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개인로그

네일 클라이스, someday.

Hewa 2015. 11. 7. 03:20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네일은 한두개 풀어놨던 셔츠 단추를 여몄다. 넥타이 매무새도 반듯하게 가다듬었다. 이내 네일은 목을 조이는 감각에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7년 내내 모범생 이미지를 포기하고서까지 교복만은 느슨하게 입고 다녔는데,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학교도 졸업한지 오래되었고, 이제는 정말 어른이니까. 나이 앞자릿수도 바뀌지 않았나. 거기까지 생각한 네일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나이 앞자릿수가 바뀌었다는 건 상당히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이때까지 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구나, 했다. 앞으로도 계속 살아나가겠지. 그러고 물끄럼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장갑에 감싸인 손을 보며 참 많은 것을 닮아가는구나, 하고 네일은 피식 웃어버렸다.

옆자리가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년에 딱 한 번, 아버지의 묘지를 찾을 때는 항상 동행이 있었으니까. 첫 해에는 저를 빤히 보고 있는 걸 옆에 두고, 그 자리에서 사랑해버린 사람에 대해 줄줄이 읊었더랬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만큼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시절이다. 항상 옆자리를 지켜주는 사람에게도,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형에게도. 그러는 저를 보다가, 마치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한 듯 엘리후는 부드럽게 저를 끌어당겨 안아주고 저 또한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었다. 분명히 안 것이겠지. 그래서 슬픔따위는 금방 날려버릴 수 있었다. 지난 일에 슬퍼하고 후회하기에는, 앞으로는 행복할 일만 남았다는 게 와닿아서. 그렇다고 슬픔이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 순간에만은 잊을 수 있었다.

혼자 가도 괜찮겠냐 물어오는 엘리후의 손등을 가만히 제 손으로 덮고, 고개를 끄덕였던 게 며칠 전의 일. 그 이후로도 동행해주었기에, 올 때마다 항상 슬픈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자신을 걱정해 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홀로 가겠다 말 한 이유는, 마음가짐을 새로 할 필요성이 있어서였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을지 괜찮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다. 정말로 주저앉아서 펑펑 울어버릴지도 모르지. 그만큼 아직도 생각하면 너무 슬퍼지니까.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네일은 아직도 종종 하곤 했다.


묘비 앞에 우뚝 멈춰선 네일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다른 꽃다발들을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일찍이 친척들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다녀갔을 법한 친척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네일은 간만에 그들의 얼굴이라도 잠깐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 둘 다 챙겨야 하는 건 제법 부담이라 평소에는 거의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머글 세계와 마법 세계로 나뉘어있기도 했고. 혹여 이런 걸 이쪽의 친척들이나 돌아가신 아버지가 신경 쓰시는 건 아닐지, 네일은 그냥 그것만 걱정이었다. 자신은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으니까. 부모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조금 달랐겠지만.


"나 왔어요. 너무 자주 오는 것도 별로일 것 같아서, 1년에 한 번 씩만 오는 건데 혹시 서운해하는 건 아니죠?"


애써 넌지시 꺼낸 말인데,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네일은 애꿎은 넥타이 매무새만 계속 가다듬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속이 답답하다. 무언가 탁 막힌 것처럼. 한 번 크게 숨을 토해내고 나서야 네일은 다시 묘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역시 아직도 어른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의연한 모습, 의젓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네일은 한참동안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나한테 서운해할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아버지는 계속 머글 세계에 살고 싶어 했잖아요. 나랑 같이. 결국 그것도 못하고 말이야."


사실은 그럴 생각이었다. 모든 것에 진절머리가 나버려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 사건을 겪으면서 이해했다. 아버지가 머글 세계로 도망쳐버린 이유. 그리고 돌아오지 않으려 했던 이유. 이런 게 싫었던 것이겠지, 당신도. 아직도 남아있는 혈통에의 차별이라는 것에 당신은 얼마나 상처받아왔을까. 죄 없는 가족의 죽음까지 겪고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에 공감해버린 순간, 네일 또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살하고. 유서를 겸해 자신에게 남겨진 편지를 읽으며 완전히 알았다. 당신에게는 나밖에 남지 않았었구나. 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구나. 그래서 죽음을 선택한 아버지를 도저히 원망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결국 그 자리에서 정말로 죽으려 했으니까. 아버지가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데도 그랬다. 죽음이 당신의 단 하나 남은 선택지였겠지.

…물론 또 하나를 알았다. 당신은 나를 끔찍히도 사랑했구나. 끔찍히도 사랑해서 나를 데리고 도망쳤고, 돌아오지 않으려 했구나. 내가 당신과 똑같은 상처를 받는 걸 바라지 않아서. 그럼에도 내가 원했기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장소로. 사실 당신은 이곳에 있으면 나까지 잃을까봐, 그게 제일 두려웠던 거겠지. 뒤늦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떼를 썼던 게 부끄러워졌다. 이런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했던 어린 나날이 7년씩이나 지속됐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당신은 모든 행동을 나를 사랑하기에 행했다. 그런데도 나는 왜 몰랐던 것인지.


"게다가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곳에 있네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선택한 것들 모두 다. 아버지가 살아있었더라면 알았을텐데."


네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정리는 거의 완벽하게 한 것 같았는데, 막상 말로 내뱉으려니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두서 없이 나왔다. "그냥, 내 선택이니 존중해주셨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밖에 할 수 없어요." 작게 중얼거리고 네일은 눈을 꽉 감은 채 무거워진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아직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너무 무거웠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이정도로 행복해도 되나, 싶거든요. 그래, 오늘은 이 말이 하고 싶어서 혼자 왔어요. 걔가 옆에 있으면 하려던 말도 다 못 할 것 같았거든."


나, 행복해요. 앞으로도 행복할거예요. 한동안 이대로도 괜찮은걸까, 하고 걱정했는데. 이젠 확신이 생겼어. 걔랑 같이 있으면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길게 덧붙이고 네일은 웃었다. 그저 생각만 하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이리 좋아지니. 누가 보고 눈꼴 시리다 하더라도 할 말은 없을듯 싶었다. 네일은 애써 미소를 지워냈다. 이렇게 행복하게 웃을 자리는 아니지.

네일은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들고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네일은 작게 오르치데우스, 하고 주문을 읊었다. 백합꽃을 한 송이씩 모아서 만든 꽃다발. 네일은 가만히 그것에 코를 묻었다. 쓸데없이 향기만 좋아선. 네일은 그대로 눈을 감고 가만히 향기를 맡았다.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느낌. 돌아갈 때 엘리후에게 선물로 꽃다발이라도 사다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입꼬리가 슬 올라갔다. 애써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입꼬리를 내리고, 네일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묘비 앞에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가볼게요. 내년에 봐요."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뒤, 눈을 감고 두 손을 깍지 껴 맞잡았다. 애도하듯이, 묵념하듯이.


몇 분 여가 지나고 나서야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는데, 난데없이 묘비 위에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평균적인 독수리의 크기보다는 다소 작은 놈이었다. …이거, 쫓아내야 하는 것 아닌지. 하지만 새까만 눈으로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게 어쩐지 쫓아낼 마음이 들질 않았다. 그렇게 독수리와 마주바라보기를 한참, 네일은 문득 손을 뻗어보았다. 보통 이렇게 하면 무슨 동물이든 물거나 할퀴곤 했는데 이놈은 묘하게도 얌전했다. 이윽고 부리 끝에 툭, 하고 손이 닿았다. 독수리는 그저 고개만 한 번 갸웃 할 뿐이었다. 올빼미나 부엉이 같은 것만 많이 봤지, 이런 대형 맹금류를 눈 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네일은 저도 모르게 눈을 빛냈다.

아쉬운 것은 이러고 있을 시간조차 부족하다는 것 정도. 친척들도 만나봐야 하고, 무엇보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 네일은 손을 거두고 뒤돌았다. 그러자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뒤쪽에서 났다. 독수리가 날아오른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독수리가 네일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이상한 놈을 다 보겠네, 했다. 처음이었다. 동물에게 거부받지 않은 건. 당연하지만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다. 오히려 좋지.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있다 하며 네일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독수리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안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애써 신경은 쓰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네일은 얼마 안 가 우뚝 멈춰서서는 하늘을 보았다. 그러자 독수리 또한 천천히 하강해 적당한 위치에 멈추어 정지비행을 했다.


"…눈에 띄잖아, 너. 계속 따라올 생각이야?"


당연하지만 독수리가 대답을 할 리는 없었다. 저가 말을 붙여 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네일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지팡이를 꺼내 독수리에게 투명화 마법을 걸어주었다. 이정도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따라올 수 있겠지. 어차피 얼마 안 가 풀릴 마법이라, 도중에 독수리가 사라지더라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다시금 멀어져가고, 그제서야 네일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 * *


"선물."


아버지의 묘지에 다녀오겠다 말하고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우더니, 연락도 없이 나타난 네일은 엘리후에게 대뜸 꽃다발을 내밀었다. 은은한 푸른빛을 띄고 있는 백합이었다. 꽤나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도 속으로는 부끄러워하고 있는 게 다 보여서, 엘리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안 받냐며 괜히 신경질을 내는 게, 정말 딱봐도 부끄러워 하고 있는 게 뻔했다. 굳이 티 안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고 엘리후는 그 꽃다발을 받았다. 직접 물들인 거야. 굳이 네일은 그리 덧붙였다.


"고마워."


작게 답한 후, 엘리후는 네일의 콧등에 살짝 입을 맞춰주었다. 반사적으로 네일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어서와. 하는 부드러운 목소리. 네일 또한 작게 웃으며 엘리후를 꼭 끌어안았다.


"다녀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