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유령검님
네게 입술을 내어주는 것 쯤이야 별 일 아니다. 네가 단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다. 이미 너와 나의 관계는 친구를 넘어서 있었기에, 네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 상관 없겠다는 생각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우리들은 정말로 서로뿐이었고,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실제로 너는 너를 희생해서 나를 구했고, 네 한쪽 눈은 영영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죄책감을 가졌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나도 너를 위해 행동하자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렇기에 나보다 너를 위해 도착한 곳이 제국, 그란데레니아였다. 우리 둘이라면 분명 이곳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네가 하고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거라고. 정말로 너를 위한 우리들의 삶을 시작할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전쟁중이라 하더라도 이 시기를 이용해 제국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을 다 해줄것이라고. 그런 소망이 있었다. 사실은 나 자신보다 너를 더 믿었다.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성공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앞만 보며 나아갔다. 뒤는 네가 확실히 봐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너는 기대에 부응하여 뒤뿐만이 아니라 앞까지 함께 보아주었다. 그란데레니아 군생활과 레지멘트 생활은 전혀 달랐지만, 너는 군말없이 적응해주었다.
네가 변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나를 위해 싸우던 네가 언제부턴가 네 본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육을 시작했다. 물론 그조차도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됐다는 것, 잘 알고있었다. 너를 변하게 만든건 바로 나였다. 네 변화에 대해 왈가왈부할 처지는 되지 못하기에,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라리 그런 변화가 너에게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전장 위에서 살육에 망설임이 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죽기 일쑤니까. 아마도 내가 빠른 시간에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변한 네 덕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너의 변화를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너라는 인간을 망치는 일임을 잘 알고있음에도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너는 언제나 나에게 웃어주었다. 나를 지켜주었고, 언제나 네 곁에 있어주었다.
네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이 세계에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찾은 기억은 최악, 그 자체였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람은 아이자크 로스바르드 단 한사람이었다. 생애 가장 고마운 사람. 그리고 생애 자신이 가장 모질게 굴었던 사람. 미안하다고 말해야했으나 끝내 말하지 못한 사람. 생애 단 한사람 뿐일 사람. 하나하나의 기억 속에는 네가 있었고, 언제나 단 둘뿐이었다. 어릴 적 나에게 의지했던 너는 어느새 내 버팀목이 될만큼 달라져있었고, 나는 그런 너에게 응석부리는 어린아이마냥 제멋대로 굴었다. 너는 그런 것을 다 참고 받아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현세를 살았던 나는 너를 두고 대체 무슨 짓을 해버린 것일까.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알면서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과거. 차라리 이런 기억이었다면 찾지 않았을텐데. 찾으려하지 않았을텐데.
기억을 찾은 후부터 너를 대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것조차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것만 같아서, 최악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너에게 너무 미안했다. 단지 그 감정 뿐이었다.
그 때의 자신은 무슨 생각으로 끝내자는 말을 먼저 꺼낸 것일까. 아이자크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거라 너무 기세등등 해 있었던가. 그것조차 그에게 너무한 일 아닌가. 너는 그 말을 승낙하였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도 가장 위험할 때에,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웃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너에게 너무 고마워서. 그렇게 결별선언을 해놓고 당연스럽게 네가 나타나줘서. 하지만 그런 일을 너 혼자 겪게 해놓고 살아서 너를 볼 수는 없었다.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너에게 더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이기적이었으니까. 너에게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하나 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
"에바는 왜 내가 더이상 기억을 찾지 않았으면 해?"
너에게는 지금 첫번째 기억밖에 없다. 그 이전의 기억은 단편적인 것만 생각난다고 하였고, 이후의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글쎄, 하는 짧은 대꾸에 아이자크는 영 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억을 찾고 싶을거란거 잘 알고있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마저 이기적이었다. 네가 기억을 모두 찾는다면 모질었던 나를 떠날것만 같아서, 나를 매도할 것만 같아서, 그런 불안감이 너무나도 컸다. 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였다. 그 기억을 보면서 괴로워할 너를 내가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은 나의 죽음을 너의 탓으로 돌릴 네가 제일 보고싶지 않았다.
"하긴, 기억같은게 무슨 소용이겠어."
아이자크는 미소지었다. 에바리스트는 말없이 살짝 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기억을 모두 찾게될까봐, 그런 초조함이 있었다. 이기적이었던 사람은 끝까지 이기적일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 너랑 나랑 함께 있는게 중요한거지. 안그래?"
"…그래."
에바리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그들의 지시자와 탐색을 나갈 시간이었다.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똑같이 일어났다. 오늘은 같이 가자. 에바리스트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에바,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무슨?"
"너는 어떻게 죽게 되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에바리스트는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아이자크는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지는걸 보고말았다. 무언가 잘못 물은 것이라는걸 깨달았다. 입술을 꾹 깨무는 에바리스트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고, 손을 뻗어 그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다 피나. 그리고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하긴, 피맛 나는 키스도 나쁘진 않지?"
"…헛소리."
에바리스트는 그 말에 작게 혀를 찼다. 여전히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고 있는 아이자크의 손가락을 밀어내고 에바리스트는 대충 걸어놓았던 코트를 걸쳤다. 아이자크가 자신의 반응이 이상하다는걸 깨닫고 일부러 한 이야기라는 것은 잘 알고있었다. 본심도 섞여있겠지만. 이상하게도 입술을 매만져오는 감촉이 사라지지 않았다. 두어번 제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던 에바리스트는 고개를 젓고는 문을 열었다.
"먼저 간다, 아이자크."
"아아. 금방 따라갈게."
에바리스트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아이자크는 맥이 탁 풀린듯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너를 죽게만든건 사실 나겠지."
사실 기억같은 것, 옛적에 다 찾아버린지 오래였다……. 그것을 알게될 에바리스트가 자신을 불편하게 대할것은 뻔하기에 숨기고있던 것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약간 변해있었으니까. 누구보다도 에바리스트 바르트를 제일 잘 아는건 아이자크 로스바르드였다.
"그 때 내가 너를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아이자크는 문득 픽 웃었다. 실없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에바리스트도 이기적이지만, 사실 자신또한 이기적이었다.
우리가 그 세계를 떠나 이 세계에 왔기에, 네가 다시 나 하나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잖아.
//
to. 버들여우님
필요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이자크에게 고맙다던가, 미안하다던가의 말을 따로 하지 않은 이유도 아마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맹우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필요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다. 그래, 사실은 애초부터 아이자크가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무엇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기분을 충족한 것일까. 아무리 상대가 에바리스트라고 하더라도, 상대가 에바리스트기에 아이자크는 수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내킬 때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 때 뿐이었다. 아이자크는 그렇게 참을성 있는 사내는 아니라고 알고있었다. 그것이 에바리스트와 그 자신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맹우였고, 일생을 함께한 이였고, 유일하게 믿는 이였고, 우습게나마 연인이라 이야기했던 이였다. 대체 아이자크는 무엇에 만족하여 조급하게 굴지 않았던 것인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에바리스트는 미궁에 빠져들었다.
*
"일어나, 에바. 회의에 늦으면 곤란하잖아?"
아침잠에 취한 이들이 으레 그렇듯 에바리스트는 반사적으로 조금만 더, 하고 웅얼거리려다 작게 혀를 찼다. 이곳은 그란데레니아가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이 회의 같은 것이 존재할 리도 없었다. 그렇게 사고를 끝낸 에바리스트는 가볍게 아이자크의 말을 무시하고 넘겨버렸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자크는 피식 웃고는 에바리스트가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머리를 쓸어넘겨주는 익숙한 손길은 어쩐지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에바리스트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흠칫 놀라버렸다. 아이자크가 안대를 푼 것은 썩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환한 금발에 어느정도 가려져있긴 했지만 눈꺼풀 위의 흉터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무의식적으로 뻗은 손이 그 흉터에 닿았다. 그 기억을 찾고 나서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의 오른쪽 눈에 대해 유독이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물론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자크는 닿아온 손을 부드럽게 맞잡고 그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에바."
"…이제 와서 멀쩡해지기를 바라는건 무리겠지."
아이자크는 대답없이 그대로 잡고 있던 에바리스트의 손을 침대 위에 찍어 눌렀다. 아직 잠이 덜 깨어있었다. 하지만 에바리스트는 이 뒤에 일어날 상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하여 승낙의 뜻으로 눈을 감았다. 금방 익숙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간질이듯 두어번 입술을 훑는 혀에 에바리스트는 미약하게 몸을 떨었다. 어쩐 일인지 꽤나 쉽게 응해주는 에바리스트에 아이자크는 조금 들뜬 듯도 했다. 앙다물고 있던 입술이 순순히 열리자 아이자크는 느릿하게 입술을 겹쳐 혀를 얽었다. 쓸데없이 방음이 뛰어나지 못하여 언제나 시끌벅적했던 인형의 여관이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터에, 혀가 얽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드려왔다. 어떻게 환한 아침부터 이렇게 에로틱한 분위기가 연출될 수 있는건지. 아이자크는 잠시 고민에 빠졌으나 이내 상대가 에바리스트라는 것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평생을 바쳐온 상대가 아니던가. 사랑스러움이나 소중함을 넘어선 것이 존재했다.
그러고보면 이렇게 부드럽게 입맞추어 보는 것도 오랜만인 일이었다. 생전의 두 사람은 끝에 치달을 수록 사이가 나빠지기만 했고, 기억을 어느정도 온전히 찾은 것은 근최근의 일이니 이런 사실들에 은거하면 그럴 만도 했다. 과거에 비하면 오히려 지금은 에바리스트 쪽이 더 적극적인 형편이었다. 슬슬 숨이 가파오는데도 입술을 떼어내지 않는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이자크는 슬쩍 손을 내려 에바리스트의 셔츠 단추를 두어개 풀어냈다.
"…아이자크."
그제야 입술을 떼어낸다.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와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안경도 끼지 않았는데 제대로 보이긴 하는걸까. 본인이 아니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음, 내가 눈이 하나라서 좋은 점이 하나 있긴 하지."
아이자크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레 코끝을 부벼왔다. 그러고는 한개씩 천천히 다시 셔츠 단추를 풀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밀어내지 않는 것은 오늘은 응해주겠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다. 대낮부터 무슨 남사스러운 짓이냐 누가 비난해도 무어라 할 말은 없었지만, 모닝섹스가 하루의 능률을 좋게 만들어준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아니면 말고. 아이자크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아이자크에게 있어서 에바리스트는 전생의 평생을 바쳤고, 이곳에서의 생도 모조리 바쳐 사랑할 사람이었다. 아마 후생에서도 만나 그를 사랑하고 있으리라고 아이자크는 생각했다. 아니, 사실 후생같은 것은 이제 필요 없었다. 현세에 부활하지 못하더라도 상관 없었다. 아이자크에게 세계란 에바리스트 자체였고, 어떤 형태로든 그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것 자체로 완벽했다.
"내 하나뿐인 눈에는 오롯이 너 하나만 가득 담을 수 있잖아. 지금처럼."
아이자크가 미소지었다. 에바리스트는 그 미소를 좋아했다. 그것은 그란데레니아 군 시절, 광기에 차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에바리스트가 진정으로 믿는 아이자크의 진짜 미소였다. 같이 가자고 물은 말에 대답과 함께 보였던 것이었다. 에바리스트는 말없이 아이자크를 끌어안았다. 내가 너를 전생에 그렇게나 괴롭게 했는데도 기억을 찾고 나서조차 군말 하나 없었던 그였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미련할까, 어떻게 이렇게나 바보같을까. 하지만 에바리스트는 과거에 대해 입을 다물어준 아이자크가 고마웠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그 자신에게 모질게 굴었던 것에 대하여 아무런 추궁 없이 덮어주고 괜찮다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아이자크이기에, 아이자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자크에게 그것은 사실 용서라 부르기도 미묘한 것이었으니.
"아니, 그저… 내 욕심일 뿐이다."
나는 네 푸른색 눈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으니. 뒷말을 의도적으로 작게 중얼거린 탓에 아이자크는 곧장 뭐라고? 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순순히 다시 이야기해줄 에바리스트가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말 없이 다시는 뜨이지 않을 오른쪽 눈 위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너는 몇번이고 이것이 내 죄가 아니라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단 하나 남은 왼쪽 눈으로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죄가 아니더라도 이것은 내가 평생 이고 가야 할 짐이다. 비단 그것은 아이자크의 오른쪽 눈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일생에 아이자크에게 저지른 모진 행동들을 모두 합하여 그 눈에 다시 한번 맹세했다. 너를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다. 네가 놓아달라 하더라도 놓지 않을 것이다. 네가 파멸하려 한다면 기꺼이 너를 끌어안고 함께 스러질 것이며, 우리가 종극에 치닫는 그 날에는 네 손을 맞잡고 너와 함께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이제 다시는 깨어져서는 안될 약속. 네가 나를 물어 뜯더라도 그 상처를 움겨쥐며 너를 품에 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도 나를 떠나지 말아라, 아이자크."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쓰디쓸지도 모르는 입맞춤만이 그것을 대신했다.
//
to. 루시
아이자크,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어떤 말이냐 하면... 새삼 이렇게 글로 적자니 어색하고,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모르겠군. 그래도 너에게 꼭 전해야 하는 말이다. 언제부터 우리의 사이가 이렇게 틀어진걸까. 네가 1년 전, 그 가을 날에 나에게 했던 말. 계속 생각해봤었다. 간파당하고 있다는 말, 너는 필시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이겠지. 그 때도 분명 알고있었다. 단지 그때는 조급함에 차있었던 것도 같다. 목표에 다다르는 제일 빠른 방법을 잡은 셈이었으니까. 그녀를 신용하지 못하겠다는 너에게 화를 내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믿지 않으면 돌아오는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네가 이해하지 못한 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평생 서로밖에 없었으니.
*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일상이었다. 꿈자리가 썩 좋지 않았던 아이자크 로스바르드는 영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에바리스트 바르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근 최근 굉장히 바빠진 그여서, 집무실 책상에 엎드려서 자는 횟수가 잦아진 상황이었다. 아이자크는 익숙한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집무실 안을 보게 된 순간, 아이자크는 그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인퀴지터의 내습, 에바리스트의 부상, 그리고 결별. 에바리스트 바르트와 아이자크 로스바르드의 결별이라니, 절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 꿈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아이자크는 후, 하고는 제 이마를 짚었다.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생각을 정리했다.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너무 늦었다. 에바리스트를 믿었으므로, 그가 혼자가 되더라도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이제 혼자라 부르기에도 묘한 상황이었다. 높아진 계급도 있었지만 옆에 존재하는 제국의 절대 권력. 에바리스트는 그녀를 믿고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믿음은 맞는 것일 것이다. 자신의 예감이 이상한 것 뿐일 것이다. 그와는 이제 오랜 인연이 끊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아이자크는 여전히 에바리스트를 믿었다.
아이자크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에바리스트 없이 자신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이자크는 고개를 저었다. 어린아이의 철없는 반항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자크는 자신이 자신의 세계를 떠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결국 상처입을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제 에바리스트의 곁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끊임없이 충돌할 바에는 떠나는 것이 나았다…….
그의 책상 서랍 안에는 예비용 안경이 두어개 더 있었다. 아이자크가 자주 깨먹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자크는 물끄러미 그것을 쳐다보다가 대뜸 하나를 집어들었다. 에바리스트는 어릴 적부터 꽤나 눈이 나빴었다. 아마도 어린 나이부터 책을 눈에서 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아이자크는 생각했다. 어린 에바리스트는 혼자였으니까. 그래서 아이자크를 알게된 이후로 그를 데리고 마을 근처 여기저기로 놀러다니곤 했었다. 아마도 외로웠을 것이다. 아이자크는 잠시 옛날 일을 추억하다가 잡고있던 안경을 꽉 쥐었다.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제 끝이니까. 내 입으로 끝을 선언했으니까. 생각해본 적도 없는 마지막.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결별. 미련이 없을리가 없었다. 작은 한숨소리가 집무실을 메웠다.
아이자크 로스바르드는 그 날 이후로 에바리스트 바르트의 집무실을 찾지 않았다. 그가 입원한 병원도 찾아가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그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의아함을 품었지만, 그들의 일이겠거니. 하고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
그리고 그 해의 어떤 날은, 정말로 슬픈 날이었다.
*
모든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마치 계획되어있던 일이었다는 양. 그래, 계획되어있던 일이 맞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바리스트의 시체는 아이자크가 먼 고향에 묻어주었으니, 제국에서 그의 장례식은 시신 없이 진행되었다. 황비의 장례식도 진행되었으나, 그에 굴하지 않을 정도로 에바리스트의 장례식도 거창하게 진행되었다. 새삼 그가 이 제국에서 꽤나 굉장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이자크는 실감했다. 하지만 그럼 뭐할까, 그는 그가 이용하려 했던 제국에게 역으로 이용당했다.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 아닌가. 레지멘트로서도 이용당했던 그였다. 제국은 무엇을 위해 에바리스트를 희생물로 쓴 것일까. 아이자크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집무실을 정리하는 일은 당연스럽겠지만 아이자크가 맡았다. 그것에 불만을 갖진 않았다. 그리고 사실 정리라고 해보았자 별 것 없었다. 워낙 집무실을 깨끗하게 쓰는 이였으니.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마치 아무도 없었던 마냥, 그는 그렇게 집무실을 사용했었다. 거기다가 무언가 직감이라도 하고 황비를 만나러 갔던 것인지, 평소보다도 더 깔끔했다. 그의 흔적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에 어쩐지 씁쓸해졌다. 이제 이곳에 돌아올 자가 없다는 것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이자크는 이마를 짚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직도 현실이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
의자에 앉아서야 눈에 띄인 것이 있었다. 잠겨있는 안쪽 서랍. 애초부터 그의 집무실에 들어올 수 있고, 안쪽에 위치한 서랍을 열 수 있을 사람은 한정되어있을텐데. 굳이 따지자면 에바리스트 본인과 아이자크 자신 뿐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집무실을 텅 비워둔 것을 보면 먼저 정리한 것은 확실한데, 어째서 잠겨있는걸까. 집무실 안에서 열쇠를 찾지도 못했다. 열어봐야하는 것일까. 열어봐야 한다는 느낌이 어째서인지 절실하게 들었다. 맞는 열쇠가 없더라도 서랍쯤이야, 힘으로 여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에바리스트가 사용하던 것이다. 그의 것을 마음대로 훼손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이제 곁에 없는 이라도 하더라도…….
하지만 궁금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어차피 에바리스트 바르트와 아이자크 로스바르드였다. 괜찮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안에 들어있던 것은 깨끗한 흰색의 편지봉투, 그리고 그 안에 가지런히 접혀있는 편지 하나. 봉투의 뒤에는 익숙한 필체로 Izac Rosewald, 라고 쓰여있었다.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어째서? 그와 자신은 결별한 사이였다. 그는 자신에게 그 이후로 한번도 연락을 취하려 한 적도 없었다. 이것을 읽어도 되는 것일까. 떨리는 손은 이미 편지봉투를 뜯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이자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랫입술은 꽉 깨물려있었다. 비릿한 피맛이 났지만 아이자크는 상관하지 않았다. 편지를 조심스럽게 잡고 있던 손은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뚝, 하고 편지지 위로 투명한 액체가 떨어졌다. 수려한 필체의 잉크가 번져간다.
*
그렇기에 너에게 더 모질게 굴었던 것 같다. 그때도 말했지만, 매번 신세지고 있는 것은 내쪽이다.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이자크, 사실은 너에게 전해야 할 말들은 이런 것이 아닌데... 이제 와서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그래, 먼저 갈라서야 하겠다고 이야기한건 내쪽이었지. 어째서 그런 이야기가 나와버린걸까. 이제 와서 생각해봤자 늦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더군. 길게 쓰지는 않겠다, 아이자크.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꼭 전해야 할 이야기가. 네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내쪽이 이용당했다는 것도 맞을 것 같더군. 오늘은... 오늘은 그녀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결착을 지을건 네가 아니라 그녀, 이 나라다. 자세한건 만나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 그리고, 모든걸 끝내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
*
편지는 끝마쳐져있지 않았다. 아이자크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같이 갈래?」그 날의 목소리가 오버랩되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이번에도, 너의 손을 잡았을 터였다……. 에바리스트. 아이자크는 작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2차 > Unli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에바] (0) | 2015.04.25 |
---|---|
[로쏘마르] (0) | 2015.04.25 |
에바 R5 이후 날조 (0) | 2015.04.25 |
[아이에바] to. 라르모님 (0) | 2015.04.19 |
[아이에바] 새로운 백년 (0) | 2015.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