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렌드 윈저->아인실 캐슬라 [오빠가 동생에게 보내는 회고록]
동생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종 사건인 줄 알았다. 내가 아니라 부모님이 그렇게 여겼다. 당시는 나도 어렸을 때라, 상황 파악 자체를 못하고 있었다. 첫째날, 부모님은 내게 동생이 어디갔냐고 물었다. 둘째날, 동생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셋째날, 마지막으로 동생을 본 게 언제냐고 물었다. 넷째날, 부모님을 만나지도 못했다. 다섯째날, 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인실은 집에 언제 와? 그리고 여섯째날까지 어머니가 우셨다. 아버지에게도 말했다. 아인실이 보고싶어. 아버지는 일곱째날까지 우셨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동생의 실종에 대해서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마치 동생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동생은 아직도 아무데도 없는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목격자라 나선 옆집 아주머니, 심지어 부모님까지도. 동생이 없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당연했다. 아인실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과자 사주기로 약속했었는데. 아인실은 어디갔어? 집에 오면 과자도 사주고 아이스크림도 사줘야지. 예쁜 인형을 사주면 좋아할까? 용돈 열심히 모아놨는데. 사실 부모님은 한달, 일년, 아니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매일 우셨던 것 같다. 밤마다 부모님의 침실에선 울음소리가 났으니까.
평범한 남매였다. 쓸데 없는 걸 가지고 싸우고, 그러다 별 일 없었다는 듯 화해하고, 같이 사고치러 다니고, 부모님께 함께 떼쓰고, 둘이서 손잡고 여기저기 놀러다니고. 사실 어릴 적에는 동생이 더 남자애 같았고 내가 더 여자애 같기도 했다. 아인실은 똑부러지는 꼬맹이였지만 오빠인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아인실에게 이리저리 휘둘렸던 기억도 있긴 한데, 선명하진 않다. 그만큼 우리는 어릴 때 헤어졌다. 부모님은 엄격했고, 오빠면서 동생에게 기대면서 살았던 나였기에 아인실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컸다. 방도 혼자 쓰게 되었는데, 남들은 방 혼자 쓰는게 좋다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아인실이 보고싶었다.
조금 크고 나서는 아인실의 실종에 의문을 느꼈다. 아직도 조그만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인실의 사진을 붙이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써둔 벽보를 붙이고 다녔다. 동생을 찾습니다. 아인실 캐슬라. 그런데 하루만 지나도, 아니. 낮에 붙여놓은 게 밤에만 와도 떼어져있었다. 그리고 벽보를 붙이고 다니기 시작한 날부터 부모님의 외출이 잦아졌다. 양복을 입은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기도 했다. 세사람은 나를 빼놓고 비밀리에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걸 몰래 엿듣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드문드문 끊겨 들리는 게 끝이었다. ―들 관수 잘...쇼. 하나 남...잃...싶진...않습니까.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어느 순간 내가 폐를 끼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벽보 붙이고 다니는 걸 그만두었다. 부모님의 외출은 그때부터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더 슬퍼보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홀몸이 됐다. 분명히 살인사건인데 어물쩡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의제기를 했으나 아직 키도 다 안 큰 어린애 말을 들어줄 리는 없었다. 나는 고아원으로 갔다. 사실 나는 고아원에서 꽤나 골칫덩어리였다. 눈에 날이 서있다고 해야할까. 가족을 연이어 잃고, 그나마도 두 사건 모두 범인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린 아이에게도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원망을 품을 만도 했다. 고아원은 나를 받아주면서도 이 아이가 어디로 갈 수나 있을까 하고 수근거렸다. 그래도 나는 입양되었다. 그곳이 가정은 아니었지만. 나를 데려가는 사람은 내 눈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일이년은 더 지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럴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모든게 의심스러웠다. 부모님의 죽음도, 동생의 실종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책하며 가족이 지어준 이름도 버렸다. 내게 이걸 갖고 있을 자격은 없다며.
안녕, 데니엘 캐슬라. 잘 있어. 네가 하지 못한 건 내가 하도록 할게. 걱정말고 푹 자도록 해. 내 이름은 이렌드 윈저야.
…그랬더랬다.
어딘가에 남아있을 사건에 관한 흔적들을 찾기위해 발버둥쳤다.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뒷세계의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차곡차곡 브린디쉬의 어두운 면을 보았다. 사실 제대로 보진 않았다. 내게 필요없는 건 한번 슥 읽어보고 가차없이 버렸다. 가족 이외에는 관심 둘 시간도 아까웠다. 캐슬라. 지금은 버린 성을 아주 애타게 찾아다녔다. 음성파일, 텍스트문서, 사진, 모든 것을 다. 죽은 부모님도 중요했지만 실종된 동생도 중요했다. 동셍은, 이 브린디쉬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힘이 필요했고 거둬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능력을 개화시키고, 발전시켰다. 그사람들의 목적은 달랐고, 매우 불순했지만 나는 강해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다가 찾았다. 아인실 캐슬라. 그림자. 사라졌다. 비밀로 해야 할 건. 아무래도 죽었을 확률이 높다. 그림자에 대해서 유출되면 도시 자체가 흔들린다.
…….
"아인실?"
반 쯤 인생을 포기하고 대충 살다가 선수로 뛰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래도 선수 시절에는 꽤 생기가 있긴 했다. 꿈을 현실로 만든다는 그 소녀를 찾으면 가족을 되찾을 수 있을까봐. 온 대륙은 혼란에 빠졌지만 나는 다시 희망을 찾았다. 그 와중에 그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선수 명단에서. 바로 그녀를 찾아갔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동생은, 글쎄. 상상했던 것, 기억하고 있던 것 모든 것에서 괴리감이 왔다. 아, 딱 하나는 그대로였다. 내가 기대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래도 바로 알아봤다.
아, 얘는 내 동생이구나. 꽉 안아줬다.
아인실에게 부모님에 대한 건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진실을 오히려 숨기려고 거짓말까지 했다. 사실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끝까지 아무것도 찾지 못했기도 했다. 그리고 세상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 동생에게는 숨기고 싶었다. 이미 홀로 너무 많이 고생을 한 아이라서 더이상 상처주고싶진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동생은 몸도, 마음도 강해져 있었던 것 같다. 나보다도 더. 차라리 내가 사라지고 동생이 브린디쉬에 남았다면 모든 진실을 알아내주지 않았을까. 동생에 비하면 내가 너무 약한 것만 같아서, 어릴 적처럼 강해지려고 또 노력했다. 동생을 지켜주고 싶었다. 이제는 어릴 적 동생 뒤에 숨어있던 데니엘이 아니니까.
지켜주고 싶었다.
내가 부족했던 건가.
맘약한 데니엘 캐슬라는 마음 속 꾹꾹 집어넣은줄 알았다. 어릴적의 나는 정에 약했다. 사람 편들어주는걸 좋아했다. 무조건 믿었고 무조건 잘해줬다. 이제 그런 면들은 다 연기로, 가식으로만 남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 살리고 싶었는데, 결과는 그게 아니었다. 칼은 다름아닌 그토록 찾아 헤맨 아인실에게로 향했다. 나는 어릴 적처럼, 아인실이 보고싶다며 떼쓰던 어린 데니엘. 그때로 돌아갔다. 그 아이가 죽음으로 가는 걸 보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잘못이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다른 이로 몰아볼 것을. 대를 취하려다가 소를 잃은 게 아니다. 내게는, 대를 취하려다 내 모든 걸 잃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병신 새끼.
방에 돌아와서 손목에 칼날을 댔다. 감각이 서늘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이었다. 희망을 잃었을 때는 꽤 자주 이러고 있었는데. 그을 용기도 없으면서.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긋지 못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한심하고 한심했다. 그리고 얼마 뒤, 긋지 못하는 자신이 아니라 그으려고 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걸 깨달았다. 복수라는 선택지는 선명히 남아있다.
단검을 손목에서 떼어내고, 벽에 박아넣었다. 복수의 칼날을 향할 장소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
이렌드 윈저 -> 몬드 가비아 [과거를 태워버린 날]
…다이버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용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가야 할 것 같다.
챙기지 않아도 될 사람들까지 챙기다가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잘못될 수 있다는 세상의 진리를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이렌드는 능력을 사용해 빠르게 무너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전기가 나갔으니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는 당연히 못 쓰겠고. 잠시 고민에 빠진 이렌드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온전했던 건물의 구조를 떠올려내기 시작했다. 비상계단까지 훼손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만. 발걸음을 재촉해 기억 상 계단이 있었던 쪽으로 향했다.
끼이익. 한참 동안 열리지 않았는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렸다. 위로 가는 계단은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 그것을 올려다보던 이렌드는 고개를 내렸다. 아래로 가는 계단. 위쪽이 저렇다면 아래쪽도 언제 땅이 꺼져버릴지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봐야 한다. 어차피 위층에는 원하는 정보가 없을 터다. 애초부터 아폴로 주식회사의 지하야말로 이렌드가 몇 년 동안 눈에 새기며 호시탐탐 노렸던 곳이었다.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음에도 지하만은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그 일에 대한 것은 지하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렌드는 조심스럽게 아래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중심을 잃을 뻔한 건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요인 때문일 것이다. 긴장감에 빨라진 심장 고동을 애써 진정시키며 천천히 내려갔다. 계단의 끝에는 관련인 외 출입 금지 구역, 이라 쓰인 안내문이 붙은 철문이 있었다. 자물쇠도 함께. 지니고 있던 총을 꺼내 자물쇠를 여러 번 쐈다. 총격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밖에서 비명을 질러댔다. 이렌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그 소리를 무시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자물쇠가 힘없이 떨어지고 나서야 이렌드는 총격을 멈추고 총을 다시 옷의 안쪽에 숨겼다.
지하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는 어쩐지 아까의 철문이 열리던 소리보다 몇 배는 더 기분이 나빴다. 안쪽은 평범한 창고로 보였다. 드론으로 추정되는 기계들이 바닥에 버려져 있었고, 이외에도 용도를 추정할 수 없는 것들이 이곳저곳 널려 있었다. 이렌드는 더 안쪽으로 향했다. 제일 끝쪽에 번호키가 달린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이번에는 단검을 꺼내 문틈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기계식 잠금장치가 제일 따기 쉬운 류라는 걸 몰랐던 걸까. 생각보다 쉽게 열리는 문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열었다.
또 하나의 계단. 아까처럼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상도 아니고 지하다. 무너진다면 그대로 즉사겠지. 이렌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만한 정보가 이곳에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끝에는 또 문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약간 열려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났다.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코를 부여잡고 이렌드는 열려 있는 틈으로 손을 뻗었다. 확 젖혀버린 문 안은 자료실이었다. 종이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한 구의 시체가 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된 모양이다. 부패 정도가 심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여있는 노트. 이렌드는 그것을 주워 읽어보았다. 첫 장은 본인으로 보이는 이름, 소속, 그리고 무엇을 명령받았는지가 쓰여 있었다. 이 자료실을 지키는 것. 다음 장부터는 평범한 일기였다. 뒤로 가면 갈수록 글씨체는 떨리고 있었고, 헛것을 보는 내용도 쓰여 있었다. 이렌드는 작게 혀를 찼다. 잔인한 놈들. 뒤의 내용은 볼 필요도 없었다. 노트를 내려놓고 이렌드는 사인을 진단을 내렸다. 아사.
이런 것에 한눈 팔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렌드는 자료실의 안쪽으로 들어가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묶음철을 하나씩 꺼내보기 시작했다. 찾고 있는 건 단 하나다. 캐슬라 부부의 살인사건. 묶음철의 맨 앞쪽에는 각기 다른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1급 비밀, 2급 비밀, 3급 비밀. 이런 식으로. 과거, 아인실의 실종에 대한 정보를 찾았을 때도 비슷한 문서를 봤었다. 그 건은 1급 비밀문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림자와 관련된 사건이라 브린디쉬에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훔쳐낸 문서라고, 당시의 정보 제공자에게 들었었다.
한두 시간 즈음 지났을까. 이렌드는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했다. 1급 비밀문서. 부모님의 이름과 지금은 버린 자신의 본래 성이 쓰여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왔다. 진실을 요구했다가 무참하게 무시당했고, 이걸 알아내기 위해 아폴로에서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기까지 했다. 이렌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호흡하고, 느릿하게 첫 장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캐슬라 부부 살인 사건. 새어나가지 말아야 할 사건이다. 자리에 있었던 기자 때문에 신문에 나긴 했지만, 대부분 곧바로 회수했다. 아마 사건이 새어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기자 또한 협박과 고문 끝에 사건에 대해서 입 다물고 있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피의자가 브린디쉬 영웅으로 칭송받는 이들의 아이인 만큼 철저히 해야 한다. 사실 피의자가 아니라 확실한 범인이다. 다행인 것은 범인이 범행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범인의 이름은…」
거기까지 읽은 이렌드는 묶음철을 떨어트렸다. …차라리 알지 않는 게 나았다. 알지 않는 게, 모르는 게,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사는 게 나았다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동명이인이라 하기에는 문서에 쓰여있는 모든 설명이 이렌드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그 아이가 얼마나 착한데. 그 아이가, 얼마나 상냥하고 정이 많고, 강한 척하면서 여린 면이 있고, 제멋대로이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얼마나 좋은 아이인데. 내가 봐온 그 아이는 얼마나, 얼마나.
내 삶의 빛이었는데.
묶음철을 가지고 나온 이렌드는 멍한 표정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신들과는 다르게 멀끔한 인상을 한 이렌드의 모습에 길거리의 사람들은 의문을 품거나, 억울함을 표현하거나, 분노의 방향을 이렌드로 돌리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렌드의 분위기 탓일까. 접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멀리에서 욕지거리를 몇 마디 뱉을 뿐이었다. 그것을 선명하게 들으면서도 이렌드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다. 목적지는 자신의 집이었다. 평범한 가정이 아닌 아폴로 주식회사에 입양되고, 아이가 아니라 임무 수행원으로 키워지며 살았던 그 집이 아니다. 아주 예전 부모님과 아인실과 함께 살았던 그 집으로.
집은 보호 조치를 요구해놨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신마저 고아원으로 보내지면서 버려진 집에는 원래 종종 노숙자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이렌드가 아폴로에서 일하게 되면서 집의 소유권을 부탁했다. 아폴로는 그 요청을 들어주었고 노숙자들을 모두 쫓아내 주었다. 집에 돌아온 이렌드는 가장 먼저 집을 청소하고, 한참 동안 앉아있기만 하다가 그대로 나가버렸었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집 열쇠는 항상 주머니 가장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몇 년 만이었다. 열쇠를 꽂아넣고 문고리를 돌리자 문은 쉽게 열렸다.
추억들이 그런 것처럼 집 또한 먼지만 가득 쌓여 있었다. 이렌드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들고 있던 묶음철은 테이블 위에 대충 올려두었다. 그러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직도 머리가 복잡했다. 다행인 것은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점이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결정을 내렸다. 십여 분 동안 앉아만 있던 이렌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을 열어보니 라이터가 여러 개 있었다. 아버지는 종종 담배를 피우셨고, 그걸 볼 때마다 어머니가 잔소리했던 기억이 있다. 이렌드는 그중 하나를 꽉 쥐었다. 켜보니 다행히 작동하고 있었다.
라이터를 가지고 거실로 나온 이렌드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묶음철을 들었다. 그리고 라이터에 불을 붙여 묶음철에 가져다 댔다. 불은 금방 묶음철에 옮겨붙었다. 이렌드는 그것을 툭, 바닥에 떨구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남은 라이터들을 모두 꺼내왔다. 하나하나 불을 붙여 똑같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렇게 찾아 헤맸던 문서와 유일한 추억인 집이 타들어 가는 것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이렌드는 열쇠까지 떨어트린 후에 천천히 집 밖으로 나섰다.
…과거를 없앨 수는 없다. 완전히 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알게 된 이상은. 하지만, 태워버릴 수는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선택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렌드 자신의 판단은 이것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 소중한 것이 있다. 그것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이렌드는 꽤 오랫동안 집을 바라보았다. 그가 뒤돌아 걷기 시작했을 즈음에야 집의 겉면이 타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타는 냄새가 났다.
…그 아이가 읽은 것만은 아니었으면 한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상처 하나 없이 별이 된 것이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저기에 있는 신문도 나중에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영원히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그게 한때 삶의 빛이었던 소중한 이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일 것이리라.
//
이렌드 윈저 -> 몬드 가비아, 아인실 캐슬라
똑똑히 기억한다. 이상한 라디오 너머에서 몬드와 아인실이 싸우던 소리. 정확히는, 아인실이 몬드를 밀어붙이던 소리. 그리고 뺨을 때리는 소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지 도무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옳은 방도가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무리 닿지 않는다고 해도 위로가 필요한 둘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렌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풀어두었던 머플러를 다시 했다. 어릴 적에 아인실이 그랬었다. 부모님이 사준 머플러를 한 자신을 보고, 오빠는 그거 정말 잘 어울려. 그 날 이후로 날이 덥지 않은 이상은 몸에서 뗀 적이 없었다. 숙취 때문에 좋지 못한 상태를 애써 숨기며 이렌드는 숙소를 나섰다. 아인실은 어디에 있을까. 몬드는 어디에 있을까. 이야기한다고 해도 들을 수 있을까. 옆에 있을 리는 없겠지. 잠시 옆을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괜찮다고 했는데. 사실은 괜찮지 않은데도, 진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전혀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가장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할 건 그 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평생 몰랐으면 했다. 혼자 알고, 혼자 모든 걸 떠안고, 혼자 물 밑으로 가라앉혀서, 없던 일로 해버리기로. 그럴 거였으면 완벽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잘못이다. 라디오에서 들려왔던 몬드의 목소리를 떠올려낸다. 오빠의 동생은 이제 몬드밖에 없다고, 마지막엔 자기를 살리고 행복하게 지내자고. …그 아이가 그렇게 말할 리가 없었다. 죄책감에 휩싸여있을 아이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죽었는데도 죽고 싶을 텐데. 사라져버리지만 않았으면. 위로해 줄 기회조차 빼앗아가 버리면 너무 슬프잖아.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7층. 바로 눈에 띄는 아인실의 시신에 이렌드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아인실은… 여기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볼 수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그럴 것 같았다. 이렌드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몬드의 시신 앞으로 향했다. 시신에 손을 뻗다가 그냥 거둬버렸다. 알고 있었다면, 자신을 보면서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마지막 날 몬드가 자신을 은근슬쩍 피해 다녔던 게 기억났다. 어째서 그 때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제대로 위로해 줄 기회는 그때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윈저 씨는 너무하잖아. 상처받았다고."
침대에 기대어 앉아 시트에 얼굴을 묻는다. 계속 머리가 아파져 오는 건 숙취 때문인지, 아니면 이렇게 꼬여버린 관계 때문인지. 자그마한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자그마한 아이가 얼마나 아팠을까. 마지막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입을 닫아버린 나를 원망이라도 했을까. 그럴 리는 없겠지. 끝까지, 미안해했겠지.
─몬드 가비아예요. 잘 부탁해요.
파편기에 만났다. 같은 조로 배정을 받고, 이 정도로 어린 애가 싸우러 나왔을 줄은 생각조차 못 했기에 꽤 놀랐던 기억이 있다. 실상은 생긴 것보다는 더 나이가 있긴 했지만. 그리고 그 사람들의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부모님을 닮았네. 몬드의 부모님은 브린디쉬에서 칭송받는 훌륭한 능력자였다. 행방불명되어버렸지만. 부모님을 잃은 기분을 이렌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갔었는데,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세차게 쳐졌었다. 이렌드보다 몬드가 더 놀랐었고. 떨리는 눈으로 아이는, 미안해요. 이렌드는 그냥 괜찮아. 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동정심이었다. 그리고, 공감.
몬드가 세상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은 것은 딱 어느 순간부터였다. 서서히 삶에 녹아들고 있었고, 그렇게 빛이 됐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청년에게 드디어 찾아온 빛이었기에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빛이 세상을 앗아간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그 후에는, 그래도 빛이었다.
"너도 내 가족이잖아, 이제는. 피는 안 이어졌어도. 그래서 아인실이랑도 잘 지냈으면 했는데……."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아인실을 탓하진 않았다. 그 아이에게는 제일 잘못이 없다. 몬드도 그렇게 반응한 아인실을 미워하진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보다도 더 미안해했으면 미안해했지. 정리하겠답시고 나와서 찾아온 건데, 아무것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 부모님을 잃은 아픔은 너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만약 그 아픔을 네가 나에게 준거라는 걸 네가 안다면 분명히 상처받을 테니까."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하진 않을게. 네가 네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세상은 네 잘못이라고 말할 테니까. 아인실도, 그리고 결국에는 나도… 하지만 있지."
긴 한숨.
"날 멀리하지는 말아줘……."
너도 결국 내 세상인데.
* * *
머리는 계속해서 더 아파졌다. 이대로 쓰러지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쓰러지면 회의 참여를 못 하게 되어버리니까 안 되는데. 아직 죽을 수는 없고, 죽고 싶지 않았다. 아인실과 몬드를 어떤 얼굴로 보라고.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바로 마주 대한 상태에서 해결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 피해버리고 싶어질까봐. 그러니까, 무서워서.
이렌드는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2층의 종합 자료실. 밤에도 급하게 뛰어왔던 장소. 신문을 찢어버린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대로 힘이 빠져서 이렌드는 주저앉고 말았다. 숙취 때문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몸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젠장. 역시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이렌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인실은 여기에 있을까. 만약 자신이 아인실이었다면 여기에 콕 박혀서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아니. 나오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온 것인데 제발 맞았으면 좋으련만.
"아인실. 오빠… ……데니엘이야."
이렌드는, 아니. 데니엘은 절로 푹 내려진 고개를 애써 들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인실이 있을 것 같은 곳을. 본명을 버린 이유? 온 가족이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혼자 살아남은 사실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워서. 도저히 그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본명은 아직도 마주하자면 너무나도 아픈 상처였다. 그 이름을 들으면 생각나는 건 첫째로 가족이고, 둘째로는 평화로웠던 시절이니까. 그래서 바꾸었다. 하지만 바꾼 이름도 싫었다. 짊어져야 할 것에서 도망친 것만 같아서. 결국은 그냥 자기 자신이 모두 싫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그 이후의 말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는 편이 맞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느끼고 있는 그 감정들을 모두 풀어줄 수 있을까? 배신감, 증오, 미움, 슬픔, 괴로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숨겨버린 내 탓인데. 차라리 제대로 얼굴 보고 얘기할 수 있을 때 말했더라면 어떻게든 했을지도 모를 텐데. …결국 널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숨겼다고 생각하면서, 네가 아파하는 걸 보기 싫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가 무서웠던 것 같아. 이기적이게도."
길게 말을 이어가던 데니엘은 다시 한 번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저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들려고 했던 자신이 잘못이다. 아무리 혼자 묻어두더라도 있었던 일이 없게 되지는 않는데.
"나 혼자 무서워서 묻어두면서, 네가 있는데도 나한테는 사과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용서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사과고 용서고 나는 무서워서 피한 것뿐인데. 피하면서 자기 위로를 했을 뿐인데. 결국 내 생각밖에 안 한 거야. 못난 오빠네, 참. 해준 것도 없는데."
숨이 턱 막혔다. 아인실을 다시 만나서 품에 안으며, 겨우 빛 하나를 잡은 세상이 색까지 되찾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아인실이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해주고 싶었다. 이제는 그 아이가 마음을 놓고 행복해질 수 있게,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역으로 사지로 내몰았다. 그 죄책감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그래서 며칠 밤을 꼬박 새우고도 잠이 오질 않는 상황에 빠졌는데. 그런데 결국 또 이런 일이,
…여기까지 생각한 데니엘은 그냥 생각을 멈추었다. 결국, 이것도 이기적인 생각이다.
"있지, 아인실. 다 괜찮으니까 딱 하나만 들어줘. 그 아이를 용서해달라고 하진 않을게.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잖아. 그렇게 용서해버리기엔, 너무 아프고 힘들잖아. 그냥…"
"…날 떠나지 말아줘. 제발.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 아이를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 잔인하고 이기적인 말은 끝끝내 하지 못했다. 데니엘은, 이렌드는 그대로 무릎을 세워 거기에 얼굴을 묻어버리고 말았다.
//
[유서, 그리고…]
아, 다들 배반자를 잊으면 안 돼. 살아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미 죽었다면 다행이지만.
p.s 2 - 데니엘 캐슬라라는 애가 있어. 걔는 정말로 소심하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녀석이라서, 친구 만드는 것도 못하는 애거든. 자학이나 하면서 살기나 하고 말이지. 너희가 걔의 친구가 되어줘. 내 마지막 부탁이야. …너희가 걔를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웠어, 다들.
p.s 3 - 사실 빠르게 쓰느라 좀 대충 썼어. 이해해주길.
p.s 4 - 아, 까먹을뻔했다. 가지고 있는 아이템은 두 개야. 운동화랑 돋보기. 각각 이동 포인트+1, 탐색 포인트+1. 요긴하게 쓰도록 해. 먼저 찾은 사람이 임자.
두번째, 남자.
세번째, 검은색.
네번째, 기도.
다섯번째, 태워버렸다.
두번째는 말할 것도 없겠지.
세번째, 얼굴을 살펴보라. 애매한 것은 이쪽.
네번째는 거짓.
다섯번째는, 그 또한 무언가를 태워버렸다. 사고였을지도 모르겠지만.
'1차 > 개인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일 클라이스, someday. (0) | 2015.11.07 |
---|---|
[Finite Triwizard] 네일 클라이스 엔딩 로그 (0) | 2015.10.11 |
[Time Square] 디셈버 (0) | 2015.04.25 |
[Project Cube] 죽음 합작 (0) | 2015.04.25 |
[Project Cube] 시아닌 with others (0) | 2015.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