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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light X CDS] 아이자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꼭 옆에 있을게.”

어린 시절의 약속이었다. 한참 어렸던 시절의 아이자크는 그런 말을 했고, 에바리스트는 저 또래의 소년이 하는 말임에도 이상하게 그 말에 안심이 되었더랬다. 그 뒤로 꼭 단 둘뿐이었다. 부모님을 잃은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너무나도 좁았고,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했다. 그래서 어린 에바와 아이자크는 어려서부터 독기를 품었다. 오로지 서로에게만 그 독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살아갔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금 더 커서는 은사를 만났다.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처럼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 시대였다. 프리드리히는 저들보다 어린 나이에 남겨진 소년들을 딱하게 여겼다. 베른하드도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랬을 것이다. 같은 마법사인 그들에게 제대로 마나의 운용을 배웠다. 그리고 잔혹한 세상을 알아갔다. 아이자크에게는 그 때부터 에바리스트 뿐이었다. 그를 자신의 세계로 여겼다. 에바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삶이란 어찌나 잔인한지.

둘에게 자이페르트 형제는 부모였고, 스승이었으며, 형제이기도 했고 동시에 친구였다. 그리고 보호자였다. 베른하드는 그들에게 나직하게 가라고 말했다. 프리드리히 또한 남으려는 소년들을 만류했다. 너희에게는 아직 미래가 남아있다고, 그랬다. 결국 그들은 소중한 이들의 말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 서로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소년들은 더 이상 잃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을 더 이상 만들지 않기로 했다. 서로만을 보고 살아가기로 했다. 그런 빙판길 같은 삶을 선택하고 말았다.
쉘터로 수용되는 무리에는 그들보다 어린 아이들도 많았다. 개중에는 부모님을 여의고 홀몸이 된 아이들도 꽤 있었다. 그중 한 아이는 갑작스럽게 가지 않겠다며 버텼다. 인간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자그마한 것을 죽여 버리려고 했다. 그게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이자크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 틈에 난입했다. 에바리스트 또한 그랬다.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보고 만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정말로 죽을 뻔 했다. 그 때 에바리스트를 감싸다가 아이자크는 눈 하나를 잃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것으로 셋 다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에게 두 번째 약속을 했다. 외눈의 아이자크가 흉한 상처를 가리기 위해 붕대를 감으면서 말했다. 영 서툰 솜씨였다.

“너만은 내가 꼭 지킬 거야, 에바.”

그 말은 그 때부터 에바에게 특별한 말이 되었다. 이후 아이자크는 그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지만, 에바리스트는 그 기억만으로도 굳게 아이자크를 믿었다. 다시 단 둘이 남아버렸음에도 그 말을 떠올리며 살아갔다. 아이자크가 정말로 자신을 지켜줄 것만 같았더랬다.

* * *

“그 쯤 되면 지루할 만도 한데.”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바리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타박타박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것은 익숙한 인영이다. 아이자크는 그에게 빵과 우유를 내밀었다. 에바리스트는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가, 읽고 있던 책의 모퉁이를 접었다. 그리고 덮어서 옆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빵과 우유는 1인분이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에바리스트는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아이자크를 바라보았다. 금안의 시선이 아이자크의 눈에 닿았다. 문득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잘도 돌아다니는구나, 싶었다.

“붕대, 갈아야겠다.”

이리 와서 앉아봐. 짤막하게 에바리스트가 덧붙였다. 아이자크는 뒷머리로 손을 넣어 엉성하게 감겨 있는 붕대를 풀며 에바리스트의 옆에 앉았다. 붕대로 가리고 있던 흉터는 당연하지만 보기에 좋지는 않았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으니 흉이 지는 것은 당연했다. 에바리스트는 구급상자를 꺼내 거기서 연고와 붕대를 꺼냈다. 이제 와서 상처 위에 약을 바르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것은 안다. 이런다고 빼낸 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에바리스트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이게 고작이어서, 헛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할 수 밖에 없었다. 연고를 짜내 흉터 위에 바르고, 에바리스트는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차라리 거즈를 붙이는 게 어때.”
“네가 감아주는 게 좋단 말야.”

솔직한 대꾸였다. 에바리스트는 그냥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이자크는 그 말대로 정말 이 순간을 좋아했다. 빈 말이 아니었다. 오른쪽 눈을 잃고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시간이었다. 에바리스트가 제 손으로 직접 자신의 붕대를 갈아주는 시간. 이 때가 되면 정말로 세상에 단 둘만 남게된 것 같았다. 텅 빈 세상에,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

“그럼 거즈도 내가 붙여줄게.”
“좋아. 다음에는 거즈로 해 줘.”

에바리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붕대를 갈무리 하고, 단정하게 감긴 모양새에 그는 괜시리 흡족해졌다. 활동량이 많은 아이자크이기에 금방 다시 엉성하게 풀릴 테지만, 그래도 그랬다.
구급상자를 다시 침대 밑으로 밀어 넣고 에바리스트는 옆에 놓아둔 빵과 우유를 집어 들었다. 어쩐지 아이자크는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물론 그가 그러는 그 이유를 에바리스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네 건?”
“난 먹고 왔어.”

다 티나는 거짓말은 왜 하는 것일까.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를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아이자크는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마치 제가 잘못 했다는 듯이.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처음 몇 번은 속아 넘어갔지만, 아이자크는 유독이나 에바리스트에게 하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여러 번 이런 태도를 보이다 보니 에바리스트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속일 수는 없었고, 속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부족하나마 하는 식사는 중요한 문제였다.

“또 주고 왔어?”
“…응.”

이번에는 에바리스트가 시선을 내렸다. “잘했어.” 그것은 정말로 잘 한 일이 맞긴 했다. 매번 보급 받는 식사를 빼앗기는 홀몸인 아이들에게 제 것을 나누어 주는 아이자크는 나름대로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한두 번 일이 아니다보니, 슬슬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의 이런 행동을 단속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시선을 슬슬 피하기만 하던 아이자크가 에바리스트의 그 말에 살짝 미소 지었다. 에바리스트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고, 제 몫의 빵을 반으로 나눠 한 조각을 아이자크에게 건넸다.

“난 괜찮으니까 너 다 먹어.”
“내가 싫어.”
“…에바 고집을 어떻게 꺾겠어, 내가.”

그래도, 빵 하나를 나누어 먹는 처지여도 두 사람은 나름대로 쉘터 내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특히 에바리스트의 경우에는 더 그랬다. 소년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에바리스트는 책을 구하는 것이 비교적 쉬운 지금 생활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런 에바를 바라보면서 아이자크도 천천히 적응해갔다. 비록 아이자크는 독서가 체질에 맞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에바리스트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가끔 그의 옆에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뛰쳐나가버리던지, 그대로 잠들어버리던지 둘 중 하나이긴 했으나. 우유 하나 까지도 나누어 마시고, 에바리스트는 다시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아이자크는 그런 에바리스트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사실, 에바의 곁에 있자면 딱히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더라도 즐거웠다. 책을 보는 에바리스트를 관찰하는 맛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에바리스트가 시선을 옮겨 아이자크를 바라보았다.

“할 거 없으면 뭐 좀 해줄래?”
“뭐든지 시켜만 주면.”

에바리스트는 탁자 위에 쌓아 둔 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걸 오늘 사이에 다 읽은 건가, 하는 생각에 아이자크는 속으로 입을 떡 벌렸다. 저렇게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에바리스트가 그간 얼마나 참아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에바리스트는 그 책 무더기를 들어 아이자크에게 넘겨주었다. 권수가 꽤 되다보니 무게 또한 꽤 되었다. 하지만 옮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거, 반납 해달라는 거지?”
“응.”
“또 뭐 필요한 건 없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에바리스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말아버렸다. 딱 보아하니 무언가 더 부탁하고 싶은데, 미안해서 하지 못하는 것이 뻔했다. 아이자크는 옆에 책들을 놓아두고 맨 위의 두꺼운 표지를 가진 책을 집어 들어 살짝 에바리스트의 머리를 쳤다. 약간의 충격에 에바리스트가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 그러다가 다시 뜨니, 그 책으로 두어번 제 어깨를 두드리며 아이자크가 웃고 있었다.

“뭐든 부탁 해. 에바 부탁인 걸.”
“그럼… 책 몇 권만 더 가져다줄래? 딱히 가리는 건 없으니까 네 마음에 드는 걸로.”

너 읽을 것도 같이 빌려 오면 더 좋고. 같이 읽게. 그 말에 아이자크는 어색하게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아이자크는 책 읽는 에바리스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딱히 정말로 독서가 지루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고.

* * *

호기심이 죄렸다. 에바리스트 몫의 새 책까지 빌려서 그에게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자크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한 방의 문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문에 바짝 귀를 대고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살짝 언성이 높아져 있는 목소리는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 듯 했다. 아마도 다른 쪽은 말없이 듣고 있는 것 뿐이리라. 이렇게 남의 이야기를 엿들어도 되는 것인가, 싶었지만 아이자크는 이제야 16살, 한창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을 나이의 남자아이였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기의 아이자크는 유독이나 더 호기심이 왕성했다. 쉘터 내에서 갇혀 지내는 생활이 이어지다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이해가 안 돼, 레이븐.”

그리고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아이자크는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 느껴버리고 말았다. 레이븐은 쉘터 내에서 마법사들의 탈출을 막고, 사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호문클루스 셋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실제로 맞닥뜨린 적은 없었지만 호문클루스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질리도록 들어왔다. 자신이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된다면? 호문클루스와 대화하고 있는 것이야 같은 호문클루스 일 것이 뻔했다. 아이자크는 입술을 짓씹었다. 죽음의 공포는 몇 번이나 맛봐 온 것이었다. 아이자크는 이내 주저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에바리스트에게 가져다  주어야 할 책을 품에 더 꽉 안았다. 아이자크는 그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로 뒤에서 문이 거칠게 열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대체가, 정말이지…….”

신경질적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이자크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느릿한 발소리에 아이자크는 다시 한 번 입술을 짓씹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서는 아이자크의 옆에 멈추어 섰다. 아이자크가 느끼고 있는 것은 공포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에바리스트의 생각이 났을 뿐이었다. 그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은 삶이다. 혹시나 중요한 이야기를 엿들어서 죽어야 하는 것이라면 빌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붉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자크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는 사람을 죽여 본 눈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의외인 일은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그대로 지나쳐 가 버렸다는 것이다. 아이자크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쩐지 화가 나 있는 모습이었는데도 그랬다. 아이자크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만 돌려 돌아보았다. 이번엔 가라앉아 있는 푸른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들어온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 특히 지금 마주하고 있는 레이븐은 더 그랬다. 눈이 마주쳤으나 금세 시선을 떨구었던 레이븐이 문득 아이자크의 눈을, 정확히 말하자면 붕대가 감겨 있는 오른쪽 눈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해 받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것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자크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자크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레이븐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두어번 저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말은 분명히 아이자크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이자크는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에바리스트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안 것인지. 그것은 둘째 치고, 그는 지금 어서 가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자크는 잠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잔인무도하다는 말만을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이내 아이자크는 두어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해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에바리스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읽고 있던 책도 마저 다 읽었을테니.

“그 나이에, 갖기 힘든 눈을 가지고 있네.”

아이자크는 무덤덤하게 레이븐을 조우했다. 하지만 그 푸른색 눈동자에 무언가 감정이 담긴 것은, 분명히 레이븐이 에바리스트를 입에 담고 나서였다. 두려움이라던가, 살고 싶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일종의 경고를, 소년은 단 하나 남은 왼쪽 눈만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레이븐은 부럽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내 그 또한 두어번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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