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게 된 기억 속, 그곳에는 곁에 존재하지 않는 네가 있었다.
첫 번째 기억을 되찾은 후로, 에바리스트는 한참이나 사색에 빠져있었다. 탐색에 나갈 때마다 몇 번이나 봐왔던 사람. 기억을 찾기 전 조차 신경이 쓰였던 단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빛나는 얼굴로 에바리스트에게 검을 향했고, 에바리스트는 망설임 하나 없이 그 검을 맞받아 쳤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요마들보다 조금 더 성가실 뿐, 금방 처리할 수 있는 상대였지만. 에바리스트는 그의 시신을 보면서 몇 번이나 이상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바로, 그 시신을 수습해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단 한 번도 그것을 행한 적은 없었으나.
─하지만 기억 속의 그는 그렇게 약해 빠진 사람이 아니었다. 뒤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기억을 찾은 후의 에바리스트는 그의 형상을 베어나갈 때마다, 어째서 그가 이렇게 약해빠진 환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곤 했다. 하기사, 이 이상한 세계의 환영은 아이자크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일 때도 있었고, 언젠가 스쳐지나 간 적 있는 듯 한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머지않아 인형과 전사들이 휴식하는 인형의 여관으로, 인형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 아이자크 로스바르드 만은 아니었다. 기억을 찾고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의 형상도 기억을 찾기 전 만큼 해치웠다. 하지만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번은 인형에게 물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인형은 자기도 모른다면서, 어깨를 으쓱 했었다. 전사들의 출입을 관리하는 어콜라이트가 보여주는 카드에도 그의 모습은 없었다. 또 다른 어콜라이트가 관리하는 상점에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인형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에바리스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저쪽이야, 에바리스트."
길었던 탐색을 마치고, 인형은 에바리스트를 이끌고 깊은 숲속으로 들어섰다. 평소의 탐색하던 지역과 별반 다른 없는 풍경이었으나, 어딘가 드는 음산한 기운에 에바리스트는 주변을 잔뜩 경계했다. 인형이 이끄는 곳에는 언제나와 같은 요마들이 있었고, 여느 때처럼 가볍게 처리하고 다음 지역으로 넘어갔다. 인형은 지시자, 인도자라는 이름에 맞게 그 모습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인형은 말이 없었다. 말없이, 이따금 그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에바리스트를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에바리스트는 그저 기분이 좋지 않은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로 했으나.
"미리 이야기 해둘게."
문득 앞서가던 인형이 멈추어 섰다. 힐끔 에바리스트를 뒤돌아 본 인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바리스트는 대꾸 없이 그런 인형을 쳐다보기만 했다.
"네 기억 속에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평소 탐색에서도 자주 만나지 않았었나."
인형이 꺼낸 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성유계라 불리는 세계, 그중에서도 쉐도우랜드 불리는 대륙에서는 그의 환영을 잦은 빈도로 볼 수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우습게도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의 환영을 베어나가는데 익숙해지고 있는 참이었다. 기억 속에서, 자신에게 말을 붙혀오고, 웃고, 친근하게 굴었던 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그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에바리스트는 종종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아니… 우리 바인더에 올 거라는 소리야."
인형은 여관 안의 전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를 바인더라 부르곤 했다. 에바리스트는 의식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인형을 바라보았다. 인형은 인형이기에, 거짓말은 할 줄 모른다. 그저 저의 어머니라 부르는 성녀의 뜻에 따라 전사들을 인도하고, 그들의 기억을 찾아줄 뿐이었다. 전사들을 새로 데려오는 것도, 누구를 데리고 다닐지도, 누구의 기억을 찾아줄 지도 물론 인형의 결정이긴 하였으나.
"전사의 기억을 찾는 데에는 조각이 필요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첫 번째 기억일 때의 이야기고, 두 번째 기억부터는 전사에 맞는 짝이 필요하지. 네 짝이 바로 아이자크인거고."
에바리스트는 그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찾은 기억 속, 유일하게 시야 속에서 살아 숨 쉬던 것이 아이자크였다. 아직 생전의 기억중 극히 일부밖에 찾지 못했지만, 그 없이는 모든 기억이 완성될 수 없을 것이라 에바리스트는 생각했다.
사례는 많았다. 종종 탐색 장소에서 다른 전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꼭 에바리스트가 인형과 함께 나가지 않더라도 다른 전사들과 함께 나간 탐색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아이자크도 그런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에바리스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 빠른 보폭의 걸음을 저지한 것은 인형이었다. 인형은, 어느 때와 같은 무감각한─ 하지만 어쩐지 불안한 눈동자로, 그것은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에바리스트의 옷깃을 잡고 있었다.
"…달라, 그를 쓰러트리고 데리고 와야 하는 거야. 에바리스트."
에바리스트는 잠시 말없이 인형을 주시했다. 그리고 금방 그런 경우도 있는 것이겠지, 하고 납득했다. 고약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기사, 기억을 빼앗고 그 기억을 다시 찾게 하는 성녀의 취향은 처음부터 고약하다 생각하지 않았던가. 짧게 괜찮다, 하고 대꾸한 에바리스트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형이 불안해 한 것은 '에바리스트'가 '아이자크'를 베고, 그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인형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앞에서 에바리스트가 만날 아이자크가, 어떤 아이자크인지를. 하지만 도저히 입이 떼어지지 않아서, 그저 청년을 따라 길을 걸을 뿐이었다.
*
눈앞의,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환영을 쏘아 죽인 에바리스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환영이 자신의 기술을 따라 하지는 않았지만, 유독이나 총을 들었을 때의 행동 패턴이 자신과 똑같았기에 번거로운 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겹쳐 보기라도 하는 것일까. 에바리스트는 물끄러미 사라져가는 환영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슬슬 익숙해질 만 하지도 않았나. 그럴 만큼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가. 에바리스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형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느낀 에바리스트는 인형을 향해 외쳤다.
"오지 마!"
그리고 에바리스트와 인형 사이 지면을 총알에 뚫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인형은 뒤로 주춤 하고 뒷걸음질 쳤다. 감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본능은 있는 것인지. 에바리스트도 집어넣었던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풀린 몸에 긴장을 했다. 그리고 풀숲에서 나타난 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금발이었다.
"…에바?"
하지만 그의 시선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환영에 먼저 가 닿았다. 그리고 그 환영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혀 불렀다. 기억 속의 아이자크도, 자신을 에바, 하고 불렀었다. 눈앞의 아이자크는 아마도 저 환영을 자신이라 생각하고 따른 것일 것이라. 빠른 상황 판단을 마친 에바리스트는 총을 집어넣었다. 아마 그도 환영을 만났을 것이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자…!"
그리고 에바리스트는 반사적으로 검을 꺼냈다. 공격은 아이자크가 먼저 한 것이었다. 마주친 벽안은 무시무시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연한 것인데, 왜 이것을 먼저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이자크가 따른 에바리스트는 저 환영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을 환영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거친 숨소리에 에바리스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아이자크의 환영이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에바가, 에바를?"
그리고 이내 아이자크는 허탈한 웃음을 뱉어냈다.
"아아… 넌 에바가 아니지. 에바가 아니야. 에바는, 에바는…!"
에바리스트의 검을 튕겨낸 아이자크는 빠른 속도로 다시 에바리스트에게 접근해 검을 휘둘렀다. 이내 작은 비웃음이 에바리스트의 귓가에 들려왔다.
"젠장, 환영 주제에! 가시나무라도 써보지 그래?"
눈앞의 아이자크는, 말도 할 줄 알았지만 동시에 기억까지도 갖고 있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을 따라오는 에바리스트가 진짜 에바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른 아이자크는 품속에서 총을 꺼내 그를 겨냥했다. 이 세계서 만난 에바리스트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기억도 없었고, 말도 하지 못했다. 기억 속 에바리스트의 기술도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 지금 분노하고 있는 것은, 그저, 일종의 화풀이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에바리스트였다. 말을 붙히고, 그 말에 반응 해 주었던 에바리스트였다. 그런데 어째서, 심지어 그 에바리스트를 죽인 자 마저 에바리스트여서 아이자크는 혼란스러웠다. 에바리스트. 에바리스트. 에바리스트. 에바, 에바. 몇 번이고 속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아이자크, 진정…!"
눈앞의 에바리스트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리고 아이자크가 눈치 채지 못한 순간, 가시나무가 아이자크의 팔을 잡았다. 아이자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하, 하는 헛웃음을 쳤다.
환영은 옛날의 기술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에바?"
아이자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에바, 정말로 에바…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정말로, 에바?"
"…미안하지만 지금은 잘못을 사과할 시간조차 아까워, 아이자크."
그리고 아이자크의 검이 멈춘 순간 에바리스트의 제국검이 아이자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눈을 크게 뜬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를 쳐다볼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모양으로 에바, 하고 부른 순간 에바리스트는 총을 꺼내들어 이미 꿰뚫려진 심장을 조준해 쐈다. 아이자크는 그 총알까지 맞고 나서야 앞으로 고꾸라졌다. 에바리스트는 그런 아이자크를 지탱해 섰다. 옅은 숨결이 옷을 뚫고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그리고 에바리스트는 더 이상 그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
잔인하다, 라고 생각했다. 환영이 아니었다. 진짜 아이자크였다. 시신은 사라지지 않았고, 인형은 그 시신을 데리고 인형의 여관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에바리스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시신을 들쳐 업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자크의 피는 에바리스트의 옷을 적셨고, 에바리스트는 지금 자신이 한 짓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아이자크를 죽였다. 아이자크와 함께하기 위해서, 아이자크를 죽였다. 자신의 기억을 위해서 아이자크를 죽였다.
인형에게 따져 물었다. 어째서 아이자크가 기억을 가지고 있었냐고. 인형은 자신도 모른다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먼저 이야기해주려고 했는데 제멋대로 가버린 것은 에바리스트라며, 오히려 그의 탓을 했다. 에바리스트는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이자크를 마주하기 무서웠다. 어째서일까, 그와 대화를 시작하면 그를 죽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말 그랬을 것이다. 아이자크였다. 다른 이도 아닌 아이자크 로스바르드였다. 그래서 그와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 채로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사과를 해버린 이유였다.
*
인형의 여관.
아이자크의 상처는 말끔하게 치료되었다. 다른 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한참 후에 눈을 떴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부른 이름은 에바리스트, 에바였다.
하지만 아이자크 로스바르드는 기억을 잃었다. 에바리스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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