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 IQ] 도시, 안개, 청년과 소녀
극한의 고통을 인내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가면 뒤, 창백해진 입술을 세게 깨물며 비명을 참아냈다. 팔을 덮고 있는 옷을 찢어버릴 듯 걷고, 거칠게 주머니를 뒤졌다. 익숙한 그립감의, 그의 손에 딱 맞는 크기를 가진 주사기. 그리고 안에 든 기분 나쁠 정도로 투명한 액체. 그는 힘겹게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비록 그 누구도 보지 못 할 것이었으나. 그는 능숙하게 손목의 피부 아래, 정맥을 찾아내 주저 없이 주삿바늘을 꽂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약물이 주입된 왼팔이 힘없이 늘어졌다. 꽂혀 있던 주사기는 그와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져 또르르 굴러갔다. 그 안에 약간 남아 있던 약물이 새어 나와 콘크리트를 적셨다. 그는, 자신이 어느새 마약에 적응했음을 알아 차렸다. 아니, 알아 차려도 아주 오래 전에 알아 차렸다. 더 이상 마약에 취해 바닥을 기지 않았을 때 즈음. 하지만 그는 마약에 적응한 자신을 애석해 하진 않았다. 뼈를 관통하고 피부를 벗겨 내는 듯한 고통을 단 한순간이라도 없앨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덜어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허나 그렇다고 마약의 패널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이라는 듯, 약이 피 안에 돌기 시작하면 졸음이 몰려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는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그에게 있어서 저의 몸속에 흐르는 피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고통의 발현지이자, 동시에 영원히 떼어낼 수 없을 것. B의 이름을 얻기도 전, 별 것 아니었던 그는 저의 몸에서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오렌지색 피를 볼 때마다 미친 듯이 웃어 젖히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미친놈이라 불렀고. 그는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했다. 미쳐 있었다. 저를 휘감는 고통에. 물론 지금도 미쳐 있다. 단지, B가 된 이후부터는 허튼 짓을 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부질 없는 짓임을 깨달아서였다. 피는 묽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마저도 요새는 거의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거의.
그래도 B는 아직은 살고 싶었다.
한번 죽었던 저를 살린 공왕류의 피는 뜻밖에 장점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평생의 고통을 안겨준 대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는 증오해 마지않는 피를 믿고 검 두 자루를 들었다. 그리고 가면을 썼다. 그의 몸이 찢겨 피가 흘러나올 때마다 그를 상대하는 자들은 오히려 고통스러워했다. 그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피는 아주 공평하게도 타인에게 또한 그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알게 된 이후부터는 적절히 활용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올 때까지 싸웠다. 그리고 그 피는 상대의 몸을 적셨다. 그를 상대하는 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고통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상대들에게 검을 꽂았다. 나는, 그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가. 숨통이 끊어진 상대에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살이 칼에 찢겨 나가고 총에 맞는 고통 따위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평생을 더한 고통과 함께 해왔기에.
피를 활용하는 법과 검에 능숙해지자, 그는 더 강한 적을 찾았다. 그게 바로 아폴로의 B였다. 마지막 일격을 그에게 꽂아 넣고 그는 어린 날 이후 처음으로 미친 듯이 웃었다. 쥐고 있던 검까지 바닥에 떨구면서. 그게 마지막이었다. B가 된 그는 더 이상 그렇게 웃지 않았다. 죽은 상대를 향해 중얼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쓴 가면 뒤로 예전의 것들을 모두 숨겼다. 그의 나이 10대, 아직 그는 어리고도 어렸다.
마약을 시작하게 된 건 그 즈음이었다. 약골이 그를 도왔다. 그래서 B도 약골을 도와주었다. 그가 하라는 것을 하고, 그의 동료가 되었다. 사실 B는 약골이 외치는 정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약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슈퍼 빌런의 칭호를 가졌음에도 별달리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딱히 그의 그런 행동에 다른 슈퍼 빌런들은 토를 달지 않았다.
고통은 떠나지 않았으나 마약이 있었고, B는 적어도 마약으로 고통을 잊은 순간에 만은 자유로웠다. 잠시나마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 이외에는 모두 부차적인 문제였다. 약골과의 신뢰 관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B는 그를 믿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믿었다. 그에게 자신을 의탁한 것이나 다름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이용, 당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뒤늦게 들었다. 하지만 B에게 중요한 건 약을 구할 루트가 약골 뿐이라는 점과, 시작을 한 이상 끝을 맺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힘이 빠졌지만 날만을 잔뜩 세운 목소리에 소녀는 흠칫 했다. 조그마한 키, 커다란 안경. 눈에 띌 수밖에 없을 분홍색 머리카락을 예쁘게 뒤로 해 양갈래로 묶은, 그보다도 더 어린 소녀. 한참을 허공을 떠돌던 B의 시선이 소녀에게 고정되었다. 나름 허물없는 사이라고 자부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소녀는 멀찍이 멈춰 서긴 했지만 딱히 겁을 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B는 잠시 소녀의 겁먹은 표정을 상상했다가 속으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겉으로도 웃을 정도였지만, 지금 그의 상황에 웃었다간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 같기에 참은 것이다. B는 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팔이 크게 베인, 가죽까지 뚫어버린 자상이었다. 상처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 내려 땅에 고이고 있었다. 그가 소녀의 접근을 막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오늘 따라 브린디쉬에 안개가 짙었다. 자칫 소녀가 핏물에 닿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아무리 슈퍼 빌런 중 하나라고 해도 소녀가 감당할 수 있을 고통은 아니었다. B 또한 소녀의 고통을 원하지 않았다. B는 제 옷에 감겨있는 붉은색 천을 풀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고인 피를 덮었다.
소녀의 곁에서 드론이 삑삑, 소리를 냈다. 이곳으로 온 것은 B의 실수였다. 원래는 자신의 마그네슘 빌딩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정말로 간만에 뇌가 마약에 취했다. 방향 구분을 못하게 되다니. B는 괜히 다 똑같이 생긴 브린디쉬의 빌딩들과 복잡한 구조를 탓했다. 부질 없는 짓이지만은.
"이제 와도 돼, 아이큐."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소녀. 아이큐는 쪼르르 그에게로 다가갔다. 보통이라면 그의 말 따위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굴었을 아이큐지만 피냄새를 맡았기에 순순히 기다려 준 것이다. 그의 피가 위험하다는 사실 쯤이야 아이큐도 잘 알고 있었다. B는 제 곁으로 온 아이큐에게 시선을 두었다. 웅웅. 드론은 미약한 진동 소리를 냈다. 기계 본연의 소리다. 아이큐가 개조한 드론은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지만, 저것처럼 아이큐 본인을 보호하려는 용도도 있었다. 아무리 도시의 반절을 슈퍼 빌런들이 장악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노리는 히어로들은 도시 구석구석에 존재했다. 어디까지나 아이큐는 기계에 있어서 천재일 뿐, 아직 어리고 힘없는 소녀였으니 꼭 필요했을 터다.
가까이서 확인 해보니 B의 상처는 아이큐의 생각보다도 더 컸다. 피가 붉은색이 아니라서 현실감은 떨어졌지만, 치료를 해야 할 상처라는 것 만은 확실했다. 제 몸에 상처를 내가며 싸우는 것은 B의 습관과도 같았다. 몸을 조금 사릴 만도 한데, 그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아이큐는 종종 그가 싸우는 방식을 보며 아프지도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참견은 하지 않았다. 다른 슈퍼 빌런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약골까지도. 허나 과연 약골이 몸을 사리라 한다면 B는 그렇게 할 것인가. 그가 오라 하면 오고,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처럼 구는 B였지만 싸움 방식에 대해서는 글쎄. 사실 다들 B라는 호칭을, 나아가서 그 자체를 믿고 있기에 충고조차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분명히 누굴 상대로든 승리하고 올 것이라고. 그에 따른 상처의 깊이는 깊을 수밖에, 양 또한 많을 수밖에.
"상처 치료해야 하지 않아?"
"그냥 둬도 돼."
사실 겉 면의 상처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B는 가면 아래로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몸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전신을 태우는 듯한 고통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앙다문 입술 틈새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그에게 필수품인 마약은 주머니 안에 있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피를 많이 흘린 대다가 긴장이 풀려 몸에 힘이 빠진 상태 인지라 주삿바늘을 제대로 혈관 안에 박아 넣을 수 있을지. B의 눈동자가 아이큐를 향했다. 붉은색 시선, 아이큐는 이따금 B에게서 나오는 신음 소리를 듣고 있었다.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영 달가워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런 것에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그의 속내를 아이큐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돕지 않을 생각인 것도 아니고. "주머니 안에 있어." 아이큐는 B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주머니를 뒤져 주사기를 꺼냈다. 언제든 혈관에 꽂을 수 있게 준비 해 놓은 듯 투명한 액체는 이미 주사기 안에 들어 있었다. 하기사, 급할 땐 마약을 주사기 안에 넣을 틈도 없을 터다. 아이큐는 상식만으로 B를 이해했다.
"어떻게 해?'
B는 대답 대신 드러난 제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을 따른 아이큐의 아직 덜 큰 손이 B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 아이큐는 사람의 인체에 대해 빠삭했다. 기계의 회로는 사람의 인체와 닮은 구석이 많았기에, 필요성에 따라 익혀 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아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B에게 묻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생각보다도 행동이 빨랐다. 일단 꽂고 보자. 실수를 한다면 부탁한 B의 탓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 말을 할 수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미약한 신음에서 비명으로 B가 내는 소리가 바뀌었다. 일단 보이는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은 아이큐는 무신경하게 피스톤을 꾹 눌렀다. 안 그래도 고통에 찌푸려져 있던 B의 미간이 더더욱 구겨졌으나, 가면에 가려져 있으니 아이큐가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주변이 조용해졌다. B는 고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저찌 제대로 약이 들어가긴 한 모양이었다. 문득 아이큐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B의 손을 잡았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의외로 따뜻해서, 놀랐다. 냉혈 동물이라 생각한 건 아니었으나. 아이큐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손을 잡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얼굴을 맞댄 세월이 꽤 됨에도 그랬다. 애초에 B는 누군가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걸 넘어 싫어하는 듯 했으니. 그 이유는 그가 가면을 벗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아이큐는 했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주사기를 주워 힘없이 늘어져 있는 B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B가 기계였다면 평생 아프지 않을 수 있게 내가 고쳐 줬을 텐데."
"…살벌한 얘기를 하네."
B는 끙, 하고 작게 신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건 여전했지만 어느 정도 움직일 만은 했다. 허나 이 정도면 괜찮네, 하고 생각함과 동시에 B는 휘청 해 지금까지 기대어 있던 난간에 다시금 등을 기대야만 했다. 그래도 딱 위태로울 지경 바로 앞에서 멈춘 덕에 기분은 크게 나쁘진 않았다. 로쏘에 가득한 고층 빌딩들 사이의 공기와는 다른 옥상 위의 공기가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데에 한 몫 했다. 비록 습기를 머금은 안개는 그대로였으나.
B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돌려 빌딩 아래를 내려다봤다. 썩 보기 좋은 경치는 아니지만, 이러고 있는 편이 더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어느새 더 가까이로 다가온 아이큐가 B의 바지 자락을 잡았다. B가 시선을 내려 저를 쳐다보자 아이큐는 메고 있던 가방을 풀어 대뜸 B에게 건넸다. B는 잠시 난처하다는 표정─물론 이것 또한 아이큐에게는 보이지 않겠으나,─을 짓다가도 순순히 그것을 받아주었다. 짐을 덜은 아이큐는 저도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은 듯 까치발을 들고 낑낑거렸다. 닿기에는 한참 멀었다. B는 속으로 작게 웃고는 아이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이큐는 불만스럽다는 듯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딱히 그런 B의 손을 거부하진 않았다.
"가방, 바닥에 내려놔도 돼?"
"상관없어."
"굳이 주길래 안 되는 줄 알았더니…"
B는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무겁기만 한 아이큐의 가방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이큐에게 저의 등이 보이도록 쪼그려 앉았다. "업혀." B의 그 말에 아이큐는 별 거리낌 없이 B의 등에 업혔다. 가방을 메고 있지 않은 아이큐는 생각보다도 더 가벼웠다. 또래 아이들보다도 더 가볍지 않을까. 어느새 아이큐는 저가 편한 자세를 찾은 듯 B의 어깨 위에 턱을 올렸다.
"안 떨어지게 조심해."
"그럴 일 없거든?"
좋다고 업혔으면서 툴툴거리는 아이큐에 B는 결국 육성으로도 픽 웃어버렸다. 아이큐는 그런 B의 등을 한 번 퍽 치고는 물끄러미 빌딩 아래로 시선을 두었다. 이제야 시원히 보였다. 안개가 잔뜩 낀 탓에 점멸하는 불빛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로쏘의 안개는 이상하리만치 짙었다. 이따금 기분을 축축 늘어지게 할 정도로. 사실, 애초부터 경치가 좋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어쩐지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을 뿐.
"B."
"응?"
"이만 돌아가자."
짙은 안개 속, 무언가 보이기라도 하는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B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