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커플로그 - 45 post
- [지크라그] 여름의 시작 2017.06.20
- [지크라그] 가장 특별한 2017.04.24
- [라그렛 블랙로즈] 31일간의 기록 2017.02.11
- [지크라그] 곁에 있어줘. 2017.02.09
- 지크라그 #연인이_어깨에_기대어_잠든다면_자캐는 2016.11.26
- [지크라그] 1982년, 6월. 여름 2016.10.20
- [지크라그] 첫키스 2016.10.06
- [지크라그] 감기 2016.09.30
- [지크라그] 0919 2016.09.19
- [엘리네일] 인연의 증표 2016.09.15
"안 자요?"
먼저 입을 연 건 지크프리트였다. 라그렛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 행동에서도 졸린 기운이 풀풀 느껴져 지크프리트는 조금 웃고 말았다. 졸린 눈이 웃음 소리에 샐쭉해져선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이내 라그렛은 어리광을 부리듯 품에서 밍기적거리다 슬 그를 밀어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려 그런 라그렛을 고쳐 안았다. 라그렛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알아 듣지 못 할 말을 웅얼거렸다. 지크프리트는 쪽 소리를 내 입을 맞추며 그 입을 막아버리고, 우물거리던 입술에선 무어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안겨 있으면 더 졸리단 말이야, 같은 말로 추정되었다. 지크프리트는 알아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을 하며 한 번 고쳐안았던 라그렛을 놓아주지 않을 듯이 제법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왜 안 자요. 자자, 선배."
"안 돼."
싫어, 도 아니고 안 돼, 였다. 말과 동시에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해버렸다. 관계의 이름이 변한 이후로, 의식해버리는 것들이 있다. 눈빛이나 시선에서 느껴지는 숨이 막힐 정도의 애정이라던지. 버겁거나 부담스럽진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종종 낯설게 느끼곤 했다. 부드럽게 턱이 잡히는 감촉에 결국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은. 지크프리트는 잔뜩 졸음이 낀 연인의 눈가 끝을 양 엄지 손가락으로 문질거렸다. 라그렛은 기어코 그 손도 밀어내고는 대신 제 손등으로 눈가를 부볐다.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어버렸다.
"옷이라도 입혀줄게요."
"됐어. 귀찮아……."
"감기 걸려요."
"여름인데 뭐."
여름 감기는 바보 아니면 안 걸린데. 영 무심한 투로 덧붙이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껴안았다. 습관적으로 품에 얼굴을 파묻으려다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지크프리트는 입혀주려고 집어들었던 윗옷을 입혀주지도 덮어주지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있다간, 시선이 맞닿자 옷을 대충 놓아두고는 한켠에 밀어둔 이불을 끌어와 라그렛에게 덮어주었다. 장난스레 이불로 돌돌 말아버리는 시늉도 했다. 불만스럽다는 눈빛에 차마 제대로 실행으로 옮기진 못해 어쩐지 아쉬워보였다. 라그렛은 그런 기색을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끌어와 꼬옥 맞잡았다. 장갑을 벗겨서 확인해보면 여러 방식으로 잔뜩 흠집이 나 있던 손은 꽤 전부터 조금씩 상처가 줄어들고 있었다. 라그렛은 그걸 만족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반창고를 붙여줄 일이 줄어들겠네,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 손 위로 입술을 대었다. 가만 바라보고 있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띄워졌다. 조금 볼이 발갛게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일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라그렛은 반대쪽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귀여워, 하고 입모양으로만 말하자 불퉁한 표정이 돌아온다. 라그렛은 나른하게 웃고는 그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지크프리트는 금세 표정을 풀고는 아니거든요, 하고 따라하듯 입술만 움직였다. 다시금 귀엽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왼눈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치워 빤히 바라보았다.
"지크."
"응?"
"잠깐만… 1, 2, 3."
"생일 축하해, 지크."
그 말을 들은 지크프리트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사락거리며 라그렛의 옆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다간, 귓바퀴를 따라 살살 쓰다듬거나 귀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살짝 잠겨있는 목소리가 어쩐지 달달하게 느껴진다. 그건 목소리가 담아낸 말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연인의 목소리이기 때문일까. 역시 둘 다인가. 생각들의 나열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라그렛을 제 품 안으로 더 끌어왔다. 그제야 라그렛은 얌전히 안겨오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라그렛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지크프리트는 그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제 것과 같은, 같을 수밖에 없는 체향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숨이 섞여 나른해졌던 공기가 차츰 가라앉았다. 사랑스러운 사람.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지크프리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 때문에 안 자고 버텼어요?"
"중요한거니까."
"아침에 해줘도 되는 걸요."
라그렛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이내 고개를 들고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봐, 잠시간 시선이 닿았다가. 내가 싫어, 하는 말이 굳이 말로 하지 않는데도 그 시선에서 느껴졌다.
"이제 잘거야."
"응. 잘 자요, 선배. 좋은 꿈 꿔."
다시금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들렸다. 이윽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릴 즈음, 지크프리트도 눈을 감았다. 얼마 정도 지나 연인의 체온에 기대어 잠에 빠져들락 말락할 때, 문득 볼에 온기 하나가 사락거리며 닿아왔다. 그 뒤로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웃고 있는 라그렛이 보였다.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당신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꿈에서 만나."
그 말은 단순한 밤인사를 떠나, 자신에게 좋은 꿈이란 너를 만나는 꿈이라는 사실을 뜻하기도 했다.
방학이 다가오는 1969년의 초여름, 기숙사의 모두가 잠을 청하러 방으로 들어가 텅 비어버린 그리핀도르 휴게실. 시간에 맞지 않게 두 사람이 남아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제법 삭막한 분위기. 곧 5학년이 될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어린 후배를 앞에 앉혀둔 채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앞의 지크프리트 위버는 죄 지은 사람 마냥 움츠러들어선 라그렛의 눈치만 힐끔힐끔 보았다. 라그렛이 자고 있던 지크프리트를 다짜고짜 깨워서 데리고 나온 지 벌써 10분 째. 아무 말도 없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더랬다. 지크프리트는 머릿속으로 저가 혹시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하는 고민을 한참 하고 있었다. 평소 행실 문제일까, 아니면 스터디? 답잖게 맹랑하게 군 걸 뒤늦게 혼내려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까지 닿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쩌겠어. 혼이 난다고 해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터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부쩍 세상 다 끝난 모양새를 하던 당신이었기에. 그게 못내 심술이 났었다.
"너."
드디어 10분 여 만에 첫 마디가 떼어졌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에서 나온 목소리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완전히 화가 난 건 아니라는 뜻이니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크프리트는 움찔하고는 물끄럼 라그렛을 바라보았다. 졸음은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정적. 본래도 사이가 가까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서먹할 일일까. 물론 서먹하게 느끼는 건 일방적으로 쫄고 있는 지크프리트 뿐이었다. 휴게실이 이렇게 춥게 느껴지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며, 할 말이 있다면 빨리 말해달라고―이 말을 꺼내면 더 혼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서도― 재촉하려 할 때 즈음. 라그렛이 입술을 뗐다. 문득, 그도 어쩐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한 것처럼 보였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긴 한숨이 떼어진 입술에서 먼저 새어나오고, 말이 이어졌다.
혼이 나거나 꾸중을 들을 수많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생각했으나 이 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 한 것이었다. 지크프리트는 다소 멍청해보이는 표정으로 라그렛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라그렛은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를 들은 게 한두번은 아닌데, 설마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발뺌할 수밖에 없는걸요. 그런 적이 없으니까……."
탐탁치 않다는 표정이 되돌아온다. 짚이는 게 전혀 없었다. 캐고 다닌다고? 대체 무엇을? 누가 그런 걸 말한 거지? 물음만이 이어졌다. 제법 위협적인 태도에 기가 죽긴 했으나 지크프리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캐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마냥 헤헤 웃으면서 친하다 말할 만한 사이는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가까워졌다.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물어볼 수 있을 정도의 관계는 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마음대로 끝내려 했던 스터디를 다시 시작하게 된 이후로, 그는 티가 날 정도의 친밀함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그런데 왜 제가 선배를 캐고 다니겠어요. 억울함에 목소리 조차 잘 나오지 않아서 더 억울해지고 만다. 그런 지크프리트를 읽어내기라도 했는지 라그렛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몰아세울 생각은 없으니까." 느릿하게 떼어진 말에 아랫 입술을 짓씹던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 하나에 닿아,
"…설마 선배 생일 물어보고 다닌 거요?"
"아, 그렇게 말했던가. 아무튼 캐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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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다 틀어주시면 감사합니다. 하나는 레이니 무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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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피어나는 꽃은 비를 맞고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 강인하고 아름답다고. 그렇다면 4월의 제라늄은 그만큼 더 강인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는 의미가 아닐지. 라그렛은 어쩐지 오늘 하루만은 장미가 아니라 제라늄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렇지만 사실, 네가 나를 보며 떠올리는 꽃이 장미라면 그저 장미여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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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지크프리트 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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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만 앞으로. …아니, 오른발 말고 왼발."
"이렇게요?"
"잠깐 쉴까."
"……어쩐지 하루 종일 피곤해보였어요."
"그런가. 난 멀쩡한데."
"춤 연습 마저 할까? 아니면 공부?"
"어느 쪽이든 괜찮지만 연습 쪽이 더 좋아요."
"시험이 3주 남은 건 알고?"
─내 졸업 프롬, 네가 내 파트너를 해야 해.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의 7학년은 지나칠 정도로 즉흥적이었다. 7학년의 그는 항상 기분이 좋아보였고, 또, 가끔 보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를 몸에 둘렀다. 본인도 자각하고 있는 그것을 가장 가까운 옆의 지크프리트 위버는 느껴버린 걸지도 모른다.
"아."
문득,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생각 났다.
2.
"선배?"
3.
"뭐해요?"
불쑥 옆에서 튀어나온 지크프리트가 말을 붙였다. 라그렛은 화들짝 놀랐으나 애써 티는 내지 않고 교과서를 덮었다. 그대로 책상에 턱을 괴고 반대쪽 손으로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헤짚어버렸다. 으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라그렛은 웃음 소리를 흘렸다.
"선배 하는 걸 몰래 훔쳐보려고 하면 못 써."
"훔쳐보려고 한 거 아닌데……. 공부하고 있었어요?"
"응. 나도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스터디 마지막, 언제가 좋을까?"
"슬슬 끝내야지. 난 곧 졸업이잖아."
"라그 선배."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제법 날카롭다. 지적은 하지 않았으나, 말 한 본인도 자각은 있을 터다. 라그렛은 부러 고개를 숙여 지크프리트가 펼쳐놓은 페이지를 천천히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시선이 엇갈린다. 어쩌면, 마음도. 엇갈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아쉽지 않았다면 제 미련이라 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선배가 졸업하는 게 싫어요."
"설명해줄게."
그저, 일상일 뿐이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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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시간은 낮의 시간보다 빠르게 흘러간다. 한두 시간 정도의 오차를 두고 똑같이 배분되어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분명하게 있음에도 그러했다. 여름의 밤은 늦게 찾아오고, 아침은 이르게 찾아온다. 반대로 겨울의 아침은 느리게 찾아오지만 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온다. 딱 그 정도의 오차.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저녁이, 밤이, 새벽이. 달이 가쁘게 물러가는 것은 결국은 체감의 탓이다. 아니면 잠으로 보내는 시간이 길어서던지. 아, 후자 쪽에 가깝나. 아무튼. 이런 부질 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밤은 저물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리 장황하게 늘어놓았어도 라그렛 블랙로즈는 지나가는 밤에 연연해하는 소년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관심한 축에 가까웠지. 그에게 밤이란 하루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때때로 사람이 다 그렇듯 깊어가는 새벽과 어두운 밤하늘, 그를 밝히는 밝은 달에 심취해 센치해지곤 했으나. 그 정도에 흔들리는 소년은 더더욱 아니었고. 남보다 몇 배는 무심하게 흘려보낸 밤이 몇 밤이나 될까. 독서가 취미인 소년 치고는 퍽 감수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리 저를 평가하면서도 라그렛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이리 길게 쓸모 없는 생각을 이어온 것만 해도 기실 생각 이상의 감수성을 내포한다는 정도였다.
그리하여 저를 감수성 부족한 소년이라 평가내리면서도 사실은 제법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저에게 박한 평가 만큼이나 남에게도 무덤덤한 사람이었다.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 직을 떠맡았으면 조금의 칭찬 정도는 해도 좋으련만. 그가 할 줄 아는 립서비스는 어디까지나 공적인 것에 한했다. 이따금 불려가 블랙로즈로서 대표하는 자리인 순혈 모임이나, 그런 비슷한 것들. 외에서는 사실, 무덤덤함을 넘어 과할 정도로 야박했다. 마치 칭찬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사람 마냥. 비단 주장으로서 그리핀도르 팀을 대할 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햇수로 4년 째 이어오고 있는 스터디에서도 그랬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맡고 있는 소년이 있다. 그 아이가 제대로된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다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말이다. 칭찬이 입에 붙지 않은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어린 축에 속했던 라그렛이 칭찬을 할 만한 대상은 멘티인 소년 뿐이었고, 소년에게 칭찬을 할 일이 없으니 칭찬 자체가 그에게는 낯선 거다. 이런 구구절절한 이유들, 그리고 그 이유들을 앞지른 성격 탓으로 어찌되었든 라그렛은 꽤나 뻑뻑한 주장이 되었다. 그리핀도르보다 몇 배는 겉으로 차가워보이는 슬리데린과 래번클로의 주장들보다도 말이다. 다소 무뚝뚝해보이는 후플푸프의 주장보다도 더.
그러한 그가 손을 뻗었다는 건 생각보다도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다. 쓰다듬었다고 보기도 힘든 행위였음에도 그랬다. 금빛 머리칼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진 손은 솔직히 따뜻했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그는 그마저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햇수로, 4년. 라그렛 블랙로즈가 3학년이고 지크프리트 위버가 신입생일 때 시작된 스터디 동안. 그리고 그 시간 외에도 선배와 후배로 지내왔던 시간 동안. 라그렛이 지크프리트를 약하게나마 쓰다듬어주었던 때가 있었던가. 동류인 순혈에게만 제외하고 모든 이에게 세워왔던, 아주 잘 벼려진 날이 살포시 접어들어가기 시작했던 4학년의 크리스마스 이후 라그렛의 태도는 상당히 누그러진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에 그쳤다. 부러 쓰다듬은 부드러운 행동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제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서까지 이랬던 적이 있었던가, 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라그렛 본인이 곰곰히 고민할 정도로. 곰곰히 생각해보니 처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라면 정말로 생각 없이 뻗은 손이어서 기억 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거겠지. 그래서, 왜 그랬지. 가지런히 누운 채 한참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던 라그렛이 문득 제 오른손을 들어 눈 앞에 펼쳐보였다. 순혈 가문 도련님 치고는 제법 거친 손이다. 손 끝에 닿았던 금빛 머리칼이 사락거리던 감촉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제 눈에 더이상 보이지 않도록 내려 침대 시트 위에 올렸다. 이유를 고찰해봤자 부질 없는 짓이다.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는 어느 때처럼 생각 없이 한 행동이겠지. 라그렛은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고 잠을 청했다.
―그래서, 어제 졸면 혼낼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용캐 다 한 모양인지 지크프리트가 나름 의기양양하게 내밀었던 스터디 과제들을 눈으로 훑어보던 라그렛은 어느새 고개를 들어 지크프리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깃펜을 한 번 손으로 빙글 돌렸다. 급하게 한꺼번에 한 과제는 어느정도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라그렛의 성에는 당연히 차지 않았고, 그래서 당연히 평소처럼 잔소리와 지적할 점을 따박따박 뱉어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거였다. 허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애한테 따가운 소리를 해봤자 제대로 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라그렛은 턱을 괸 채로 계속해서 느릿하게 깃펜을 손으로 돌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졸고만 있는 소년에게서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어제부터 참 이상한 일이지. 평소였으면 귀라도 잡아당기면서 깨웠을텐데, 깨울 맘이 들지 않는 건. 어제도 혼냈어야 정상이었던 거였는데. 소리 조차 내지 않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비게 된 손이 문득 뻗어진다. 왼눈 께에 쏠려 머물고 있는 앞머리칼에 손 끝이 닿았다. 그대로 옆으로 넘기듯이 사락, 하고. 한참 감겨있던 눈이 반 쯤 뜨여진다. 항상 앞머리 아래에서 언뜻언뜻 보이던 왼쪽 눈동자의 붉은색이 보였다. 라그렛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앞머리를 매만지던 손이 올라가고,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꾹 눌러 책상에 박아버렸다. 잠깐 뜨여졌던 눈이 또 머리가 책상에 닿았다고 다시금 감겼다. 많이 졸렸던 모양이다.
제 권속, 이라 칭하기엔 멀고 제 선 안, 이라 끝내기엔 그보다는 가깝다. 지크프리트 위버는 그 시절부터 라그렛 블랙로즈에게 그 간극 어딘가에 서 있는 존재였다. 사실은 그 시절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알게 모르게 헤이트 크라임에 손을 댔던 저학년. 그 때 제 앞에 뚝 떨어진 머글 태생 소년은 솔직히 말하자면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터인데. 남이 건드리면 하염없이 불쾌했고, 그렇다고 구태여 저가 건드리지도 않았다. 괴롭힘 당하는 걸 도와줬냐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다소 제멋대로였다고 생각한다. 끝내 제 눈에 지크프리트에게 손을 대는 얼굴이 보여져 본의아니게 응징 아닌 응징을 해주었던 일을 떠올려보자면, 더더욱. 도움은 주지 않았으나 응징은 하고 다녔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그냥 눈에 밟혀서 그랬다기엔 했던 일의 강도가 너무나도 강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지.
잔머리가 듬성듬성 삐져나와 있는 뒷머리에 여전히 올려진 채인 제 손에 시선이 닿는다. 그대로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제법 부드러웠다.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게 이런 느낌인가. 참 새삼스러운 감상이다. 그리고, 이상하지 않나. 나도, 너도. 지크프리트 위버가 피곤해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제멋대로 꼬셔와 시작하게 만든 퀴디치에, 배분해주었던 포지션과도 달라졌으니. 적응을 위해 부단히도 열심히 노력하는 게 제 눈에도 보였더랬다. 어차피 추격꾼 자리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서 정말로 저가 바꿔도 되는 일이었는데. 강요에 가까운 제안을 받아주었던 것도,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되었을 포지션을 바꿔준 것도. 사실 주장인 제 입장에서는 다 고마운 일들 뿐이라 어느 정도의 편의는 봐줄 수 있었다. 먼저 말로 꺼내지 않았을 뿐. 예를 들어 스터디 한 번 쉬면 안 되겠냐고 말해왔더라면 흔쾌히 그러자고 해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밤을 샐 정도로 굳이 무리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상하다는 말로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혼나는게 무서웠나. 아니면 그리 빡빡한 선배로 보였나. 사실 둘 다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라,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어버렸다.
제법 오랜 시간 금색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은 두어번 톡톡 두드리는 것을 끝으로 떨어져나갔다. 이번에는 사락거리는 감촉이 남았다. 싫지는 않았고. 다시금 비어버린 손은 종이와 깃펜을 찾아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잠시 물끄럼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으로 보이는 지크프리트를 보던 라그렛은 저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두 번 정도 접었다. 머리와 책상 사이에 깨지 않도록 살살 끼워넣어 베개처럼 베게 하고 나서야 라그렛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도, 오늘도 어쩐지 이상하기만 한 하루다. 내일은 이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걸. 짧은 한숨을 내쉬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가 밤을 새 해 온 과제들을 옆에 끼고 자리를 떠났다. 그곳에는 그렇게 곤히 잠든 지크프리트와 그 곁의, 라그렛의 필체로 또박또박 쓰여진 작은 쪽지만이 남았다.
「새 과제는 없고, 대신 내줬던 과제 다시 제대로 해와. 목도리는 안 돌려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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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한낮의 따스한 햇볕을 느껴본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네일은 정자세로 누운 채 한참이나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곗바늘이 째깍, 하고 3 쪽으로 약간 움직였다. 새벽에 비교적 일찍 잠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의 하루의 반을 잠으로 보냈다고 할 만 했다. 한 번도 깨어나지 않고. 네일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오래 누워만 있었기 때문일까, 영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편하게 자본 것도, 그 와중에 한 번도 깨지 않은 것도 드문 일이었더랬다. 이내 네일은 픽 웃고는 짧게 마른세수를 했다.
많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지금 나. 문득 깨닫게 됐다.
네일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올려둔 안경을 손에 쥐고, 캘린더 또한 집어 들었다. 안경은 쓰고 캘린더는 무릎 위에 올려둬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손을 뻗어 캘린더의 제일 앞으로 넘기자 2015년의 9월이 나왔다. 2015년은 참 이상한 해였다. 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살기로 마음먹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도 생겼다. …정말로, 정말로 이상하고 또 이상한 일인데. 그마저도 기쁘고 행복해서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낯설지만 좋은 느낌. 캘린더 한 장을 넘기니 10월이 나왔다. 네일은 제 심장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심장이 뛰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한참을 더 넘겨서 다시금 2016년의 7월.
며칠 전은 제 생일이었다. 졸업 직후 따로 집을 구해 나와 살게 됐다는 걸 전하면서, 갑작스레 생긴 정적을 틈 타 넌지시 7월 6일. 이라고 말했던 것은 일종의 변덕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고, “내 생일.” 하고 덧붙여 말하자 웃음을 터뜨렸었다. 그 웃음의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떠들썩한 생일은 아니었으나 인생 최고의 생일을 보냈다고 말 할 수 있었다.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나도 행복했으므로.
그렇게 생일을 지나 18살이 되었다. 18살은 네일에게 있어서 조금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나이였다. 딱 이 나이 때에 형이 자신을 감싸다가 어머니와 함께 죽었다.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형이 살아야했을 인생을 대신 살 것이라 마음먹고, 오로지 형만을 좇아 살았었다. 중간에 기분 나쁜 열등감으로 변질되었을 정도로 집착했다. 18살……. 그래서 이 나이를 넘어 살지는 못 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아니, 생각해왔었다. 과거형을 쓰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앞으로는 온전히 저만의 삶을 살아갈 터다. 어떤 형태로든 연인의 곁에서. 스무 살이 넘어도, 한창 아름답고 꽃다울 나이를 넘어도, 수명이 다해 죽을 그 때까지도.
네일은 침대에서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켰다. 갑자기 하고 싶은 게 생겼다. 혼자 외출하는 건 산책을 빼면 오랜만이 될 듯싶다. 마법 세계는 별로고, 아마도 머글 세계 쪽으로 가야겠지. 무작정 필요한 곳을 찾아갈 생각이라, 시간은 최대한 많이 필요했다. 네일은 욕실로 쏙 들어갔다. 닫힌 문 틈 사이로 작게 물줄기 소리가 새어나갔다.
* * *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고,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네일이 찾아낸 곳은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방이었다. 다이애건 앨리나 호그스미드 쪽으로 갔으면 시계방쯤이야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았겠으나, 마법사가 운영하는 시계방은 곤란했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모르는 영국 한복판의 시내 여기저기를 헤짚고 다녔던 것이다. 네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계방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 하고 울리며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안으로 들어오자 약간 진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닥 좋아하는 류의 냄새는 아니었다.
“어서오세요.”
맞이해준 건 인상이 좋은 여인이었다. 네일은 작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고, 가까이 가 유리장 안에 있는 시계들을 물끄럼 쳐다보았다. 향수 냄새가 조금 더 진하게 났다. 아무래도 이 여인이 사용하는 향수의 냄새인 모양이었다. 한참 시계들을 둘러보던 네일은 저가 잘못 찾아온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내부의 모습, 그리고 진열되어있는 시계들에 네일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을 무슨 의미로 읽었는지 여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세요?”
“……회중시계 제작을 맡기려고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과학이 아닌 마법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야 아날로그식의 시계를 사용하지, 머글 세계에서는 전자식 시계를 사용할 것 아닌가. 머글 세계에서 시계 제작을 맡길 거라면 마법 세계의 상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시계방이 아닌, 전문적인 시계 공방을 찾았어야 했다. 흘끔 보니 그녀 또한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로 유리장 위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뻘쭘한 상황에 마른세수라도 하고 싶어졌다.
네일이 다른 곳을 알아보겠다며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즈음, 문득 그녀는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작을 할 만한 공방으로는 안 보이는 데도요?”
“안쪽에 작긴 해도 공방이 있긴 있답니다. 수리용으로 쓰는 공간이긴 한데, 제가 제작은 할 줄 모르거든요. 대신 부탁드릴 만 한 분이 계셔요.”
대신 가격이 조금 많이 나올 거예요. 엷게 웃으며 그녀는 저가 서 있던 유리장의 건너편, 더 안쪽으로 네일을 안내했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확실히 공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공간이 나왔다. “아무래도 회중시계 같은 걸 찾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보니 제작은 배워놓지 않았거든요. 원래 여기,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그 때는 주문 제작 의뢰도 받으셨던 거로 기억한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양해를 구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참 밝은 여자다, 싶다. 처음 보는 손님에게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다 늘어놓고.
네일은 눈을 돌려 작은 공방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낡은 쇠 냄새는 적어도 그녀에게서 나는 진한 향수 냄새보다는 나았다.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시계 부품들과 도구들을 둘러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네일에게 말을 붙여왔다. 아무래도 좋은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지금 바로 갈 테니 손님 잘 붙잡아두라고 하시네요.”
그녀가 빙긋 웃자 네일도 어색하게나마 따라서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작은 의자 두 개를 더 가져와, 세 개가 된 의자들 중 하나에 앉았다. “생각해놓은 디자인은 있으세요?” 네일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의자 두 개 중 하나에 따라 앉았다.
그리하여 그 여름, 네일은 약 이주일 동안 내내 먼 듯 멀지 않은 머글 세계의 시계방으로 매일 같이 찾아갔다. 디자인 협의나 주문은 첫날 방문 때 다 끝내놓았으나, 세부적인 디자인에 있어서 주문자에게 직접 보여주며 조정하는 편이 완성도에 있어서 더 좋다는 말 때문이었다. 물론 제작 과정부터 완성까지 제 눈에 다 담아두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고. 시계 안쪽에 새겨질 이름을 직접 쓰기 위해서, 이따금 은판에 글씨를 새기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는 사람이라 뺀질나게 들르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진한 향수 냄새를 두르고 다니는 그 여인과 종종 사담을 나누기도 했다. 제작을 맡아준 그녀의 어머니 또한 종종 그 대화에 낄 때가 있었으나, 제작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이야기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지 말이 없었기에 보통은 둘만의 대화였다. 물론 사적인 이야기까지는 네일이 딱 잘라서 끌고 가지 않았고, 보통은 제작하는 시계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하나는 누구 주려는 거예요? 역시 애인?”
이런 이야기들 말이다. 네일은 그 물음에 드물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방을 찾은 네일은 억지로 웃거나 애써 웃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부드럽게 웃는 건 처음 보는 일이라 그녀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여보였더랬다.
* * *
얼마만에 보는 거더라. 엘리후는 네일의 팔을 끌어당겨 그를 제 품에 안았다. 네일은 딱히 바르작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연인에게 제 몸을 맡겼다. 이렇게 저를 뒤에서 끌어안을 때면 귓가에서 미약하게 들리는 숨소리가 있어서, 묘할 정도로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으나 그래서 좋았다. 엘리후는 허리를 숙여 네일의 뒷목에 가만히 코를 묻었다. 아주 옅게, 눈치 채지도 못 할 정도의 낯선 향기가 났다. 네일에게선 찾아 볼 수 없었던, 동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향기가. 향수 냄새였다.
“네일.”
“응?”
“요새 누구 만나고 다녀?”
그 말을 듣는 순간 네일은 심장이 덜컹 할 뻔 했다. 아니, 확실하게 덜컹 했다. 엄연히 따지자면 만나고 다닌다기 보다는 시계 제작을 위해 만나는 것뿐이었으나, 어쨌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어?” 하며 얼빠진 소리만 낼 뿐 딱히 답을 내놓지 않고 있는 네일의 뒤통수만 물끄럼 바라보며 엘리후는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바로 닿는 네일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두어번 부비자 어쩐지 낯선 향기가 더 진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주아주 미약하고 딱히 유쾌하지는 않은, 그런 감각. 네일에게는 정말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류의 향기였기에 그가 쓰는 향수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던 네일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할까. 선물은 조금 서프라이즈로 주고 싶은데. 그럼 어쩌지. 엘리후에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할 자신은 전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후는 손을 뻗어 네일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입술을 깨무는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야속해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내가 괜히 이상한 생각 하게 될 것 같은데. 여자 향수 냄새가 나. 너한테서.”
“그런 거 아냐.”
그런 말을 들어버리니 저마저 괜히 불안해지지 않나. 저가 갖고 싶어져서 제작을 의뢰한 거기도 했지만 동시에 선물해주고 싶어서─동시에 회중시계 정도는 커플로 맞춰서 갖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나, 아니. 정확히는 맞춰서 가지고 있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연인을 위해서도 있는데, 괜한 오해가 생기는 건 싫었다. 네일이 시선을 저 쪽으로 돌리며 단호하게 말하자 엘리후는 푸스스 웃었다.
“알아.”
그 대답까지 듣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네일은 제 팔을 들어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시계방이 향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던 게 생각났다. 처음이야 거슬렸지, 지금은 적응 됐다보니 생각을 하질 못 했다. 그 냄새로 가득 찬 공간에 있는데다가, 향수를 쓰는 당사자와 매일같이 만나고 있으니 냄새가 안 배기가 더 힘들었을 터다. 그렇다고 그리 강하게 나는 것도 아닌데. 알아차린 걸 보니 제 연인이 대단하기도 하고, 그만큼 저에 대해 모든 것에 있어서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이야기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엘리후는 네일의 고개를 잡아 돌리고 제 고개도 슬쩍 틀어 입술을 맞대었다. 혀를 내밀자 닫혀있던 입술이 부드럽게 열리고, 그 안의 혀를 끄집어내 제 혀와 얽히게 했다. 일부러 타액이 섞이는 소리를 노골적으로 내자, 네일이 귀 끝까지 붉히는 게 보여서 엘리후는 속으로 쿡쿡 웃어버렸다. 이내 작게 뜨고 있던 눈까지 감고, 키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받아들이는 것마저 서툴러서, 가만히 있다가도 적극적으로 응해보려고 혀를 얽는 시늉을 하는 게 마냥 귀여워보였더랬다. 그 시늉이 저가 하는 키스와 상당히 많이 닮아있기에 더더욱.
숨이 막힐 즈음이 되어서야 엘리후는 입술을 떼어냄과 동시에 여전히 잡고 있던 네일의 고개도 놓아주었다. 그제야 네일은 슬며시 몸을 돌려 엘리후의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엘리후 또한 마찬가지로 네일의 허리에 팔을 둘러 마주 안았다. 향수 냄새. 의식하고 나니 쓸 데 없이 더 선명하게 느껴져선, 엘리후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역시 안 되겠다.”
어, 하는 사이에 네일은 뒤쪽의 소파로 밀려 반 강제로 눕게 됐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네일과 가만히 눈을 맞추며, 엘리후는 빙긋 웃어보였다. 채 1년을 채우지 못 한 연애 기간, 확실히 이런 쪽으로 눈치가 키워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모양이다.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었고, 사실 이대로도 귀여우니 마음에 들었지만.
엘리후는 고개를 숙여 툭 튀어나온 목젖에 짧게 입을 맞추고, 그대로 내려가 목 언저리에 입술을 대었다. 입을 벌려 약하게 물고 빨아들이자 붉은 자국이 남음과 함께 네일이 몸을 떨었다. 제 머리채를 잡으며 밀어내는 손을 맞잡아 내리며, 엘리후는 고개를 들어 네일과 눈을 맞췄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몸은 오로지 제 손으로만 온전히. 이렇게 숨김없이 이리 솔직하게 떨린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행여나 남의 손길이 닿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남의 손이 닿는다는 것부터 불쾌한 일이었고, 그래서 하는 일종의 영역표시 같은 것이었다. 불필요할 정도의 짓궂음을 보이는 행위이기도 했다.
“네가 실수한 거니까, 불만은 없지?”
“……으.”
대답 대신 작게 신음하며 네일은 잡히지 않은 한 쪽 팔로 제 얼굴을 가려버렸다. 물론 순순히 그렇게 둘 엘리후는 아니어서, 금방 그 팔을 치우고 다시 눈을 맞추며 웃어보였다. 이내 다시금 제 목에 얼굴을 묻고 흔적을 남겨가는 걸 보며 네일은 살짝 눈을 감았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게 연인의 머리칼을 잡고, 움직이는 데에는 방해되지 않도록 약하게 쓰다듬었다. 목 언저리에 닿는 혀와 숨은 그 자체로도 노골적이어서, 단순한 심술이 아니라 섹스의 전초전이라는 것쯤이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음대로 하라지. 속으로 중얼거리고 네일은 맞잡고 있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 * *
그리하여 10월을 며칠 정도 앞둔 9월의 끝자락. 거슬리는 곳 없이 깔끔하게 마감 처리까지 끝난 한 쌍의 시계를 네일은 집까지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손을 뻗어 겉면을 쓸어내리자, 세밀하게 새겨진 그림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하나에는 여름날의 해바라기가, 다른 하나에는 겨울날의 나무가. 딱히 별 이유는 없으나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았다. 시침의 끝에는 각각 푸른색 보석과 붉은색 보석을 작게 하나씩 박아놓았다. 분침의 끝에는 그보다도 더 작은, 반대색의 보석을 박아놓았고. 그리고 뚜껑의 안쪽, 오로지 서로만이 볼 수 있을 공간. 그곳에는.
2015. 10. 15
Elihu Alfieri
Neil Claes
제 손으로 직접 그리 새겼다. 그 작업까지 마치고 나자, 정말로 완성되었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깔끔하게 새겨진 이름까지 손끝으로 쓸어보고, 네일은 두 시계의 뚜껑을 덮었다. 제 것은 겨울의 나무가 그려진 것.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어두고, 다른 하나는 상자에 다시 잘 넣어놓았다. 언제쯤 주는 게 좋을까. 작년에 챙겨주지 못 했던 생일에? 너무 많이 남았는걸. 그 전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참지. 네일은 속으로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결국 오래는 기다리지 못하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불현듯 예감이 들었다. 1년이 되는 그 날에, 주게 되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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