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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바] 겨울

간밤에 눈이 꽤나 많이 왔다. 어릴 적이었다면 가슴 뛰는 광경일지도 모르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은 저걸 언제 치우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곳이 군대라는 이유도 한 몫 하긴 하겠지만, 어쩐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쌓인 눈에 감동하던 어린 시절과 멀어져가는건 당연한 것이었다. 하기사, 언제는 동심의 존재에 하나하나 감동하고 살았던가. 오히려 이정도 나이를 먹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게 이상하지 않을까. 복도에서 창틀에 기댄 채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이자크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단으로 보이는 병사가 하나 둘 나와 눈을 치우기 시작한다. 새하얗던 주변 풍경이 다시 칙칙한 색깔로 물들어간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아이자크는 어쩐지 쓸쓸한 눈을 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겨울의 전장은 고요하다. 고요하다기보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추위로 인한 사기 감소는 그란데레니아 군에게도, 루비오나 연합군에게도 꽤나 큰 타격이었다. 그렇다보니 어느 쪽도 쉽사리 서로의 영토에 침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실정이었다. 잔뜩 움츠러든 병사들을 데리고 전투를 진행해봤자 서로에게 득은 없고 실만 가득한 일이라는 것을 두 쪽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덕에 전장에 나가는 것보다 서류 업무가 더 많아진 것이 아이자크에게는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자신은 이런 서류더미 속보다 피튀기는 전장이 더 어울린다, 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아이자크의 1차적인─ 아니 굳이 따지자면 0차적인 목적인 맹우를 지키는 것에는 딱 맞는 평화긴 했다. 그의 곁을 지키지 못할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까만건 글씨요 하얀건 종이인 서류들을 몇 장쯤 들여다보고 있자하면 잠도 오고,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지루함이 배로 느는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면 그것만큼 따분한 것이 또 없었다. 하나뿐인 맹우라는 작자는 서류에 팔려있는 워커홀릭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이런 곳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나, 로스바르드 대위.”

익숙한 목소리. 아이자크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띄며 고개를 돌렸다. 춥지도 않은지 코트도 걸치지 않은 채인 에바리스트가 그곳에 있었다. 아이자크는 창가에 기대어 있는 채로 에바리스트를 바라보기만 할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어보이는 그 모습에 에바리스트는 혀를 찼다. 조금 벌어져있는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아이자크는 이내 몸을 에바리스트 쪽으로 돌리더니 장난스럽게 팔을 양쪽으로 살짝 벌렸다. 그 의도를 금방 알아챈 에바리스트의 입술 틈새에서 하얀 입김과 함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해맑게 웃고 있던 아이자크를 무시하고 그의 옆으로 세어버려서는 아이자크가 그랬던 것처럼 창가에 기대었다. 은근히 기대하기라도 했다는 듯, 아니면 단순히 무안해서인지 아이자크는 슬쩍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벌리고 있던 팔도 슬며시 붙였다. 그리고는 불만이라는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쌀쌀맞긴.”
“눈 쌓여있는걸 보고 있었나보군.”

가볍게 아이자크의 말을 무시한 에바리스트는 눈동자만 옆으로 돌려 아이자크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한두번 일은 아니라는 듯 아이자크는 별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에바리스트의 시선도 주변에 쌓여있는 눈에 고정되었다. 주변이 온통 새하얗다. 칙칙한 분위기의 군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꽤나 마음이 포근해지지 않나. 언제나 긴장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병사들의 얼굴도 계급을 막론하고 오늘은 어느 정도 풀어져 있는 듯 했다. 전쟁 중이긴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이런 평화도 얼마간은 있는 것이 낫다.

“에바는─”

창가에 등을 기댄 채로 살짝 고개를 젖혀 에바리스트를 바라보던 아이자크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쌓여있는 눈에 고정되어있던 시선이 다시 아이자크에게로 향한다. 안경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시선. 오늘의 에바리스트의 얼굴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꽤나 풀어져있다.

“음, 아니야.”
“말을 할거면 제대로 하지 그래.”

아이자크는 고개를 젓기만 했다. 에바리스트도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고 입을 다물었다.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해야 할 말은 하는 사이였다. 애초부터 모진 말을 하더라도 그것에 상처받을 만큼 가벼운 관계가 아니었다. 쌓인 세월도 오래지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정도가 남달랐다. 아이자크에게 있어서 에바리스트는 세상 그 자체였다. 에바리스트 또한 아이자크의 그 생각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세상 속에서도 가장 빛나는 것은 자신뿐일까. 아이자크는 잠시 그런 고민에 빠져들었다. 알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장 위에서 서로의 눈빛만 보고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지만, 세세한 감정까지 알아채는건 아무리 아이자크여도 에바리스트 본인이 아닌 이상은 무리인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이자크는 그래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그러한 바램뿐이었다…….
아이자크의 눈동자가 밖으로 향한다. 그리고 재설작업을 맡은 병사가 보이기 시작하자 기대어있던 등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뒤돌아 에바리스트를 바라본다.

“영 이상하단 말이지.”
“무엇이?”

이번에도 아이자크는 대꾸하지 않는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에바리스트를 향해 작게 미소를 띄워주고, 아이자크는 검은색 셔츠 위에 대충 입고 있던 제복을 벗어 에바리스트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마치 자신은 별로 춥지 않다는 양,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에바리스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대로 가만히 아이자크와 시선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저렇게 하얀 눈이지만 언젠가는 녹아 사라질 것이다. 아이자크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에바리스트는 문득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춥지 않아요, 도련님?”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웃는다. 예의 그 호칭에 에바리스트는 작게 혀를 찼다. 종종 아이자크가 사용하는 그 호칭은 낯익은 듯 그리운 것이었다. 에바리스트는 눈을 감았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아이자크는 잠시 그런 에바리스트를 바라보다가 창가에 팔을 걸쳐 턱을 괴었다.

“네가 더 추워보이는데.”
“글쎄. 감기만 안걸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복장인데 감기에 걸리지 않을 리가…”

잔소리를 쏟아내려는 입을 에바리스트는 그냥 꾹 다물어버렸다. 듣지 않을 것이 뻔했다. 원래 에바리스트의 일이라면 본인의 몸은 사리지 않아왔던 것이 아이자크였다. 감기 걸려도 안 챙겨줄거다. 쏘아붙히는 목소리에 아이자크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결국 신경 쓰여서 일도 제대로 잡지 못할 에바리스트가 눈에 선했으니. 아마도 끙끙 앓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옆에 앉아 졸고 있을 그였다. 아이자크에게 무심한 듯 굴어도 결국 에바리스트의 신경 반경 내에는 아이자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관계였다.

“이리와, 아이자크.”

부름에 아이자크는 일단 고개를 돌려 에바리스트를 쳐다보았다. 설경에 눈이 팔려 그가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평화는 사람을 무르게 만들고 있었다. 옆에 그가 있어서, 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에바리스트의 옆에 있는 아이자크는 확실히 평소보다는 물러지곤 했다. 에바리스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아이자크의 옆에 붙어 섰다. 어쩐 일일까. 그가 먼저 다가오는 일은 굉장히 드문 것이어서, 아이자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바리스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아이자크가 어깨에 걸쳐준 그의 제복 끝을 잡고, 넓게 핀 후에 아이자크에게도 걸쳐준다. 거리가 가깝다. 서로의 온기가 전해져온다. 아이자크는 미소지었다. 기분이 좋았다.

“말을 좀 안들어야지.”
“에바는 유독 몸이 차니까. 걱정이 되는건 어쩔 수 없다고.”
“왜 그 생각을 너만 한다고 생각하는건지.”

하지만 이대로도 괜찮지 않은가. 충분히 마음 속까지 따뜻한걸. 에바리스트와 함께 있다면 아이자크는 그것으로 족했다. 그렇기에 자신보다도 그를 먼저 챙겼고, 그렇게밖에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것은 에바리스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아이자크는 그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나간 세월과 그에 따라 쌓인 정은 두사람을 서로에 의해 길들여지게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에 대해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러고 있는거 들켜도 괜찮아?”
“어차피 둘뿐이잖나.”
“흐음. 하긴, 우리 둘이 언제는 안붙어있었다고. 새삼스럽네.”

익숙해졌다.

“새삼스럽군.”
“그러게.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없을텐데 말이야. 하긴, 누가 함부로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대위님과 소령님이신데.”

함께 있는 것이.

“그것도 그렇군.”

서로가 없으면 그것이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로.

“있지, 에바. 추운건 싫지만 난 겨울이 좋더라.”

영 무심한듯한 빛을 띄고 있는 금색 눈동자가 아이자크에게로 향한다. 그 눈은 아이자크에게 이유를 묻고 있었다. 아이자크는 잠시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씩 웃었다. 잠시 눈동자를 데룩, 굴리더니 갑작스레 에바리스트의 안경을 뺏어 대충 걸쳐보는 것이었다. 에바리스트는 갑작스러운 아이자크의 행동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고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의 볼을 감싸 잡았다. 아이자크의 새끼손가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안경이 에바리스트의 턱선에 닿았다. 안경테의 감촉이 차가웠다. 하지만 볼에 닿은 아이자크의 손은 따뜻했다. 어쩐 일인지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다. 에바리스트는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의 앞머리를 살짝 쓸어 올렸다. 서로의 어깨 끝에 걸쳐져있던 군복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맞추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왜냐하면, 비밀이야.”
“…너란 녀석은 정말이지...”
“궁금하면 직접 상상해보시던지.”

싱글벙글한 채로 에바리스트에게 직접 안경을 씌워주고 아이자크는 손을 떼어냈다. 어느새 부대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던 눈은 거의 다 치워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가 보고 있었던 설경도 이미 평범한 군부대의 모습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아이자크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잠시간 미소가 지워진 입가. 에바리스트는 그런 아이자크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아이자크는 다시 웃으며 떨어진 자신의 군복을 주워들어 대충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몇걸음 먼저 걷다가, 이내 뒤돌아 에바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이만 들어가자, 에바.”

*

공기가 차다. 검을 검집에 꽂아넣고 에바리스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사람을 향해 뒤돌았다. 그들이 지시자라 칭하는 소녀는 전투가 끝나자 에바리스트를 향해 걸어오는 듯하더니, 그를 지나쳐가 쓰러진 요마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그것은 전사들의 기억을 찾아주기 위해 필요한 조각의 재료였다. 이미 대부분의 기억을 되찾은 두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었지만, 아직 인형의 여관에는 기억을 잃은 전사들이 가득했다. 그들을 위해 싸워주는 것에 대해 두 사람은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는 구면인 자들도 있었고,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자들도 있었지만 그러했다. 많은 기억을 찾았다 하더라도 아직 찾지 못한 기억들이 많았다. 그들은 조용히 싸우면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자크는 방금 전의 전투에서 다친 팔을 꽉 쥐고 있었다. 지옥의 문지기라 불리는 쌍두견에게 물린 상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다친 것보다 에바리스트에게 위험한 전투를 떠넘긴 것이 영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에바리스트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에바리스트를 보며 아이자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꽉 감았다. 당연히 그러게 조심하지, 하는 잔소리 세례가 쏟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잔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잡고 있던 팔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자크는 실눈을 떴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에바리스트가 있었다. 생각치도 못한 반응이라 아이자크는 벙 찐 표정으로 작게 입을 벌린 채 에바리스트를 바라보았다.

“괜찮나?”


피가 배어나오는 군복을 보며 에바리스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자신의 곁에 다가온 리즈와 함께 그들을 보면서 소녀는 리즈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먼저 가자는 뜻이었다. 리즈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녀도 그를 따라 걷다가 문득 뒤돌아 아이자크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살짝 내리는 그 행동은 먼저 갈테니 나중에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아이자크는 어쩔수 없네, 하고는 피식 웃었다. 금방 지금 웃음이 나오냐는 까탈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바리스트는 일부러 아이자크의 다친 팔을 잡아끌었다. 아이자크가 윽, 하고 작게 신음했다. 아이자크를 끌고 간 에바리스트는 그를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에 기대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아이자크의 상의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군복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을 아이자크는 약간 당황한 채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검은색 셔츠는 다친 팔을 따라 검붉은 색으로 피에 절어 있었다. 쌍두견에게 물린 상처는 꽤나 깊었다. 팔이 잘리지 않은 것이 다행일까. 이런 세계라서 저렇게 멀쩡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자크의 정신력이 엄청난 것인지 에바리스트는 당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심란한 표정을 하고 제 팔을 바라보는 에바리스트를 보며 아이자크는 피식 웃었다. 반대쪽 팔로 에바리스트의 군모를 벗기고 바닥에 내려놓더니, 두어번 슥슥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헝클어트렸다.

“아이자크!”
“너만 괜찮으면 난 괜찮아, 에바.”

바보같긴… 중얼거림과 함께 찌푸려지는 미간을 아이자크는 꾹꾹 눌렀다. 그런 아이자크의 손을 잡아 내리고는 에바리스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런 곳에서는 치료는 커녕 지혈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피가 많이 멈추긴 했지만, 그렇다고 피가 나지 않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가기에는 먼저 떠난 그들의 지시자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믿음직한 에이스가 옆에 붙어있더라도, 전사 한명만을 믿고 갈 곳이 아니었다. 먼 발치에서 보기에도 환영성이라 불리우는 그 곳은 위험한 장소로 보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다친 아이자크를 데리고 가기에도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정말로 강행군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충이라도 지혈을 하기 위해 아이자크의 팔을 잡고있던 에바리스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어차피 이 세계에선 금방 나아질거 알고 있잖아, 에바. 한동안 저릿저릿하긴 하겠지만.”
“하지만…….”
“언제 이렇게 여려지셨을까.”
“…헛소리 하지 마라.”

피가 묻어난 에바리스트의 손을 자신의 팔에서 떼어내고, 아이자크는 살풋 미소지었다. 그리고 어쩐지 아픈 표정을 하고 있는 에바리스트의 볼을 쓸어내렸다. 흰 장갑의 감촉이 찼다.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거야. 그동안 둘이서 오붓하게 이야기나 하자고.”

인형의 여관은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기에는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몇십 명이나 되는 각기 다른 성격의 전사들이 모인 장소여서 언제나 시끌벅적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에바리스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끄덕이고 아이자크의 옆에 앉았다.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가 건네준 자신의 군복을 다시 입었다. 하지만 추위가 영 가시지 않는지 몸을 떨었다. 그것이 신경 쓰이는 듯 에바리스트는 코트를 벗어 아이자크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런 에바리스트를 빤히 쳐다보다가 아이자크는 덮혀진 코트를 반 쯤 에바리스트에게 끌어다 그에게도 덮어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건지…”
“그냥 이것저것?”

다친 것은 자신인 주제에 아이자크는 혼자 신이 나있고, 오히려 에바리스트가 영 걸리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가 이상해 보이긴 했다. 애초에 말린다고 말려질 아이자크가 아니었기에 에바리스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돌아가라도 해도 돌아갈 아이자크가 아니었고, 아이자크를 혼자 보낼 수 있을 에바리스트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빚이 있었다. 너무나도 큰 빚이.

“아참.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 가르쳐줄까?”

얼마 전에 떠올려낸 기억 속의 대화였다. 그러고 보면 어째서인지 잠시간 고민을 했던 것도 같다. 결국 답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에바리스트는 굳이 대꾸하지는 않았다. 아이자크는 여전히 미소를 띈 채로 흐음- 하고 고민하는듯 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에바리스트는 그런 아이자크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웃긴건지, 배까지 잡고 웃고있다. 저 혼자 무엇이라도 기억해낸 것일까. 아이자크는 그렇게 한참이나 웃다가 고개를 돌려 에바리스트와 눈을 맞추었다.

“그건 당연한거잖아? 네가 태어난게 겨울이니까.”

그 말에 에바리스트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아이자크에게 있어서 그것은 정말이지 당연한 것이었다.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눈 쌓인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겨울이구나. 네가 온 날이구나, 하고.”
“그것 때문에 그 때 눈이 치워지는걸 보고 그리 쓸쓸한 표정을 했었나.”
“…내가 그랬었어?”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아이자크는 제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에바리스트는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아이자크는 기억을 되짚는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상한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하늘이 맑았다.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아이자크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랬었구나.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눈이 치워지는 것에 알지 못할 씁쓸함을 느끼긴 했었지만, 그것이 표정에까지 드러날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 느낌의 근원지를 알지 못했었으니. 눈이 없어진다는 것은 겨울이 끝나감을 의미했다. 아이자크에게 겨울은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담고있는 계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비록 녹아 사라지는게 아니라 치워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헤에. 에바, 그런 것까지 캐치해낼 정도로 날 신경썼었구나? 잔뜩 풀려있었으면서.”
“…헛소리 하는걸 보니 아픈건 다 나았나보군.”

쌀쌀맞게 대답한 에바리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제 제복 코트를 휙 가져가 걸치고는 넓은 보폭으로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이자크는 그런 에바리스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다행히 눈 때문에 에바리스트의 발걸음은 그닥 속력이 붙지 않았다. 아이자크는 풀려져있는 자신의 군복 단추를 급하게 채우면서 빠른 걸음으로 에바리스트를 따라갔다. 그리고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에바도 눈을 좋아하지?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걸 알고 있으니까. 함께 쌓인 눈을 바라보던 그 날, 에바리스트의 입가에 미미하게 걸쳐져있던 그 미소를 아이자크는 알고 있었다.

“같이 가, 에바!”

─하지만 사실은 그 미소의 이유가 정말로 오랜만에 아이자크와 함께 평화를 즐길 수 있었어서, 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도 평생 그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하랴. 금방 에바리스트를 따라 잡은 아이자크는 저 혼자서만 신이 난 채로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팔의 통증도 사르르 사라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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