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때와 같은 오후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추웠고, 이렌드는 평소에 하고 다니던 것보다도 더 두꺼운 목도리를 하고 나왔다. 언제였던가, 동생들이 직접 떠서 주었던 것. 옷걸이에 걸어둔 그것에 시선을 잠깐 두다가, 금방 거두어냈다. 시선은 시계로 옮겨졌다. 퇴근 시간이 얼마 안남은 시점이었다. 이렌드는 당장 눈 앞에 놓여있는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꽤 많이 남았는데. 집에 가져가서 해야 하나. 제 양 미간 사이를 두어번 꾹꾹 누르다, 이렌드는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손이 차가웠다. 집중력이 흐려져서야 깨달은 것인데, 비서실에는 딱히 난방을 틀어놓지 않은 상태였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이렌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해주어야 할 서류가 몇 장인가 있었다. 그것을 챙기고, 시선은 이내 벽에 걸려있는 달력에 닿았다. 12월 24일. 두어번 눈을 깜빡이던 이렌드는 이내 달력에서도 시선을 떼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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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제 앞에 내밀어지는 서류 뭉치를 받으며 가현은 흘끔 이렌드를 쳐다보았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인데도 일인가. 하기사, 매번 이랬다. 관계가 변한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진 않았다. 참으로도 독한 워커홀릭이라 항상 생각하지 않았던가. 딱히, 그것에 불만은 없다. 그저 제 몸을 챙기지 않을까봐 그것만 걱정일 뿐. 내일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지 이렌드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받았으니 이제 가봐." 허나 그 말에 어째선지 이렌드는 요지부동이었다. 가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두어번 달싹이던 입술이 살짝 타이밍을 잃고 나서야 열렸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네가 모르는 내 일정도 있던가."
"내일은요."
"딱히."
그럼 됐어요. 그리 말을 끊어버리자, 가현은 책상에 턱을 괸 채로 빤히 이렌드를 쳐다보았다.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는 것은 여전하다. 검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니, 그 소리를 신경쓰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이내 이렌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였으면 그냥 그것으로 말을 하고 말았을텐데. 굳이 이리 뜸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끔 이렌드는 이리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그것이 충분히 그 다운 일이긴 했으나. 탁, 탁.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뜸해질 때 쯤 이렌드는 하지 못하고 있던 말을 뱉어냈다. 했다, 보다는 뱉어냈다에 가까웠다.
"오늘 퇴근 같이 할래요?"
나 조금 일찍 할건데. 가현은 제법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워커 홀릭이 어쩐 일인가, 싶었다. 일을 빨리 끝내기라도 했나? 그나저나 얼굴이 조금 창백한데. 아무래도 오늘도 일하느라 난방 트는 것을 까먹은 모양이었다. 저가 찾아가서 켜주기라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최근. 가현은 잠시 대답 없이 이렌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이렌드는 그제야 얼굴을 조금 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30분 정도면 충분하죠?"
"아마도."
"그럼, 주차장에서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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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어쩐 일인가 싶다. 딱히 특별한 날도 아니고. 속된 말로는 빨간날일 뿐인데다가, 저랑은 평소에도 맨날 보지 않는가. 그래서 이런 날에는 그리 아끼는 동생들과 보내라고 따로 약속을 잡지 않는 편이었다. 이렌드도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는 듯 토를 달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이렌드가 기념일에 먼저 약속을 잡아온 것은 처음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기념일은 챙기지 않는 편 아니었던가. 챙기더라도 약소한 선물 정도로 끝나곤 했고.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도통 알 수 없는 일이다.
"됐다."
한참을 제 집 TV 앞에서 꼼지락거리던 이렌드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가현이 앉아있는 소파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꺼져 있던 TV를 리모콘으로 키고, 버튼을 몇 번 꾹꾹 눌렀다.
"겨우 TV나 보자고 데려왔어?"
"…딱히 할 게 생각이 안 나서. 밖으로 나갈순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겨우 TV라니. 그냥 TV는 아니거든요."
그래봤자 영화 아닌지. TV 화면에 띄워지는 영화의 시작부분을 보며 가현은 조금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도 이정도가 어딘가.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라 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야 제 탓이니, 저가 무어라 할 처지는 안되었다. 이렌드가 그닥 불만을 가지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이렌드는 어쩐지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는 그대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영화 몇 편이 연속해서 나올 거라는 것이다. 그렇게 설정을 해두었으니까. 나름대로 영화 고르는데에 시간을 많이 썼는데.
─는, 사실 별 쓸모 없는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같이 저녁을 먹은 게 애초에 늦은 시간이었으니. 두편 째의 영화가 반 쯤 지날 때 즈음, 가현은 이미 반 쯤 잠에 취한 채였다. 그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기에 이렌드는 그냥 속으로 픽 웃을 뿐이었고. 참, 여러 의미로 칼같은 사람이다. 이럴 때에는 생체 시계가 조금 고장나도 좋을텐데.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가현의 어깨를 조금 끌어당겨 그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 이렌드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솔직히 이럴게 뻔하지. 그래서 세번째 정도 부터는 제 취향만 가득 묻혀서 영화를 정해놓았더랬다. 그 전에는, 그냥 루즈한 드라마 같은 것들. 그래서 더 졸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도 잠이 오는 기분인데. 이렌드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보니 이제 정말로 크리스마스인데. 이렌드는 잠들어있는 가현에게 툭 기대어, 작게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중얼거렸다. 닿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