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시간은 낮의 시간보다 빠르게 흘러간다. 한두 시간 정도의 오차를 두고 똑같이 배분되어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분명하게 있음에도 그러했다. 여름의 밤은 늦게 찾아오고, 아침은 이르게 찾아온다. 반대로 겨울의 아침은 느리게 찾아오지만 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온다. 딱 그 정도의 오차.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저녁이, 밤이, 새벽이. 달이 가쁘게 물러가는 것은 결국은 체감의 탓이다. 아니면 잠으로 보내는 시간이 길어서던지. 아, 후자 쪽에 가깝나. 아무튼. 이런 부질 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밤은 저물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리 장황하게 늘어놓았어도 라그렛 블랙로즈는 지나가는 밤에 연연해하는 소년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관심한 축에 가까웠지. 그에게 밤이란 하루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때때로 사람이 다 그렇듯 깊어가는 새벽과 어두운 밤하늘, 그를 밝히는 밝은 달에 심취해 센치해지곤 했으나. 그 정도에 흔들리는 소년은 더더욱 아니었고. 남보다 몇 배는 무심하게 흘려보낸 밤이 몇 밤이나 될까. 독서가 취미인 소년 치고는 퍽 감수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리 저를 평가하면서도 라그렛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이리 길게 쓸모 없는 생각을 이어온 것만 해도 기실 생각 이상의 감수성을 내포한다는 정도였다.
그리하여 저를 감수성 부족한 소년이라 평가내리면서도 사실은 제법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저에게 박한 평가 만큼이나 남에게도 무덤덤한 사람이었다.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 직을 떠맡았으면 조금의 칭찬 정도는 해도 좋으련만. 그가 할 줄 아는 립서비스는 어디까지나 공적인 것에 한했다. 이따금 불려가 블랙로즈로서 대표하는 자리인 순혈 모임이나, 그런 비슷한 것들. 외에서는 사실, 무덤덤함을 넘어 과할 정도로 야박했다. 마치 칭찬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사람 마냥. 비단 주장으로서 그리핀도르 팀을 대할 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햇수로 4년 째 이어오고 있는 스터디에서도 그랬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맡고 있는 소년이 있다. 그 아이가 제대로된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다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말이다. 칭찬이 입에 붙지 않은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어린 축에 속했던 라그렛이 칭찬을 할 만한 대상은 멘티인 소년 뿐이었고, 소년에게 칭찬을 할 일이 없으니 칭찬 자체가 그에게는 낯선 거다. 이런 구구절절한 이유들, 그리고 그 이유들을 앞지른 성격 탓으로 어찌되었든 라그렛은 꽤나 뻑뻑한 주장이 되었다. 그리핀도르보다 몇 배는 겉으로 차가워보이는 슬리데린과 래번클로의 주장들보다도 말이다. 다소 무뚝뚝해보이는 후플푸프의 주장보다도 더.
그러한 그가 손을 뻗었다는 건 생각보다도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다. 쓰다듬었다고 보기도 힘든 행위였음에도 그랬다. 금빛 머리칼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진 손은 솔직히 따뜻했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그는 그마저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햇수로, 4년. 라그렛 블랙로즈가 3학년이고 지크프리트 위버가 신입생일 때 시작된 스터디 동안. 그리고 그 시간 외에도 선배와 후배로 지내왔던 시간 동안. 라그렛이 지크프리트를 약하게나마 쓰다듬어주었던 때가 있었던가. 동류인 순혈에게만 제외하고 모든 이에게 세워왔던, 아주 잘 벼려진 날이 살포시 접어들어가기 시작했던 4학년의 크리스마스 이후 라그렛의 태도는 상당히 누그러진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에 그쳤다. 부러 쓰다듬은 부드러운 행동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제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서까지 이랬던 적이 있었던가, 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라그렛 본인이 곰곰히 고민할 정도로. 곰곰히 생각해보니 처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라면 정말로 생각 없이 뻗은 손이어서 기억 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거겠지. 그래서, 왜 그랬지. 가지런히 누운 채 한참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던 라그렛이 문득 제 오른손을 들어 눈 앞에 펼쳐보였다. 순혈 가문 도련님 치고는 제법 거친 손이다. 손 끝에 닿았던 금빛 머리칼이 사락거리던 감촉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제 눈에 더이상 보이지 않도록 내려 침대 시트 위에 올렸다. 이유를 고찰해봤자 부질 없는 짓이다.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는 어느 때처럼 생각 없이 한 행동이겠지. 라그렛은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고 잠을 청했다.
―그래서, 어제 졸면 혼낼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용캐 다 한 모양인지 지크프리트가 나름 의기양양하게 내밀었던 스터디 과제들을 눈으로 훑어보던 라그렛은 어느새 고개를 들어 지크프리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깃펜을 한 번 손으로 빙글 돌렸다. 급하게 한꺼번에 한 과제는 어느정도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라그렛의 성에는 당연히 차지 않았고, 그래서 당연히 평소처럼 잔소리와 지적할 점을 따박따박 뱉어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거였다. 허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애한테 따가운 소리를 해봤자 제대로 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라그렛은 턱을 괸 채로 계속해서 느릿하게 깃펜을 손으로 돌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졸고만 있는 소년에게서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어제부터 참 이상한 일이지. 평소였으면 귀라도 잡아당기면서 깨웠을텐데, 깨울 맘이 들지 않는 건. 어제도 혼냈어야 정상이었던 거였는데. 소리 조차 내지 않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비게 된 손이 문득 뻗어진다. 왼눈 께에 쏠려 머물고 있는 앞머리칼에 손 끝이 닿았다. 그대로 옆으로 넘기듯이 사락, 하고. 한참 감겨있던 눈이 반 쯤 뜨여진다. 항상 앞머리 아래에서 언뜻언뜻 보이던 왼쪽 눈동자의 붉은색이 보였다. 라그렛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앞머리를 매만지던 손이 올라가고,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꾹 눌러 책상에 박아버렸다. 잠깐 뜨여졌던 눈이 또 머리가 책상에 닿았다고 다시금 감겼다. 많이 졸렸던 모양이다.
제 권속, 이라 칭하기엔 멀고 제 선 안, 이라 끝내기엔 그보다는 가깝다. 지크프리트 위버는 그 시절부터 라그렛 블랙로즈에게 그 간극 어딘가에 서 있는 존재였다. 사실은 그 시절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알게 모르게 헤이트 크라임에 손을 댔던 저학년. 그 때 제 앞에 뚝 떨어진 머글 태생 소년은 솔직히 말하자면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터인데. 남이 건드리면 하염없이 불쾌했고, 그렇다고 구태여 저가 건드리지도 않았다. 괴롭힘 당하는 걸 도와줬냐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다소 제멋대로였다고 생각한다. 끝내 제 눈에 지크프리트에게 손을 대는 얼굴이 보여져 본의아니게 응징 아닌 응징을 해주었던 일을 떠올려보자면, 더더욱. 도움은 주지 않았으나 응징은 하고 다녔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그냥 눈에 밟혀서 그랬다기엔 했던 일의 강도가 너무나도 강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지.
잔머리가 듬성듬성 삐져나와 있는 뒷머리에 여전히 올려진 채인 제 손에 시선이 닿는다. 그대로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제법 부드러웠다.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게 이런 느낌인가. 참 새삼스러운 감상이다. 그리고, 이상하지 않나. 나도, 너도. 지크프리트 위버가 피곤해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제멋대로 꼬셔와 시작하게 만든 퀴디치에, 배분해주었던 포지션과도 달라졌으니. 적응을 위해 부단히도 열심히 노력하는 게 제 눈에도 보였더랬다. 어차피 추격꾼 자리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서 정말로 저가 바꿔도 되는 일이었는데. 강요에 가까운 제안을 받아주었던 것도,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되었을 포지션을 바꿔준 것도. 사실 주장인 제 입장에서는 다 고마운 일들 뿐이라 어느 정도의 편의는 봐줄 수 있었다. 먼저 말로 꺼내지 않았을 뿐. 예를 들어 스터디 한 번 쉬면 안 되겠냐고 말해왔더라면 흔쾌히 그러자고 해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밤을 샐 정도로 굳이 무리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상하다는 말로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혼나는게 무서웠나. 아니면 그리 빡빡한 선배로 보였나. 사실 둘 다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라,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어버렸다.
제법 오랜 시간 금색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은 두어번 톡톡 두드리는 것을 끝으로 떨어져나갔다. 이번에는 사락거리는 감촉이 남았다. 싫지는 않았고. 다시금 비어버린 손은 종이와 깃펜을 찾아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잠시 물끄럼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으로 보이는 지크프리트를 보던 라그렛은 저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두 번 정도 접었다. 머리와 책상 사이에 깨지 않도록 살살 끼워넣어 베개처럼 베게 하고 나서야 라그렛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도, 오늘도 어쩐지 이상하기만 한 하루다. 내일은 이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걸. 짧은 한숨을 내쉬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가 밤을 새 해 온 과제들을 옆에 끼고 자리를 떠났다. 그곳에는 그렇게 곤히 잠든 지크프리트와 그 곁의, 라그렛의 필체로 또박또박 쓰여진 작은 쪽지만이 남았다.
「새 과제는 없고, 대신 내줬던 과제 다시 제대로 해와. 목도리는 안 돌려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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