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크프리트 위버는 그닥 크지 못 한 소파에 웅크려 누워 잠들어 있는 라그렛 블랙로즈를, 제 연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새벽이 깊어가는 고요한 시간. 특별한 일이 없지 않은 이상은 늦지 않은 시간에 잠을 청하곤 하는 그였기에, 먼저 자고 있겠거니 하며 느즈막히. 그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집에 들어온 게 사실이었다. 들어선 집 안의 불이 켜져 있다는 점에서 놀랐고, 라그렛의 모습을 보고서 또 놀랐다. 자고 있을 거라는 예상은 반 이상 맞긴 했다. 그는 색색 소리까지 내며 자고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맞지 못 한 이유는 침대가 아니라 소파에서 자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개도 베지 않고, 이불도 덮지 않고. 첫번째로 든 생각은 불편하겠다, 였고 두번째로 든 생각은 춥겠다, 였다. 아무리 집 안이라고 해도 한겨울에 목티 한 장만 입고 담요조차 두르지 않은 채 좁은 소파에 웅크려 자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도 깨울 수가 없었다. 너무 곤히 잠들어 있어서. 행여나 깰까봐 건드리지도 못 한 채 라그렛을 바라만 보던 지크프리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았다. 바로 정면에 자고 있는 얼굴이 보이도록. 이내 좁게나마 남은 틈에 양 팔을 교차시켜 올리고, 그 위에 제 턱을 걸쳤다. 당연스럽게도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졌다. 옅게 내쉬는 숨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 그렇게 티 하나 없는 말끔한 얼굴을 응시했다. 숨결과 숨결이 닿는다.
그러기를 한참. 지크프리트는 제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숙직을 할 뻔한 걸 겨우 빠져나온 탓일까. 아니면 이른 새벽까지 이어진 일 때문일까. 두 가지 이유가 다 겹쳐서 형성되었을 진득한 피로감이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걸 버티고있기는 조금 힘에 부쳤다. 잠에 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편히 쉬지도 못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 위에 툭 올려지는 손에 지크프리트는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잠이 덜 깬 샛노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에 작게 미소지었다. 반 쯤 뜨인 눈을 두어번 깜빡이던 라그렛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 웃었다. 라그렛의 남은 한 쪽 손까지 지크프리트에게로 뻗어지고, 머리를 쓰다듬던 손 또한 내려가 느릿하게 목을 끌어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렇게 한 층 더 가까워진다. 이마가 한 번 툭,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많이 늦었네."
"으응, 어쩌다보니요."
"피곤하겠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었다. 라그렛은 고개를 돌려 몇 번 잔기침을 하고는 다시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걱정해야 할 쪽은 이쪽인데, 오히려 선홍색 눈동자가 걱정스럽다는 빛을 잔뜩 띠고 있었다. 저를 더 끌어당겨 아예 옆에 눕히려는 라그렛을 슬 밀어내고 지크프리트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거면 침대에서 자지 왜 여기서 자고 있느냐고. 걱정의 시발점이 되는 물음을 던지니 라그렛은 시선을 잠시 피했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옆에 네가 없는 침대에는 별로 눕고 싶지 않았다, 고. 그리 답한다. 지크프리트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1980년의 10월 한 달. 두 달 여 떨어져 지냈던 시간이 지나가고, 1981년의 1월로 또 다시 한 달. 아낌없이 사랑을 속삭였던 두번째의 한 달 동안 라그렛은 부쩍 어리광이 늘었다. 던지는 말도 퍽 솔직해졌고. 이제와서 어떤 감정을 숨기려 하겠냐만은 말이다. 라그렛으로서는 더더욱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름 너 올때까지 기다린건데."
언제 잠든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이곤 라그렛은 작게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저가 없는 빈자리가 그리도 쓸쓸하냐며. 그럼 도대체 평소에는 혼자 집에서 어떻게 지내냐고. 지금은 필요없을, 어찌보면 답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는 물음을 삼키고 대신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상체를 일으켜 끌어안았다. 라그렛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답은, 정말로 정해져있다. 괜찮다 답할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마저 즐겁다고, 그리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섞여있지 않겠지. 그리움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마련이므로.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막연하게 기분 좋았다. "무리해서라도 집에 오길 잘했네요." 그 말에는 부정하지 못했다. 빈말로라도 뭐하러 무리까지 했냐며, 꼭 들어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리 말 할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던 시간은 명백하고 느끼는 외로움 또한 사실은 선명했으므로. 정말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으레 그렇듯 기다리는 시간까지 즐겁지 않았더라면. 버티지 못하고 떼를 써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기간이었다. 심적으로 완전히 괜찮아지지도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계속 옆에 있고 싶기 마련인 연애 초기라는 이유가 사실 그보다도 더 컸다.
"잘거면 침대에서 자야죠."
"으응."
한참이나 누워있던 소파에서 비척비척 일어난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손을 잡고 그에게 이끌려 침대로 향했다. 눕기 직전이 되어서야 지크프리트는 그때까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대충 던져두었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더 길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꼭 붙어 누워 저를 끌어안는 손길에 몸을 맡겨 라그렛의 품에 얼굴을 묻은 지크프리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말로 일을 쉴 수도 없는 마당에─사실 쉴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라그렛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적 여유는 둘 모두에게 부족했다. 허락된 시간은 아침에 깨어난 후 출근 직전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과, 퇴근 이후의 비교적 긴 시간. 그마저도 사실 후자의 경우에는 라그렛이 만성적으로 수면이 부족한 지크프리트를 재우느라 급급해했다. 연애 초기 치고는 퍽 팍팍하게 살고있지 않은가. 그래도 또 같이 있는 동안에는 마냥 좋다고 계속 붙어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서늘한 옷자락에 잠이 깨버린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에 몇 번 코를 부볐다. 그러고 그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후배가, 지금은 연인이. 제 품 안에서만은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허나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지크프리트는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라그렛을 물끄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라그렛 또한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여 지크프리트를 내려다보았다. 1초, 2초, 3초. 시곗바늘이 째깍거리는 소리와 보통보다는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심장 박동인지는 모른다. 제 것인지, 연인의 것인지. 그리고 틈을 메우는 건 서로의 작은 숨소리. 말 한 마디 없이 한참이나 그렇게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채. 서로를 마주보았다. 때로는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은 때가 있기 마련이고,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다시금 숨결이 닿는다. 어쩐지 간질간질했다. 그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라그렛 블랙로즈는 이러한 감정의 간질거림에 유독 약한 청년이었다. 지크프리트 위버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자각함과 동시에 그것에 약하다는 사실 또한 자각했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고. 마치 이끌리듯이.
라그렛은 조심스럽게 지크프리트의 턱을 잡았다. 그대로 눈을 감는다. 서서히 얼굴이 가까워지고. 제 입술을 그의 입술에 겹쳤다. 막연한 따뜻함. 턱을 잡고 있던 손이 올려져 지크프리트의 두 눈을 감겼다. 몇 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어진 아주 짧은 입맞춤이었다. 사실 키스라고 부르기도 뭣 할 정도였다. 그래도 꼴에 그게 둘 다에게 첫키스라고. 여전히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뛰는 소리가 더 빨라졌다. 사실 누구의 것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하나의 것이 아니니까. 둘의 것이었다. 함께,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깐동안 겹쳐졌던 입술이 떨어져나가고, 지크프리트는 눈을 살짝 크게 뜨곤 얼떨떨한 표정으로 라그렛을 쳐다보았다. 느리게 깜빡였다. 이내 웃어버린다. 저도 모르게 한 짓에 적잖게 당황하고 있던 라그렛은 지크프리트가 제 품에 다시 파고들어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현실로 돌아왔다. 그 또한 입꼬리를 당겨 웃고는 제 연인을 더 꼬옥 끌어안았다.
"싫지 않아?"
"그럴리가요. 너무 좋은걸요."
슬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살짝 붉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발갛게 물든 볼을 손 끝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라그렛은 작게 입술을 우물거렸다. 다음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말 대신 볼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검지 손가락을 지크프리트의 턱 밑에 대 고개를 더 들게 했다. 그대로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눈을 감은 게 보이자 별 것도 아닌 용기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선. 열린 입술 틈으로 제 혀를 밀어넣었다. 차마 혀와 혀를 얽지는 못하고, 입 안을 덧그리듯. 사실 간질이는 것에 가깝도록 혀로 약하게 쓸어보고 나서야 입을 뗐다.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다시금 웃고, 이번에는 저가 먼저 입술을 가져다댔다.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어쩐지 간질간질했다. 아까 마주보고 있을 때처럼. 라그렛은 그런 지크프리트의 뒷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살짝 닿았던 입술이 멀어지자 더 당겨 안았다. 어쩐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오늘은 잘 잘 수 있겠다. 그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닿아왔다. 지크프리트 또한 라그렛을 끌어안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느때처럼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제 품에 안고 다시금 등을 토닥여주었다. 바로 재우려는 걸 보면 그도 퍽 쑥스러운 모양이다. 지크프리트는 픽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그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아주 깊은 잠에. 간만에 그리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랑한다는 속삭임을 들은 것도 같다는 생각을 끝으로 지크프리트는 잠에 빠져들었다. 라그렛은 뒤늦게 붉어진 얼굴을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에 묻어버리곤 혹여 답답할까봐, 끌어안은 팔을 조금 느슨하게 했다. 겨울의 새벽. 밖의 공기는 차고 안의 공기도 마냥 따뜻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맞닿은 온기만은 하염없이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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