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Herowarz
[갈가B] Bad End?
Hewa
2015. 5. 24. 06:21
"예전에는 말이죠."
소년은 가만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들어 종종 있는 일이기에, 갈가마귀는 대꾸 없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소년이 하는 이야기는 저에 대한, 저에게 있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마음 한켠을 쓰리게 하는 이야기 뿐인 것은. 그런 생각을 잠시 하던 갈가마귀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감정들은 이미 심연 저편으로 떨궈버린 후였다. 그런 것들에 연연했다간 죽을 수도 있기에, 갈가마귀는 감정이 흔들릴 수 있는 요소들을 모두 버렸다. 연민, 동정심, 그런 것들 마저도 전부 다. 그래서 갈가마귀는 소년의 이야기를 덤덤히 들을 수 있었다. 속에서 요동치는 것들을 모두 무시하면서. 저를 흔들리게 할만한 것들은 이미 모두 다 버렸다고 위안하며. 그렇기에 소년은 망부석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고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하나하나 신경 써 줄 정도로 갈가마귀의 형편은 좋지 못했다.
감정이 흔들려 조절할 수 없게 된다면 곁의 소년마저 위험해질수도 있다. 그림자에 먹히는 것은 저 한명으로도 충분하다고, 갈가마귀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관 없는 누군가가 말려드는 일은 더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갈가마귀는 빛이 흐려져가는 십자가를 꽉 쥐었다. 재잘거리는 소년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러운 손으로.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했었어요. 사람을 죽인다던지, 물건을 훔친다던지."
소년은 하고 싶지 않은 일들, 이라고 말했으나 그것들을 나열하는 어조는 매우 차분했다. 이제는 무덤덤해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과거의 일이기에 괜찮다는 뜻일까. 소년은 한참동안 말을 잇지 않다가, 그대로 풀썩 뒤로 누워버렸다. 갈가마귀는 그런 소년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을까. 갈가마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을 과거의 행동들을 되짚고 있을까. 그런 것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갈가마귀는 애써 떨쳐내고, 저를 집어삼키려 일렁거리는 심연 너머로 그 마음을 다시금 던져버렸다. 흔들리면 안된다. 지금까지 제어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붉은 여왕의 십자가는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얼마 더 있으면 완전히 그 기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외면하고 또 외면해야 한다.
소년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편이 갈가마귀에게는 더 도움이겠으나 그렇다고 소년을 버릴 수는 없었다. 최소한 갈가마귀가 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서서히 스러져가는 소년의 말동무를 해주는 일 뿐이었으므로. 갈가마귀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으나, 그것은 소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브린디쉬의 Blade라는 칭호를 가진 소년은 큰 병을 갖고 있지 않았나. 약을 복용하지 못하고 있는 B는 그 속에서부터 자신을 차츰 좀먹어들어가고 있었다. 갈가마귀가 B의 이야기에마저 고개를 돌린다면 B는 더 빠른 속도로 죽어갈지도 모르기에. 함께인 것도 갈가마귀에게는 독이었으나 그렇다고 혼자가 된다면 더더욱 위험했다. B가 사라지고 필연적으로 찾아올 외로움이라는 놈은 가장 큰,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차가운 감각이기에.
"당연히 약이 필요했으니까 그랬죠. 당시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그래도 다 괜찮았는데, 딱 하나 못 견디는게 있었다면……."
눈을 감고 있던 B의 미간이 짐짓 찌푸려졌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텐데. 굳이 꾸역꾸역 하려는 이유는 대화의 레파토리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다른 이들과 철저히 단절되어 이렇게 단 둘이 남게 된 것도.
여러 사람이 죽었다. 예상대로 심연은 무서운 곳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힘을 가진 신들이 득시글거렸고, 아직 제 힘을 갖추지 못한 선수들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선수들 중 주력으로 꼽히던 갈가마귀와 B를 포함한 몇몇 선수들은 그 신들을 쓰러트리거나, 무력화시키거나, 주의를 끌거나 하는 식으로 겨우겨우 연명했다. 그나마도 지금은 이렇게 뿔뿔히 흩어져버린 상태다. 모두가 힘을 모아야 겨우 한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된 이상 누가 살아있을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연락 수단인 세이렌과 메두사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게 된지 한참이 지났다. 허나 남들을 걱정할 여유는 갈가마귀에게도, B에게도 없었다.
"듣고 있어요?"
갈가마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똑바로 하늘을 보며 누워있던 B의 고개가 돌려져 갈가마귀를 쳐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갈가마귀는 고개를 끄덕인다. 안 듣고 있던 거 다 알아요. B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갈가마귀는 어쩐지 미안해져버린다. "다시 이야기 해." 갈가마귀의 그 말에 B는 대꾸 대신 다시금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본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브린디쉬의 뒷골목에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가령, 어린 소년들을 겁탈한다던가 하는."
…돈은 꽤나 많이 줘요. 작게 덧붙이는 말에 갈가마귀는 속으로 혀를 찬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타박하지만 B는 고개를 젓는다. 그만큼 아팠다. 약이 필요했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들. B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갈가마귀는 소년이 딱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금방 그 생각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매번 읊던 성경 구절을 속으로 중얼거린다. 똑같은 구절만 웅얼거리게 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더이상 다른 구절들이 생각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번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가 했더니, 소년이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제일 최악인게 뭔지 알아요? 갈가마귀는 고개를 젓는다. B의 과거들은 더이상 갈가마귀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있지 않다. 온갖 세속적인 것들, 음란한 것들, 잔인한 것들은 갈가마귀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까이 하고 싶어도 가까이 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
"점차 나마저도 즐기게 된다는 게…"
"네 잘못이 아니야."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B는 눈을 크게 뜨고 갈가마귀를 쳐다본다. 그리고 푸핫, 웃음을 터뜨린다. 갈가마귀는 그것이 조금 불만이다. 나름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는데. 하기사, 너무 상투적인 위로였다. B의 잘못이 아니라면 그럼 누가 잘못인 걸까. B를 돈으로 사 그 몸을 범했던 자? 그는 정당히 돈을 지불하지 않았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던 갈가마귀는 고민을 중단한다. 별로 좋지 못한 쪽의 고민이고, 답은 아주 간단하다. 돈이 문제군. 돈이. 돈이 잘못이야.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성경 구절을 읊는다. 드디어 다른 구절이 생각났다. B에게 고마워 할 일이다. 썩 맘에 드는 말은 아니지만. B는 돈을 사랑한게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는 약이 필요했고 그 약을 구하기 위해 돈을 쫓았을 뿐.
B가 웃음을 터뜨린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갈가마귀 다운 위로였기 때문이었다. 최든들어 갈가마귀는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있었다. 본래 말 없는 자이긴 했으나, 그래도 조잘조잘 떠들다보면 걸어오는 태클이라던지가 적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좋은 조짐은 아니었다. 제어를 위해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도, 갈가마귀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B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정신이 혼미했다. 그에게 독이 될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애써 피해왔는데, 점점 그런 쪽의 이야기로 쏠리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가 잘 버텨주어야 할텐데. 이야기를 중단하기엔, 그랬다가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두번째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B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힘들죠?"
버티는 것이. 갈가마귀는 그 말에는 도저히 부정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종종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림자는 첨차 더 일렁이고, 과연 언제까지 이것을 제어할 수 있을지. 갈가마귀는 대꾸 없이 마른 침을 삼킨다.
"차라리 죽을까요? 나, 당신이랑 자면 완전히 정신을 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아마 당신도…"
"살아야지."
B는 최근 잠조차 자지 않고 있다.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다. 갈가마귀는 속삭이듯 말하며 B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었다. 한계에 치닫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말에서도, 그 어조에서도. 하지만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 했던 대화가 있지 않나. 살고싶다고. 네가 살고싶어하는 만큼 나 또한 살고 싶다고. 그러니까 끝까지 버텨보자고. 버티고 버티다보면 파편을 가진 이가 나타나 갈가마귀의 숨통을 트이게 해줄지도 모르고, 약을 가진 이가 나타나 B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지도 모르고…….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으나 처음부터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겨우 찾은 것이긴 했으나 적에게 들키지 않는 안전한 공간이 존재하긴 했다. 여기뿐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곳처럼 안전한 곳이 또 있을 것이고, 없다면 이곳을 찾기 위해 동료들이 계속 헤매고 있을 터다. 만나서, 합류한다면 둘 다 지금보다 상태는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포기할 수 없었다. B는 제 눈을 가린 갈가마귀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 아주 세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잡은 세기 만큼은 아직 살고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안해요."
B는 손의 힘을 풀었고, 갈가마귀는 손을 거두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 같기는 했으나, 희망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갈가마귀는 혀를 찼다. B가 조금만 더 버텨주었으면 한다. 저는 그래도 아직은 버틸만 한데, B는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모양이다. 애초에 B가 겪는 고통을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B는 정신을 말끔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기위해서는 며칠을 참아온 잠을 자는 방법 뿐이었다. 괜찮을까. 깨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신뿐만이 아니라 곁을 지켜주는 갈가마귀까지 좀먹을 것 같아 그것이 두려웠다. 깨어나지 못하는 것 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나, 조금만 잘게요. 어차피 아파서 오래 자진 못하니까 한두시간만 있다가 깨워줘요."
"그래."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 갈가마귀는 그것이 걱정이다. 걱정을 버리겠다 버리겠다 하고 있지만 그것은 끝끝내 버려질 것이 아니었다. B 또한 눈을 뜨지 못할까 두려웠으나. B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주변이 암전되었다. 오로지 바로 옆, 앉아있는 갈가마귀의 인기척만이 느껴졌다. 어째선지 그것에 안심이 되고 마음이 편해져 서서히 잠에 빠져든다. 꼭 일어날게요. 갈가마귀가 걱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를 안심시키듯 작게 중얼거리며. 그가 그것을 들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자신을 안심시켜주는 만큼 자신 또한 그를 안심시켜주고 싶어서.
갈가마귀는 B를 믿었다. 들었던 그의 과거들, 자신이 겪었더라면 그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과거들을 극복해내고 이자리에 있는 소년이 아닌가. 그러기에 이번에도 일어서리라. 그리고 자신을, 동료들을 가로막고 기만하는 것들을 모두 베어나가리라. 그렇게 생각하기에 잠에 빠져들고 있는 B를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적어도 자고 있을 때만은 편안하기를. 눈을 뜨면 다시금 고통뿐이기에.
소년은 가만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들어 종종 있는 일이기에, 갈가마귀는 대꾸 없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소년이 하는 이야기는 저에 대한, 저에게 있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마음 한켠을 쓰리게 하는 이야기 뿐인 것은. 그런 생각을 잠시 하던 갈가마귀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감정들은 이미 심연 저편으로 떨궈버린 후였다. 그런 것들에 연연했다간 죽을 수도 있기에, 갈가마귀는 감정이 흔들릴 수 있는 요소들을 모두 버렸다. 연민, 동정심, 그런 것들 마저도 전부 다. 그래서 갈가마귀는 소년의 이야기를 덤덤히 들을 수 있었다. 속에서 요동치는 것들을 모두 무시하면서. 저를 흔들리게 할만한 것들은 이미 모두 다 버렸다고 위안하며. 그렇기에 소년은 망부석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고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하나하나 신경 써 줄 정도로 갈가마귀의 형편은 좋지 못했다.
감정이 흔들려 조절할 수 없게 된다면 곁의 소년마저 위험해질수도 있다. 그림자에 먹히는 것은 저 한명으로도 충분하다고, 갈가마귀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관 없는 누군가가 말려드는 일은 더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갈가마귀는 빛이 흐려져가는 십자가를 꽉 쥐었다. 재잘거리는 소년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러운 손으로.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했었어요. 사람을 죽인다던지, 물건을 훔친다던지."
소년은 하고 싶지 않은 일들, 이라고 말했으나 그것들을 나열하는 어조는 매우 차분했다. 이제는 무덤덤해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과거의 일이기에 괜찮다는 뜻일까. 소년은 한참동안 말을 잇지 않다가, 그대로 풀썩 뒤로 누워버렸다. 갈가마귀는 그런 소년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을까. 갈가마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을 과거의 행동들을 되짚고 있을까. 그런 것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갈가마귀는 애써 떨쳐내고, 저를 집어삼키려 일렁거리는 심연 너머로 그 마음을 다시금 던져버렸다. 흔들리면 안된다. 지금까지 제어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붉은 여왕의 십자가는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얼마 더 있으면 완전히 그 기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외면하고 또 외면해야 한다.
소년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편이 갈가마귀에게는 더 도움이겠으나 그렇다고 소년을 버릴 수는 없었다. 최소한 갈가마귀가 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서서히 스러져가는 소년의 말동무를 해주는 일 뿐이었으므로. 갈가마귀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으나, 그것은 소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브린디쉬의 Blade라는 칭호를 가진 소년은 큰 병을 갖고 있지 않았나. 약을 복용하지 못하고 있는 B는 그 속에서부터 자신을 차츰 좀먹어들어가고 있었다. 갈가마귀가 B의 이야기에마저 고개를 돌린다면 B는 더 빠른 속도로 죽어갈지도 모르기에. 함께인 것도 갈가마귀에게는 독이었으나 그렇다고 혼자가 된다면 더더욱 위험했다. B가 사라지고 필연적으로 찾아올 외로움이라는 놈은 가장 큰,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차가운 감각이기에.
"당연히 약이 필요했으니까 그랬죠. 당시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그래도 다 괜찮았는데, 딱 하나 못 견디는게 있었다면……."
눈을 감고 있던 B의 미간이 짐짓 찌푸려졌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텐데. 굳이 꾸역꾸역 하려는 이유는 대화의 레파토리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다른 이들과 철저히 단절되어 이렇게 단 둘이 남게 된 것도.
여러 사람이 죽었다. 예상대로 심연은 무서운 곳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힘을 가진 신들이 득시글거렸고, 아직 제 힘을 갖추지 못한 선수들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선수들 중 주력으로 꼽히던 갈가마귀와 B를 포함한 몇몇 선수들은 그 신들을 쓰러트리거나, 무력화시키거나, 주의를 끌거나 하는 식으로 겨우겨우 연명했다. 그나마도 지금은 이렇게 뿔뿔히 흩어져버린 상태다. 모두가 힘을 모아야 겨우 한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된 이상 누가 살아있을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연락 수단인 세이렌과 메두사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게 된지 한참이 지났다. 허나 남들을 걱정할 여유는 갈가마귀에게도, B에게도 없었다.
"듣고 있어요?"
갈가마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똑바로 하늘을 보며 누워있던 B의 고개가 돌려져 갈가마귀를 쳐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갈가마귀는 고개를 끄덕인다. 안 듣고 있던 거 다 알아요. B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갈가마귀는 어쩐지 미안해져버린다. "다시 이야기 해." 갈가마귀의 그 말에 B는 대꾸 대신 다시금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본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브린디쉬의 뒷골목에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가령, 어린 소년들을 겁탈한다던가 하는."
…돈은 꽤나 많이 줘요. 작게 덧붙이는 말에 갈가마귀는 속으로 혀를 찬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타박하지만 B는 고개를 젓는다. 그만큼 아팠다. 약이 필요했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들. B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갈가마귀는 소년이 딱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금방 그 생각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매번 읊던 성경 구절을 속으로 중얼거린다. 똑같은 구절만 웅얼거리게 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더이상 다른 구절들이 생각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번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가 했더니, 소년이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제일 최악인게 뭔지 알아요? 갈가마귀는 고개를 젓는다. B의 과거들은 더이상 갈가마귀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있지 않다. 온갖 세속적인 것들, 음란한 것들, 잔인한 것들은 갈가마귀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까이 하고 싶어도 가까이 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
"점차 나마저도 즐기게 된다는 게…"
"네 잘못이 아니야."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B는 눈을 크게 뜨고 갈가마귀를 쳐다본다. 그리고 푸핫, 웃음을 터뜨린다. 갈가마귀는 그것이 조금 불만이다. 나름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는데. 하기사, 너무 상투적인 위로였다. B의 잘못이 아니라면 그럼 누가 잘못인 걸까. B를 돈으로 사 그 몸을 범했던 자? 그는 정당히 돈을 지불하지 않았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던 갈가마귀는 고민을 중단한다. 별로 좋지 못한 쪽의 고민이고, 답은 아주 간단하다. 돈이 문제군. 돈이. 돈이 잘못이야.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성경 구절을 읊는다. 드디어 다른 구절이 생각났다. B에게 고마워 할 일이다. 썩 맘에 드는 말은 아니지만. B는 돈을 사랑한게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는 약이 필요했고 그 약을 구하기 위해 돈을 쫓았을 뿐.
B가 웃음을 터뜨린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갈가마귀 다운 위로였기 때문이었다. 최든들어 갈가마귀는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있었다. 본래 말 없는 자이긴 했으나, 그래도 조잘조잘 떠들다보면 걸어오는 태클이라던지가 적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좋은 조짐은 아니었다. 제어를 위해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도, 갈가마귀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B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정신이 혼미했다. 그에게 독이 될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애써 피해왔는데, 점점 그런 쪽의 이야기로 쏠리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가 잘 버텨주어야 할텐데. 이야기를 중단하기엔, 그랬다가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두번째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B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힘들죠?"
버티는 것이. 갈가마귀는 그 말에는 도저히 부정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종종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림자는 첨차 더 일렁이고, 과연 언제까지 이것을 제어할 수 있을지. 갈가마귀는 대꾸 없이 마른 침을 삼킨다.
"차라리 죽을까요? 나, 당신이랑 자면 완전히 정신을 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아마 당신도…"
"살아야지."
B는 최근 잠조차 자지 않고 있다.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다. 갈가마귀는 속삭이듯 말하며 B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었다. 한계에 치닫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말에서도, 그 어조에서도. 하지만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 했던 대화가 있지 않나. 살고싶다고. 네가 살고싶어하는 만큼 나 또한 살고 싶다고. 그러니까 끝까지 버텨보자고. 버티고 버티다보면 파편을 가진 이가 나타나 갈가마귀의 숨통을 트이게 해줄지도 모르고, 약을 가진 이가 나타나 B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지도 모르고…….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으나 처음부터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겨우 찾은 것이긴 했으나 적에게 들키지 않는 안전한 공간이 존재하긴 했다. 여기뿐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곳처럼 안전한 곳이 또 있을 것이고, 없다면 이곳을 찾기 위해 동료들이 계속 헤매고 있을 터다. 만나서, 합류한다면 둘 다 지금보다 상태는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포기할 수 없었다. B는 제 눈을 가린 갈가마귀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 아주 세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잡은 세기 만큼은 아직 살고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안해요."
B는 손의 힘을 풀었고, 갈가마귀는 손을 거두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 같기는 했으나, 희망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갈가마귀는 혀를 찼다. B가 조금만 더 버텨주었으면 한다. 저는 그래도 아직은 버틸만 한데, B는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모양이다. 애초에 B가 겪는 고통을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B는 정신을 말끔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기위해서는 며칠을 참아온 잠을 자는 방법 뿐이었다. 괜찮을까. 깨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신뿐만이 아니라 곁을 지켜주는 갈가마귀까지 좀먹을 것 같아 그것이 두려웠다. 깨어나지 못하는 것 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나, 조금만 잘게요. 어차피 아파서 오래 자진 못하니까 한두시간만 있다가 깨워줘요."
"그래."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 갈가마귀는 그것이 걱정이다. 걱정을 버리겠다 버리겠다 하고 있지만 그것은 끝끝내 버려질 것이 아니었다. B 또한 눈을 뜨지 못할까 두려웠으나. B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주변이 암전되었다. 오로지 바로 옆, 앉아있는 갈가마귀의 인기척만이 느껴졌다. 어째선지 그것에 안심이 되고 마음이 편해져 서서히 잠에 빠져든다. 꼭 일어날게요. 갈가마귀가 걱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를 안심시키듯 작게 중얼거리며. 그가 그것을 들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자신을 안심시켜주는 만큼 자신 또한 그를 안심시켜주고 싶어서.
갈가마귀는 B를 믿었다. 들었던 그의 과거들, 자신이 겪었더라면 그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과거들을 극복해내고 이자리에 있는 소년이 아닌가. 그러기에 이번에도 일어서리라. 그리고 자신을, 동료들을 가로막고 기만하는 것들을 모두 베어나가리라. 그렇게 생각하기에 잠에 빠져들고 있는 B를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적어도 자고 있을 때만은 편안하기를. 눈을 뜨면 다시금 고통뿐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