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 67 post
- [그리린] 불면의 밤1 2015.07.24
- [그리린] 위로의 방법 2015.07.16
- [갈가마귀 & B] 이름 2015.06.19
- [갈케이] 동행 2015.06.18
- [그리린] 어느 날의 담론 2015.05.31
- [갈가B] Bad End? 2015.05.24
- [갈가B] 동행 2015.04.25
- [갈가마귀 & B] 2015.04.25
- [클라레이] to. 체온님 2015.04.25
- [B & IQ] 도시, 안개, 청년과 소녀 2015.04.25
린이 아메스트리스를 떠나는 발걸음을 재촉한 이유는 간단했다. 후의 시신을 어서 묻어주고 싶기도 했고, 너무 시간을 지체해버린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찝찝한 기분을 어서 떨쳐내고 싶었다. 아메스트리스에 계속 있다가는 계속 생각날 것만 같았다. 잊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생각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평생 잊지는 못할 일이다. 그 누가 다른 이와 몸을 공유한 경험을 잊을 수 있겠냐만은, 린이 잊고 싶지 않아 하는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사자가 다시 살아돌아오지 않는 이상은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이유가. 허나 그런 일이 가능할 리는 없었다. 죽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자면 소멸하는 것을 린 본인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낀 이후이기 때문이었다. 꽤 오랜 시간동안 한 몸을 썼기에 그 느낌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싱으로 향하는 길 위, 밤이 깊어 야영을 하기 위해 사막 한 가운데에 자리를 깔았다. 편하지는 못한 잠자리에 털썩 누운 린은 머리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것을 향해 손을 뻗다가, 그대로 움켜쥘듯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드가 처음으로 세계의 왕을 운운했던 날에도 저렇게 달이 빛났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유치한 말을 지껄이던 그리드가 있었고, 비웃으면서도 묘하게 동조해주었던 린이 함께 있었다. 지금은 그리드가 제멋대로 사라져버렸지만은. 후련해야하는게 정상인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제 몸을 차지해버린 기분나쁜 녀석에서 단순하게는 표현할 수 없는, 조금 다른 존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폭풍같은 사건이 모두 지나가고 여유가 생긴 지금, 린은 그것에 대해서 종종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어차피 이제는 부질 없는 고민이라는 결론에 닿아 고개를 저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 답은 얻었으나, 반박하고 싶은 마음에 부질 없다 하면서도 계속 고민을 반복했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기생체와 숙주의 관계였다. 의사소통이 가능했을 뿐. 그리고 기생체라는 것이 생각보다 숙주의 간섭에 대해 개방적이었고, 그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는 차이점이 끝이었을 것이다. 동료다 친구다 포장해봤자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애초에 린이 원해서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리드는 묘하게 린에게 관대하게 굴었다. 부하랍시고 에드나 키메라들을 낮잡아봤던 것에 비해, 린만은 동등한 위치로 취급해주었으니까. 물론 린이 잘못 느낀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대장부하 소리는 애초부터 농담으로 시작했기도 했고. 물론 이후 그리드가 꽤나 자주 대장과 부하를 운운했던 것을 보자면 진지했을 수도 있겠지만서도.
사실은 소유물 취급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애초에 그리드는 친구도 동료도 부하도 일단 '내'를 앞에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다. 탐욕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소유욕이었다. 탐욕 하나만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가질 수 있는 정말로 티 하나 없이 순수한 소유욕.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정신이 말짱한 채로 눈만 감고 있던 린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크세르크세스 유적이 근처에 있었다. 다녀오면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지 못한다면 내일 여정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잡생각은 그만하고 싶다는 이유가 더 컸다. 린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고 있는 란팡을 흘끔 쳐다보았다. 피곤할 것이다. 굳이 깨우고 싶진 않았기에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바삭, 바삭 하고 신발 너머로 모래가 밟히는 느낌은 그리 나쁘진 않았다. 산책을 하기에는 딱 좋은 조건이었다. 바람에 모래가 날리는 것만 뺀다면. 린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멸망한 왕국의 유적은 린이 더 편한 길로 아메스트리스에 올 수 있었음에도 굳이 험한 사막길을 택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허나 막상 아메스트리스에 가는 도중 잠시 멈춰 둘러봤을 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어느날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멸망했음에도 이정도의 유적이 남아있구나, 하는 감탄이 끝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편하게 가지 그랬냐며 후가 핀잔을 주었을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그 말에 린은 그럴 걸 그랬나, 하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고.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감회가 새로웠다. 크세르크세스 멸망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돌무더기를 지나치고, 린은 거대한 벽화 앞에 멈추어섰다. 예전에 글러트니의 뱃속에서 에드가 꼼꼼하게 해석을 해 준 적이 있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것이 한 왕국을 집어삼킨 국토연성을 뜻한다는 것밖에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아메스트리스에서 다시금 벌어진 일을 막지 못했더라면, 여파는 싱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만약 그런 스케일의 일이 싱에 영향을 준다면, 눈앞에서 모든 걸 보고 경험한 지금의 린으로서는 도무지 막을 자신이 없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 관련 없는 외국의 일에 간섭한 것에 대해 린은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신하를 잃는 크나큰 실수를 하긴 했으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배운 것도 많았다. 소중한 동료들도 만났다. 그리고, 그리드.
후회하지 않는다.
욕망은 그리드에게서 옮은 것이 아니었다. 린이 인간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드를 받아들이면서 증폭되어버렸다고 한다면 조금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리드의 욕망과는 질 자체가 달랐다. 그리드가 있어야만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다니.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불로불사를 위해 싱에 가져가야 하는 현자의 돌이라면 굳이 호문클루스가 아니더라도 이미 존재했다. 그저 그리드를 계속 갖고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드가 린에게 가졌던 것과는 다르게 자신이 그리드에게 가졌던 것은 그저 질낮고 묘하게 진득거리는 욕망일 뿐이었다고, 린 본인이 그렇게 여겼다. 반박하고 싶은 답이었으며 너무 늦게 자각해버린 마음이었다. 물론 진작 알았더라도 본인에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될 걸 알았더라면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랬더라면, 의 이야기다.
잘못된 방향을 옳게 틀어준 건 그리드였다. 어린 마음에 부린 욕심을 자신이 사라짐으로써 꺾어주었다. 욕심을 부릴래도 부릴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자신의 의사는 무시해도 되냐며 억울하긴 했지만 따지고보면 그리드는 맞는 일을 해주었다. 그 몸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좋은 꼴만 보지는 못했을 테니까. 부리지 말아야 할 욕심임을, 감정만 앞선 린과는 다르게 그리드는 간파하고 있었다. 허나 린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라는 놈이 상당히 저급하고 꿈틀거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까.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올 정도로. 그것만은 모른 채로 사라진 것이었으면 한다. 끝까지 애송이 취급을 받았기에 감정적인 약점까지 잡히고 싶진 않았다.
…이젠 없는 녀석에 대해 무슨 자존심을 세우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으, 춥다."
린은 찬 바람에 노출된 팔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밤이 깊어갈수록 공기는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겉옷을 입고 오는 거였는데.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시점이다. 벽화 위에 손을 댄 린은 쌓여있는 먼지를 털어냈다. 잠자리를 박차고 나오더라도 잡생각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이럴거면 귀중한 수면시간을 맨땅에 버리는 것 보다야 잠이 안 오더라도 눈 꼭 감고 누워있는 편이 나았다. 언젠간 잘 수 있겠지, 하면서. 잠자리가 불편해서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굳이 또 불편하고 고된 사막길을 택해 온 이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지. 사실은 계속계속 생각하고 싶어서, 빠르게 돌아서는 척하며 이후의 과정에서 되려 질질 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린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속을 어지럽게 하는 생각들 중 어느게 거짓이고 어느게 진실일까. 이제는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어져버렸다.
린은 뒤돌았다. 돌아가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란팡이 걱정할지도 모른다. 생각을 정리하러 온 산책은 오히려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만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기억 저 너머에 묻히게 될 것이다. 그때만을 기다리는 게 방법인 듯 싶다. 어린 아이의 열병이 지나가듯이, 어느 순간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그래도 일단 지금으로서는,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뒤돌아 걷기 시작한 린은 몇 걸음 가지 않아 우뚝 멈춰섰다. 바로 뒤, 아까까지만 해도 바라보고 있던 곳에서 인기척이 났다. 분명히 방금 전까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잡생각들 때문에 그랬다기에는 린이 가진 본능은 그렇게 물러터지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의 기척을 완벽하게 숨길 줄 아는 자다.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처음으로 생각난 건 싱에서 온 암살자, 두번째로 생각난 건 자신을 찾으러 온 란팡. 하지만 후자였다면 이렇게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어라 말을 시켰겠지. 그렇다면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몸만 달랑 나온 것이라 검조차 지니고 있지 않은지라 대치하기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뒤돌아볼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자리를 뜰까. 린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상대는 천천히 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손목이 잡히려는 순간 린은 재빨리 돌아보았다. 암살이라면 어느 쪽의 소행인지 확실히 봐두어야했다. 돌아 본 그 자리에는,
"너무한 거 아냐?"
린은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상대는 갑자기 린이 살기를 띄우며 돌아보자 제법 당황한 듯 보였다.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운을 띄운 뒤로 아무 말도 없었다. 린 또한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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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아까 전부터 웅웅, 하고 머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리드는 두어번 고개를 휘저었다. 그리고 벽에 기대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아직도 주변에 날리고 있는 화약 가루를 털어냈다. 아까 전에는 매연을 잔뜩 마시기도 했다. 간헐적으로 나오던 기침은 이것 때문이리라. 그리드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다가 아래로 미끄러져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몸에 안 좋으니 조심좀 하라고 린이 슬슬 핀잔을 줄 시점인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계속 머리가 아픈 것도 그렇고, 갑자기 덜컥 겁이 나는 것이다. 사실 언제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울부짖는 영혼들의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그리드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문제였다.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면. 린을 불러보려던 그리드는 그냥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방금 전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 자신의 힘이 부족했기에 동료를 지키지 못했던 기억. 한 번 잊어버린 적이 있었으나 다시 떠올려버린 이상, 다시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울고 있을 지도 모르지. 눈물을 흘린다는 일반적인 의미 보다는, 감정의 이야기다. 그 때의 자신도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시끄럽게 울려대고 아파오는 머리는 일종의 울음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혼자 두어야 하는게 맞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책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 이외의 일로는 1분1초도 아까운 시기다. 그리드가 경험한 상실이라는 것은 그랬다.
《그리드.》
대답 대신 그리드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린의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차분했다. 물론 좋은 의미의 차분함은 아니었다. 자괴감이 뚝뚝 방울져 마음 위에 진득하게 떨어지고, 그대로 깊은 바닷속으로 쳐박혀지는 느낌. 괜찮냐고 묻는 것은 그닥 의미 없어 보였다. 괜찮을 리가 없으니까.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뱉어내는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같은 몸을 쓴다고 느끼는 감정까지 같지는 않은데, 두 사람은 묘하게 같은 기분을 공유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특히 더 그랬다. 덕분에 그리드마저 푹 가라앉아 있었다.
동정인가, 연민인가, 동질감인가. 사실은 순수한 걱정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지쳤구나.》
"너야말로."
린은 픽, 하고 바람이 새어나가듯 웃었다. 그러게. 둘 다 너무 지쳐버렸어. 아직 하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지 못했는데. 그리드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바람 한 점조차 불지 않았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듯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그리드로서는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잘 풀리려나. 계획에 문제는 없을까. 답지 않게 그리드는 사색에 빠졌다.
그래도 린이 이름을 불러온 순간부터 머리는 울리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기침도 멈췄고. 조금은 괜찮아졌다는 뜻이겠지. 다행이라고 말할까 하다가, 이번에도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다.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은 전해질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찝찝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시간 죽이고 있어도 괜찮냐. 네 그 계획은 어쩌고?》
"자기는 계획이고 뭐고,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애초에 난 이 상태로 돌아가면 그거로 끝이니까.》
말려들지 않아도 될 남의 나라 문제에 말려들어 이 꼴이 되어버렸다. 린의 말대로, 불로불사인 호문클루스를 얻은─정확히 말하자면 하나가 되어버린─ 시점에, 그냥 돌아가버리면 그것으로 린의 목표는 달성되는 것이었다. 허나 린은 도저히 아메스트리스에서 만난 동료들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지도자라는 자를 보며 느낀 것들. 아무리 남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왕이 되어서는 안될 자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린 본인의 신념의 문제였다. 그리고 저의 계획을 운운하는 그리드.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떠나지 않은 덕에 시간은 시간대로 지체되었고, 신하마저 잃게 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리드의 탓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그리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미안하진 않다. 린의 의지가 섞여 결정한 일이기도 했고, 미안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너무 낯간지러웠다. 단지, 모든 것이 자신이 부족하고 약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여길 린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네 일만 잘 풀리면 난 걱정도 없겠다.》
"그러냐."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이정도 질질 끈다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리드는 한쪽 무릎을 세워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그 행동에 린은 제법 당황한 눈치였다. 사실 그리드조차도 자신이 왜 계속 이런 기분에 빠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단순히 감정이 동화되었다기엔 너무 시간이 길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이어이, 왜 네가 우울해하는건데?》
"…그러게나 말이다."
《니가 기운 차려야 나도 기운 차리지 않겠냐고.》
린의 일이 자신의 일인 마냥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린이 이렇게 커져버렸는지. 어떤 의미에서 커져버린 것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할 일들만 가득이었다. 동료, 라기엔 더 진득한 것 같고. 친구, 라기엔 너무 간질거리고. 그리드가 인식할 수 있는 단어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었더랬다. 린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일어나, 멍청아. 일어나서 움직여. 아무리 지금이 때가 아니더라도 일찍일찍 움직여야 탈이 안 생기지.》
그렇게 말하는 린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운이 빠져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걸 린 본인도 알고는 있었다. 몸이 하나고 사람은 둘이라면, 느끼는 것도 둘인 편이 좋을텐데. 그래야 한 쪽이 무언가의 이유로 발이 묶였을 때, 다른 쪽이 움직일 수 있으니까. 애석히도 그리드와 린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드를 책망하기에는, 린은 이것마저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이상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린은 그렇게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드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린 야오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과 린의 관계에 대해서. 말로 설명 못할 것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말로 설명하지 못할 뿐이지 머릿속으로는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좋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는 것 자체를 꺼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파왔다.
그렇다면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한참을, 사실은 그닥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정적 때문에 한참으로 느껴지는 그 시간 동안 그러고 있던 그리드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그리드는 제 손등을 쳐다보았다. 우로보로스의 문양이 있는 왼쪽 손. 원래 이 몸에는 없었던 것. 오른손으로 그것을 지워버릴 듯 문질렀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내려 문양 위에 입술을 대었다.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린은 말 대신 뭔데 이건,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위로."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나 느낌이 속에 있는 린에게는 전해지지 않듯, 이것 또한 전해지지 않아야 하는 게 맞을텐데. 린은 제 왼쪽 손등에서 따뜻한 촉감을 느껴버렸다. 그리드와는 달리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던 린은 대꾸 없이 그리드와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입맞춘다.
그리드는 린까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유는? 그리드는 자신의 감정이 말하고 있는 것들을 깡그리 모르겠다 취급하기로 하고, 그저 위로를 해주고 싶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드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걷기 시작했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애써 무시하며.
//
표면상의 서열은 그리드>린(사실은 =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이더라도 감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그리드<린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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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종종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을 꾸었다. B는 그 낯선 모습에 매번 심히 당황스러워했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의 악몽에 대해 B는 아무런 책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룻밤이 흐르고, 며칠, 몇 달이 흐르면서 B는 그가 악몽을 꾸는 날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른 수건을 가져와 식은땀을 닦아주고, 고열에 시달리기라도 한다면 이마 위에 얼음 주머니를 올려 주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밤이 지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시선으로 B를 보았다. B는 그러려니 했다. B가 심성이 착하거나, 참을성이 많거나 하는 보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B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런 밤이 반복될 때마다 그는 이름을 불렀으니까. 과거의 이름들. 사실 B 또한 그런 그의 곁에 있을 때마다 평소의 그처럼, 싸늘하고 식어있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 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가식을 떨듯 그를 챙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B는 그를 대하는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그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걸 알았다. 까마귀가 모르는 것들 또한 알았다.
최강의 군단, [갈가마귀&B] 이름
S.
갈가마귀는 그 이니셜을 참으로 싫어했다. 간혹 헤이디어즈와 있을 때 띠는 미소를 제외하면 표정 변화가 없는 그가, 그 이니셜만 들으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를 S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은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인드도, 피오나도 그랬다. 그건 그녀들이 배려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니셜 능력자. 그저 그렇게 불러야 하니 그렇게 부르는 것뿐이었다. 갈가마귀 또한 그런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녀들에게 화를 내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감정을 억눌렀다. 그건 열한 번째 그룹의, 헤드헌터 오베론을 제3세계로 돌려보냈다는, 아름답지만 감정이 없는 머신건의 그녀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화를 느꼈다. 짜증을 느꼈다. 즐거움을 느꼈고, 애틋함도 느꼈다. 그림자에 먹히지 않기 위해.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런 감정들에서 눈을 돌릴 뿐이었다. B는 그런 그를 딱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점은 다른 의미에서 갈가마귀와 B의 공통점을 만들어 주었다. B는 살을 태우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아직은 살고 싶었다. 갈가마귀 또한 아직은 살고 싶었다.
B 또한 처음 갈가마귀를 S라고 불렀다. 그건 브린디쉬에서는 당연한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인드와 피오나와는 다르게 B는 그의 감정 변화를 주시했다. 애초에 슈퍼 빌런이었던 B는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 무어라 불러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던 B는,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요?"
"?"
그에게 묻기로 했다. 백넘버 198, 선수가 된 B의 곁에는 그를 거둔 비광이나 함께 다니는 나그네, 또는 다른 프리랜서 동료들 등 사람이 많아졌지만, 종종 B는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그는 그 외로움을 갈가마귀를 찾아 풀었다. 물론 그 외로움은 옛 동료, IQ나 마인드를 찾아가서도 풀 수는 있었다. 같은 브린디쉬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그는 다른 5명처럼 제대로 된 슈퍼 빌런은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6인의 슈퍼 빌런이었다는 것. B는 그 외로움이 갈가마귀를 찾아도 풀리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았다. 그리고 또, 그는 꽤 멋있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그랬다. 말도, 몸짓도, 품행도. 오래전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한 소년은 뜻밖에 B의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건 바로 어른에 대한 동경이었다.
"호칭을 말하는 건가."
"네."
"…갈가마귀, 라고 부르면 되지 않나."
"그건 별로 이름 같지가 않잖아요. 애초에 진짜 이름도 아니고."
갈가마귀는 잠시 B가 생각보다도 더 많이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브린디쉬에 있던 시절, 여기저기에서 들은 것이야 많겠으나. 아마 본인이 궁금해서 여기저기에 물어보고 다니며 알게 된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갈가마귀는 딱히 그런 행동을 했다고 B를 책망할 마음은 없었다. 멋대로 뒤를 캐고 다닌 거긴 했지만, 한창 궁금할 게 많은 나이 아닌가. B는 아직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을 소년이었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것들, 혹은 들키지 말아야 할 것들은 자신만이 알고 있다. 자신을 제외하자면, 아주 오래전 그림자에 먹혀버린 S뿐이다. 갈가마귀는 그녀 이후로 타인에게 자신을 노출하는 일을 최대한 꺼리게 되었다. 까마귀는 그때의 일로 충격뿐만이 아니라 상처 또한 입었다. 평생 치료할 수 없을 상처를.
이제 와서 이름을 숨길 이유는 딱히 없었다. 어디까지나 아폴로의 눈을 피하고자 필사적으로 숨긴 것이었을 뿐으로, 지금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래도, 아직 이름으로 불리는 건 어색했다. S조차 갈가마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으니까. 어릴 적 부모님이 다정하게 헤르만, 하고 불러준 것 이외에는 딱히 이름을 불린 적이 없었다.
"B도 딱히 이름 같진 않은데."
그 말에 B는 잠시 갈가마귀를 삐딱하게 쳐다봤다. B도 이름을 불리지 않은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 마이너리티에선 다들 제임스라고 불러줬었는데. 그리고 그 소녀가, 페인이. 제임스, 하고. 다정하게, 때로는 불만 있는 듯이, 혹은 그 마지막처럼 처절하게. 제임스.
"제임스 리스."
B의 이름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부르질 않았을 뿐. B에게 이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 이질적이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로, 그저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세상에 부딪히며 살아온 소년 같은 느낌. 게다가 브린디쉬의 이니셜 능력자란 자고로 저의 이름을 뒷면으로 보내고 그 이니셜만을 가진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칭호를 빼앗기지 않는 이상은. 선대 S가 그랬고, 지금 S인 자신이 그러했으니 B 또한 그럴 것이다.
제 이름을 읊어준 B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불렸던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임스라고 불러요."
"B."
"…마음대로 하던지."
제멋대로다. 딱히 이름으로 불리길 원한 건 아니기에 별 상관은 없었으나. 사실 은연중에는 그닥 제 이름을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 날 들었던 페인의 그 목소리를 잊고 싶지 않아서. 그 위에 덧씌워질 것들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환청이어도 괜찮았다. 페인의 마지막 목소리였으니까. 그것도 어느 때보다 더 애절하게 제 이름을 불러줬으니까. 처음으로 생긴 소중한 사람이었다. 품었던 감정과는 별개로 평생 마음 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과거를 이겨내기 위해,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갑작스레 사뭇 달라진 B의 분위기에 갈가마귀는 슬쩍 눈을 크게 뜨고 흘끔 B를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과 B는 비슷한 부류라고 갈가마귀는 생각하고 있었다. 살아온 구조라고 해야 할까. 남들과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태어났으나,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갈가마귀는 사실 어렸을 적의 자신을 B에 빗대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왕이면 이 아이는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매일매일을 죽음과 싸우며 살아가는 자신보다는 더 순탄하게 살아갔으면 한다.
"헤르만 디히터."
툭 내뱉듯이 중얼거린다. B는 그 가면 너머로 눈을 크게 뜬다. 그가 말한 것은 아마도 갈가마귀의 본명이리라. B는 한두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갈가마귀가 제 이름을 말했던 그 어조를 따라 하듯 중얼거렸다.
"갈가마귀."
역시 이렇게 부르는 게 편해요. B는 작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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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가 pve 업데이트 되기도 전에 쓰기 시작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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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왜 같이 다녀요?"
케이가 묻는다. 물음의 대상은 온몸을 새까만 색으로 휘감고 있는 남자다. 고요함을 가르고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마른 빵을 갈라, 조금 더 큰 쪽을 케이에게 건넸다. 그 반응이 케이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팔을 뻗어 빵을 받고 한 조각 베어 물었다. 불만은 허기를 이기지 못한다. 물론 그 불만이라는 놈은 질기고도 질겨, 그렇게 굴복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텁텁한 질감의 빵을 씹으면 씹을수록 대답 없는 그에 대한 케이의 불만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케이가 그에게 던진 물음은 아주 옛날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언제부터였던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음에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떨어져 버린, 이 여정의 시작부터 이어져 왔을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에게 케이는 짐이었다. 생활력이나 적응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시간만 되면 투덜거리며, 게다가 모종의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원인으로 그에 대한 태도가 마냥 바르지만은 않았다. 케이가 잠든 사이에 두고 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케이는 그가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케이가 봤을 때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좋은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일하던 서점의 사장이 은밀하게 움직여 약을 훔치던 것을 발견한 그 날. 케이는 어느 정도 그가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도둑질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아닐 거라고 끊임없이 부정했고, 그래서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도왔다. 이후의 일이다. 그는 케이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는, 약을 구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훔친 약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 모습까지 목격한 케이의 기분은 어쩐지 미묘하게 요동쳤더랬다.
함께 다니지 않는 편이 그에게는 편하리라.
케이는 그의 능력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능력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다는 것쯤은 파악할 수 있었다. 만약에 위험해 처해서 그가 능력을 사용해야 할 때가 온다면, 케이는 걸림돌이었다. 전투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분명히 그는 케이를 지키려 들 것이다. 그런데도 꾸준히 그가 자신을 챙겨 다니는 이유를 케이는 알 수가 없었다. 자고 있는 사이 두고 가도 될 것을.
사실 케이는 매번 잠들기 전, 깨어난 직후를 상상하곤 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가버린 갈가마귀. 그리고 홀로 남은 자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케이는 그런 의문이 들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죽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의 편안함을 바라는 것인가. 자신의 희생으로 그가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인가. 자신은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면, 그가 자신의 무언가라도 되는지─
……부질없는 자문자답이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무슨 뜻이에요?"
갈가마귀가 하는 말 중에서는 케이가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너무 많다. 케이는 성경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서점에서 일할 때, 갈가마귀가 그리도 열심히 읽는 모습을 보며 저게 뭐 그리 재밌을까. 하고 눈길을 둔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도저히 흥미를 붙일 수가 없었고, 무턱대고 사버린 성경책은 케이의 방 한구석에 대충 버려지게 되었다.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돌아간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케이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갈가마귀가 성경에 집착하는 이유를 케이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몰랐다면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알게 된 이후에 듣고 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며, 모든 것들 참았던 이유. 그저 죽고 싶지 않아서.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동시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케이는 그나이대 여자아이들과 비슷하게 살고 싶어 하면서도 죽고 싶어 하기도 했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뜻이지."
"기적을 바랄 정도로 나랑 같이 있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거네요."
어쩐지, 기가 죽어버린다. 케이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지금까지 계속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갈가마귀가 그제야 케이에게 흘끗 시선을 두었다. 그와 동시에 케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제 손만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그렇다면 버리라는 말이 하고 싶다. 그렇다고 혼자 남겨지기도 싫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케이조차 케이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갈가마귀는 이 예민한 사춘기 시기의 소녀에게 최대한 잘 해주려 노력하고 있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뒤늦게 저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갈가마귀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이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으리라. 허나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그런 말을 해주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지. 아직 세상을 많이 경험해보지 않은 소녀에게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그대로 둘의 분위기는 어색해져 버렸다. 단둘인 상황에서 불화 다음으로 안 좋은 상황이 바로 이런 어색함이다. 갈가마귀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처음 갈가마귀와 S가 만났을 때, 둘은 상상 이상으로 어색했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그 시간이 끝나고, 친밀함이 쌓여갈 무렵 어색함이라는 것에 대해 S에게 배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최대한 없어야 할 것이라고. 어쨌든 동행해야 하는데, 계속 이렇게 있어 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케이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을 갈가마귀는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러다가 겨우 찾아낸 결론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갈가마귀는 저가 깨작거리며 먹고 있던 반쪽짜리 빵을 또 한 번 잘랐다. 저가 입을 대지 않은 부분으로. 그리고 그것을 케이에게 내밀었다. 뜬금없이 빵 쪼가리가 눈앞에 보이자 케이는 고개를 쳐들었다. 무슨 뜻이냐는 눈이다.
"더 먹어둬. 그래야 편하게 움직이지."
"오빠는요?"
호칭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그냥 예전처럼 사장님이라고 불러줬으면 차라리 더 나으련만. 하기야, 지금은 서점 사장도 아르바이트생도 아니니 그렇게 부르는 것도 웃긴 노릇이다.
"나는 됐어."
갈가마귀가 신경 써주었다. 케이는 내심 기뻐졌다. 빵 반 쪼가리를 다 먹었는데도 허기가 가시질 않았으니, 자그마한 걸 더 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갈가마귀가 걱정되긴 했으나 원래 잘 먹지 않던 사람이다. 정말로 괜찮으니까 줬겠지, 하고 방금 그의 말에 안심한다. 갈가마귀 또한 평소처럼 돌아온 케이의 분위기에 안심한다.
어째서 케이를 데리고 다니느냐, 에 대하여. 사실 갈가마귀도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다. 분명히 언젠가는 발목을 잡힐 것이다. 은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민한 사람은 알아차릴 수 있고, 이곳을 돌아다니며 본 동물들은 더 쉽게 은신한 케이를 발견할 것이다. 자신이 위험해 처한 케이를 모른 체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은 케이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일찍 떨어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케이가 가지고 있는 저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역시 그럴 수는 없었다.
책임감인가. 괜히 같이 그림자에 말려들게 해 평범하게 살고 있던 어린 소녀를 이런 끔찍한 공간에 떨어뜨려 버린 것에 대한. 그런, 죄책감인가. 따지고 보면 원인 제공은 케이가 하지 않았나. 물론 그렇다고 케이를 탓할 수는 없는 사건이었지만. 너무 복잡한 문제다. 오래 생각해봤자 좋을 것이 없을 것 같다.
…혹은, 다른 감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하지만 갈가마귀가 감정에 대해 따지는 것이야말로 제일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갈가마귀는 감정이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느끼기는 느끼지만 남보다 미미하고, 억지로 느끼지 않으려 노력한다. 또한, 머리로는 이 감정이라는 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그렇게 어릴 적부터 감정을 제어하도록 교육받아왔으니 어쩔 수가 없다. 한 감정과 다른 감정을 헷갈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이것에 대한 고민은 그만두자. 살아남는 것, 자신뿐만 아니라 케이와 함께 살아 이곳에서 나가는 것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슬슬 움직이자."
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가 붙고 찢어져 엉망이 된 옷을 탈탈 털고, 갈가마귀를 쳐다봤다. "어디로 갈 거예요?" 갈가마귀는 그대로 동쪽을 바라본다.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르니 행선지를 제대로 정할 수 있을 리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갈가마귀 또한 천천히 일어났다.
"가자, 케이."
그리고 느릿한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케이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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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바람이 쐬고 싶을 뿐이었다. 숨죽이며 아메스트리스 곳곳을 쏘다니기 시작한게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니, 슬슬 답답해지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고 숨막히는 여정을 해온것만은 아니었으나. …사실 답답하다는 표현보다는 그냥 혼자만의 시간을 잠시 갖고 싶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건방진 국가 연금술사 꼬맹이와 두 키메라를 놓아두고, 완벽하게 혼자인 시간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리드는 홀로 거리를 노다니고 있는 지금이 갑작스레 만족스러워졌다. 물론, 이 만족스러움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내부에서 울리는 건지 귓가에서 울리는 건지 아직도 통 모르겠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갈건데?》
처음에는 존재 자체가 달갑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익숙해졌으며 슬슬 어느정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정말로 최악이었다. 조금만 닥치고 있지. 방금 전까진 기분 참 좋았는데. 확 망쳐버린 기분에 속으로 린을 원망해봤으나, 린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다. 이 녀석이 있는 한은 평생토록 혼자는 되지 못하리라. 고독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긴 했으나, 가끔은 이런식으로 기분 전환이 필요한 법인데. 이렇게 된 제 신세를 한탄하며 그리드는 기분을 망친 복수 대신 린의 말을 잘근잘근 씹어주었다. 남이 보기엔 유치하다 말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어차피 둘의 대화를 남이 들을 방법은 존재하지도 않으니, 남이 볼 때 어떻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게다가 기분도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그리드가 대답이 없자 린은 하릴없이 사방 팔방이 기분 나쁜 배경의 정면만 바라보았다. 시각을 공유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까지 전부 공유하고 있진 않았다. 어느정도 기억에 간섭할 수 있다는 건 예전, 그리드가 동료를 기억해내지 못하고 죽였을 땨 확인하긴 했으나. 애초에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한 몸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몸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그리드가 그것을 알게 모르게 존중해주고 있으니 린 또한 그러고 싶었다. 그런고로, 린이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단 하나만은 확단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리드의 기분이 상당히 별로라는 것.
행선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쯤은 진즉 눈치챘다. 발걸음은 느릿하고, 종종 멈춰서 흥미를 끄는 것에 잠깐 시선을 두기도 하는 행동들을 보면 확실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가. 파악하기 쉽다고 생각한 순간 언제나 뜻밖의 모습을 보여왔던 그리드였다. 행선지가 필요 없는 여정이라 하더라도 어느정도 정해는 두어야 돌아올 때도 편할텐데. 걱정이 섞여 다시 한 번 말을 븥일까 했으나, 결국 그냥 그만두었다.
변두리의 자그마한 마을은 오늘이 장날이었던 모양이다. 거리가 사람으로 붐볐다. 그리드는 점점 더 그 속으로 섞여들어갔다. 아무리 호문클루스라 하더라도 지금은 그냥 평범한, 길 가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모난 것도,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묵묵히 지켜만 보던 린은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아무리 저의 몸을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그냥 평범하게 살아오 별 문제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여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그래서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뒤늦게 앗차, 했지만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심기를 더 거스르고 싶진 않아서 아무 말 하지 않으려고 꾹꾹 참고 있었는데. 하지만 의외로 그리드의 표정은 덤덤했다. 아까처럼 기분이 상한 것 같지도 않았다. 도통 파악할 수가 없어서 린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심심해서, 다른 이유로는 걱정이 되어서 말을 붙였더니 살포시 무시하고 나 기분 나쁘다, 는 티를 풀풀 내지 않나. 그래서 조용히 있다가 자칫 예민할지도 모르는 말을 꺼냈더니 이번에는 또 그닥 상관 없다는 눈치다. 오늘처럼 알기 힘든 날은 또 처음이었다. 그래도, 같이 한 시간이 꽤 오래 되었는데. 혼만 두 개지 어쨌든 한 몸인데.
이럴거면 차라리 말을 더 시켜볼 걸. 지금까지 심심함을 꾹 참고 있었던 게 억울해져버렸다. 아니면 짜증나서 무시하긴 무시했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저도 심심해져버려서 말을 시켜오길 기다린 것일지도 모른다. 거짓말은 안한다는 게 신조인 주제에, 그리드는 은근히 솔직하지 않은 구석이 있으니 충분히 그럴만도 했다.
"…호문클루스에게는 호문클루스 나름의 긍지라는 게 있어."
《하지만 너는 딱히 그런 거에 연연하진 않잖아.》
이 녀석은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고, 린은 가볍게 그 생각을 추측해낼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거에 연연했다면 이렇게 뛰쳐나와서 인간들과 키메라랑 어울리진 않았겠지.》 뒤이은 이 말에는 긍정할 수밖에 없다. 프라이드나 라스가 운운하는 긍지와 그리드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사실 호문클루스와 인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어쨌든 베이스는 인간의 몸을 쓰고 있는 그리드의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능력과 현자의 돌을 제외한다면 인간이나 다름 없었다.
《인간이 된다면 지금처럼 귀찮게 도망 다닐 필요도 없고, 오히려 더 멋대로 살 수 있지 않나?》
일리는 있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이유에 반박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고 말았다.
"호문클루스인 편이 가질 수 있는 게 더 많지. 불로불사, 재생력, 타고난 능력. 밥도 먹지 않아도 되고 잠도 자지 않아도 돼. 에너지는 현자의 돌에서 공급받을 수 있으니, 소모량만 많어지는 것 뿐이고. 많아져봤자 평범한 인간 수명의 몇 배는 더 살겠지."
《…어디까지나 갖고 싶은 것과 가지고 싶은 것, 소유가 최선이라는 건가.》
"그래. 그게 삶의 이유니까. 돈도 원해, 여자도 원해, 이 세상의 모든 걸 원해. 질릴 정도로 듣지 않았나."
완벽한 반박이다. 이런식의 갑론을박은 자주 있는 일이었고, 서로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지금까지 계속 린이 이겼으나 이번엔 완패였다. 역시 자신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하지만, 인간이 되는 편도 나쁘지 않을텐데. 황제가 불로불사를 원해 현자의 돌을 찾아 아메스트리스까지 먼 길을 온 린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인 입장에선 호문클루스가 가지고 있는 이점이란 제대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몸의 주도권을 잡고 있을땐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멀고도 먼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어쨌든 원했기에 고통과 그리드의 혼이라는 패널티 -사실 이제 와서는 패널티라는 생각은 전혀 없으나- 를 감내해 가진 것인데.
그리드를 상대로는 처음 맛보는 패배에 뚱하니 있던 린은 문득 장난기가 들어 툭 내뱉었다.
《인간이 되면 너랑 같이 있을 수 없어서 싫다, 라는 립서비스는 죽어도 안해주네.》
"징그러운 소릴…"
실없는 대화를 이은 끝에, 어느새 군중 속에서 빠져나온 그리드는 마을 외곽의 낮은 언덕을 거의 다 오르고 있었다. 정상에는 큰 나뮤가 우뚝 서있었고, 발견하자마자 바로 정한 목적지가 바로 코앞이었다. 딱 저기까지만 가 잠시 그늘 아래서 쉬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시작은 썩 좋지만은 않았으나 어쨌든 괜찮은 산책이었다고, 맘속으로는 미리 짧디 짧은 여정의 마무리를 지어두었다. 자주 멈춰섰는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 돌아가는 길은 한순간이리라.
이름 모를 거대한 나무 아래, 풀숲에 그리드는 털썩 주저앉았다. 늘어지듯 나무에 기댔다가 금세 주르륵 아래로 내려가 누워버렸다. 깔고 누운 풀들이 엉기성기 얽혀 있어 제법 푹신푹신했다. 앉는 것보단 이쪽이 더 편안했다. 그리드는 길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무성한 나뭇잎들 틈으로 보이는 하늘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랬다. 이 하늘이, 얼마 후 약속의 날이 되면 완전히 망가져버린단 말이지…….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여기 있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 왜 고향으로 안 돌아가냐. 현자의 돌이라면 몸 안에 넘칠 정도로 많은데."
《내 몸은 네가 차지하고 있잖아?》
"틈만 나면 튀어나오는 주제에 잘도 그런 이유를 대는군."
린은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그럴 때마다 그리드는 제멋대로 튀어나오지 좀 말라며 면박을 주곤 했지만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화를 내기도 했으나 날이 갈수록 누그러졌고, 오히려 최근에는 그리 답답하면 네가 잠깐 나와 있으라며 먼저 청해오기도 했다.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은 성격에 장족의 발전이었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현자의 돌을, 불로불사를 찾는 목적은 달성한 지 오래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은 둘째치고 다음 황좌는 야오 가의 것이다. 그리드의 능력을 쓴다면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리드로서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싱으로 가는 길은 굉장히 험해. 황량한 사막길을 네 생각보다도 더 오래 지나야 하는데, 견딜 수 있겠어?》
"충분히."
농 삼아 던진 말에 그리드가 진지하게 즉답해오자 린은 오히려 당황해 말을 잃고 말았다. 어쩐지 가장 처음 했던 대화, 몸을 내놓으라는 말에 가져가라 했더니 그리드가 당황했던 그 때와 겹쳐져 당황은 어디가고 얼마 안 가 픽 웃어버렸다.
…그나저나, 내심 원하는 눈치다. 하기사 적을 막는 계획은 성공할지 실패할지 불확실하며, 혹시라도 실패한다면 배신한 호문클루스 그리드의 말로는 뻔하다. 인간인 린은 당연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인 황자를 잃은 가문은 완전히 기울테고. 그것을 알면서도 돌아가지 않는, 아니.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 그게 너무나도 컸다.
《동료가 여기에 있잖아. 내버려두고 도망칠 수는 없어.》
린은 동료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곤 했다. 심지어 신하마저도 무작정 부리는 것이 아니라 동료로 여겼다. 그리드는 잠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린의 입에서 동료라는 단어가 나올 때면 항상 이랬다.
"진짜 네놈같은 대답이군."
《그렇다면 너야말로 왜 도망치지 않아? 네가 사라진다고 틀어질 계획도 아니고, 넌 여기 있어봤자 실이 더 많지 않나.》
"…리스크를 감안하고 가질 수 있는 게 크니까."
세계의 왕, 말인가. 싱의 황제로는 차지 않는다 이거지. 어쩐지 린은 자존심이 상해버렸다. 그래도 싱은 굉장한 대국이고, 만인지상의 자리인데 그래도 그것보다 더 큰 세계의 왕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갖고 싶은 것도 많지. 그의 존재 자체가 탐욕이고, 존재의 이유가 탐욕이니 충분히 이해할 만은 햤다. 린이 린 야오 다운 대답을 했듯이 그리드 또한 그리드 다운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저와는 다르게 대답이 느렸다. 정말로 원하는 게 그거라면 바로 답했을 것이다. 어쩐지 뜨뜻미지근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원하는 건 따로 있지만 말할 수는 없으니 다른 것으로 얼버무린 듯 하다. 굳이 그리드가 린에게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린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나 있었다.
옛날의 일이 또 떠오른다. 그리드가 옛 동료를 죽였을 때의 일. 기억 나지 않는다며 죽였으면서, 끝끝내 기억해내고 울부짖었다. 그 순간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한데 이상하게 흐릿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드가 울었었나? 울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데, 운 것 같기도 했다. 길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만큼 그리드가 고통스러워했다는 뜻이다. 기억에 간섭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보다 다른 더 중요한 걸 알았다. 그리드에게 동료라는 개념은 소중하다는 것을.
……그토록 원하는 것들을, 희생할 만큼?
"어이, 린. 왜 갑자기 조용해지냐."
어디까지나 가설이었다. 그저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리드 본인은 자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체가 탐욕인 존재에게 그 탐욕을 모두 채울만한 것이 존재한다니. 본인은 절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니 린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해봤자 지금 당장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찜찜해 할테니까. 굳이 그리드를 혼란스럽게 하고싶지는 않았다.
짐짓 진지해진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린은 다시금, 평소때처럼 행동한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가볍게 말을 돌리며.
《붕대 다 풀리겠다. 뭘 그리 건드렸어?》
"불편해서."
그리 말하며 그리드는 아까부터 계속 만지작거리고있던 붕대를 아예 풀어 내던져버렸다. 왼손 손등 위의 우로보로스 문양. 린은 아직도 종종 낯설게 느껴졌다. 《에드한테 잔소리 들을텐데.》 상관 없어. 그리드는 짧게 투덜거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 여기저기에 묻은 풀을 탁탁 털어내며, 기지개를 한 번 더 켰다. 휴식 시간이 너무 길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빌어먹을 형제들이 추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배신을 한 이상, 경계는 늦추면 안된다. 그들은 단 하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있을테고, 자신은 지금 그 오차일테니까.
《돌아가려고?》
"그래."
올라갈 땐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내려가보니 은근히 경사가 가파르다. 느긋한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고, 왔던 길을 눈으로 되짚어보았다. 생각보다는 더 멀리온듯 싶다.
아직도 시장은 활발했다. 사람은 아까보다 더 많은 것 같았다. 물건을 파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숙소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세명이 떠올라 먹을 것을 대충 샀다. 사실 그들의 취향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모조리 다 린이 먹고싶어하는 것들만 사버렸다. 하지만 사지 않으면 린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한 자리 차지하고 먹어댈 것 같아 어쩔 수가 없었다. 황자라는 놈이 도대체 왜이리 먹을 거에 집착하는지, 그리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물어보기라도 해야겠다. 실없는 대답만 들을 것 같지만.
숙소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그리드가 문득 길 한가운데에 우뚝 멈춰섰다. 다 저가 먹을 것이 아님에도 먹을 생각에 신나있던 린은 그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말이지."
《응?》
그대로 미동도 않던 그리드는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를 뻥 차버렸다. 이녀석이 갑자기 왜이래? 린이 다시금 물으려는 순간,
"인간이 될 생각이 없는 이유, 정말로 네놈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에라이!"
그걸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어?! 되려 린 쪽이 더 당황해버렸다가, 머지않아 크게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아까 나오기 전, 그리드와 에드가 아웅다웅 하는 걸 봤을 때보다도 더 크게. 그리드는 괜시리 돌멩이를 하나 더 차버리고 귀를 틀어막은 채로 걸음을 빨리 했다. 《거짓말은 안 하는 게 신조잖아?》 《어라, 그러면 진심인데?》 장난 섞인 목소리로 린은 계속 그리드에게 말을 붙였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귀로 들리는 느낌이어도 속에서부터 울리는 소리라 귀를 막아도 들릴텐데. 갑자기 꺼낸 말이 저런 거라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었다. 물론 그래서 린이 그리드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계속 붙여오는 말에도 반응 없이 빠르게 걷기만 하던 그리드는 끝끝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넌 정말 끝내주게 짜증나."
《그리고 우린 끝내주게 잘 맞지.》
도무지 반박할 수가 없는 말에 그리드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숙소가 머지 않았다. 먹을 걸 펼쳐두면 린은 바로 그쪽으로 신경을 돌릴 것이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자. 속으로 참을 인 자를 몇 번이나 세겼다.
한참을 키득거리던 린은 문득 웃음을 멈추었다. 혹시 이녀석, 이미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깨닫고 있나? 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추측이고 이것 또한 추측이었으나. 잠시 눈을 꿈뻑이며 고민에 빠져들었다가, 린은 고개를 휘휘 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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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가만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들어 종종 있는 일이기에, 갈가마귀는 대꾸 없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소년이 하는 이야기는 저에 대한, 저에게 있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마음 한켠을 쓰리게 하는 이야기 뿐인 것은. 그런 생각을 잠시 하던 갈가마귀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감정들은 이미 심연 저편으로 떨궈버린 후였다. 그런 것들에 연연했다간 죽을 수도 있기에, 갈가마귀는 감정이 흔들릴 수 있는 요소들을 모두 버렸다. 연민, 동정심, 그런 것들 마저도 전부 다. 그래서 갈가마귀는 소년의 이야기를 덤덤히 들을 수 있었다. 속에서 요동치는 것들을 모두 무시하면서. 저를 흔들리게 할만한 것들은 이미 모두 다 버렸다고 위안하며. 그렇기에 소년은 망부석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고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하나하나 신경 써 줄 정도로 갈가마귀의 형편은 좋지 못했다.
감정이 흔들려 조절할 수 없게 된다면 곁의 소년마저 위험해질수도 있다. 그림자에 먹히는 것은 저 한명으로도 충분하다고, 갈가마귀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관 없는 누군가가 말려드는 일은 더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갈가마귀는 빛이 흐려져가는 십자가를 꽉 쥐었다. 재잘거리는 소년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러운 손으로.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했었어요. 사람을 죽인다던지, 물건을 훔친다던지."
소년은 하고 싶지 않은 일들, 이라고 말했으나 그것들을 나열하는 어조는 매우 차분했다. 이제는 무덤덤해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과거의 일이기에 괜찮다는 뜻일까. 소년은 한참동안 말을 잇지 않다가, 그대로 풀썩 뒤로 누워버렸다. 갈가마귀는 그런 소년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을까. 갈가마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을 과거의 행동들을 되짚고 있을까. 그런 것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갈가마귀는 애써 떨쳐내고, 저를 집어삼키려 일렁거리는 심연 너머로 그 마음을 다시금 던져버렸다. 흔들리면 안된다. 지금까지 제어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붉은 여왕의 십자가는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얼마 더 있으면 완전히 그 기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외면하고 또 외면해야 한다.
소년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편이 갈가마귀에게는 더 도움이겠으나 그렇다고 소년을 버릴 수는 없었다. 최소한 갈가마귀가 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서서히 스러져가는 소년의 말동무를 해주는 일 뿐이었으므로. 갈가마귀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으나, 그것은 소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브린디쉬의 Blade라는 칭호를 가진 소년은 큰 병을 갖고 있지 않았나. 약을 복용하지 못하고 있는 B는 그 속에서부터 자신을 차츰 좀먹어들어가고 있었다. 갈가마귀가 B의 이야기에마저 고개를 돌린다면 B는 더 빠른 속도로 죽어갈지도 모르기에. 함께인 것도 갈가마귀에게는 독이었으나 그렇다고 혼자가 된다면 더더욱 위험했다. B가 사라지고 필연적으로 찾아올 외로움이라는 놈은 가장 큰,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차가운 감각이기에.
"당연히 약이 필요했으니까 그랬죠. 당시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그래도 다 괜찮았는데, 딱 하나 못 견디는게 있었다면……."
눈을 감고 있던 B의 미간이 짐짓 찌푸려졌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텐데. 굳이 꾸역꾸역 하려는 이유는 대화의 레파토리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다른 이들과 철저히 단절되어 이렇게 단 둘이 남게 된 것도.
여러 사람이 죽었다. 예상대로 심연은 무서운 곳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힘을 가진 신들이 득시글거렸고, 아직 제 힘을 갖추지 못한 선수들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선수들 중 주력으로 꼽히던 갈가마귀와 B를 포함한 몇몇 선수들은 그 신들을 쓰러트리거나, 무력화시키거나, 주의를 끌거나 하는 식으로 겨우겨우 연명했다. 그나마도 지금은 이렇게 뿔뿔히 흩어져버린 상태다. 모두가 힘을 모아야 겨우 한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된 이상 누가 살아있을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연락 수단인 세이렌과 메두사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게 된지 한참이 지났다. 허나 남들을 걱정할 여유는 갈가마귀에게도, B에게도 없었다.
"듣고 있어요?"
갈가마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똑바로 하늘을 보며 누워있던 B의 고개가 돌려져 갈가마귀를 쳐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갈가마귀는 고개를 끄덕인다. 안 듣고 있던 거 다 알아요. B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갈가마귀는 어쩐지 미안해져버린다. "다시 이야기 해." 갈가마귀의 그 말에 B는 대꾸 대신 다시금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본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브린디쉬의 뒷골목에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가령, 어린 소년들을 겁탈한다던가 하는."
…돈은 꽤나 많이 줘요. 작게 덧붙이는 말에 갈가마귀는 속으로 혀를 찬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타박하지만 B는 고개를 젓는다. 그만큼 아팠다. 약이 필요했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들. B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갈가마귀는 소년이 딱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금방 그 생각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매번 읊던 성경 구절을 속으로 중얼거린다. 똑같은 구절만 웅얼거리게 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더이상 다른 구절들이 생각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번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가 했더니, 소년이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제일 최악인게 뭔지 알아요? 갈가마귀는 고개를 젓는다. B의 과거들은 더이상 갈가마귀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있지 않다. 온갖 세속적인 것들, 음란한 것들, 잔인한 것들은 갈가마귀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까이 하고 싶어도 가까이 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
"점차 나마저도 즐기게 된다는 게…"
"네 잘못이 아니야."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B는 눈을 크게 뜨고 갈가마귀를 쳐다본다. 그리고 푸핫, 웃음을 터뜨린다. 갈가마귀는 그것이 조금 불만이다. 나름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는데. 하기사, 너무 상투적인 위로였다. B의 잘못이 아니라면 그럼 누가 잘못인 걸까. B를 돈으로 사 그 몸을 범했던 자? 그는 정당히 돈을 지불하지 않았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던 갈가마귀는 고민을 중단한다. 별로 좋지 못한 쪽의 고민이고, 답은 아주 간단하다. 돈이 문제군. 돈이. 돈이 잘못이야.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성경 구절을 읊는다. 드디어 다른 구절이 생각났다. B에게 고마워 할 일이다. 썩 맘에 드는 말은 아니지만. B는 돈을 사랑한게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는 약이 필요했고 그 약을 구하기 위해 돈을 쫓았을 뿐.
B가 웃음을 터뜨린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갈가마귀 다운 위로였기 때문이었다. 최든들어 갈가마귀는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있었다. 본래 말 없는 자이긴 했으나, 그래도 조잘조잘 떠들다보면 걸어오는 태클이라던지가 적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좋은 조짐은 아니었다. 제어를 위해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도, 갈가마귀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B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정신이 혼미했다. 그에게 독이 될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애써 피해왔는데, 점점 그런 쪽의 이야기로 쏠리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가 잘 버텨주어야 할텐데. 이야기를 중단하기엔, 그랬다가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두번째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B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힘들죠?"
버티는 것이. 갈가마귀는 그 말에는 도저히 부정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종종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림자는 첨차 더 일렁이고, 과연 언제까지 이것을 제어할 수 있을지. 갈가마귀는 대꾸 없이 마른 침을 삼킨다.
"차라리 죽을까요? 나, 당신이랑 자면 완전히 정신을 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아마 당신도…"
"살아야지."
B는 최근 잠조차 자지 않고 있다.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다. 갈가마귀는 속삭이듯 말하며 B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었다. 한계에 치닫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말에서도, 그 어조에서도. 하지만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 했던 대화가 있지 않나. 살고싶다고. 네가 살고싶어하는 만큼 나 또한 살고 싶다고. 그러니까 끝까지 버텨보자고. 버티고 버티다보면 파편을 가진 이가 나타나 갈가마귀의 숨통을 트이게 해줄지도 모르고, 약을 가진 이가 나타나 B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지도 모르고…….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으나 처음부터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겨우 찾은 것이긴 했으나 적에게 들키지 않는 안전한 공간이 존재하긴 했다. 여기뿐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곳처럼 안전한 곳이 또 있을 것이고, 없다면 이곳을 찾기 위해 동료들이 계속 헤매고 있을 터다. 만나서, 합류한다면 둘 다 지금보다 상태는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포기할 수 없었다. B는 제 눈을 가린 갈가마귀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 아주 세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잡은 세기 만큼은 아직 살고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안해요."
B는 손의 힘을 풀었고, 갈가마귀는 손을 거두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 같기는 했으나, 희망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갈가마귀는 혀를 찼다. B가 조금만 더 버텨주었으면 한다. 저는 그래도 아직은 버틸만 한데, B는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모양이다. 애초에 B가 겪는 고통을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B는 정신을 말끔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기위해서는 며칠을 참아온 잠을 자는 방법 뿐이었다. 괜찮을까. 깨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신뿐만이 아니라 곁을 지켜주는 갈가마귀까지 좀먹을 것 같아 그것이 두려웠다. 깨어나지 못하는 것 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나, 조금만 잘게요. 어차피 아파서 오래 자진 못하니까 한두시간만 있다가 깨워줘요."
"그래."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 갈가마귀는 그것이 걱정이다. 걱정을 버리겠다 버리겠다 하고 있지만 그것은 끝끝내 버려질 것이 아니었다. B 또한 눈을 뜨지 못할까 두려웠으나. B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주변이 암전되었다. 오로지 바로 옆, 앉아있는 갈가마귀의 인기척만이 느껴졌다. 어째선지 그것에 안심이 되고 마음이 편해져 서서히 잠에 빠져든다. 꼭 일어날게요. 갈가마귀가 걱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를 안심시키듯 작게 중얼거리며. 그가 그것을 들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자신을 안심시켜주는 만큼 자신 또한 그를 안심시켜주고 싶어서.
갈가마귀는 B를 믿었다. 들었던 그의 과거들, 자신이 겪었더라면 그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과거들을 극복해내고 이자리에 있는 소년이 아닌가. 그러기에 이번에도 일어서리라. 그리고 자신을, 동료들을 가로막고 기만하는 것들을 모두 베어나가리라. 그렇게 생각하기에 잠에 빠져들고 있는 B를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적어도 자고 있을 때만은 편안하기를. 눈을 뜨면 다시금 고통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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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냄새가 짙어."
붉은색 시선이 그 목소리를 따른다. B는 인기척에 본능적으로 겨누었던 검을 거뒀다. 적이었다면 그 검은 가차없이 어깨를 꿰뚫고, 허리를 찢고, 다리를 베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적이 아니었다. 넉살 좋게 말하자면 동료,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내일의 적이다. 브린디쉬, 행잉 스퀘어 위에서 벌어지는 MFL은 다 그랬다. 저에게 핀잔스러운 말을 건네온 남자와도 어제는 서로를 보호해주고, 오늘은 살기를 주고받는 나날을 반복해왔다. 그러면서 쌓인 감정적인 문제는 이미 배제한 지 오래였다. 따지다보면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선수들 대부분이 아주 일찍 깨달았다.
"당신도 만만치 않은데요."
갈가마귀는 그 말에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곡을 찔렀으리라. B는 더이상의 말 없이 검지 손가락으로 갈가마귀의 볼을 가리켰다. 그 행동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한 갈가마귀는 손을 들어 장갑의 손등으로 볼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피가 묻은 감각에조차 익숙해 진 것일지도 모른다. 갈가마귀는 속으로, 그 피가 묻는 순간에도 읊었던 말을 중얼거린다.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살인은 죄악이다. 설령 그것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하더라도. 붉은 여왕이 준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대로 얇게 퍼져 죽어버렸겠지.
갈가마귀는 문득 시선을 내린다. 그림자가 길어진 것만 같다. 착각일 것이다. 착각이어야만 한다.
B는 잠시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노닥거릴 시간은 없을 듯 하다.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뒤로 하고, B는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그냥 놔둬도 알아서 정신 차리고 합류할 것이다. 매번 그랬으니까. 그를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그런 행동에 익숙해진 것이다.
"…하나만 물어도 되나."
B가 멈춰선다. 그리고 몸을 틀어 그를 본다. 갈가마귀의 눈동자는 여전히 땅바닥, 정확히는 자신의 그림자에 고정되어 있다. B 또한 그것을 내려다본다. 스멀스멀,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금방이라도 갈가마귀를 삼켜버릴 것처럼. 자신조차 삼켜질 것만 같다. 한참 뒤에야 갈가마귀는 고개를 들었다. 제 그림자를 쳐다보고 있는 B에게 넌지시, 하지만 그에게는 여러 의미로 중요할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진다. 그림자는 그만 봐주었으면 한다. ……다른 이까지 이 그림자에 말려들게 하는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림자를 들여다보다가 사라져버린 소녀 하나가 있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생각이 닿자 다시금 잡생각에 빠져든다. 하지만 애써 지우고, 입을 연다.
"넌 뭐때문에 사람을 죽이지?"
그 물음에 B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과거의 이유? 아니면, 현재의 이유? 그것을 되물으려다 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가장 큰 이유가 하나 있지 않나. 말해주지 못할 이유도 아니었다. B는 곧바로 전투에 돌입하기 위해 검의 길이를 늘렸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듯,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던져주었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B는 도약하듯 뛰쳐나갔다. 막 벌어진 전투의 틈에 껴, 이번에도 살아남기 위해. 살기 위해서는 약이 필요했고,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수단은 바로 이 전장 위였으니까. 갈가마귀는 미동도 없이 그런 B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B의 눈은 잠시 그런 갈가마귀 쪽으로 쏠렸다가, 저를 발견한 적에게로 다시금 고정되었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했는 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궁금증이 든다면 그때가서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최강의 군단, 갈가마귀XB [동행]
브린디쉬, 루저시티.
가면을 쓰고 있어서 생기는 장점이 있다. 첫 번째, 남에게 굴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 얼굴에 생기는 상처를 최대한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오늘처럼 추운 날 찬 바람을 쐬지 않아도 된다.
오늘 같은 날은 그 세 번째 장점이 제일 중요하게 느껴졌다. 보통 도심에 가까울수록 온도는 높아지기 마련인데, 어째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추위는 더해져만 갔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루저시티는 그리 따뜻한 도시가 아니었으므로. 아주 차디찬 공기만이 맴도는 도시였다. 기계, 그리고 온기가 진작에 식어버린 송장같은 사람들이 사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광기.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힐라리아가 주도했던 사이언슬로지. 무엇을 믿고, 무엇을 꿈꾸는지에 대해서. 브린디쉬의 밑바닥에서 살아온 사람들일수록 더 끌리기 쉬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속했던 사람이 바로 B 자신이었다. 하지만 영생을 논하는 종교라서일까,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오히려 멀리하고 싶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과 죽고 싶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하지만 살을 태우고 뼈를 깎고 심장을 조이는 고통을 가지고 영생을 누리고 싶지는 않았다.
과학이, 기계가 이 고통을 사라지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B는 동행에게로 관심을 돌린다. 갈가마귀는 평소에 하고 다니는 털목도리를 입가까지 끌어올렸다. 그만큼 날이 춥다는 뜻이다. 그는 겉으로는 하나도 티를 내고 있지 않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귀가 발갛게 변해 있었다. 차라리 대화라도 있었다면 말의 온기라도 주고받을 수 있으련만. 애석히 B도, 갈가마귀도 그다지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그저 오가는 행인도 하나 없는, 쓰레기만 바람에 날려 굴러다니는 휑한 길을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로. 낙오자들의 처지란 그러했다. 전투 도중 갈라진 그들을 기다려줄 만도 하건만, 동료들은 어디까지 갔는지 그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야속했다. 그래도 갈라졌던 그 장소까지는 어찌어찌 찾아와 한 시간 즈음이나 더 걷고 있는데. 메두사와 세이렌도 반응이 없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체할 틈이 없다는 사실 쯤은. 만신전의, 제 3세계의 문이 열렸다고 했다. 갈가마귀는 그 말에 눈에 띄게 동요했다. 모든 감정을 꾹 억누르기만 했던 그의 그런 반응은 B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그곳을 그림자 세계라고 불렀다. 그 누구도 가서도, 겪어서도 안되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의 능력이 바로 그 장소와 관련이 있다며. 겁을 주고 싶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B는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그 장소가 궁금해지고 말았다. 일렁이던 그림자. 마치 주인을 집어삼킬 듯이. B의 안에 가까스로 살아있는 소년의 호기심이란 놈은 B를 그리도 자극해댔다.
B와 갈가마귀의 눈이 마주친다. 그를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눈치 채지 못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있는데, 명백히 B의 실수였다. 황급히 눈동자를 반대쪽으로 굴려보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갈가마귀는 B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는 뜻이다. 그것을 읽어낸 B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갈가마귀가 미묘복잡한 표정으로 끄덕이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릴 즈음 문득,
"브린디쉬에 돌아온 소감이 어때요?"
갈가마귀의 신경이 다시금 B에게로 쏠렸다. 그제야 갈가마귀의 옆에서 느릿한 날개짓을 하고 있던 까마귀도 B를 쳐다봤다. 한 번에 느껴지는 두 개의 시선. 제법 부담스러워졌다. B는 갈가마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고 있는 듯도 했고, 귀찮아하는 듯도 했으며,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도 했다. 그와 갈가마귀가 가지고 있는 몇몇의 공통분모 중 하나였다. 출신, 브린디쉬. 그렇기에 루저시티에 발을 들이고, 시선 끝에 갈가마귀가 잡힐 때부터 묻고 싶었다. 마인드에게 묻기엔 그녀는 먼저 떠난지 오래였고, 아이큐는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너무 어렸다. 결국 물망에 걸린 딱 좋은 사람이 갈가마귀였다. 게다가 더더욱 그는 그림자에 먹혀 해그라이드로 떨어진 이후, 슈퍼빌런들이 장악했던 그 날의 로쏘와 행잉 스퀘어를 제외하면 단 한번도 브린디쉬에 발을 들인 적이 없다고 알고 있었다.
단순한 임기응변은 아니라는 뜻이다. B는 꾸준히 그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도 던지고 있었다.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해, 같은 주제로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었고.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언젠가 꼭 따로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는 너는?"
그리고 기다려 받은 답변이 그런 것이다. 그걸 몰라서 당신에게 물은 거였는데. B는 참 도움 안 되는 사람, 하고 속으로 그를 곱씹는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다시 돌아온 브린디쉬. 한 때 자신이 있었던 최하층. 돌아오고 싶었나, 돌아오고 싶지 않았나? 사실 브린디쉬는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탁한 공기를 마시는 순간의 헛구역질은 착각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쪽. 많은 동료들을 만들어준 선수 생활은 B를 어느정도 무르게 만든 걸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도시를, 이 대륙을 버텨내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역시,
"…잘 모르겠어요."
갈가마귀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닮아 새까만 까마귀는 언제 B를 쳐다봤냐는 듯이 올곧이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쁜 새다. 갈가마귀는 뭐가 좋다고 저것을 옆에 띄우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주인에게만은 충성하기라도 하는 건지. 예로부터 까마귀는 흉조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그 새까만 색과는 다르게 눈동자는 새빨갛게 빛났다. 어쩐지 기분 나쁜…….
…평범한 갈가마귀잖아.
"나도 거기에 대한 답변은 잘 모르겠지만."
갈가마귀가 천천히 숨을 들이 마신다. 크게, 썩을 대로 썩은 탁한 공기를. 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 공기를 마시며 삼십 년을, 십몇 년을 살았다. 다른 선수들은 처음 브린디쉬에 들어와 기침을 하고, 그게 심해져 눈물이 고이기도 했으나 둘은 전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공기가 당연하다는 듯 호흡했다. 마치 기계처럼. 그리고 브린디쉬는 점점 기계가 살기 얼맞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단순히 인간이 시킨 일만을 반복하는 드론들이 살기 좋은 공간으로. 어느 날 누군가가 보여준 영화에서 벌어지는, 기계가 인간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날이 언젠가 이 브린디쉬에 오지 않을까. B는 가만히 갈가마귀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헛생각을 하다보면 시간은 빠르게 가기 마련이다.
"…여기에 있으면 옛날 일이 자꾸 생각나. 약을 훔쳤던 일, 서점, 그리고 그 아이."
케이.
"너도 그렇지 않나?"
맞는 말이다. 슈퍼 빌런으로서 다른 네명과 함께 했던 날들이 자꾸 생각났다. 그래도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제법 친했고, 서로에게만은 유대감이라는게 있었으니까.
애초부터 답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브린디쉬는 과거를 담아놓은 공간.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필요가 없는 곳.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나니 어딘가 마음이 편해졌다. 그에게 묻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족한 B의 표정을 보고 갈가마귀는 충분했나보군, 하고 낮게 말한다. B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대화 없는 동행이 이어진다. 둘 다 애초부터 대화가 어울리는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더 대화를 이으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까마귀가 크게 까악, 운다. B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평소에는 소리없이 날아다니는 까마귀, 전투 시에는 그의 무기로 변하는 생물인지 비생물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 것이었는데. 동시에 까마귀의 울음 소리는 안좋은 징조였다. 갈가마귀가 우뚝 멈춰선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 그제서야 B 또한 주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림자 때문일까.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B보다 갈가마귀가 더 감이 빨랐다.
"검을 뽑아, B."
잠복이었다.
* * *
검이 적의 살을 찢고, 복부를 꿰뚫는다. 그때마다 갈가마귀의 미간이 작게, 혹은 크게 찌푸려졌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적들은 숨을 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슬슬 버거웠다. 핏줄기가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진득한 공기. 모조리 단 둘뿐인 B와 갈가마귀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이었다. 그럼에도 검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그랬다간 갈가마귀까지 위험해진다. 죽게 된다. 그리고, 자신 또한. 살고싶다. 이 지독한 통증 속에서도 살고싶다. 그것만 머릿속으로 되뇌이며 B는 몸을 움직였다.
이어지는 전투 속에서 문득 B는 갈가마귀를 돌아보았다. 그도 B와 마찬가지로 힘겨워보였으나. 평소때의 그와는 달랐다. 적을 베는 손놀림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그 칼날은 무자비했으며- 아니, 그것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B는 그의 표정에 주목했다. 그 입꼬리를 보았다. 흡사,
웃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갈가마귀?"
B는 나즈막히 그를 부른다. 작은 목소리긴 했지만 거의 등을 맞대고 있기에 그가 듣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갈가마귀는 조용했다. 그것이 오히려 B의 불안함을 더 증폭시켰다. 본능에 의지해 한 무리 더 다가온 적들을 베어나가며, B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갈가마귀의 그림자는 비정상적으로 길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렁거린다. 당장이라도 B의 그림자를 집어 삼켜 버릴 듯,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허나 지금은 그를 신경쓸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올라간 것 처럼 보였던 입꼬리는 그저 잘못 본 것이기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그림자는 그저 전투중의 현상이기를. 등 뒤의 동료가 언제 가장 큰 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B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림자 능력자는 그 강함 만큼이나 위험하다. 갈가마귀 전대 S의 죽음에 대해서 B 또한 들은 바가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브린디쉬 최강의 검사, B라고 하더라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그가 폭주한다면? 얼만큼의 시간을 벌 수 있을까. 다른 선수들이 눈치채고 도우러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불행 중 다행인지 적들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주변에 떼로 몰려있는 것들만 처리하면 끝일 듯 싶었다. 아마도 갈가마귀의 공이 크리라. 좋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나쁘게 받아들여야 할 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덤벼오는 적에게 검을 꽂아넣고, 거칠게 뽑는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가면과 옷을 적셨다. 찝찝하다. 씻어내고싶다.
그제서야 등 뒤의 갈가마귀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주변이 고요해지자 갈가마귀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듯 휘청거렸다가, 겨우 양 손으로 땅을 짚었다. B는 그런 갈가마귀를 건드릴수조차 없었다. 본능이 가로막았다. 아직도 일렁거리는 그림자에 먹혀버릴 지도 모른다고. 그럼, 그냥 죽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살기 위해 발버둥쳤던 모든 것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그였다. 동질감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B는 살고 싶었다.
"괜찮아요?"
역시나 대답은 없다.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B는 가면 뒤로 입술을 짓씹었다. 갈가마귀는 땅을 짚고 있는 손으로 그 땅을 쥐어 뜯듯 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확실히, 괴로워하고 있다. 어디에 앉혀 놓기라도 하는게 낫지 않을까. B는 더이상 말을 하는 것 대신 손을 내미는 것을 선택했다. "잡아요." 드디어 갈가마귀가 고개를 드는 것으로 반응했다. 눈이 마주쳤다.
"…건드리지 마. 위험해."
잔뜩 갈라진 목소리.
"그렇다고 이렇게 놓아둘 순 없잖아요."
"위험하다니까. 떨어져."
"혼자 죽기라도 하려구요?"
대답이 없는 건 긍정이기 때문일지, 아니면 더이상 말 하기 힘들어서일지. 그조차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B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그렇게나 살고 싶어했잖아. 그래서 그 날의 질문에 살기 위해서, 란 답변을 들은 순간 미묘복잡한 표정을 지었던 거 아냐.
……사실 그 또한 그 대답을 듣고, 동질감을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하나만 물을게요."
죽인다, 는 표현은 지금의 그에게는 너무 자극적일 터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싸워요?"
갈가마귀의 시선이 떨렸다. 그는 잠시동안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B는 그 눈이 말하고 있는 것을 쉽게 읽어냈다. 자신 또한 몇 번이나 저런 눈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 하고. 눈으로, 행동으로, 모든 것으로. 아주 처절하게.
"그럼 살아야죠."
B는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요동치던 갈가마귀의 그림자는 서서히 잠잠해져갔다. 하지만 아직 방심은 할 수 없었다. 피를 머금은 그림자는 언제 다시 그 입을 쩍 벌릴지 모르니까. 그럼에도 B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괜찮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살아야 한다고 외쳤던 그가 다시금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 했으니까. B는 갈가마귀를 믿었다. 그리고 갈가마귀는 B의 손을 잡았다.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긴 했지만.
B는 약간 힘겹게 그를 부축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의 전투로 조금 지치긴 했지만, 전신을 찢는 고통보다는 훨씬 나았다.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잠잠했던 세이렌에서 치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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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 설정 주의
브린디쉬에서 MFL 선수들에게 제공해주는 것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경기장도 컨셉이라고는 하지만 행잉 스퀘어의 감옥을 활용한 게 다였고, 그 인기와는 다르게 환경은 열악한 쪽에 가까웠다. 대부분이 돈을 목적으로 참가하는 것이고, 그 상금만은 확실했기에 별 상관 없이 느껴지는 것일 뿐. 그래도 경기 전날 선수들이 머물만한 숙소 정도는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때 선수들은 서로 안면을 익히기도 하고, 가볍게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컨디션 조절에도 그 편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그건 많은 선수들이 좋게 생각하는 부분이긴 했으나. 그래도 꼭 한두명 쯤은,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남과 어울리는 걸 꺼리는 사람이라거나, 남에게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이라거나.
아침을 달갑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갈가마귀는 장담할 수 있었다. 어딘가의 소녀마냥 세상의 중심은 나로 돌아간다, 뭐 그런건 아니었으나.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갈가마귀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한 몇 분 즈음 지났을 무렵에 반 쯤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침부터 경기 일정이 잡혀 있는 걸 기억 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참 꾸준히도, 이번에도 저만이 일어나 있었다. 매번 그랬다. MFL 선수들 중에 유독 늦잠 꾸러기들이 많기라도 한 건지. 진실은 알 수 없었으나. 이사람 저사람 깨우고 다니는 것도 일이었다. 순순히 일어나주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욕을 하거나 했으니까. 물론 하나하나 반응해주진 않았다. 그런 성격도 아니었고 반응 하는 게 오히려 더 피곤했다.
숙소 환경은 그래도 꽤 괜찮았다. 화장실도 깨끗한 편이었고, 필요한 건 다 있었다. 간단하게 세안을 마치고, 갈가마귀는 잠시 슬쩍 고개를 틀어 볼에 손을 대고, 정면의 거울 안에 비친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최근 경기 일정이 늘어나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더니 눈 밑에 그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물론 그건 그것과 조금 다르긴 했으나, 아무튼 짙게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인상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지만 피로가 누적되면 파편으로 제어하고 있는 힘이 어떻게 틀어질지 모른다. 그런 일말의 불안함이 존재했기에, 갈가마귀는 합숙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의 눈에 그제서야 대충 널부러져 자고 있는 청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볼 때마다 참 불편하게 자고 있다. 갈가마귀는 잠시 그 앞에 멈추어 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옆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매번 쓰고 다니는 가면은 벽에 걸려 있었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B는 언제나 가장 늦게 잠에 들었다. 갈가마귀조차도 그가 언제 잠드는 지 모를 정도로 늦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갈가마귀는 고개를 돌렸다. 그정도로 보이기 싫어한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다. 그는 저가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을 가져와 대충 B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B를 흔들어 깨웠다.
"…봤어요?"
갈가마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젓다가, B가 지금 저를 볼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짧게 아니, 하고 대꾸했다. 어쨌든 정면으로 본 건 아니니 거짓말은 아니지 않을까. 물론 이것까지도 거짓말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주여 제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아침이야. 일어나."
미동이 없는 B에게 갈가마귀는 말을 툭 던지고, 그의 앞에서 발걸음을 떼어냈다. 깨울 사람은 한참이나 남아있다. 저도 제대로 씻은 게 아니고 세안만 하긴 했지만, 미리 이렇게 깨워놔야 저가 다 씻고 나왔을 때 다른 이 또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차례대로 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경험에 기인한 판단이었다. 익숙해진 건 달가운 일은 아니었으나. 갈가마귀는 B의 근처에서 죽은 듯 자고 있는 다른 사람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죽을 듯이 앓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즈음이었다. 으, 으으으으, 아, 으으.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갈가마귀는 방금 저가 떠나 온 뒤를 돌아보았다. B다. 오늘 아침도, 예의 그 고통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약은."
"…방금 먹긴 했는데……."
그렇다면 늦었다는 말이다. 중요한 거라면 재깍재깍 먹지 그랬나, 하고 잔소리를 하려다가 갈가마귀는 애써 그 말을 그냥 목 뒤로 넘겨버렸다. 얼마나 된 고통인지 갈가마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는, 그리고 현재진행형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그리고 약효는 빨리 돌지 않는다. 갈가마귀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아 여전히 이불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는 B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작 깨워 약을 먹게 했어야 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이렇게 같이 합숙을 하는 날이면 열에 여덟은 이랬다. 작은 한숨이 절로 입술 틈새에서 새어 나왔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항상 말만 그렇게 하지."
"그럼 부탁 하나만 할게요…."
B는 비척비척 일어나며 제 얼굴을 덮고 있는 이불을 치워냈다. 그리고 겨우 얼굴을 가릴 수 있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반대쪽 손을 갈가마귀에게 내밀었다. 일으켜 달라는 뜻이었다. 갈가마귀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볍게 그 손을 잡아 주었다. 이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파편은 믿을 만한 억제기였으니까. 그래도 눈을 감고 속으로 생각 나는 성경 구절을 읊었다. 지속된 불안함은 습관을 만들었고, 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이젠 불편함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씻게 화장실 좀 데려다줘요. 찬 물 끼얹으면 정신 차릴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처음에는 낯을 가리던 청년이 요새는 꽤나 따박따박 말을 붙이고 있다. 슈퍼 빌런이라는 옛 명성과는 다르게 B는 다소 소심한 구석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적어도 갈가마귀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이렇게?"
"아, 아뇨. 당신 편한 대로."
겨우겨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보다 키가 작은 청년을 내려다보며 갈가마귀는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저렇게 가려도 보일 건 다 보이는데. 말하면 안 되겠지. 언뜻언뜻 보이는 청년의 얼굴은 의외로 말짱했다. 지금까지는 무슨 하자라도 있어서 보이기 싫어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싫어한다면 그것도 존중해줘야 하는 것이라고 갈가마귀는 생각했다.
편한대로, 라는 말을 듣고 나서 갈가마귀는 다짜고짜 B를 들쳐 매버렸다. 당황한 B가 뭐하는 거냐며, 내려 달라며 외쳤지만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편한 쪽이라면 이쪽이다. B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야 얼굴이 안 보이잖아."
나름대로의 구실이다. B는 끙, 하고 작게 신음하고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긍한 건지, 포기한 건지.
"…얼굴은 진짜 못 본거죠?"
"그래."
이번에는 정말로 거짓말이었다. 그러니까 진심을 담아, 주여. 제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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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다보는 시선이 썩 달갑지는 않다. 2cm는 그리 큰 차이가 아니었기에, 느낌도 생소했다. 어쩐지 관찰대상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레이븐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책상에 턱을 괸 채로 멀뚱히 클라우드를 보고 있었다. 몇 센티 정도일까. 1/10 정도 크기로 줄어든 것 같은데. 20cm도 안 되는건가. 클라우드는 머릿속으로 분명히 놀리고 있을 거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실상 레이븐에게는 그런 실없는 생각들 뿐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우드는 여전히 영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레이븐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노트북이나 좀 가져다 줘."
"내가 왜?"
심드렁한 대꾸에 클라우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루나에게 들키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루나는 대놓고 놀려대려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클라우드는 혀를 찼다. 어쩐지 상상이 되어서,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지금 눈 앞의 레이븐처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도 안 잡히는 것보다야…….
"야!"
갑자기 옷깃이 잡아 당겨져 들어올려졌다. 적지 않게 놀란 클라우드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어째 지금은 더 그런 것 같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옮기는 양 클라우드의 옷깃만 살짝 잡은 채로 레이븐은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클라우드에게만 채감 발걸음을 옮긴 것이지, 레이븐 본인은 몸을 돌려 몇발자국 움직인 게 다였다. 몸이 작아지니 온갖 감각들이 다 왜곡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쾌하다.
"그런데 그 몸으로 어쩌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 레이븐에 클라우드는 물끄러미 닫혀 있는 노트북을 쳐다봤다. …마법을 쓰면 열 수는 있지 않을까. 시도는 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한참을 레이븐은 클라우드가 끙끙거리며 마법으로 노트북을 여는 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일분여가 지나고 나서야 노트북을 열기만 하는 데 성공한 클라우드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어딘가 자존심이 상한다. 직접 깎아먹기까지 하는 자존심이지만, 없진 않다. 클라우드는 훽 고개를 돌려 레이븐을 쏘아보았다.
"조금 도와주면 덧나?"
"도와주려고 말 시킨건데 네가 대답이 없었잖아."
…우문현답인지, 현문우답인지. 그제야 레이븐은 손을 뻗어 덜 열린 노트북을 제대로 열어주었다. 도통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뾰루퉁하게 레이븐을 흘겨보던 클라우드는 이내 고개를 돌려 꺼져 있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손을 뻗어도 전원 버튼에 닿을 리가 없다.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클라우드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걸어가 노트북 위로 올라섰다. 그대로 또 걸어가 버튼 앞까지 가서야…… 그래. 이 작은 손으로 버튼을 눌러봤자 라는 걸 왜 이제서야 깨달았을까.
"……."
"……."
잠시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레이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뻗어 버튼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부팅음에 화들짝 놀란 클라우드는 저도 모르게 두어번 주춤했다. 또 그걸 본 모양인지 레이븐은 피식 웃었다. 클라우드는, 적당히 여기서 혀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노트북으로 뭐 하려고."
"당연하잖아. 일."
퉁명스러운 대꾸에 레이븐은 그대로 팔짱을 꼈다.
"워커홀릭."
글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클라우드의 대꾸가 없자 레이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쉬지그래."
"그럴 시간도 없어."
"정말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리가. 일종의 오기였다. 영 무심하게 시선을 내리고만 있던 레이븐은 이내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손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눈을 감아버린 클라우드는 다시 몸이 들리는 느낌에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건지. 클라우드를 대충 노트북 옆으로 치워버린 레이븐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 와 앉았다.
"그렇게 바쁘면 내가 하면 되잖아."
그리고 한 쪽 손으로 턱을 괸 채로 마우스에 손을 얹었다. 레이븐의 그 말에 클라우드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심인 듯 레이븐은 눈동자를 데룩 굴려 그런 클라우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뭘 하면 되냐고 묻고 있는 눈이다. 클라우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너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은데."
굳이 꺼려지는 점 하나를 꼽자면 이런 식의 돌직구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왔지만 도저히 곱게 봐 줄 수만은 없었다. 뭐라 쏘아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클라우드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불필요한 언쟁을 해봤자 힘이 빠지는 건 저 쪽이라는 사실을, 클라우드는 잘 알고 있었다. 영 못 믿음직하긴 하지만, 관둘 생각도 없어 보이고. 한 번쯤 맡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클라우드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몇시간 후, 레이븐은 잡고 있던 마우스를 놓아버렸다. 아무리 작아졌다고 해도 시선이 정말로, 아주, 매우 심하게 부담스러웠다. 시선을 내리면 마치 안 보고 있었다는 듯 훽 고개를 돌려버리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면 어김없이 시선이 쏟아져온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맡긴 일이 영 불안한 건 알겠는데, 이런 식의 감시당하는 느낌은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레이븐이 마우스를 놓아버리자 클라우드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다시 그에게 고정시켰다.
"…솔직히 별 거 아니잖아?"
레이븐이 말대로, 클라우드가 그에게 맡긴 건 그냥 간단한 자료 찾기일 뿐이었다. 굳이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아도 그정도는 할 줄 안다. 마치 그정도도 할 줄 모를테니 지켜보고 있는 편이 낫겠지, 하는 느낌이었다. 클라우드도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 드는 것이, 자꾸 그에게로 눈이 갔다. 기분 나빠 할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눈은 안 마주치려고 했는데, 당연히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냥 가서 쉬어. 쳐다보고 있지 말고."
"…그러고 싶긴 한데."
작게 한숨을 푹 내쉬는 클라우드에 레이븐은 고개를 갸웃, 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 한숨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몸으로 책상 위에서 어떻게 내려가겠는가. 마법을 쓰면 될 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마법조차 마음대로 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이븐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또다시 아까처럼 클라우드의 옷깃을 잡고 들어 올렸다.
"이렇게 안 잡으면 안 돼?"
"그럼 어떻게 잡아."
"……그것도 그렇네."
어쩌다 이렇게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렸는지. 클라우드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방 한구석에 자리잡은 침대에 클라우드를 내려놓은 레이븐은 제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쳐다보지 말고, 좀 자."
클라우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레이븐은 아마 그러진 못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쓸데없이 걱정만 많은 녀석이었다. 일이 많은 때와 적은 때가 어느정도 정해져 있는 레이븐으로서는 그의 일을 조금 덜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언제나 정색을 하고 가라며 성을 내던 클라우드에 알 수 없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었다. 이번에도 영 께름칙해 하면서 별 것 아닌 일을 맡긴 거고. 매번 일에 치이는 클라우드인지라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레이븐은 가끔 불만스럽기도 했다.
몸을 돌려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온 레이븐은 의자에 앉기 전에 허리만 살짝 숙여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별 뜻 없는 창을 괜히 여러개 띄워 놓고, 고개를 돌려 옆의 책장을 바라보았다. 책은 둘째치고 사이사이가 서류뭉치로 정신이 없었다. 레이븐은 그쪽으로 손을 뻗어 서류 몇 장을 꺼냈다. 내용은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지만, 결제 서류로 보였다. 그럼 간단히 서명만 하고 넘기면 될 것이다. 워낙 정신이 없는 녀석이니 저가 결제한 줄 알지 않을까. 대충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펜을 들고 레이븐은 가볍게 결제란에 서명을 했다. 저의 것이 아니라 눈대중으로 여러번 봐왔던 클라우드의 것으로. 나름대로 그럴듯하다. 등 뒤에선 당연히 시선이 느껴졌지만, 띄워놓은 창 때문인지 아무래도 맡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하는 듯 클라우드는 별 말이 없었다. 알고 있다면 당장 소리질러 바득바득 화를 냈을 텐데.
그래도 어느 정도 읽기는 해둬야 할 것 같아서 눈으로 훑으며 서명을 하고 있는 지라, 실상 결제 완료 서명이 되어 있는 서류는 아직 적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언젠가부터 느껴지지 않는 시선에 레이븐이 고개를 돌렸다. 앉아서 멀뚱멀뚱 쳐다고 있을 거라 생각한 클라우드는 어느새 누워 있었다. 쉬라고 했더니 아예 잠을 자는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븐은 조심스레 그런 클라우드에게 다가갔다. 하기사, 며칠 밤샘을 하며 방에 틀혀박혀 나오지도 않았던 녀석이다. 그래서 살아 있나 확인을 하러 클라우드의 방에 들렀던 게 아니었던가. 어쩌다보니 그의 일을 해 주고 있긴 했지만.
문득,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불필요해진 호문클루스의 처분은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잠귀는 또 밝은 지라 침대에 살짝 걸터 앉은 것 만으로도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클라우드와 시선이 마주친 레이븐은 한참동안 말없이 자그만해진 클라우드를 바라보았다.
"있지, 클라우드."
그렇게 불러놓고 레이븐은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가끔 이런 식으로 나오는 레이븐은 답답하기도 했고, 어쩐지 답지 않기도 했다. 뜻모를 행동을 하는 건 그의 종특이었지만서도.
"……이대로 더 작아져버려서, 아예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했어."
클라우드는 눈만 두어번 깜빡이며 레이븐과 눈을 맞추었다.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렸는지라, 솔직히 말하자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걱정을 하고 있나. 클라우드는 문득 손을 뻗었다. 어쩐지 쓰다듬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당연히 손은 닿지 않았다. 아쉬워져서 손을 다른 쪽으로 옮겼다. 그나마 레이븐이 침대 위를 짚은 손이 저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레이븐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은 클라우드는 시선을 떨궜다.
"사라지진 않을 거야."
"……응."
예전부터 알게모르게, 레이븐은 클라우드를 믿고 있었다. 매번 기만이니 뭐니 하는 말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말이다. 본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클라우드도.
"미안, 쓸데 없는 소리 해서."
"너도 피곤한가보지."
픽 웃으며 클라우드는 제 손을 거두었다. 작아졌는데도 닿는 온기는 그대로였다. 묘하게 기분 좋아하고 있는 클라우드를 보다가, 레이븐은 갑작스레 저 또한 침대에 몸을 묻어버렸다.
"일은."
"몰라. 잘래."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클라우드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사실 방금 전에도 바로 자려고 했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레이븐의 말대로 자고 일어나면 더 작아져있지 않을까, 아예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눈을 감았을 뿐인데도 슬슬 오는 잠에 클라우드는 얼마 가지 않아 빠져들었다. 레이븐이 옆에 있어서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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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고통을 인내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가면 뒤, 창백해진 입술을 세게 깨물며 비명을 참아냈다. 팔을 덮고 있는 옷을 찢어버릴 듯 걷고, 거칠게 주머니를 뒤졌다. 익숙한 그립감의, 그의 손에 딱 맞는 크기를 가진 주사기. 그리고 안에 든 기분 나쁠 정도로 투명한 액체. 그는 힘겹게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비록 그 누구도 보지 못 할 것이었으나. 그는 능숙하게 손목의 피부 아래, 정맥을 찾아내 주저 없이 주삿바늘을 꽂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약물이 주입된 왼팔이 힘없이 늘어졌다. 꽂혀 있던 주사기는 그와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져 또르르 굴러갔다. 그 안에 약간 남아 있던 약물이 새어 나와 콘크리트를 적셨다. 그는, 자신이 어느새 마약에 적응했음을 알아 차렸다. 아니, 알아 차려도 아주 오래 전에 알아 차렸다. 더 이상 마약에 취해 바닥을 기지 않았을 때 즈음. 하지만 그는 마약에 적응한 자신을 애석해 하진 않았다. 뼈를 관통하고 피부를 벗겨 내는 듯한 고통을 단 한순간이라도 없앨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덜어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허나 그렇다고 마약의 패널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이라는 듯, 약이 피 안에 돌기 시작하면 졸음이 몰려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는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그에게 있어서 저의 몸속에 흐르는 피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고통의 발현지이자, 동시에 영원히 떼어낼 수 없을 것. B의 이름을 얻기도 전, 별 것 아니었던 그는 저의 몸에서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오렌지색 피를 볼 때마다 미친 듯이 웃어 젖히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미친놈이라 불렀고. 그는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했다. 미쳐 있었다. 저를 휘감는 고통에. 물론 지금도 미쳐 있다. 단지, B가 된 이후부터는 허튼 짓을 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부질 없는 짓임을 깨달아서였다. 피는 묽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마저도 요새는 거의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거의.
그래도 B는 아직은 살고 싶었다.
한번 죽었던 저를 살린 공왕류의 피는 뜻밖에 장점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평생의 고통을 안겨준 대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는 증오해 마지않는 피를 믿고 검 두 자루를 들었다. 그리고 가면을 썼다. 그의 몸이 찢겨 피가 흘러나올 때마다 그를 상대하는 자들은 오히려 고통스러워했다. 그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피는 아주 공평하게도 타인에게 또한 그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알게 된 이후부터는 적절히 활용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올 때까지 싸웠다. 그리고 그 피는 상대의 몸을 적셨다. 그를 상대하는 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고통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상대들에게 검을 꽂았다. 나는, 그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가. 숨통이 끊어진 상대에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살이 칼에 찢겨 나가고 총에 맞는 고통 따위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평생을 더한 고통과 함께 해왔기에.
피를 활용하는 법과 검에 능숙해지자, 그는 더 강한 적을 찾았다. 그게 바로 아폴로의 B였다. 마지막 일격을 그에게 꽂아 넣고 그는 어린 날 이후 처음으로 미친 듯이 웃었다. 쥐고 있던 검까지 바닥에 떨구면서. 그게 마지막이었다. B가 된 그는 더 이상 그렇게 웃지 않았다. 죽은 상대를 향해 중얼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쓴 가면 뒤로 예전의 것들을 모두 숨겼다. 그의 나이 10대, 아직 그는 어리고도 어렸다.
마약을 시작하게 된 건 그 즈음이었다. 약골이 그를 도왔다. 그래서 B도 약골을 도와주었다. 그가 하라는 것을 하고, 그의 동료가 되었다. 사실 B는 약골이 외치는 정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약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슈퍼 빌런의 칭호를 가졌음에도 별달리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딱히 그의 그런 행동에 다른 슈퍼 빌런들은 토를 달지 않았다.
고통은 떠나지 않았으나 마약이 있었고, B는 적어도 마약으로 고통을 잊은 순간에 만은 자유로웠다. 잠시나마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 이외에는 모두 부차적인 문제였다. 약골과의 신뢰 관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B는 그를 믿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믿었다. 그에게 자신을 의탁한 것이나 다름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이용, 당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뒤늦게 들었다. 하지만 B에게 중요한 건 약을 구할 루트가 약골 뿐이라는 점과, 시작을 한 이상 끝을 맺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힘이 빠졌지만 날만을 잔뜩 세운 목소리에 소녀는 흠칫 했다. 조그마한 키, 커다란 안경. 눈에 띌 수밖에 없을 분홍색 머리카락을 예쁘게 뒤로 해 양갈래로 묶은, 그보다도 더 어린 소녀. 한참을 허공을 떠돌던 B의 시선이 소녀에게 고정되었다. 나름 허물없는 사이라고 자부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소녀는 멀찍이 멈춰 서긴 했지만 딱히 겁을 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B는 잠시 소녀의 겁먹은 표정을 상상했다가 속으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겉으로도 웃을 정도였지만, 지금 그의 상황에 웃었다간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 같기에 참은 것이다. B는 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팔이 크게 베인, 가죽까지 뚫어버린 자상이었다. 상처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 내려 땅에 고이고 있었다. 그가 소녀의 접근을 막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오늘 따라 브린디쉬에 안개가 짙었다. 자칫 소녀가 핏물에 닿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아무리 슈퍼 빌런 중 하나라고 해도 소녀가 감당할 수 있을 고통은 아니었다. B 또한 소녀의 고통을 원하지 않았다. B는 제 옷에 감겨있는 붉은색 천을 풀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고인 피를 덮었다.
소녀의 곁에서 드론이 삑삑, 소리를 냈다. 이곳으로 온 것은 B의 실수였다. 원래는 자신의 마그네슘 빌딩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정말로 간만에 뇌가 마약에 취했다. 방향 구분을 못하게 되다니. B는 괜히 다 똑같이 생긴 브린디쉬의 빌딩들과 복잡한 구조를 탓했다. 부질 없는 짓이지만은.
"이제 와도 돼, 아이큐."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소녀. 아이큐는 쪼르르 그에게로 다가갔다. 보통이라면 그의 말 따위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굴었을 아이큐지만 피냄새를 맡았기에 순순히 기다려 준 것이다. 그의 피가 위험하다는 사실 쯤이야 아이큐도 잘 알고 있었다. B는 제 곁으로 온 아이큐에게 시선을 두었다. 웅웅. 드론은 미약한 진동 소리를 냈다. 기계 본연의 소리다. 아이큐가 개조한 드론은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지만, 저것처럼 아이큐 본인을 보호하려는 용도도 있었다. 아무리 도시의 반절을 슈퍼 빌런들이 장악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노리는 히어로들은 도시 구석구석에 존재했다. 어디까지나 아이큐는 기계에 있어서 천재일 뿐, 아직 어리고 힘없는 소녀였으니 꼭 필요했을 터다.
가까이서 확인 해보니 B의 상처는 아이큐의 생각보다도 더 컸다. 피가 붉은색이 아니라서 현실감은 떨어졌지만, 치료를 해야 할 상처라는 것 만은 확실했다. 제 몸에 상처를 내가며 싸우는 것은 B의 습관과도 같았다. 몸을 조금 사릴 만도 한데, 그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아이큐는 종종 그가 싸우는 방식을 보며 아프지도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참견은 하지 않았다. 다른 슈퍼 빌런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약골까지도. 허나 과연 약골이 몸을 사리라 한다면 B는 그렇게 할 것인가. 그가 오라 하면 오고,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처럼 구는 B였지만 싸움 방식에 대해서는 글쎄. 사실 다들 B라는 호칭을, 나아가서 그 자체를 믿고 있기에 충고조차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분명히 누굴 상대로든 승리하고 올 것이라고. 그에 따른 상처의 깊이는 깊을 수밖에, 양 또한 많을 수밖에.
"상처 치료해야 하지 않아?"
"그냥 둬도 돼."
사실 겉 면의 상처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B는 가면 아래로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몸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전신을 태우는 듯한 고통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앙다문 입술 틈새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그에게 필수품인 마약은 주머니 안에 있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피를 많이 흘린 대다가 긴장이 풀려 몸에 힘이 빠진 상태 인지라 주삿바늘을 제대로 혈관 안에 박아 넣을 수 있을지. B의 눈동자가 아이큐를 향했다. 붉은색 시선, 아이큐는 이따금 B에게서 나오는 신음 소리를 듣고 있었다.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영 달가워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런 것에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그의 속내를 아이큐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돕지 않을 생각인 것도 아니고. "주머니 안에 있어." 아이큐는 B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주머니를 뒤져 주사기를 꺼냈다. 언제든 혈관에 꽂을 수 있게 준비 해 놓은 듯 투명한 액체는 이미 주사기 안에 들어 있었다. 하기사, 급할 땐 마약을 주사기 안에 넣을 틈도 없을 터다. 아이큐는 상식만으로 B를 이해했다.
"어떻게 해?'
B는 대답 대신 드러난 제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을 따른 아이큐의 아직 덜 큰 손이 B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 아이큐는 사람의 인체에 대해 빠삭했다. 기계의 회로는 사람의 인체와 닮은 구석이 많았기에, 필요성에 따라 익혀 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아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B에게 묻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생각보다도 행동이 빨랐다. 일단 꽂고 보자. 실수를 한다면 부탁한 B의 탓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 말을 할 수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미약한 신음에서 비명으로 B가 내는 소리가 바뀌었다. 일단 보이는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은 아이큐는 무신경하게 피스톤을 꾹 눌렀다. 안 그래도 고통에 찌푸려져 있던 B의 미간이 더더욱 구겨졌으나, 가면에 가려져 있으니 아이큐가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주변이 조용해졌다. B는 고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저찌 제대로 약이 들어가긴 한 모양이었다. 문득 아이큐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B의 손을 잡았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의외로 따뜻해서, 놀랐다. 냉혈 동물이라 생각한 건 아니었으나. 아이큐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손을 잡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얼굴을 맞댄 세월이 꽤 됨에도 그랬다. 애초에 B는 누군가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걸 넘어 싫어하는 듯 했으니. 그 이유는 그가 가면을 벗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아이큐는 했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주사기를 주워 힘없이 늘어져 있는 B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B가 기계였다면 평생 아프지 않을 수 있게 내가 고쳐 줬을 텐데."
"…살벌한 얘기를 하네."
B는 끙, 하고 작게 신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건 여전했지만 어느 정도 움직일 만은 했다. 허나 이 정도면 괜찮네, 하고 생각함과 동시에 B는 휘청 해 지금까지 기대어 있던 난간에 다시금 등을 기대야만 했다. 그래도 딱 위태로울 지경 바로 앞에서 멈춘 덕에 기분은 크게 나쁘진 않았다. 로쏘에 가득한 고층 빌딩들 사이의 공기와는 다른 옥상 위의 공기가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데에 한 몫 했다. 비록 습기를 머금은 안개는 그대로였으나.
B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돌려 빌딩 아래를 내려다봤다. 썩 보기 좋은 경치는 아니지만, 이러고 있는 편이 더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어느새 더 가까이로 다가온 아이큐가 B의 바지 자락을 잡았다. B가 시선을 내려 저를 쳐다보자 아이큐는 메고 있던 가방을 풀어 대뜸 B에게 건넸다. B는 잠시 난처하다는 표정─물론 이것 또한 아이큐에게는 보이지 않겠으나,─을 짓다가도 순순히 그것을 받아주었다. 짐을 덜은 아이큐는 저도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은 듯 까치발을 들고 낑낑거렸다. 닿기에는 한참 멀었다. B는 속으로 작게 웃고는 아이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이큐는 불만스럽다는 듯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딱히 그런 B의 손을 거부하진 않았다.
"가방, 바닥에 내려놔도 돼?"
"상관없어."
"굳이 주길래 안 되는 줄 알았더니…"
B는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무겁기만 한 아이큐의 가방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이큐에게 저의 등이 보이도록 쪼그려 앉았다. "업혀." B의 그 말에 아이큐는 별 거리낌 없이 B의 등에 업혔다. 가방을 메고 있지 않은 아이큐는 생각보다도 더 가벼웠다. 또래 아이들보다도 더 가볍지 않을까. 어느새 아이큐는 저가 편한 자세를 찾은 듯 B의 어깨 위에 턱을 올렸다.
"안 떨어지게 조심해."
"그럴 일 없거든?"
좋다고 업혔으면서 툴툴거리는 아이큐에 B는 결국 육성으로도 픽 웃어버렸다. 아이큐는 그런 B의 등을 한 번 퍽 치고는 물끄러미 빌딩 아래로 시선을 두었다. 이제야 시원히 보였다. 안개가 잔뜩 낀 탓에 점멸하는 불빛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로쏘의 안개는 이상하리만치 짙었다. 이따금 기분을 축축 늘어지게 할 정도로. 사실, 애초부터 경치가 좋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어쩐지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을 뿐.
"B."
"응?"
"이만 돌아가자."
짙은 안개 속, 무언가 보이기라도 하는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B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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