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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사교성이 부족하다, 보다는 사람을 사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네일에게 있어서는 더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빠르게 피곤해지곤 했다. 저를 알아볼 사람이 많은 집안 행사에서는 더더욱. 게다가 오늘은 저에게 쏟아진 이목들 덕분에 두 배 정도 더 피곤했다. 겨우 축가 연주가 뭐라고. 그러다가도 결혼식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네일은 곧바로 제 방으로 향했다. 좋은 게 딱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꽤 오랜 시간 저를 괴롭혔던 짐 하나를 겨우 덜어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집에 도착한 지금까지도 연인이 제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다. 오늘 자고 갈 모양이구나. 그렇게 또 기분이 좋아져버리고 만다.

  침대에 털썩 앉아선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고 있으니, 자연스레 방까지 따라온 엘리후가 제 옆에 앉았다. 피로가 꽤 많이 쌓였는지 눈이 조금 아팠다. 그렇게 네일이 한참이나 눈만 비비고 있자 엘리후는 손을 뻗어 그런 네일의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눈을 비비던 손이 내려지고, 평소 잘 때가 아닌 이상 잘 벗지 않는지라 보기가 힘든 맨눈이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 눈을 오래 비빈 터에 눈가가 그 색보다는 조금 옅게, 발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엘리후는 그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제 손으로 두어번 눈을 비벼주었다. 종종 약한 감기에 시달리는 것만 빼면 네일은 대체적으로 건강했지만, 항상 걱정스러운 건 눈이었다. 예전에는 안경을 벗고도 시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스물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급격히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의 네일은 안경을 벗으면 조금 떨어진 곳의 저를 볼 때 약하게 인상을 쓰곤 했다. 그러니 계속 눈을 비비는 행동에 걱정이 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졌어.”


  겨우 이정도로 말이지. 엘리후는 픽 웃으며 눈가를 비벼주던 손을 내려 시트 위에 놓여져 있는 네일의 손을 잡아 올렸다. 이내 오늘 수고를 참 많이 했을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다. 네일은 잠시 그걸 보고 있다가 고개를 슬쩍 돌려버렸다. 연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부분부분마다 약한 간질거림이 남았다. 이윽고 반대쪽 손까지 잡아 열 손가락 모두에 키스하고 나서야 엘리후는 네일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시선만 힐끔거리며 저를 보고 있었던 네일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별 저항 없이 기대오는 것이 퍽 사랑스럽다.


  “오늘 고생 많았어.”

  “그만 좀 불렀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네일은 작게 툴툴거렸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마냥 좋기만 했다.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 한참동안 네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엘리후는 다시금 손을 내려 네일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장갑을 벗고 잡아주면 더 좋을 텐데. 자주 하는 생각이었지만, 네일은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좋은 건 똑같으니까. 게다가 다른쪽 손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지금 제 손 위에 놓여져 있는 손에서는 장갑 너머에서까지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맨손으로 잡는 것과는 조금 약하지만 그렇기에 좋은 무언가가 있었다.

  피로가 풀림과 동시에 솔솔 오기 시작하는 잠기운에 네일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후도 피곤할테니 저가 잠들면 저를 눕혀주고 그 옆에 누워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 것이다. 같이 밤을 보내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쉬운 일이지만…….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미 잠기운이 모두 이겨버린 뒤였다. 불편해보이면 갈아입혀주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네일이 잠에 취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


  “날이 갈수록 더 잘 치니까 어쩔 수 없지.”


  피아노 말이야. 늦은 대답이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는지 엘리후는 그리 덧붙였다. 목소리에 조금 잠이 깨버렸다. 네일은 눈을 뜨고 엘리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였다면 그냥 대충 웃고 넘기거나 했을 텐데, 연인의 칭찬이란 기분이 좋은 것이라. 네일은 슬쩍 시선을 내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걸 들킨 건 꽤 예전의 일이고, 그를 위해서 쳐준 적도 여러 번이지만 그래도 뭔가 묘하게 부끄러웠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치는 걸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은 당장 축가를 연주하고 있을 때 깨달은 것이었다.


  “…그만큼 연습을 하니까. 이번에는 당연히 더 많이 해야 했고.”


  네일이 대답을 했으나, 이번에도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내리고 있던 시선을 다시 엘리후에게로 향하니,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히 하는 걸까. 네일이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마주쳤다. 금방 엘리후는 눈웃음을 보였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며 네일은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어렸을 적이라면 저도 모르게 피해버렸겠지만. 그 상태로 먼저 말을 꺼내려고 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대답이 늦는 거냐며. 대화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소 뜬금없는 말로 엘리후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리 물었을 것이다.


 “첫째, 네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평생 이어질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할게.”


  ─? 순간 네일은 말을 잃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엘리후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여전히 웃으며 그런 네일을 마주했다. 상황 파악이 안됐는지, 꽤 오래 눈만 깜빡이며 저를 바라보는 네일에 솔직히 말하자면 웃음이 터질 뻔 했으나. 여전히 잠이 덜 깬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하고 싶은 게 생겨버린 이상은 해야만 했기에, 엘리후는 웃음을 꾹 참았다. 연인의 손에 이끌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결혼식을 보고, 연인이 남을 위해 연주하는 축가를 들으며 문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엘리후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둘째,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너만을 바라볼게.”


  그제야 뒤늦게 엘리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달은 듯 네일은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여전히 웃고 있는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막힌 말문이 도저히 뚫리질 않았다.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면 안 되는 건가. 매번 이렇게 엘리후가 돌발 행동을 할 때마다 네일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곤 했다. ……하기사, 이런건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채로 듣는 게 더 설레긴 하지만. 그래도 야속한 것은 야속한 것이라.


  “셋째, 아무리 지치고 힘든 상황이어도 너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은 절대 하지 않도록 할게.”

  “잠시만.”


  제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네일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엘리후가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네일의 입에 댐으로써 그 이상의 말을 하는 걸 막아버렸다. 이내 “지금은 조용히 듣고 있어야지?”하며 푸스스 웃는 것이다. 네일은 눈을 내려 제 입을 막은 손가락을 잠시 보다가 이내 다시 엘리후를 보았다. 부끄러울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결혼식을 보고 온 뒤라서 그 분위기에 타, 정식은 아니더라도 꺼내보는 서약일터다. 알고 있다. 하지만 마치 정말로 그 자리에서 듣는 기분이라서. 입술에서 손가락이 떨어져나가자 네일은 저도 모르게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다시금 손가락이 닿아와 그것을 풀어주었다. 애써 멍청하게 짓고 있던 표정을 지워내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하여간에, 제멋대로다. 엘리후는 그 웃음을 보고 나서야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싫진 않아.


  “넷째, 항상 널 믿고 네 믿음 또한 저버리지 않을게.”


  싫을 리가 없잖아.


  “다섯째,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오래도록 변치 않고 오로지 너만을 사랑할게.”


  자, 그럼 이제 대답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엘리후는 눈을 떴다. 이내 그는 웃고 있던 표정을 지워내고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손이 뻗어져오고,


  “…네일?”

  “응?”

  “왜 울어.”


  손가락이 부드럽게 눈가를 쓸고 지나갔다. 오히려 네일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울고 있어? 전혀 몰랐다는 눈치로 네일은 빤히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엘리후는 다시금 픽 웃고 만다. 계속해서 네일의 눈가를 쓸어주며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다. 네일은 슬며시 그 손을 밀어내고 제 소매를 눈에 가져다댔다. 정말로 울고 있네. 어쩐지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기 시작한다 했다. 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쳐내며 네일은 옅게 웃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데, 그런데도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왜 우는지 알잖아.”

  “너도 참.”


  어쩔 수 없네, 하는 태도로 엘리후는 네일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설마 울 줄은 몰랐는데. 꽤 당황스러운 반응이라 저마저 놀라고 말았다. 여전히 작게 훌쩍이고 있는 연인의 등을 토닥여주다가 엘리후는 슬며시 드러나 있는 귀에 입을 맞추었다. 이내 등을 토닥이던 손으로 네일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 그 이마에, 콧잔등에, 볼에, 끝으로 입술에까지 가볍게 키스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답은 안 해줄 거야?”

  “……설마.”


  겨우 눈물을 그친 네일은 빙긋 웃으며 작게, 눈 앞의 연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사랑해.”


  언젠가 이런 약식이 아닌, 정식으로 대답할 날을 꿈꾸었다. 그때는 아마 지금보다도 더 울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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