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20세도 채 되지 않은, 아직 어린 소년들이었다. 하지만 나이와는 별개로 어떤 어른들도 겪지 못했을 일을 수도 없이 겪은, 그러고도 견고한 마음으로 살아남은 강인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사실 그 둘이 겪은 비극은 그 세대의 아이, 어른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휩쓸고 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더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소용돌이 프로폰드. 직접 그들의 평화를 앗아간 그것과 맞서 싸우려 했다. 결전의 날, 모든 비극의 씨앗이 사라지던 그 자리에는 소년들 또한 있었다. 이제는 빛바랜 영광만이 남은,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진 레지멘트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은 지금 이 자리에 굳건히 살아남아 존재했다. 그리고 침묵했다. 지금은 레지멘트라는 그 이름이 군 내부에서 떠들썩한 이야깃거리로 사용되고 있지만, 아마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레지멘트는 과거의 영광만을 간직한 채 잊혀져야 하는 단체였다.
평화가 찾아온 지금, 철벽의 요새 속에 숨어있던 그란데레니아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간 소년들은 더 이상 레지멘트의 성기사가 아니었다.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이제는 군의 개가 되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똑같은 군대였지만, 목적도 체제도 다른 두 단체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적응 운운할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출신도 과거도 하나 묻지 않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승부하는 세계. 에바리스트는 아직도 람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더 이상 레지멘트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득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도, 출신도 말할 수 없었다. 발목만 잡고 있는 듯한 레지멘트였지만 에바리스트는 굳이 그 이름을 탓하려 하지는 않았다. 한 때 목숨을 구해주고, 삶을 연명하게 해주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지상에 레지멘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같은 레지멘트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레지멘트였다.
영 예쁜 색깔은 되지 못하는 금안이었다. 어릴 적에는 정말 보석처럼 반짝였던 것 같기도 한데. 거울을 보던 에바리스트는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이제 와서 신경써봤자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색또한 탁한 색으로 변질된지 오래였다. 에바리스트는 몸을 틀어 아이자크에게 시선을 두었다. 아이자크는 재질이나 생김새는 낯설었지만, 익숙할 수밖에 없는 군화를 신고 있었다. 이내 시선은 임시로 해놓은 안대에 와닿았다. 금방 너에게 잘 어울리는 것으로 바꾸어 줄 것이다. 그것이 너를 위해 제일 처음 해야 할 일이었다. 함께 위로 나아갈 이에게 맹세의 증표로써 줄 것이었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에바."
에바리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시시한 훈련병 생활도 이제 종지부를 찍었다. 나가야 할 곳은 진짜 전쟁터였다. 둘중 하나, 자칫하면 둘 다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갖 참사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목숨이었다. 쉽게 스러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이자크가 쥐고 있는 검을, 그것보다도 더 아이자크를 믿었다. 벌써 몇 년을 함께 했을까. 등뒤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에바리스트는 그 하나만을 신뢰했고, 앞으로도 쭈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자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삼 긴장이라도 되나봐?"
아이자크가 미소지었다. 그란데레니아 군인으로서는 처음 나가는 전장이었다. 소용돌이 안과는 전혀 다른 곳. 정말 긴장이라도 된다 하더라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은 피비린내와 어울리지 않는 나이였다. 하지만 동시에 피비린내와 함께 살아왔다. 태어난 시대가 잘못되었을까. 조금 더 이후의 세계에 태어났다면 평범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랬다면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만났더라도 지금처럼 깊은 관계는 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모든 인과관계에 따라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겠지만, 서로에게 지금 제일 소중한 것은 서로 뿐이었다. 평화도, 평범한 삶도 서로가 없다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바리스트는 더 높은 곳을 꿈꾸었다. 그 무엇도 더 이상 그들의 세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아이자크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그를 따랐다. 레지멘트가 붕괴되고, 생존자들을 찾는 눈을 피하며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에바리스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이자크부터가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은 어리지만, 자신의 도련님은 커서 꼭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남부럽지 않게 멋있게. 그리고 그의 곁에서 그를 지키는 것은 자신일 것이다. 그럴 것이고, 그래야 했다.
"…아이자크."
나지막한 목소리가 맹우를 불렀다. 군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것이 꼭 맞았다. 아이자크는 고개를 들어 에바리스트를 쳐다보았다. 안경 너머의 금안과 단 하나 남은 청안이 마주닿았다. 그 때, 자신이 조금만 더 신경써 행동했다면 안대 너머의, 그가 제 손으로 뭉개버렸던 오른쪽 눈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에바리스트는 그런 감성적인 생각에 잠기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기에는 미래가 너무 불안정했다. 그리고 이제는 안전을 위해서라도 묻어두어야 할 기억이었다. 미련을 두지 않기로, 그렇게 결정했다. 앞으로는 앞만 보고 나아가야 했다. 그래, 뒤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차례 버렸던 유년시절의 고향이었고, 지금 버리게 될, 버리고 있는 레지멘트였다. 또다시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아이자크 뿐이었다.
"강해지자."
그 말에 아이자크는 멀뚱멀뚱 에바리스트를 쳐다보기만 하다가, 이내 웃었다. 굳이 이런 식으로 다짐을 다지지 않아도 강해져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포레스트 힐을 뒤로하던 그 날부터 아이자크에게는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똑같이 바들바들 떨고있었으면서 자신의 앞을 막아서준 어린 에바리스트. 그를 지켜야했다. 적어도 그의 짐은 되지 않도록 레지멘트에서도 독기를 품고 강해지려 노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으로는 단 둘 뿐이었다. 운명 공동체나 다름 없었던 레지멘트와 이곳은 달랐으니까. 형식상의 동료, 그보다는 그저 같은 편. 그 정도가 적당한 표현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강해져야 했다. 너는 앞만 보며 나아가도 돼, 에바. 뒤는 내가 철저히 봐줄테니까. 그럴 수 있도록 지금보다도 더 강해질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전해질 터였다.
"죽지 마라, 아이자크."
"너야말로. 물론 너는 내가 지킬거지만."
아이자크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온 뒤로 아이자크는 부쩍이나 여유로워진 것 같았다. 아니면 그새에 저 혼자 부쩍 어른이 되기라도 한 것일까.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썩 나쁜 변화는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청색 외눈이 향하는 곳의 변화는 없을테니까. 이제는 친구,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도 괜찮았다. 맹우 정도로 괜찮을까. 사실 그런 단어들로 표현하기에는 무척이나 미묘한 관계였지만.
"마음 단단히 먹어. 앞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소용돌이 안보다 더하겠어?"
"입조심도 하고."
키득거리는 아직은 덜 자란, 하지만 슬슬 청년의 티가 엿보이기 시작하는 소년에 에바리스트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초조해할 필요가 무엇 있을까.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곁에는 가장 훌륭한 전투원이자 가장 믿는 이가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안심할 수 있었다. 단 둘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더 안정적이었다. 아마도 아이자크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으리라.
아이자크는 장갑까지 낀 후에 에바리스트에게도 자신이 낀 것과 같은 것을 건네주었다. 에바리스트는 그것을 받았다.
"이만 나가자."
*
그리고, 사실은 제일 걱정했던 것이 이것일지도 모른다. 전투는 승리, 하지만 사상자 다수. 레지멘트 시절의 전투와는 확실히 달랐다. 죽이지 않으면 이쪽이 죽는다는 사실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죽이는 대상부터 차원이 달랐다. 그 시절에는 적어도 죄를 짓는 감각은 아니었는데. 검날의 끝에 닿는 감각, 총구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인간이었다. 뒤집어쓰게 될 피도, 모두. 물론 그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이자크의 반응을 간과했을 뿐이었다.
처음 전장에 나오고, 적이 인간이라는걸 새삼스럽게 꺠달아버린 아이자크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렸었다. 움직임이 평소 그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평생 싸우는 삶을 살아온 그였고,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또한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숨통을 끊는 행위를 최대한 피한 것이었다. 계속 그런 위태로운 전투를 이어가던 아이자크의 총구가 사람의 심장으로 향하게 된 이유는, 에바리스트가 위험에 쳐해서였다.
이름을 부르려던 에바리스트의 입술이 앙다물렸다. 아이자크가 절어있는 피는 예전같은 요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아이자크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빨갛게 젖은 금발은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고, 외눈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바리스트는 해야 할 말조차 잊고 말았다. 무언가를 잃은 듯한 모습의 아이자크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검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신을 따라 흐르는 피.
"…지금 무슨 짓을 한걸까?"
지금 아이자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위로? 그런 것으로 저런 모습의 그를 달랠 수 있을까. 에바리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아이자크를 제일 잘 아는게 그였다. 에바리스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성급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굳게 먹은 자신과, 자신을 따르기로 한 아이자크는 그 각오부터가 다를 터였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에게 그 무슨 말도 해줄 수 없었다. 하늘은 끔찍할 정도로 맑았고, 그 아래의 소년들은 여전히 절망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에바, 에바."
애타는 목소리가 에바리스트를 불렀다. 그제야 아이자크는 고개를 돌려 에바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에바리스트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꿋꿋히 마주했다. 그것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내 아이자크는 꽉 쥐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피에 젖어있는 땅은 꼭 소년을 닮아있었다. 척박하고, 오로지 햇빛에만 의지하고 있는. 지금 아이자크 또한 그러했다. 금발의 소년은 에바리스트만을 의지했다.
"……괜찮아."
"에바……."
"괜찮아, 아이자크."
힘없이 무너지는 몸을 에바리스트가 받쳐 끌어안았다. 그리고 계속 괜찮아, 괜찮아 하고 그 귓가에 중얼거렸다. 자신이 끌어안고 가야 할 사람이었다. 이런 것으로 무너질 아이자크가 아니라는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기에 에바리스트는 그를 지탱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청안은 꼭 포레스트 힐이 무너지던 그 날의 것과 똑같았다. 그 때의 자신은 그에게서 무언가의 보호본능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달랐다. 하나뿐인 맹우,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연유로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괜찮아."
아이자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살인은 소년에게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져 올까. 소년은 앞으로 이 행위를 계속 해나갈 수 있을까. 지금 떨고있는 아이자크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남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위한 일도 아니었다. 그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에바리스트를 위한 일이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 그가 목표하는 바를 이루게 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의 곁에 남아있기 위해서…….
"…응, 에바. 괜찮을거야."
애써 웃는 소년의 미소에 에바리스트는 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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