 생각을 읽지 않아도 릭 또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슬퍼져 버렸으나. 마틴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리라.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 * *
"빅 벤은 언제 봐도 아름답지 않아요?"
대답 대신 릭은 고개만 끄덕였다. 시계탑 안, 릭은 가만히 시간을 확인했다. ……거짓말 이었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당장이라도 장난이었다 하며 웃는다면 화 안내고 믿어줄 수 있을 정도로. 종일 의연했던 마틴을 보며, 한켠으로는 계속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틴 챌피는 그런 짓궂은 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지 않나.
"오늘 즐거웠어요."
"나도 그렇소. 당연하지만."
마틴 챌피의 미소는 여전히 눈부시고, 그래서 릭은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내 그대에게 더이상 무엇을 해줘야 할까. 하고 싶은 일도, 말도 많았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아주 끔찍할 정도로. 이제는 그나마도 무언가 할 수 있을 시간은 남지 않았다. 그저 영양가 없는 대화만을 주고받을 뿐이다.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마틴은 건물 내벽에 몸을 기대 앉았다. 끝은, 이곳이리라.
"진작 이렇게 시간을 내야 했는데… 아쉬워지려고 해요, 릭."
무슨 대답을 해줘야 할까. 릭은 한참을 대꾸 못한 채로 고민만 했다. 그런 그의 맘을 읽었는지 마틴은 싱긋 미소지었다.
"미안해요."
"왜 그대가 사과하는 건지."
릭은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았다. 끝이 다가온다는 걸 이런 식으로 그가 전해오고 있다. 거짓이라 믿으려 하는 시도도 이제는 불가능하다. 마틴은 가만히 릭의 어깨에 기댔다.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어릴 때 꿈이 하늘을 나는 거라고, 말한 적 있었죠?"
"그래. 기억 나오."
"존재하지 않았던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하며 한 생각이었어요. 그때부터 사랑을 꿈꿨는 지도 모르겠네요."
잔인한 얘기를 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릭은 마틴의 입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막을 수 없다. 지금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하다.
"……그리고 꿈이 하나 더 생겼는데…"
그가, 눈을 감는다.
"…죽을 땐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이렇게."
이어지지 않는 말에 릭은 입술만 달싹였다. 무엇을 꿈꿨는가, 마틴 챌피. 더이상은 물을 수도 없게 되지 않았나. 숨이 멎은 마틴 챌피를 제 어깨에 기대놓은 채로 릭은 시선을 멀리했다. 밤하늘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