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원래 이렇게 맨날 날씨가 꿀꿀한가?"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였지만 마틴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괜히 옷에 묻지도 않은 물기를 털어내는 척 하며, 릭은 건물 외벽에 기대어 섰다. 대꾸가 없자 그의 생각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마틴은 들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틴의 관심사는 제 품에 잔뜩 안은 책들에만 쏠려 있었다. 영국은 책을 보관하기에 썩 좋은 나라는 아니었다. 섬나라이기도 했고, 그의 말마따나 특유의 비가 잦고 안개가 자주 끼는 기후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평범한 책은 필연 이리저리 트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마틴 챌피는 책을 꼭 사서 봐야 하는 성미의 사람이었다. 영국에서 사는 것 치고는 책 관리를 그럭저럭 잘한다고 생각하는 축이기도 했고.
"…돌아온 이후부터 맑은 날씨를 본 적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인데."
이쯤 말을 시키면 대꾸해주겠지. 그의 생각 속 목소리를 듣고 마틴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고의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최근 부쩍 만남이 잦아진 상대였다. 하지만 이 마주침은 분명히 고의가 맞을 것이다. 마틴은 흘끔 시선만 돌려 릭을 바라보았다. 당연하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뭘 저리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나, 싶다. 대놓고 대답을 원하고 있다는 눈치였다. 이쯤 되니 정말 마틴도 그의 말을 무시하고만 있기는 힘들었다.
"원래 짓궂은 날씨로 유명한 나라죠."
그것도 모르고 여행 오셨어요, 하는 덧붙임은 목 뒤로 넘기고 마틴은 무심하게 비 오는 거리로 눈을 돌렸다. 애초에 몰라서 던진 말이 아니라 딱히 시킬 말이 생각 나지 않았던 것이었을 게다. 점점 더 세차게 쏟아지는 비에 마틴은 괜히 품 안의 책들을 더 세게 끌어 안았다.
공적인 자리에서의 릭 톰슨은 굉장히 호감을 불러 일으키는 인간이었다. 언변이 능했고 심지가 올곧으며, 자기 주장이 강력하면서도 경청의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반적으로 유능했다. 여행 중 우연히 작전에 참가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사적으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마련이라는 듯. 사실 맞지 않는 상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짝을 만난 양 잘 맞는 축에 속했다. 이따금 벌어지는 이러한 갑작스러운 만남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허나 그의 입자에서 생각해보면, 그저 순수히 친해지고 싶다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마틴이 마인드 리더임을 알고 있는 그 인지라 최대한 생각을 삼가고 있는 듯 했으나, 사람이 생각을 완전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가끔 마틴은 그에게서 저에 대한 관심을 읽어내곤 했다. 굳이 이렇게 심드렁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고, 그래오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그리 기분이 좋지는 못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마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요? 타키온."
"그냥 저녁이나 한 끼 같이 먹자고 찾아왔소."
저의 어디가 그의 호감을 이 만큼이나 산 것일까. 필요한 사람에 한해서는 생각을 읽고 마음을 조종하여 강제로라도 호감을 형성해 온 마틴이었으나 아직 그에게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본래 타인의 호감을 쉽게 하는 편이긴 했으나, 그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대놓고 호감을 보여 왔기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와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마틴에게도 충분히 그럴 의향이 있었지만 그는 이따금 릭에게서 저도 모를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내가 릭 톰슨이오, 하면 십중팔구 누구든 같이 먹어 줄 터인데요."
"농담이 심하군, 어트랙티브. 그쪽이야말로 attractive가 아니오?"
비아냥이 섞인 말이 아니라 순수한 농담임을 릭도 알고 있기에, 그 또한 말장난으로 받아쳤다. 결국 마틴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짐이 너무 많은 걸요."
"집에 들렸다 가면 되는 일 아니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포탈이 눈앞에 나타났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어차피 식전이었고, 이 이상으로 안전하게 책을 집으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만남은 잦았으나, 깊은 대화는 없었다. 누가 알까, 그러다 보면 그에 대한 알다가도 모르겠는 거부감도 사라질지. 그렇게 된다면 마틴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책이 꽤 많군."
마틴의 집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을 보며 릭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잠시 들렸다 가는 것이라도 해도 비 오는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기에 안으로 들인 것인데, 그 사이를 못 참고 릭은 집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번에 사온 책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마틴은 그의 옆에 섰다.
"수에 비해 읽은 건 적지만요."
"하기야 전쟁 중이니까. 책 읽을 시간이 날 리가 없겠군."
그것이 참 아쉬운 점이었다. 보고 싶은 책이 생기면 일단 사기부터 하는데, 덕분에 읽지 못한 책 위에 또 새 책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적게나마 주어지는 휴일 때마다 밖으로 나도는 것 대신 집에서 조용히 독서 시간을 갖곤 했으나, 책을 사오는 속도를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올려 놓았던 책을 한 권씩 빈 책장에 꽂으며 마틴은 이러다가는 전쟁이 끝나면 한 1년 동안은 종일 책만 읽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서도 릭의 생각에서는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을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고 싶은 게 있으시면 언제든 빌려 드릴게요."
그런 생각을 읽어낸 건 아니지만, 굳이 읽지 않아도 그런 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책을 모두 꽂은 마틴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는 나중에, 하고 대꾸했으면서도 손을 뻗어 책 한 권을 꺼냈다. 펼쳐서 느릿한 속도로 책장을 넘기는 손이 꽤나 조심스럽다. 미국에서는 오래 전에 절판 된 책이라는 모양이다.
"타키온."
저를 부르는 소리에 한참이나 책에 몰두하고 있던 릭이 고개를 돌렸다.
"저녁, 먹자면서요."
"…본 용건을 잊을 뻔 했군."
릭은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훑고 있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았다. 책에 관심이 깊은 건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어디 생각해두신 곳 있어요?"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곳이라는 걸 읽어낸 마틴은 릭이 포탈을 열자 갑작스레 자리를 피했다. 릭은 고개를 갸웃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릭의 곁으로 돌아온 마틴은 검은색 장우산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마틴의 손에도 비슷한 것이 들려 있었다. 릭은 픽 웃어버리고 그것을 받았다. 빛을 발하던 포탈이, 천천히 꺼져 갔다.
그가 마틴을 이끌고 찾은 곳은 그닥 고급스럽지도, 그렇다고 싼 티가 나지도 않는 평범한 레스토랑이었다. 가끔 마틴이 재단의 일 때문에 만나곤 하는 인사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곳을 찾곤 했는데, 사실 마틴에게는 이 정도의 음식점이 딱 적당했다. 비 때문인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고, 은은히 낯익은 노래의 멜로디가 들려왔다. 제법 마음에 드는 분위기였다. 음식 맛도 나쁘진 않고.
"사실은 말이지, 날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 줄 알았다오."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 갑작스럽게 릭이 꺼낸 말에 마틴은 고기를 목 뒤로 넘기지도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법 멍청한 표정일 터다. 금방 마지막 고기 한 점을 삼키고, 마틴은 되묻는 것 대신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시선을 피하기도 하고. 남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조금 무뚝뚝하게 구는 것 같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리 끈질기게 쫓아다니셨어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마틴은 공식석상에선 차별이나 편애를 두지 않는 사람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까지는 조금 힘들었다. 그의 관심을 무의식적으로 피해온 건 사실이다. 이유는 그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담스러워서 였다. 저를 들여다 보는 눈이. 마틴이 거부반응을 일으킨 부분은 그대로 속내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이 깊어지곤 하는 눈동자였다. 그는 읽는 사람이었지, 읽히는 역할은 아니었다. 물론 릭이 실제로 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리는 없겠으나 그 감각이라는 게 마틴에게는 굉장히 낯설었다.
"오늘만 해도,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찾아오신 거잖아요. 어딜 봐도."
"너무 티를 냈나."
릭이 작게 혀를 찼다. 어쩐지 한 발자국 앞서다가, 또 뒤쳐졌다가를 반복하는 기분의 대화였다. 어차피 그와는 일로도 자주 마주칠 사이고, 호감이 있는 건 마틴도 마찬가지였으니 사소한 오해는 불필요했다. 저가 그를 묘하게 피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 정도면 솔직하게 말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틴은 들고 있던 포크로 릭, 정확히는 그의 눈을 가리켰다.
"당신 눈이 말이죠."
릭은 당연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내 눈이? 하고 되물으며 그는 가만히 마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절 들여다 볼 때마다 제가 아니라 당신이 마인드 리더인 기분이 들어요."
그대로 턱을 괸 채로 마틴은 영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그러니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 말에 반응하듯 오히려 릭은 마틴을 더 노골적으로 들여다봤다.
게다가 그는 저를 마주하고 있을 때마다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속 모를 표정으로 생각도 없이 쳐다보니, 마틴으로서는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눈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않소."
릭은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기사, 의도한 게 아니라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마틴 저가 괜히 찔려서 유독이나 더 예민하게 구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사실, 그의 눈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자면 부담은 둘째 치고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럼 이렇게 할까, 챌피."
그러고 보니 호칭이 변했다. 어차피 그런 문제에 까칠하게 연연하는 마틴은 아니었으나.
"앞으로 지속적으로 만나보는 거. 물론 사적으로 말이오. 지금처럼 식사도 같이 하고, 같이 책도 읽고. 어떻소?"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자주 만나다 보면 거부감이 덜해질지도 모르지 않소."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저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고, 그와 저는 나름대로 얼추 잘 맞는 편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사석에서는 다소 장난기 있었고 의외의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했지만, 여행이 취미라는 것과 결부시켜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성격이었다. 이런 사석에서의 모습이 조금 더 그 답다는 생각이 있다.
"친구 하자는 뜻인가요?"
그의 말에 릭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그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틴이 저를 읽는 것을 의도한 듯 릭이 어깨를 으쓱한다. 마틴은 결국 그냥 작게 웃어버리며 어느 정도 와인이 남아 있는 잔을 들어 그에게로 향했다.
"뭐, 좋아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릭."
릭은 대꾸 대신 제 잔을 들어 가볍게 마틴의 잔에 부딪혔다. 쨍, 하는 소리가 제법 듣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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