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밤 늦게 집에 들어온 연인에게 첫마디로 건네는 말이 어서와, 나 보고 싶었어, 가 아닌 걱정의 말이라는 게 얼마나 속이 쓰린 일인지. 제법 지친 표정을 하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라그렛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밖이 제법 추운 모양이었다. 볼이 발갛게 물든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창백하게 질린 걸 보면. 오른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몇 번 볼을 문질러주었다. 찬 기운이 지크프리트의 볼을 타고 제 손바닥으로까지 넘어왔다. 10년에 가까운 지난 세월 속의 너에 대해 문득 생각한다. 항상 이런 모습으로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왔다 나가고, 그랬던 걸까. 제법 자주 들르는 편이긴 했어도 항상 제 집에 오는 것은 아니었으니. 너를 떠올리자면 쉽사리 꺾이지 않는 강한 모습이 먼저 스쳐지나가지만, 가끔씩은. 아주 가끔씩은 그 뒤에 간직한 무수한 상처들이나 외로움 같은 것들이 문득 그 위를 덮곤 한다. 그러면 어쩐지 저마저 슬퍼지는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천천히 볼을 엄지 손가락으로 쓸어주자 기분이 좋은 듯 옅은 미소가 입술에 걸쳐졌다. 어리광을 부리듯 제 손에 볼을 부벼온다.
"나 괜찮은데. 표정이 왜 그래요."
"내 표정이 왜."
거둬진 손이 제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표정도, 감정도 제법 잘 숨기는 것들이라 생각했건만. 최근들어 유독 숨기지 못하게 된 것이 몇 개 있다. 걱정이나 애정 같은 것들. 돌아오는 대답은 딱히 없었다. 허나 제 표정을 보는 얼굴이 꽤나 즐거워보여, 라그렛은 괜히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곤 뒤돌아 소파에 털썩 앉아버렸다. 딱히 삐진 건 아니었지만. 코트를 가지런히 걸어두고 제게 다가오는 지크프리트를 향해 라그렛은 살짝 팔을 벌렸다. 안아달라는 뜻은 아니었고 오히려 안기라는 뜻이었지만 되려 저를 세게 끌어안아온다. 뭐 어떠랴 싶어서 라그렛은 가만히 지크프리트의 품에 기댔다. 괜찮지 않아 보이는 쪽은 저쪽인데 등을 토닥여주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조금 뒤늦게 심통이 나는 것도 같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많이 피곤해보여." 작은 웅얼거림과 함께 라그렛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지크프리트는 그제야 꼬옥 안고 있던 연인을 놓아주고 그의 옆에 앉았다.
사귀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몸을 틀어 저를 향하고 있는 연인의 어깨를 팔로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퍽 자연스러워졌다. 얼떨결에 라그렛의 어깨에 기대게 된 지크프리트는 작게 웃음 소리를 흘렸다. 한창 애정만 쏟아부어도 아까울 시기에 걱정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었으나, 그래도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계절이 겨울만 아니었더라도 조금 나았을까 싶다. 괜한 생각들이 길어진다. 제 어깨를 감싸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하루 종일 긴장을 놓지 않고 있어야 하는 직장이었고, 더 그래야 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 걸까. 긴장이 탁 풀리자 나른해지고만다. 그걸 눈치챈 모양인지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감싸안은 팔을 움직여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손에 닿는 머리칼이 제법 부드러웠다. 그리고, 제 머리칼에서 나는 향과 비슷한 향이 난다. 라그렛은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주체하느라 꽤 애를 먹고 말았다.
"좀 자. 무릎 베개라도 해줘? 아니면 침대로 갈까?"
"잠들기 싫어요."
왜.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지크프리트는 눈을 내리감았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주제에. 작은 투덜거림이 들린 것도 같다. 또다시 지크프리트가 작게 웃음 소리를 흘렸다. 그 모습이 얄미워 라그렛은 괜히 지크프리트의 볼을 잡고 길게 당겨버렸다. 어느새 작게 뜨인 눈이 그를 흘겨보았다. 이번에는 라그렛이 웃고 만다. 볼을 놓아주자 발갛게 자국이 남았다가 금세 사라졌다. 선홍색 눈동자가 다시 눈꺼풀 너머로 사라졌다. 그 위를 손이 스치고 지나갔다.
"선배랑 같이 있고 싶은걸……."
딱 어리광을 부리는 목소리다. 10년 전 즈음에 자주 들었을까. 지크프리트 위버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심심치않게 듣긴 했으나 빈도가 적어졌음은 확실했다. 그게 최근 들어 또 늘고 있는 거다. 싫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지. 어리광을 부려도 좋고 칭얼거려도 좋고 제게 스트레스를 풀어도 좋으니 기대주었으면 했다. 밖으로 그런 희망을 표출하지는 않았으나, 속내가 그러하다는 뜻이다. 나른함에 취해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목소리에 라그렛은 그냥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응대했다. 그 마음은 저도 똑같다. 몸도 마음도 닿지 않았던 한 달 여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다고. 이리도 애틋해졌다. 가능하다면,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제 성에 찰 때까지만이라도.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마냥 제 옆에 붙어있기만 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라그렛은 고개를 돌려 지크프리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반응이 없는 걸 보니 결국 잠든 모양이었다. 다시금 어깨를 감싸안아 가볍게 토닥였다. 고요함은 숨 쉬는 소리마저 상당히 크게 전달해주었다. 듣고 있자니 저까지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밤마다 지긋지긋한 악몽에 시달렸던 시간 속에서 저를 편히 잠들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란 과연 어느 정도의 구원인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이라 생각한다. 겪어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구원이고, 희망이고, 단 하나 뿐인 빛이다. 지금도 그랬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옆에서만은 악몽에도 불면증에도 붙잡혀있지 않을 수 있었다. 때때로는, 그를 괴롭게 했던 현실과 정신적인 문제들에서도 편하게 해주곤 했다. 자연스레 제 처음을 모두 주게 되면서, 결국에는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인생 처음 맞닿았던 손의 온기가 이제는, 저가 원한다면 평생 곁에 있을 것이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따스함을 나누었다. 내 인생도 혼자 뿐이었고 네 인생도 혼자 뿐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혼자는 아니었다. 서로가 있었으니까. 그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떨어져 지낸 시간 동안 알았다. 그래서 네게도 내가 그런 존재였으면 했다. ……그런 바람이 있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어둠이 싫고 무서워서 네게 숨었던 시간들 속에서, 나는 편했는데. 너는 어쩐지 내 곁에서마저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자는 체 하며 여러번 보았다. 내가 너를 편하게 해주지 못 했던 모양이다. 의지가 되지 않는 존재였거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네가 짊어지고 있었던 게 컸다거나. 너는 나를 오랜 시간 사랑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네가, 짊어진 것들. 얼마나 크고 무거웠으면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본인은 변했다는 자각이나 있을까. 어린 시절의 너를 떠올리고 지금의 너를 보고있자면 마음 한켠이 아려오는 건 사실이었다. 지금이 싫다는 건 절대로 아니었으나.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것들을 보아왔다.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추하며 어두운지 직접 깨달으면서 살았다. 17살이 되는 해 네가 그런 것들을 모른 채 자라서 밝은 곳에서만 지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됐다. 허나 그와 동시에, 네가 이미 그런 것들을 보아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묻지 않은 대신 도울 수 있는 건 전부 도왔다.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보고 겪은 네가 정한 길을 올곧게 걸을 수 있도록. 그게 옳은 길이라 믿었기에. 알고자 하면 알 수도 있었을 터다.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했을테니까. 그러지 않은 건 성격 탓도 있었지만, 과거에 얽메여봤자 좋을 것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미 네가 그것들을 딛고 나아가기로 했으니까, 내가 그것들을 알아서 얽메여봤자. 모르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말하지 않는 네게 크게 서운해하지 않았다. 마치 죄라도 지은 듯, 혹은 무언가를 원망하듯이. 저가 혼혈이라고 토해냈던, 어렸던 지크프리트 위버. 사실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추측할 수 있었고 압축할 수도 있었다. 딱 거기까지만 했다. 지금까지도 그러했다. 때가 되면 어련히 말해주겠지. 사실 말해주지 않아도 좋았다.
내가 모르는 너에 대한 것들 너머에 네가 아는 나에 대한 것들이 있다. 네가 몰랐으면 했던 세상의 어두운 면들에는 자신의 음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숨기고 싶었으나 결국 모두 토해 내가 모르는 곳에서 하나도 빠짐 없이 보여주었다. 그 후에 만난 너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너지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멀리 있지 않겠다고, 덤덤하게 제 마음을 전했다. 그걸 다 보고 나서도. 너를 좋아하지 않았던 시간들과 내가 해 온 많은 더러운 일들을 보고 나서도. 내가 네가 생각하는 만큼 마냥 밝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도. 나를 받아들이겠다 하는 네가 있어서 몇 밤이나 울음을 삼켰던지. 당장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는 걸 네가 알까. 지금 와서 그런 것들은 몰라도 되는 것들이다. 알아야 하는 것들은, 그러니까…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 정도. 딱 그것만 알면 되는 거다.
어깨에 기대어 잠든 연인을 한 번 품 안에 품었다가 놓아주었다. 생각 이상으로 마른 몸을 안아드는 일이야 그닥 어렵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춥기라도 한지 살짝 몸을 웅크렸다. 가지런히 정리해놓은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불까지 덮어줬는데도 계속 그 상태였다. 결국 제 품안에 다시 소중하게 껴안았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사랑해."
깨어있을 때 해준다면 더 좋을텐데. 아직은 조금 쑥스럽네.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어버리곤 라그렛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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