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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렛 블랙로즈] 1967년 겨울, 보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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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이제야 익숙해져가는 옷장에서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 한 색의 목도리를 꺼냈다. 붉은색과 금색을 몸에 두른지 3년 째.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과 별개로 여전히 꺼려지는 색이었다. 뱀의 녹빛과 은빛을 두르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월이 호그와트에 몸 담은 세월보다 길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불만만 잔뜩 지닌 채 툴툴거리던 어린 아이는 이제 제법 조숙해져 투덜거리진 않게 되었지만, 받아들이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듯 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입학식 때에도 지난 입학식에 그랬던 것처럼 분류 모자를 보고 으르렁거렸더랬다. 남들보다 빼어난 척 하고 어른스러운 척 하지만 아직 13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사소한 것에 잘 삐지고 유치하게 구는, 그런 소년. 그래도 그 나잇대에 비해서는 제법 능숙하게 스스로 목도리를 맬 줄은 알았다. 라그렛은 거울을 보며 교복 매무새까지 정돈한 뒤에야 방을 나섰다.

  지루해 빠진 호그와트. 기대 이하로만 느껴지는 건 슬리데린에 가지 못했기 때문일까. 초록 뱀들의 틈바구니에서 홀로 툭 튀는 빨강. 대다수는 이제 신경도 쓰지 않는 풍경이었지만, 아직 학교부터 낯선 슬리데린의 신입생들에게는 그 이상으로 어색한 것이 또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라그렛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입에 넣은 사과 한 조각을 우물거렸다. 그나마 식사 시간은 괜찮은 편이었다. 지금처럼 슬리데린의 테이블 한쪽을 차지하고 앉을 수 있으니까. 아니꼬운 시선이 이따금 뒤통수에 꽂히곤 했지만, 라그렛 블랙로즈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소년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시선조차 비웃는 타입에 가까웠다. 아무튼, 먹을 것에 관심이 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슬리데린에 섞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식사 시간은 호그와트의 일정 중에서 유일하게 라그렛이 기다리곤 하는 시간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슬리데린과 함께 듣는 수업인 어둠의 마법 방어술 정도.

  "라그, 오늘도 여기 앉아있네."

  라그렛은 제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에 눈을 치켜떴다. 물론 그 눈빛은 상대를 확인하고 금세 누그러들었지만 말이다. 겨울의 눈을 그 안에 담은 듯한 새하얀 머리칼, 그 아래로 선연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 그 자체에 어울리는 슬리데린의 교복. 그리젤다 헤르메스 로페즈는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가 유독이나 잘 따르는 선배였다. 그의 손에 의해 엉망진창이 된 머리칼을 정리하며 라그렛은 멋쩍게 웃었다. 그리젤다는 라그렛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따금 누군가가ㅡ그 누군가에 해당하는 사람은 대부분 레버리 킹스턴이었고, 가끔은 스노우 그린필드였다.ㅡ 앉긴 했지만 보통은 비어있는 자리였다. 라그렛은 거리낌 하나 없이 옆을 내어주었다. 기묘한 동석. 근처의 신입생들은 더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멀리 떨어지는 아이들도 몇몇 있었다. 물론 그리젤다 또한 그런 걸 신경 쓰는 소년은 아니었고.

  "여기가 편하니까요."
  "같이 앉는 사람도 없으면서?"
  "앉으려고 하면 제가 내쫓는 거죠."

  사실이라면 사실이었고,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었다. 내쫓고 말고는 그의 기분에 따라 달랐다. 총애해 마지않는 슬리데린이라 하더라도 라그렛은 쉽사리 제 옆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마음이 맞는 친구나, 존경하는 선배가 아닌 이상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날에는 타인이 와 앉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런 날은 상당히 드물었다.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이미 라그렛의 주변은 불가침구역이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그 중심에 있는 라그렛 블랙로즈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서도. 허나 어떻든, 결국 라그렛은 그런 것 또한 신경 쓰는 소년이 아니었다. 사실상 가까운 이가 오더라도 그렇게 반기지만은 않았다. 혼자를 가장 편해했다. 그저 슬리데린을 친밀히 여기고, 그리핀도르를 거북해할 뿐.

  "뭐… 이런 얘긴 됐고. 다음 수업 뭐야?"
  "어둠의 마법 방어술이요."
  "그럼 슬슬 보가트 수업을 할 땐가."

  끝끝내 눈앞의 음식들에 완전히 흥미를 잃고만 라그렛이 그리젤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보가트는 아직 책에서만 본 적 있는 생물이었다. 보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변한다고 했나. 어린 시절, 처음 보가트에 대해 알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정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머릿속을 뜯어볼 수라도 있나. 그렇다면 연구할 가치가 있는데. 생물이 레질리먼스를 쓰는 게 가능하기라도 한 건가. 그런 류의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깊게 고민하기에는 금방 흥미를 잃고 마는 소재긴 했지만은. 대처법이 있고, 그게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면 이용 가치는 사실상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왜요?"
  "그냥.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기 딱 좋은 수업이니까, 잘 익혀두라고."

  리디큘러스.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리젤다는 소리 없이 읊조리곤 품 안의 지팡이를 휘둘렀다. 라그렛은 잠시 불편한 표정을 했다가도 금세 풀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이 지나치네요, 선배."

  입꼬리를 올려 짓는 미소는 어쩐지 그리젤다와 닮아 있기도 했다.



05.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정확히는 별로 흥미도 없다는 듯이 반응했던 라그렛이, 똑같은 소재로 그리젤다를 찾은 건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다. 보가트 수업을 마치고 온 라그렛은 그리젤다의 앞에서마저 영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선배는 보가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울 질문에 그리젤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쉬이 입을 열었다. 그는 총애하는 후배가─그리핀도르에 들어갔다는 점만 제외하자면─ 왜 그런 것을 묻는지 궁금해했다. 나이에 걸맞게 겁에 질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런 건 라그렛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내 그리젤다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서워서 그래?" 질문의 답과는 다른 것을 입에 담았다.
  그리젤다 헤르메스 로페즈는 3학년의 어둠의 마법 방어술 수업, 연례행사처럼 항상 하곤 하는 보가트와 관련된 수업에서 말도 안 되는 것을 보았다. 바로 자기 자신의 시체였다. 아직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젤다는 그것에서 불쾌함밖에 느끼지 않았고, 금세 생각 한 켠에서까지 지워냈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미뤄두었다. 그러니 라그렛에게 해줄 충고 또한 그 선에 머물렀다. 역으로 던진 제 물음에 고개만 젓는 라그렛을 보며 그리젤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또한 말도 되지 않는 걸 보았나.

  "솔직히 나는 그게 왜 내 보가트인지도 모르겠는데. 넘길 수만 있으면 그거로 된 거 아닌가."
  "……그런가요."
  "너도 모르겠으면 크게 신경 쓰지 마. 알았지?"

  한겨울의 눈이 내려앉은 듯 새하얀 머리칼 아래의, 새파랗게 빛나는 눈이 웃었다. 라그렛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의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만족스러운 답을 내어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02.


  샛노란 눈동자에 위협적으로 덜컹거리는 옷장이 담겼다. 소년은 기계적으로 그것의 정의를 머릿속으로 읊었다. 보가트. 옷장이나 침대 밑 같은 어둡고 좁은 곳에 숨어 사는 생물로, 어떤 모양으로도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괴물이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모습으로 변하여 겁을 주는 습성이 있다. 라그렛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보가트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는 리하르트 오스본을 보았다. 설명이 끝나면 한 명씩 보가트를 보게 해 리디큘러스를 쓰도록 하는 간단한 테스트를 한다지. 라그렛은 책상에 턱을 괴었다. 그 눈은 금세 지루함에 잠겨들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T를 받은 성적표? 농담처럼 그리 생각했으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건 자존심이 상하는 거지, 두려워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도대체 뭘 보게 될까. 깃펜의 깃털을 만지작거리며 라그렛은 그리핀도르의 누군가가 첫번째로 이름이 불려, 옷장 앞에 서는 것을 보았다. 옷장이 벌컥 열리고, 새까만 무언가가 점점 뚜렷한 형태를 취해갔다.



04.


  "기분이 별로인가 보네요."

  라그렛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보라색 눈이 저를 응시했다. 눈을 깜빡이던 라그렛은 고개만 휘휘 저을 뿐이었다. 레버리 오르페우스 킹스턴은 라그렛이 가까이하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당연히 소속은 슬리데린. 녹색과 은빛이 퍽 잘 어울리는 킹스턴 가의 도련님. 그는 좋은 라이벌이었고, 라그렛이 거리낌 없이 대하는 친구였다. "거짓말." 짓궂게 웃는 얼굴을 보며 라그렛 또한 하릴없이 웃고 말았다. 어둠의 마법 방어술은 좋아하는 수업이었다. 수업 자체의 호감도 컸으나, 슬리데린과 함께 듣는 수업이기에 그러했다. 보가트에 대한 수업이 끝나고 난 직후, 저녁. 대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 레버리를 마주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긴, 별로일 만도 하죠."
  "신경을 긁을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왜죠?"

  긍지 높은 블랙로즈의 도련님이 겨우 보가트를 퇴치하지 못했다는 건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일 텐데. 레버리는 낮게 웃었다.

  "그러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네. 별로인 건 사실이지만."
  "리디큘러스까지는 성공했으니까 그런 걸지도 모르죠."
  "그런 번거로운 생물은 질색이야. 마주칠 일도 없을텐데."

  힘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라그렛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가트를 퇴치하기 위해선 두 가지 작업이 필요하다. 첫째로, 리디큘러스를 사용해 보가트를 시전자가 상상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만들 것. 둘째로, 웃음 소리를 내 보가트를 쫓아낼 것. 첫 번째는 순조롭게 했으나─비록 의문에 빠졌긴 했지만─ 두 번째는 무리였다. 라그렛은 도저히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없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까스로 생각해내긴 했지만, 아무튼 그건 절대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웃을 수도 없지. 잠시 회상에 잠겼던 라그렛은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글쎄요.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아나요, 라그?"
  "불길한 소리 하긴."

  심란한 표정을 지은 채로 라그렛은 고개를 돌렸다. 보가트의 실수라고 생각해야 할까. 그것도 생물이라면 생물이니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이해가 되긴 했지만, 글쎄.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것을 행한 주제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구는 친우를 보고 있자니 저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냥 가볍게 넘길 수 있을 만한 것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넘길 수도 없고 가볍지도 않으며 말이 되지 않는다.

  ……도통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06.


  그로부터 일주일 후,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실. 라그렛은 처음으로 교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마냥. 리하르트 오스본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학생도 아닌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가. 그는 그리핀도르에 아주 드물게 나타나곤 하는, 자신을 언짢아하는 학생이었다. 머글 태생이라는 이유로. 그것과는 별개로 어둠의 마법 방어술은 좋아하는 과목인지 항상 열심히 임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기묘할 정도로 공과 사를 잘 분리하는 소년. 나이에 맞지 않는 모습이다. 소년이 블랙로즈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리하르트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사실 최근 들어 리하르트는 사적인 이유로 라그렛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로 인해 기묘한 조합 하나가 탄생했으므로.

  "무언가 용건이라도 있나요, 블랙로즈 군."
  "……질문이 하나 있어서요."

  작은 한숨 소리가 대답에 이어졌다. 역시, 기꺼운 태도는 되지 못했다. 표정에서부터 당신에게 무언가 묻는 것 자체로 자존심 상한다는 티가 풀풀 풍겼다. 자연스레 호기심이 인다. 머글 태생이라는 이유로 주력 과목의 교수님을 달가워하지 않는 그가 과연 무엇이 궁금해졌길래. 지금처럼 단둘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불편할 소년일 터. 그런 예상이 빗나가진 않았는지 라그렛은 괜히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불편함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톡톡톡. 검지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꽤 빨랐다.

  "보가트."
  "음?"

  리하르트는 눈을 깜빡였다. 그 입에서 나온 단어는 꽤나 의외였고, 어느 면에서는 납득이 가기도 했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의 보가트.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사실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그의 보가트를 보고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으레 13살의 아이들이 그렇듯 금세 잊어버렸겠지만. 하지만 당사자는 잊지 못하는 것이겠지. 라그렛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보가트가, 보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도 변하나요."
  "그건 블랙로즈 군이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던가요?"

  라그렛은 그 되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못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고의로 말을 무시했다. 대화를 길게 끌 생각도 없다는 듯이. 리하르트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보가트를 마주한 라그렛은 확실히,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스러워했지. 불쾌하게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리하르트는 이번에도 라그렛이 별로 원하지 않을 물음을 입 밖으로 내었다.

  "다른 걸 먼저 이야기해볼까요. 블랙로즈 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무엇이죠?"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그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단언하는 이유는요?"

  말문이 막혔다. 찾지 못한 답 중 하나였다.

  "블랙로즈 군, 사람에게는 내재된 공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인은 모르지만 속으로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거죠."
  "보가트가 틀리지 않았다는 말씀이신가요."

  온색을 띠고 있음에도 어딘가 차가운 샛노란 눈동자가 날을 보였다. 리하르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상대는 아직 13살짜리 어린아이였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이유로 자신을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별개로, 학생에게 현실을 직시시켜 주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었기에.

  "글쎄요. 만약 틀렸다면 학계에 보고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가트가 실수를 했다고. 만약 진짜로 그 모습이 블랙로즈 군이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라면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블랙로즈 군이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이 뭔지 모른다면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물론 블랙로즈 군이 보가트를 마주한 순간, 보가트가 변한 모습은 제가 보기에도 꽤 놀랍긴 했습니다만……."
  "여기까지 하죠."

  라그렛은 리하르트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동자 속에서 날카롭게 벼려졌던 칼날은 어느샌가 시선의 끝을 향해 명백한 경멸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보가트가 변한 모습을 떠나, 그 모습을 교실에 있는 전원이 보았다는 것을 더 끔찍해 했다. 라그렛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고, 리하르트는 되려 웃음으로 응수했다. 애초부터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그 모습이 자신이 두려워하는 모습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라그렛은 부러 큰 소리를 내며 혀를 찼고, 뒤돌아 교실 문을 향했다.

  "아참, 블랙로즈 군."

  마찬가지로 라그렛은 대답하지 않았다.

  "멘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꾸어도 괜찮습니다. 언제든 말해주세요."
  "……그정도는 알아서 합니다. 신경 끄시죠."

  큰 소리를 내며 교실의 문이 닫혔다. 한참 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느리게 눈을 꿈뻑이고는, 뒤늦게 수업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03.


  덜컹거리는 소리가 시끄럽다. 이름이 호명되어 나온 라그렛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느릅나무 지팡이를 들었다. 느릅나무, 용의 심줄. 블랙로즈이자 순혈이라는 긍지의 상징. 그런 이유로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제 지팡이를 좋아했다. 샛노란 색, 예리한 눈빛은 당장에라도 무언가가 튀어나올 듯 살벌한 기세를 내뿜는 옷장을 꿰뚫었다. 이윽고 지팡이의 끝을 향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리디큘러스. 쉬운 주문이 아닌가. 그저 무엇으로 변할지 궁금할 뿐. 무엇을 보더라도 겁에 질리진 않겠지. 그리 생각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가 아닌, 정말로 순수하게 그리 생각하기 때문에.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옷장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튀어나오고, 소용돌이 치는 모습과 함께….

  …?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놓여진 것은 줄기에 가시가 돋친 검은 장미 한 송이였다. 그저 한 송이가 덩그러니. 잠시 그대로 굳어있던 순간 또 한 번 소용돌이가 치고, 장미가 불어났다. 두 송이, 네 송이. 이윽고 아찔한 장미 향을 내뿜는 검은 장미의 정원으로.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 하며 헛웃음을 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속으로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까지 내었을지도 모르겠다. 라그렛은 이를 악물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도저히 열릴 생각을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리디큘러스!"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소리, 그리고 시들어가는 장미들. 빛도 수분도 받지 못해 바싹 말라 비틀어지는, 흉한 모습. 보가트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리디큘러스를 사용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 뒤 웃음소리를 내 쫓아내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걸 보며 어떻게 웃을 수가 있겠느냐고. 이게 어째서……. 라그렛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