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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레이] to. 체온님

내려다보는 시선이 썩 달갑지는 않다. 2cm는 그리 큰 차이가 아니었기에, 느낌도 생소했다. 어쩐지 관찰대상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레이븐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책상에 턱을 괸 채로 멀뚱히 클라우드를 보고 있었다. 몇 센티 정도일까. 1/10 정도 크기로 줄어든 것 같은데. 20cm도 안 되는건가. 클라우드는 머릿속으로 분명히 놀리고 있을 거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실상 레이븐에게는 그런 실없는 생각들 뿐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우드는 여전히 영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레이븐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노트북이나 좀 가져다 줘."
"내가 왜?"

심드렁한 대꾸에 클라우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루나에게 들키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루나는 대놓고 놀려대려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클라우드는 혀를 찼다. 어쩐지 상상이 되어서,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지금 눈 앞의 레이븐처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도 안 잡히는 것보다야…….

"야!"

갑자기 옷깃이 잡아 당겨져 들어올려졌다. 적지 않게 놀란 클라우드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어째 지금은 더 그런 것 같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옮기는 양 클라우드의 옷깃만 살짝 잡은 채로 레이븐은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클라우드에게만 채감 발걸음을 옮긴 것이지, 레이븐 본인은 몸을 돌려 몇발자국 움직인 게 다였다. 몸이 작아지니 온갖 감각들이 다 왜곡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쾌하다.

"그런데 그 몸으로 어쩌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 레이븐에 클라우드는 물끄러미 닫혀 있는 노트북을 쳐다봤다. …마법을 쓰면 열 수는 있지 않을까. 시도는 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한참을 레이븐은 클라우드가 끙끙거리며 마법으로 노트북을 여는 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일분여가 지나고 나서야 노트북을 열기만 하는 데 성공한 클라우드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어딘가 자존심이 상한다. 직접 깎아먹기까지 하는 자존심이지만, 없진 않다. 클라우드는 훽 고개를 돌려 레이븐을 쏘아보았다.

"조금 도와주면 덧나?"
"도와주려고 말 시킨건데 네가 대답이 없었잖아."

…우문현답인지, 현문우답인지. 그제야 레이븐은 손을 뻗어 덜 열린 노트북을 제대로 열어주었다. 도통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뾰루퉁하게 레이븐을 흘겨보던 클라우드는 이내 고개를 돌려 꺼져 있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손을 뻗어도 전원 버튼에 닿을 리가 없다.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클라우드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걸어가 노트북 위로 올라섰다. 그대로 또 걸어가 버튼 앞까지 가서야…… 그래. 이 작은 손으로 버튼을 눌러봤자 라는 걸 왜 이제서야 깨달았을까.

"……."
"……."

잠시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레이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뻗어 버튼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부팅음에 화들짝 놀란 클라우드는 저도 모르게 두어번 주춤했다. 또 그걸 본 모양인지 레이븐은 피식 웃었다. 클라우드는, 적당히 여기서 혀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노트북으로 뭐 하려고."
"당연하잖아. 일."

퉁명스러운 대꾸에 레이븐은 그대로 팔짱을 꼈다.

"워커홀릭."

글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클라우드의 대꾸가 없자 레이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쉬지그래."
"그럴 시간도 없어."
"정말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리가. 일종의 오기였다. 영 무심하게 시선을 내리고만 있던 레이븐은 이내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손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눈을 감아버린 클라우드는 다시 몸이 들리는 느낌에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건지. 클라우드를 대충 노트북 옆으로 치워버린 레이븐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 와 앉았다.

"그렇게 바쁘면 내가 하면 되잖아."

그리고 한 쪽 손으로 턱을 괸 채로 마우스에 손을 얹었다. 레이븐의 그 말에 클라우드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심인 듯 레이븐은 눈동자를 데룩 굴려 그런 클라우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뭘 하면 되냐고 묻고 있는 눈이다. 클라우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너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은데."

굳이 꺼려지는 점 하나를 꼽자면 이런 식의 돌직구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왔지만 도저히 곱게 봐 줄 수만은 없었다. 뭐라 쏘아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클라우드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불필요한 언쟁을 해봤자 힘이 빠지는 건 저 쪽이라는 사실을, 클라우드는 잘 알고 있었다. 영 못 믿음직하긴 하지만, 관둘 생각도 없어 보이고. 한 번쯤 맡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클라우드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몇시간 후, 레이븐은 잡고 있던 마우스를 놓아버렸다. 아무리 작아졌다고 해도 시선이 정말로, 아주, 매우 심하게 부담스러웠다. 시선을 내리면 마치 안 보고 있었다는 듯 훽 고개를 돌려버리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면 어김없이 시선이 쏟아져온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맡긴 일이 영 불안한 건 알겠는데, 이런 식의 감시당하는 느낌은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레이븐이 마우스를 놓아버리자 클라우드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다시 그에게 고정시켰다.

"…솔직히 별 거 아니잖아?"

레이븐이 말대로, 클라우드가 그에게 맡긴 건 그냥 간단한 자료 찾기일 뿐이었다. 굳이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아도 그정도는 할 줄 안다. 마치 그정도도 할 줄 모를테니 지켜보고 있는 편이 낫겠지, 하는 느낌이었다. 클라우드도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 드는 것이, 자꾸 그에게로 눈이 갔다. 기분 나빠 할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눈은 안 마주치려고 했는데, 당연히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냥 가서 쉬어. 쳐다보고 있지 말고."
"…그러고 싶긴 한데."

작게 한숨을 푹 내쉬는 클라우드에 레이븐은 고개를 갸웃, 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 한숨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몸으로 책상 위에서 어떻게 내려가겠는가. 마법을 쓰면 될 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마법조차 마음대로 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이븐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또다시 아까처럼 클라우드의 옷깃을 잡고 들어 올렸다.

"이렇게 안 잡으면 안 돼?"
"그럼 어떻게 잡아."
"……그것도 그렇네."

어쩌다 이렇게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렸는지. 클라우드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방 한구석에 자리잡은 침대에 클라우드를 내려놓은 레이븐은 제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쳐다보지 말고, 좀 자."

클라우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레이븐은 아마 그러진 못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쓸데없이 걱정만 많은 녀석이었다. 일이 많은 때와 적은 때가 어느정도 정해져 있는 레이븐으로서는 그의 일을 조금 덜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언제나 정색을 하고 가라며 성을 내던 클라우드에 알 수 없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었다. 이번에도 영 께름칙해 하면서 별 것 아닌 일을 맡긴 거고. 매번 일에 치이는 클라우드인지라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레이븐은 가끔 불만스럽기도 했다.
몸을 돌려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온 레이븐은 의자에 앉기 전에 허리만 살짝 숙여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별 뜻 없는 창을 괜히 여러개 띄워 놓고, 고개를 돌려 옆의 책장을 바라보았다. 책은 둘째치고 사이사이가 서류뭉치로 정신이 없었다. 레이븐은 그쪽으로 손을 뻗어 서류 몇 장을 꺼냈다. 내용은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지만, 결제 서류로 보였다. 그럼 간단히 서명만 하고 넘기면 될 것이다. 워낙 정신이 없는 녀석이니 저가 결제한 줄 알지 않을까. 대충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펜을 들고 레이븐은 가볍게 결제란에 서명을 했다. 저의 것이 아니라 눈대중으로 여러번 봐왔던 클라우드의 것으로. 나름대로 그럴듯하다. 등 뒤에선 당연히 시선이 느껴졌지만, 띄워놓은 창 때문인지 아무래도 맡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하는 듯 클라우드는 별 말이 없었다. 알고 있다면 당장 소리질러 바득바득 화를 냈을 텐데.

그래도 어느 정도 읽기는 해둬야 할 것 같아서 눈으로 훑으며 서명을 하고 있는 지라, 실상 결제 완료 서명이 되어 있는 서류는 아직 적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언젠가부터 느껴지지 않는 시선에 레이븐이 고개를 돌렸다. 앉아서 멀뚱멀뚱 쳐다고 있을 거라 생각한 클라우드는 어느새 누워 있었다. 쉬라고 했더니 아예 잠을 자는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븐은 조심스레 그런 클라우드에게 다가갔다. 하기사, 며칠 밤샘을 하며 방에 틀혀박혀 나오지도 않았던 녀석이다. 그래서 살아 있나 확인을 하러 클라우드의 방에 들렀던 게 아니었던가. 어쩌다보니 그의 일을 해 주고 있긴 했지만.

문득,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불필요해진 호문클루스의 처분은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잠귀는 또 밝은 지라 침대에 살짝 걸터 앉은 것 만으로도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클라우드와 시선이 마주친 레이븐은 한참동안 말없이 자그만해진 클라우드를 바라보았다.

"있지, 클라우드."

그렇게 불러놓고 레이븐은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가끔 이런 식으로 나오는 레이븐은 답답하기도 했고, 어쩐지 답지 않기도 했다. 뜻모를 행동을 하는 건 그의 종특이었지만서도.

"……이대로 더 작아져버려서, 아예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했어."

클라우드는 눈만 두어번 깜빡이며 레이븐과 눈을 맞추었다.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렸는지라, 솔직히 말하자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걱정을 하고 있나. 클라우드는 문득 손을 뻗었다. 어쩐지 쓰다듬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당연히 손은 닿지 않았다. 아쉬워져서 손을 다른 쪽으로 옮겼다. 그나마 레이븐이 침대 위를 짚은 손이 저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레이븐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은 클라우드는 시선을 떨궜다.

"사라지진 않을 거야."
"……응."

예전부터 알게모르게, 레이븐은 클라우드를 믿고 있었다. 매번 기만이니 뭐니 하는 말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말이다. 본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클라우드도.

"미안, 쓸데 없는 소리 해서."
"너도 피곤한가보지."

픽 웃으며 클라우드는 제 손을 거두었다. 작아졌는데도 닿는 온기는 그대로였다. 묘하게 기분 좋아하고 있는 클라우드를 보다가, 레이븐은 갑작스레 저 또한 침대에 몸을 묻어버렸다.

"일은."
"몰라. 잘래."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클라우드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사실 방금 전에도 바로 자려고 했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레이븐의 말대로 자고 일어나면 더 작아져있지 않을까, 아예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눈을 감았을 뿐인데도 슬슬 오는 잠에 클라우드는 얼마 가지 않아 빠져들었다. 레이븐이 옆에 있어서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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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레이]

"클라우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절로 머리가 멍해졌다. 클라우드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손으로 제 눈을 가려버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괜히 꽉 쥐고 있던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잠시 그 통화를 끊어버릴까 고민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클라우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 스피커를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열기에 들뜬 목소리에 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언제 오는데?"

"내일 모레. 시간 될 때마다 연락 할게."


레이븐은 대충 가방에 필요한 짐을 챙겨 넣으며 말하는 클라우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클라우드가 지금까지 박박 우겨온 것은 그 누구보다도 레이븐이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추천하는 캠프라던가, 그런 것들. 본인에게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드가 꺼렸던 이유는 당연히 레이븐 때문이었다. 클라우드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나 없으면 넌 안되니까, 하는 말이었으니. 레이븐은 굳이 그것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라서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사고 치지 말고."

"내가 애냐."


재미 없는 대화가 오갔다. 잠시 레이븐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클라우드와 만나서, 친해진 이후로 하루 이상 떨어져 있어본 적이 있었던가? 함께 했던 기억들 속에선 찾을 수 없었다. 자신도, 클라우드도 부모님이 집을 비우고 계시는 상황이 처음 만나기 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친해진 이후로 마치 가족 마냥 같은 집, 같은 방에서 잠을 청해온 세월이 꽤나 오래 되어 있었다. 레이븐은 시선을 돌려 제 오른손을 내려보았다. 왼손 검지로 오른손 손가락을 천천히 하나, 둘, 세개까지 접었다. 이만큼 클라우드가 없다, 라. 어쩐지 상상이 되지가 않았다.


"……그리고 너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어. 평생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무슨."

"그만큼 같이 있었던건 사실이잖아?"


하지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영 모진 말이어서, 레이븐은 잠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에 익숙해진 클라우드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유순하게 잘 넘어가 줬으나. 가방의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들리자 레이븐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린 클라우드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빤히 레이븐과 시선을 마주치고 있다가, 클라우드가 먼저 눈을 돌려버렸다. 부끄럼도 없다니까. 작은 투덜거림이 레이븐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 내가 걱정하는건 그런게 아니거든."


그 말과 함께 클라우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하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그 위에 턱을 올려놓은 채로 클라우드를 쳐다보고 있던 레이븐의 고개가 그것을 따라 들렸다. 성큼성큼 레이븐에게 다가온 클라우드는 살짝 허리를 숙여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고, 갑작스러운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레이븐은 익숙하다는 듯 그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놀라줘도 괜찮을텐데, 했지만 이것 나름대로도 클라우드는 마음에 들었다.


"섹스 홀릭."


작은 속삭임이 레이븐의 귓가를 간질였다. 묘하게 귓가에 오래 남는 말이어서, 레이븐은 그대로 클라우드를 밀어내버렸다. 하지만 쉽사리 밀려날 클라우드가 아니었고, 입술에 옅은 숨결이 닿아왔다. 깊게 키스해올 것처럼 다가오더니 쪽 소리만 내고 떨어져 나가서, 레이븐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려 버렸다.


"안 한지 좀 됐지?"

"입 좀 다물어주면 안될까."

"3일 더 기다릴 수 있어?"


집요하게 물어오는 클라우드에 결국 레이븐은 대꾸 자체를 관둬버렸다. 시시하긴, 하고 중얼거리고 클라우드는 그제야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고 미소지었다.


너한테만 그렇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할까. 아마도 평생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도 못 기다릴까…"


그 말이 문제의 발단이었다고, 며칠 후 클라우드는 떠올리며 후회했다.


*


저녁에 먼저 연락 할게, 하고 끊은 것이 낮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째선지 레이븐이 먼저 전화를 걸어 왔다. 어쩐 일이지, 싶었다. 배웅하러 나와줄 때도 끝까지 먼저 연락은 안할 것처럼 고고하게 굴더니. 잠시 받지 말까, 하는 짓궂은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저어버렸다. 어차피 숙소에 들어온 지금은 자유 시간이었다. 씻고 나와서 연락 하려고 했는데, 그냥 먼저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클라우드는 살짝 미소를 띄운 채로 통화 연결 버튼을 꾹 눌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핸드폰 너머로 옅은 숨소리만 불규칙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레이븐?"


불러오는 목소리에 레이븐이 크게 숨을 토했다. 그 숨소리를 용캐 알아들은 클라우드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말문이 막혀버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클라우드……."


클라우드는 반사적으로 방의 문을 흘겨보았다. 일과는 다 끝난 후라서 찾아올 사람은 없었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문을 잠궈버렸다. 한참을 입모양으로만 웅얼거리다가, 다시 레이븐의 이름을 한번 작게 불렀다. 숨소리 틈에서 옅은 신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하아, 레이븐. 너 대체……."

"못 기다리겠어."


한참을 머뭇거리던 목소리가 토해내듯 말을 뱉어냈다. 괜히 문고리를 꽉 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궈졌다. 결국 클라우드는 비척비척 침대 쪽으로 걸어가 걸터 앉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놀려대긴 했지만 이런 상황은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뒤통수를 맞은 거나 다름이 없다고나 할까. 핸드폰 넘어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클라우드는 그냥 아에 몸을 뉘여버렸다. 핸드폰을 잡고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섹스 홀릭이라는거 부정 못하겠지?"


무응답은 긍정이 표현이라고 했던가.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게 아닐텐데. 클라우드는 핸드폰을 잡고 있는 팔의 반대쪽 팔로 제 눈을 가려버렸다. 일단 돌아가면 가만 안둘거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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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주의

전화, 안 받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클라우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석을 할 일이 있으면 같이 했고, 깨어 있는 시간에는 거의 계속 함께 있어 온 지가 햇수로 3년 째였다. 갑자기 비어 버린 옆 자리는 상상 이상으로 허전하다. 뭔가 일이 있다면 말을 했을 텐데. 아프기라도 한 걸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클라우드는 책상에 엎드렸다. 빼꼼하니 고개만 돌린 채로 레이븐의 자리를 쳐다보다가, 아예 얼굴을 팔에 묻어버렸다. 올해 들어서 가장 우울한 날이 될 것 같다.

뜬끔없는 레이븐의 결석에 의아함을 품은 것은 비단 클라우드 뿐만은 아니었다. 특별반 녀석들에게 왜 네가 이유를 모르냐는 둥,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는 둥, 드디어 사랑이 식어가는 거라는 둥. 하루 종일 특별반 녀석들에게 시달린 클라우드는 결국 교실에서 뛰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당장 어제만 해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대화하지 않았던가. 최근의 일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레이븐에게 잘못 한 것도 없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레이븐이니까, 싫어졌다면 그렇다고 딱 잘라서 말 했을 것이기도 하고. 이유 모를 공백에 마음이 답답했다.

교실에서 뛰쳐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갈 곳이 없었다. 한참을 방황하고 다니다가 클라우드가 자리 잡은 곳은 학교 도서관이었다. 이럴 때면 특별반 신분이 참 좋았다. 특별반 누구누구인데요, 하면 별 말 없이 문이 열리곤 했으니까. 레이븐과도 이런 특권을 꽤나 자주 써먹어 왔다. 교실은 언제나 시끌시끌했고, 신경 긁는 사람도 많아서 둘만 있기에는 도서관이 딱이었다. 게다가 레이븐은 독서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활자를 읽는 거긴 해도. 클라우드는 책을 읽는 레이븐을 좋아한다. 완벽한 조합이었다. 그러고 앉아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몇 시간 째. 집중이 전혀 되지 않았다. 교실에서 나오면 그나마 빈 자리가 덜 느껴지지 않을까 했는데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연했다. 도서관도 으레 레이븐과 함께 하던 장소였으니까. 도대체 어딜 간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클라우드는 괜히 잡히지도 않는 공부를 파고 또 팠다. 뭐 하는 짓이지,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샤프를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정답지를 꺼내서 내내 풀었던 문제들을 채점 해보는데, 결과가 꽤나 참담했다. 수능에서 이런 점수가 나오면 혀 깨물고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답지 않게 비가 내리는 문제집을 덮고 클라우드는 결국 도서관에서도 뛰쳐 나왔다. 그의 생각이 나지 않는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또 한참을 헤매고 다니던 클라우드는 복도 한 복판에 우뚝 멈춰 섰다.

레이븐과 함께 하지 않았던 장소 따위 존재 할 리가 없잖아.

새삼스럽게 자신에게서 그의 존재감을 느꼈다. 한심하긴. 이정도로 좌지우지 되는 사람이었던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누르고 클라우드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특별반의 특권 두 번째. 언제나 잠겨 있는 옥상의 자유 이용권. 이건 원래부터 주어졌던 건 아니었고, 다른 녀석이 해 준 일이긴 했지만 아무튼.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쓸데없이 계단만 많다며 투덜거렸을 것이다. 레이븐에게. 하릴없이 계단의 숫자만 세다가, 어느새 다 올라온 클라우드는 꽉 쥐고 있던 열쇠로 굳게 잠겨 있는 옥상 문을 열었다. 기름칠을 안 했다는 티가 팍팍 나는 금속음이 들렸다. 문을 열자 마자 불어오는 바람은 꽤나 기분이 좋다. 레이븐이 옆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굳이 잠글 필요는 없겠지. 문을 돌아보며 클라우드는 난간에 기대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텅 비어 있다. 그 덕에 너무나도 조용해서 어쩐지 더 쓸쓸해져 버렸다. 어디 둘 곳이 없어서 들고 와버린 문제집을 내려놓고 클라우드는 털썩 주저 앉았다. 잠이라도 조금 자면 나으려나. 얼마 지나지 앉아 아예 누워버린 클라우드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도 정말 쓸 데 없이 좋다. 차라리 확 비나 와 버렸으면. 축축하니 젖어서 감기라도 걸리면 그걸 핑계로 조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레이븐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학교에 오지 못 한 건지도 알 수 있을텐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클라우드는 휴대폰을 꺼넀다. 단축 번호 1번을 꾹, 누르자 무미건조하게 <레이븐> 이라고 저장 해 놓은 그의 번호가 화면에 띄워졌다. 조금 더 애교 있게 저장 할 걸 그랬나. 명색에 사…사귀는 사이인데. 클라우드는 끙, 하고 작게 신음했다. 하기사, 레이븐의 휴대폰에도 자신은 꽤나 무미건조하게 저장 되어 있더라. 똑같이 클라우드, 라고.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포기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넣고 클라우드는 눈을 감았다.

"클라우드. 야, 클라우드!"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흔들어 깨우며 이름을 불러 오는 목소리에 클라우드는 어렴풋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의외의 얼굴이 보였다. 레이븐이었으면 저도 모르게 와락 껴안아 버렸을 지도 모르겠는데.

"…뭐야, 무슨 일이야."
"찾느라 죽는 줄 알았네. 너, 진짜 레이븐이랑 무슨 일 있어?"

그럴 리가 없잖아. 괜히 까칠하게 대꾸 할 뻔 했다. 억지로 꾸역꾸역 말을 목 뒤로 집어 넣으며 클라우드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지만, 정말로 별 일 없었다. 레이븐도 평소와 똑같았고 자신도 그랬다. 그리고 또 다시 한 번. 불만이 있다면 말 했을 레이븐이다.

"하지만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
"아까도 말 했잖아. 정말로 모른다고."

결국 잔뜩 짜증이 섞인 채로 대답이 나와 버렸다. 디토엠은 머쓱해진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다른 둘도 아니고 클라우드와 레이븐이다. 가끔 부럽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그 둘 말이다. 둘이 짜고서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황은 꽤나 비현실적이었다. 클라우드의 반응을 보아하니 장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쏙 들어가 버렸지만, 사실 지금도 그냥 장난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사실 내가 걱정 되서 여기저기 좀 물어보고 다녔단 말이지. 그런데 교무실에서 들은 거야."

어쩐지 뜸을 들이는 디토엠에 클라우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내가 모르는 걸 선생님이 알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은 조금 뒤로 하고, 클라우드는 애써 성격을 죽이고 디토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레이븐, 이사 갔대."

거짓말.

* * *



사실 약속이 있었다. 학교 일과 중에는 웬만해선 밖으로 나돌지 말자는 약속. 결석도 하지 말고, 지각도 하지 말고. 다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레이븐과 함께 다니기 시작한 이래로 클라우드는 꽤나 학교 생활에 풀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약속이 다 무슨 상관인가. 클라우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갑자기 왜. 곧바로 든 생각이었다. 그 다음에는, 어째서 말을 하지 않았어. 당장 어제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일 봐, 하던 레이븐의 얼굴이 생생했다. 무슨 의미인데, 이건?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었다. 그리하여 학교에서 뛰쳐나간 클라우드가 향한 곳은 레이븐의 집이었다. 디토엠의 거짓말이라면 정말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레이븐의 장난이라면 차라리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 내지 않을게. 차라리 서프라이즈, 뭔가의 이벤트, 그런 거라고 해 줘. 레이븐.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클라우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로 빈 집이었다. 이웃에 물어보니 오늘 아침에 이사를 가던 것 같다, 고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 자리에서 곧장 클라우드는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레이븐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싫어졌다면 차라리 말로 해. 내가 무언가 잘못 했다면 차라리, 화를 내 줘. 어째서야.

덩그라니 문 앞에 서 있던 클라우드는 한참이 지나서야 뒤돌았다. 어디로 가야하지. 그냥 집으로 갈까. 끈적한 무기력함이 등 뒤에 늘어 붙어 있었다. 기분이 나쁘다. 뭐가 나쁜 건지 모르겠는데, 서럽고 야속하다. 처음으로 찾은 소중한 사람이었다. 스킨쉽을 하거나, 낯간지러운 말을 속삭이는 게 부담스럽다면 그냥 친구로 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떠나는 건 아니잖아. 너무 한 일이잖아, 레이븐.
그러고 또 한참을 서 있었다. 학교에도, 집에도 돌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꽤나 비참한 기분이었다. 삶 이래로 처음 느껴 보는 듯한 그런 것. 정말이지 싫은 감각이다. 심호흡을 하고 클라우드는 눈을 꽉 감았다.

"……클라우드?"

목소리에 클라우드는 퍼뜩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꽤 놀란 표정의 레이븐이 눈 앞에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다.

"왜 여기에 있어? 학교는?"

뭔가 클라우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레이븐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어디 아파? 조심스러운 물음에 클라우드는 숨을 멈췄다. "아픈 거면 여긴 왜 왔어, 병원으로 가야지." 이마에 닿아 오는 손에 정신이 들었다. 열은 없는데. 말 좀 해봐, 하며 레이븐은 계속 클라우드에게 말을 붙였다. 이내 숨을 토해냄과 동시에 클라우드는 레이븐의 팔을 끌어 당겨 안았다.

"왜 그ㄹ─"
"…아무 말도 하지 마."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를 보며 레이븐은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보니 시간이, 꽤 많이 지나버렸구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연락을 한다고 해 놓고 학교에만 했구나.

"전화 많이 했어. 한 번도 안 받더라."
"미안해. 바빠서 전화 오는 것도 몰랐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니까."

레이븐은 그 말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가끔 이렇게 아이같이 굴 때가 있다. 이번에는 넘어가기로 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니까. 많이 놀랐겠구나. 덤덤한 표정으로 레이븐은 괜히 딴청을 피웠다. 별로, 울지 말라던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상처를 줘 버릴 것 같아서.

"아무 데도 가지 마……."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클라우드가 우는 걸 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애초에 별로, 울 일도 없었다. 만나고, 함께 있고, 내내 즐거운 일만 있었으니까. 처음 특별반 편성 얘기가 나올 때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 저 레이븐 없으면 그런 데 안 들어갑니다. 자퇴 할 거예요. 꼴에는 위협적이게 말 해본다고 목소리도 깔고, 반항적으로 대들기도 한 주제에 뒤에서는 진짜 퇴학 당하면 어쩌나 했어 하며 어색하게 웃던 클라우드가 있다.

"안 갈게."

말 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 얘기는 하고 싶었다. 가만히 그를 토닥이며 레이븐은 주머니를 뒤졌다. 참 상황에 안 어울리는 짓인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하나는 복사본이고, 하나는 진짜 집 열쇠다. 굳이 진짜 열쇠를 쥐어주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손으로 클라우드의 손을 꽉 잡으며 건네 주었다.

"네 거야."

작게 웅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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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꽤 재밌는 세상이 되어 버렸지, 클라우드."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클라우드는 눈을 떴다.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아파왔다. 결국 인상까지 쓰며 그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 쪽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크리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는 존재하지 않는 데도, 마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는 마법유저였기에 클라우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눈이 마주치자 크리스는 옅게 미소 짓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클라우드는 결국 포기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깨질 듯이 아파 오던 머리도 서서히 괜찮아지고 있었다. 살짝 비틀거리며 섰다. 벽을 짚으려고 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도저히 지면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허공에 떠 있는 듯 했는데, 조심스럽게 발을 들어 땅을 디디자 바닥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들었다.
시야는 끝도 보이지 않는 흰색으로 메워져 있었다. 클라우드는 화이트 아웃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연상해냈다.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조금 오래 걸어 크리스와 멀리 떨어졌음에도 그의 형상은 똑똑하게 보였으니까. 결국 클라우드는 다시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는 마치 그림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재미있는 세상이라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눈이 부시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하얗기만 한 공간은 어쩐지 불쾌감만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다시 한 번 클라우드와 크리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크리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깍지를 껴 그 위에 제 턱을 올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해 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리는 더 깨질 듯이 아파왔다. 결국 클라우드는 다시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여전히 크리스는 말없이, 마치 그를 관찰하는 것처럼 쳐다 볼 뿐이었다.

"뭔가 말 좀 해보시죠, 크리스. 대체 여긴 뭡니까?"
"그러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반응이었다. 여유롭게 대충 대꾸하는 크리스에 클라우드는 괜히 더 조급해져 버렸다. 기억은 없었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공간에는 자신과 크리스 뿐이다. 의미심장하게 웃고만 있는 그를 보며 클라우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무언가 말 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클라우드는 일어서서 뒤돌았다. 조금 더 걸어 볼 생각이었다.

"일어나는 게 늦었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하지만 그 말에 클라우드는 우뚝 멈춰 섰다. 돌아보자 투명한 무언가에 앉아 있던 것 같았던 그가 일어섰다. 그리고 세 걸음 정도 걷다가 멈추더니, 손을 뻗었다. 핀 손바닥은 애매한 위치에 멈춰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닿아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놀라서, 클라우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손바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내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던 거리를 좁혀 클라우드 또한 손바닥을 펴고 손을 뻗었다. 머지않아 툭 막혀버렸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손을 펴 거울에 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크리스와 같은 위치에서 막힌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사이에 두꺼운 유리라도 있는 마냥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의 거리가 꽤 멀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크리스가 마법을 썼다고 하더라도, 무엇 때문에 이런 것을 했겠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클라우드는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나는 갇혀 있는 거야. 그렇게 좁진 않은데, 뒤도 이렇게 막혀 있더라고."
"어째서……?"
"물어 봤자야.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으니까. 마법도 사용 되지 않아."

금세 손을 거둔 크리스에 클라우드 또한 손을 거두었다. 어째서 그는 갇혀 있고 자신은 자유로운가. 아니, 사실은 자신 또한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고개만 돌려 뒤쪽에 하염없이 펼쳐져 있는 하얀 공간을 클라우드는 주시했다. 앞이 이런 식으로 막혀 있다면 뒤 또한 끝이 있지 않겠는가. 나가는 통로이든, 무엇이든. 클라우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 크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자유로운 게 맞아. 그리고 네가 있는 그 뒤, 아마 끝도 없을 걸."

가봤자야, 하고 짧게 덧붙이고 크리스는 다시 아까 앉아 있었던 위치에 똑같이 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익숙해 보였다. 클라우드는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라고 했던 크리스의 말을 떠올려냈다. 그는 얼마동안이나 여기서 있었던 걸까. 정신을 잃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자신이 정신을 차리기 전의 상황을 상상해보다가 섬뜩해져서 클라우드는 자신의 한 쪽 팔을 잡았다. 그는 홀로 무엇을 했을지.

"타임 쉬프트 디스펜서가 작동을 했지."

그 말에 마치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듯 클라우드의 눈앞에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기억을 못하는 것이야 당연했다. 프로그래밍 되어 있던 대로 소멸당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깨닫자 지끈거려 오던 머리도 완전히 괜찮아졌다. 클라우드는 작게 헛웃음을 뱉어냈다.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하였고, 자신마저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긴 세월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클라우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크리스와 자신이 함께 존재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크리스는 아까부터 자신이 하는 생각을 읽고 있는 듯한 말만을 하고 있었다.

"실패 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뭣하군. 오작동이라고 해 둘까? 아무튼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나는 여기에 이렇게 갇혔고, 너는 거기에 그렇게."

그렇다면 여기는 아무 것도 아닌 세계라는 말이다.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자신은 실패했고, 패배자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클라우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자신에게 참 잔인한 세상이다. 차라리 그냥 죽여 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서 무엇을 하라는 말인지.

"그래. 넌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 했어."

꼭 그렇게 촌철살인 안 해주셔도 되는데요, 하고 말 하려 한 클라우드는 그냥 아랫입술을 꾹 깨물기만 했다. 자신의 생각이 그에게 들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굳이 말로 전할 필요는 없었다. 그대로 클라우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화풀이를 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스의 말대로 마법조차 사용 되지 않는 세계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다를 지도 모르지."

클라우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웃는 낯짝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말만을 하고 있다. "조금 제대로 말 해주면 안 됩니까?" 미간을 찌푸리며 클라우드가 되묻자 크리스는 잠시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조금 후에 입을 열었다.

"실험이라고 할까, 연구라고 할까. 이런 쪽에는 네가 더 빠삭할테니 마음대로 생각 하고, 아무튼 그런 걸 해 볼까 해."

깍지를 껴 맞잡은 두 손을 꼬고 있는 다리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로 크리스가 작게 웃었다. 이런 세계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실험 도구도 없었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종이나 필기구도 없었다. 그런 비슷한 행위조차 할 수 있을 리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클라우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그의 장난을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너야, 클라우드. 조금 배가 아프긴 하지만."
"……예?"
"타임 쉬프트 디스펜서에는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담겨 있지. 그리고 그것의 토대는 400년 전에 빼앗기긴 했지만, 내 마법이고."

다 알고 있는 것을 굳이 설명해주며 크리스는 몸을 기대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것만 같았지만 아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그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생각 또한 읽혔는지 크리스가 한 손으로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꼬여버린 모양이야." 장난도, 거짓말도 아닌 듯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별 미련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연구를 진행할 사람은 너, 동시에 피실험자도 너야. 나는 실험자도 아니고 관찰자겠지. 이 자리에 앉아서 너를 관찰하는 일밖에 할 수 없으니까."

크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모든 게 결핍되어 있다니까요. 입술만 달싹이는 클라우드를 보며 크리스는 어느 정도의 텀을 두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거절해도 괜찮아. 권리는 너한테 있고, 나는 강요하고 싶더라도 그러지 못하거든."
"이번엔 말로 하도록 하죠. 제대로 좀 말해주세요."

그러자 크리스가 유쾌하게 웃었다. 클라우드에게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인데 그는 꽤나 즐거워보였다. 무엇이? 자신이 곤혹스러워 하는 것이? 그 정도로 악취미였던가, 이 사람은. 이내 클라우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더라도 이런 공간에 오랫동안 있게 된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백의 공간. 자신 또한 미쳐버리게 될까.

"나는 미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크리스는 일어나 고개를 위로 올렸다. 위로도, 밑으로도,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은 공백만이 가득했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대로 크리스는 눈을 감았다.

"400년을 살고 보면 무슨 상황이 되던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걸지도. 애초에 나는 그렇게 살아야 했지만, 아마 그 정도 살게 된다면 누구든 그럴 거야. 조금 말을 빨리 할 테니 집중해서 들어."

클라우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쪽 눈만을 뜨고 클라우드를 바라보던 크리스는 그 반응을 보고 나서야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내 마법을 바탕으로 한 디스펜서야. 오작동을 했더라도 이거로 끝이 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렇게 갇혀 있는데도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했지. 한계는 있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하나를 알아냈어. 시간을 돌리는 능력은 남아 있다는 것. 바로 디스펜서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했던 원동력인 너에게 말이야."

어느새 고개를 똑바로 하고 한 손의 검지 손가락을 펴 자신을 가리키는 크리스에 클라우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클라우드는 천천히 그 말을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실험인지, 연구인지 아무튼 간단해. 너는 네가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네가 지키고자 했던 동료들의 죽음을 막는다. 디스펜서가 작동하지 않게 한다. 네가 원하는 세계를 찾을 때까지 무한하게 반복할 수 있어. 중도에 포기하더라도, 뭐. 결국 네 마음대로고."

그가 어떻게 알아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의 마법이니 어렴풋이 깨달았을 수도 있겠다. 어때? 하며 물어오는 크리스. 클라우드는 잠시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가,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무한하게 존재하는 기회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 말이다. 크리스는 더 이상의 말도, 재촉도 없이 클라우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목소리가 떨렸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생각 해. 네가 돌아가고 싶은 때를 기억해 내."

햇수를 세는 것을 언젠가부터 포기했던 인생을 클라우드는 떠올려냈다. 호문클루스였기에 가질 수 있었던 기억력을 총 동원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기억을 훑어냈다. 그렇다면, 맨 처음 돌아갈 것은 똑같이 맨 처음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크리스가 빙긋 웃었다. "승낙할 줄 알았어." 작게 입모양으로만 그가 중얼거렸다.

"제목은 뭐로 할래? 네가 실험자고, 동시에 피실험자야. 네가 지어."

굳이 그런 것을 지어야 할까. 별로 상관은 없다고 판단했지만, 클라우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많이 지나지 않아 대답했다.

"계획도시, 로 하죠."

―네 마음대로 하도록 해. 옅은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두 번째 세계가 시작됐다.

Ing.

첫 번째 루프 지점은 가장 처음이었다.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클라우드는 아직 조그마했던 시절로 돌아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얀 공간이 아닌 밀실에 앉아 있었다. 레이븐도, 루나도 만나기 전, 홀로 앉아서 알지 못할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며, 이상한 훈련들을 받았을 때다. 그는 단박에 기억 해 낼 수 있었다. 정말로 악몽 같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클라우드는 판단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그 시절을 버텼다.
레이븐이 인간성을 잃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잃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똑같은 삶은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릿하게 지나갔고, '그날'이 지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정보를 모을 필요는 없었다. 애초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 심증뿐이었던 것은 확증으로 만들었고, 이전 루나에게 들켰던 때를 기억해 내 매사에 행동을 더더욱 조심히 했다.
일단 레이븐의 자살을 막기로 했다. 그가 진실을 알게 되는 루트를 모두 차단했다. 정해진 운명에 대한 절망으로 그가 자살을 택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2030년의 겨울이 되었다. 이것으로 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부터 잘못 된 것일까. 클라우드는 레이븐의 죽음을 통보 받았다. 어째서? 이번에도 자살이었다. 모든 것을 차단했을 텐데. 그제야 클라우드는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실을 알았던 것도 한 몫 했겠지만, 그의 자살에는 또 다른 큰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가 인간성을 되찾았다는 것. 클라우드는 작게 헛웃음을 쳤다. 애초부터 그는 함지존을 통한 마지막 살인을 완수하고, 자신 또한 사라져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티팩트, 다시 시작하는 시계는 또 한 번 완성되었다. 레이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클라우드에게 완전한 세계가 되지 못한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찾아서. 클라우드는 다시 한 번 세계를 뛰어 넘었다.

두 번째 루프 지점은 '그날'의 이전이었다. 그렇다면 레이븐이 맨 처음 인간성을 잃게 되는 것 자체를 막으면 된다. 클라우드는 자신이 그를 어떻게 해 보겠다며 이카루스와 연금술사 노인을 설득했다.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요청은 겨우겨우 승낙되었고, 그가 레이븐을 맡았다. 그에게 레이븐은 무슨 꿍꿍이냐고 물었지만 클라우드는 아무런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이미 두 번을 잃었다. 더 이상은 잃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살인에도 검은 마나가 찬다는 사실쯤이야 첫 번째 삶에서 검증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살인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레이븐에게 넘어가는 의뢰들의 일부분을 일단 14번이 아티팩트를 훔쳐 달아나 안전하게 된 루나에게 넘겼다. 아무도 모르게. 이번에는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또다시 변수가 생겨버렸다. 레이븐이 다시 시작하는 검을 되찾아왔다. 당연했다. 레이븐이 그 날, 크림슨 로브를 죽이지 못한 이유는 서로의 검은 마나로는 서로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크림슨 로브의 검은 마나를 레이븐에게 이식하는 것을 막은 게 바로 자신이다. 처음부터의 오류였다. 결국 다시 한 번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 세계를 뛰어 넘었다.

세 번째 루프 지점은 레이븐이 윤필규를 조달자로 쓰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그가 검은 마나를 이식 받지 못하게 한 것은 그대로 하고, 맨 처음 함지존을 발견해 그를 처리하러 갈 때에 레이븐과 동행했다. 이카루스를 대적할 함지율을 이 때 만나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틈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크림슨 로브의 처리는 자신이 맡고, 레이븐에게 함지존을 맡겼다. 당연하지만 크림슨 로브를 죽이지는 않았다. 죽인 것으로 위장하고, 그를 도망 보냈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고, 네가 우리와 대적할 힘을 갖게 되기 전까지는 들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클라우드는 레이븐에게 연락을 넣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닿지가 않았다. 무슨 일일까. 결국 그는 직접 레이븐을 찾으러 나설 수밖에 없었다. 레이븐은, 함지율을 만났다. 함지존은 그의 손으로 직접 처리한 이후였다. 그 장면을 목격한 함지율은 당연하지만 그 때처럼 폭주했다. 클라우드는 레이븐을 데리고 도망쳤다. 그 꼬마는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분명히 크림슨 로브가 돌아와서 그를 챙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은 맞아 떨어졌고, 한동안은 잠잠했다. 그런 줄 알았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클라우드가 최대한 줄였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살인을 감행한 레이븐의 정신 상태는 굉장히 불안정했다. 보이지 않는 결함이 생긴 것이다. 애초부터 그는 자살 시도를 몇 번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호문클루스였기에 실패만 해왔다. 그리고 또 하나, 레이븐은 유독이나 어린 아이에게 약했다. 함지율과의 만남은 가뜩이나 불안한 레이븐의 정신 상태를 건드렸다. 레이븐은, 루나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루나는 몇 번이나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레이븐은 차라리 그게 나를 돕는 일이라며 그녀를 설득했다. 루나는 누구보다도 레이븐을 아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자신을 돕는 일이라는 말에 그의 부탁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레이븐은 또다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클라우드는 이번에도 실패했다.

―그럼 그렇게 간단할 줄 알았어?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는 클라우드에게, 백색의 공간에서 크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클라우드는 픽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고작 세 번이다. 포기 할 수는 없다. 이미 시작한 이상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실패했다. 하지만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클라우드. 너에게는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 더 있어. 나는 어디까지나 관찰자니까 개입할 수는 없겠지. 염두 해두고, 네가 찾도록 해. 분명히 도움이 될테니까.

그의 조언을 새겨들으며 클라우드는 또 한 번 세계를 뛰어넘는다.

Last?

크리스가 말한, 자신의 또 다른 능력이란 도시를 뜻하는 것이었다. 모든 일이 벌어진 이 도시 말이다. 자신 자체가 도시였다. 근본적 시스템부터 시작해서, 도시를 구성하는 특정한 요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가령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법조차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정전시킨다던지, 건축을 막는다던지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쓸모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나쁘진 않았다. 처음 자신이 실험에 붙였던 계획도시라는 이름이 더더욱 어울리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클라우드는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와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레이븐은 높은 곳을 좋아했기에, 일부러 만든 고층 빌딩이었다. 도시에는 썩 어울리지 않았고 민원도 많았지만, 어차피 만든 이후에는 클라우드의 손을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클라우드도 제법 자주 찾곤 했다.
벌써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세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레이븐을 구하려는 시도들은 모두 레이븐 때문에 무산되었다. 언제나 이번에는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레이븐이 변수를 만들어냈다. 클라우드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참으로 잔인하지 않은가. 그를 구하려고 하는데, 그가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진실을 일찍 알려버리면 그것에 삶의 끈을 놓아버렸고, 희망을 심어주더라도 더 썬의 손으로나, 아니면 다른 이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마치 그를 구할 수 없다고 세계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클라우드는 고개를 저었다. 서서히 지쳐가고 있음을 느꼈다.

"클라우드."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클라우드는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의 루프를 반복하며 지겹게 들은 목소리다. 크리스는 400년을 살았는데, 자신은 과연 얼마나 살았을까. 이미 루프 횟수를 세는 걸 포기한 이상 제대로 알 길은 없었다. 비슷할 거라고 추측 할 뿐이었다. 400년 정도 살게 된다면 누구든 좋던 싫던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가게 된다고, 크리스가 처음 말 했었다. 클라우드는 그의 기분을 제법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죽지 못하는 삶이다. 그 또한 그랬을 것이다. 또한, 그러고 있을 것이고.

"미안. 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네. 가볼게."

그는 혼자 있는 것을 선호했기에 클라우드는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었다. 옥상의 문을 닫고 들어 온 레이븐의 시선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클라우드를 좇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반경에서 멀어져갈 때 쯤, 그의 팔을 잡았다. 클라우드는 살짝 놀란 표정을 하고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널 만나러 온 거야."
"여기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고?"

레이븐은 어깨를 으쓱 했다. 그렇게 오래 봐 왔는데 도무지 예상이 되지 않는 녀석이다. 하기사, 예상이 되었더라면 애초에 그의 모든 돌발 행동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클라우드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아쉬울 노릇이다. 백색 공간의 크리스 처럼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조금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난간에 기대는 레이븐에 클라우드 또한 그의 옆으로 가 그처럼 난간에 기대었다.

"기분이 어때."

의미심장한 물음에 클라우드는 "무슨 뜻이야?" 하고 되물었다. 백색 공간의 크리스 또한 이런 화법이 특기였는데. 새삼스럽게 그를 떠올리며 클라우드는 고개를 돌려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잠시 레이븐은 대꾸 없이 아래만을 내려다보았다. 그 자체로도 꽤나 아찔한 광경이다.

"부탁이 있어."

레이븐이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레이븐은 인간성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처음 생처럼 클라우드가 찾아주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레이븐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죽여줘."

순간 클라우드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을 눈치 챈 레이븐은 또다시 말이 없다. 적어도 레이븐이 자신에게 자신의 죽음을 부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억 상에는 그랬다. 이내 클라우드는 픽 웃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모양인지 레이븐은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몇 번이나 반복한 건 너였지."

그만 둘 생각은 없는 거야? 하는 물음에 클라우드는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루프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몇 번이나, 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적어도 이번에 처음 안 것은 아닐 테다. 알고 있었다면 자신의 죽음을 피하려고 해주는 건 안 됐던 걸까. 어쩐지 레이븐이 야속해졌다.

"그만 두기를 원해?"
"의무감에 하는 거라면 그만 둬."

클라우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넘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눈을 뜬 레이븐은 여전히 무덤덤한 채로 클라우드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하필이면 의지가 약해졌을 지금, 레이븐이 안 좋은 곳을 건드리고 말았다. 이대로 포기해버릴까. 그가 구하고자 하는 인물이 그만 두라는 말을 입에 담자 클라우드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많이 약해졌구나. 속으로 자조했다.

"클라우드."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이 들려온다. 클라우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나를 정말로 구하고 싶다면 포기하지 마."

그만 두라더니, 이번에는 포기 하지 말라고 말한다. 잔인한 처사다. 슬슬 세상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모든 것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클라우드는 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너를 돕지 않을 거야. 죽고 싶으면 죽을 거고, 죽이고 싶으면 죽일 거야. 모든 조건은 똑같아."

이내 클라우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하지 않나. 클라우드는 저도 모르게 레이븐의 목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가했다. 하지만 레이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레이븐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클라우드는 손에 힘을 뺐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자책했다.

"설사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나를 구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 할 가능성이 몇 백만, 몇 천만, 몇 억중에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포기하지 마."

옅은 숨소리가 섞인 채로 레이븐이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대꾸 않는 클라우드를 향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나도 네가 나를 구해주는 세계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까."

억지로 피하고 있던 푸른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클라우드는 작게 웃었다. 아까 헛웃음을 뱉어냈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예의 언제나 짓곤 하던 그 미소였다.

"분부대로."

클라우드는 다시 한 번, 몇 번째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횟수에 하나를 더하여 세계를 뛰어넘는다.

―Re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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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레이] Valentine's Day

자진해서 레이븐이 책상 업무를 떠맡겠다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의아해하며 넘겨주긴 했는데, 당연히 걱정이 안 될 리는 없어서 클라우드는 그의 방 주변을 서성이고만 있었다. 가끔 방 밖으로 레이븐이 나올 때마다 마주쳤고, 그 때마다 내쫓겼지만 클라우드는 끈질기게 돌아왔다. 레이븐도 결국 포기 한 모양이었다. 어쩌겠는가. 바로 옆에서 어떻게 하는지 봐야 겠다는 마음은 겨우 억눌러서 여기서 그친 것인데. 복잡한 것이나 따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빼두긴 했지만.
문득 클라우드는 이렇게 제가 계속 걱정을 해도 좋으니 레이븐이 계속 내근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일이 줄어든다는 것은 관련이 없었다. 외근은 호문클루스인 그들에게 여러모로 위험했다. 다치거나, 아니 애초에 그들이 다칠 일은 별로 없었지만 서도.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은 둘째치고 그들의 일인 살인은 그들 자신의 생명을 깎아 먹는 일이라는 것은 클라우드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또한 쉽사리 알릴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고. 이내 클라우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책상 업무를 주로 맡기로 만들어진 호문클루스는 바로 자신이었다. 레이븐이나 루나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리가.
다리 아파. 한참을 서 있었던 클라우드는 제 무릎을 두어번 꾹꾹 눌렀다. 어차피 옆에서 보지 않는 다면 별 부질 없는 짓이니 그냥 작업실로 돌아가는 게 낫긴 할 터인데. 결국 자리에 주저앉은 클라우드는 문을 마주했다. 괜히 문을 째려보며 있다가, 이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레이븐이 생각 없이 달라고 한 것일 리도 없을 텐데 뭐 그리 걱정이 된다고. 일처리가 어벙했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이븐의 죄책감이 존재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일은 살인이었으니까. 지금의 레이븐은 그다지 걱정 할 일도 얼마 없지 않나. 클라우드는 자리를 옮겨 문 옆 벽에 기대 앉았다.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한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레이븐은 클라우드가 보이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자 마주친 눈에 혀를 찼다.

"아직도 그러고 있어?"
"…어쩌다보니."

머쓱한 듯 클라우드는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레이븐의 손에는 서류더미가 들려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클립처리까지 되어 있는 것이, 정말로 걱정 할 필요가 없었구나 싶었다. 앞으로 일이 밀리면 조금 맡겨볼까. 클라우드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 다리가 저릿해왔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자. 받아."

제법 무게 있는 서류뭉치를 받고 클라우드는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조금 타이밍이 늦게 튀어 나온 말은 고마워, 였다. 레이븐은 잠시 클라우드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어깨만 으쓱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야. 딱히 도와주고 싶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말 해주면 안 돼? 빈말이라도 말이지."
"글쎄. 안 떨어트리게 조심해."

그 말만을 남기고 레이븐은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닫히는 문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클라우드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면서, 조금 놀아주면 덧나나. 하지만 이내 머릿속에 떠오른, 아직 남아있는 일들 때문에 클라우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쉴 틈이 없는 것은 자신이었구나. 클라우드는 조심조심 서류더미를 들고 제 방으로 향했다.


검토는 해봐야겠지. 레이븐이 대신 처리해 준 서류더미는 한 켠에 밀어놓고 다른 일을 보다가 문득 클라우드의 시선이 거기로 닿았다. 클립을 풀고, 한 장 한 장 집어 눈으로 훑어내렸다. 레이븐의 글씨체를 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예전에도 생각 한 것이지만, 꽤 수려했다. 자신의 것과는 다르게. 딱히 뒤의 것까지 볼 필요는 없을 정도로 흠없이 처리되어 있기도 했다.
두어개 쯤만 더 보고 그대로 넘길까, 하며 클라우드는 한 장을 더 집었다. 문득 종이와는 다른 묵직한 느낌이 딸려 왔다. 종이 뒤에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뭐야, 이게?"

서툴게 묶인 리본이 꼭 레이븐의 솜씨같았다. 아니, 그가 한 게 맞겠지 애초에. 작은 선물상자였다. 불현듯 클라우드는 고개를 돌려 달력을 확인했다. 아날로그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예전의 레이븐 대신 자신이 걸어놓고 뜯기 시작한 달력이었다. 2월, 14일.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어떻게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뭐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라니까. 결국 웃음을 터뜨린 클라우드는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그나저나 그 녀석, 발렌타인 데이는 여자가 남자한테 주는 날이라는 건 알고 있으려나. 상관은 없겠지 싶어서 클라우드는 어깨만 으쓱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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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븐은 퍽 겨울이 잘 어울리는 청년이었다. 적어도 클라우드의 생각에는 그랬다. 그럼에도 평소 복장은 겨울과는 거리가 멀고 또 멀어서, 매 겨울이 찾아오면 레이븐의 옷을 챙겨주는 것이 클라우드의 일 중 하나였다. 클라우드가 쥐어주는 겉옷을 받으며 레이븐은 언제나 추우면 마법을 쓰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고, 클라우드는 그럴 때마다 보고 있자면 내가 춥다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럴 때면 차라리 레이븐이 솔직하고 클라우드가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기사 그것은 언제나 그랬기도 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어쨌든 클라우드는 레이븐에게 겨울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또한 겨울의 레이븐을 좋아했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어준 후에 직접 고른 옷을 입히고, 휑한 목에 목도리까지 둘러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제 멋대로 꾸며놓은 레이븐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정작 그 본인은 언제나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모든 시간은 언제나 평범하게 흘러갔다. 딱히 특별한 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무가 없는 날이 곧 휴일이었고, 그렇다고 그 날만은 다르게 보낸다거나 그러지도 않았다. 레이븐의 경우는 대부분을 잠으로 떼웠고, 클라우드야 상시 추적 임무를 맡고 있기도 했고 책상 업무는 다 그의 몫이었기에 사실상 완벽한 휴일 따위를 갖지는 못했다. 그렇게 지나쳐간 세월이었다. 한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고, 당연하다고 느꼈다. 
세상에 기념일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쉘터 내에 마법사들이 수용되면서 알았다. 그들과 원만한 관계는 되지 못했기에, 그나마도 언뜻언뜻 듣기만 한 것이 전부였다. 적어도 레이븐만은 회의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니까, 검은마나가 거의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레이븐 말이다. 
첫 크리스마스 파티는 레이븐에 의해서 벌어졌다. 그가 아이들에게서 12월 25일은 선물을 받고, 즐겁게 보내는 날이라는 사실을 듣고 와서였다. 당연하지만 그런 것을 듣도 보도 못한 채 삭막하게만 살아온 그들이 제대로 된 파티를 벌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선물도 없었고, 그닥 즐겁지도 않았다. 그저 셋이 모여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적이 흘렀다가. 또 다시 누군가가 말을 꺼내거나 그런 것의 반복이었다. 레이븐도 충분히 예상한 사실인지 그닥 실망하지는 않는 듯 했다. 그걸 보고 클라우드가 "차라리 아이들과 함께 보내지, 뭐하러 셋을 고집했어." 하고 물었다. 레이븐은 잠시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클라우드가 아이들만은 널 꽤나 좋아하지 않냐고 덧붙혔다. 이내 레이븐은 시선을 내리깔고 작게 대꾸했다. 

"처음부터 너랑 나랑 루나 뿐이었는 걸." 

그것은 끝 또한 그래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추측은 지금 와서는 클라우드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그 이후 매년은 아니더라도 몇년씩 걸러서는 함께 보냈다. 약속이 없더라도 일이 없으면 찾아갔고, 그렇게 모여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그 상황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루나와 레이븐이 찾아오면 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뒷전으로 밀어두고 하릴없이 그들과 시간을 죽였다. 몇 해중 한 해는 레이븐이 혼자 찾아오기도 했다. 레이븐은 그를 자주 찾는 축이어서 별달리 다르게 느껴지진 않았으나, 어쨌든 클라우드는 무의식적으로 12월 25일을 기다리곤 했다. 자신에게는 하나 의미 없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그 날에 적어도 레이븐만은 곁에 있었고, 클라우드도 어느새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참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던 클라우드는 이내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작년, 작년에는 어떠했는가. 당연히 레이븐이 생각났다. 작년 이맘 때의 레이븐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면, 우습게도 사회 속에 있었다. 그 레이븐이. 쓸만한 조달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현대 사회야말로 날마다 꼭 기념일을 붙여 공동체 끼리 허례허식을 치르는 장소가 아닌가. 가뜩이나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는 레이븐이 제대로 된 핑계를 대서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자연스레 인간들 틈에 휩쓸렸을테지. 아마도 그 때가 레이븐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기념일을 보냈던 때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의 그런 모임이 다 그렇듯 술 또한 동반되었고, 레이븐이라고 그것을 안 마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대 학살극이 벌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또한 의문이었고. 
어쨌든, 그래서 레이븐은 술을 마셨다. 클라우드가 아는 한에는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둘째치고 꽤 많이 마셨다. 술에 취한 레이븐은 솔직히 말하자면 재미 없었다. 특별한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였지만, 울기라도 했었으면 또 모를 노릇이다. 
2029년의 12월 25일 새벽, 클라우드는 난데없이 레이븐에게 통신도 메세지도 아닌 전화를 받았다. 그는 어쩐지 어눌한 말투로 다짜고짜 위치를 말했고, 거기다가 데리러 오라는 짤막한 말을 덧붙였다.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인상이었던가, 자신은. 그래도 클라우드는 고분고분 레이븐을 데리러 갔다. 그리고 그의, 장의사 동료로 보이는 여성에게 레이븐을 건네 받았다.
시간이 지나며 안 것이지만 그녀는 레이븐에게 꽤나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퍽 안타까운 일이다. 으레 잘 생긴 남자에게 환상을 품고 자연스레 끌린 것이리라. 레이븐이 소리소문없이 장의사 일을 관두었을 때, 그녀만은 조금 아쉬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금세 잊어버렸겠지. 그렇게 치면 별로 안타깝다고 표현하지 않아도 상관 없을 것이다. 
레이븐을 데리고 복귀하는 것은 그닥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그날 새삼스럽게 텔레포트의 유용성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없었다면 조금 힘들었을지도. 술주정이 없다는 것은 둘째치고. 그래도 레이븐의 몸에서 술냄새가 나는 건 클라우드에게 꽤나 새로운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언제나 무심하게 굴던 레이븐이 먼저 달라붙어 오는 것도 색다르긴 했다. 제멋대로 인 건 여전했지만, 클라우드는 그런 레이븐에 적응 된 지 오래였다. 레이븐은 반 쯤 정신이 나가 있었고, 클라우드는. 그는 그런 레이븐을 보며 옛날을 떠올렸다. 과거를 바라보며 현재의 레이븐을 대했다. 레이븐은 얼마 안 가 스르르 잠들어버렸고, 클라우드는 나름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사실은, 꼭 저가 아침에 해주었던 목도리를 여전히 하고 있어서 나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엉성한 것이 꼭 일 할 때 풀어놓았다가 제 손으로 다시 한 것 같았다. 결국 자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클라우드가 제 손으로 풀어주기는 하였으나.
그 해의 12월 25일도 레이븐과 함께였다. 별다른 임무가 없었기에 레이븐은 클라우드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침에 깨어나서 그는 간밤의 일을 모른 척 했고, 클라우드는 그냥 웃으며 그것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은근슬쩍 놀리는 것은 관두지 않았지만. 그리고는 실없는 대화였다. 일은 할만 하냐고 물었고, 짜증난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럼 그냥 관두지 그러냐는 말에는 작은 한숨만이 돌아왔다.

친구냐는 물음에 클라우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친구, 동료. 그런 단어들로 정의내릴 수 있는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레이븐도, 루나도. 그저 이런 난처한 상황을 만들어 버린, 데리러 오라고 해 놓고 나올 생각을 않는 레이븐을 원망 할 뿐이었다. 데리러 와. 하는 요청은 그 이후로 몇 번이나 더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랬고, 클라우드는 또 불만과는 다르게 그런 레이븐을 데리러 갔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처음 레이븐을 데리러 갔던 그 날 그를 건네 주었던 여성에게 잡혀버린 것이다. 한참을 어색하게 웃음으로 응수하던 클라우드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레이븐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븐이 정의 내리는 자신과의 관계라, 사실 클라우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영역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왜 내 이름이 들려?"

그리고 꼭 제 이야기를 하는 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레이븐이 불쑥 나타나서는 말을 잘라먹었다. "아, 조금 아쉽네." 클라우드는 그 물음을 지긋이 무시하고 어깨만 으쓱 했다. 생각이 닿자 궁금해 진 것은 사실이었다. 레이븐에게 자신은 무슨 존재인지. 그것을 듣고 나면 자신에게 있어서 레이븐이 어떤 존재인지 정의 내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레이븐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클라우드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그녀 쪽으로 돌렸다. 여성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사래를 치고, 간단한 인삿말과 함께 자리를 뜰 뿐이었다.

"나름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는데."
"쓸 데 없는 거일 게 뻔한데?"

……글쎄. 쓸 데 없진 않을지도. 작게 대꾸하자 뭔데, 하고 레이븐이 되물었다. 클라우드는 그냥 고개를 두어번 저을 뿐이었다.

─그 사람, 그쪽이랑 있을 때는 평소랑 다르거든요. 맨날 칙칙하고 무심하기만 하던 사람이, 이상하게 먼저 친하게 구는 것 같아서. 그래서 궁금했어요. 어떤 관계인지.

묘하게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 *



2029년의 겨울은 그랬더랬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기어코 2030년의 겨울도 왔다. 클라우드는 그 해의 시작부터 끝을 직감했다. 그래서 사실은 이런 것을 상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닐 것이다. 이 해는 이상하게 가을부터 추웠고, 그래서 클라우드는 일찍부터 레이븐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그리고 클라우드가 목도리를 둘러준 레이븐은 2013년 이전의 레이븐이었다. 동시에 이후의 레이븐이었고. 그에게서 두 명의 레이븐을 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만족이라고 하더라도 좋았다. 자신의 손으로 감정을 찾아 준 레이븐은 불완전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레이븐."

어느 해부턴가 12월 25일에 그 이름을 부르면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면 시선이 느껴졌다.

"……레이븐."

그리고 올 해는 들리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유달리도 추운 한 해였다. 레이븐의 옷차림은 여전히 겨울답지 않았고, 클라우드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해부터인가 그랬듯이 제 옷장에서 레이븐의 옷을 꺼냈다. 언제나 해주었던 것과 같은 목도리도 꺼냈다. 네가 내, 무슨 존재였는지. 어째서 너를 그렇게나 챙겨주었던지. 그리고 너는 어째서. 왜 다른 사람의 눈에 네가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했는지. 클라우드는 알 수 없었다. 물을 기회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방치한 것은 자신이다.

그를 잃은 네가 어떻게 될 지 상상해 본 적 있어? 제멋대로 행동을 시작 한 루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나는 상상 해 본 적 없어. 앞으로 알게 되겠지. 그런 안일한 태도로 하루를 일관했다. 클라우드는 언제나처럼 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달라졌어? 달라진 게 있다면 있을 것이고, 없다면 없을 것이라.

레이븐은 겨울이 잘 어울리는 청년이다. 그리고 레이븐에게 어울리는 그 겨울을 클라우드는 좋아했다. 그리고 겨울이 어울리는 레이븐도 좋아했다. 레이븐에게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어울렸다. 마치 그 계절이 레이븐을 위해서 생긴 것 같았다. 동시에 레이븐도 겨울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리고, 레이븐이 없는 겨울이다. 그것은 클라우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의미 자체를 가지지 못했다.

클라우드는 그 불완전함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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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현욱]

* 검은방 AU

"왜 그러셨습니까."

오랜 침묵을 깨고 청년이 처음 한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남자는 청년의 말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는 채라도 해주러 시선이라도 돌려줄 만 한데, 그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 대놓고 무시한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라. 하지만 그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크림슨 로브는 군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저 김현욱이 이해 되지 않을 뿐이었다. 끝까지 망설였던 이유는 다른 이도 아닌 그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오래 전부터 지녀온 연쇄 살인마 라는 타이틀은 괜히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목격자까지 죽이는 일 쯤이야 간단했다. 하지만 그 타이틀 덕에 이미 밉보이고 있는 상대가 바로 김현욱이었다. 그의 직업 상 살인자를 싫어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지만은. 그렇기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크림슨 로브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김현욱의 눈 앞에서. 그런데도 김현욱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시신이 발견되고, 다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패닉하는 와중에도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물론 살인을 목격했을 때 김현욱이 무언가 말 한마디라도 했다면 이미 진작에 크림슨 로브는 그를 죽였을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고 분위기가 가라앉은 이후에야 깨달은 일이지만, 김현욱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죽이지 말라는 그의 귀띔이 있지 않았었나. 그것이 무언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쉽게 감이 오진 않았다. 그래서 크림슨 로브는 그에게 직접 이유를 묻는 다소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다. 사실 그는 입을 열기 전부터 날카로운 독설 몇 마디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네놈이 그렇게 꽁꽁 숨기는 이름을 가르쳐 주면 말해 줄 생각은 있는데."

그리고 한참이나 크림슨 로브가 기다렸던 대답은 겨우 그런 것이었다. 농담 섞인 대꾸에 크림슨 로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현욱은 여전히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였다. 그가 야속하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진중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물론 크림슨 로브도 그냥 하는 생각이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으니 그가 자신의 신념까지 거스르며 입을 다문 것일 것이라 생각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저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고.

"네가 궁금해 하는 거야 당연하지."
"형사님은 이유를 말해 줄 생각이 없으실 뿐이고요?"

김현욱은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크림슨 로브는 결국 그의 입에서 직접 이유를 듣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정도로 꽁꽁 싸매는 것을 보면 목숨을 담보로 협박을 해도 말 해주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집은 만난지 채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거다."

그는 그저 의미심장한 말 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이미 두손 두발 다 든 크림슨 로브는 별 생각 없이 그저 네네, 하고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사실 김현욱의 존재는 당연하지만 크림슨 로브에게는 방해였고, 그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처음 그의 직업인 형사를 들먹이며 김현욱은 건드리지 말라, 했던 것이 꽤 오랫동안 크림슨 로브에게는 의문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크림슨 로브의 복수와 관련 된 인물, 혹은 몇 안 되게 그의 복수와 관련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복수와 관련 된 사람이니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의미인지. 하지만 형사, 그것도 딱 봐도 유능한 김현욱의 존재는 아무리 생각해도 위협이었다. 혹시나 계획이 틀어지더라도 괜찮은 것인지.

"뭐, 됐어요. 전 덕분에 편해졌으니까."
"사람을 죽이는 기분은 어떠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크림슨 로브는 고개를 돌려 김현욱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정면, 닫힌 문에 고정 된 채 였다. 그것에 태클을 걸까 했지만 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크림슨 로브는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이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김현욱의 눈을 들여다 보고 있자면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서, 무슨 일이든 설득 당할 것 같고 어떤 말이든 납득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

"……글쎄요."
"신종 복수? 의외로 쪼잔하군."

불만이 담긴 실없는 대꾸에 크림슨 로브는 픽 웃고 말았다. 그 웃음에 김현욱이 두어마디 더 투덜거린 것 같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땅히 대답이 생각 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기분, 사실은 그다지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살인자에는 안 어울리는 상이거든."
"만난지 하루도 안 됐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형사의 감."

간단하고 무성의 해 보이지만 확실한 답변이었다. 그의 눈은 둘째치고 아예 그 자체가 아닌 말도 설득력 있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크림슨 로브는 하기 시작했다. 형사된 자 인지라 쓸만한 능력이겠지 싶었다. 타고난 천성인 듯 하지만. 그런 능력이면 무얼 하든 수완이 좋을 텐데, 김현욱은 이상할 정도로 형사라는 직업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굳이 그가 형사라고 짚어주지 않았더라도 처음 얼굴을 보자마자 형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을 정도로.

"살인자라고 살인이 즐거운 건 아니거든요. 즐거워서 하는 종자도 세상에는 많긴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거, 썩 좋은 기분은 아니죠. 적어도 저한테는."

성에 차는 답변이었을까. 김현욱의 눈치를 살피던 크림슨 로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살인자가 형사의 맘에 차는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하지만 그래도 김현욱이 찜찜한 표정을 하고 있진 않아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크림슨 로브는 마음 먹었다. 어째서 그의 기분을 맞추어 주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너, 형사 해 볼 생각은 없냐."
"…연쇄 살인마인데요, 저."
"살인마 보다는 그 쪽이 더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어. 그냥 그렇다고."

정말로 그렇게 보이는 걸까. 크림슨 로브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쥐는 칼이 아니라, 자신 같은 살인마를 막기 위한 총이 쥐어져 있다면 무슨 기분일까. 한 번도 생각 해 본 적 없는 길이었다. 현실화 시킬 수 없으니 당연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좁았고, 그나마 제일 나은 길이라 생각하고 걸어온 게 지금의 길이 아니었던가. 아쉽다는 생각을 하고 싶진 않았기에 크림슨 로브는 고개를 휘휘 저어 상념을 지워버렸다.

"죽은 여동생이 있다고 했지."

그것은 얼떨결에 꺼내버린 말이었다.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들에게 꺼낼 이야기가 죽음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평소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이야기였겠지만 어차피 다 죽을 사람들인데, 하는 생각을 했더니 별로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갑작스럽게 그것을 언급하는 김현욱에 크림슨 로브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잊고 싶지 않은 것이긴 했지만, 남에 의해 화자되고 싶지도 않았다.

"동병상련 일지도 모르겠군."

그 말을 끝으로 김현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림슨 로브는 덕분에 무슨 뜻이냐 물을 타이밍조차 잃고 말았다. 김현욱은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의 일행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마치 그의 말처럼 정말로 크림슨 로브는 동류의 냄새를 맡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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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레이]

* 언라이트 AU 주의

클라우드는 소녀가 그러한 지시를 내린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무감정한 눈동자를 가진 인형이었다. 대체 저의 기억을 본 뒤에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사실 인형에게 느끼는 동질감이라거나, 그런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만든 것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차이라면 소녀는 정말 말 그대로 인형 그 자체라는 점이다. 느낄 수 있는 것의 유무를 이야기하자면, 사실 자신도 본래는 소녀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 지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최근 클라우드는 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클라우드가 고개를 두어번 휘휘 저었다. 어쨌든, 지금은 그가 지시자라고 부르는 인형에 대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였든 소녀는 클라우드를 먼 지역까지 탐색에 내보냈다. 그것도 레이븐과 함께. 소녀가 본 클라우드의 기억 속에는 그가 있었을 터였다. 물론 대부분 레이븐이 존재했던 기억이었으나, 이번 기억은 조금 달랐다. 레이븐의 죽음이 담겨 있었으니까. 저 혼자 저만치 가버린 레이븐의 뒷모습을 보며 클라우드는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레이븐이 기억을 어느정도 되찾았는지 클라우드는 알지 못한다. 기억을 찾아주는 주체인 소녀도, 당사자인 레이븐도 유독이나 그의 기억에 대해서는 코멘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기억에 대해서 말하자면, 처음부터 레이븐이 있었다. 레이븐이 저를 알아보는 것으로 보아 레이븐도 그럴 것이라고 클라우드는 추측만 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건 당연했다. 루나 까지 합해서 세명의 호문클루스였다. 살아오면서 제대로 된 인간관계란 서로 밖에 없지 않았나. 레이븐의 첫 기억에는 분명히 자신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떠올려낸 것들은? 지금의 너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클라우드는 오른손을 펴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 식으로 레이븐이 찾은 기억의 갯수를 새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네개. 그리고 이내 침묵했다. 레이븐이 그제야 뒤를 돌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클라우드가 한참이나 멈추어 있던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까이 까지 올 때까지 레이븐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클라우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클라우드와 어느정도 가까워지자 레이븐이 다시 움직였다. 아무래도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 닿아 있던 푸른색 시선 또한 떼어져나갔다. 그것에 한순간 아쉬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으나. 클라우드는 말없이 앞서가는 레이븐을 따랐다. 이 탐색의 목적지는 오로지 레이븐만이 알고 있었다. 그것이 지시였고, 이 세게에서 전사로 살아가게 된 이상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레이븐이 멈춘 곳은 날카롭게 깎아 내려진 절벽 위였다.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호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레이븐에 어쩐지 클라우드는 다가갈 수 없겠다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떠올려보면 언제나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가장 가까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멀리는 아니지만 한 발자국의 간격이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자신은 들어본 적도 물은 적도 없지 않았나. 따지자면 끔찍할 정도로 미적지근한 관계였다…….

"클라우드."

레이븐이 먼저 불러온 것이 얼마만의 일일까. 근최근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클라우드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사실 간격은 더 넓었던 것이 아닌지. 대답이 없자 레이븐이 돌아 서 클라우드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클라우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슬픈 눈을 하고 있다. 저것이 무엇인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저가 죽기 얼마 전부터 저런 눈을 하고 있지 않았었나, 레이븐은. 클라우드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끔찍하게도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아가서 어째서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거냐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탁이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잊고 싶었지만 떠올라버린 기억이 생각나버려. 하고. 하지만 좋지 못한 말이 함께 나올 것이 뻔하기에 클라우드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클라우드."

레이븐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저의 표정을 살피는 모습과, 한번 더 이름을 불러오는 모양새가 대답을 독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맞춰주는 것 만으로 응수했다. 잠시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정적 사이를 바람이 갈랐다. 호수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꽤나 차가웠다. 결국 포기한 쪽은 클라우드였다.

"여기가 목적지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반응한 레이븐에, 클라우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하진 않지만 몇번 와 본 장소였다. 처음 왔을 때와 그 이후에도 검어서 기분 나빴던 호수였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호수 밑바닥의 사는 괴물을 처리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것의 숨통을 끊어 놓은 후에야 호수는 깨끗해졌다. 어째 그 때보다도 더 깨끗해진 듯 했다. 괴물은 계속 출몰한다고 하지만서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레이븐은 다시 클라우드에게서 멀어져갔다. 절벽 끝 아슬아슬한 위치에 멈춰서서 레이븐은 가만히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있었다. 바람은 멎었다가 다시 불었다가를 반복했고 클라우드는 굳이 레이븐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리와, 클라우드."

어느새 다시 생각에 잠겨 있던 클라우드를 레이븐이 불렀다. 고개만 돌린 채로 저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티 하나 없어서, 기억을 찾은 것이 아니라 되려 잃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클라우드는 영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븐의 옆에 서는 것이 어째서인지 어색했다. 클라우드가 어쩡쩡하게 자리 잡은 후에야 레이븐은 절벽 끝에 걸터 앉았다. 생전에도 레이븐은 이런 장소를 좋아했었다. 어느 경치가 보이든, 높은 곳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것을 즐기는 듯 했다. 클라우드도 따라 앉았다. 남이 본다면 기겁하며 당장 일으켜 세울지도 모를 만큼 위태로운 장소였지만 어차피 상관 없었다. 다시 죽어도 멀쩡하게 복구되 살아날 몸 아닌가.

그리고 어쩐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클라우드였다.

"탐색의 목적은 도대체 뭐였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대신 클라우드에게 주어진 것은 다른 것이었다. 클라우드는 눈만 두어번 깜빡이며 고개를 레이븐을 향해 돌렸다. 레이븐의 시선은 여전히 호수 근처에 고정된 채였다.

"내 죽음은 어땠어?"

그리고 이어진 말에 클라우드는 머리를 무언가로 세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머지않아 헛웃음이 나왔다. 어째서 알고 있냐, 에 대해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뻔했다. 인형. 아무런 감정없이 흔들흔들 거리는 인형의 짓이다. 말하지 않았으면 했다. 레이븐이 영영 알지 못했으면, 저의 마지막 기억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으면 했다. 레이븐은 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끝까지 클라우드를 괴롭혔던 사실도 그게 아니었던가. 레이븐은 한 수 위의 청년이었다.

"…이상한 세계지. 정작 본인은 모르는 죽음을 남이 알고 있으니."
"특이케이스라고 들었어."

레이븐은 클라우드의 말을 돌리려는 행동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끝내 저의 목적만을 관철시킬 확고한 태도다. 클라우드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클라우드에게 있어서, 레이븐의 죽음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또한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도 했다. 반절 가량 찾은 기억에 하필이면 그런 것이 끼어 있었으니, 앞으로의 일 따위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물론 지금 이렇더라도 나중에야 다르겠지만, 당장은 그랬다. 레이븐은 종종 이런 식으로 클라우드를 후벼파곤 했다. 자각이 있지는 않겠지만서도. 하지만 그럼에도 클라우드는 레이븐을 종종 상냥하다던가, 사려깊다던가 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사여구로 수식하곤 했다. 그 이유는 본인만이 알 터였다.

"이야기 하기 싫은거야?"
"그래."

그제야 레이븐이 고개를 돌렸다. 살짝 기울어진 채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워서, 이번엔 클라우드가 그것을 피해버렸다.

"그럼 하나만 대답해 줘."

이번에도 클라우드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내 의사로 죽은거지?"

레이븐이 이런 것을 물어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클라우드는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위안을 얻으려 한다면 이런 것을 묻지 않았어야 했다. 혹시 너는 아직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끔 클라우드는 레이븐에게 그를 상처줄만한 독설을 날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했다. 실천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리고 클라우드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차라리 그런 독설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것이다.

레이븐이 손을 뻗었다. 클라우드의 볼에 닿아온 손은, 기억 속의 그것과 똑같이 차가웠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굳이 그것을 떼어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계속 붙어 있어 주었으면 했다. 이유를 말하라면 못 하겠지만. 제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클라우드의 말문이 턱 막혔다. 생전, 자신의 실수는 명백했다. 그리고 늦은 뒤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후회를 했던가? 레이븐의 죽음에서 뚝 끊겨버린 기억은 그것까지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했을 것이라 클라우드는 확신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하여. 허나 지금 와서, 이런 이상한 세계에서 실천해본다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싶었다.

"……네 의사와는 상관 없이, 나는 끔찍할 정도로 싫었어."

결국 클라우드가 내린 결정은, 후회 할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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