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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라그] 얼음거울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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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렛 블랙로즈] 1967년 겨울, 보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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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이제야 익숙해져가는 옷장에서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 한 색의 목도리를 꺼냈다. 붉은색과 금색을 몸에 두른지 3년 째.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과 별개로 여전히 꺼려지는 색이었다. 뱀의 녹빛과 은빛을 두르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월이 호그와트에 몸 담은 세월보다 길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불만만 잔뜩 지닌 채 툴툴거리던 어린 아이는 이제 제법 조숙해져 투덜거리진 않게 되었지만, 받아들이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듯 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입학식 때에도 지난 입학식에 그랬던 것처럼 분류 모자를 보고 으르렁거렸더랬다. 남들보다 빼어난 척 하고 어른스러운 척 하지만 아직 13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사소한 것에 잘 삐지고 유치하게 구는, 그런 소년. 그래도 그 나잇대에 비해서는 제법 능숙하게 스스로 목도리를 맬 줄은 알았다. 라그렛은 거울을 보며 교복 매무새까지 정돈한 뒤에야 방을 나섰다.

  지루해 빠진 호그와트. 기대 이하로만 느껴지는 건 슬리데린에 가지 못했기 때문일까. 초록 뱀들의 틈바구니에서 홀로 툭 튀는 빨강. 대다수는 이제 신경도 쓰지 않는 풍경이었지만, 아직 학교부터 낯선 슬리데린의 신입생들에게는 그 이상으로 어색한 것이 또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라그렛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입에 넣은 사과 한 조각을 우물거렸다. 그나마 식사 시간은 괜찮은 편이었다. 지금처럼 슬리데린의 테이블 한쪽을 차지하고 앉을 수 있으니까. 아니꼬운 시선이 이따금 뒤통수에 꽂히곤 했지만, 라그렛 블랙로즈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소년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시선조차 비웃는 타입에 가까웠다. 아무튼, 먹을 것에 관심이 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슬리데린에 섞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식사 시간은 호그와트의 일정 중에서 유일하게 라그렛이 기다리곤 하는 시간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슬리데린과 함께 듣는 수업인 어둠의 마법 방어술 정도.

  "라그, 오늘도 여기 앉아있네."

  라그렛은 제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에 눈을 치켜떴다. 물론 그 눈빛은 상대를 확인하고 금세 누그러들었지만 말이다. 겨울의 눈을 그 안에 담은 듯한 새하얀 머리칼, 그 아래로 선연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 그 자체에 어울리는 슬리데린의 교복. 그리젤다 헤르메스 로페즈는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가 유독이나 잘 따르는 선배였다. 그의 손에 의해 엉망진창이 된 머리칼을 정리하며 라그렛은 멋쩍게 웃었다. 그리젤다는 라그렛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따금 누군가가ㅡ그 누군가에 해당하는 사람은 대부분 레버리 킹스턴이었고, 가끔은 스노우 그린필드였다.ㅡ 앉긴 했지만 보통은 비어있는 자리였다. 라그렛은 거리낌 하나 없이 옆을 내어주었다. 기묘한 동석. 근처의 신입생들은 더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멀리 떨어지는 아이들도 몇몇 있었다. 물론 그리젤다 또한 그런 걸 신경 쓰는 소년은 아니었고.

  "여기가 편하니까요."
  "같이 앉는 사람도 없으면서?"
  "앉으려고 하면 제가 내쫓는 거죠."

  사실이라면 사실이었고,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었다. 내쫓고 말고는 그의 기분에 따라 달랐다. 총애해 마지않는 슬리데린이라 하더라도 라그렛은 쉽사리 제 옆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마음이 맞는 친구나, 존경하는 선배가 아닌 이상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날에는 타인이 와 앉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런 날은 상당히 드물었다.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이미 라그렛의 주변은 불가침구역이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그 중심에 있는 라그렛 블랙로즈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서도. 허나 어떻든, 결국 라그렛은 그런 것 또한 신경 쓰는 소년이 아니었다. 사실상 가까운 이가 오더라도 그렇게 반기지만은 않았다. 혼자를 가장 편해했다. 그저 슬리데린을 친밀히 여기고, 그리핀도르를 거북해할 뿐.

  "뭐… 이런 얘긴 됐고. 다음 수업 뭐야?"
  "어둠의 마법 방어술이요."
  "그럼 슬슬 보가트 수업을 할 땐가."

  끝끝내 눈앞의 음식들에 완전히 흥미를 잃고만 라그렛이 그리젤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보가트는 아직 책에서만 본 적 있는 생물이었다. 보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변한다고 했나. 어린 시절, 처음 보가트에 대해 알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정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머릿속을 뜯어볼 수라도 있나. 그렇다면 연구할 가치가 있는데. 생물이 레질리먼스를 쓰는 게 가능하기라도 한 건가. 그런 류의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깊게 고민하기에는 금방 흥미를 잃고 마는 소재긴 했지만은. 대처법이 있고, 그게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면 이용 가치는 사실상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왜요?"
  "그냥.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기 딱 좋은 수업이니까, 잘 익혀두라고."

  리디큘러스.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리젤다는 소리 없이 읊조리곤 품 안의 지팡이를 휘둘렀다. 라그렛은 잠시 불편한 표정을 했다가도 금세 풀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이 지나치네요, 선배."

  입꼬리를 올려 짓는 미소는 어쩐지 그리젤다와 닮아 있기도 했다.



05.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정확히는 별로 흥미도 없다는 듯이 반응했던 라그렛이, 똑같은 소재로 그리젤다를 찾은 건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다. 보가트 수업을 마치고 온 라그렛은 그리젤다의 앞에서마저 영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선배는 보가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울 질문에 그리젤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쉬이 입을 열었다. 그는 총애하는 후배가─그리핀도르에 들어갔다는 점만 제외하자면─ 왜 그런 것을 묻는지 궁금해했다. 나이에 걸맞게 겁에 질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런 건 라그렛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내 그리젤다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서워서 그래?" 질문의 답과는 다른 것을 입에 담았다.
  그리젤다 헤르메스 로페즈는 3학년의 어둠의 마법 방어술 수업, 연례행사처럼 항상 하곤 하는 보가트와 관련된 수업에서 말도 안 되는 것을 보았다. 바로 자기 자신의 시체였다. 아직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젤다는 그것에서 불쾌함밖에 느끼지 않았고, 금세 생각 한 켠에서까지 지워냈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미뤄두었다. 그러니 라그렛에게 해줄 충고 또한 그 선에 머물렀다. 역으로 던진 제 물음에 고개만 젓는 라그렛을 보며 그리젤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또한 말도 되지 않는 걸 보았나.

  "솔직히 나는 그게 왜 내 보가트인지도 모르겠는데. 넘길 수만 있으면 그거로 된 거 아닌가."
  "……그런가요."
  "너도 모르겠으면 크게 신경 쓰지 마. 알았지?"

  한겨울의 눈이 내려앉은 듯 새하얀 머리칼 아래의, 새파랗게 빛나는 눈이 웃었다. 라그렛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의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만족스러운 답을 내어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02.


  샛노란 눈동자에 위협적으로 덜컹거리는 옷장이 담겼다. 소년은 기계적으로 그것의 정의를 머릿속으로 읊었다. 보가트. 옷장이나 침대 밑 같은 어둡고 좁은 곳에 숨어 사는 생물로, 어떤 모양으로도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괴물이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모습으로 변하여 겁을 주는 습성이 있다. 라그렛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보가트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는 리하르트 오스본을 보았다. 설명이 끝나면 한 명씩 보가트를 보게 해 리디큘러스를 쓰도록 하는 간단한 테스트를 한다지. 라그렛은 책상에 턱을 괴었다. 그 눈은 금세 지루함에 잠겨들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T를 받은 성적표? 농담처럼 그리 생각했으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건 자존심이 상하는 거지, 두려워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도대체 뭘 보게 될까. 깃펜의 깃털을 만지작거리며 라그렛은 그리핀도르의 누군가가 첫번째로 이름이 불려, 옷장 앞에 서는 것을 보았다. 옷장이 벌컥 열리고, 새까만 무언가가 점점 뚜렷한 형태를 취해갔다.



04.


  "기분이 별로인가 보네요."

  라그렛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보라색 눈이 저를 응시했다. 눈을 깜빡이던 라그렛은 고개만 휘휘 저을 뿐이었다. 레버리 오르페우스 킹스턴은 라그렛이 가까이하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당연히 소속은 슬리데린. 녹색과 은빛이 퍽 잘 어울리는 킹스턴 가의 도련님. 그는 좋은 라이벌이었고, 라그렛이 거리낌 없이 대하는 친구였다. "거짓말." 짓궂게 웃는 얼굴을 보며 라그렛 또한 하릴없이 웃고 말았다. 어둠의 마법 방어술은 좋아하는 수업이었다. 수업 자체의 호감도 컸으나, 슬리데린과 함께 듣는 수업이기에 그러했다. 보가트에 대한 수업이 끝나고 난 직후, 저녁. 대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 레버리를 마주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긴, 별로일 만도 하죠."
  "신경을 긁을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왜죠?"

  긍지 높은 블랙로즈의 도련님이 겨우 보가트를 퇴치하지 못했다는 건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일 텐데. 레버리는 낮게 웃었다.

  "그러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네. 별로인 건 사실이지만."
  "리디큘러스까지는 성공했으니까 그런 걸지도 모르죠."
  "그런 번거로운 생물은 질색이야. 마주칠 일도 없을텐데."

  힘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라그렛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가트를 퇴치하기 위해선 두 가지 작업이 필요하다. 첫째로, 리디큘러스를 사용해 보가트를 시전자가 상상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만들 것. 둘째로, 웃음 소리를 내 보가트를 쫓아낼 것. 첫 번째는 순조롭게 했으나─비록 의문에 빠졌긴 했지만─ 두 번째는 무리였다. 라그렛은 도저히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없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까스로 생각해내긴 했지만, 아무튼 그건 절대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웃을 수도 없지. 잠시 회상에 잠겼던 라그렛은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글쎄요.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아나요, 라그?"
  "불길한 소리 하긴."

  심란한 표정을 지은 채로 라그렛은 고개를 돌렸다. 보가트의 실수라고 생각해야 할까. 그것도 생물이라면 생물이니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이해가 되긴 했지만, 글쎄.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것을 행한 주제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구는 친우를 보고 있자니 저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냥 가볍게 넘길 수 있을 만한 것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넘길 수도 없고 가볍지도 않으며 말이 되지 않는다.

  ……도통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06.


  그로부터 일주일 후,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실. 라그렛은 처음으로 교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마냥. 리하르트 오스본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학생도 아닌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가. 그는 그리핀도르에 아주 드물게 나타나곤 하는, 자신을 언짢아하는 학생이었다. 머글 태생이라는 이유로. 그것과는 별개로 어둠의 마법 방어술은 좋아하는 과목인지 항상 열심히 임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기묘할 정도로 공과 사를 잘 분리하는 소년. 나이에 맞지 않는 모습이다. 소년이 블랙로즈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리하르트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사실 최근 들어 리하르트는 사적인 이유로 라그렛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로 인해 기묘한 조합 하나가 탄생했으므로.

  "무언가 용건이라도 있나요, 블랙로즈 군."
  "……질문이 하나 있어서요."

  작은 한숨 소리가 대답에 이어졌다. 역시, 기꺼운 태도는 되지 못했다. 표정에서부터 당신에게 무언가 묻는 것 자체로 자존심 상한다는 티가 풀풀 풍겼다. 자연스레 호기심이 인다. 머글 태생이라는 이유로 주력 과목의 교수님을 달가워하지 않는 그가 과연 무엇이 궁금해졌길래. 지금처럼 단둘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불편할 소년일 터. 그런 예상이 빗나가진 않았는지 라그렛은 괜히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불편함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톡톡톡. 검지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꽤 빨랐다.

  "보가트."
  "음?"

  리하르트는 눈을 깜빡였다. 그 입에서 나온 단어는 꽤나 의외였고, 어느 면에서는 납득이 가기도 했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의 보가트.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사실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그의 보가트를 보고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으레 13살의 아이들이 그렇듯 금세 잊어버렸겠지만. 하지만 당사자는 잊지 못하는 것이겠지. 라그렛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보가트가, 보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도 변하나요."
  "그건 블랙로즈 군이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던가요?"

  라그렛은 그 되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못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고의로 말을 무시했다. 대화를 길게 끌 생각도 없다는 듯이. 리하르트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보가트를 마주한 라그렛은 확실히,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스러워했지. 불쾌하게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리하르트는 이번에도 라그렛이 별로 원하지 않을 물음을 입 밖으로 내었다.

  "다른 걸 먼저 이야기해볼까요. 블랙로즈 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무엇이죠?"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그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단언하는 이유는요?"

  말문이 막혔다. 찾지 못한 답 중 하나였다.

  "블랙로즈 군, 사람에게는 내재된 공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인은 모르지만 속으로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거죠."
  "보가트가 틀리지 않았다는 말씀이신가요."

  온색을 띠고 있음에도 어딘가 차가운 샛노란 눈동자가 날을 보였다. 리하르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상대는 아직 13살짜리 어린아이였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이유로 자신을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별개로, 학생에게 현실을 직시시켜 주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었기에.

  "글쎄요. 만약 틀렸다면 학계에 보고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가트가 실수를 했다고. 만약 진짜로 그 모습이 블랙로즈 군이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라면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블랙로즈 군이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이 뭔지 모른다면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물론 블랙로즈 군이 보가트를 마주한 순간, 보가트가 변한 모습은 제가 보기에도 꽤 놀랍긴 했습니다만……."
  "여기까지 하죠."

  라그렛은 리하르트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동자 속에서 날카롭게 벼려졌던 칼날은 어느샌가 시선의 끝을 향해 명백한 경멸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보가트가 변한 모습을 떠나, 그 모습을 교실에 있는 전원이 보았다는 것을 더 끔찍해 했다. 라그렛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고, 리하르트는 되려 웃음으로 응수했다. 애초부터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그 모습이 자신이 두려워하는 모습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라그렛은 부러 큰 소리를 내며 혀를 찼고, 뒤돌아 교실 문을 향했다.

  "아참, 블랙로즈 군."

  마찬가지로 라그렛은 대답하지 않았다.

  "멘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꾸어도 괜찮습니다. 언제든 말해주세요."
  "……그정도는 알아서 합니다. 신경 끄시죠."

  큰 소리를 내며 교실의 문이 닫혔다. 한참 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느리게 눈을 꿈뻑이고는, 뒤늦게 수업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03.


  덜컹거리는 소리가 시끄럽다. 이름이 호명되어 나온 라그렛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느릅나무 지팡이를 들었다. 느릅나무, 용의 심줄. 블랙로즈이자 순혈이라는 긍지의 상징. 그런 이유로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제 지팡이를 좋아했다. 샛노란 색, 예리한 눈빛은 당장에라도 무언가가 튀어나올 듯 살벌한 기세를 내뿜는 옷장을 꿰뚫었다. 이윽고 지팡이의 끝을 향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리디큘러스. 쉬운 주문이 아닌가. 그저 무엇으로 변할지 궁금할 뿐. 무엇을 보더라도 겁에 질리진 않겠지. 그리 생각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가 아닌, 정말로 순수하게 그리 생각하기 때문에.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옷장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튀어나오고, 소용돌이 치는 모습과 함께….

  …?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놓여진 것은 줄기에 가시가 돋친 검은 장미 한 송이였다. 그저 한 송이가 덩그러니. 잠시 그대로 굳어있던 순간 또 한 번 소용돌이가 치고, 장미가 불어났다. 두 송이, 네 송이. 이윽고 아찔한 장미 향을 내뿜는 검은 장미의 정원으로.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 하며 헛웃음을 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속으로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까지 내었을지도 모르겠다. 라그렛은 이를 악물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도저히 열릴 생각을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리디큘러스!"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소리, 그리고 시들어가는 장미들. 빛도 수분도 받지 못해 바싹 말라 비틀어지는, 흉한 모습. 보가트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리디큘러스를 사용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 뒤 웃음소리를 내 쫓아내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걸 보며 어떻게 웃을 수가 있겠느냐고. 이게 어째서……. 라그렛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지크랑 19금 티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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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라그] 여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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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뜩 흐트러진 시트 위에 놓여있던 손이 더듬거리며 연인의 손을 찾았다. 그걸 본 건지 못 본건지 반 쯤 눈이 감겨있는 눈꺼풀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라그렛은 눈 위로 닿는 익숙한 온기를 느끼며 완전히 눈을 감았다. 손은 기어코 찾아내 맞잡았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나른한 공기에 취해, 감은 눈 아래 굳게 다물려있던 입술이 작게 벌어져 한숨이 새어나왔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관계 후의 여운을 제법 길게 느끼는 청년이었다. 그 여운에 몸을 맡기다 스르르 잠드는 때가 많을 정도로. 그 연인인 지크프리트 위버는 그렇게 제 품 안에서 잠든 그가 마냥 귀여워 항상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여느 때와 지금은 조금 달라, 라그렛은 잠들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새어나왔던 한숨 소리는 금세 끄응, 하고 앓는 소리로 변했다.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볼을 살살 손등으로 간질였다. 감겼던 눈이 한 쪽만 느리게 뜨이다 이윽고 완전히 뜨였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했다.

  "안 자요?"

  먼저 입을 연 건 지크프리트였다. 라그렛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 행동에서도 졸린 기운이 풀풀 느껴져 지크프리트는 조금 웃고 말았다. 졸린 눈이 웃음 소리에 샐쭉해져선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이내 라그렛은 어리광을 부리듯 품에서 밍기적거리다 슬 그를 밀어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려 그런 라그렛을 고쳐 안았다. 라그렛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알아 듣지 못 할 말을 웅얼거렸다. 지크프리트는 쪽 소리를 내 입을 맞추며 그 입을 막아버리고, 우물거리던 입술에선 무어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안겨 있으면 더 졸리단 말이야, 같은 말로 추정되었다. 지크프리트는 알아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을 하며 한 번 고쳐안았던 라그렛을 놓아주지 않을 듯이 제법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왜 안 자요. 자자, 선배."
  "안 돼."

  싫어, 도 아니고 안 돼, 였다. 말과 동시에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해버렸다. 관계의 이름이 변한 이후로, 의식해버리는 것들이 있다. 눈빛이나 시선에서 느껴지는 숨이 막힐 정도의 애정이라던지. 버겁거나 부담스럽진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종종 낯설게 느끼곤 했다. 부드럽게 턱이 잡히는 감촉에 결국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은. 지크프리트는 잔뜩 졸음이 낀 연인의 눈가 끝을 양 엄지 손가락으로 문질거렸다. 라그렛은 기어코 그 손도 밀어내고는 대신 제 손등으로 눈가를 부볐다.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어버렸다.

  "옷이라도 입혀줄게요."
  "됐어. 귀찮아……."
  "감기 걸려요."
  "여름인데 뭐."

  여름 감기는 바보 아니면 안 걸린데. 영 무심한 투로 덧붙이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껴안았다. 습관적으로 품에 얼굴을 파묻으려다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지크프리트는 입혀주려고 집어들었던 윗옷을 입혀주지도 덮어주지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있다간, 시선이 맞닿자 옷을 대충 놓아두고는 한켠에 밀어둔 이불을 끌어와 라그렛에게 덮어주었다. 장난스레 이불로 돌돌 말아버리는 시늉도 했다. 불만스럽다는 눈빛에 차마 제대로 실행으로 옮기진 못해 어쩐지 아쉬워보였다. 라그렛은 그런 기색을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끌어와 꼬옥 맞잡았다. 장갑을 벗겨서 확인해보면 여러 방식으로 잔뜩 흠집이 나 있던 손은 꽤 전부터 조금씩 상처가 줄어들고 있었다. 라그렛은 그걸 만족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반창고를 붙여줄 일이 줄어들겠네,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 손 위로 입술을 대었다. 가만 바라보고 있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띄워졌다. 조금 볼이 발갛게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일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라그렛은 반대쪽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귀여워, 하고 입모양으로만 말하자 불퉁한 표정이 돌아온다. 라그렛은 나른하게 웃고는 그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지크프리트는 금세 표정을 풀고는 아니거든요, 하고 따라하듯 입술만 움직였다. 다시금 귀엽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왼눈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치워 빤히 바라보았다.

  "지크."
  "응?"
  "잠깐만… 1, 2, 3."

  ─됐다. 라그렛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지크프리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포개고, 떼어냈다가 다시금 깊게 키스했다. 동그랗게 뜨여진 눈은 제 손으로 감겨주었다. 아직도 마냥 어려보이기만 하는 연인은 여전히 기습적인 스킨십에 약했다.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있었으나. 연인은 자각하고 있을지, 아닐지. 궁금했지만 부러 묻지는 않는 것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제게는 귀엽게 느껴질 터다. 꽤 오래 이어진 키스를 끝내고 입술을 뗀 라그렛은 선홍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이맘 때가 되면 항상 기다리게되는 시간이다. 말을 하는 건 자신이면서도.

  "생일 축하해, 지크."

  그 말을 들은 지크프리트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사락거리며 라그렛의 옆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다간, 귓바퀴를 따라 살살 쓰다듬거나 귀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살짝 잠겨있는 목소리가 어쩐지 달달하게 느껴진다. 그건 목소리가 담아낸 말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연인의 목소리이기 때문일까. 역시 둘 다인가. 생각들의 나열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라그렛을 제 품 안으로 더 끌어왔다. 그제야 라그렛은 얌전히 안겨오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라그렛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지크프리트는 그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제 것과 같은, 같을 수밖에 없는 체향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숨이 섞여 나른해졌던 공기가 차츰 가라앉았다. 사랑스러운 사람.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지크프리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 때문에 안 자고 버텼어요?"
  "중요한거니까."
  "아침에 해줘도 되는 걸요."

  라그렛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이내 고개를 들고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봐, 잠시간 시선이 닿았다가. 내가 싫어, 하는 말이 굳이 말로 하지 않는데도 그 시선에서 느껴졌다.

  "이제 잘거야."
  "응. 잘 자요, 선배. 좋은 꿈 꿔."

  다시금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들렸다. 이윽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릴 즈음, 지크프리트도 눈을 감았다. 얼마 정도 지나 연인의 체온에 기대어 잠에 빠져들락 말락할 때, 문득 볼에 온기 하나가 사락거리며 닿아왔다. 그 뒤로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웃고 있는 라그렛이 보였다.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당신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꿈에서 만나."

  그 말은 단순한 밤인사를 떠나, 자신에게 좋은 꿈이란 너를 만나는 꿈이라는 사실을 뜻하기도 했다.


* * *


  방학이 다가오는 1969년의 초여름, 기숙사의 모두가 잠을 청하러 방으로 들어가 텅 비어버린 그리핀도르 휴게실. 시간에 맞지 않게 두 사람이 남아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제법 삭막한 분위기. 곧 5학년이 될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어린 후배를 앞에 앉혀둔 채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앞의 지크프리트 위버는 죄 지은 사람 마냥 움츠러들어선 라그렛의 눈치만 힐끔힐끔 보았다. 라그렛이 자고 있던 지크프리트를 다짜고짜 깨워서 데리고 나온 지 벌써 10분 째. 아무 말도 없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더랬다. 지크프리트는 머릿속으로 저가 혹시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하는 고민을 한참 하고 있었다. 평소 행실 문제일까, 아니면 스터디? 답잖게 맹랑하게 군 걸 뒤늦게 혼내려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까지 닿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쩌겠어. 혼이 난다고 해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터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부쩍 세상 다 끝난 모양새를 하던 당신이었기에. 그게 못내 심술이 났었다.

  "너."

  드디어 10분 여 만에 첫 마디가 떼어졌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에서 나온 목소리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완전히 화가 난 건 아니라는 뜻이니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크프리트는 움찔하고는 물끄럼 라그렛을 바라보았다. 졸음은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정적. 본래도 사이가 가까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서먹할 일일까. 물론 서먹하게 느끼는 건 일방적으로 쫄고 있는 지크프리트 뿐이었다. 휴게실이 이렇게 춥게 느껴지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며, 할 말이 있다면 빨리 말해달라고―이 말을 꺼내면 더 혼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서도― 재촉하려 할 때 즈음. 라그렛이 입술을 뗐다. 문득, 그도 어쩐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한 것처럼 보였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긴 한숨이 떼어진 입술에서 먼저 새어나오고, 말이 이어졌다.

  "요새 나에 대해서 캐고 다닌다며."
  "네?"

  혼이 나거나 꾸중을 들을 수많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생각했으나 이 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 한 것이었다. 지크프리트는 다소 멍청해보이는 표정으로 라그렛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라그렛은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를 들은 게 한두번은 아닌데, 설마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발뺌할 수밖에 없는걸요. 그런 적이 없으니까……."

  탐탁치 않다는 표정이 되돌아온다. 짚이는 게 전혀 없었다. 캐고 다닌다고? 대체 무엇을? 누가 그런 걸 말한 거지? 물음만이 이어졌다. 제법 위협적인 태도에 기가 죽긴 했으나 지크프리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캐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마냥 헤헤 웃으면서 친하다 말할 만한 사이는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가까워졌다.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물어볼 수 있을 정도의 관계는 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마음대로 끝내려 했던 스터디를 다시 시작하게 된 이후로, 그는 티가 날 정도의 친밀함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그런데 왜 제가 선배를 캐고 다니겠어요. 억울함에 목소리 조차 잘 나오지 않아서 더 억울해지고 만다. 그런 지크프리트를 읽어내기라도 했는지 라그렛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몰아세울 생각은 없으니까." 느릿하게 떼어진 말에 아랫 입술을 짓씹던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 하나에 닿아,

  "…설마 선배 생일 물어보고 다닌 거요?"
  "아, 그렇게 말했던가. 아무튼 캐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지크프리트는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당사자의 귀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생일 딱 하나만 물어보고 다닌 거기에 설마 그거에 사람을 캐고 다닌다는 말을 붙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애초에 꽤 많은 사람에게 오래 묻고 다녔는데도 알아내지 못 한 정보였다. 나름 그와, 설령 과거형이라 하더라도 친해보였던 사람들에게까지 물었음에도 다들 모른다 이야기했다. 고의로 말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이 넓은 호그와트에 사람 생일 하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니. 제법 비참한 기분을 맛보았던 게 당장 며칠 전의 일이 아니던가. 과할 정도의 비밀주의라고 투덜거리기도 했었다.
  뚱한 시선이 지크프리트 위버에게 가닿는다. 그래도 라그렛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제법 풀려 있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몇 번이나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리듯 제 팔을 두드리던 라그렛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소문이 얼마나 와전되기 쉬운 놈인지 잘 아는 소년이었다. 크리스마스 휴일이 끝나고, 그 겨울 대연회장에서 저가 벌였던 일이 어떤 소문이 되어 돌고 있는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일 자체를 벌이지 않았겠지. 되려 인생의 교훈 같은 것을 얻었다. 무엇에 대해서든 소문은 믿을 만한 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련은 사람을 더 성숙하게 만들고, 성장을 위해서는 아픔이 동반 된다지. 어딘가의 명언 같은 것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음이 사실이었다.

  "…그런 건 내게 물어도 됐을텐데."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서요."

  라그렛은 작게 혀를 찼다. 호그와트에 다닌 4년,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걸 궁금해 한 사람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가르쳐주지 않은 건 가르쳐줄 필요성을 못느꼈기 때문이다. 가르쳐줄 이유도 없다. 생일이랍시고 요란하게 축하해주는 건 귀찮고, 선물은 받아봤자 낭비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생일 선물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항상 시끌벅적한 그리핀도르식 생일 축하는… 더더욱 받고 싶지 않다. 라그렛은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먼저 말을 꺼내놓고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니. 적어도 화를 낼 만한 일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눈치나 사회성이 0에 수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생일을 알아내려는 행동 뒤에 어떤 감정과 이유가 깔려 있는지는 충분히 알 터다. 당신이 태어난 날을 축하해주고 싶다는, 순수한 호의를 기저에 두었을테지. 눈 앞의 어린 후배 또한. 그런 걸 가지고 혼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얼마 없을 것이다. 아무리 저가 깐깐하고 까칠한 선배라 하더라도 이번 건에 대해 지크프리트를 꾸짖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생일 축하는 깜짝 선물로 해주는 게 더 좋아요. 그리 덧붙인 지크프리트는 우물쭈물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르쳐주기 싫으시면 안 가르쳐주셔도 괜찮아요."
  "정말로?"
  "…가르쳐주신다면 정말로 좋겠지만요."

  이건 그냥 가르쳐 달라는 말이 아닌가. 라그렛은 답잖게 헛웃음을 흘렸다. 떼를 쓰는 방법도 있을 텐데. 지크프리트 위버는 항상 대부분의 화제에 대해서 한 발 빼는 시늉을 하곤 했다. 제게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은. 저가 그렇게 어려울까. 의문의 답은 금방 찾아냈다. 어려울 게 당연하다. 저가 지금까지 눈 앞의 후배를 대해온 방식에 대해 생각하자면 그렇다. 요새 들어 많이 나아지고 있다 해도, 여전히 쌀쌀맞기만 한 선배겠지. 이런 사람을 뭐하러 붙잡고, 어째서 생일 같은 걸 축하해주고 싶어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눈 앞의 아이가 그만큼 상냥하기 때문일까. 모두에게 그런 무분별한 다정함을 베푸는 걸까. 아니면…….

  "…생일은 이미 지났어."

  그 말에 지크프리트는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도,

  "어차피 생일은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그리 말하고는 웃는 거다. 이런 감정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믿고 따랐던 어머니는 절대로 따뜻한 사람은 되지 못했고, 가까이 지낸 친구들─이제는 대부분이 저를 저버린 슬리데린의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핀도르가 불필요할 정도로 활기차고 정이 깊어보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글쎄.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인 것 같았다. 다수가 아닌 한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의 깊이가 이리도 깊고 밝을 수 있었던가. 사람은 누구나 낯선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곤 한다. 동시에 호기심을 갖기도 하고. 지금의 저는 어느 쪽을 더 깊게 갖고 있을지. 애초에 닿고 싶어 하는 건지. 그 날 이후로 몇 달이나 지났건만, 아직 라그렛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알지 못한 채로 안온한 온기에 기댈 것이라 생각한다.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제와서 주위를 둘러보면 겨울을 닮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 봄, 내지 여름의 향취를 가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태어난 날을 떠나서 말이다. 그리핀도르의 아이들은 다 그랬다. 저 혼자서만 겨울에 사는 것 같았다. 따뜻한 계절로 끌어올려지면 어떤 기분일까. 무엇을 보게 될까. 애초에 자신이 있어도 되는 곳인가. 상념이 길어졌다.

  "4월 24일."
  "…!"

  지금 활짝 웃는 너는 확실히 여름이다. 너무나도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잠시 겨울에 있다가 이제는 완연히 여름으로 빠져나온 네게 겨울이 옮아가지는 않을까, 네게. 저가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걱정할─ 걱정하는건가. 아무튼, 그럴 일인가 싶어서 라그렛은 생각을 잘라냈다.

  "기뻐요. 기억해둘게요."
  "네 생일도 말 해."
  "에."
  "내 생일만 쏙 듣고 말 생각인가."

  지크프리트는 제 볼을 긁적였다. 마치 대단한 건 아니라는 듯이. 내 생일은 대단한 것처럼 취급했으면서? 라그렛은 고개를 기울였다. 알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녀석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이라는 게 다 그렇겠지만은.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독하게도 자존감이 낮은 아이라는 것. 기실 그건 지크프리트 위버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자존감이라면 저도 충분히 난도질되어 있었다. 조각조각 직접 잘라내었다.

  "그러고보니 얼마 안 남았네요."
  "방학 중인가봐."
  "네… 6월 20일이에요."

  6월 20일. 속으로 한 번 곱씹었다. 호들갑스러운 파티는 못 하겠군. 집에서 할 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어쩐지 그러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그렛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의 정적이 되돌아왔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있던 라그렛은 문득 지크프리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라그렛의 앞에 섰다. 새삼 정말 작은 아이다. 저가 2학년일 때엔 이렇게 작지 않았던 것 같은데. 라그렛은 무심한 눈을 한 채로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잡아 당겨 제 품에 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크기는 나쁘지 않다. 작년부터 생각한 거였다. 지크프리트는 어버버거리며 그의 품 안에서 낑낑거렸다.

  "네가 내 생일을 축하해주겠다면 나도 네 생일에 편지라도 보낼거니까, 받으면 답장해."
  "네? 네… 네!"

  업어주기야 종종 업어주었지만 안아보는 건 꽤나 오랜만의 일이다. 울고 있는 걸 차마 무시하고 갈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안아주었던 게 벌써 제작년과 작년의 일이라니.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며 라그렛은 눈을 감았다. 그대로 소파에 풀썩 누워버렸다. 사람의 체온이란 참으로 포근한 것이어서, 이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곤 했다. 라그렛은 그런 감각을 제법 좋아했다. 사실 인정하고 있기도 했다. 위로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시간 후에, 지금은 제법 평화로워지긴 했지만 되려 그 평화로움이 우울함을 불러오곤 했다. 안온함에 기대는 것. 아주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부디 그렇기를. 이런 생각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크프리트는 천천히 라그렛의 등을 토닥였다. 라그렛은 딱히 말도 하지 않았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었다.

  "나는 파티 같은 귀찮은 거 싫으니까, 내 생일 소문 내고 다니지도 말고."

  그 말에는 대답이 없다. 라그렛이 째려보자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라그렛은 불편한 숨을 작게 내쉬었다.


* * *


  "생일엔 휴가 좀 달라 그래."
  "어떻게 그래요. 일인데."

  게다가 무려 선배를 먹여 살리는 일이라구요. 장난스레 키들거리며 지크프리트는 제 연인을 끌어안았다. 라그렛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 누굴 먹여 살려? 이어진 말에 지크프리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몬트로즈 맥파이즈 선수의 연봉은 어느 정도일까. 딱히 물은 적은 없어서 모르는데, 상상 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진 정도라는 것 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내 지크프리트는 생일인데 좀 띄워주지 그래요, 하며 볼멘 소리를 냈다. 그것마저도 라그렛은 웃어 넘겨버렸지만은. 짓궂어, 정말. 지크프리트는 투덜거리며 라그렛의 볼을 간질였다.

  "애초에 생일 다 지나서야 집에 온 게 누군데."
  "그게 그렇게 서운해요?"
  "……그래."

  유치하다고 생각하는지 라그렛은 대답 전 조금 머뭇거렸다. 라그렛은 제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볼을 제법 노골적으로 간질이기 시작하는 연인의 손을 피해버렸다.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건 안다. 그저 정말로 서운할 뿐이다. 어린 시절에는 생일 같은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나이를 먹을 수록 이런 거에 집착하게 됐다. 연인의 생일이라 그런 걸수도 있고. 다물려 있던 입술 틈새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삐져있어봤자 뭐하겠어. 손을 피한 게 퍽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지크프리트를 라그렛은 제법 세게 끌어안았다. 그래도 하루가 다 지나가진 않았으니까. 그걸 위안으로 삼기로 한다.

  "생일 되자마자 선배가 축하해줬잖아요. 그거로 충분해요, 전."
  "같이 있지 않아도?"

  그건 좀……. 라그렛은 머쓱하게 웃는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헤짚어버렸다. 자꾸만 심술부린다며 웅얼거리는 말도 가볍게 무시했다.

  "제일 먼저 축하해주는 건… 약속 한 거니까."
  "응?"
  "아냐, 아무것도."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라그렛은 저가 잔뜩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실제로도 별 거 아닌, 약속 아닌 약속이었다. 딱 저에게만 중요한, 지크프리트 위버는 기억할 지 못 할지도 모르는 약속.


* * *


  새 학년이 시작될 9월. 호그와트 행 급행 열차 앞에서 기어코 지크프리트를 찾아낸 라그렛은 제법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정확히는 서운해하는 표정에 가까웠으나, 지크프리트가 느끼기엔 험악함에 가까웠다. 지크프리트는 놀란 눈을 하고 라그렛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저를 찾아온 것도 놀랐지만, 이런 표정을 하니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배……? 겨우겨우 입술을 떼 그를 부르자 라그렛이 제 이마를 짚었다.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거에 대한 자책이 조금 섞여있었다. 대체 나는 왜 서운해하는거지? 기를 쓰고 찾아내놓고 의문에 빠져버린다. 일단 이렇게 찾아내버렸으니 용건은 말해야했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한심하기만 한 용건이라고 해도. 말을 주워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한 행동도 취소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답장 왜 안 했어."
  "답장이요…?"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 되돌아왔다. 어쩐지 두달여 전 억울해하던 표정과 겹쳐져, 라그렛은 힘이 탁 풀리고 말았다. 동시에 괜히 짜증도 났다. 이번에는 편지를 보내겠다 말까지 해놓았으니 발뺌할 수도 없을 터다. 그런데도 지크프리트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뭔가 잘못 안 건가? 그렇지만 답장을 받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나름대로 정성껏 생일 축하한다는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부엉이가 물고 가 하늘 너머로 사라지는 것까지 보았는데. 멀뚱거리는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중간에 편지가 유실되기라도…….

  아.

  "…생일 축하한다고, 편지 보낸다고 했잖아."

  힘이 빠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 했을까. 라그렛은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여전히 당황한 표정의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응, 기억하고 있어요.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분명 보냈는데…."
  "하루 종일 선배 편지만 기다렸는데, 다른 애들 편지는 와도 선배 편지는 안 오더라구요. 그래서 으음… 까먹으셨나 했어요."

  별로 기억할 만한 것도 아니니까. 가볍게 덧붙이는 것 치고는 당시에 제법 속이 상했었다는 게 눈에 보였다. 할 말이 사라지고 만다. 순혈 가문에서 키우는 부엉이가 머글 세계에 편지를 전해줄 리가 없지 않나. 당장 저가 알기에도 그렇게 교육을 시켜놓았다고 들었다. 답잖게 들떠선 그걸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애초에 왜 그렇게 들떠 있었는지. 최근 들어 이해 못 할 행동만 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라그렛은 물끄럼 지크프리트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선지 지크프리트는 웃고 있었다. 억울하게 혼이 날 뻔 했는데 이 녀석은 웃음이 나오는 건가. 그리 물을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이번에는 명백하게 제 잘못이었으므로. 보낸 것은 맞지만 받지는 못했고, 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야하는 데도 까먹고 있었고, 그걸 가지고 멋대로 화를 내려 했다. 제멋대로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부엉이가 실수라도 했나봐요. 슬프다… 그래도 괜찮아요."
  "…왜?"
  "어쨌든 써서 보내주긴 한 거잖아요. 그거로 충분히 기뻐요."

  지크프리트 위버는 자꾸만 라그렛 블랙로즈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답을 못할 때가 많은지, 라그렛은 도무지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도 알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지크프리트는 헤 웃으며 라그렛을 껴안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기뻐할 수가 있나? 어째서? ….

  "내년에는 답장을 두 배로 써야겠어요."
  "…두 배?"
  "선배는 써줬는데, 저는 받질 못해서 답장을 못 썼잖아요. 그러니 올 해 분량까지 합해서 두 배죠."
  "그런 수고로운 짓 하지 마."

  지크프리트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전혀 수고로운 짓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왜… 이 정도로 잘 해주는 거지.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일에 대해 라그렛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나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마냥 입술만 달싹였다. 마주 안아주지도 못했다. 그냥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서, 겨우겨우 대답만을 입에 담아낼 뿐이었다.

  "답장을 두 배로 써야하니까, 내년에도 꼭 보내주세요."
  "…그래."

  내 불찰이니까.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라그렛은 생각 난 말을 정리도 하지 않고 천천히 목소리에 담아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대책 없이 말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계속 보낼거야. 네 생일을 처음 축하해주는 건 내가 할거니까."
  "그, 그렇게까진 안 해주셔도 돼요!"
  "됐으니까 말 들어. 매년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참으로 어이 없는 억지였다. 하지만 이런 억지도 너는 기꺼이 받아 줄 것이라고. 그런 묘한 확신이 있었다.


* * *


  이후에는 얼굴이 새빨개져선 어쩔 줄도 몰라 했던가. 잠시 어린 지크프리트 위버를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져, 라그렛은 웃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땐 별 것 아닌거로도 뻘뻘거리고 쑥스러워하곤 했는데. 요새의 지크프리트는 너무나도 뻔뻔해졌다. 그런 점도 좋긴 하지만. 그 약속은 실제로도 계속 지켜왔다. 생일 전날에는 항상 꼬박꼬박 집에 불러왔고, 오지 못하는 해에는 편지를 보냈다. 매년 네 생일에 제일 먼저 축하의 말을 전하는 건 나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법 기쁜 일이다. 앞으로도 그럴테고. 라그렛은 슬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가렸다. 그런 약속은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너와는 그런 약속들을 많이 해놓았다. 게다가 약속이라 하기엔 뭣할 정도로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행동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랜 시간 너를 좋아해왔나보다, 나는. 손 끝이 간질거렸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자 사랑하는 선홍빛과 눈이 마주쳤다. 우울감에 빠져 있었던 시절의 네게서도 나는 여름의 향기를 맡았다. 왜냐하면, 나의 여름은 너였으니까. 기나긴 겨울을 끝내고 사랑하는 계절로 접어들게 해준 것은 항상 너였다. 그런 너를 내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나의 여름. 그에 어울리게 여름의 시작에 태어난 아이. 네 존재로 인해 나의 여름도 시작되었다고, 그런 낯 간지러운 말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지만. 항상 네 생일이 되면 여름의 시작을 자각하곤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었다. 네가 생각나서. 더위에 시달리는 건 질색이었지만, 덥다는 핑계로 서늘한 네 체온에 기댈 수 있었던 건 제법 좋아했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왼손을 맞잡았다가, 제 입가로 끌어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은 그대로 미끄러져 약지에 닿고.

  "어?"
  "바보 같은 소리 내긴. 선물이야."

  입술이 닿았던 약지에 반지 하나가 끼워졌다. 심플하면서도 제법 비싸보이는, 얇은 실버링. 라그렛은 순순히 지크프리트의 손을 놓아주었다. 지크프리트는 눈을 깜빡이며 반지 위에 새겨진 이름을 만지작거렸다. 예민한 손 끝에서부터 연인의 이름이 느껴졌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표정이 제법 마음에 들어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는 입을 맞췄다. 평소보다 농도가 더 진한 키스였다. 입술이 떼어지자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을 다급하게 끌어 안았다. 생일 선물은 서프라이즈로 주는 게 좋다고, 누구씨가 먼저 한 말인데. 그건 기억하려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라그렛은 느리게 미소지었다.

  "…어쩌지."
  "응?"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그럼 그냥 좋아하면 돼, 하고 가볍게 말하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였다. 상상 이상으로 더 좋아해줘서 저마저도 기뻐졌다. 정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듯 지크프리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연인을 마냥 귀엽게 바라보던 라그렛은 천천히 입을 열어 제 말을 이어나갔다. 생일 선물이라기보다는 예전부터 주고 싶었다는 둥, 같이 가서 맞추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둥, 손을 자주 잡아서 그런가 네 손 크기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둥……. 한참이나 재잘거리다가 라그렛은 문득 말을 끊었다. 얼마 지나, 사랑하는 선홍빛을 가만 마주하며 말을 붙였다.

  "행복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환하게 웃는 연인의 얼굴이 보였다. 사실상 대답은 필요치도 않았다. 정해져 있었으니까. 나는, 그거면 됐어. 더 필요한 게 있을리가. 라그렛은 눈을 내리감으며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지크라그] 무제

* 해리포터 세계관 버전으로 진행했습니다.

* 염장질...주의...지크 사랑해





[지크라그] In the cage

* 초보 키퍼입니다. 몇몇 부분은 살짝 각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 스포 주의!




[지크라그] 가장 특별한

 


* 둘다 틀어주시면 감사합니다. 하나는 레이니 무드예요.


-



1.


  매년 이맘 때 즈음이 되면 항상 받곤 하는 편지들이 있다. 눈에 익은 부엉이가 물어다 준 편지를 라그렛은 느릿한 손놀림으로 받았다. 제 할 일을 마친 부엉이가 몇 번 푸드덕거리며 날개짓을 하더니 먼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모습에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꽤 길었다. 이내 라그렛은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편지의 내용은 뻔했기에 구태여 그걸 확인하기 위해 편지를 펼치는 것조차 수고롭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매년 똑같은 내용으로 쓰이는 답장을 보내는 행동은 더더욱 수고로웠다. 올해의 답장에는 내년부터 이런 편지 보내지 말라는 문구를 덧붙여 놓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라그렛은 침구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런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들은 대개 매년 고집스레 똑같은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니, 그런 내용으로 답장을 보낸다고 해봤자 딱히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지만 말이다. 짧은 손짓으로 양피지와 깃펜을 가져왔다. 양피지 위에 글씨가 수놓아지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필요 없다, 와 이런 편지도 필요 없다. 짧은 두 문장이 연이여 쓰였다.
  라그렛은 반듯하게 접어 봉투 안에 넣은 편지를 들고 창문 근처의 새장으로 다가갔다. 이른 시간인지라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까만 부엉이가 눈에 들어왔다. 새장 문을 열고 손등으로 날개를 간질이자 부엉이의 눈이 뜨였다. 라그렛은 밖으로 머리를 들이민 부엉이의 부리에 편지봉투를 물려주었다. 잠이 많고 게으른 부엉이지만 제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잘 아는 똑똑한 놈이다. 잽싸게 편지봉투를 입에 문 부엉이는 열어둔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부엉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시선을 돌려, 침대 위에 올려둔 편지를 눈에 담았다. 간단한 안부와 필요한 것을 묻는 형식적인 편지였다. 오늘 하루 종일, 그리고 내일까지 비슷한 내용의 것이 잔뜩 도착할 터다. 올해도 편지들과 답장에 시달릴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권태로움에 시달리고 만다. 라그렛은 바닥으로 편지를 대충 치워두고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제게로 또 하나의 편지가 오고 있다는 것도, 그 편지는 더더욱 귀찮은 내용인 것도 모르는 채로 라그렛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래서 셀레브리티는 피곤하다니까, 하며.


2.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나라에도 어쨌든 봄은 오기 마련이다. 봄이 깊어가고 여름을 준비하기 시작할 영국의 4월, 그 끝무렵. 다른 계절보다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빈도가 잦은 건 사실이었으나, 영국인 게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듯 런던에는 심심치않게 비가 내렸다. 3월의 바람과 4월의 비가 5월의 꽃을 피게 한다지. 그렇다면 4월에 피는 꽃은 비를 받아내며 피어나는 꽃일까.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라그렛은 유려한 손짓으로 지팡이를 품 속에 넣으며 마법부 중앙홀로 들어섰다. 많이들 퇴근한 후의 시간이라 이따금 오가는 사람을 빼면 넓은 홀의 구석 벽에 혼자 기대어 서 있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저를 흘끔거리는 시선이 완전히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고, 애초에 없으면 허전하다 느낄 정도로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그런 시선을 익숙하게 여겼다. 호와 불호에 대해 따지자면 전자에 가까웠지만.
  어찌되었든 빨리 와준다면 좋을텐데. 오러 사무국은 야근을 너무 많이 시킨다며 라그렛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앙다문 입술 틈새로 새어나온 한숨 뒤로 어렴풋 빗소리가 들려왔다. 제 몸에도 비냄새가 스민 것 같았다. 지크프리트가 올 때 즈음에는 비가 그쳤으면 한다. 라그렛은 적당히 비가 오는 지금 같은 날을 좋아했으나, 적어도 그가 알기에 지크프리트 위버는 맑은 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랬다. 누군가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던가. 그 말대로 저가 태어난 4월을 잔인한 달이라 여겼던 때가 분명히 존재했다. 이제는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어디까지나 과거에 불과한 생각이었다. 지금의 감상으로 누군가가 4월에 대해 묻는다면, 두 사람을 위해 그려놓은 듯한 달이라 생각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하곤 했다. 달의 반절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반절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계절. 이제는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으리라.

  "선배?"

  그닥 길진 않았던 기다림의 끝. 뜻밖에도 목소리는 뚫어져라 보고있던 승강기가 아니라 옆쪽의, 저가 들어왔던 마법부 입구에서 들려왔다. 라그렛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돌렸다. 홀딱 젖은 채로 저를 보고있는 지크프리트가 눈에 들어왔다. 올 때 즈음에는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무색하게도, 아직까지 많이 오는 모양이었다.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라그렛은 픽 웃어버렸다. 오랫동안 벽에 붙어있던 등을 떼내고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조용한 홀 안에 구두굽 소리만 울려퍼지던 1초, 2초, 3초. 이윽고 발을 뗀 지크프리트는 곧장 달려가 라그렛을 와락 껴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 흠뻑 젖어있다는 걸 깨닫고 곧장 놓아버렸지만 말이다. 라그렛은 잠시 웃어버리고는 자신 쪽에서 지크프리트를 안아버렸다. 습한 비냄새 너머로 본래부터 존재감이 옅었던 체향을 잡아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에게 닿지 않도록 팔을 멀리 움직여 물기를 탈탈 털어낸 후에야 그를 마주 안았다.

  "비 많이 맞았네. 외근 다녀오는 길?"
  "응… 혼자 뒷정리를 맡았더니 생각보다 늦어졌어요."

  지크프리트는 어색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라그렛은 작게 혀를 차고는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헤짚어놓다간 물기를 털어주었다. 말려줄 목적이라면 지팡이를 꺼내는 게 나았겠지만.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감겨오는 머리칼의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 좋았으면 좋았지. 어느새 꼬옥 감은 눈두덩 위를 엄지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다가 그대로 손을 올려 지크프리트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여전히 감고 있는 눈 위에 부드럽게 입술을 부비고, 드러난 이마에도 입을 맞추고. 애교스럽게 볼을 부비고 나서야 지크프리트는 반 정도 눈을 떠보였다.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거리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원래 그런 건 후배들한테 시키는거야. 몇년 차인데 아직도 요령이 없네." 작게 소근거리자 칭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지크프리트는 선배가 오늘 늦는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투덜거렸다. 여전히 웃는 표정을 하고 있는 라그렛은 삐죽 튀어나온 입술 위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떨어져나갔다. 그러자 결국 지크프리트의 표정은 다시금 풀어져버린다. 결국 이럴거면서. 키득거리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허리를 당겨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 늦을거라고 어제 저녁부터 잔뜩 칭얼거렸던 사람이 어쩐 일이에요?"
  "도망쳤지. 술자리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선배가 빠지면 안 되는 자리였던거 아닌가."

  라그렛은 흠, 소리를 내고는 괜시리 시선을 한 번 피해버렸다. 지크프리트는 그런 라그렛의 볼을 스치듯 매만졌다. 금세 라그렛은 그 손 위로 제 손을 올려 꽉 맞잡았다.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길 밑으로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지 지크프리트의 입술이 열렸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어 라그렛은 그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짧게 겹쳤다가 뗐다.

  "퇴근은?"
  "금방 정리하고 올게요."

  잠시의 시간도 아쉬웠다. 맞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고는 라그렛은 미련이 잔뜩 남은 눈으로 가만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웃음 소리를 흘리며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어깨를 잡더니 볼 위에 쪽, 소리를 내며 입맞췄다. 잠깐만 더 기다려달라는 속삭임은 덤이었다. 그런 주제에 떨어져나가는 손길은 마찬가지로 미련을 뚝뚝 흘리고 있지 않나. 어린 연인이 어른스럽게 굴려는 것에 대해 무어라 할 이유는 없었고, 그건 그것대로 귀엽게 느껴지기만 해서. 지크프리트가 저를 스쳐지나갈 때까지도 딱히 지적은 않았다. 언제까지 귀여울 생각이냐는 둥의 실없는 생각만 흘릴 뿐이었다. 괜히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오는 건 참을 수가 없어서 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시야 안에서 지크프리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즈음에야 라그렛은 다시금 벽에 기댔다. 바로 지금처럼 기다림마저 즐거워질 때가 종종 있었다.


3.


  "그런데 정말로 혼자 쏙 빠져나와도 괜찮았던 거예요? …아, 또 말 안 듣는다. 안으로 좀 들어와봐요."

  나랑 붙어있기 싫어요? 시무룩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말에 라그렛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성인 남성 둘에 우산은 하나. 하나를 가져왔다는 건 속셈이 있다는 게 뻔히 보이는 일인데 저리 말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붙어있고 싶어서 딸랑 하나만 가져온 거잖아.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눌러 참고는 라그렛은 한참이나 키득거렸다.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붙어있고 싶다는 흑심과 별개로, 연인이 비에 젖는 걸 원하진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몇 번 더 웃음 소리를 흘리고는 부러 더 몸을 붙이더니 팔짱까지 꼈다. 이제 됐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까처럼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빠르게 누그러졌다. "이렇게 귀여워서 어쩐담." 여전히 웃음기 섞인 말에 지크프리트는 못 들은 채를 했다. 그마저도 귀엽게 보인다는 말을 라그렛은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대신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걱정이 많네. 다들 집에 일찍 갈 수 있어서 오히려 좋을걸. 아니면 자기들끼리 놀고 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선배 생일 파티인데."
  "답장으로 필요 없다고까지 말해뒀다니까. 생일 파티 해줄거라고 전날에 통보하는 사람이 어딨어? 애인 있는 것도 알면서. 늦게까지 붙잡아두려는 못된 심보들이잖아, 아주."

  결국 지크프리트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럼, 당연하지. 퉁명스럽게 이어지는 말에 지크프리트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제 팔짱을 낀 라그렛을 제 쪽으로 더 당겼다. 저항없이 자연스레 당겨져오는 게 퍽 사랑스럽다. 샛노란 눈동자가 지크프리트를 향했다.

  "응, 그런 거면 안 되죠."
  "왜?"
  "선배는 저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요."

  무심코 이유를 물었던 라그렛은 눈을 깜빡였다. 지크프리트는 자기가 뭐 잘못 말했냐는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교차하는 시간이 꽤 길게 늘어지고. 느리게 옮기던 발걸음도 우뚝 멈추어섰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손에 쥐어져있던 우산을 제 손으로 가져왔다. 다른 손으로는 그대로 그를 벽 쪽으로 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뒷걸음질하던 지크프리트의 등이 벽에 닿았다. 갸웃하며 저를 빤히 쳐다보는 행동에 라그렛은 그 어깨를 꾹 잡았다. 까만 우산 아래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친 건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라그렛의 손으로 옮겨졌던 우산이 천천히 기울어지다가, 이내 스르르 땅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비게 된 손으로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껴안았다. 입맞춤이 더 깊어졌다. 몸 위로 토도독 빗방울이 떨어지고, 체온이 식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술이 겹쳐지고 혀가 얽히며 두 사람의 온기로 자꾸만 달아올랐다. 갈 곳을 잃었던 손이, 팔이 제 허리에 감기자 라그렛은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고개를 틀어 몇 번이고 연인의 혀와 입 안을 탐했다. 숨이 부족해질 때까지 조금도 밀어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술이 떼어지고, 더운 숨이 오갔다.

  "집 앞인데 그새를 못참았어요?"
  "…네가 너무 사랑스러운 말을 하니까."

  빗줄기 아래에서 톡 이마를 맞대며 라그렛은 작게 웅얼거렸다. 저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요, 라. 몇 번이나 속으로 곱씹었다. 그런 말을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욕심이 생기면 죽이려고만 하는 아이였다. 적어도, 제 기억 속에선. 그래서 그 말이 이렇게 기쁠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한 욕심이라도 부려줬으면 했다. 지크프리트는 머쓱한 듯 제 뒷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빗물에 젖어가는 라그렛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연인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데, 그렇게 묶였다는 이유로 이런 말을 하게 돼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그치만, 저는 선배가 조금이라도 더 즐겁고 행복해하는 쪽이 좋아요. 꼭 제 곁이 아니라도요."

  라그렛은 한 번 크게 숨을 토해냈다. 연인이 되었으니 이제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라고. 말을 삼켰다. 대신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바보야."

  아닌데요…. 가늘게 이어진 대꾸에 웃음을 참으며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더 세게 안았다. 안 놓아줄 듯이 안아버렸다. 도저히 저가 느끼는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겠어서. 한때 똑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그랬다. 그래서 다른 이유 때문도 있었지만 이 이유 때문으로도 지크프리트 위버와의 관계에 있어서 저가 잘 한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곤 했다. 이제는 더이상 하지 않는 고민이다. 설령 잘 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저가 꼭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다짐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네 곁이 아닌 곳에서 행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그러하니 너도 그럴 것이라 믿기로 했다. 제 행복 안에 지크프리트 위버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응."

  그렇네요. 뒷말은 속으로만 하고 지크프리트 또한 제게 기대오는 라그렛을 꽉 껴안았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지금보다 더 사랑스러워지면 어쩌지. 그럼 나는 받아버려서 가지게 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감정이 두근거리는 묘한 감각 속에서 라그렛은 눈을 감았다. 뒷머리를 쓸어주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잠시 제 몸을 맡겼다. 이어진 정적.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진 않았으나 어쩐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느낌 후에야 지크프리트는 입을 열었다. 오래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선배. 응. 이제 들어가요. 응. 짤막한 대꾸만 입에 담으며 라그렛은 자꾸만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눈 앞의 어린 연인에게라도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4.


  3월의 바람과 4월의 비가 5월의 꽃을 피게 한다. 그렇다면 4월에 피어나는 꽃은 제 몸으로 비를 받아내며 피어나는 꽃이 맞다. 꽃의 계절이라는 5월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을 뿐이었다. 5월의 꽃보다 강인하고, 그렇기에 이따금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게 4월의 꽃이었다. 제 생각으로 낸 결론이었다. 라그렛은 머리에 남아있는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잡생각을 이어나갔다. 지크프리트는 그런 라그렛을 물끄럼 바라보다가 침대 위에 놓여진 빈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라그렛은 그를 한 번 흘끔 보고는 손을 꼬옥 맞잡아주었다. 제 머리에 대충 올려두었던 수건도 치워버렸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탓인지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곧 12시, 날이 바뀔 때를 앞둔 시각. 길게 한숨을 내쉬곤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여전히 손은 맞잡은 채였다.

  "곧 선배 생일인데 해줄 수 있는게 없네요."
  "뭔가를 해줘야만 하는 것도 아닌걸."
  "그치만 생일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난 날인걸. 그냥 지나가면 속상해요."

  제 볼에 입술을 부벼오는 느낌에 라그렛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손을 들어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강아지 마냥 머리를 부벼오자 다시금 웃음이 새어나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를 좋아한다. 지크프리트 위버가 라그렛 블랙로즈를 좋아하게 된 것도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라그렛에게는 가장 특별했다. 그 또한 지크프리트를 아주 많이 좋아했기에. 지크가 라그를 좋아한다니, 라그에게 있어서는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다. 한때 좋아하고 싶지 않아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너무나도 좋아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할 정도로 좋아했고, 또 사랑했다. 그 사실이 지금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할 뿐이었다. 머릿속과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많은 말들을 생략하며 라그렛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해야 할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관계였다.

  "애초에 해줄 수 있는 게 왜 없어. 막상 생일이 되면 많이 해줄거면서."
  "으응… 아, 12시다."

  지크프리트의 시선이 짧게 시계에 머물렀다가 다시 제 연인에게로 돌아왔다. 이어질 말을 벌써 몇 번이나 들어왔는지. 그닥 가깝지 않았던 시절에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은 이상하리만치 꼬박꼬박 챙겼던 소년이 있다. 그런 소년을 끝내 사랑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일 축하해요, 선배. 오늘은 더 사랑해요."
  "그럼 나도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도록 할까."

  그게 뭐냐며 웃는 입술에 가볍게 입맞춰주었다. 입술에 닿는 온기마저 사랑스러워서.

  "네가 있어서 사랑이 있고, 또 네가 있어서 행복이 있는 거야. 그냥… 그거로 충분한 거니까."
  "…좋은 말이에요. 어디서 알아온 말이에요?"
  "내가 지은 말이면 어쩌려고. 알아보면 알 수 있을걸. 진짜 그런 걸 어쩐담."

  4월에 피어나는 꽃은 비를 맞고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 강인하고 아름답다고. 그렇다면 4월의 제라늄은 그만큼 더 강인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는 의미가 아닐지. 라그렛은 어쩐지 오늘 하루만은 장미가 아니라 제라늄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렇지만 사실, 네가 나를 보며 떠올리는 꽃이 장미라면 그저 장미여도 좋았다.

<꿈의 행방> ~장미파 : 오늘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가 외로워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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