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그리린] 위로의 방법

Hewa 2015. 7. 16. 04:58

건물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아까 전부터 웅웅, 하고 머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리드는 두어번 고개를 휘저었다. 그리고 벽에 기대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아직도 주변에 날리고 있는 화약 가루를 털어냈다. 아까 전에는 매연을 잔뜩 마시기도 했다. 간헐적으로 나오던 기침은 이것 때문이리라. 그리드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다가 아래로 미끄러져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몸에 안 좋으니 조심좀 하라고 린이 슬슬 핀잔을 줄 시점인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계속 머리가 아픈 것도 그렇고, 갑자기 덜컥 겁이 나는 것이다. 사실 언제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울부짖는 영혼들의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그리드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문제였다.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면. 린을 불러보려던 그리드는 그냥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방금 전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 자신의 힘이 부족했기에 동료를 지키지 못했던 기억. 한 번 잊어버린 적이 있었으나 다시 떠올려버린 이상, 다시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울고 있을 지도 모르지. 눈물을 흘린다는 일반적인 의미 보다는, 감정의 이야기다. 그 때의 자신도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시끄럽게 울려대고 아파오는 머리는 일종의 울음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혼자 두어야 하는게 맞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책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 이외의 일로는 1분1초도 아까운 시기다. 그리드가 경험한 상실이라는 것은 그랬다.

 

《그리드.》

 

대답 대신 그리드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린의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차분했다. 물론 좋은 의미의 차분함은 아니었다. 자괴감이 뚝뚝 방울져 마음 위에 진득하게 떨어지고, 그대로 깊은 바닷속으로 쳐박혀지는 느낌. 괜찮냐고 묻는 것은 그닥 의미 없어 보였다. 괜찮을 리가 없으니까.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뱉어내는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같은 몸을 쓴다고 느끼는 감정까지 같지는 않은데, 두 사람은 묘하게 같은 기분을 공유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특히 더 그랬다. 덕분에 그리드마저 푹 가라앉아 있었다.
동정인가, 연민인가, 동질감인가. 사실은 순수한 걱정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지쳤구나.》
"너야말로."

 

린은 픽, 하고 바람이 새어나가듯 웃었다. 그러게. 둘 다 너무 지쳐버렸어. 아직 하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지 못했는데. 그리드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바람 한 점조차 불지 않았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듯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그리드로서는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잘 풀리려나. 계획에 문제는 없을까. 답지 않게 그리드는 사색에 빠졌다.
그래도 린이 이름을 불러온 순간부터 머리는 울리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기침도 멈췄고. 조금은 괜찮아졌다는 뜻이겠지. 다행이라고 말할까 하다가, 이번에도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다.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은 전해질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찝찝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시간 죽이고 있어도 괜찮냐. 네 그 계획은 어쩌고?》
"자기는 계획이고 뭐고,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애초에 난 이 상태로 돌아가면 그거로 끝이니까.》

 

말려들지 않아도 될 남의 나라 문제에 말려들어 이 꼴이 되어버렸다. 린의 말대로, 불로불사인 호문클루스를 얻은─정확히 말하자면 하나가 되어버린─ 시점에, 그냥 돌아가버리면 그것으로 린의 목표는 달성되는 것이었다. 허나 린은 도저히 아메스트리스에서 만난 동료들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지도자라는 자를 보며 느낀 것들. 아무리 남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왕이 되어서는 안될 자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린 본인의 신념의 문제였다. 그리고 저의 계획을 운운하는 그리드.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떠나지 않은 덕에 시간은 시간대로 지체되었고, 신하마저 잃게 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리드의 탓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그리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미안하진 않다. 린의 의지가 섞여 결정한 일이기도 했고, 미안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너무 낯간지러웠다. 단지, 모든 것이 자신이 부족하고 약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여길 린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네 일만 잘 풀리면 난 걱정도 없겠다.》
"그러냐."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이정도 질질 끈다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리드는 한쪽 무릎을 세워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그 행동에 린은 제법 당황한 눈치였다. 사실 그리드조차도 자신이 왜 계속 이런 기분에 빠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단순히 감정이 동화되었다기엔 너무 시간이 길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이어이, 왜 네가 우울해하는건데?》
"…그러게나 말이다."
《니가 기운 차려야 나도 기운 차리지 않겠냐고.》

 

린의 일이 자신의 일인 마냥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린이 이렇게 커져버렸는지. 어떤 의미에서 커져버린 것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할 일들만 가득이었다. 동료, 라기엔 더 진득한 것 같고. 친구, 라기엔 너무 간질거리고. 그리드가 인식할 수 있는 단어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었더랬다. 린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일어나, 멍청아. 일어나서 움직여. 아무리 지금이 때가 아니더라도 일찍일찍 움직여야 탈이 안 생기지.》

 

그렇게 말하는 린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운이 빠져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걸 린 본인도 알고는 있었다. 몸이 하나고 사람은 둘이라면, 느끼는 것도 둘인 편이 좋을텐데. 그래야 한 쪽이 무언가의 이유로 발이 묶였을 때, 다른 쪽이 움직일 수 있으니까. 애석히도 그리드와 린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드를 책망하기에는, 린은 이것마저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이상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린은 그렇게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드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린 야오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과 린의 관계에 대해서. 말로 설명 못할 것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말로 설명하지 못할 뿐이지 머릿속으로는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좋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는 것 자체를 꺼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파왔다.


그렇다면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한참을, 사실은 그닥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정적 때문에 한참으로 느껴지는 그 시간 동안 그러고 있던 그리드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그리드는 제 손등을 쳐다보았다. 우로보로스의 문양이 있는 왼쪽 손. 원래 이 몸에는 없었던 것. 오른손으로 그것을 지워버릴 듯 문질렀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내려 문양 위에 입술을 대었다.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린은 말 대신 뭔데 이건,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위로."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나 느낌이 속에 있는 린에게는 전해지지 않듯, 이것 또한 전해지지 않아야 하는 게 맞을텐데. 린은 제 왼쪽 손등에서 따뜻한 촉감을 느껴버렸다. 그리드와는 달리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던 린은 대꾸 없이 그리드와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입맞춘다.
그리드는 린까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유는? 그리드는 자신의 감정이 말하고 있는 것들을 깡그리 모르겠다 취급하기로 하고, 그저 위로를 해주고 싶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드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걷기 시작했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애써 무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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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상의 서열은 그리드>린(사실은 =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이더라도 감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그리드<린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