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AU
그다지 운수가 좋지 못 한 날이다. 제 자리에 앉은 네일은 끙, 하고 작게 신음하며 머리를 책상에 박듯이 엎드렸다. 머릿속에는 자고싶다는 생각만 사득했다. 며칠 내내 철야에, 퇴근하고 나서도 밀린 서류에 시달리고. 가뜩이나 그래서 잠도 제대로 못잤는데, 하필이면 또 이유모르게 기분이 안 좋은 상사에게 잘못 걸려서 이사실까지 끌려가 안 들어도 될 쓴소리나 잔뜩 듣고. 팀의 실적 부진을 탓하는 말에 그건 제가 잘못한 게 아닌데요. 하고 말대답을 한 게 화근이었다. 그냥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하고 말 것을. 애초에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대답이었다. 조금이라도 잔소리가 듣기 싫었을 만큼 피로가 누적되었다는 뜻이겠지. 어쩌다 이렇게 되었담. 이래뵈도 저는 입사 이래로 우수 사원 타이틀을 놓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 팀의 실적 부진은 정말로 저가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갑작스레 팀에서 서너명이나 회사를 그만둬버린 게 제일 큰 요인이었다. 남은 인원으로 그 부족함을 매꾸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으니까. 이유도 말하지않고 관둬버린 이들을 속으로 씹으며, 네일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지간에, 신입이 들어올 때까지 실적은 어떻게든 매꿔놓아야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쉬고 있을 시간조차 없다는 뜻이다.
"저기, 이거."
네일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몇 남지 않은 팀의 일원중 한 사람이었다. 저보다 몇 달 정도 늦게 입사한 여사원. 방금 타 온 것인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내밀며,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이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위에서 깨지고 오는 걸 다 본 모양이다. 대표격으로 혼난 셈이니, 미안해할만은 하지. 게다가 네일은 모든 팀원들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는 입장이라,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할 것이다. 네일 또한 일종의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 머그잔을 받았다. 종이컵이 아닌 걸 보니, 개인적으로 가지고다니는 물건인 듯 했다. 그런 걸 이렇게 내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네일이 참견할 것은 아니었다. 해줄 말은 "고마워요." 하는 짧은 감사 표현일 뿐이라, 거기까지만 하고 네일은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다 마시면 직접 갖다줄게요."
"아니, 그냥 가지셔도……."
그리 말하며 말 끝을 얼버무리는 그녀를 보며, 네일은 두어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마음만 받을게요." 그리 대꾸하니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의 관심은 부담스럽다. 아무리 고마워서 호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고 말이지. 네일은 머그잔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짧게 인사를 한 후 제 자리로 돌아가는 여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눈을 두어번 깜빡이다, 머그잔을 다시 들고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니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거 자판기 커피가 아닌데. 딱히 커피를 즐기진 않았지만, 자판기 커피에 입맛이 익숙해지다보면 값싼 커피와 비싼 커피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게 되기 마련이다. 잔에 담긴 건 후자쪽에 가까운듯 했다. …입맛이 까다로운가. 그런 줄은 몰랐는데. 방금 다녀간 여성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네일은 아직 커피가 반 쯤 남은 머그잔을 잘 안 보이는 곳에 치워두었다.
제 것이 아닌 물건을 책상 위에 두면 난감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 앞에선 거짓말을 못하는 자신인지라, 새로 샀다고 얼버무리더라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누구 거냐고 캐물어지는 게 일상이었다. 아주 예전부터. 사실 별 것 아니라는 걸 본인도 알텐데, 꼭 그렇게 해야만 속이 풀린다는 듯이 행동하는 걸 볼 때면 네일은 속으로 피식피식 웃곤 했다. 그런 면이 제법 귀여우니까. 묘하게 뾰로통해지는 태도가 말이지. 그래도, 곤란해지는 건 곤란해지는 것이다. 피곤을 태우기 위한 커피는 반 잔 정도면 충분했다. 다 식으면 그 때 한 번에 마시고 돌려주러 가지 뭐.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일은 옆에 놓아두었던 서류 한 장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때, 호랑이도 제발 저리면 온다고. 저 생각을 잠시 한 건 어찌 알았는지, 익숙한 인영이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미스터 클라이스, 이것 좀 대신 처리해줘요."
이 직장 후배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는 뭐람? 네일은 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나가며 서류를 몇 장을 내밀어 온 엘리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그에 답하듯 엘리후는 뭔가 잘못됐나요? 하는 표정으로 네일을 향해 눈을 접어 웃었고. 뭐, 그런 것에 칼같은 성격도 아니었고. 그와 저 사이에 따질 것도 없는지라 네일은 그저 입술만 슬쩍 내민 채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말이지. 하기사, 바쁜 건 저나 엘리후나 마찬가지였다. 실적 문제 때문에 골머리 썩고 있을 건 똑같으니, 조금 도와주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제 일을 처리하는 것 보다는 엘리후의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쪽이 뭔가 더 기분 좋기도 하고.
"대신 다 처리하면 메신저로 연락 할테니까, 직접 받으러 와요."
―그럼 직접 한 번 더 보러 오기.
제대로 말하자면 그리 말한 것이다. 그걸 알아듣지 못할 엘리후가 아니라 생각했다. 엘리후는 작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네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시선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아쉽다는 느낌이 뚝뚝 묻어나올 정도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네일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어떤 게 우리 엘리 속을 썩이고 있었던 건지 확인이나 해볼까. 제 서류를 밀어두고 네일은 방금 받은 것을 올려두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받은 것들은 모두 다 백지였다. 설마 잘못 가져다줬나? 그럴 리가 없는데.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네일은 맨 끝 장에 붙어있는 포스트잇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의미를 이해해, 저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못봤겠지, 하고 생각하는 건 이어지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5분 뒤에 옥상. 일 있으면 천천히 와도 돼. 기다릴게.」
단정한 글씨로 그리 쓰여있었다. 네일은 미소를 지우지 못 한 채로 그 글씨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할 일이 밀려있는 건 사실이지만. 분명히 엘리후는 곧바로 옥상으로 향했을 게 뻔했다. 그러니 5분 뒤는 무슨. 네일은 의자에서 일어나 제법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 * *
그러니까, 옥상은 일종의 도피처였다. 회사 내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사실 해도 될만한 것들도 이상하게 눈치가 보여서, 더더욱 조심스럽게 굴고 있는 게 지금 현재였다. 답답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제법 스릴있기도 하고. 사실 둘 다 이런 걸 어느정도는 즐기는 입장이라 말이다. 그리고, 존대를 쓰거나 일부러 낯설게 대하는 상대의 모습이 꽤나 신선하기도 하고. 그래서 아마 커밍아웃을 당하지 않는 이상은 쭈욱 이어질 상황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주의하고 있는 둘이었기에 커밍아웃을 당할 리는 더더욱 없을 것이고.
"빨리 왔네?"
가만히 난간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저를 바라보는 엘리후를 향해 네일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엘리후는 작게 웃으며 자세를 똑바로 하고, 슬쩍 두 팔을 벌렸다. 네일은 잠시 멈칫했지만 뭘 하라는 건지는 잘 알고있기에,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런 엘리후의 품에 포옥 안겼다. 제 팔로 끌어당겨 안기까지 하니 절로 눈이 감겼다. 편안해서. 그리고 좋아서. 엘리후는 그런 네일을 어쩔 수 없다는 듯 쳐다보며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뭐야, 갑자기."
"충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네가. 그렇게 작게 덧붙이는 엘리후에 네일은 고개를 들고 얄밉긴. 하고 중얼거렸다. 하기사, 제 피로가 누적되어 있다는 걸 엘리후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래도 같이 있을 땐 최대한 티 안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연인의 눈은 속일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엘리후는 푸스스 웃으며 짧게 쪽, 하고 입술을 맞때었다가 떼어냈다. 묘하게 속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에 네일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뽀뽀도 오랜만에 하는 느낌이야."
"어제 저녁부터 같이 못 있었고, 오늘 처음 하는 거긴 하잖아."
"그건 그렇지."
얼마 안 가 엘리후가 입을 맞춰오자, 네일은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올려 엘리후의 목에 걸쳤다. 이쪽이 더 밀착하기에 편했다. 그러니까, 입술과 입술을. 알싸한 커피향이 느껴졌다. 아마도 제 것이겠지. 속으로 아차, 한 네일은 변명거리를 빠르게 고민했다. 졸린 게 안 깨서 타먹었다고 해야지. 그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이내 아쉽다는 듯이 네일의 입술을 한 번 핥으며 엘리후는 키스를 끝마쳤다. 그리고 뜻밖에, 커피향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냥 그리 생각하는 건가? 네일은 속으로 갸웃 했지만. 이 편이 더 편하긴 하지. 했다.
"많이 혼났어?"
"으응."
"나름대로 나도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데 말야."
덕분에 데이트 할 시간도 없다고. 투덜거리는 입술에 이번엔 저가 먼저 쪽, 해주고는 네일은 가만히 엘리후의 품에 기댔다. 그래. 충전이란 말이지. 딱 알맞는 표현이라 생각했다.
"어쩌겠어. 조금만 더 힘내줘."
"당연하지. 너만 고생시킬 순 없잖아."
안 그래도 최근, 묘하게 엘리후가 팀원들을 갈구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저 혼자 다 떠맡으려 하는 게 불만인 모양이지. 그냥 저에게 그러지 말라 말하면 될 것을, 굳이 남들을 갈구고 다니는 애인의 행동을 네일은 제법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안 좋은 소문이 도는데도 차마 그러지 말라 하질 못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도 조금만 더 심해지면 소문을 퍼뜨리는 이들에게도 언질을 주고, 엘리후에게도 따로 말하기로 마음을 먹은 게 얼마 전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저녁 데이트 하자. 오늘 야근 없던데."
"그냥 하려고 했는데?"
"진짜로?"
풀 죽은 채를 하는 모습을 보며 네일은 픽 바람새듯 웃었다. 그리고 괜히 어깨에 머리를 부비며, 고개를 저었다. 최근 바빠서 저녁도 같이 못 먹었었지. 그러니 당연히 싫을 리는 없었다.
"대신 나 요새 잠을 못자서… 좀 일찍 들어가봐야 해. 야근 없는 날은 오랜만인걸."
그러니까, 이렇게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어보이면 마음이 안 약해질 수가. 네일은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엘리후을 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응? 하니 엘리후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그리고 이내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조곤조곤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같이 자, 그럼. 재워줄게."
―이건 뭐라고 받아들여야 한담? 네일은 속으로 헛웃음을 치고는 엘리후의 머리카락을 괜히 헝클어트렸다. 물론 얼마 안 가 느긋한 손길로 쓰다듬는 행동으로 변하긴 했지만 말이다. 거부권이 없다는 사실 쯤은 알고 있다. 일종의 어리광이었으니까. 저도 종종 부리곤 하는. 네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제야 엘리후 또한 다시 미소지으며 네일의 등을 아까 그랬던 것처럼 두어번 토닥여주고 놓아주었다.
"충전은 다 됐어?"
"200% 정도 된 것 같네."
완벽하군. 흡족하다는 목소리로 대꾸하고 엘리후는 먼저 발걸음을 떼 옥상에서 빠져나갔다. 네일 또한 그런 엘리후를 빠른 걸음으로 쫓아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먼저 손을 뻗어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 때 쯤, 엘리후가 고개를 돌려 네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머그잔, 내가 돌려주러 가도 되지?"
…그거까지 보고 있었나. 어쩐지, 키스 하면서 분명히 커피향을 느꼈을 텐데 아무 말도 없더라. 네일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뭐 어떠랴. 클라이스가 바빠서요. 하고 대신 갖다주고 말 것이 뻔하니, 별로 상관은 없었다. 만족스러운 답을 받았다는 듯 엘리후 또한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제법 귀에 거슬렸다.
―무슨 말로 갈군담. 엘리후는 사무실로 들어서며 골똘히 생각을 시작했다. 사실, 얼마 전에 관둔 몇은 저가 갈구어서 관둔 것이 분명했다. 그러게 누가 내 거에 눈길을 두래. 그것이 흑심이 아닌, 네일의 상냥함에 답하는 순수한 호의임을 알긴 했으나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일이 고생하고 저 또한 고생하는 것은 원하는 일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관둘 때까지 갈구어야 속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네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흘끔 네일을 바라보니, 고개를 갸웃한다. 아무래도 평생 모르게 해야 하는 게 맞겠지. 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슬쩍 웃자, 네일 또한 작게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