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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불시로 부름을 받는 것이야 흔히 있었던 일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저택의 이 문이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물론 익숙한 것과 편한 것은 조금 다르기 마련이라. 네일은 문을 두드리기 전 낮게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클라이스는 네일에게 있어서 몸도 마음도 불편하게 만드는 장소였고, 그래서 졸업 하자마자 따로 집을 얻어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물론 불편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이유 때문에 나왔겠지만. 딱 최소한의 교류만을 주고받고 있는 관계. 그러니 집안사람들에게 이리 불려와 나누는 대화가 네일에게 달갑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도, 대화의 소재마저도 말이다. 손가락으로 문만 톡톡 건드리던 네일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저, 들어가도 될까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지는 건 정말로 그 시간이 길기 때문일까, 아니면 체감상의 이유일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할 무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소리도 없이 천천히 열렸다. 바로 정면에서 지팡이를 내려놓고 있는 늙은 남성이 보였다. 현 클라이스의 가주이자,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 저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 그 또한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사람이다. 동시에 가장 불편한 사람이기도 했다.
순혈 가문의 가주란 다 이런 분위기일까. 17살의 가을,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처음 만났던 에디트의 가주라는 사람도 비슷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쪽은 훨씬 더 젊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겉모습을 떠나서, 저도 모르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기에. 물론 저가 만난 두 사람으로 판단하기엔 조금 섣부른 것이긴 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린 후, 요지부동으로 서있는 네일을 향해 그는 입을 열었다. 네일은 바닥에 딱 붙은 채 떨어질 생각을 않는 발을 애써 움직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 시점부터 네일은 저 문이 다시 열릴 때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 자리를 떠나고픈 마음은 둘째 치고, 연인과의 시간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세상에서 저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시간을 방해 받아버린 꼴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네일은 꽤나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불쾌함을 남에게 티내지 않는 방법이야 옛적에 터득했으니, 별 일을 만들지는 않겠지만은. 얘기 하면서 실수하면 안 돼, 하고 애 어르듯 말했던 연인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라버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실수를 한다기보다는 사고를 칠 것 같은데. 아까 그에게 했던 대답과는 조금 다른 것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일은 항상 앉곤 했던 쪽의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맞은편에 앉고, 당연히 저에게로 향해오는 시선을 네일은 제 시선을 슬쩍 내림으로써 은근슬쩍 피해버렸다.
“차라도 내오라고 시켜야겠구나.”
“할아버님이 필요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제 것까지 챙겨주시진 않아도 되고요.”
“네가 그렇다면 됐다. 나도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차라도 한 모금씩 들이키며, 찻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도 있었으나. 정말로 이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불편함을 떠나서, 엘리후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너무 기다리게 하면 삐지거나 감기에 걸려버릴지도 모르니. 삐진 거야 어떻게든 풀어주면 되지만,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건 정말 큰일이잖아. 사실상 지금 이 자리에선 전혀 상관없으나 네일 자신에게는 그 이상으로 상관있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네일은 끊임없이 이 시간이 빠르게 끝나기만을 바랐다. 이제야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이어지는 말이 없자 네일은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그제서야 말이 이어졌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생각보다 사교 모임에 잘 어울리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못 어울릴 성격은 아닌걸요. 이런 자리에 나오게 된지 꽤 되기도 했잖아요.”
“집에서는 별로 어울리지 못했지 않았느냐.”
“…그건…….”
순간 쓰고 있던 가면을 떨어트리고야 만다. 네일은 당황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직구로 말 해올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그때도 나름 숨막혀하는 걸 잘 숨기면서 지냈다고 생각했다. 불완전했나. 확실히 어린 시절의 일이긴 하지만. 네일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괜히 제 입술만 약하게 짓씹었다. 그러다가도 금방 그만둬버린다. 입술이 찢어져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저가 못 본 사이에 상처를 만들고 왔다며, 무슨 일이냐고 엘리후가 물어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다. 네일이 끝내 대답을 포기하고 다시금 시선을 피할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유쾌하게 웃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래서 불편할 수밖에 없는 거다. 마른세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나도, 다른 가족들도 알고 있단다. 네게도, 네 아버지에게도 그랬겠지.”
“…더 곤란한 이야기가 나와 버리네요. 아버지는 나름대로 노력하셨던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은 노력하지 않았다는 양. 물론 그 뜻이 안에 숨겨져 있긴 했다. 그 주제는 꺼내지 않아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다. 못 읽어낼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그 집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던가, 편하게 있으려고 한다던가, 구성원들이나 집 자체에 어울린다던가. 그런 노력을 일절 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졸업 직후 나오려고 했으니까. 그 집은 저가 사용했던 방 안에 있을 때마저 숨이 막히게 하는 곳이었다.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며 방을 비워뒀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본가에 머물러야 할 때마다 그 방을 쓰긴 했지만. 평생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저가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이상으로 이곳을 불편하게 느낄 사람이 있었고, 저 또한 그를 별로 이곳에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다. 오늘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절대로. 지금이야 제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적인 일이지만, 만약 본가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둘이서 보내온 시간의 반 이상은 함께하지 못했을 터다. 별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상상만으로도 아득해지는 느낌이라서.
“그래, 네 가족 이야기는 우리 둘 모두에게 별로 좋은 소재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마.”
진즉에 그래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 분 일 초마저 아깝게 느껴지는 상황이라, 네일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릴 뻔 했다. 인내심은 좋은 편이라 참 다행이다. 살짝 내려간 안경을 바로 올리며 네일은 제 할아버지를 똑바로 마주봤다. 아무리 깍듯이 대해야 하는 사람이고, 예의를 차려서 대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정도의 불쾌함을 표출하는 정도는 허용됐다. 물론 네일에게 있어서는 깍듯함도, 예의도 사실은 별로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의지에 반하는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뒤엎고 나올 자신이 있었다. 클라이스는 가족에 대한 일말의 미련과, 이곳에서 저를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류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라.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네가 이런 모임에 나오게 된지 정말 오래 지나긴 했지. 어때,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있느냐?”
─그렇게 불편한 화제가 나오고야 만다. 네일은 이번엔 결국 참아내지 못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마저도 상대가 눈치 채지 못 할 정도로 빠르게 인상을 펴긴 했지만. 네일은 속으로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언젠가 한 번 쯤 분명히 저에게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지금일 줄이야. 물론 이 이야기가 언제 나오든 지금과 같은 기분일 것은 변함이 없을 테지만. 네일은 흘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연인의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뭐라고 답하는 게 좋을까, 엘리. 여기서 더 깊게 이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문득 머리를 들이미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네일은 겨우겨우 표정을 풀었다. 절로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글쎄요… 딱히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서요.”
“그런 것 치고는 꽤 자주 얘기를 나누는 여성분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데.”
“사람이라도 붙여두셨나 보죠?”
“하하, 너무 날 세우지는 말고.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네 친척들이 말해주었을 뿐이다.”
절로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남이 보기엔 친밀해보이나? 오늘 엘리후가 질투심을 보였던 건 단순히 저가 그걸 유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안 그래도 사이가 가까워보였나. 참 이상한 일이다. 미소를 억지로 걸치고, 불필요할 정도로 격식을 잔뜩 차린 말투와 태도로 일관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나. 자주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러한 이유로 불편하면 불편했지, 절대로 편한 사이는 아니었다. “날을 세운 건 어떤 의미라고 받아들여야 하느냐?” 그 말에 잠시 단어 선택을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네일은 작게 혀를 찬 후 입을 열었다.
“그분이랑은 딱히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단 한 번도 없고요. 그냥 어쩌다보니 이런 자리에서 자주 뵐뿐이에요.”
“그렇다면 차라리 잘 되었구나. 내가 봐 둔 사람들이 몇 있다.”
그 정도의 여성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지요. 그렇게 말 할 뻔 한 것을 꾹 참고 네일은 슬쩍 시선을 내렸다. 이럴 때면 역시 확 밝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디까지나 생각으로만 끝날 뿐이었다. 아직은 시기적으로도 부적절했고, 상황적으로도 서로를 난감하게 만들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둘러대는 것이야 굳이 밝히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저 혼자 난감해지는 것쯤이야 네일은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어디까지가 해도 되는 선이고, 해서는 안 되는 선인지. 슬슬 화가 나는 이유에 대해서. 비밀이긴 하지만 저에게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는 연인이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강요받는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불쾌했고, 그렇다면 이 불쾌함을 어느 정도는 표출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켜야할 선은 과연 어디에 그어져 있는가. 그 선을 넘는 것으로 제게 돌아올 여파는 어느 정도고, 그에게 돌아갈 여파는 어느 정도인가. 그 단시간에 머리를 굴리는 것은 꽤나 골이 아픈 일이었으나, 이내 네일은 단어 선택까지 모두 끝마치고 입을 열었다.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이 일에 대해서 감수해야 하는 것이 오로지 저 혼자뿐이라면. 그렇다면 얼마든지. 네일은 일부러 빙긋 웃으며 이 상황에선 무겁게만 느껴지는 말을 아주 가볍게 내뱉었다. 눈앞의 남자가 얼굴을 굳히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 그마저도 제법 유쾌하게 느껴졌다. 그걸 떠나서 말해버렸다는 속시원함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는 굉장히 불쾌하네요. 관심 없는 이유, 이해 하셨죠. 불쾌한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일.”
“이 참에 다 말해두도록 할게요. 이런 자리도 솔직히 불편합니다. 여러 방식으로 챙김 받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참견하지 않아주셨으면 해요.”
이렇게 말해봤자 제 뒤의 성이 떼어질 리는 없다는 것을 네일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떼어낼 생각도 없었고. 저가 쓸 만 한 패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건 어느 면에선 굉장히 슬픈 일이었으나, 동시에 유용했다. 저의 입장과 위치를 알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얼마나의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 이런 자리에서 배워온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원하지 않아도 익힐 수밖에 없었다. 불편한 대화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도. 지금 뱉어낸 말은 상당한 강수였으나, 멀리 내다보면 일찍 해두는 게 훨씬 나은 말이었다.
“보내주시던 돈도 이제 안 보내주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이제 제 앞가림 제가 하면서 살아야 하니까요.”
“…아니다. 너도 엄연히 클라이스의 아이잖니. 그리 많이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의 잡다한 부분들을 도와주는 것에 대한 보수라고 생각해라.”
이것이 저를 위해 보이는 순수한 호의가 아님을 네일은 알고 있었다. 네일 클라이스. 살아남은 아이. 영웅과 똑같은 호칭을 지닌 소년으로서, 두 번이나 살아남았다는 것은 꽤나 이슈가 될 만한 일이었다. 그러니 저는, 일종의 장식물 취급인 것이다. 집안에서는. 실제로 한동안 마법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클라이스는 저의 존재로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거추장스러운 타이틀은 둘째치고서라도, 마법부에서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교수님들도, 심지어 교장선생님마저 저를 탐냈다. 마법부에서는 원하는 부서의 자리를 주겠다, 교수님들은 저마다 친인척들이 운영하는 가게나 단체의 임원으로 삼아주겠다 등등. 교장선생님은 당연하게도 호그와트 교수직을 권해주었다. 물론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있는지라 모든 것에 거절 의사를 표하고 졸업한 모교였다. 비단 호그와트에서의 성적뿐만이 아니라 타이틀 때문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그 타이틀에 대해서는 좋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결론을 못 내리겠으나. 썩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그저, 아마 평생을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을 뿐.
“클라이스를 버리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아직은요.”
네일은 옅게 짓고 있던 미소를 지워버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버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읽힐 말이었기에 그 말은 삼켜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그와 관련된 물음이 되돌아왔다.
“버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이로구나. 굳이 지금 남겨두는 이유는 무엇이지?”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기 위해서요.”
“그건 너를 위해서인가?”
이건 꽤 어려운 질문이었다. 바로 답 할 수 없는 이유는, 글쎄. 네일 또한 제대로 알지 못해서였다. 깍지 껴잡은 제 두 손을 가볍게 풀고, 네일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저를 위한 것과 그를 위한 것의 선은 어느 정도인가. 그를 위한 것이 동시에 저를 위한 것이며, 저를 위한 것이 동시에 그를 위한 것이 아닌지. 이렇게 묶여버린 세월도 꽤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그렇게 묶인 게 불편하냐 묻는다면, 불편할 리가 없다고 바로 답할 수 있었다. 이이상의 행복은 없을 텐데. 조금 더 생각을 이어나가던 네일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답을 뱉어냈다. 지금 하는 말이 정답일지는 잘 모르겠으나.
“…물론 저를 위해서 일거예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뒷감당은 할 자신이 있겠고.”
“하지 않았다면 말하지 않았겠죠.”
“그래, 알았다.”
예상 외로 쉽게 떨어지는 대답에 네일은 조금 얼떨떨해졌으나, 그냥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더 할 말은 없을 것이기에 네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인을 더 기다리게 하기도 뭣하고.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린 뒤였기에. 정말로 감기에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사소한 걱정을 하며 네일은 짧게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는 말을 남기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럼 숨통이 트이겠지. 소중한 시간을 다시 가질 수 있겠지. 그리 생각하니 답답하고 찝찝한 마음은 조금 덜해졌다.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일은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그 녀석 말이다.”
그 말이 들리지만 않았더라면.
“……누구를 말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알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도 데려왔더구나.”
가장 불쾌한 대화 소재를 꼽으라면 이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싫었다. 껄끄럽고 불편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끔찍할 정도로 아끼고 아끼는 연인이라서, 항상 데려오는 걸 망설였다.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 또한 커서. 부러 욕심을 부리면 이렇게 후회할 일이 생기곤 한다. 그렇다고 후회하기에는 같이 보낸 시간은 즐거웠으니. 네일은 딱 문고리를 잡은 손을 이대로 돌려 문을 열고 나가버릴까, 아니면 말을 받아줄까. 꽤 오랜 시간을 대답 없이 고민했더랬다. 물론 결국 선택지는 후자뿐이었지만. 전자를 택했다간 일이 더 귀찮아질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제법 대형 사고를 친 셈인데.
“신뢰 하나는 높이 사주마. 물론 그 신뢰가 클수록 배신당했을 때의 아픔도 크겠지.”
네일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안경 뒤의 시선이 제법 싸늘했다. 눈동자는 시릴 정도로 차갑게 식어있었고. 숨기지 못해버린 건 꽤나 드문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숨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숨기지 않은 것이었다. 별로 숨기고 싶지 않은 불쾌함이었기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까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어디가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를 한참 쳐다보며 네일은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내 작게 헛웃음을 토해냈다. 묘한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눈, 그리고 표정으로 응수했다.
“참견 하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만.”
“네가 버리지 않겠다고 한 이상은 내 자유 아니겠느냐. 그리고 딱히 참견은 아니었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 조금이라도 들은 게 잘못이지. 네일은 고개를 휙 돌려버리고 그대로 손을 움직여 문고리를 돌렸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문 밖으로 나가기 전 네일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맘대로 지껄이지 마시죠.”
문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 짜증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일은 안경을 벗고 짧게 마른세수를 했다. 손을 떼어내고 난 후의 시야는 심각할 정도로 흐렸다. 그마저도 짜증을 유발하는 일이라, 네일은 괜히 거칠게 안경을 다시 쓰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 층을, 저택을 빠져나갔다. 한시도 더 붙어있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꽤 오랫동안 오지 않을 생각이다. 부르더라도 한두 번 정도는 가볍게 무시해도 되겠지. 그만한 불쾌함과 짜증을 선사해 주었으니. 모처럼의 자리라서, 조금 더 즐기다 갈까. 하고 말 할 생각이 조금은 있었는데. 그마저도 싹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참, 저가 가끔은 너무나도 바보 같은 것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네일은 픽 웃어버렸다. 정말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네. 잠깐 보았던 무표정은 저를 발견하자마자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마저도 웃음이 나와서. 네일은 한달음에 엘리후에게 다가가 무작정 그를 끌어안고 말았다. 엘리후는 잠시 눈을 크게 뜨고 그런 네일을 바라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고는 등을 두어번 토닥여주었다. 네일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편하다. 당장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갖고 있던 불쾌함과 짜증이 빠른 속도로 씻겨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엘리후는 네일의 등을 몇 번 더 쓸어주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웃으며 말을 건넸다.
“무슨 일 있었어?”
“…으응. 아니, 아무것도.”
“그럼 어쩐 일로 갑자기 어리광이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어진 말에 네일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조금 떨어져나갔다. 그나마도 금방 다시 꼬옥 끌어안아버렸지만. 잠시라도 떨어져있기 싫다는 듯이. 엘리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만가만 제 품에 부비적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만 했다.
“집에 가자, 엘리. 많이 추웠지.”
제 뺨을 감싸오는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엘리후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라면 그 뒤이어 잔기침이 몇 번 나왔다는 것 정도. 저가 그래놓고 우스운지 엘리후는 작게 키득거렸다. 네일 또한 픽 웃어버리며 작게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아주 잠깐 떨어져 있었던 것뿐인데, 마치 1년은 보지 못했다는 양. 잠깐 닿았던 입술이 금방 떨어져나가자, 엘리후는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네일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연인의 목에 감고 있던 팔을 떼어내며 네일은 고개를 기울이며 옅게 미소지어보였다.
“가면… 음. 마음대로 해도 좋아, 오늘은.”
“그 말 진심이지?”
허리를 숙여오며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네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한데. 지금 기분이 좋아 보이니 딱히 묻고 싶지는 않았다. 엘리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네일을 빤히 쳐다보다가, 똑같이 가볍게 입술에 쪽 해주고는 옷매무새를 조금 가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손을 잡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네일 또한 순순히 따라 걸음을 맞추었다.
역시 이름 뒤의 성을 버릴 날이 온다면 역시 나를 위해서 보다는 너를 위해서일 것이리라고. 제 연인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평생 알지 못할 그런 생각을 네일은 문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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