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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라그] 여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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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뜩 흐트러진 시트 위에 놓여있던 손이 더듬거리며 연인의 손을 찾았다. 그걸 본 건지 못 본건지 반 쯤 눈이 감겨있는 눈꺼풀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라그렛은 눈 위로 닿는 익숙한 온기를 느끼며 완전히 눈을 감았다. 손은 기어코 찾아내 맞잡았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나른한 공기에 취해, 감은 눈 아래 굳게 다물려있던 입술이 작게 벌어져 한숨이 새어나왔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관계 후의 여운을 제법 길게 느끼는 청년이었다. 그 여운에 몸을 맡기다 스르르 잠드는 때가 많을 정도로. 그 연인인 지크프리트 위버는 그렇게 제 품 안에서 잠든 그가 마냥 귀여워 항상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여느 때와 지금은 조금 달라, 라그렛은 잠들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새어나왔던 한숨 소리는 금세 끄응, 하고 앓는 소리로 변했다.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볼을 살살 손등으로 간질였다. 감겼던 눈이 한 쪽만 느리게 뜨이다 이윽고 완전히 뜨였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했다.

  "안 자요?"

  먼저 입을 연 건 지크프리트였다. 라그렛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 행동에서도 졸린 기운이 풀풀 느껴져 지크프리트는 조금 웃고 말았다. 졸린 눈이 웃음 소리에 샐쭉해져선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이내 라그렛은 어리광을 부리듯 품에서 밍기적거리다 슬 그를 밀어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려 그런 라그렛을 고쳐 안았다. 라그렛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알아 듣지 못 할 말을 웅얼거렸다. 지크프리트는 쪽 소리를 내 입을 맞추며 그 입을 막아버리고, 우물거리던 입술에선 무어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안겨 있으면 더 졸리단 말이야, 같은 말로 추정되었다. 지크프리트는 알아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을 하며 한 번 고쳐안았던 라그렛을 놓아주지 않을 듯이 제법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왜 안 자요. 자자, 선배."
  "안 돼."

  싫어, 도 아니고 안 돼, 였다. 말과 동시에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해버렸다. 관계의 이름이 변한 이후로, 의식해버리는 것들이 있다. 눈빛이나 시선에서 느껴지는 숨이 막힐 정도의 애정이라던지. 버겁거나 부담스럽진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종종 낯설게 느끼곤 했다. 부드럽게 턱이 잡히는 감촉에 결국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은. 지크프리트는 잔뜩 졸음이 낀 연인의 눈가 끝을 양 엄지 손가락으로 문질거렸다. 라그렛은 기어코 그 손도 밀어내고는 대신 제 손등으로 눈가를 부볐다.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어버렸다.

  "옷이라도 입혀줄게요."
  "됐어. 귀찮아……."
  "감기 걸려요."
  "여름인데 뭐."

  여름 감기는 바보 아니면 안 걸린데. 영 무심한 투로 덧붙이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껴안았다. 습관적으로 품에 얼굴을 파묻으려다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지크프리트는 입혀주려고 집어들었던 윗옷을 입혀주지도 덮어주지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있다간, 시선이 맞닿자 옷을 대충 놓아두고는 한켠에 밀어둔 이불을 끌어와 라그렛에게 덮어주었다. 장난스레 이불로 돌돌 말아버리는 시늉도 했다. 불만스럽다는 눈빛에 차마 제대로 실행으로 옮기진 못해 어쩐지 아쉬워보였다. 라그렛은 그런 기색을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끌어와 꼬옥 맞잡았다. 장갑을 벗겨서 확인해보면 여러 방식으로 잔뜩 흠집이 나 있던 손은 꽤 전부터 조금씩 상처가 줄어들고 있었다. 라그렛은 그걸 만족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반창고를 붙여줄 일이 줄어들겠네,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 손 위로 입술을 대었다. 가만 바라보고 있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띄워졌다. 조금 볼이 발갛게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일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라그렛은 반대쪽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귀여워, 하고 입모양으로만 말하자 불퉁한 표정이 돌아온다. 라그렛은 나른하게 웃고는 그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지크프리트는 금세 표정을 풀고는 아니거든요, 하고 따라하듯 입술만 움직였다. 다시금 귀엽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왼눈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치워 빤히 바라보았다.

  "지크."
  "응?"
  "잠깐만… 1, 2, 3."

  ─됐다. 라그렛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지크프리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포개고, 떼어냈다가 다시금 깊게 키스했다. 동그랗게 뜨여진 눈은 제 손으로 감겨주었다. 아직도 마냥 어려보이기만 하는 연인은 여전히 기습적인 스킨십에 약했다.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있었으나. 연인은 자각하고 있을지, 아닐지. 궁금했지만 부러 묻지는 않는 것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제게는 귀엽게 느껴질 터다. 꽤 오래 이어진 키스를 끝내고 입술을 뗀 라그렛은 선홍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이맘 때가 되면 항상 기다리게되는 시간이다. 말을 하는 건 자신이면서도.

  "생일 축하해, 지크."

  그 말을 들은 지크프리트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사락거리며 라그렛의 옆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다간, 귓바퀴를 따라 살살 쓰다듬거나 귀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살짝 잠겨있는 목소리가 어쩐지 달달하게 느껴진다. 그건 목소리가 담아낸 말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연인의 목소리이기 때문일까. 역시 둘 다인가. 생각들의 나열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라그렛을 제 품 안으로 더 끌어왔다. 그제야 라그렛은 얌전히 안겨오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라그렛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지크프리트는 그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제 것과 같은, 같을 수밖에 없는 체향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숨이 섞여 나른해졌던 공기가 차츰 가라앉았다. 사랑스러운 사람.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지크프리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 때문에 안 자고 버텼어요?"
  "중요한거니까."
  "아침에 해줘도 되는 걸요."

  라그렛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이내 고개를 들고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봐, 잠시간 시선이 닿았다가. 내가 싫어, 하는 말이 굳이 말로 하지 않는데도 그 시선에서 느껴졌다.

  "이제 잘거야."
  "응. 잘 자요, 선배. 좋은 꿈 꿔."

  다시금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들렸다. 이윽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릴 즈음, 지크프리트도 눈을 감았다. 얼마 정도 지나 연인의 체온에 기대어 잠에 빠져들락 말락할 때, 문득 볼에 온기 하나가 사락거리며 닿아왔다. 그 뒤로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웃고 있는 라그렛이 보였다.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당신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꿈에서 만나."

  그 말은 단순한 밤인사를 떠나, 자신에게 좋은 꿈이란 너를 만나는 꿈이라는 사실을 뜻하기도 했다.


* * *


  방학이 다가오는 1969년의 초여름, 기숙사의 모두가 잠을 청하러 방으로 들어가 텅 비어버린 그리핀도르 휴게실. 시간에 맞지 않게 두 사람이 남아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제법 삭막한 분위기. 곧 5학년이 될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어린 후배를 앞에 앉혀둔 채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앞의 지크프리트 위버는 죄 지은 사람 마냥 움츠러들어선 라그렛의 눈치만 힐끔힐끔 보았다. 라그렛이 자고 있던 지크프리트를 다짜고짜 깨워서 데리고 나온 지 벌써 10분 째. 아무 말도 없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더랬다. 지크프리트는 머릿속으로 저가 혹시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하는 고민을 한참 하고 있었다. 평소 행실 문제일까, 아니면 스터디? 답잖게 맹랑하게 군 걸 뒤늦게 혼내려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까지 닿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쩌겠어. 혼이 난다고 해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터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부쩍 세상 다 끝난 모양새를 하던 당신이었기에. 그게 못내 심술이 났었다.

  "너."

  드디어 10분 여 만에 첫 마디가 떼어졌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에서 나온 목소리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완전히 화가 난 건 아니라는 뜻이니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크프리트는 움찔하고는 물끄럼 라그렛을 바라보았다. 졸음은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정적. 본래도 사이가 가까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서먹할 일일까. 물론 서먹하게 느끼는 건 일방적으로 쫄고 있는 지크프리트 뿐이었다. 휴게실이 이렇게 춥게 느껴지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며, 할 말이 있다면 빨리 말해달라고―이 말을 꺼내면 더 혼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서도― 재촉하려 할 때 즈음. 라그렛이 입술을 뗐다. 문득, 그도 어쩐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한 것처럼 보였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긴 한숨이 떼어진 입술에서 먼저 새어나오고, 말이 이어졌다.

  "요새 나에 대해서 캐고 다닌다며."
  "네?"

  혼이 나거나 꾸중을 들을 수많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생각했으나 이 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 한 것이었다. 지크프리트는 다소 멍청해보이는 표정으로 라그렛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라그렛은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를 들은 게 한두번은 아닌데, 설마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발뺌할 수밖에 없는걸요. 그런 적이 없으니까……."

  탐탁치 않다는 표정이 되돌아온다. 짚이는 게 전혀 없었다. 캐고 다닌다고? 대체 무엇을? 누가 그런 걸 말한 거지? 물음만이 이어졌다. 제법 위협적인 태도에 기가 죽긴 했으나 지크프리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캐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마냥 헤헤 웃으면서 친하다 말할 만한 사이는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가까워졌다.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물어볼 수 있을 정도의 관계는 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마음대로 끝내려 했던 스터디를 다시 시작하게 된 이후로, 그는 티가 날 정도의 친밀함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그런데 왜 제가 선배를 캐고 다니겠어요. 억울함에 목소리 조차 잘 나오지 않아서 더 억울해지고 만다. 그런 지크프리트를 읽어내기라도 했는지 라그렛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몰아세울 생각은 없으니까." 느릿하게 떼어진 말에 아랫 입술을 짓씹던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 하나에 닿아,

  "…설마 선배 생일 물어보고 다닌 거요?"
  "아, 그렇게 말했던가. 아무튼 캐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지크프리트는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당사자의 귀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생일 딱 하나만 물어보고 다닌 거기에 설마 그거에 사람을 캐고 다닌다는 말을 붙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애초에 꽤 많은 사람에게 오래 묻고 다녔는데도 알아내지 못 한 정보였다. 나름 그와, 설령 과거형이라 하더라도 친해보였던 사람들에게까지 물었음에도 다들 모른다 이야기했다. 고의로 말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이 넓은 호그와트에 사람 생일 하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니. 제법 비참한 기분을 맛보았던 게 당장 며칠 전의 일이 아니던가. 과할 정도의 비밀주의라고 투덜거리기도 했었다.
  뚱한 시선이 지크프리트 위버에게 가닿는다. 그래도 라그렛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제법 풀려 있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몇 번이나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리듯 제 팔을 두드리던 라그렛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소문이 얼마나 와전되기 쉬운 놈인지 잘 아는 소년이었다. 크리스마스 휴일이 끝나고, 그 겨울 대연회장에서 저가 벌였던 일이 어떤 소문이 되어 돌고 있는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일 자체를 벌이지 않았겠지. 되려 인생의 교훈 같은 것을 얻었다. 무엇에 대해서든 소문은 믿을 만한 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련은 사람을 더 성숙하게 만들고, 성장을 위해서는 아픔이 동반 된다지. 어딘가의 명언 같은 것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음이 사실이었다.

  "…그런 건 내게 물어도 됐을텐데."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서요."

  라그렛은 작게 혀를 찼다. 호그와트에 다닌 4년,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걸 궁금해 한 사람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가르쳐주지 않은 건 가르쳐줄 필요성을 못느꼈기 때문이다. 가르쳐줄 이유도 없다. 생일이랍시고 요란하게 축하해주는 건 귀찮고, 선물은 받아봤자 낭비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생일 선물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항상 시끌벅적한 그리핀도르식 생일 축하는… 더더욱 받고 싶지 않다. 라그렛은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먼저 말을 꺼내놓고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니. 적어도 화를 낼 만한 일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눈치나 사회성이 0에 수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생일을 알아내려는 행동 뒤에 어떤 감정과 이유가 깔려 있는지는 충분히 알 터다. 당신이 태어난 날을 축하해주고 싶다는, 순수한 호의를 기저에 두었을테지. 눈 앞의 어린 후배 또한. 그런 걸 가지고 혼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얼마 없을 것이다. 아무리 저가 깐깐하고 까칠한 선배라 하더라도 이번 건에 대해 지크프리트를 꾸짖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생일 축하는 깜짝 선물로 해주는 게 더 좋아요. 그리 덧붙인 지크프리트는 우물쭈물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르쳐주기 싫으시면 안 가르쳐주셔도 괜찮아요."
  "정말로?"
  "…가르쳐주신다면 정말로 좋겠지만요."

  이건 그냥 가르쳐 달라는 말이 아닌가. 라그렛은 답잖게 헛웃음을 흘렸다. 떼를 쓰는 방법도 있을 텐데. 지크프리트 위버는 항상 대부분의 화제에 대해서 한 발 빼는 시늉을 하곤 했다. 제게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은. 저가 그렇게 어려울까. 의문의 답은 금방 찾아냈다. 어려울 게 당연하다. 저가 지금까지 눈 앞의 후배를 대해온 방식에 대해 생각하자면 그렇다. 요새 들어 많이 나아지고 있다 해도, 여전히 쌀쌀맞기만 한 선배겠지. 이런 사람을 뭐하러 붙잡고, 어째서 생일 같은 걸 축하해주고 싶어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눈 앞의 아이가 그만큼 상냥하기 때문일까. 모두에게 그런 무분별한 다정함을 베푸는 걸까. 아니면…….

  "…생일은 이미 지났어."

  그 말에 지크프리트는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도,

  "어차피 생일은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그리 말하고는 웃는 거다. 이런 감정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믿고 따랐던 어머니는 절대로 따뜻한 사람은 되지 못했고, 가까이 지낸 친구들─이제는 대부분이 저를 저버린 슬리데린의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핀도르가 불필요할 정도로 활기차고 정이 깊어보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글쎄.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인 것 같았다. 다수가 아닌 한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의 깊이가 이리도 깊고 밝을 수 있었던가. 사람은 누구나 낯선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곤 한다. 동시에 호기심을 갖기도 하고. 지금의 저는 어느 쪽을 더 깊게 갖고 있을지. 애초에 닿고 싶어 하는 건지. 그 날 이후로 몇 달이나 지났건만, 아직 라그렛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알지 못한 채로 안온한 온기에 기댈 것이라 생각한다.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제와서 주위를 둘러보면 겨울을 닮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 봄, 내지 여름의 향취를 가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태어난 날을 떠나서 말이다. 그리핀도르의 아이들은 다 그랬다. 저 혼자서만 겨울에 사는 것 같았다. 따뜻한 계절로 끌어올려지면 어떤 기분일까. 무엇을 보게 될까. 애초에 자신이 있어도 되는 곳인가. 상념이 길어졌다.

  "4월 24일."
  "…!"

  지금 활짝 웃는 너는 확실히 여름이다. 너무나도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잠시 겨울에 있다가 이제는 완연히 여름으로 빠져나온 네게 겨울이 옮아가지는 않을까, 네게. 저가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걱정할─ 걱정하는건가. 아무튼, 그럴 일인가 싶어서 라그렛은 생각을 잘라냈다.

  "기뻐요. 기억해둘게요."
  "네 생일도 말 해."
  "에."
  "내 생일만 쏙 듣고 말 생각인가."

  지크프리트는 제 볼을 긁적였다. 마치 대단한 건 아니라는 듯이. 내 생일은 대단한 것처럼 취급했으면서? 라그렛은 고개를 기울였다. 알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녀석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이라는 게 다 그렇겠지만은.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독하게도 자존감이 낮은 아이라는 것. 기실 그건 지크프리트 위버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자존감이라면 저도 충분히 난도질되어 있었다. 조각조각 직접 잘라내었다.

  "그러고보니 얼마 안 남았네요."
  "방학 중인가봐."
  "네… 6월 20일이에요."

  6월 20일. 속으로 한 번 곱씹었다. 호들갑스러운 파티는 못 하겠군. 집에서 할 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어쩐지 그러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그렛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의 정적이 되돌아왔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있던 라그렛은 문득 지크프리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라그렛의 앞에 섰다. 새삼 정말 작은 아이다. 저가 2학년일 때엔 이렇게 작지 않았던 것 같은데. 라그렛은 무심한 눈을 한 채로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잡아 당겨 제 품에 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크기는 나쁘지 않다. 작년부터 생각한 거였다. 지크프리트는 어버버거리며 그의 품 안에서 낑낑거렸다.

  "네가 내 생일을 축하해주겠다면 나도 네 생일에 편지라도 보낼거니까, 받으면 답장해."
  "네? 네… 네!"

  업어주기야 종종 업어주었지만 안아보는 건 꽤나 오랜만의 일이다. 울고 있는 걸 차마 무시하고 갈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안아주었던 게 벌써 제작년과 작년의 일이라니.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며 라그렛은 눈을 감았다. 그대로 소파에 풀썩 누워버렸다. 사람의 체온이란 참으로 포근한 것이어서, 이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곤 했다. 라그렛은 그런 감각을 제법 좋아했다. 사실 인정하고 있기도 했다. 위로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시간 후에, 지금은 제법 평화로워지긴 했지만 되려 그 평화로움이 우울함을 불러오곤 했다. 안온함에 기대는 것. 아주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부디 그렇기를. 이런 생각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크프리트는 천천히 라그렛의 등을 토닥였다. 라그렛은 딱히 말도 하지 않았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었다.

  "나는 파티 같은 귀찮은 거 싫으니까, 내 생일 소문 내고 다니지도 말고."

  그 말에는 대답이 없다. 라그렛이 째려보자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라그렛은 불편한 숨을 작게 내쉬었다.


* * *


  "생일엔 휴가 좀 달라 그래."
  "어떻게 그래요. 일인데."

  게다가 무려 선배를 먹여 살리는 일이라구요. 장난스레 키들거리며 지크프리트는 제 연인을 끌어안았다. 라그렛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 누굴 먹여 살려? 이어진 말에 지크프리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몬트로즈 맥파이즈 선수의 연봉은 어느 정도일까. 딱히 물은 적은 없어서 모르는데, 상상 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진 정도라는 것 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내 지크프리트는 생일인데 좀 띄워주지 그래요, 하며 볼멘 소리를 냈다. 그것마저도 라그렛은 웃어 넘겨버렸지만은. 짓궂어, 정말. 지크프리트는 투덜거리며 라그렛의 볼을 간질였다.

  "애초에 생일 다 지나서야 집에 온 게 누군데."
  "그게 그렇게 서운해요?"
  "……그래."

  유치하다고 생각하는지 라그렛은 대답 전 조금 머뭇거렸다. 라그렛은 제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볼을 제법 노골적으로 간질이기 시작하는 연인의 손을 피해버렸다.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건 안다. 그저 정말로 서운할 뿐이다. 어린 시절에는 생일 같은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나이를 먹을 수록 이런 거에 집착하게 됐다. 연인의 생일이라 그런 걸수도 있고. 다물려 있던 입술 틈새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삐져있어봤자 뭐하겠어. 손을 피한 게 퍽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지크프리트를 라그렛은 제법 세게 끌어안았다. 그래도 하루가 다 지나가진 않았으니까. 그걸 위안으로 삼기로 한다.

  "생일 되자마자 선배가 축하해줬잖아요. 그거로 충분해요, 전."
  "같이 있지 않아도?"

  그건 좀……. 라그렛은 머쓱하게 웃는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헤짚어버렸다. 자꾸만 심술부린다며 웅얼거리는 말도 가볍게 무시했다.

  "제일 먼저 축하해주는 건… 약속 한 거니까."
  "응?"
  "아냐, 아무것도."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라그렛은 저가 잔뜩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실제로도 별 거 아닌, 약속 아닌 약속이었다. 딱 저에게만 중요한, 지크프리트 위버는 기억할 지 못 할지도 모르는 약속.


* * *


  새 학년이 시작될 9월. 호그와트 행 급행 열차 앞에서 기어코 지크프리트를 찾아낸 라그렛은 제법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정확히는 서운해하는 표정에 가까웠으나, 지크프리트가 느끼기엔 험악함에 가까웠다. 지크프리트는 놀란 눈을 하고 라그렛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저를 찾아온 것도 놀랐지만, 이런 표정을 하니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배……? 겨우겨우 입술을 떼 그를 부르자 라그렛이 제 이마를 짚었다.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거에 대한 자책이 조금 섞여있었다. 대체 나는 왜 서운해하는거지? 기를 쓰고 찾아내놓고 의문에 빠져버린다. 일단 이렇게 찾아내버렸으니 용건은 말해야했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한심하기만 한 용건이라고 해도. 말을 주워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한 행동도 취소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답장 왜 안 했어."
  "답장이요…?"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 되돌아왔다. 어쩐지 두달여 전 억울해하던 표정과 겹쳐져, 라그렛은 힘이 탁 풀리고 말았다. 동시에 괜히 짜증도 났다. 이번에는 편지를 보내겠다 말까지 해놓았으니 발뺌할 수도 없을 터다. 그런데도 지크프리트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뭔가 잘못 안 건가? 그렇지만 답장을 받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나름대로 정성껏 생일 축하한다는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부엉이가 물고 가 하늘 너머로 사라지는 것까지 보았는데. 멀뚱거리는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중간에 편지가 유실되기라도…….

  아.

  "…생일 축하한다고, 편지 보낸다고 했잖아."

  힘이 빠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 했을까. 라그렛은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여전히 당황한 표정의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응, 기억하고 있어요.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분명 보냈는데…."
  "하루 종일 선배 편지만 기다렸는데, 다른 애들 편지는 와도 선배 편지는 안 오더라구요. 그래서 으음… 까먹으셨나 했어요."

  별로 기억할 만한 것도 아니니까. 가볍게 덧붙이는 것 치고는 당시에 제법 속이 상했었다는 게 눈에 보였다. 할 말이 사라지고 만다. 순혈 가문에서 키우는 부엉이가 머글 세계에 편지를 전해줄 리가 없지 않나. 당장 저가 알기에도 그렇게 교육을 시켜놓았다고 들었다. 답잖게 들떠선 그걸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애초에 왜 그렇게 들떠 있었는지. 최근 들어 이해 못 할 행동만 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라그렛은 물끄럼 지크프리트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선지 지크프리트는 웃고 있었다. 억울하게 혼이 날 뻔 했는데 이 녀석은 웃음이 나오는 건가. 그리 물을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이번에는 명백하게 제 잘못이었으므로. 보낸 것은 맞지만 받지는 못했고, 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야하는 데도 까먹고 있었고, 그걸 가지고 멋대로 화를 내려 했다. 제멋대로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부엉이가 실수라도 했나봐요. 슬프다… 그래도 괜찮아요."
  "…왜?"
  "어쨌든 써서 보내주긴 한 거잖아요. 그거로 충분히 기뻐요."

  지크프리트 위버는 자꾸만 라그렛 블랙로즈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답을 못할 때가 많은지, 라그렛은 도무지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도 알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지크프리트는 헤 웃으며 라그렛을 껴안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기뻐할 수가 있나? 어째서? ….

  "내년에는 답장을 두 배로 써야겠어요."
  "…두 배?"
  "선배는 써줬는데, 저는 받질 못해서 답장을 못 썼잖아요. 그러니 올 해 분량까지 합해서 두 배죠."
  "그런 수고로운 짓 하지 마."

  지크프리트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전혀 수고로운 짓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왜… 이 정도로 잘 해주는 거지.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일에 대해 라그렛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나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마냥 입술만 달싹였다. 마주 안아주지도 못했다. 그냥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서, 겨우겨우 대답만을 입에 담아낼 뿐이었다.

  "답장을 두 배로 써야하니까, 내년에도 꼭 보내주세요."
  "…그래."

  내 불찰이니까.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라그렛은 생각 난 말을 정리도 하지 않고 천천히 목소리에 담아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대책 없이 말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계속 보낼거야. 네 생일을 처음 축하해주는 건 내가 할거니까."
  "그, 그렇게까진 안 해주셔도 돼요!"
  "됐으니까 말 들어. 매년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참으로 어이 없는 억지였다. 하지만 이런 억지도 너는 기꺼이 받아 줄 것이라고. 그런 묘한 확신이 있었다.


* * *


  이후에는 얼굴이 새빨개져선 어쩔 줄도 몰라 했던가. 잠시 어린 지크프리트 위버를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져, 라그렛은 웃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땐 별 것 아닌거로도 뻘뻘거리고 쑥스러워하곤 했는데. 요새의 지크프리트는 너무나도 뻔뻔해졌다. 그런 점도 좋긴 하지만. 그 약속은 실제로도 계속 지켜왔다. 생일 전날에는 항상 꼬박꼬박 집에 불러왔고, 오지 못하는 해에는 편지를 보냈다. 매년 네 생일에 제일 먼저 축하의 말을 전하는 건 나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법 기쁜 일이다. 앞으로도 그럴테고. 라그렛은 슬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가렸다. 그런 약속은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너와는 그런 약속들을 많이 해놓았다. 게다가 약속이라 하기엔 뭣할 정도로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행동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랜 시간 너를 좋아해왔나보다, 나는. 손 끝이 간질거렸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자 사랑하는 선홍빛과 눈이 마주쳤다. 우울감에 빠져 있었던 시절의 네게서도 나는 여름의 향기를 맡았다. 왜냐하면, 나의 여름은 너였으니까. 기나긴 겨울을 끝내고 사랑하는 계절로 접어들게 해준 것은 항상 너였다. 그런 너를 내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나의 여름. 그에 어울리게 여름의 시작에 태어난 아이. 네 존재로 인해 나의 여름도 시작되었다고, 그런 낯 간지러운 말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지만. 항상 네 생일이 되면 여름의 시작을 자각하곤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었다. 네가 생각나서. 더위에 시달리는 건 질색이었지만, 덥다는 핑계로 서늘한 네 체온에 기댈 수 있었던 건 제법 좋아했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왼손을 맞잡았다가, 제 입가로 끌어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은 그대로 미끄러져 약지에 닿고.

  "어?"
  "바보 같은 소리 내긴. 선물이야."

  입술이 닿았던 약지에 반지 하나가 끼워졌다. 심플하면서도 제법 비싸보이는, 얇은 실버링. 라그렛은 순순히 지크프리트의 손을 놓아주었다. 지크프리트는 눈을 깜빡이며 반지 위에 새겨진 이름을 만지작거렸다. 예민한 손 끝에서부터 연인의 이름이 느껴졌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표정이 제법 마음에 들어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는 입을 맞췄다. 평소보다 농도가 더 진한 키스였다. 입술이 떼어지자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을 다급하게 끌어 안았다. 생일 선물은 서프라이즈로 주는 게 좋다고, 누구씨가 먼저 한 말인데. 그건 기억하려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라그렛은 느리게 미소지었다.

  "…어쩌지."
  "응?"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그럼 그냥 좋아하면 돼, 하고 가볍게 말하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였다. 상상 이상으로 더 좋아해줘서 저마저도 기뻐졌다. 정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듯 지크프리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연인을 마냥 귀엽게 바라보던 라그렛은 천천히 입을 열어 제 말을 이어나갔다. 생일 선물이라기보다는 예전부터 주고 싶었다는 둥, 같이 가서 맞추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둥, 손을 자주 잡아서 그런가 네 손 크기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둥……. 한참이나 재잘거리다가 라그렛은 문득 말을 끊었다. 얼마 지나, 사랑하는 선홍빛을 가만 마주하며 말을 붙였다.

  "행복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환하게 웃는 연인의 얼굴이 보였다. 사실상 대답은 필요치도 않았다. 정해져 있었으니까. 나는, 그거면 됐어. 더 필요한 게 있을리가. 라그렛은 눈을 내리감으며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지크라그] 가장 특별한

 


* 둘다 틀어주시면 감사합니다. 하나는 레이니 무드예요.


-



1.


  매년 이맘 때 즈음이 되면 항상 받곤 하는 편지들이 있다. 눈에 익은 부엉이가 물어다 준 편지를 라그렛은 느릿한 손놀림으로 받았다. 제 할 일을 마친 부엉이가 몇 번 푸드덕거리며 날개짓을 하더니 먼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모습에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꽤 길었다. 이내 라그렛은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편지의 내용은 뻔했기에 구태여 그걸 확인하기 위해 편지를 펼치는 것조차 수고롭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매년 똑같은 내용으로 쓰이는 답장을 보내는 행동은 더더욱 수고로웠다. 올해의 답장에는 내년부터 이런 편지 보내지 말라는 문구를 덧붙여 놓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라그렛은 침구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런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들은 대개 매년 고집스레 똑같은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니, 그런 내용으로 답장을 보낸다고 해봤자 딱히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지만 말이다. 짧은 손짓으로 양피지와 깃펜을 가져왔다. 양피지 위에 글씨가 수놓아지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필요 없다, 와 이런 편지도 필요 없다. 짧은 두 문장이 연이여 쓰였다.
  라그렛은 반듯하게 접어 봉투 안에 넣은 편지를 들고 창문 근처의 새장으로 다가갔다. 이른 시간인지라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까만 부엉이가 눈에 들어왔다. 새장 문을 열고 손등으로 날개를 간질이자 부엉이의 눈이 뜨였다. 라그렛은 밖으로 머리를 들이민 부엉이의 부리에 편지봉투를 물려주었다. 잠이 많고 게으른 부엉이지만 제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잘 아는 똑똑한 놈이다. 잽싸게 편지봉투를 입에 문 부엉이는 열어둔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부엉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시선을 돌려, 침대 위에 올려둔 편지를 눈에 담았다. 간단한 안부와 필요한 것을 묻는 형식적인 편지였다. 오늘 하루 종일, 그리고 내일까지 비슷한 내용의 것이 잔뜩 도착할 터다. 올해도 편지들과 답장에 시달릴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권태로움에 시달리고 만다. 라그렛은 바닥으로 편지를 대충 치워두고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제게로 또 하나의 편지가 오고 있다는 것도, 그 편지는 더더욱 귀찮은 내용인 것도 모르는 채로 라그렛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래서 셀레브리티는 피곤하다니까, 하며.


2.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나라에도 어쨌든 봄은 오기 마련이다. 봄이 깊어가고 여름을 준비하기 시작할 영국의 4월, 그 끝무렵. 다른 계절보다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빈도가 잦은 건 사실이었으나, 영국인 게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듯 런던에는 심심치않게 비가 내렸다. 3월의 바람과 4월의 비가 5월의 꽃을 피게 한다지. 그렇다면 4월에 피는 꽃은 비를 받아내며 피어나는 꽃일까.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라그렛은 유려한 손짓으로 지팡이를 품 속에 넣으며 마법부 중앙홀로 들어섰다. 많이들 퇴근한 후의 시간이라 이따금 오가는 사람을 빼면 넓은 홀의 구석 벽에 혼자 기대어 서 있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저를 흘끔거리는 시선이 완전히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고, 애초에 없으면 허전하다 느낄 정도로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그런 시선을 익숙하게 여겼다. 호와 불호에 대해 따지자면 전자에 가까웠지만.
  어찌되었든 빨리 와준다면 좋을텐데. 오러 사무국은 야근을 너무 많이 시킨다며 라그렛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앙다문 입술 틈새로 새어나온 한숨 뒤로 어렴풋 빗소리가 들려왔다. 제 몸에도 비냄새가 스민 것 같았다. 지크프리트가 올 때 즈음에는 비가 그쳤으면 한다. 라그렛은 적당히 비가 오는 지금 같은 날을 좋아했으나, 적어도 그가 알기에 지크프리트 위버는 맑은 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랬다. 누군가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던가. 그 말대로 저가 태어난 4월을 잔인한 달이라 여겼던 때가 분명히 존재했다. 이제는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어디까지나 과거에 불과한 생각이었다. 지금의 감상으로 누군가가 4월에 대해 묻는다면, 두 사람을 위해 그려놓은 듯한 달이라 생각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하곤 했다. 달의 반절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반절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계절. 이제는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으리라.

  "선배?"

  그닥 길진 않았던 기다림의 끝. 뜻밖에도 목소리는 뚫어져라 보고있던 승강기가 아니라 옆쪽의, 저가 들어왔던 마법부 입구에서 들려왔다. 라그렛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돌렸다. 홀딱 젖은 채로 저를 보고있는 지크프리트가 눈에 들어왔다. 올 때 즈음에는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무색하게도, 아직까지 많이 오는 모양이었다.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라그렛은 픽 웃어버렸다. 오랫동안 벽에 붙어있던 등을 떼내고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조용한 홀 안에 구두굽 소리만 울려퍼지던 1초, 2초, 3초. 이윽고 발을 뗀 지크프리트는 곧장 달려가 라그렛을 와락 껴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 흠뻑 젖어있다는 걸 깨닫고 곧장 놓아버렸지만 말이다. 라그렛은 잠시 웃어버리고는 자신 쪽에서 지크프리트를 안아버렸다. 습한 비냄새 너머로 본래부터 존재감이 옅었던 체향을 잡아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에게 닿지 않도록 팔을 멀리 움직여 물기를 탈탈 털어낸 후에야 그를 마주 안았다.

  "비 많이 맞았네. 외근 다녀오는 길?"
  "응… 혼자 뒷정리를 맡았더니 생각보다 늦어졌어요."

  지크프리트는 어색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라그렛은 작게 혀를 차고는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헤짚어놓다간 물기를 털어주었다. 말려줄 목적이라면 지팡이를 꺼내는 게 나았겠지만.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감겨오는 머리칼의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 좋았으면 좋았지. 어느새 꼬옥 감은 눈두덩 위를 엄지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다가 그대로 손을 올려 지크프리트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여전히 감고 있는 눈 위에 부드럽게 입술을 부비고, 드러난 이마에도 입을 맞추고. 애교스럽게 볼을 부비고 나서야 지크프리트는 반 정도 눈을 떠보였다.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거리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원래 그런 건 후배들한테 시키는거야. 몇년 차인데 아직도 요령이 없네." 작게 소근거리자 칭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지크프리트는 선배가 오늘 늦는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투덜거렸다. 여전히 웃는 표정을 하고 있는 라그렛은 삐죽 튀어나온 입술 위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떨어져나갔다. 그러자 결국 지크프리트의 표정은 다시금 풀어져버린다. 결국 이럴거면서. 키득거리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허리를 당겨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 늦을거라고 어제 저녁부터 잔뜩 칭얼거렸던 사람이 어쩐 일이에요?"
  "도망쳤지. 술자리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선배가 빠지면 안 되는 자리였던거 아닌가."

  라그렛은 흠, 소리를 내고는 괜시리 시선을 한 번 피해버렸다. 지크프리트는 그런 라그렛의 볼을 스치듯 매만졌다. 금세 라그렛은 그 손 위로 제 손을 올려 꽉 맞잡았다.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길 밑으로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지 지크프리트의 입술이 열렸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어 라그렛은 그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짧게 겹쳤다가 뗐다.

  "퇴근은?"
  "금방 정리하고 올게요."

  잠시의 시간도 아쉬웠다. 맞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고는 라그렛은 미련이 잔뜩 남은 눈으로 가만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웃음 소리를 흘리며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어깨를 잡더니 볼 위에 쪽, 소리를 내며 입맞췄다. 잠깐만 더 기다려달라는 속삭임은 덤이었다. 그런 주제에 떨어져나가는 손길은 마찬가지로 미련을 뚝뚝 흘리고 있지 않나. 어린 연인이 어른스럽게 굴려는 것에 대해 무어라 할 이유는 없었고, 그건 그것대로 귀엽게 느껴지기만 해서. 지크프리트가 저를 스쳐지나갈 때까지도 딱히 지적은 않았다. 언제까지 귀여울 생각이냐는 둥의 실없는 생각만 흘릴 뿐이었다. 괜히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오는 건 참을 수가 없어서 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시야 안에서 지크프리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즈음에야 라그렛은 다시금 벽에 기댔다. 바로 지금처럼 기다림마저 즐거워질 때가 종종 있었다.


3.


  "그런데 정말로 혼자 쏙 빠져나와도 괜찮았던 거예요? …아, 또 말 안 듣는다. 안으로 좀 들어와봐요."

  나랑 붙어있기 싫어요? 시무룩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말에 라그렛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성인 남성 둘에 우산은 하나. 하나를 가져왔다는 건 속셈이 있다는 게 뻔히 보이는 일인데 저리 말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붙어있고 싶어서 딸랑 하나만 가져온 거잖아.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눌러 참고는 라그렛은 한참이나 키득거렸다.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붙어있고 싶다는 흑심과 별개로, 연인이 비에 젖는 걸 원하진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몇 번 더 웃음 소리를 흘리고는 부러 더 몸을 붙이더니 팔짱까지 꼈다. 이제 됐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까처럼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빠르게 누그러졌다. "이렇게 귀여워서 어쩐담." 여전히 웃음기 섞인 말에 지크프리트는 못 들은 채를 했다. 그마저도 귀엽게 보인다는 말을 라그렛은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대신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걱정이 많네. 다들 집에 일찍 갈 수 있어서 오히려 좋을걸. 아니면 자기들끼리 놀고 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선배 생일 파티인데."
  "답장으로 필요 없다고까지 말해뒀다니까. 생일 파티 해줄거라고 전날에 통보하는 사람이 어딨어? 애인 있는 것도 알면서. 늦게까지 붙잡아두려는 못된 심보들이잖아, 아주."

  결국 지크프리트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럼, 당연하지. 퉁명스럽게 이어지는 말에 지크프리트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제 팔짱을 낀 라그렛을 제 쪽으로 더 당겼다. 저항없이 자연스레 당겨져오는 게 퍽 사랑스럽다. 샛노란 눈동자가 지크프리트를 향했다.

  "응, 그런 거면 안 되죠."
  "왜?"
  "선배는 저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요."

  무심코 이유를 물었던 라그렛은 눈을 깜빡였다. 지크프리트는 자기가 뭐 잘못 말했냐는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교차하는 시간이 꽤 길게 늘어지고. 느리게 옮기던 발걸음도 우뚝 멈추어섰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손에 쥐어져있던 우산을 제 손으로 가져왔다. 다른 손으로는 그대로 그를 벽 쪽으로 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뒷걸음질하던 지크프리트의 등이 벽에 닿았다. 갸웃하며 저를 빤히 쳐다보는 행동에 라그렛은 그 어깨를 꾹 잡았다. 까만 우산 아래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친 건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라그렛의 손으로 옮겨졌던 우산이 천천히 기울어지다가, 이내 스르르 땅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비게 된 손으로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껴안았다. 입맞춤이 더 깊어졌다. 몸 위로 토도독 빗방울이 떨어지고, 체온이 식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술이 겹쳐지고 혀가 얽히며 두 사람의 온기로 자꾸만 달아올랐다. 갈 곳을 잃었던 손이, 팔이 제 허리에 감기자 라그렛은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고개를 틀어 몇 번이고 연인의 혀와 입 안을 탐했다. 숨이 부족해질 때까지 조금도 밀어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술이 떼어지고, 더운 숨이 오갔다.

  "집 앞인데 그새를 못참았어요?"
  "…네가 너무 사랑스러운 말을 하니까."

  빗줄기 아래에서 톡 이마를 맞대며 라그렛은 작게 웅얼거렸다. 저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요, 라. 몇 번이나 속으로 곱씹었다. 그런 말을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욕심이 생기면 죽이려고만 하는 아이였다. 적어도, 제 기억 속에선. 그래서 그 말이 이렇게 기쁠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한 욕심이라도 부려줬으면 했다. 지크프리트는 머쓱한 듯 제 뒷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빗물에 젖어가는 라그렛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연인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데, 그렇게 묶였다는 이유로 이런 말을 하게 돼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그치만, 저는 선배가 조금이라도 더 즐겁고 행복해하는 쪽이 좋아요. 꼭 제 곁이 아니라도요."

  라그렛은 한 번 크게 숨을 토해냈다. 연인이 되었으니 이제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라고. 말을 삼켰다. 대신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바보야."

  아닌데요…. 가늘게 이어진 대꾸에 웃음을 참으며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더 세게 안았다. 안 놓아줄 듯이 안아버렸다. 도저히 저가 느끼는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겠어서. 한때 똑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그랬다. 그래서 다른 이유 때문도 있었지만 이 이유 때문으로도 지크프리트 위버와의 관계에 있어서 저가 잘 한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곤 했다. 이제는 더이상 하지 않는 고민이다. 설령 잘 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저가 꼭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다짐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네 곁이 아닌 곳에서 행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그러하니 너도 그럴 것이라 믿기로 했다. 제 행복 안에 지크프리트 위버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응."

  그렇네요. 뒷말은 속으로만 하고 지크프리트 또한 제게 기대오는 라그렛을 꽉 껴안았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지금보다 더 사랑스러워지면 어쩌지. 그럼 나는 받아버려서 가지게 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감정이 두근거리는 묘한 감각 속에서 라그렛은 눈을 감았다. 뒷머리를 쓸어주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잠시 제 몸을 맡겼다. 이어진 정적.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진 않았으나 어쩐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느낌 후에야 지크프리트는 입을 열었다. 오래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선배. 응. 이제 들어가요. 응. 짤막한 대꾸만 입에 담으며 라그렛은 자꾸만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눈 앞의 어린 연인에게라도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4.


  3월의 바람과 4월의 비가 5월의 꽃을 피게 한다. 그렇다면 4월에 피어나는 꽃은 제 몸으로 비를 받아내며 피어나는 꽃이 맞다. 꽃의 계절이라는 5월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을 뿐이었다. 5월의 꽃보다 강인하고, 그렇기에 이따금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게 4월의 꽃이었다. 제 생각으로 낸 결론이었다. 라그렛은 머리에 남아있는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잡생각을 이어나갔다. 지크프리트는 그런 라그렛을 물끄럼 바라보다가 침대 위에 놓여진 빈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라그렛은 그를 한 번 흘끔 보고는 손을 꼬옥 맞잡아주었다. 제 머리에 대충 올려두었던 수건도 치워버렸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탓인지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곧 12시, 날이 바뀔 때를 앞둔 시각. 길게 한숨을 내쉬곤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여전히 손은 맞잡은 채였다.

  "곧 선배 생일인데 해줄 수 있는게 없네요."
  "뭔가를 해줘야만 하는 것도 아닌걸."
  "그치만 생일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난 날인걸. 그냥 지나가면 속상해요."

  제 볼에 입술을 부벼오는 느낌에 라그렛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손을 들어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강아지 마냥 머리를 부벼오자 다시금 웃음이 새어나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를 좋아한다. 지크프리트 위버가 라그렛 블랙로즈를 좋아하게 된 것도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라그렛에게는 가장 특별했다. 그 또한 지크프리트를 아주 많이 좋아했기에. 지크가 라그를 좋아한다니, 라그에게 있어서는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다. 한때 좋아하고 싶지 않아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너무나도 좋아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할 정도로 좋아했고, 또 사랑했다. 그 사실이 지금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할 뿐이었다. 머릿속과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많은 말들을 생략하며 라그렛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해야 할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관계였다.

  "애초에 해줄 수 있는 게 왜 없어. 막상 생일이 되면 많이 해줄거면서."
  "으응… 아, 12시다."

  지크프리트의 시선이 짧게 시계에 머물렀다가 다시 제 연인에게로 돌아왔다. 이어질 말을 벌써 몇 번이나 들어왔는지. 그닥 가깝지 않았던 시절에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은 이상하리만치 꼬박꼬박 챙겼던 소년이 있다. 그런 소년을 끝내 사랑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일 축하해요, 선배. 오늘은 더 사랑해요."
  "그럼 나도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도록 할까."

  그게 뭐냐며 웃는 입술에 가볍게 입맞춰주었다. 입술에 닿는 온기마저 사랑스러워서.

  "네가 있어서 사랑이 있고, 또 네가 있어서 행복이 있는 거야. 그냥… 그거로 충분한 거니까."
  "…좋은 말이에요. 어디서 알아온 말이에요?"
  "내가 지은 말이면 어쩌려고. 알아보면 알 수 있을걸. 진짜 그런 걸 어쩐담."

  4월에 피어나는 꽃은 비를 맞고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 강인하고 아름답다고. 그렇다면 4월의 제라늄은 그만큼 더 강인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는 의미가 아닐지. 라그렛은 어쩐지 오늘 하루만은 장미가 아니라 제라늄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렇지만 사실, 네가 나를 보며 떠올리는 꽃이 장미라면 그저 장미여도 좋았다.

[라그렛 블랙로즈] 31일간의 기록



with 지크프리트 위버


-



1.


  "한 발만 앞으로. …아니, 오른발 말고 왼발."
  "이렇게요?"

  슬 눈치를 보고 굳이 묻기까지 하는 게 퍽 귀여워 틀렸다는 건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라그렛은 잡은 손을 가볍게 당겼다. 지크프리트가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둘 사이의 간격은 한 발자국 남짓. 딱 그정도만을 남긴 채로, 이제 청년이 되어가는 소년은 제 후배에게만 보여주던 예의 그 미소 그대로 빙긋 웃어보였다. 제 눈 앞에서 붉어진 볼을 숨기지 못하는 건, 15살. 딱 그 나이대 아이의 모습이었더랬다. 라그렛은 솔직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그것이 저가 친애하는 후배의 경우라면 더더욱 좋아할 수밖에 없다. 또 한 번 발이 엇갈리고, 스텝이 꼬인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가. 흘끔 아래를 본 라그렛은 작게 키득거리며 잡은 손을 놓았다. 떨어진 손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최근들어 자그마한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사라지는 걸 아쉬워하게 됐다.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니라 생각한다. 허나 딱히 교정할 마음이 없음 또한 사실이다. 필요성은 느꼈으나, 글쎄. 정에 취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다. 어쩐지 조금 풀어져있고 싶기도 했다.

  "잠깐 쉴까."

  한 템포 늦게 뱉어진 말에 지크프리트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라그렛은 그대로 바로 뒤의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남이 본다면 꽤 이상한 모양새가 아닐까 싶다. 야밤에 좁은 기숙사 방에서 남자 단 둘이 춤이라니. 며칠 째 그리핀도르 기숙사의 한 방에서 이어지고 있는 풍경이었다. 라그렛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지크프리트가 옆에 앉는 게 느껴졌다. 옆을 더듬거리니 작고 조금 거친 듯한 손이 뻗은 제 손 끝에 닿았다. 체온이 제법 서늘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온기가 존재한다. 라그렛은 그 손을 그대로 감싸 잡아 제 가슴팍 위에 올렸다. 느껴지는 건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일까, 아니면 멀지 않은 손목에서 느낄 수 있을 지크프리트의 심장이 뛰는 소리일까. 알 수는 없었으나 깊게 생각하지도 않기로 했다. 그대로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이대로 잠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속으로 날짜를 세었다. 삼 주와 한달 남짓. 그 정도 남았다. 긴 듯 빠듯하게만 느껴지는 시간이라 잘 수가 없었다. 전자와 후자 어느 쪽 때문이라도 말이다. 내 파트너는 완벽해야 한다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라그렛이었다. 허나 사실 후자의 것은 전자의 것이 끝나고 준비해도 되는 건데, 그럼 일찍 준비하자며 부득부득 우긴 건 지크프리트 위버였다. 저를 위해 그런 것임을 바로 알았다. 그래서 결국 져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자꾸만 약해지고 만다. 미련이라 말할 수 있나. 미련이 생기는 건 꺼려지는 일이라 여겼는데, 막상 생겨버리고 때가 다가오니 별 생각이 없어졌다. 때가 가까워질수록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이유를 붙이면 그럴듯했다.
  문득 몸 위로 이불이 덮였다. 그제야 라그렛은 눈을 떴다.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선홍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1년 새에 생각이 많아진 눈이었다. 지크프리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는 줄 안 모양이었다. 혹여 깰까봐 제대로 눕혀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다가 이불이라도 덮어주자 했을 게 바로 상상되어 라그렛은 속으로 웃어버렸다. 이내 감싸 잡은 지크프리트의 손등을 몇 번 쓸어내리고, 손을 놓고, 그대로 올려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젖살이 아직 덜 빠진 모양새 그대로 부드러웠다. 좋은 감촉이라서 저도 모르게 몇 번 주물거려버렸다. 열다섯은 한창 귀여울 나이다. 제게는 유독 더 그랬다. 사실 지크프리트라서 그렇다. 어쨌든 그러하니 한껏 귀여워 할 뿐이었다. "나 안 자." 뒤늦게 작게 툭 뱉으니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라그렛을 보지 못하는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라그렛은 몸을 일으켜 어정쩡하게 덮인 이불을 잡고 지크프리트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그리곤 이불로 감싸인 어깨를 제 팔로도 감싸안아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어쩐지 하루 종일 피곤해보였어요."
  "그런가. 난 멀쩡한데."

  사실 신경 쓸 게 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르쳐 줄 게 늘면 해야할 일도 늘기 마련이었다. 아주 짧게나마 배운, 보통 여성들이 밟는 스텝. 리드를 받는 쪽. 빈말로라도 좋은 평을 내릴 수는 없는 실력이었기에 딱히 상대는 없이 남는 시간 마다 차근차근 기억을 되살려 홀로 밟아나갔다. 가르쳐줘야 할 것들을 되짚어가며 다시 공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일은 지크프리트 위버가 모르는 새에 이루어졌고, 그게 피로한 모습으로 보여진다고 해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라그렛은 부러 거짓말을 했다.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시키는 건 싫었다. 그런 걱정이 이어지고 누적되면 그만 두자 말할 게 뻔한 아이다. 어디까지나 저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었다. 나중에 아쉬워할 바에는 지금 무리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피곤을 잘 모르는 체질이었다. 몸에는 분명히 독이지만 효율로 따지면 상당한 득이라 여겼다. 진짜로 버겁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어떻게든 되고 있었다.

  "춤 연습 마저 할까? 아니면 공부?"
  "어느 쪽이든 괜찮지만 연습 쪽이 더 좋아요."
  "시험이 3주 남은 건 알고?"

  중요한 시험인데. 짧게 덧붙였다.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된 1년 동안, 잠들기 직전 지루한 교과서를 읽어줘왔던 시간을 쪼개어 이렇게 쓰게 되었다. 졸업 프롬이 한 달 정도 남은 지금 당장은 이 정도로 충분할거라 판단했다. 라그렛은 제 스케쥴을 모두 지크프리트에게 맞췄고, 정규 수업을 제외하면 지크프리트는 대부분을 라그렛에게 배웠다. 수업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 배분은 라그렛의 재량이었고 그런 점은 편하다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크프리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그렛의 손을 잡고 약하게 당겼다. "공부를 할 바에야 다른 걸 하고 싶은 건 당연하죠." 늦은 대답. 그 뒤에 무슨 말을 숨겼을 지는 충분히 추측이 가능했다. 선배 말마따나 선배의 파트너는 완벽하죠, 따위의 말일까. 라그렛은 저를 당기는 지크프리트에게 순순히 끌려가주었다. 소년은 먼저 서툴게나마 스텝을 밟아온다. 고개를 숙여 제 발을 보며 꽤 열중하고 있다. 장난기가 생겨 일부러 꼬아버렸다. 허나 그것마저 제 실수라고 인식했는지 지크프리트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라그렛은 꼬인 스텝을 풀고 천천히 다시금 맞춰나갔다. 리드를 해야하는 건 그 쪽인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잊은 채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지금 또한 그러하니 어렵진 않았다. 하나, 둘, 셋. 박자를 맞추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내 졸업 프롬, 네가 내 파트너를 해야 해.

  일정이 확정되었을 무렵 뱉었던 말이었다. 저녁 시간의 연회장. 마치 오늘 음식은 별로라는 투로 평이하게 한 말. 그걸 듣고 목이 막혀 물을 찾던 지크프리트 위버가 아직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질 정도로 얼마 되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몇 잔의 물을 삼키고 겨우 진정한 후에야 자기로도 괜찮냐 물어왔다. …글쎄. 졸업 프롬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다가 일정이 나와서야 그런 걸 하는구나 했고, 파트너를 데려와도 좋다는 말에 바로 떠오른 건 지크프리트 위버였다. 졸업 프롬이라 하면 함께 졸업할 동급생을 파트너로 삼는 게 보통이겠으나 그런 걸 신경 쓰진 않았다. 그냥, 다른 사람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네겐 거부권이 없다는 투로 말하긴 했으나 사실 조금이라도 거부감을 보이면 바로 농담이라 하며 철회하려 했다. 파트너가 필수는 아니었으므로. 사실 프롬 같은 거에 관심도 없었다. 제게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거다. 물론 그런 걸 알진 못했겠지만, 지크프리트는 어째선지 싫은 티 하나 내질 않았다. 부담스러워할 줄 알았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말을 뱉은 그때에도 너무 막무가내에 제멋대로였다 생각할 정도였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어느 정도의 놀라움과 그 뒤에 숨겨둔 기쁨을 감추고 당시에는 그저 웃음으로 응수했으나, 기숙사로 돌아와 스터디를 하고 있을 때. 문득 생각이 나 깃펜을 쥐고 있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맞잡고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더랬다. 해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늦은 대답이었다. 많은 말을 생략했으나 그정도로도 충분했으리라.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의 7학년은 지나칠 정도로 즉흥적이었다. 7학년의 그는 항상 기분이 좋아보였고, 또, 가끔 보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를 몸에 둘렀다. 본인도 자각하고 있는 그것을 가장 가까운 옆의 지크프리트 위버는 느껴버린 걸지도 모른다.

  "아."

  발을 밟아버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라그렛의 실수였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짧은 탄식을 내뱉은 건 지크프리트였고,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어 라그렛을 바라보았다. 라그렛은 묘하게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도 실수할 때 쯤은 있어. 퉁명스럽게 뱉어진 말에 지크프리트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구태여 어려운 쪽을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쉬운 쪽을 가르치는 게 편했다. 그저 쉬운 거랑 어려운 것 중 택하라고 하니 지크프리트가 어려운 걸 선택했을 뿐이었다. 오기일까. 라그렛은 고개를 기울였으나 딱히 말리진 않았다. 어차피 가르치고 싶었던 건 어려운 쪽이니 상관 없었다. 지크프리트 위버는 제게 오러가 되고 싶다 했다. 그렇다면 익혀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다. 마법 세계는 허례허식에 치중하는 구닥다리였다. 어쨌든 마법부 소속인 이상 원하지 않아도 사교장에 발을 들일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면 최소한은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었다. 저가 가르친 아이가 저가 모르는 곳에서 비웃음을 사는 건 기분 나쁜 일이었기에. 그래서 보통 리드하는 쪽에 속하는 스텝을 가르치게 된 거다. 부득이하게 리드당하는 쪽이 됐지만 뜻밖에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직 지크프리트가 자꾸만 자신이 리드해야한다는 걸 잊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눈 앞의 아이에게만은 한 발 물러서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라그렛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쨌든 제 실수는 자존심이 상한다. 한 번만 더 맞춰보고 공부 할까. 응, 좋아요. 짧은 대화가 오갔다.

  문득,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생각 났다.


2.


  지크프리트 위버는 퍽 제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오늘은 제 침대에서 자라 하면 바로 꼬물거리며 이불 안으로 들어오곤 할 정도로. 딱히 싫지도 않은 모양이라 안고 자는 것도 여러번. 닿아있는 온기도, 품 안의 존재감도, 그리 짙지 않은 체향도, 문득문득 느껴지는 옅은 숨도,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금빛 마저도. 이제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라그렛은 곤히 잠들어있는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다. 정확히는 잠을 청하지 않고 있는 새벽이었다. 지크프리트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하고 라그렛은 슬며시 그를 놓아둔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 뒤적거리며 작년에 쓰던 6학년 마법약 교과서를 찾는 데에만해도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직 먼지가 쌓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낡은 티가 난다. 이런 걸 물려줘도 되나 싶지만 이내 고민을 치워버리고 교과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동시에 자리에 앉아 깃펜을 쥐었다. 수려한 글씨체로 빈 맨 앞 장에 Dear, 라 썼다가 지워버렸다. 잡다한 것을 쓰는 건 나중에 하기로 했다. 빠르게 몇 장을 넘겼다. 그제야 내용들과 제 필기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생각하다가 그 옆에 스터디를 하던 제 말투 그대로 첨언을 달기 시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어렵지도 않았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지루한 이론들만 쓰인 1장이 끝나고 나서야 라그렛은 교과서를 덮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주고 싶은 일은 동의어였다. 제 졸업까지 앞으로 31일. 제법 빠듯했으나 자신은 있었다.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졸업 선물이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만드는 물건이다. 앞으로는 해줄 수 없을 일을 대신 하기 위해서. 깃펜을 놓는 데 어쩐지 미련이 생겼다. 정말로 이별을 준비하는 것 같다. 라그렛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먹먹함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한다.

  "선배?"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저를 찾았다. 라그렛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침대로 돌아갔다. 눈을 부비며 상체만 일으킨 지크프리트를 다시 품에 안으며 눕혔다. 제 옷깃을 꽉 잡아오는 손이 느껴졌다. 쉬이, 하고 귓가에서 소리를 내며 등을 쓸어주었다. 반도 채 뜨이지 않은 선홍색 눈동자는 서서히 다시금 눈꺼풀 뒤로 잠겨들어갔다.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그렛은 괜히 지크프리트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놓아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 나의…. 뒷말은 바로 생각났으나 구태여 다른 단어를 붙인다. 나의 미련. 라그렛은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면 이 먹먹함을 잊을 수 있기를 빌었다.


3.


  그리하여 일주일 넘게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하자면, 저가 졸업 후에는 스터디를 하지 못하게 될테니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한 일이라 말할 수 있었다. 사라질 것만 같은 분위기는 부러 두른 것이었다. 졸업 후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모든 연락을 끊어버리기로 했다. 꽤 오래 전부터 생각한 일이었다. 이유를 하나하나 말하기엔 너무 구구절절했다. 간단히 하자면 정리였고, 결심이었다. 모든 것에 대해 떳떳해지고 나서 돌아오고자. 멋대로 사라졌던 자신을 누가 받아줄까 싶지만은. 남은 이는 배신감을 느낄까. 아니면, 다른 종류의 것을 느낄까. 오래 생각하면 뒷목이 뻐근해지곤 한다. 싫은 감각이었다. 그때 일은 그때가서 생각하자. 머릿속을 뿌옇게 흐려버린 생각을 지워냈다.
  말로 하던 스터디를 글로 써 옮겨놓는다. 6학년 분량을 대충 끝내놓고 7학년으로 넘어가니 제법 속도가 빨라졌다. 아무래도 저가 배운지 얼마 안 된 것들이라 그런걸까. 이젠 필요 없는 거라고 건성건성 들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게 티가 나긴 하는지 드문드문 막히곤 했다. 남의 손을 빌리긴 싫어서, 머리를 숙이고 이 교수님 저 교수님 찾아가 그 부분의 내용을 다시 들어 익힌 후에야 교과서에 필기를 남기고 첨언을 달곤 했다. 제대로 들을 걸 그랬지. 시간 낭비를 하는 것 같아서 같아서 뒤늦게 조금 후회가 되고 만다. 이제와서는 늦은 일이지만은.
  속도가 빨라진 이유를 꼽자면 스터디 횟수를 줄인 탓도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하고 있는 시간 낭비를 더 하지는 않기 위해서였다. 지크프리트가 O.W.L.s를 볼 날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기에,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읊는 건 관둔 거다. 나란히 앉아 머리를 맞대고 이론을 가르치고 배움받던 시간들은 적당히 갈무리하고, 실기의 비율이 높아졌다. 덕분에 마법약 재료를 구해온답시고 호그와트 밖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녀, 몸이며 얼굴에 붙이고 다니는 반창고의 갯수가 늘게 된 건 당연지사였다. 지크프리트에게는 가다가 넘어졌다고 대충 얼버무렸지만 말이다.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어영부영 넘어갈 수는 있었다.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으나 저가 해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음을 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아직 학생 신분이었다. 알고 있는데도, 종종 난관에 부딪히거나 끊겨버린 길을 볼 때면 어쩐지 비참해지곤 했다.

  "뭐해요?"

  불쑥 옆에서 튀어나온 지크프리트가 말을 붙였다. 라그렛은 화들짝 놀랐으나 애써 티는 내지 않고 교과서를 덮었다. 그대로 책상에 턱을 괴고 반대쪽 손으로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헤짚어버렸다. 으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라그렛은 웃음 소리를 흘렸다.

  "선배 하는 걸 몰래 훔쳐보려고 하면 못 써."
  "훔쳐보려고 한 거 아닌데……. 공부하고 있었어요?"
  "응. 나도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7학년 교과서를 작업하고 있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본의아니게 공부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 시험을 위한 공부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라그렛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머쓱하게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됐다며 공부 열심히 하라 말하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라그렛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시선은 지크프리트의 옆구리에 끼워진 5학년 마법약 교과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찾아온 이유야 뻔하지 않나. 휙 가버리려는 지크프리트의 팔을 잡아 멈춰 세웠다. "이번엔 뭘 모르겠는데?" 먼저 말을 꺼내니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책상 위에 제 교과서를 펴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라그렛은 그런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학년 초에만 해도 솔직히 작심삼일로 끝날 줄 알았다. 어느 정도의 결심이길래 이렇게 열심히일까. 문득 지크프리트가 저는 사실 혼혈이라 고백해왔던 지난 날이 떠오른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어떻든 상관 없기에 그렇냐 말하고 넘겨버렸으나, 속에서는 글쎄. 그 고백과 변화를 당연히 연결지어버렸다.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는 거에 가까운 경우의 수가는 꽤 많이 그려졌다. 한참을 더 저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라그렛은 속으로 고개를 휘휘 저어버렸다. 생각이 조금 길어진 모양인지 지크프리트는 페이지를 찾아놓고 물끄럼 라그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라그렛은 문득 입을 열었다.

  "…스터디 마지막, 언제가 좋을까?"

  저를 향하는 선홍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라그렛은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슬슬 끝내야지. 난 곧 졸업이잖아."
  "라그 선배."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제법 날카롭다. 지적은 하지 않았으나, 말 한 본인도 자각은 있을 터다. 라그렛은 부러 고개를 숙여 지크프리트가 펼쳐놓은 페이지를 천천히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시선이 엇갈린다. 어쩌면, 마음도. 엇갈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아쉽지 않았다면 제 미련이라 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선배가 졸업하는 게 싫어요."

  무심코 손이 뻗어질 뻔 했다. 부디 제 빈자리가 크지 않기만을 빌었건만, 결국 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문득 본 눈빛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아니, 서늘한 게 아니다. 조금 달랐다. 슬퍼하고 있나. 라그렛은 한숨을 삼켰다. 제 눈빛도 똑같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졸업하기 싫어. 내게도 네 빈자리가 클거야. 내뱉지 못하는 말 또한 몇 번이고 삼켰다. 다짐은 흐려지지 않는다. 번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미련이 더 커지기 전에 정을 떼어놓아야 할텐데. 이상하게 눈 앞의 아이에게만은 그게 힘들었다. 이쯤되면 무리라 보아도 되겠지. 라그렛은 문득 슬 웃고는 결국 손을 뻗고야 말았다. 팔이 잡히자 지크프리트는 흠칫했으나 딱히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대로 잡아당기나 싶더니,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억지로 제 무릎 위에 앉혀버렸다. 이내 작은 웃음 소리. 뒤에서 끌어안은 모양새 그대로 라그렛은 제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을 지크프리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곤 지크프리트의 어깨에 제 턱을 걸쳤다. 이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에서 나온 말은 대답이나 책망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설명해줄게."

  그저, 일상일 뿐이었다.


4.


  라그렛은 괜히 지크프리트의 발을 꾸욱 밟아버렸다. 그제야 어딘가 멍했던 눈동자가 빛을 되찾았다. 요근래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잠시 말 없이 지크프리트를 빤히 바라보던 라그렛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어진 시간은 3주와 한달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두 개.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달 중의 반이 벌써 지나갔다. 잠시 생각해보면 지친 건 지크프리트 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쉬지않고 숨가쁘게 달려온 게 사실이었으므로. 라그렛은 잡고 있는 손에 괜히 힘을 꽉 주었다. 딱히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는 눈치로 저를 보고 있는 선홍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완벽주의자를 상대하는 건 제법 피곤한 일이기 마련이다. 바로 그 완벽주의자가 라그렛 블랙로즈라는 이름으로 지크프리트 위버의 옆에 딱 붙어있으니. 그러니 그 분의 피로함도 같이 느끼고 있을 터다. 물론 그것에 딱히 미안함을 느끼거나 더 배려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기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 치고는 이미 많이 봐주고 있는 상태였다. 상대가 지크프리트 위버여서일까. 그것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릴 수 없었으나.
  그래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사실 2주 전에 비해 확실히 나아진 실력이었다. 여전히 서툰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어디 가서 최악의 평을 듣지는 않을 정도일까. 문득 처음으로 제 허리에 팔을 두르게 하고, 반대쪽 손은 평생 놓지 않을 것 마냥 꼬옥 맞잡았던 날의 지크프리트가 겹쳐졌다. 라그렛은 슬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슬슬 한 번쯤 쉬어갈 때가 됐다. 앞으로도 종종 쉴 시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공부든 준비든 소홀리 한 편은 아니었고, 본래 때가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더 쉬어가야 하는 법이라 여겼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끝으로. 라그렛은 또 발이 밟힐까봐 바짝 긴장한 채 스텝을 밟아나가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나, 속으로 셈과 동시에 눈을 깜빡였다. 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을 움직여 지크프리트의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셋. 스텝이 끝남과 동시에 그대로 당겨 제 품에 안았다. 이렇게 끌어안을 때면 저보다 10cm 넘게 작다는 걸 새삼 다시 느끼곤 했다.

  "서, 선배?"
  "왜이렇게 조급하게 굴어."

  당황으로 물든 선홍빛을 마주하며 라그렛은 고개를 기울였다. 꼭 해야만 하는 일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다. 쉬어가질 않는다는 것. 자신이 지치는 것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쉬지 않으면 지치는 건 당연한데도. 경험으로 깨닫게 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굳이 지크프리트가 그런 식으로 교훈을 얻게 되는 건 별로 내키질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옆에 저가 있으니까.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이미 한 번의 추락의 과정을 거친 소년이었고, 당연히 그게 어느 정도로 힘든지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추락이 제게 득을 주고 지금의 자신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아픔은 그다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진심으로 친애하게 된 제 후배에게만은.

  "그치만 얼마 안 남았잖아요."
  "시험이? 아니면 프롬이?"

  대답을 못 하고 웅얼거리기만 하는 입술이 보인다. 라그렛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시간적으로 촉박하다고는 해도 과할 정도로 조급해하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여전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빤히 보던 라그렛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내 라그렛은 여전히 잡고 있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한층 더 세게 잡아 침대 쪽으로 끌고갔다. 또 한 번 다급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라그렛은 가볍게 무시했다. 딱히 무슨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제법 억센 손길에 겁이라도 집어 먹은 건지. 라그렛은 속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지크프리트의 침대에 그를 밀어 그대로 눕혀버렸다.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는 채로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뭐 할 말 있어?"
  "…시험이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럼 춤 연습 같은 걸 할 때가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할 때지."

  그리고 거짓말 하지 마. 가볍게 덧붙이곤 라그렛은 책상 위에 올려둔 마법약 교과서를 집어들었다. 조급해하는 건, 프롬에 대해서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는 걸 라그렛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시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있긴 하겠지. 허나 시험이 끝나고 준비해도 되는 의상 이야기를 벌써부터 한다던지 하는 건 아무리봐도 조급해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배는 프롬 때 뭐 입을거예요? 하는 물음에 그때 가서 정할 거라 대답했다. 그럼 저는 뭘 입죠, 하는 풀죽은 말에도 똑같기 그때 가서 저가 정할 것이라 대꾸했다. 당장 어제의 대화였다. 라그렛은 엉거주춤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지크프리트의 옆에 앉았다. 지크프리트는 느리게 상체만 일으켰다.

  "프롬 생각은 하지 마. 지금은 네 시험이 더 중요하니까."
  "어떻게 그래요. 선배의 마지막 프롬인데."

  묘한 데자뷰. 어느 날인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라그렛은 대답 없이 들고온 마법약 교과서를 펼쳤다. 지크프리트는 지금의 자신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걸까. 춤을 가르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 욕심 때문이었고, 그걸 받아주고 되려 재촉하고 있는 건 지크프리트 쪽이었다. 지크프리트에게 배울 의욕이 없다거나 그러고싶은 마음이 없어 보이면 바로 관둘 생각이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니까. 프롬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딱히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그대로의 지크프리트 위버로도 파트너로는 충분했다. 그래서 해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는 말을 굳이 한 거였는데. 말을 안 했기에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리고 솔직히 지금 이 시험으로 미래가 완전히 결정되는 건 아니잖아요."
  "무슨 뜻이야?"
  "제일 중요한 시험은 선배가 곧 볼 시험이잖아요. 저한테도 그렇고요."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문득 밝은 금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지크프리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야 다시 말을 꺼냈다. 하면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 마냥.

  "…망쳐도 선배가 가르쳐줄거잖아요."
  "지크."

  나직한 목소리가 지크프리트를 부르고. 한참이나 라그렛을 응시하던 선홍색 눈동자는 이내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말을, 해야 할까. 앞으로는 가르칠 수 없을 거라고. 저는 떠날거라고. 그 말을 해야만 하는 걸까. 하지 못 한 이유는 간단했다. 구태여 미리 말 할 필요가 없어서. 말하고 나서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정말로 굳게 한 다짐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거라 마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아이가 가지 말라고 잡아버리면 잡혀버릴 것만 같아서. 그것에, 위안을 가져버릴 것 같아서. 저를 감당하기엔 지크프리트 위버는 아직 너무나도 작고 어리고 약한 아이라서……. 억지로 생각을 끊어낸다. 이 이상은 안 된다고 저를 억눌렀다. 이내 라그렛은 아까의 지크프리트처럼 한참이나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지크, 대답해."

  그 부름에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겨우 라그렛과 시선을 맞췄다. 대답 대신이었다. 굳이 한 번 더 재촉하진 않았다. 문득 라그렛은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눈이 떨리고 있다. 어째서일까.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을 한 번 더 달싹이고 나서야 라그렛은 입을 열었다.

  "시험은 잘 볼거야. 망친다는 얘기는 하지도 마. 다른 사람도 아니라 내가 직접 널 가르쳤어. 5년이나."
  "……응. 알아요."
  "잘 할 수 있어. 시험도, 프롬도."

  느릿한 끄덕임에 라그렛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말 할 수 없다. 때가 되면 이런 행동과 말의 이유들을 네가 다 알게 되겠지.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저야말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별을 이야기하면 제 마음이 아플 것이다. 쑤시고, 찢어지는 느낌을 느낄 것임을 안다.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말하지 못하는 거다. 어찌되었든 제 졸업 후에도, 저가 없더라도 지크프리트는 살아갈 것이고 많은 것을 배워나갈 것이다. 그러다보면 더 좋은 선생을 찾을 수도 있고, 그런 거다. 그렇게 되면 라그렛이라는 사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게 될 수도 있겠지. 바라지 않았으나 그걸 바랐다. 더 이상 제 마음 속에서 커지지 않았으면 했다. 똑같이, 두려워서였다. 감정의 무게라는 것이…. 짓눌려서,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까봐. 더 나아가서 죽어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될 것만 같아. 친애하는 후배님. 하지 못 하는 말을 꾸역꾸역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그러니 오늘은 쉬자. 피곤하잖아. 그렇지?"
  "…알았어요. 그럴게요."

  착하다.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상체를 꾹 눌러 눕혀버렸다. 저 또한 그 옆에 누웠다. "잠들기 전까지 옆에 있을게." 작은 중얼거림. 감기지 못 하는 선홍색 눈동자가 올곧게 라그렛을 향한다. 재울 생각인 듯 가슴팍을 천천히 두드리는 손 위에 제 손을 올려, 지크프리트는 자그마한 손으로 라그렛의 손등을 감쌌다. 이내 눈이 감기는 듯 싶더니 반 쯤 뜨인 채로 멈췄다. 아직은 감을 수 없다는 듯이.

  "잠든 후에는요?"
  "옆에 있을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지크프리트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벌써 눈치 챈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떠날 거라는 걸. 그래서 구태여 제 대답을 들으려 한 걸지도 모르지. 라그렛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껴안고 토닥여주는 것 대신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오늘은 평소처럼 품에 안고 자진 못 할거야. 또다시 꺼내지 못 하는 말을 속으로 웅얼거렸다. 앞으로 2주. 이제야 반. 그때까지 미련이 갈무리되리라는 확신을 여전히 할 수가 없었다.


  5.


  잠이 안 와요. 작은 목소리가 제법 무겁게 잠긴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라그렛은 한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럴 만도 했다. 당장 내일이 시험이었다. 2년 전의 자신도 그러지 않았나. O.W.L.s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사실 다를 것도 없는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와는 다르게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라그렛은 가만히 지크프리트와 시선을 맞추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때를 되돌아보자면, 이런 게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자그마한 위안이라도 줄 수 있는 말이든, 행동이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뒷머리를 꾹 눌러 제 품에 얼굴을 묻게 했다. 이내 지크프리트는 어리광을 부리듯 품에서 몇 번 얼굴을 부비다가 라그렛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머리칼과 밝은 금색 눈 아래로 느리게 띄워지는 미소가 보였다. 뒷머리를 누르던 손은 이내 가만가만 금색 머리칼을 쓰다듬고,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선배는 왜 안 자요. 글쎄. 장난스러운 웃음 소리 후로 라그렛은 고개를 숙여 지크프리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때로는 말 한 마디로 충분할 때가 있다는 걸 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나직한 말 이후로 선홍색 눈동자가 천천히 눈꺼풀 아래로 잠겨들어갔다.


  6.
 

  "선배!"
  "쉿, 그렇게 크게 부르면 들키잖아."

  한 손으로는 검지를 제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크프리트의 입을 막았다. 지크프리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내 입을 막은 손이 내려져, 제 것보다 훨씬 작은 아이의 손을 꼬옥 잡았다. 온기에는 익숙해졌으나 따스함은 여전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라그렛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7층 복도를 통과했다. 어느 곳으로 향하는 지도 모르는 채로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손을 꽉 잡기만 했다. 사실 어디로 가는지 물으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친 차였다. 사실 물어봤자 말해줄 거라는 확신도 딱히 없으니 그저 따를 뿐이었다. 라그렛 블랙로즈는 묘하게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졸업을 일주일 정도 남긴 시점, 갓 시험이 끝난 후배의 손을 잡고 몰래 기숙사 방을 빠져나와 다짜고짜 어딘가로 향할 정도로 말이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제멋대로인 일이나, 변덕스러운 일이나. 모두 자주 있었던 일이었더랬다. 낯설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시험이 끝난 날이라고 해이해지기라도 한 건지. 순찰을 도는 반장들의 눈을 피하는 일은 평소보다 더 쉬웠다. 발소리를 죽여 텅 빈 7층 복도를 통과하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1층까지. 현관홀을 통과해 정문 앞을 지나서야 라그렛은 한 번 숨을 돌리며 지크프리트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는 눈을 무시하고는 라그렛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성을 나와서인지 아까보다는 느릿한 속도였다. 계절은 여름에 가까웠으나, 아직 밤공기는 차가웠다. 덕분에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더 존재감을 키웠다. 답답하기라도 했던 걸까.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라그렛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면, 기분이 별로인가. 괜한 생각이라 여기지만 혹여 제 시험만 챙겨주느라 정작 라그렛 본인의 시험은 망쳤을까봐 걱정이었다. 시험 잘 봤냐는 제 물음에도 미적지근하게 대충 얼버무렸으니. 그런거라면 큰일인데. 시선을 내리니 제 손을 꽉 잡고 있는 라그렛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우이길 빌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호숫가였다. 잠시 잠긴 눈빛으로 호수를 응시하던 라그렛은 여전히 지크프리트의 손을 잡은 채로 털썩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본래 여기가 목적지였던걸까. 지크프리트 또한 자연스럽게 라그렛의 옆에 앉았다. 라그렛은 눈동자를 데룩 굴려 그런 지크프리트를 흘끔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은 다시 호수로 옮겨졌으나, 대신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감싸안아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느껴지는 체온이 따스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틀어 라그렛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방법은 없었으니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라그렛은 호수를 보고,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라그렛이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선명한 선홍색과 밝은 금색. 지크프리트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려버렸다. 라그렛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의 어깨를 감싸주고 있는 손을 움직이고 몸을 숙여 지크프리트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었다. 계속해서 한참의 침묵. 제 목도리까지 둘러주고 나서야 라그렛은 입을 열었다.

  "꽤 오래 있을 거니까 조금 자도 돼. 들어갈 때 깨울게."
  "꼭 자야 해요?"
  "시험 보고 와서 피곤할 거 아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배도 그렇잖아요, 하는 대꾸는 가볍게 무시당했다. 잠시 입술을 삐죽거리던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자는 척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귓가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이 자꾸만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화끈거리는 느낌이 손과 닿은 귀부터 시작해 얼굴까지 번져갔으나 시선은 느껴지지 않으니 들키진 않았을 것이다. 지크프리트는 한 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풀었다. 근 1년, 잘 때만 되면 항상 이 손길이 느껴지곤 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등을 쓸어내리거나, 토닥이거나.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상냥한 축에는 들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나 그때만은 묘하리만치 상냥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 이 사람이 마냥 좋았다. 바로 옆의 라그렛은 전혀 모르겠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손길에 조금씩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5년이었다. 지크프리트 위버와 함께 한 시간은. 그중 4년은 솔직히 허투루 보냈다. 잘 대해주지도 않았고, 빈말도 딱히 하지 않았다. 쉽게 할 수 있는 쓰다듬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벽이 허물어진 건 1년 사이의 일이었다. 평소와 같았으나 동시에 너무나도 달랐다. 지크프리트는 첫 1년과 반년 정도를 빼놓고는 항상 저를 잘 따라왔다. 그런 아이에게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뒤늦게 깨달은 건데, 지크프리트는 제게 있어서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앞으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만큼 사랑받으며 자랐으면 한다. 15살은 아직 자랄 날이 많이 남은 나이니까. 집을 나오고 나서의 1년, 4년 동안 주지 못했던 애정과 사랑을 그 시간 동안 한꺼번에 주었다. 표현이나 방식은 서툴었지만 전해졌으면 한다. 제대로 보내지 못 한 4년의 시간을 아까워해 1년 동안 애를 썼을 정도로 하염없이, 거짓이나 꾸밈 하나도 없이 진심으로 아꼈다고. 떠나고 사라졌음에 저를 원망하더라도 그것 하나 만큼은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답지 않게 감상적인 이유를 알고 있다. 새벽으로 가까워지는 시간의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도 더 큰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잠시 눈을 감은 채 호숫가 저편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던 라그렛은 느리게 눈을 떴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보였다. 그러고 나니 질질 끌어온 생각 정리는 얼추 끝났다. 두어시간은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한 시간 남짓으로 제법 적게 걸린 걸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고개를 슥 돌리니 제 어깨에 기댄 채 곤히 잠들어있는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색색, 하는 숨소리가 그제야 귓가를 간질였다. 작게 웃어버리고는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깨우는 것 대신 제 망토를 걸쳐주었다. 그대로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들었다. 한참이나 지크프리트를 내려다보던 라그렛은 고개를 숙여 금빛 머리칼에 두어번 입술을 부볐다. 이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호그와트 성으로, 그리핀도르 기숙사로 돌아갔다.


  7.


  "잘 어울려."
  "거짓말이죠."

  저를 흘겨보는 지크프리트에 라그렛은 작게 키득거렸다. 아무래도 영 불편한 모양인지 낑낑거리는 모양새가 자그마한 강아지같아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빈말 잘 안 하는 거 알잖아. 그리 덧붙이니 입을 삐죽거렸다. 그 반응에 결국 라그렛은 한 번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법 살벌하게 노려보는 선홍색 시선에 금방 그칠 수밖에 없었지만서도. 그래도 여전히 라그렛의 입술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뭐가 불만인지 지크프리트는 자꾸만 틱틱거렸으나 그런 반응을 모조리 다 무시하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와 맞잡고 있는 오른손 대신 왼손을 뻗었다. 조금 느슨하게 매여진 넥타이에 손이 닿고, 느릿하게 풀어냈다. 그리고 제 손으로 다시 매주었다. 이런 부분은 아직 서툴기만 한 것 같아서, 챙겨줘야 할 부분만 자꾸 보이곤 했다. 이제 곧, 저는 졸업인데. 큰일이라고 작게 중얼거리자 그걸 또 들었는지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그렛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두어번 도리질 할 뿐이었다.

  "……근데 진짜 잘 어울려요?"
  "자꾸 그렇게 캐물을 거야?"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머쓱한 듯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평소처럼 웃어보였다. 빈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인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잘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 둘 중에 꼽으라면 후자에 가까웠긴 했지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탓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애초에 15살은 정장을 차려 입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 아닌가. 차라리 넥타이 말고 보타이를 매줄 걸 그랬나. 속으로 웃었다. 문득 지크프리트가 지금의 저보다도 더 큰 이후에 입은 모습이 보고싶어진다. 라그렛은 괜히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잔뜩 헤짚어놓고는 연회장 벽에 기댔다. 아직 제대로 프롬이 시작한 건 아니었다. 저와 지크프리트를 포함해 벌써부터 많이들 연회장에 들어와있긴 했지만서도. 작년의 무도회가 문득 생각나고 만다. 블랙로즈로서 참여해 순혈 가문 자제들의 간을 봤던, 하나의 사교장이라 생각했던 때다. 지금은 조금 달랐다. 항상 정장에 달아놓곤 했던 검은 장미를 떼어버리고, 라그렛으로서 지크프리트의 손을 잡고 왔다. 그래서일까. 예전의 이런 자리들을 떠올리면 괜시리 숨이 턱 막혔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라그렛은 맞잡고 있는 손을 당겨 지크프리트를 바로 옆으로 끌어왔다.

  "어디 안 좋아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안 좋다기보다는 그저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만 잔뜩 떠오를 뿐이었기에.

  "곧 시작이네."
  "응. 괜히 긴장되네요."

  잘 할 수 있을 거야. 어느 날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뱉어내며 라그렛은 고개를 숙여 지크프리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크프리트는 붉은 기가 감도는 뺨 아래로 두어번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네, 하고 짧은 대답을 뱉어냈다. 슬며시 웃으며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라그렛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잘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멋진 파트너를 원해서 지크프리트를 데려온 게 아니었다. 지크프리트 위버가 해주었으면 해서. 원하는 사람이 이 후배 뿐이었기에 데려온 거였다. 그러니, 전혀 상관 없었다. 오늘을 위해 오래, 그리고 열심히 준비한 건 사실이지만은.

  "지크."
  "네, 선배."
  "아무데도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그것만 하면 돼."

  이 말의 의미를 네가 알까. 아마 겉으로 드러나는 뜻으로밖에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허나 그거면 충분했다. 더이상은 바라지도 않았고, 바라면 안 됐다. 속뜻을 알아듣지 못했으면 한다.
  지크프리트의 대답과 동시에 폭죽이 터졌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건 둘 모두였고, 라그렛은 얼얼한 제 귀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빨랐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지크프리트의 귀도 제 손바닥으로 몇 번 부벼주었다. 연회장 가득 조용히 깔려 있던 음악의 소리가 커졌다. 졸업 프롬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잡생각이 많아진다. 정말 졸업이구나, 하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라그렛은 애써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모두 쫓아버리고 물끄럼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 또한 멀뚱멀뚱 라그렛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잊은 게 생각났다. 라그렛은 주섬주섬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장미였다. 검은색이 아니라 붉은색. 생화로 만들어진 코르사주 두 개. 하나는 제 가슴 위에 달았고, 남은 하나는 자연스레 뻗어졌다. 장난스레 귓가에 꽂을 듯 하다가 느릿하게 저와 같은 위치에 꽂아주었다. 붉은색 장미. 이건 정말로 빈 말 하나 없이 지크프리트 위버에게 잘 어울렸다.

  "그럼 이제 춤 신청을 부탁해도 될까?"

  이런 말을 하게 하는 것부터 감점인데. 속으로 키득거리며 구태여 입에 담았다. 지크프리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손이 잡혔다. 기분 나쁜 감각도, 이러저런 잡생각들도.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씻겨 사라져갔다.


  9.


  1972년 6월, 셋째주. 졸업식.

  "선배, 빨리 안 가면 늦어요!"

  라그렛은 제 팔을 잡아 끄는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졸업식이 그렇게 달갑지도 않은 주제에. 라그렛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가 졸업하는 게 싫다고 했던, 어느 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실 들은 이후부터 종종 계속 떠오르곤 했다. 그때마다 속으로 나도 졸업하기 싫다고 대답했으나,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다. "금방 갈테니 먼저 가있어." 지크프리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문 밖으로 나서면서까지 자꾸만 저를 돌아보았다. 5년은 절대로 짧은 시간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아쉽겠지. 라그렛은 끝끝내 입 밖으로까지 한숨을 푹 쉬고는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나가면 정말로 끝이다. 7년 동안 정든 기숙사에 작별을 고하는 거다. 분명 처음에는 끔찍하게 여길 정도로 싫어했는데, 결국 사랑해버리고 말았다. 제 집이나 다름 없는 장소였다. 그리핀도르는. 당연히 슬퍼지고 말았으나 애써 그 감각을 지워냈다. 대신 침대 밑에 차곡차곡 쌓아 숨겨놓은 교과서들을 꺼냈다. 총 2년 분이었다. 6학년과 7학년. 비록 어제까지 밤을 꼬박 새야하긴 했으나 다 하긴 다 했다. 제법 만족스러웠다. 지크프리트의 짐 옆에 그것들을 다시 쌓아두었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양피지와 깃펜을 꺼냈다. 교과서 한 권 한 권, 맨 앞 장마다 정성스레 싸인 마냥 해놓았던 것을 다시금 양피지 위에 써놓았다.

  ─Dear Sieg, From Rag.

  양피지를 뒤집어, 뒷장에는.

  ─너무 걱정하지 마.

  양피지는 앞장으로 뒤집혀 쌓여진 교과서들 위에 올려졌다. 라그렛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는 두고 떠날 수 있다. 친애하는 지크프리트 위버. 네가 원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쓰지 못 한 말을 대신 속으로 읊조렸다.


  10.


  꽃다발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구태여 오르치데우스로 만들어선 제 품에 안겨주었다. 그런 후배였다. 지크프리트 위버는.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직접 만들어줘서. 라그렛은 꽃들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향을 맡았다. 붉은색 장미. 장미는 좋아하지 않게 되긴 했으나 그래도 네가 가진 붉은색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다. 좋아할 수밖에…….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멀어지고 있는 호그와트를 바라보았다. 속으로까지 재미있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나. 픽 웃어버리고 라그렛은 꽃다발을 세게 끌어안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잘해주지 말 걸,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도 잘해주었을 것이다. 정을 기울였을 것이다. 나의 미련. 나의……. 언젠가부터 웃음기는 싹 사라져 있었다. 대신 울음을 삼켰다. 그때 속으로마저 숨겼던 단어를 입모양으로만 읊조렸다. 또다시 울음을 삼키고, 작은 목소리로 토해냈다.

  잠시동안, 혹은 꽤 오래, 바라진 않지만 어쩌면 평생. 안녕, 내가 사랑해버린 아이야.


  8.


  졸업식 전날. 라그렛은 깊게 잠들어있는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해야 할 일은 마쳤고, 이제는 정말 마음의 준비만이 남았다. 하지만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무리였다.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정리 할 수 없다. 제 마음 속에서 떠나보낼 수 없다. 두고가기 싫었다. 미련이라 포장했지만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렴풋 눈치채고 있었다. 드러내지 못할 뿐이었고, 완전한 자각조차 두려울 뿐이었다. 그리핀도르의 색이자 네 눈을 닮은 붉은색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거짓말이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욕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곧 청년이 될 터지만, 욕심이 많다는 게 변할 리는 없었다. 감정은 꾹꾹 눌러 자신조차 모르도록 마음 속 깊은 곳에 담아둘테니, 내가 지금 행하는 일은 용서해주기를. 속으로 읊조리고는 조심스레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잠시 맞닿았던 입술을 천천히 떼어내며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디 용서해줘, 지크.


[지크라그] 곁에 있어줘.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라그렛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병원 측과의 마찰은 충분히 예상했으나 생각보다도 더 강경했다. 라그렛은 피로와 스트레스를 등에 업고 병실로 들어왔다. 혹여나 편안한 잠에 방해라도 될까 문을 살살 닫는 건 잊지 않았다. 이윽고 긴 한숨. 라그렛은 으레 병실에는 하나쯤 있기 마련인, 불편하기 짝이 없는 보호자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시간 여 이어진 말다툼 덕분에 심신이 모두 지쳐버렸다. 여전히 불쾌함에 찌푸려져 있는 제 미간을 두어번 꾹꾹 눌렀다. 지크프리트가 깨어나자마자 보는 건 제 얼굴이었으면 했고, 굳이 웃는 표정이 아니더라도 평소 때와 같은 표정을 보았으면 했다. 그러하니 지쳤다고 찡그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까. 혹시 지금 당장이라도 깨어날 지, 누가 알까. 라그렛은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맨손을 맞잡았다. 장갑을 끼고 있던 평소의 손보다 더 차다. 그대로 반대쪽 손으로까지 그 손을 잡아, 제 온기를 전했다. 이러면 금세 따뜻해질 터다. 지크프리트의 체온은 보통의 사람보다 찬 편이긴 했지만 라그렛은 항상 묘한 따스함을 느끼곤 했다. 비록 의식이 없는 지금이라고 해도 그걸 느낄 수는 있다. 허리를 숙여 잔상처와 물어 뜯은 흔적이 남은 손에 제 이마를 대었다가, 한 손을 놓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밝은 금색 눈동자가 제법 무겁게 잠겼다.

  시침도, 분침도, 초침도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계처럼 지크프리트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눈치챈 건 멈춘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고, 머지 않아 소식이 들려왔다. 저와 그의 관계를 완전히 밝혀버린 것에 대해 후회가 깊었는데 그때만은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연습 경기 도중의 잠깐 쉬는 시간이었다. 당장 가봐야 하는 상황에 구구절절하게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니. 지금까지도 옆에 있어주라는 말 외에 별 말이 없는 것에 조금은, 사실은 꽤 많이 감사하고 있다. 두 번 씩이나 자신을 받아준 몬트로즈 맥파이즈에는 어째 항상 폐만 끼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원채 자신은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서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 약속하는 건 솔직히 불가능했다. 그러니 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퇴출 당한다고 해도 할 말 없으니 받아들일 생각이기도 했다.
  아무튼 소식을 듣자마자 멋대로 뛰쳐나와 곧바로 성 뭉고 병원으로 직행해 보게 된 지크프리트의 상태는 솔직히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좋았다거나 나쁘지 않았다거나 하면 시계가 멈춰버릴 이유도 없고, 의식 불명일 이유도 없었다. 항상 각오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일이긴 했지만 막상 눈 앞에 벌어지니 숨이 턱 막혔다. 당장은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그냥 자고 있는 거라 생각하기로 하니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바로 지크프리트를 끌어안아버렸다. 체온이 느껴졌다. 재와 먼지 따위에 엉망이 된 머리칼을 쓸어주고 바라보다가 다시금 끌어안았다. 폭발에 휘말렸다고 했나. 더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솔직히 어디 하나 불구가 되거나 아예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벼운 화상과 긁히고 찢겨서 생긴 상처 정도는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말 할 수 없었다. 숨이 붙어있다면 그거로 됐다고 여겼다. 살아만 있다면 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거로 족했다.
  응급 처치는 저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었으니 치료사들이 하는 걸 물끄럼 보기만 했다. 치유를 위해 쓰이는 잎과 꽃을 가지지만 그 가지에선 죽음의 냄새가 난다지. 제 지팡이는 그런 역설을 지닌 산사나무였고, 과거에는 후자를 두려워했으나 지금은 전자를 믿었다. 정식 치료사만큼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실력이라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제 지팡이를 신뢰했다. 응급 처치가 끝나자마자 치료사들을 쫓아내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물끄럼 내려다보았다. 벌써 십수년을 함께 한 지팡이를 꺼내 흉터가 남지 않도록 지워내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으나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잠시도 쉬지 않으니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그걸 끝내고나니 마침 병원 측에서 부르기에 다녀온 것이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다 그렇듯 아무리 병원이라고 해도 윗선은 꽉 막혀 있었다. 정식 치료사도 아닌 이가 직접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서니, 일단 입원을 받아준 병원 측에서는 잘못되기라도 할까 겁이 난 모양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라그렛이 설득을 들어줄 사람도 아니었으니. 어찌저찌 책임은 저가 다 지기로 하고 멋대로 대화를 끝내고 온 차였다.

  지크프리트는 남이 제 몸에 손을 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싫어했다. 저와 끔찍하게 닮은 점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무리 중상에 의식 불명이라 해도 치료사가 손을 대는 걸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싫어하는 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왕이면 자신이 직접 하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다. 네가 안다면 왜 그랬냐고 잔소리를 할까. 화를 내진 않을 게 분명했다. 선배한테는 화 안 낸다고 말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기에. 지크프리트는 저와의 약속은 항상 꼭 지키는 청년이었다. 그러니, 네가 내게 화를 낼 리가 없지. 라그렛은 여전히 지크프리트의 손을 잡은 채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잔소리는 별로였다. 물론 지금이라면 그 잔소리조차 기쁘게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가 그리움도 사실이다. 지금처럼 지크프리트의 손을 양 손으로 잡고 그 손에 이마를 댄 채 기도라도 하듯─물론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무신론자였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거나. 조금 지칠 즈음에는 사람을 불러 가져온 책을 읽었다.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지나갔으나 여전히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의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 * *

  라그렛은 눈을 떴다. 하루를 꼬박 밤을 새고, 지크프리트가 누워있는 병실 침대로 기어들어가 그를 품에 안고 쪽잠을 잤다. 좁은 1인용 침대에서 성인 남성 둘이 자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으나 둘 다 얇은 체형이라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 오래 자지도 못했지만. 길게 기지개를 켜곤 여전히 눈을 감은 채인 지크프리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감은 눈 위에 느리게 입을 맞췄다. 그래도 처음보다야 온기가 진해졌다. 그게 퍽 마음에 들어, 라그렛은 작게 웃고 말았다. 제 생각보다 더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오래 지나지 않아 눈을 뜰 터다. 그때를 위해 되려 지크프리트가 저를 걱정하지 않도록 제 상태는 멀쩡해야 했다. 먹는 거야 아무 것도 먹고 있지 않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몇 십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쪽잠은 계속 자기로 했다. 걱정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저를 바라볼 때에는 항상 편했으면 한다.

  침대를 다시 말끔하게 정리해주고 라그렛은 덮어둔 책을 집어들었다. 벌써 세 권이 끝나간다. 더 가져오라고 시켜야 할까. 안그래도 어쩌다 그런 일에 휘말린 건지 따로 조사를 맡긴 뒤였다. 소식이 들려올 때 함께 시키면 되겠지. 책장 하나를 넘길 때마다 하나의 생각이 지나간다. 지크프리트에 대한 것이나, 깨어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나, 그를 이렇게 만든 원인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것이나. 그런 중요하면서 사소하기도 한 것들을 생각했다.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갔다. 들려온 초침 소리가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째깍거리는 소리는 익숙했으나 동시에 낯설었다. 라그렛은 다시금 책을 덮어두고 고개를 들었다. 반사적으로 병실 안의 시계를 찾았다. 네 면의 벽을 모두 둘러본 후에야 깨달았다. 지크프리트가 의식을 찾음과 동시에 다시 흘러갈, 제 손목의 시계 초침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른 시계는 모두 치워버렸다는 걸. 라그렛은 옷소매를 걷었다. 제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시계가, 째깍째깍. 평소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이내 앞으로 평생토록 하나 뿐일 제 연인을 보았다. 눈을 뜨면 웃어주기로 했는데. 가늘게 뜨인 채 저를 바라보는 선홍빛을 마주하고 나니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으려나. 저가 알 수는 없었으나. 깜빡깜빡. 이제는 정말 평소처럼 저를 바라보고 있다. 라그렛은 한참을 말 없이 지크프리트를 마주했다. 라그렛이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를 세다가 놓쳐버렸을 무렵, 문득 지크프리트가 웃었다. 그마저도 평소와 하나 다를 바가 없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기어코 울지는 않았다.

  "손 잡아줘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손을 잡았다. 익숙한 온기가 좋았다. 저를 보고 있는 선홍색 눈동자도, 좋았다. 들려오는 목소리 또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제야 라그렛은 웃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너무 늦게 일어난 거 아니냐고 타박했다. 지크프리트도 비슷하게 받아주었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말들이 오가고 잡은 손을 당겨 끌어안았다. 다행이라 웅얼거리니 뒷머리를 가만가만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결국 또 눈물이 터질 뻔 하고, 또 얼만큼의 눈물을 삼켜내고. "이제 이렇게 마음 고생 시킬 일 없을 거예요." 걱정했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한다거나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맘 고생을 하지 않았다는 말 또한, 필요치 않음을 안다.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뺨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일상적인 일이었으나 그만큼 그리웠다.

  "마음 고생 같은 건 별로 안 했는데."

  단지 지금처럼 시선을 마주하지 못 하는 게, 조금 그랬어. 힘들다는 말은 입에 담지 않기로 했다. 눈을 깜빡이던 지크프리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한 걱정은 저 혼자 다했다며 웅얼거렸다. 똑같이 웃어주니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구태여 힘들었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걸 지크프리트도 알고 있을 터다. 캐묻지 않는다거나 걱정스러운 티를 내지 않는 건 저를 위해서겠지. 동시에 서로를 위해서기도 했다. 라그렛 또한 괜히 힘을 줘 손을 잡았다. 문득 장난스러운 물음이 이어졌다.

  "다시 마주한 느낌이 어때요?"

  라그렛은 잠시 몸을 움직여 아까 지크프리트가 해주었던 것처럼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잡고 있는 손을 끌어와 제 뺨에 대게 했다. 고개를 기울이고, 미소지었다. 울고 싶다고 말 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그마저도 부족했다.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오늘도 예뻐. 멋있고, 잘생겼고."

  평소에 이런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있던가. 그렇지만 마주 미소하는 연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항상 그런 감상이 떠오르곤 했다. 입 밖에 내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해서도 있었지만, 사랑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낯간지러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앞으로는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자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간질간질한 감각에는 여전히 약했다. 몇 년이나 이어온 연애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제 뺨에 올려둔 손이 살살 움직여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간지럽다 키득거려도 멈추지 않았다. 사실 기분이 좋아서 멈추게 할 생각도 딱히 없었다.

  "역시 선배는 꿈보단 실물이 훨씬 더 잘생겼어요."

  내 꿈을 꾸었냐고 키득거릴 차에 지크프리트가 똑같이 덧붙였다. 라그렛이 한 말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었다. 듣는 것이야 익숙했으나. 가만히 그런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던 라그렛은 그의 어깨를 당겨 입을 맞춰버렸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걸 각오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닥치고 나니 생각보다 더 힘들었음을 인정했다. 허나 여전히 일을 관두라거나 하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장난스레 몇 번 뱉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 쯤이야 지크프리트도 잘 알고 있을 터고, 그래서 그냥 넘기곤 했던 적이 여러번이다. 저가 진심으로 위험하니 관두어 달라 말하면 그걸 단칼에 거절하지는 못 할 사람이라는 걸 안다. 실은, 제 경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말 하지 못 하는 게 아니라 말 하지 않는 것에 더 가까울 수도 있었다. 그를 사랑하기에 그만큼 존중하는 것이기도 했고, 지크프리트가 오러가 될 수 있도록 지도해준 사람 중에는 분명히 자신이 끼어있었다. 이제와서 관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또. 그의 신념을 안다. 저를 사랑한다는 감정으로 그 신념을 한 번 굽혀주었음도 안다. 그래서 앞으로는 굽히지 않았으면 했다. 그걸 위해서라도, 또한 그것에 어울리는 것도. 오러는 끔찍할 정도로 지크프리트 위버에게 어울렸고 어느 시점부터 라그렛은 오러라고 하면 그밖에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관두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사실은 더 컸다. 제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보다도 어쩌면 더. 제법 길게 이어진 입맞춤을 끝내기 위해 라그렛은 슬 지크프리트를 밀어냈다. 그러자 되려 지크프리트가 저를 끌어왔다. 이마를 맞대고, 키득거렸다. 당연해서 들을 필요도 없었어요? 입맞춤은 하고 싶어서 한 것이기도 했지만, 입을 막기 위해서 한 것이기도 해서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자연스레 끌어안는 손길에 몸을 맡기고 라그렛은 슬 지크프리트에게 기댔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욕심이 많았고, 이기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는 말이 있었다.

  "지크."
  "네, 선배."
  "한동안은 쉬어."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고, 중얼거렸다.

  "…며칠 정도는 내 곁에 있어줘."

  그래줄거지, 하는 되물음은 필요치 않을 터라 굳이 하지는 않았다. 미소는 지우지 않았지만 문득 슬퍼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크라그 #연인이_어깨에_기대어_잠든다면_자캐는



  "괜찮아?"

  밤 늦게 집에 들어온 연인에게 첫마디로 건네는 말이 어서와, 나 보고 싶었어, 가 아닌 걱정의 말이라는 게 얼마나 속이 쓰린 일인지. 제법 지친 표정을 하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라그렛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밖이 제법 추운 모양이었다. 볼이 발갛게 물든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창백하게 질린 걸 보면. 오른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몇 번 볼을 문질러주었다. 찬 기운이 지크프리트의 볼을 타고 제 손바닥으로까지 넘어왔다. 10년에 가까운 지난 세월 속의 너에 대해 문득 생각한다. 항상 이런 모습으로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왔다 나가고, 그랬던 걸까. 제법 자주 들르는 편이긴 했어도 항상 제 집에 오는 것은 아니었으니. 너를 떠올리자면 쉽사리 꺾이지 않는 강한 모습이 먼저 스쳐지나가지만, 가끔씩은. 아주 가끔씩은 그 뒤에 간직한 무수한 상처들이나 외로움 같은 것들이 문득 그 위를 덮곤 한다. 그러면 어쩐지 저마저 슬퍼지는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천천히 볼을 엄지 손가락으로 쓸어주자 기분이 좋은 듯 옅은 미소가 입술에 걸쳐졌다. 어리광을 부리듯 제 손에 볼을 부벼온다.

  "나 괜찮은데. 표정이 왜 그래요."
  "내 표정이 왜."

  거둬진 손이 제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표정도, 감정도 제법 잘 숨기는 것들이라 생각했건만. 최근들어 유독 숨기지 못하게 된 것이 몇 개 있다. 걱정이나 애정 같은 것들. 돌아오는 대답은 딱히 없었다. 허나 제 표정을 보는 얼굴이 꽤나 즐거워보여, 라그렛은 괜히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곤 뒤돌아 소파에 털썩 앉아버렸다. 딱히 삐진 건 아니었지만. 코트를 가지런히 걸어두고 제게 다가오는 지크프리트를 향해 라그렛은 살짝 팔을 벌렸다. 안아달라는 뜻은 아니었고 오히려 안기라는 뜻이었지만 되려 저를 세게 끌어안아온다. 뭐 어떠랴 싶어서 라그렛은 가만히 지크프리트의 품에 기댔다. 괜찮지 않아 보이는 쪽은 저쪽인데 등을 토닥여주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조금 뒤늦게 심통이 나는 것도 같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많이 피곤해보여." 작은 웅얼거림과 함께 라그렛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지크프리트는 그제야 꼬옥 안고 있던 연인을 놓아주고 그의 옆에 앉았다.
  사귀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몸을 틀어 저를 향하고 있는 연인의 어깨를 팔로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퍽 자연스러워졌다. 얼떨결에 라그렛의 어깨에 기대게 된 지크프리트는 작게 웃음 소리를 흘렸다. 한창 애정만 쏟아부어도 아까울 시기에 걱정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었으나, 그래도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계절이 겨울만 아니었더라도 조금 나았을까 싶다. 괜한 생각들이 길어진다. 제 어깨를 감싸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하루 종일 긴장을 놓지 않고 있어야 하는 직장이었고, 더 그래야 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 걸까. 긴장이 탁 풀리자 나른해지고만다. 그걸 눈치챈 모양인지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감싸안은 팔을 움직여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손에 닿는 머리칼이 제법 부드러웠다. 그리고, 제 머리칼에서 나는 향과 비슷한 향이 난다. 라그렛은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주체하느라 꽤 애를 먹고 말았다.

  "좀 자. 무릎 베개라도 해줘? 아니면 침대로 갈까?"
  "잠들기 싫어요."

  왜.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지크프리트는 눈을 내리감았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주제에. 작은 투덜거림이 들린 것도 같다. 또다시 지크프리트가 작게 웃음 소리를 흘렸다. 그 모습이 얄미워 라그렛은 괜히 지크프리트의 볼을 잡고 길게 당겨버렸다. 어느새 작게 뜨인 눈이 그를 흘겨보았다. 이번에는 라그렛이 웃고 만다. 볼을 놓아주자 발갛게 자국이 남았다가 금세 사라졌다. 선홍색 눈동자가 다시 눈꺼풀 너머로 사라졌다. 그 위를 손이 스치고 지나갔다.

  "선배랑 같이 있고 싶은걸……."

  딱 어리광을 부리는 목소리다. 10년 전 즈음에 자주 들었을까. 지크프리트 위버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심심치않게 듣긴 했으나 빈도가 적어졌음은 확실했다. 그게 최근 들어 또 늘고 있는 거다. 싫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지. 어리광을 부려도 좋고 칭얼거려도 좋고 제게 스트레스를 풀어도 좋으니 기대주었으면 했다. 밖으로 그런 희망을 표출하지는 않았으나, 속내가 그러하다는 뜻이다. 나른함에 취해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목소리에 라그렛은 그냥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응대했다. 그 마음은 저도 똑같다. 몸도 마음도 닿지 않았던 한 달 여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다고. 이리도 애틋해졌다. 가능하다면,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제 성에 찰 때까지만이라도.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마냥 제 옆에 붙어있기만 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라그렛은 고개를 돌려 지크프리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반응이 없는 걸 보니 결국 잠든 모양이었다. 다시금 어깨를 감싸안아 가볍게 토닥였다. 고요함은 숨 쉬는 소리마저 상당히 크게 전달해주었다. 듣고 있자니 저까지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밤마다 지긋지긋한 악몽에 시달렸던 시간 속에서 저를 편히 잠들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란 과연 어느 정도의 구원인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이라 생각한다. 겪어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구원이고, 희망이고, 단 하나 뿐인 빛이다. 지금도 그랬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옆에서만은 악몽에도 불면증에도 붙잡혀있지 않을 수 있었다. 때때로는, 그를 괴롭게 했던 현실과 정신적인 문제들에서도 편하게 해주곤 했다. 자연스레 제 처음을 모두 주게 되면서, 결국에는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인생 처음 맞닿았던 손의 온기가 이제는, 저가 원한다면 평생 곁에 있을 것이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따스함을 나누었다. 내 인생도 혼자 뿐이었고 네 인생도 혼자 뿐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혼자는 아니었다. 서로가 있었으니까. 그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떨어져 지낸 시간 동안 알았다. 그래서 네게도 내가 그런 존재였으면 했다. …그런 바람이 있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어둠이 싫고 무서워서 네게 숨었던 시간들 속에서, 나는 편했는데. 너는 어쩐지 내 곁에서마저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자는 체 하며 여러번 보았다. 내가 너를 편하게 해주지 못 했던 모양이다. 의지가 되지 않는 존재였거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네가 짊어지고 있었던 게 컸다거나. 너는 나를 오랜 시간 사랑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네가, 짊어진 것들. 얼마나 크고 무거웠으면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본인은 변했다는 자각이나 있을까. 어린 시절의 너를 떠올리고 지금의 너를 보고있자면 마음 한켠이 아려오는 건 사실이었다. 지금이 싫다는 건 절대로 아니었으나.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것들을 보아왔다.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추하며 어두운지 직접 깨달으면서 살았다. 17살이 되는 해 네가 그런 것들을 모른 채 자라서 밝은 곳에서만 지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됐다. 허나 그와 동시에, 네가 이미 그런 것들을 보아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묻지 않은 대신 도울 수 있는 건 전부 도왔다.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보고 겪은 네가 정한 길을 올곧게 걸을 수 있도록. 그게 옳은 길이라 믿었기에. 알고자 하면 알 수도 있었을 터다.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했을테니까. 그러지 않은 건 성격 탓도 있었지만, 과거에 얽메여봤자 좋을 것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미 네가 그것들을 딛고 나아가기로 했으니까, 내가 그것들을 알아서 얽메여봤자. 모르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말하지 않는 네게 크게 서운해하지 않았다. 마치 죄라도 지은 듯, 혹은 무언가를 원망하듯이. 저가 혼혈이라고 토해냈던, 어렸던 지크프리트 위버. 사실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추측할 수 있었고 압축할 수도 있었다. 딱 거기까지만 했다. 지금까지도 그러했다. 때가 되면 어련히 말해주겠지. 사실 말해주지 않아도 좋았다.

  내가 모르는 너에 대한 것들 너머에 네가 아는 나에 대한 것들이 있다. 네가 몰랐으면 했던 세상의 어두운 면들에는 자신의 음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숨기고 싶었으나 결국 모두 토해 내가 모르는 곳에서 하나도 빠짐 없이 보여주었다. 그 후에 만난 너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너지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멀리 있지 않겠다고, 덤덤하게 제 마음을 전했다. 그걸 다 보고 나서도. 너를 좋아하지 않았던 시간들과 내가 해 온 많은 더러운 일들을 보고 나서도. 내가 네가 생각하는 만큼 마냥 밝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도. 나를 받아들이겠다 하는 네가 있어서 몇 밤이나 울음을 삼켰던지. 당장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는 걸 네가 알까. 지금 와서 그런 것들은 몰라도 되는 것들이다. 알아야 하는 것들은, 그러니까…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 정도. 딱 그것만 알면 되는 거다.

  어깨에 기대어 잠든 연인을 한 번 품 안에 품었다가 놓아주었다. 생각 이상으로 마른 몸을 안아드는 일이야 그닥 어렵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춥기라도 한지 살짝 몸을 웅크렸다. 가지런히 정리해놓은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불까지 덮어줬는데도 계속 그 상태였다. 결국 제 품안에 다시 소중하게 껴안았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사랑해."

  깨어있을 때 해준다면 더 좋을텐데. 아직은 조금 쑥스럽네.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어버리곤 라그렛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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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라그] 1982년, 6월.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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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년 이맘 때보다 훨씬 무더운 여름이었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제법 더위를 잘 타는 체질의 청년이었고, 하루에 몇 번이나 앞머리를 쓸어올려 땀을 식혔는 지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자꾸만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도 더위 탓이었고. 계절이 바뀐다고 해도 온도차가 그리 크게 나지는 않는 게 영국 기후의 특성인데,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더웠다. 정말로, 이상할 정도로. 라그렛은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하게 도출해낼 수 있었다. 70년대의 사회가 어떠했는가. 초반에는 정체 모를 살인 및 실종, 납치 사건들에 경계를 곤두세웠고, 후반부터는 본격적인 테러가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싸하게 식지 않았나. 1970년대가 끝났다고 상황이 호전되지는 않았다. 그렇게나 그에게 악몽 같았던 1980년이 지나간 후에도 그랬다. 테러의 방향이 불특정 다수를 향하게 되면서는 정말로 전쟁 그 자체가 되어버린 1981년. 더위에 시달려할 심적 여유조차 없던 시기였다. 그리고 열달을 꽉 채운 후의 겨울, 종전.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심심치않게 일어나고는 있으나 어찌되었든 평화는 어영부영 찾아오기는 했다. 오랜 시간 마법 세계를 얼어붙게 했던 전란의 기운이 사라지고, 얼어붙었던 사회가 스르르 녹고. 그렇게 처음으로 맞는 여름이다. 그러니 지나왔던 다른 여름들보다 더 덥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가타부타 생각이 길어지긴 했으나, 지금 라그렛에게 저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보다도 더 더위에 쥐약이라는 게 중요했지. 어릴 때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람의 체질이라는 게 이다지도 쉽게 바뀌는 것이었나 싶다.
  꽤 길게 눈을 감고 있던 라그렛은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서늘함에 얼굴을 묻었다. 옅게나마 남아있는 금빛에서는 제 머리칼에서 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향이 났다. 크게 튀지 않는 은은한 향이었지만 그마저도 마냥 좋았더랬다. 저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는, 지크프리트 위버 특유의 서늘함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옷자락에서 느껴지는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그 자체에서 서늘함이 느껴지는 건 좀 의아한 일이긴 했다. 제 몸에 열이 많은 편도 아닌데. 그래도 라그렛은 따뜻함과 서늘함중 하나를 고르자면 바로 후자를 택할 수 있을 정도로 서늘한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불호를 표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물론 마냥 서늘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연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 따스함 또한 겸비하고 있었다. 이쪽은 정말로 저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서, 인지하고 나면 기분이 좋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감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정말로. 라그렛은 그대로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에 두어번 코를 부볐다. 오늘따라 어리광이 길었다.
  완연한 평화를 가지고 다시 찾아온 여름. 전후 정리는 아직 덜 되었으나 심적인 여유는 제법 많이 생겼다. 라그렛의 어리광은 바로 거기에서 기인됐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도 지크프리트는 제 앞에서만은 항상 웃곤 하였으나, 그 뒤에 얼마나의 근심이 있었고 얼만큼의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는지 라그렛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에만은 제 곁에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아직 불안정하다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았으며 연인이라는 관계적인 부분에 대한 욕심도 최소화했고, 으레 사랑을 받는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있는─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의 기저는 그때까지도 어린 시절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하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불의에 맞서 싸우며 저가 옳다고 믿는 길을 올곧게 바라보고, 그러면서 저절로 자신을 살피지 않게 된 지크프리트 위버를 지탱해주기 위해서였다.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게, 지쳐 멈춰서지 않을 수 있게. 그를 돌보는 일은 오롯이 저가 떠맡았다. 존재만으로도 지지대가 될 수 있는 것이 있기 마련이라고. 제 생각보다도 더 전부터 지크프리트에게 그런 존재가 바로 자신이었다고. 깨닫고는 있었으나 부러 그렇게 어른임을 가장하고 힘쓴 까닭은 그의 심지가 굳은 만큼이나 저 또한 곧게 지지해주고 싶어서였다. 그래도 매일매일 늦은 밤 집에 들어오는 연인을 맞아 제 품에 안고, 재우기에 급급했던 태도만은 결국 저 또한 심적인 여유가 부족했음을 내보이는 일이었던 것 같다고 뒤늦게 생각했더랬다. 그랬던 시간들이 지나고 지크프리트가 어느 정도의 여유를 되찾아 안정되자, 그제야 라그렛은 마음놓고 그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게 된 거다.
  허나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는 사실을 하나 이야기하자면, 그러한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라그렛의 기저가 가장을 넘어서 실제로 상당히 많이 어른으로 변모했다는 점이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껴안고 있으면 안 더워요?"

  고개를 틀어 저를 바라보며 물음을 던지는 입술에 입맞추고 라그렛은 어깨만 으쓱했다. 아무리 저가 느끼기에 서늘한 편이라고 하더라도 한여름에 붙어있으면 더 더운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쪄죽는다고 해도 안고 있을 거다. 괜찮아, 하는 짧은 대답에 품 안의 지크프리트가 바르작거렸다. 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라그렛의 팔을 슬 내리고는 몸을 돌려 저가 먼저 라그렛을 끌어안았다. 라그렛 또한 자연스레 지크프리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마주 껴안았다. 마주본 곳에는 사랑해 마지 않은 선홍색 눈동자가 있고, 밝은 노란색 눈동자가 있다. 적색과 금색.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두 색 모두 그리핀도르의 색이 아닌가. 문득 깨달은 라그렛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이내 라그렛은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던 지크프리트는 금세 퉁명스러운 태도를 지워내고 새 대화 소재를 꺼냈다. 사실 그에게는 아까 전부터. 아니, 사실은 꽤 전부터 신경쓰이던 것이 있었다.

  "피곤해보이는데. 착각 아니죠? 오늘도 나갔다 왔어요?"
  "으음."
  "요새 외출이 잦네요."

  라그렛은 다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렇게 제 모습을 잘 꾸며내고 가장하는 청년이 연인에게만은 본모습이나 마음을 숨기질 못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라그렛에게 지크프리트는 유일이었고, 지크프리트가 졸업을 하지 않았던 시절 저 혼자서 했던 약속 같은 것도 있었다. 너한테는 거짓말 안 해, 하고. 속이지는 않았으나 숨김으로 인해서 너무나도 큰 일이 벌어졌던 경험도 있었다. 존재의 가치고 약속이고 다 둘째치고서라도, 속이는 일이나 숨기는 일이나 상대가 지크프리트 위버가 되면 라그렛은 본능적으로 꺼려졌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 상대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숨기는 게 완전히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딱 하나 있었다. 반년 가까이 숨기고 있는 일이, 하나. 겨울의 끝자락에 비밀스레 소식이 들려왔으며 봄으로 접어들어가는 무렵 확정된 것이 있었다. 놀래켜주겠답시고 철저하게 숨기고 있으니, 지크프리트가 알 리는 없었고. 그러니 이렇게 외출에 대해서 묻는 것이겠지. 최근들어 잦아진 외출과 돌아온 후의 피로함, 그리고 지크프리트 위버에게 숨기고 있는 것. 모든 것을 단 하나로 귀결 시키는, 이유에 대해서.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입이 간질거리는 게 사실이었다.

  "걱정돼?"
  "당연하죠."

  항상 선배 걱정 뿐인걸요. 지크프리트는 말을 삼켰다. 라그렛은 작게 미소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다. 둘 사이에는 그런 게 꽤 많았다. 서로의 인생, 반 이상을 함께한 시간들을 절대로 허투루 보낸 것은 아니었기에. 묘하게 어색했던 미소를 자연스럽게 바꿔보이며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와 가만히 눈을 마주했다. 걱정은 제법 기분 좋은 울림을 가진 단어였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는 별개로 말이다.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이제 웬만해선 안 일어날텐데."
  "……꼭 그게 아니더라두요. 그리고 아직 완전히 정리된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 그래. 종전인데도 우리 지크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고 있지."

  작은 키득거림과 함께 라그렛은 장난스레 대답했다. 아주 명백하게, 놀리는 어투였다. 지크프리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하고. 아까 라그렛이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어리광을 부리며 지크프리트는 그의 품에 괜시리 파고들었다. 이럴 때 보면 아직도 두 살 어린, 어리숙하기만 한 후배인 것만 같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조금 변하지 않았는가. 후배나 동생이 아니라 조금 다른 이름으로. 지크프리트의 뒷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며 라그렛은 자꾸만 웃음 소리를 흘렸다. 왜 이렇게 장난끼만 드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크프리트 위버와 같이 있다보면 저마저도 호그와트에 다니던 어린 소년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당연하지만, 싫진 않았다. 그리움은 접어두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그래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며 아련하게 부르지는 않게 됐다. 가장 큰 행복이 옆에 있게 되어서였다.

  "그래서 요컨대, 밖에 나돌아다니지 말라는 뜻인가?"
  "그런 뜻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결국 끝까지 장난이다. 무어라 말을 덧붙이기 위해 열리는 지크프리트의 입술에 짧게 입맞추고 빙긋 웃어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크프리트 위버는 절대로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다. 느렸으면 느렸지. 그래도 연인이라고, 제 일에는 제법 빠릿빠릿하게 나오긴 하더만. 애석히도 라그렛 블랙로즈는 아무리 연인에 대해서라고 하더라도 항상 냉정하게 평가하는 청년이었다. 그게 습관과도 같은 것이라서. 굳이 포장해서 말해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기실 직설적인 것이야 지크프리트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 사이였다. 그렇게 군다고 해서 서운해하지는 않을 정도의. 오히려 그런 면을 좋아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기도 했다. 가끔 저를 보며 좋아 죽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싫어하는 면 내지 마음에 안 들어하는 면이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리고 사실 그런 점은 이쪽이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길어진 잡설을 줄이고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피로에 찌들어있는 걸 나름대로 숨기고는 있었다. 그런데도 지크프리트가 눈치 챈 정도라니, 꽤 심각한 상황이 아닌지. 아무리 지크프리트 위버에게는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괜찮은 척이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은 몸에 배인 거나 다름이 없었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고 있을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이야 라그렛 본인도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새삼 얼마나 여유 없이 살아왔던건가, 싶다. 이윽고 작은 한숨.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그렛은 말없이 도리질만 한다. 완전히 숨기기는 불가능할 정도로 무리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80년 10월 이후로 벌써 2년 가까이 지나지 않았나. 다시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은 건 2월 즈음의 일이었고, 생각 끝에 알겠다 답신한 건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간으로 약 2년의 공백을 따라잡으려면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기에. 동시에 지지리도 방치해놓은 왼팔의 재활까지 동시에 진행하려니 피곤하지 않을 수가 있나. 다 제 업이라 생각하며, 고스란히 받아들여 무리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길게 놓아본 적이 있었던가. 호그와트 2학년. 다소 불순한 의도로 시작했던 게 퀴디치다. 어련히 고학년이 되면 알아서 자연스레 관두게 될 줄 알았다. 그걸 끝까지 물고 늘어졌더니 생각에도 없던 미래에까지 끌고가게 됐다. 따지고보면 인연이 생겼을 때부터 놓지 못하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그리핀도르 아이들과 가까워진 계기도 사실 퀴디치였다. 그랬었지. 정말로, 많은 인연을 얻었다. 그리고 덕분에 인연이라는 게 어찌 발전될 수 있는 것인지도 알게됐다. 문득 추억에 잠기고 만다. 그리핀도르 관중석에서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저를 좇던 선홍색 시선이라던가. 잠도 채 깨지 않은 후배를 붙잡고 대뜸 팀에 들어오라며 반 쯤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던 어린 날의 자신이나. 얼떨결에 수락했던, 잠이 덜 깨어 멍청했던 표정 같은 것도 있고. 선배들 대화에 맹랑하게 끼어들어 저가 해보겠다 했던 목소리와, 제대로 해내겠답시고 부득부득 매달렸던 금발의 소년. 이제는 색이 바랬으나 그 빛만은 영원히 바래지 않을 우승. 그 이듬 해에 소중히 여기게 된 아이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품에 끌어안고 함께 추락해 제 몸으로 모든 걸 받아냈던 일. 그 후 새벽의 병동이라던가. 저가 떠나고 나니 휙 관둬버려서, 유치하게도 서운해했던 적도 있었더랬다. 그래도 제법 유명인이 되어 돌아온 자신을 보며 빛내던 그 눈빛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선배?"
  "왜."
  "얘기하다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세월이 흐르며 많은 것이 변했으나 저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 그 사실이 위안이었던 적이 분명히 존재했고, 지금은…… 글쎄.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에 구구절절한 이유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어쩐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라그렛은 느릿하게 웃다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자꾸만 우물거리는 입술에 그대로 키스해버렸다. 혀가 뒤섞이는 감각에 얼굴을 붉혔던 작년 겨울과는 달리 지금은 제법 익숙해졌고, 또 능숙해졌다. 키스는 오래 이어지진 않았으나 혀에 남은 질척한 느낌은 오래 갈 듯 싶다.

  "충분히 쉬고 있어."
  "정말이죠?"
  "너한테는 거짓말 안 해."

  19살의 라그렛 블랙로즈가 17살의 지크프리트 위버에게 했던 말이다. 그 말을 굳이 그렇게 똑같이 한다. 지크프리트는 특유의 선홍색 눈동자를 깜빡이다가 이내 라그렛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두어번 부비고, 또 고개를 들어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라그렛에게는 이 시간이 자는 시간보다 더 효율적인 휴식 시간이었다. 지크프리트는 알지 모를지 모르겠지만. 한참 눈만 깜빡이던 지크프리트는 작게 알았어요, 하고 대꾸했다. 저가 사랑한 붉은색은 바로 이 선홍색이다.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고 있으면 최근들어 스멀스멀 욕구가 피어오르고 입이 간질거리곤 했다. 반 년. 가장 극적일 순간에 알려주겠다고 마음 먹어 숨겨온 시간이 분명히 있는데도, 말해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몬트로즈 맥파이즈로의 복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이리 올려다보면 누가 충동을 느끼지 않겠는가. 참을성과 인내심 하나는 괜찮은 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라그렛은 속으로 웃음 소리와 앓는 소리를 같이 내며 지크프리트와 이마를 맞대었다. 키스 해줘. 작게 속삭이자 머뭇거리나 싶더니 금세 입술을 부벼온다. 그게 퍽 마음에 들어서. 라그렛은 두 팔을 뻗더니 지크프리트의 목에 둘러 그대로 감싸안았다. 지금 하는 키스는 꽤 길게 이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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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라그] 첫키스



  지크프리트 위버는 그닥 크지 못 한 소파에 웅크려 누워 잠들어 있는 라그렛 블랙로즈를, 제 연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새벽이 깊어가는 고요한 시간. 특별한 일이 없지 않은 이상은 늦지 않은 시간에 잠을 청하곤 하는 그였기에, 먼저 자고 있겠거니 하며 느즈막히. 그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집에 들어온 게 사실이었다. 들어선 집 안의 불이 켜져 있다는 점에서 놀랐고, 라그렛의 모습을 보고서 또 놀랐다. 자고 있을 거라는 예상은 반 이상 맞긴 했다. 그는 색색 소리까지 내며 자고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맞지 못 한 이유는 침대가 아니라 소파에서 자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개도 베지 않고, 이불도 덮지 않고. 첫번째로 든 생각은 불편하겠다, 였고 두번째로 든 생각은 춥겠다, 였다. 아무리 집 안이라고 해도 한겨울에 목티 한 장만 입고 담요조차 두르지 않은 채 좁은 소파에 웅크려 자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도 깨울 수가 없었다. 너무 곤히 잠들어 있어서. 행여나 깰까봐 건드리지도 못 한 채 라그렛을 바라만 보던 지크프리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았다. 바로 정면에 자고 있는 얼굴이 보이도록. 이내 좁게나마 남은 틈에 양 팔을 교차시켜 올리고, 그 위에 제 턱을 걸쳤다. 당연스럽게도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졌다. 옅게 내쉬는 숨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 그렇게 티 하나 없는 말끔한 얼굴을 응시했다. 숨결과 숨결이 닿는다.
  그러기를 한참. 지크프리트는 제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숙직을 할 뻔한 걸 겨우 빠져나온 탓일까. 아니면 이른 새벽까지 이어진 일 때문일까. 두 가지 이유가 다 겹쳐서 형성되었을 진득한 피로감이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걸 버티고있기는 조금 힘에 부쳤다. 잠에 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편히 쉬지도 못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 위에 툭 올려지는 손에 지크프리트는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잠이 덜 깬 샛노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에 작게 미소지었다. 반 쯤 뜨인 눈을 두어번 깜빡이던 라그렛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 웃었다. 라그렛의 남은 한 쪽 손까지 지크프리트에게로 뻗어지고, 머리를 쓰다듬던 손 또한 내려가 느릿하게 목을 끌어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렇게 한 층 더 가까워진다. 이마가 한 번 툭,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많이 늦었네."
  "으응, 어쩌다보니요."
  "피곤하겠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었다. 라그렛은 고개를 돌려 몇 번 잔기침을 하고는 다시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걱정해야 할 쪽은 이쪽인데, 오히려 선홍색 눈동자가 걱정스럽다는 빛을 잔뜩 띠고 있었다. 저를 더 끌어당겨 아예 옆에 눕히려는 라그렛을 슬 밀어내고 지크프리트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거면 침대에서 자지 왜 여기서 자고 있느냐고. 걱정의 시발점이 되는 물음을 던지니 라그렛은 시선을 잠시 피했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옆에 네가 없는 침대에는 별로 눕고 싶지 않았다, 고. 그리 답한다. 지크프리트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1980년의 10월 한 달. 두 달 여 떨어져 지냈던 시간이 지나가고, 1981년의 1월로 또 다시 한 달. 아낌없이 사랑을 속삭였던 두번째의 한 달 동안 라그렛은 부쩍 어리광이 늘었다. 던지는 말도 퍽 솔직해졌고. 이제와서 어떤 감정을 숨기려 하겠냐만은 말이다. 라그렛으로서는 더더욱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름 너 올때까지 기다린건데."

  언제 잠든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이곤 라그렛은 작게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저가 없는 빈자리가 그리도 쓸쓸하냐며. 그럼 도대체 평소에는 혼자 집에서 어떻게 지내냐고. 지금은 필요없을, 어찌보면 답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는 물음을 삼키고 대신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상체를 일으켜 끌어안았다. 라그렛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답은, 정말로 정해져있다. 괜찮다 답할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마저 즐겁다고, 그리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섞여있지 않겠지. 그리움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마련이므로.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막연하게 기분 좋았다. "무리해서라도 집에 오길 잘했네요." 그 말에는 부정하지 못했다. 빈말로라도 뭐하러 무리까지 했냐며, 꼭 들어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리 말 할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던 시간은 명백하고 느끼는 외로움 또한 사실은 선명했으므로. 정말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으레 그렇듯 기다리는 시간까지 즐겁지 않았더라면. 버티지 못하고 떼를 써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기간이었다. 심적으로 완전히 괜찮아지지도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계속 옆에 있고 싶기 마련인 연애 초기라는 이유가 사실 그보다도 더 컸다.

  "잘거면 침대에서 자야죠."
  "으응."

  한참이나 누워있던 소파에서 비척비척 일어난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손을 잡고 그에게 이끌려 침대로 향했다. 눕기 직전이 되어서야 지크프리트는 그때까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대충 던져두었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더 길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꼭 붙어 누워 저를 끌어안는 손길에 몸을 맡겨 라그렛의 품에 얼굴을 묻은 지크프리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말로 일을 쉴 수도 없는 마당에─사실 쉴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라그렛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적 여유는 둘 모두에게 부족했다. 허락된 시간은 아침에 깨어난 후 출근 직전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과, 퇴근 이후의 비교적 긴 시간. 그마저도 사실 후자의 경우에는 라그렛이 만성적으로 수면이 부족한 지크프리트를 재우느라 급급해했다. 연애 초기 치고는 퍽 팍팍하게 살고있지 않은가. 그래도 또 같이 있는 동안에는 마냥 좋다고 계속 붙어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서늘한 옷자락에 잠이 깨버린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에 몇 번 코를 부볐다. 그러고 그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후배가, 지금은 연인이. 제 품 안에서만은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허나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지크프리트는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라그렛을 물끄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라그렛 또한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여 지크프리트를 내려다보았다. 1초, 2초, 3초. 시곗바늘이 째깍거리는 소리와 보통보다는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심장 박동인지는 모른다. 제 것인지, 연인의 것인지. 그리고 틈을 메우는 건 서로의 작은 숨소리. 말 한 마디 없이 한참이나 그렇게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채. 서로를 마주보았다. 때로는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은 때가 있기 마련이고,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다시금 숨결이 닿는다. 어쩐지 간질간질했다. 그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라그렛 블랙로즈는 이러한 감정의 간질거림에 유독 약한 청년이었다. 지크프리트 위버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자각함과 동시에 그것에 약하다는 사실 또한 자각했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고. 마치 이끌리듯이.
   라그렛은 조심스럽게 지크프리트의 턱을 잡았다. 그대로 눈을 감는다. 서서히 얼굴이 가까워지고. 제 입술을 그의 입술에 겹쳤다. 막연한 따뜻함. 턱을 잡고 있던 손이 올려져 지크프리트의 두 눈을 감겼다. 몇 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어진 아주 짧은 입맞춤이었다. 사실 키스라고 부르기도 뭣 할 정도였다. 그래도 꼴에 그게 둘 다에게 첫키스라고. 여전히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뛰는 소리가 더 빨라졌다. 사실 누구의 것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하나의 것이 아니니까. 둘의 것이었다. 함께,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깐동안 겹쳐졌던 입술이 떨어져나가고, 지크프리트는 눈을 살짝 크게 뜨곤 얼떨떨한 표정으로 라그렛을 쳐다보았다. 느리게 깜빡였다. 이내 웃어버린다. 저도 모르게 한 짓에 적잖게 당황하고 있던 라그렛은 지크프리트가 제 품에 다시 파고들어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현실로 돌아왔다. 그 또한 입꼬리를 당겨 웃고는 제 연인을 더 꼬옥 끌어안았다.

  "싫지 않아?"
  "그럴리가요. 너무 좋은걸요."

  슬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살짝 붉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발갛게 물든 볼을 손 끝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라그렛은 작게 입술을 우물거렸다. 다음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말 대신 볼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검지 손가락을 지크프리트의 턱 밑에 대 고개를 더 들게 했다. 그대로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눈을 감은 게 보이자 별 것도 아닌 용기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선. 열린 입술 틈으로 제 혀를 밀어넣었다. 차마 혀와 혀를 얽지는 못하고, 입 안을 덧그리듯. 사실 간질이는 것에 가깝도록 혀로 약하게 쓸어보고 나서야 입을 뗐다.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다시금 웃고, 이번에는 저가 먼저 입술을 가져다댔다.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어쩐지 간질간질했다. 아까 마주보고 있을 때처럼. 라그렛은 그런 지크프리트의 뒷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살짝 닿았던 입술이 멀어지자 더 당겨 안았다. 어쩐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오늘은 잘 잘 수 있겠다. 그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닿아왔다. 지크프리트 또한 라그렛을 끌어안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느때처럼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제 품에 안고 다시금 등을 토닥여주었다. 바로 재우려는 걸 보면 그도 퍽 쑥스러운 모양이다. 지크프리트는 픽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그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아주 깊은 잠에. 간만에 그리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랑한다는 속삭임을 들은 것도 같다는 생각을 끝으로 지크프리트는 잠에 빠져들었다. 라그렛은 뒤늦게 붉어진 얼굴을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에 묻어버리곤 혹여 답답할까봐, 끌어안은 팔을 조금 느슨하게 했다. 겨울의 새벽. 밖의 공기는 차고 안의 공기도 마냥 따뜻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맞닿은 온기만은 하염없이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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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라그] 감기



  제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손길에 라그렛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보이는 건 당연하게도 익숙한 얼굴이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윽고 한숨 소리를 뒤로 하고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문제라면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 정도. 두어번 입술을 달싹이던 라그렛은 결국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한참 동안 머리칼을 쓸어넘겨주며 식은땀을 닦아주던 손이 스르륵 내려가 라그렛의 목 여기저기를 손가락 끝으로 살살 매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나온 건 한숨도, 목소리도 아닌 잔기침 몇 번이었다. 작게 인상을 쓰고 제 입을 가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지크프리트는 손을 거두었다. 작게나마 찌푸려진 미간을 펴주기 위해 또 뻗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라그렛은 딱히 그 손길들 하나하나를 저지하려 들진 않았다. 평소보다도 나른하게 풀린, 밝은 노란색 눈동자가 지크프리트를 향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두어번 더 콜록거리고 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그마저도 상당히 잠겨있었지만.

  "언제 왔어."
  "목소리, 잠겼어요."
  "……언제 왔냐니까."

  저마저도 제 잠긴 목소리가 낯설어서, 라그렛은 제 목을 오른손으로 약하게 감싸 엄지 손가락으로 목울대를 꾹꾹 눌렀다. 그런다고 목소리가 돌아올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라그렛은 잔뜩 인상을 써버렸다. 잔뜩 잠겨버린 제 목소리도, 물음에 답하지 않는 지크프리트 위버도. 어쩐지 다 맘에 들지 않고 불만스럽기만 해서.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가. 그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크프리트는 허리를 숙여 한껏 찌푸려진 미간에 가볍게 쪽, 하고 입맞추었다. 다시금 새까만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이마에도 입맞추고. 라그렛은 목 깊은 안쪽에서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방금 왔어요." 늦은 대답에 두 손이 뻗어진다. 저보다도 더 하얀 목에 감싸안듯 걸쳐져, 그대로 제 쪽으로 당겼다. 힘 하나 들어가지 않은 몸짓임에도 불구하고 지크프리트는 생각보다도 더 쉽게 끌려왔다. 어정쩡하게 제 옆에 누운 연인의 품에 머리를 부비며 라그렛은 옅은 숨을 내쉬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어리광이다. 제 체온이 올라간 덕에 서늘하게 느껴지는 옷깃의 감촉이 제법 좋았다. 그보다는 확실히 연인의 품이라는 점에서 더 좋은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러기를 한참. 약하게 옷깃을 붙잡고 부비적거리던 라그렛은 고개를 들어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저를 보고 있었던 모양인 선홍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 아파."
  "알아요. 이렇게 티를 내고 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상태가 안 좋다는 걸 깨달은 건 어제 저녁 즈음이었고, 안 좋은 걸 넘어서 정상이 아니라는 것까지 깨달은 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라그렛은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여느때처럼 배웅해주고 난 이후의 기억이 없다. 정확히는 드문드문 끊겨 있다. 그 때 완전히 방전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다른 일정이 없는 날이었어서 다행이지. 끊긴 부분의 기억은 이러하다. 비척거리며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깨어버리고. 식은땀에 젖어있는데도 자꾸만 으슬으슬 추워서 괜히 더 이불을 당겨 덮었더랬다. 그러다가 또 잠들고, 깨고. 세번째로 깬 게 바로 지금이다. 만 하루를 잠으로만 보낸 거다. 어지간히 아프긴 한 모양이지. 그래도, 침대에서 자꾸만 바르작거리느라 엉망이 된 검은색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손길은 몸이 안 좋은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좋기만 했다. 라그렛은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저를 보고 있는 선홍색 눈동자. 피곤에 절어있는 눈가 위로 걱정이 띄워져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그냥 감긴데 뭘. 컨디션 관리를 못 한 것 뿐이야."

  나 답지 않은 짓이지.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한 뒤에는 또 몇 번의 콜록거리는 소리. 체질부터 건강하기로 타고났고, 어릴 적부터 컨디션 관리는 습관처럼 몸에 배여 있었다. 가벼운 감기조차 걸리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만큼 무리해야할만한 일이 생겼다거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다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 이상은 말이다. 전자의 경우는 사실 그런 일 없을 거다, 라고 취급해도 될 정도이니 보통 라그렛이 아프다면 후자의 이유였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허나 이번에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계절이 넘어가는 무렵, 보통 사람들이 으레 한 번씩 다 앓고 지나가는 가벼운 감기에 저까지 걸려버린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저가 풀려있다는 뜻이 되겠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아픈 걸 핑계로 맘껏 어리광 부릴 수 있는 건 좋은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언제는 눈치 봐가면서 어리광을 부렸냐, 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할 말은 없었지만. 어차피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어리광을 부리는 상대는 눈 앞의 연인 뿐이었다.
  아무튼. 제법 진정성을 담은 눈으로 저를 보며 그리 말해오니 믿을 수밖에 없지 않나. 애초에 믿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품에 안긴 라그렛에게선 미열이 느껴졌다. 고열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심해야 할까. 열을 조금이라도 낮춰주어야겠다 싶어서 지크프리트는 슬쩍 라그렛을 밀어냈다. 그러자 힘이 하나도 들어가있지 않은 손에 갑작스레 힘이 들어가며 옷깃을 더 당기는 게 아닌가. 옷깃을 붙잡는 것에서 끝나지도 않고, 라그렛은 그대로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제 것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어린아이 마냥. 겨우 한 번 약하게 밀어낸 것 가지고 약이라도 올랐는지, 가늘게 뜨인 눈이 지크프리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읽어낼 수 있다. 가지 말라고, 그리 제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물수건이라도 놔줄까, 했어요."
  "그런 거 필요 없어."

  딱잘라 말하며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더 당겨 안았다. ……아픈 사람의 뜻이 그러하다니 어쩔 수 있나.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다가, 지크프리트도 그런 라그렛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제 걸 놓칠까봐 갑작스레 세워졌던 날은 어디갔는지, 금세 표정이 풀어져선 라그렛은 눈을 감았다. 앞머리칼에 입맞추던 입술이 내려져 그렇게 감긴 눈가에도 입맞추고, 콧잔등과 볼에까지. 조금 더 움직여 열기를 머금은 제 입술에 다다르자 라그렛은 슬쩍 고개를 돌려 지크프리트의 입술을 피해버렸다. 감기 옮아. 상관 없어요. 내가 상관 있어. 말다툼 아닌 짧은 말다툼 끝에 결국 져준 건 라그렛이었고, 막상 입술과 입술이 겹쳐지고 나니 좋다고 제 입 안과 혀를 내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네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봤자 짧은 키스로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또 저를 배려한답시고 이런 식인게 분명했다. 싫진 않았지만 글쎄, 가끔씩은 불만스러울 때가 있기 마련이다. 떨어져나가는 입술에 이번에는 저가 먼저 입술을 겹쳐버리며 깊게 입맞추었다. 숨이 찰 때까지. 그러고나서 입을 떼니, 감기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 숨을 쉬기가 힘들어서 라그렛은 자꾸만 숨을 몰아쉬었다. 입 안에 고인 타액을 삼키는 것마저도 제법 힘이 들어 보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걱정스럽다는 시선이 그에게 닿는다.

  "괜찮아요?"
  "……물 마시고 싶어."
  "갖다줄게요."
  "됐어, 괜찮아."

  어쩌라는건지. 여전히 저를 꾹 붙잡은 손을 보며 지크프리트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이대로 잘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저도 다시금 고쳐 안으며 라그렛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나른함 때문인지 금세 감기는 눈 위로 다시금 가볍게 입맞춰주고. 어쩐지 열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걸 본인도 느끼는 모양인지 라그렛은 자꾸만 더 지크프리트의 품에 파고들었다.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는 와중에도. 더위 많이 타는 사람인데, 덥지도 않은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해줘야할지도 모르겠고. 사실 저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사람을 억지로 떼내어서 뭔가를 해주기도 좀 그랬다.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라그렛의 머리칼과 얼굴 여기저기에 입맞춰주며 지크프리트는 그냥 그런 그를 더 소중히 껴안았다.

  "……나 잠들어도, 어디 가지 마."

  놓지도 말고….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숙여 그런 라그렛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어디 안 가요. 놓지도 않을 거구요. 그제야 라그렛은 작게나마 미소짓는다. 응, 하고 짧게 대꾸한 뒤의 라그렛은 묘하게 조금 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로 뭔가를 해줄 수는 없겠다 싶다. 당장은 그저 편하게 잠들 수 있도록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라그렛은 잠에 빠져들었고, 감기 때문인지 색색거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지크프리트의 귓가를 간질였다. 단지 그 뿐. 마주보고 누운 것도 아니고 제 품에 안겨있는 이상 베개를 베게 하기는 힘들어서. 베개 대신 팔 하나를 벨 수 있도록 내주고, 남은 팔로는 가만히 감싸안았다. 그러고 고개를 숙이니 미열 때문인지 약하게나마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또 가볍게 쪽, 하고. 잘자요. 하고 귓가에 속삭이니 으응, 하고 대답처럼 웅얼거리는 잠꼬대가 퍽 귀여웠더랬다. 그래서 지크프리트도 그냥 그대로 눈을 꼭 감아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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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라그] 0919


   밤의 시간은 낮의 시간보다 빠르게 흘러간다. 한두 시간 정도의 오차를 두고 똑같이 배분되어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분명하게 있음에도 그러했다. 여름의 밤은 늦게 찾아오고, 아침은 이르게 찾아온다. 반대로 겨울의 아침은 느리게 찾아오지만 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온다. 딱 그 정도의 오차.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저녁이, 밤이, 새벽이. 달이 가쁘게 물러가는 것은 결국은 체감의 탓이다. 아니면 잠으로 보내는 시간이 길어서던지. 아, 후자 쪽에 가깝나. 아무튼. 이런 부질 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밤은 저물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리 장황하게 늘어놓았어도 라그렛 블랙로즈는 지나가는 밤에 연연해하는 소년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관심한 축에 가까웠지. 그에게 밤이란 하루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때때로 사람이 다 그렇듯 깊어가는 새벽과 어두운 밤하늘, 그를 밝히는 밝은 달에 심취해 센치해지곤 했으나. 그 정도에 흔들리는 소년은 더더욱 아니었고. 남보다 몇 배는 무심하게 흘려보낸 밤이 몇 밤이나 될까. 독서가 취미인 소년 치고는 퍽 감수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리 저를 평가하면서도 라그렛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이리 길게 쓸모 없는 생각을 이어온 것만 해도 기실 생각 이상의 감수성을 내포한다는 정도였다.

  그리하여 저를 감수성 부족한 소년이라 평가내리면서도 사실은 제법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저에게 박한 평가 만큼이나 남에게도 무덤덤한 사람이었다.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 직을 떠맡았으면 조금의 칭찬 정도는 해도 좋으련만. 그가 할 줄 아는 립서비스는 어디까지나 공적인 것에 한했다. 이따금 불려가 블랙로즈로서 대표하는 자리인 순혈 모임이나, 그런 비슷한 것들. 외에서는 사실, 무덤덤함을 넘어 과할 정도로 야박했다. 마치 칭찬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사람 마냥. 비단 주장으로서 그리핀도르 팀을 대할 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햇수로 4년 째 이어오고 있는 스터디에서도 그랬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맡고 있는 소년이 있다. 그 아이가 제대로된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다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말이다. 칭찬이 입에 붙지 않은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어린 축에 속했던 라그렛이 칭찬을 할 만한 대상은 멘티인 소년 뿐이었고, 소년에게 칭찬을 할 일이 없으니 칭찬 자체가 그에게는 낯선 거다. 이런 구구절절한 이유들, 그리고 그 이유들을 앞지른 성격 탓으로 어찌되었든 라그렛은 꽤나 뻑뻑한 주장이 되었다. 그리핀도르보다 몇 배는 겉으로 차가워보이는 슬리데린과 래번클로의 주장들보다도 말이다. 다소 무뚝뚝해보이는 후플푸프의 주장보다도 더.

  그러한 그가 손을 뻗었다는 건 생각보다도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다. 쓰다듬었다고 보기도 힘든 행위였음에도 그랬다. 금빛 머리칼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진 손은 솔직히 따뜻했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그는 그마저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햇수로, 4년. 라그렛 블랙로즈가 3학년이고 지크프리트 위버가 신입생일 때 시작된 스터디 동안. 그리고 그 시간 외에도 선배와 후배로 지내왔던 시간 동안. 라그렛이 지크프리트를 약하게나마 쓰다듬어주었던 때가 있었던가. 동류인 순혈에게만 제외하고 모든 이에게 세워왔던, 아주 잘 벼려진 날이 살포시 접어들어가기 시작했던 4학년의 크리스마스 이후 라그렛의 태도는 상당히 누그러진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에 그쳤다. 부러 쓰다듬은 부드러운 행동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제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서까지 이랬던 적이 있었던가, 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라그렛 본인이 곰곰히 고민할 정도로. 곰곰히 생각해보니 처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라면 정말로 생각 없이 뻗은 손이어서 기억 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거겠지. 그래서, 왜 그랬지. 가지런히 누운 채 한참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던 라그렛이 문득 제 오른손을 들어 눈 앞에 펼쳐보였다. 순혈 가문 도련님 치고는 제법 거친 손이다. 손 끝에 닿았던 금빛 머리칼이 사락거리던 감촉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제 눈에 더이상 보이지 않도록 내려 침대 시트 위에 올렸다. 이유를 고찰해봤자 부질 없는 짓이다.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는 어느 때처럼 생각 없이 한 행동이겠지. 라그렛은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고 잠을 청했다.


  ―그래서, 어제 졸면 혼낼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용캐 다 한 모양인지 지크프리트가 나름 의기양양하게 내밀었던 스터디 과제들을 눈으로 훑어보던 라그렛은 어느새 고개를 들어 지크프리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깃펜을 한 번 손으로 빙글 돌렸다. 급하게 한꺼번에 한 과제는 어느정도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라그렛의 성에는 당연히 차지 않았고, 그래서 당연히 평소처럼 잔소리와 지적할 점을 따박따박 뱉어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거였다. 허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애한테 따가운 소리를 해봤자 제대로 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라그렛은 턱을 괸 채로 계속해서 느릿하게 깃펜을 손으로 돌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졸고만 있는 소년에게서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어제부터 참 이상한 일이지. 평소였으면 귀라도 잡아당기면서 깨웠을텐데, 깨울 맘이 들지 않는 건. 어제도 혼냈어야 정상이었던 거였는데. 소리 조차 내지 않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비게 된 손이 문득 뻗어진다. 왼눈 께에 쏠려 머물고 있는 앞머리칼에 손 끝이 닿았다. 그대로 옆으로 넘기듯이 사락, 하고. 한참 감겨있던 눈이 반 쯤 뜨여진다. 항상 앞머리 아래에서 언뜻언뜻 보이던 왼쪽 눈동자의 붉은색이 보였다. 라그렛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앞머리를 매만지던 손이 올라가고,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꾹 눌러 책상에 박아버렸다. 잠깐 뜨여졌던 눈이 또 머리가 책상에 닿았다고 다시금 감겼다. 많이 졸렸던 모양이다.

  제 권속, 이라 칭하기엔 멀고 제 선 안, 이라 끝내기엔 그보다는 가깝다. 지크프리트 위버는 그 시절부터 라그렛 블랙로즈에게 그 간극 어딘가에 서 있는 존재였다. 사실은 그 시절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알게 모르게 헤이트 크라임에 손을 댔던 저학년. 그 때 제 앞에 뚝 떨어진 머글 태생 소년은 솔직히 말하자면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터인데. 남이 건드리면 하염없이 불쾌했고, 그렇다고 구태여 저가 건드리지도 않았다. 괴롭힘 당하는 걸 도와줬냐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다소 제멋대로였다고 생각한다. 끝내 제 눈에 지크프리트에게 손을 대는 얼굴이 보여져 본의아니게 응징 아닌 응징을 해주었던 일을 떠올려보자면, 더더욱. 도움은 주지 않았으나 응징은 하고 다녔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그냥 눈에 밟혀서 그랬다기엔 했던 일의 강도가 너무나도 강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지.

  잔머리가 듬성듬성 삐져나와 있는 뒷머리에 여전히 올려진 채인 제 손에 시선이 닿는다. 그대로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제법 부드러웠다.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게 이런 느낌인가. 참 새삼스러운 감상이다. 그리고, 이상하지 않나. 나도, 너도. 지크프리트 위버가 피곤해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제멋대로 꼬셔와 시작하게 만든 퀴디치에, 배분해주었던 포지션과도 달라졌으니. 적응을 위해 부단히도 열심히 노력하는 게 제 눈에도 보였더랬다. 어차피 추격꾼 자리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서 정말로 저가 바꿔도 되는 일이었는데. 강요에 가까운 제안을 받아주었던 것도,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되었을 포지션을 바꿔준 것도. 사실 주장인 제 입장에서는 다 고마운 일들 뿐이라 어느 정도의 편의는 봐줄 수 있었다. 먼저 말로 꺼내지 않았을 뿐. 예를 들어 스터디 한 번 쉬면 안 되겠냐고 말해왔더라면 흔쾌히 그러자고 해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밤을 샐 정도로 굳이 무리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상하다는 말로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혼나는게 무서웠나. 아니면 그리 빡빡한 선배로 보였나. 사실 둘 다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라,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어버렸다.

  제법 오랜 시간 금색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은 두어번 톡톡 두드리는 것을 끝으로 떨어져나갔다. 이번에는 사락거리는 감촉이 남았다. 싫지는 않았고. 다시금 비어버린 손은 종이와 깃펜을 찾아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잠시 물끄럼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으로 보이는 지크프리트를 보던 라그렛은 저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두 번 정도 접었다. 머리와 책상 사이에 깨지 않도록 살살 끼워넣어 베개처럼 베게 하고 나서야 라그렛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도, 오늘도 어쩐지 이상하기만 한 하루다. 내일은 이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걸. 짧은 한숨을 내쉬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가 밤을 새 해 온 과제들을 옆에 끼고 자리를 떠났다. 그곳에는 그렇게 곤히 잠든 지크프리트와 그 곁의, 라그렛의 필체로 또박또박 쓰여진 작은 쪽지만이 남았다.


  「새 과제는 없고, 대신 내줬던 과제 다시 제대로 해와. 목도리는 안 돌려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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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인연의 증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한낮의 따스한 햇볕을 느껴본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네일은 정자세로 누운 채 한참이나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곗바늘이 째깍, 하고 3 쪽으로 약간 움직였다. 새벽에 비교적 일찍 잠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의 하루의 반을 잠으로 보냈다고 할 만 했다. 한 번도 깨어나지 않고. 네일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오래 누워만 있었기 때문일까, 영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편하게 자본 것도, 그 와중에 한 번도 깨지 않은 것도 드문 일이었더랬다. 이내 네일은 픽 웃고는 짧게 마른세수를 했다.


  많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지금 나. 문득 깨닫게 됐다.


  네일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올려둔 안경을 손에 쥐고, 캘린더 또한 집어 들었다. 안경은 쓰고 캘린더는 무릎 위에 올려둬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손을 뻗어 캘린더의 제일 앞으로 넘기자 2015년의 9월이 나왔다. 2015년은 참 이상한 해였다. 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살기로 마음먹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도 생겼다. …정말로, 정말로 이상하고 또 이상한 일인데. 그마저도 기쁘고 행복해서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낯설지만 좋은 느낌. 캘린더 한 장을 넘기니 10월이 나왔다. 네일은 제 심장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심장이 뛰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한참을 더 넘겨서 다시금 2016년의 7월.

  며칠 전은 제 생일이었다. 졸업 직후 따로 집을 구해 나와 살게 됐다는 걸 전하면서, 갑작스레 생긴 정적을 틈 타 넌지시 7월 6일. 이라고 말했던 것은 일종의 변덕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고, “내 생일.” 하고 덧붙여 말하자 웃음을 터뜨렸었다. 그 웃음의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떠들썩한 생일은 아니었으나 인생 최고의 생일을 보냈다고 말 할 수 있었다.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나도 행복했으므로.

  그렇게 생일을 지나 18살이 되었다. 18살은 네일에게 있어서 조금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나이였다. 딱 이 나이 때에 형이 자신을 감싸다가 어머니와 함께 죽었다.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형이 살아야했을 인생을 대신 살 것이라 마음먹고, 오로지 형만을 좇아 살았었다. 중간에 기분 나쁜 열등감으로 변질되었을 정도로 집착했다. 18살……. 그래서 이 나이를 넘어 살지는 못 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아니, 생각해왔었다. 과거형을 쓰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앞으로는 온전히 저만의 삶을 살아갈 터다. 어떤 형태로든 연인의 곁에서. 스무 살이 넘어도, 한창 아름답고 꽃다울 나이를 넘어도, 수명이 다해 죽을 그 때까지도.


  네일은 침대에서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켰다. 갑자기 하고 싶은 게 생겼다. 혼자 외출하는 건 산책을 빼면 오랜만이 될 듯싶다. 마법 세계는 별로고, 아마도 머글 세계 쪽으로 가야겠지. 무작정 필요한 곳을 찾아갈 생각이라, 시간은 최대한 많이 필요했다. 네일은 욕실로 쏙 들어갔다. 닫힌 문 틈 사이로 작게 물줄기 소리가 새어나갔다.


* * *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고,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네일이 찾아낸 곳은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방이었다. 다이애건 앨리나 호그스미드 쪽으로 갔으면 시계방쯤이야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았겠으나, 마법사가 운영하는 시계방은 곤란했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모르는 영국 한복판의 시내 여기저기를 헤짚고 다녔던 것이다. 네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계방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 하고 울리며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안으로 들어오자 약간 진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닥 좋아하는 류의 냄새는 아니었다.


  “어서오세요.”


  맞이해준 건 인상이 좋은 여인이었다. 네일은 작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고, 가까이 가 유리장 안에 있는 시계들을 물끄럼 쳐다보았다. 향수 냄새가 조금 더 진하게 났다. 아무래도 이 여인이 사용하는 향수의 냄새인 모양이었다. 한참 시계들을 둘러보던 네일은 저가 잘못 찾아온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내부의 모습, 그리고 진열되어있는 시계들에 네일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을 무슨 의미로 읽었는지 여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세요?”

  “……회중시계 제작을 맡기려고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과학이 아닌 마법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야 아날로그식의 시계를 사용하지, 머글 세계에서는 전자식 시계를 사용할 것 아닌가. 머글 세계에서 시계 제작을 맡길 거라면 마법 세계의 상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시계방이 아닌, 전문적인 시계 공방을 찾았어야 했다. 흘끔 보니 그녀 또한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로 유리장 위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뻘쭘한 상황에 마른세수라도 하고 싶어졌다.

  네일이 다른 곳을 알아보겠다며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즈음, 문득 그녀는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작을 할 만한 공방으로는 안 보이는 데도요?”

  “안쪽에 작긴 해도 공방이 있긴 있답니다. 수리용으로 쓰는 공간이긴 한데, 제가 제작은 할 줄 모르거든요. 대신 부탁드릴 만 한 분이 계셔요.”


  대신 가격이 조금 많이 나올 거예요. 엷게 웃으며 그녀는 저가 서 있던 유리장의 건너편, 더 안쪽으로 네일을 안내했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확실히 공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공간이 나왔다. “아무래도 회중시계 같은 걸 찾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보니 제작은 배워놓지 않았거든요. 원래 여기,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그 때는 주문 제작 의뢰도 받으셨던 거로 기억한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양해를 구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참 밝은 여자다, 싶다. 처음 보는 손님에게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다 늘어놓고.

  네일은 눈을 돌려 작은 공방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낡은 쇠 냄새는 적어도 그녀에게서 나는 진한 향수 냄새보다는 나았다.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시계 부품들과 도구들을 둘러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네일에게 말을 붙여왔다. 아무래도 좋은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지금 바로 갈 테니 손님 잘 붙잡아두라고 하시네요.”


  그녀가 빙긋 웃자 네일도 어색하게나마 따라서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작은 의자 두 개를 더 가져와, 세 개가 된 의자들 중 하나에 앉았다. “생각해놓은 디자인은 있으세요?” 네일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의자 두 개 중 하나에 따라 앉았다.


  그리하여 그 여름, 네일은 약 이주일 동안 내내 먼 듯 멀지 않은 머글 세계의 시계방으로 매일 같이 찾아갔다. 디자인 협의나 주문은 첫날 방문 때 다 끝내놓았으나, 세부적인 디자인에 있어서 주문자에게 직접 보여주며 조정하는 편이 완성도에 있어서 더 좋다는 말 때문이었다. 물론 제작 과정부터 완성까지 제 눈에 다 담아두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고. 시계 안쪽에 새겨질 이름을 직접 쓰기 위해서, 이따금 은판에 글씨를 새기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는 사람이라 뺀질나게 들르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진한 향수 냄새를 두르고 다니는 그 여인과 종종 사담을 나누기도 했다. 제작을 맡아준 그녀의 어머니 또한 종종 그 대화에 낄 때가 있었으나, 제작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이야기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지 말이 없었기에 보통은 둘만의 대화였다. 물론 사적인 이야기까지는 네일이 딱 잘라서 끌고 가지 않았고, 보통은 제작하는 시계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하나는 누구 주려는 거예요? 역시 애인?”


  이런 이야기들 말이다. 네일은 그 물음에 드물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방을 찾은 네일은 억지로 웃거나 애써 웃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부드럽게 웃는 건 처음 보는 일이라 그녀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여보였더랬다.


* * *


  얼마만에 보는 거더라. 엘리후는 네일의 팔을 끌어당겨 그를 제 품에 안았다. 네일은 딱히 바르작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연인에게 제 몸을 맡겼다. 이렇게 저를 뒤에서 끌어안을 때면 귓가에서 미약하게 들리는 숨소리가 있어서, 묘할 정도로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으나 그래서 좋았다. 엘리후는 허리를 숙여 네일의 뒷목에 가만히 코를 묻었다. 아주 옅게, 눈치 채지도 못 할 정도의 낯선 향기가 났다. 네일에게선 찾아 볼 수 없었던, 동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향기가. 향수 냄새였다.


  “네일.”

  “응?”

  “요새 누구 만나고 다녀?”


  그 말을 듣는 순간 네일은 심장이 덜컹 할 뻔 했다. 아니, 확실하게 덜컹 했다. 엄연히 따지자면 만나고 다닌다기 보다는 시계 제작을 위해 만나는 것뿐이었으나, 어쨌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어?” 하며 얼빠진 소리만 낼 뿐 딱히 답을 내놓지 않고 있는 네일의 뒤통수만 물끄럼 바라보며 엘리후는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바로 닿는 네일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두어번 부비자 어쩐지 낯선 향기가 더 진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주아주 미약하고 딱히 유쾌하지는 않은, 그런 감각. 네일에게는 정말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류의 향기였기에 그가 쓰는 향수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던 네일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할까. 선물은 조금 서프라이즈로 주고 싶은데. 그럼 어쩌지. 엘리후에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할 자신은 전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후는 손을 뻗어 네일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입술을 깨무는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야속해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내가 괜히 이상한 생각 하게 될 것 같은데. 여자 향수 냄새가 나. 너한테서.”

  “그런 거 아냐.”


  그런 말을 들어버리니 저마저 괜히 불안해지지 않나. 저가 갖고 싶어져서 제작을 의뢰한 거기도 했지만 동시에 선물해주고 싶어서─동시에 회중시계 정도는 커플로 맞춰서 갖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나, 아니. 정확히는 맞춰서 가지고 있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연인을 위해서도 있는데, 괜한 오해가 생기는 건 싫었다. 네일이 시선을 저 쪽으로 돌리며 단호하게 말하자 엘리후는 푸스스 웃었다.


  “알아.”


  그 대답까지 듣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네일은 제 팔을 들어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시계방이 향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던 게 생각났다. 처음이야 거슬렸지, 지금은 적응 됐다보니 생각을 하질 못 했다. 그 냄새로 가득 찬 공간에 있는데다가, 향수를 쓰는 당사자와 매일같이 만나고 있으니 냄새가 안 배기가 더 힘들었을 터다. 그렇다고 그리 강하게 나는 것도 아닌데. 알아차린 걸 보니 제 연인이 대단하기도 하고, 그만큼 저에 대해 모든 것에 있어서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이야기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엘리후는 네일의 고개를 잡아 돌리고 제 고개도 슬쩍 틀어 입술을 맞대었다. 혀를 내밀자 닫혀있던 입술이 부드럽게 열리고, 그 안의 혀를 끄집어내 제 혀와 얽히게 했다. 일부러 타액이 섞이는 소리를 노골적으로 내자, 네일이 귀 끝까지 붉히는 게 보여서 엘리후는 속으로 쿡쿡 웃어버렸다. 이내 작게 뜨고 있던 눈까지 감고, 키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받아들이는 것마저 서툴러서, 가만히 있다가도 적극적으로 응해보려고 혀를 얽는 시늉을 하는 게 마냥 귀여워보였더랬다. 그 시늉이 저가 하는 키스와 상당히 많이 닮아있기에 더더욱.

  숨이 막힐 즈음이 되어서야 엘리후는 입술을 떼어냄과 동시에 여전히 잡고 있던 네일의 고개도 놓아주었다. 그제야 네일은 슬며시 몸을 돌려 엘리후의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엘리후 또한 마찬가지로 네일의 허리에 팔을 둘러 마주 안았다. 향수 냄새. 의식하고 나니 쓸 데 없이 더 선명하게 느껴져선, 엘리후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역시 안 되겠다.”


  어, 하는 사이에 네일은 뒤쪽의 소파로 밀려 반 강제로 눕게 됐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네일과 가만히 눈을 맞추며, 엘리후는 빙긋 웃어보였다. 채 1년을 채우지 못 한 연애 기간, 확실히 이런 쪽으로 눈치가 키워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모양이다.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었고, 사실 이대로도 귀여우니 마음에 들었지만.

  엘리후는 고개를 숙여 툭 튀어나온 목젖에 짧게 입을 맞추고, 그대로 내려가 목 언저리에 입술을 대었다. 입을 벌려 약하게 물고 빨아들이자 붉은 자국이 남음과 함께 네일이 몸을 떨었다. 제 머리채를 잡으며 밀어내는 손을 맞잡아 내리며, 엘리후는 고개를 들어 네일과 눈을 맞췄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몸은 오로지 제 손으로만 온전히. 이렇게 숨김없이 이리 솔직하게 떨린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행여나 남의 손길이 닿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남의 손이 닿는다는 것부터 불쾌한 일이었고, 그래서 하는 일종의 영역표시 같은 것이었다. 불필요할 정도의 짓궂음을 보이는 행위이기도 했다.


  “네가 실수한 거니까, 불만은 없지?”

  “……으.”


  대답 대신 작게 신음하며 네일은 잡히지 않은 한 쪽 팔로 제 얼굴을 가려버렸다. 물론 순순히 그렇게 둘 엘리후는 아니어서, 금방 그 팔을 치우고 다시 눈을 맞추며 웃어보였다. 이내 다시금 제 목에 얼굴을 묻고 흔적을 남겨가는 걸 보며 네일은 살짝 눈을 감았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게 연인의 머리칼을 잡고, 움직이는 데에는 방해되지 않도록 약하게 쓰다듬었다. 목 언저리에 닿는 혀와 숨은 그 자체로도 노골적이어서, 단순한 심술이 아니라 섹스의 전초전이라는 것쯤이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음대로 하라지. 속으로 중얼거리고 네일은 맞잡고 있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 * *


  그리하여 10월을 며칠 정도 앞둔 9월의 끝자락. 거슬리는 곳 없이 깔끔하게 마감 처리까지 끝난 한 쌍의 시계를 네일은 집까지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손을 뻗어 겉면을 쓸어내리자, 세밀하게 새겨진 그림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하나에는 여름날의 해바라기가, 다른 하나에는 겨울날의 나무가. 딱히 별 이유는 없으나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았다. 시침의 끝에는 각각 푸른색 보석과 붉은색 보석을 작게 하나씩 박아놓았다. 분침의 끝에는 그보다도 더 작은, 반대색의 보석을 박아놓았고. 그리고 뚜껑의 안쪽, 오로지 서로만이 볼 수 있을 공간. 그곳에는.



2015. 10. 15

Elihu Alfieri

Neil Claes



  제 손으로 직접 그리 새겼다. 그 작업까지 마치고 나자, 정말로 완성되었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깔끔하게 새겨진 이름까지 손끝으로 쓸어보고, 네일은 두 시계의 뚜껑을 덮었다. 제 것은 겨울의 나무가 그려진 것.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어두고, 다른 하나는 상자에 다시 잘 넣어놓았다. 언제쯤 주는 게 좋을까. 작년에 챙겨주지 못 했던 생일에? 너무 많이 남았는걸. 그 전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참지. 네일은 속으로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결국 오래는 기다리지 못하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불현듯 예감이 들었다. 1년이 되는 그 날에, 주게 되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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