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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렛 블랙로즈] 31일간의 기록



with 지크프리트 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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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발만 앞으로. …아니, 오른발 말고 왼발."
  "이렇게요?"

  슬 눈치를 보고 굳이 묻기까지 하는 게 퍽 귀여워 틀렸다는 건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라그렛은 잡은 손을 가볍게 당겼다. 지크프리트가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둘 사이의 간격은 한 발자국 남짓. 딱 그정도만을 남긴 채로, 이제 청년이 되어가는 소년은 제 후배에게만 보여주던 예의 그 미소 그대로 빙긋 웃어보였다. 제 눈 앞에서 붉어진 볼을 숨기지 못하는 건, 15살. 딱 그 나이대 아이의 모습이었더랬다. 라그렛은 솔직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그것이 저가 친애하는 후배의 경우라면 더더욱 좋아할 수밖에 없다. 또 한 번 발이 엇갈리고, 스텝이 꼬인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가. 흘끔 아래를 본 라그렛은 작게 키득거리며 잡은 손을 놓았다. 떨어진 손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최근들어 자그마한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사라지는 걸 아쉬워하게 됐다.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니라 생각한다. 허나 딱히 교정할 마음이 없음 또한 사실이다. 필요성은 느꼈으나, 글쎄. 정에 취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다. 어쩐지 조금 풀어져있고 싶기도 했다.

  "잠깐 쉴까."

  한 템포 늦게 뱉어진 말에 지크프리트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라그렛은 그대로 바로 뒤의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남이 본다면 꽤 이상한 모양새가 아닐까 싶다. 야밤에 좁은 기숙사 방에서 남자 단 둘이 춤이라니. 며칠 째 그리핀도르 기숙사의 한 방에서 이어지고 있는 풍경이었다. 라그렛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지크프리트가 옆에 앉는 게 느껴졌다. 옆을 더듬거리니 작고 조금 거친 듯한 손이 뻗은 제 손 끝에 닿았다. 체온이 제법 서늘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온기가 존재한다. 라그렛은 그 손을 그대로 감싸 잡아 제 가슴팍 위에 올렸다. 느껴지는 건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일까, 아니면 멀지 않은 손목에서 느낄 수 있을 지크프리트의 심장이 뛰는 소리일까. 알 수는 없었으나 깊게 생각하지도 않기로 했다. 그대로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이대로 잠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속으로 날짜를 세었다. 삼 주와 한달 남짓. 그 정도 남았다. 긴 듯 빠듯하게만 느껴지는 시간이라 잘 수가 없었다. 전자와 후자 어느 쪽 때문이라도 말이다. 내 파트너는 완벽해야 한다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라그렛이었다. 허나 사실 후자의 것은 전자의 것이 끝나고 준비해도 되는 건데, 그럼 일찍 준비하자며 부득부득 우긴 건 지크프리트 위버였다. 저를 위해 그런 것임을 바로 알았다. 그래서 결국 져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자꾸만 약해지고 만다. 미련이라 말할 수 있나. 미련이 생기는 건 꺼려지는 일이라 여겼는데, 막상 생겨버리고 때가 다가오니 별 생각이 없어졌다. 때가 가까워질수록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이유를 붙이면 그럴듯했다.
  문득 몸 위로 이불이 덮였다. 그제야 라그렛은 눈을 떴다.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선홍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1년 새에 생각이 많아진 눈이었다. 지크프리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는 줄 안 모양이었다. 혹여 깰까봐 제대로 눕혀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다가 이불이라도 덮어주자 했을 게 바로 상상되어 라그렛은 속으로 웃어버렸다. 이내 감싸 잡은 지크프리트의 손등을 몇 번 쓸어내리고, 손을 놓고, 그대로 올려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젖살이 아직 덜 빠진 모양새 그대로 부드러웠다. 좋은 감촉이라서 저도 모르게 몇 번 주물거려버렸다. 열다섯은 한창 귀여울 나이다. 제게는 유독 더 그랬다. 사실 지크프리트라서 그렇다. 어쨌든 그러하니 한껏 귀여워 할 뿐이었다. "나 안 자." 뒤늦게 작게 툭 뱉으니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라그렛을 보지 못하는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라그렛은 몸을 일으켜 어정쩡하게 덮인 이불을 잡고 지크프리트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그리곤 이불로 감싸인 어깨를 제 팔로도 감싸안아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어쩐지 하루 종일 피곤해보였어요."
  "그런가. 난 멀쩡한데."

  사실 신경 쓸 게 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르쳐 줄 게 늘면 해야할 일도 늘기 마련이었다. 아주 짧게나마 배운, 보통 여성들이 밟는 스텝. 리드를 받는 쪽. 빈말로라도 좋은 평을 내릴 수는 없는 실력이었기에 딱히 상대는 없이 남는 시간 마다 차근차근 기억을 되살려 홀로 밟아나갔다. 가르쳐줘야 할 것들을 되짚어가며 다시 공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일은 지크프리트 위버가 모르는 새에 이루어졌고, 그게 피로한 모습으로 보여진다고 해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라그렛은 부러 거짓말을 했다.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시키는 건 싫었다. 그런 걱정이 이어지고 누적되면 그만 두자 말할 게 뻔한 아이다. 어디까지나 저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었다. 나중에 아쉬워할 바에는 지금 무리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피곤을 잘 모르는 체질이었다. 몸에는 분명히 독이지만 효율로 따지면 상당한 득이라 여겼다. 진짜로 버겁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어떻게든 되고 있었다.

  "춤 연습 마저 할까? 아니면 공부?"
  "어느 쪽이든 괜찮지만 연습 쪽이 더 좋아요."
  "시험이 3주 남은 건 알고?"

  중요한 시험인데. 짧게 덧붙였다.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된 1년 동안, 잠들기 직전 지루한 교과서를 읽어줘왔던 시간을 쪼개어 이렇게 쓰게 되었다. 졸업 프롬이 한 달 정도 남은 지금 당장은 이 정도로 충분할거라 판단했다. 라그렛은 제 스케쥴을 모두 지크프리트에게 맞췄고, 정규 수업을 제외하면 지크프리트는 대부분을 라그렛에게 배웠다. 수업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 배분은 라그렛의 재량이었고 그런 점은 편하다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크프리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그렛의 손을 잡고 약하게 당겼다. "공부를 할 바에야 다른 걸 하고 싶은 건 당연하죠." 늦은 대답. 그 뒤에 무슨 말을 숨겼을 지는 충분히 추측이 가능했다. 선배 말마따나 선배의 파트너는 완벽하죠, 따위의 말일까. 라그렛은 저를 당기는 지크프리트에게 순순히 끌려가주었다. 소년은 먼저 서툴게나마 스텝을 밟아온다. 고개를 숙여 제 발을 보며 꽤 열중하고 있다. 장난기가 생겨 일부러 꼬아버렸다. 허나 그것마저 제 실수라고 인식했는지 지크프리트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라그렛은 꼬인 스텝을 풀고 천천히 다시금 맞춰나갔다. 리드를 해야하는 건 그 쪽인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잊은 채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지금 또한 그러하니 어렵진 않았다. 하나, 둘, 셋. 박자를 맞추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내 졸업 프롬, 네가 내 파트너를 해야 해.

  일정이 확정되었을 무렵 뱉었던 말이었다. 저녁 시간의 연회장. 마치 오늘 음식은 별로라는 투로 평이하게 한 말. 그걸 듣고 목이 막혀 물을 찾던 지크프리트 위버가 아직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질 정도로 얼마 되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몇 잔의 물을 삼키고 겨우 진정한 후에야 자기로도 괜찮냐 물어왔다. …글쎄. 졸업 프롬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다가 일정이 나와서야 그런 걸 하는구나 했고, 파트너를 데려와도 좋다는 말에 바로 떠오른 건 지크프리트 위버였다. 졸업 프롬이라 하면 함께 졸업할 동급생을 파트너로 삼는 게 보통이겠으나 그런 걸 신경 쓰진 않았다. 그냥, 다른 사람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네겐 거부권이 없다는 투로 말하긴 했으나 사실 조금이라도 거부감을 보이면 바로 농담이라 하며 철회하려 했다. 파트너가 필수는 아니었으므로. 사실 프롬 같은 거에 관심도 없었다. 제게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거다. 물론 그런 걸 알진 못했겠지만, 지크프리트는 어째선지 싫은 티 하나 내질 않았다. 부담스러워할 줄 알았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말을 뱉은 그때에도 너무 막무가내에 제멋대로였다 생각할 정도였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어느 정도의 놀라움과 그 뒤에 숨겨둔 기쁨을 감추고 당시에는 그저 웃음으로 응수했으나, 기숙사로 돌아와 스터디를 하고 있을 때. 문득 생각이 나 깃펜을 쥐고 있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맞잡고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더랬다. 해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늦은 대답이었다. 많은 말을 생략했으나 그정도로도 충분했으리라.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의 7학년은 지나칠 정도로 즉흥적이었다. 7학년의 그는 항상 기분이 좋아보였고, 또, 가끔 보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를 몸에 둘렀다. 본인도 자각하고 있는 그것을 가장 가까운 옆의 지크프리트 위버는 느껴버린 걸지도 모른다.

  "아."

  발을 밟아버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라그렛의 실수였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짧은 탄식을 내뱉은 건 지크프리트였고,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어 라그렛을 바라보았다. 라그렛은 묘하게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도 실수할 때 쯤은 있어. 퉁명스럽게 뱉어진 말에 지크프리트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구태여 어려운 쪽을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쉬운 쪽을 가르치는 게 편했다. 그저 쉬운 거랑 어려운 것 중 택하라고 하니 지크프리트가 어려운 걸 선택했을 뿐이었다. 오기일까. 라그렛은 고개를 기울였으나 딱히 말리진 않았다. 어차피 가르치고 싶었던 건 어려운 쪽이니 상관 없었다. 지크프리트 위버는 제게 오러가 되고 싶다 했다. 그렇다면 익혀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다. 마법 세계는 허례허식에 치중하는 구닥다리였다. 어쨌든 마법부 소속인 이상 원하지 않아도 사교장에 발을 들일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면 최소한은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었다. 저가 가르친 아이가 저가 모르는 곳에서 비웃음을 사는 건 기분 나쁜 일이었기에. 그래서 보통 리드하는 쪽에 속하는 스텝을 가르치게 된 거다. 부득이하게 리드당하는 쪽이 됐지만 뜻밖에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직 지크프리트가 자꾸만 자신이 리드해야한다는 걸 잊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눈 앞의 아이에게만은 한 발 물러서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라그렛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쨌든 제 실수는 자존심이 상한다. 한 번만 더 맞춰보고 공부 할까. 응, 좋아요. 짧은 대화가 오갔다.

  문득,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생각 났다.


2.


  지크프리트 위버는 퍽 제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오늘은 제 침대에서 자라 하면 바로 꼬물거리며 이불 안으로 들어오곤 할 정도로. 딱히 싫지도 않은 모양이라 안고 자는 것도 여러번. 닿아있는 온기도, 품 안의 존재감도, 그리 짙지 않은 체향도, 문득문득 느껴지는 옅은 숨도,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금빛 마저도. 이제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라그렛은 곤히 잠들어있는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다. 정확히는 잠을 청하지 않고 있는 새벽이었다. 지크프리트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하고 라그렛은 슬며시 그를 놓아둔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 뒤적거리며 작년에 쓰던 6학년 마법약 교과서를 찾는 데에만해도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직 먼지가 쌓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낡은 티가 난다. 이런 걸 물려줘도 되나 싶지만 이내 고민을 치워버리고 교과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동시에 자리에 앉아 깃펜을 쥐었다. 수려한 글씨체로 빈 맨 앞 장에 Dear, 라 썼다가 지워버렸다. 잡다한 것을 쓰는 건 나중에 하기로 했다. 빠르게 몇 장을 넘겼다. 그제야 내용들과 제 필기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생각하다가 그 옆에 스터디를 하던 제 말투 그대로 첨언을 달기 시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어렵지도 않았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지루한 이론들만 쓰인 1장이 끝나고 나서야 라그렛은 교과서를 덮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주고 싶은 일은 동의어였다. 제 졸업까지 앞으로 31일. 제법 빠듯했으나 자신은 있었다.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졸업 선물이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만드는 물건이다. 앞으로는 해줄 수 없을 일을 대신 하기 위해서. 깃펜을 놓는 데 어쩐지 미련이 생겼다. 정말로 이별을 준비하는 것 같다. 라그렛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먹먹함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한다.

  "선배?"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저를 찾았다. 라그렛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침대로 돌아갔다. 눈을 부비며 상체만 일으킨 지크프리트를 다시 품에 안으며 눕혔다. 제 옷깃을 꽉 잡아오는 손이 느껴졌다. 쉬이, 하고 귓가에서 소리를 내며 등을 쓸어주었다. 반도 채 뜨이지 않은 선홍색 눈동자는 서서히 다시금 눈꺼풀 뒤로 잠겨들어갔다.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그렛은 괜히 지크프리트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놓아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 나의…. 뒷말은 바로 생각났으나 구태여 다른 단어를 붙인다. 나의 미련. 라그렛은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면 이 먹먹함을 잊을 수 있기를 빌었다.


3.


  그리하여 일주일 넘게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하자면, 저가 졸업 후에는 스터디를 하지 못하게 될테니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한 일이라 말할 수 있었다. 사라질 것만 같은 분위기는 부러 두른 것이었다. 졸업 후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모든 연락을 끊어버리기로 했다. 꽤 오래 전부터 생각한 일이었다. 이유를 하나하나 말하기엔 너무 구구절절했다. 간단히 하자면 정리였고, 결심이었다. 모든 것에 대해 떳떳해지고 나서 돌아오고자. 멋대로 사라졌던 자신을 누가 받아줄까 싶지만은. 남은 이는 배신감을 느낄까. 아니면, 다른 종류의 것을 느낄까. 오래 생각하면 뒷목이 뻐근해지곤 한다. 싫은 감각이었다. 그때 일은 그때가서 생각하자. 머릿속을 뿌옇게 흐려버린 생각을 지워냈다.
  말로 하던 스터디를 글로 써 옮겨놓는다. 6학년 분량을 대충 끝내놓고 7학년으로 넘어가니 제법 속도가 빨라졌다. 아무래도 저가 배운지 얼마 안 된 것들이라 그런걸까. 이젠 필요 없는 거라고 건성건성 들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게 티가 나긴 하는지 드문드문 막히곤 했다. 남의 손을 빌리긴 싫어서, 머리를 숙이고 이 교수님 저 교수님 찾아가 그 부분의 내용을 다시 들어 익힌 후에야 교과서에 필기를 남기고 첨언을 달곤 했다. 제대로 들을 걸 그랬지. 시간 낭비를 하는 것 같아서 같아서 뒤늦게 조금 후회가 되고 만다. 이제와서는 늦은 일이지만은.
  속도가 빨라진 이유를 꼽자면 스터디 횟수를 줄인 탓도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하고 있는 시간 낭비를 더 하지는 않기 위해서였다. 지크프리트가 O.W.L.s를 볼 날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기에,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읊는 건 관둔 거다. 나란히 앉아 머리를 맞대고 이론을 가르치고 배움받던 시간들은 적당히 갈무리하고, 실기의 비율이 높아졌다. 덕분에 마법약 재료를 구해온답시고 호그와트 밖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녀, 몸이며 얼굴에 붙이고 다니는 반창고의 갯수가 늘게 된 건 당연지사였다. 지크프리트에게는 가다가 넘어졌다고 대충 얼버무렸지만 말이다.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어영부영 넘어갈 수는 있었다.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으나 저가 해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음을 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아직 학생 신분이었다. 알고 있는데도, 종종 난관에 부딪히거나 끊겨버린 길을 볼 때면 어쩐지 비참해지곤 했다.

  "뭐해요?"

  불쑥 옆에서 튀어나온 지크프리트가 말을 붙였다. 라그렛은 화들짝 놀랐으나 애써 티는 내지 않고 교과서를 덮었다. 그대로 책상에 턱을 괴고 반대쪽 손으로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헤짚어버렸다. 으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라그렛은 웃음 소리를 흘렸다.

  "선배 하는 걸 몰래 훔쳐보려고 하면 못 써."
  "훔쳐보려고 한 거 아닌데……. 공부하고 있었어요?"
  "응. 나도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7학년 교과서를 작업하고 있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본의아니게 공부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 시험을 위한 공부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라그렛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머쓱하게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됐다며 공부 열심히 하라 말하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라그렛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시선은 지크프리트의 옆구리에 끼워진 5학년 마법약 교과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찾아온 이유야 뻔하지 않나. 휙 가버리려는 지크프리트의 팔을 잡아 멈춰 세웠다. "이번엔 뭘 모르겠는데?" 먼저 말을 꺼내니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책상 위에 제 교과서를 펴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라그렛은 그런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학년 초에만 해도 솔직히 작심삼일로 끝날 줄 알았다. 어느 정도의 결심이길래 이렇게 열심히일까. 문득 지크프리트가 저는 사실 혼혈이라 고백해왔던 지난 날이 떠오른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어떻든 상관 없기에 그렇냐 말하고 넘겨버렸으나, 속에서는 글쎄. 그 고백과 변화를 당연히 연결지어버렸다.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는 거에 가까운 경우의 수가는 꽤 많이 그려졌다. 한참을 더 저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라그렛은 속으로 고개를 휘휘 저어버렸다. 생각이 조금 길어진 모양인지 지크프리트는 페이지를 찾아놓고 물끄럼 라그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라그렛은 문득 입을 열었다.

  "…스터디 마지막, 언제가 좋을까?"

  저를 향하는 선홍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라그렛은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슬슬 끝내야지. 난 곧 졸업이잖아."
  "라그 선배."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제법 날카롭다. 지적은 하지 않았으나, 말 한 본인도 자각은 있을 터다. 라그렛은 부러 고개를 숙여 지크프리트가 펼쳐놓은 페이지를 천천히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시선이 엇갈린다. 어쩌면, 마음도. 엇갈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아쉽지 않았다면 제 미련이라 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선배가 졸업하는 게 싫어요."

  무심코 손이 뻗어질 뻔 했다. 부디 제 빈자리가 크지 않기만을 빌었건만, 결국 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문득 본 눈빛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아니, 서늘한 게 아니다. 조금 달랐다. 슬퍼하고 있나. 라그렛은 한숨을 삼켰다. 제 눈빛도 똑같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졸업하기 싫어. 내게도 네 빈자리가 클거야. 내뱉지 못하는 말 또한 몇 번이고 삼켰다. 다짐은 흐려지지 않는다. 번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미련이 더 커지기 전에 정을 떼어놓아야 할텐데. 이상하게 눈 앞의 아이에게만은 그게 힘들었다. 이쯤되면 무리라 보아도 되겠지. 라그렛은 문득 슬 웃고는 결국 손을 뻗고야 말았다. 팔이 잡히자 지크프리트는 흠칫했으나 딱히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대로 잡아당기나 싶더니,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억지로 제 무릎 위에 앉혀버렸다. 이내 작은 웃음 소리. 뒤에서 끌어안은 모양새 그대로 라그렛은 제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을 지크프리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곤 지크프리트의 어깨에 제 턱을 걸쳤다. 이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에서 나온 말은 대답이나 책망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설명해줄게."

  그저, 일상일 뿐이었다.


4.


  라그렛은 괜히 지크프리트의 발을 꾸욱 밟아버렸다. 그제야 어딘가 멍했던 눈동자가 빛을 되찾았다. 요근래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잠시 말 없이 지크프리트를 빤히 바라보던 라그렛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어진 시간은 3주와 한달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두 개.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달 중의 반이 벌써 지나갔다. 잠시 생각해보면 지친 건 지크프리트 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쉬지않고 숨가쁘게 달려온 게 사실이었으므로. 라그렛은 잡고 있는 손에 괜히 힘을 꽉 주었다. 딱히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는 눈치로 저를 보고 있는 선홍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완벽주의자를 상대하는 건 제법 피곤한 일이기 마련이다. 바로 그 완벽주의자가 라그렛 블랙로즈라는 이름으로 지크프리트 위버의 옆에 딱 붙어있으니. 그러니 그 분의 피로함도 같이 느끼고 있을 터다. 물론 그것에 딱히 미안함을 느끼거나 더 배려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기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 치고는 이미 많이 봐주고 있는 상태였다. 상대가 지크프리트 위버여서일까. 그것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릴 수 없었으나.
  그래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사실 2주 전에 비해 확실히 나아진 실력이었다. 여전히 서툰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어디 가서 최악의 평을 듣지는 않을 정도일까. 문득 처음으로 제 허리에 팔을 두르게 하고, 반대쪽 손은 평생 놓지 않을 것 마냥 꼬옥 맞잡았던 날의 지크프리트가 겹쳐졌다. 라그렛은 슬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슬슬 한 번쯤 쉬어갈 때가 됐다. 앞으로도 종종 쉴 시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공부든 준비든 소홀리 한 편은 아니었고, 본래 때가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더 쉬어가야 하는 법이라 여겼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끝으로. 라그렛은 또 발이 밟힐까봐 바짝 긴장한 채 스텝을 밟아나가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나, 속으로 셈과 동시에 눈을 깜빡였다. 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을 움직여 지크프리트의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셋. 스텝이 끝남과 동시에 그대로 당겨 제 품에 안았다. 이렇게 끌어안을 때면 저보다 10cm 넘게 작다는 걸 새삼 다시 느끼곤 했다.

  "서, 선배?"
  "왜이렇게 조급하게 굴어."

  당황으로 물든 선홍빛을 마주하며 라그렛은 고개를 기울였다. 꼭 해야만 하는 일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다. 쉬어가질 않는다는 것. 자신이 지치는 것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쉬지 않으면 지치는 건 당연한데도. 경험으로 깨닫게 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굳이 지크프리트가 그런 식으로 교훈을 얻게 되는 건 별로 내키질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옆에 저가 있으니까.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이미 한 번의 추락의 과정을 거친 소년이었고, 당연히 그게 어느 정도로 힘든지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추락이 제게 득을 주고 지금의 자신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아픔은 그다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진심으로 친애하게 된 제 후배에게만은.

  "그치만 얼마 안 남았잖아요."
  "시험이? 아니면 프롬이?"

  대답을 못 하고 웅얼거리기만 하는 입술이 보인다. 라그렛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시간적으로 촉박하다고는 해도 과할 정도로 조급해하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여전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빤히 보던 라그렛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내 라그렛은 여전히 잡고 있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한층 더 세게 잡아 침대 쪽으로 끌고갔다. 또 한 번 다급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라그렛은 가볍게 무시했다. 딱히 무슨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제법 억센 손길에 겁이라도 집어 먹은 건지. 라그렛은 속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지크프리트의 침대에 그를 밀어 그대로 눕혀버렸다.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는 채로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뭐 할 말 있어?"
  "…시험이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럼 춤 연습 같은 걸 할 때가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할 때지."

  그리고 거짓말 하지 마. 가볍게 덧붙이곤 라그렛은 책상 위에 올려둔 마법약 교과서를 집어들었다. 조급해하는 건, 프롬에 대해서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는 걸 라그렛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시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있긴 하겠지. 허나 시험이 끝나고 준비해도 되는 의상 이야기를 벌써부터 한다던지 하는 건 아무리봐도 조급해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배는 프롬 때 뭐 입을거예요? 하는 물음에 그때 가서 정할 거라 대답했다. 그럼 저는 뭘 입죠, 하는 풀죽은 말에도 똑같기 그때 가서 저가 정할 것이라 대꾸했다. 당장 어제의 대화였다. 라그렛은 엉거주춤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지크프리트의 옆에 앉았다. 지크프리트는 느리게 상체만 일으켰다.

  "프롬 생각은 하지 마. 지금은 네 시험이 더 중요하니까."
  "어떻게 그래요. 선배의 마지막 프롬인데."

  묘한 데자뷰. 어느 날인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라그렛은 대답 없이 들고온 마법약 교과서를 펼쳤다. 지크프리트는 지금의 자신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걸까. 춤을 가르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 욕심 때문이었고, 그걸 받아주고 되려 재촉하고 있는 건 지크프리트 쪽이었다. 지크프리트에게 배울 의욕이 없다거나 그러고싶은 마음이 없어 보이면 바로 관둘 생각이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니까. 프롬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딱히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그대로의 지크프리트 위버로도 파트너로는 충분했다. 그래서 해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는 말을 굳이 한 거였는데. 말을 안 했기에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리고 솔직히 지금 이 시험으로 미래가 완전히 결정되는 건 아니잖아요."
  "무슨 뜻이야?"
  "제일 중요한 시험은 선배가 곧 볼 시험이잖아요. 저한테도 그렇고요."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문득 밝은 금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지크프리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야 다시 말을 꺼냈다. 하면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 마냥.

  "…망쳐도 선배가 가르쳐줄거잖아요."
  "지크."

  나직한 목소리가 지크프리트를 부르고. 한참이나 라그렛을 응시하던 선홍색 눈동자는 이내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말을, 해야 할까. 앞으로는 가르칠 수 없을 거라고. 저는 떠날거라고. 그 말을 해야만 하는 걸까. 하지 못 한 이유는 간단했다. 구태여 미리 말 할 필요가 없어서. 말하고 나서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정말로 굳게 한 다짐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거라 마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아이가 가지 말라고 잡아버리면 잡혀버릴 것만 같아서. 그것에, 위안을 가져버릴 것 같아서. 저를 감당하기엔 지크프리트 위버는 아직 너무나도 작고 어리고 약한 아이라서……. 억지로 생각을 끊어낸다. 이 이상은 안 된다고 저를 억눌렀다. 이내 라그렛은 아까의 지크프리트처럼 한참이나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지크, 대답해."

  그 부름에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겨우 라그렛과 시선을 맞췄다. 대답 대신이었다. 굳이 한 번 더 재촉하진 않았다. 문득 라그렛은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눈이 떨리고 있다. 어째서일까.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을 한 번 더 달싹이고 나서야 라그렛은 입을 열었다.

  "시험은 잘 볼거야. 망친다는 얘기는 하지도 마. 다른 사람도 아니라 내가 직접 널 가르쳤어. 5년이나."
  "……응. 알아요."
  "잘 할 수 있어. 시험도, 프롬도."

  느릿한 끄덕임에 라그렛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말 할 수 없다. 때가 되면 이런 행동과 말의 이유들을 네가 다 알게 되겠지.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저야말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별을 이야기하면 제 마음이 아플 것이다. 쑤시고, 찢어지는 느낌을 느낄 것임을 안다.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말하지 못하는 거다. 어찌되었든 제 졸업 후에도, 저가 없더라도 지크프리트는 살아갈 것이고 많은 것을 배워나갈 것이다. 그러다보면 더 좋은 선생을 찾을 수도 있고, 그런 거다. 그렇게 되면 라그렛이라는 사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게 될 수도 있겠지. 바라지 않았으나 그걸 바랐다. 더 이상 제 마음 속에서 커지지 않았으면 했다. 똑같이, 두려워서였다. 감정의 무게라는 것이…. 짓눌려서,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까봐. 더 나아가서 죽어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될 것만 같아. 친애하는 후배님. 하지 못 하는 말을 꾸역꾸역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그러니 오늘은 쉬자. 피곤하잖아. 그렇지?"
  "…알았어요. 그럴게요."

  착하다.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상체를 꾹 눌러 눕혀버렸다. 저 또한 그 옆에 누웠다. "잠들기 전까지 옆에 있을게." 작은 중얼거림. 감기지 못 하는 선홍색 눈동자가 올곧게 라그렛을 향한다. 재울 생각인 듯 가슴팍을 천천히 두드리는 손 위에 제 손을 올려, 지크프리트는 자그마한 손으로 라그렛의 손등을 감쌌다. 이내 눈이 감기는 듯 싶더니 반 쯤 뜨인 채로 멈췄다. 아직은 감을 수 없다는 듯이.

  "잠든 후에는요?"
  "옆에 있을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지크프리트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벌써 눈치 챈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떠날 거라는 걸. 그래서 구태여 제 대답을 들으려 한 걸지도 모르지. 라그렛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껴안고 토닥여주는 것 대신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오늘은 평소처럼 품에 안고 자진 못 할거야. 또다시 꺼내지 못 하는 말을 속으로 웅얼거렸다. 앞으로 2주. 이제야 반. 그때까지 미련이 갈무리되리라는 확신을 여전히 할 수가 없었다.


  5.


  잠이 안 와요. 작은 목소리가 제법 무겁게 잠긴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라그렛은 한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럴 만도 했다. 당장 내일이 시험이었다. 2년 전의 자신도 그러지 않았나. O.W.L.s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사실 다를 것도 없는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와는 다르게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라그렛은 가만히 지크프리트와 시선을 맞추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때를 되돌아보자면, 이런 게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자그마한 위안이라도 줄 수 있는 말이든, 행동이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뒷머리를 꾹 눌러 제 품에 얼굴을 묻게 했다. 이내 지크프리트는 어리광을 부리듯 품에서 몇 번 얼굴을 부비다가 라그렛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머리칼과 밝은 금색 눈 아래로 느리게 띄워지는 미소가 보였다. 뒷머리를 누르던 손은 이내 가만가만 금색 머리칼을 쓰다듬고,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선배는 왜 안 자요. 글쎄. 장난스러운 웃음 소리 후로 라그렛은 고개를 숙여 지크프리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때로는 말 한 마디로 충분할 때가 있다는 걸 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나직한 말 이후로 선홍색 눈동자가 천천히 눈꺼풀 아래로 잠겨들어갔다.


  6.
 

  "선배!"
  "쉿, 그렇게 크게 부르면 들키잖아."

  한 손으로는 검지를 제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크프리트의 입을 막았다. 지크프리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내 입을 막은 손이 내려져, 제 것보다 훨씬 작은 아이의 손을 꼬옥 잡았다. 온기에는 익숙해졌으나 따스함은 여전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라그렛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7층 복도를 통과했다. 어느 곳으로 향하는 지도 모르는 채로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손을 꽉 잡기만 했다. 사실 어디로 가는지 물으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친 차였다. 사실 물어봤자 말해줄 거라는 확신도 딱히 없으니 그저 따를 뿐이었다. 라그렛 블랙로즈는 묘하게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졸업을 일주일 정도 남긴 시점, 갓 시험이 끝난 후배의 손을 잡고 몰래 기숙사 방을 빠져나와 다짜고짜 어딘가로 향할 정도로 말이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제멋대로인 일이나, 변덕스러운 일이나. 모두 자주 있었던 일이었더랬다. 낯설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시험이 끝난 날이라고 해이해지기라도 한 건지. 순찰을 도는 반장들의 눈을 피하는 일은 평소보다 더 쉬웠다. 발소리를 죽여 텅 빈 7층 복도를 통과하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1층까지. 현관홀을 통과해 정문 앞을 지나서야 라그렛은 한 번 숨을 돌리며 지크프리트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는 눈을 무시하고는 라그렛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성을 나와서인지 아까보다는 느릿한 속도였다. 계절은 여름에 가까웠으나, 아직 밤공기는 차가웠다. 덕분에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더 존재감을 키웠다. 답답하기라도 했던 걸까.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라그렛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면, 기분이 별로인가. 괜한 생각이라 여기지만 혹여 제 시험만 챙겨주느라 정작 라그렛 본인의 시험은 망쳤을까봐 걱정이었다. 시험 잘 봤냐는 제 물음에도 미적지근하게 대충 얼버무렸으니. 그런거라면 큰일인데. 시선을 내리니 제 손을 꽉 잡고 있는 라그렛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우이길 빌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호숫가였다. 잠시 잠긴 눈빛으로 호수를 응시하던 라그렛은 여전히 지크프리트의 손을 잡은 채로 털썩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본래 여기가 목적지였던걸까. 지크프리트 또한 자연스럽게 라그렛의 옆에 앉았다. 라그렛은 눈동자를 데룩 굴려 그런 지크프리트를 흘끔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은 다시 호수로 옮겨졌으나, 대신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감싸안아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느껴지는 체온이 따스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틀어 라그렛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방법은 없었으니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라그렛은 호수를 보고,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라그렛이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선명한 선홍색과 밝은 금색. 지크프리트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려버렸다. 라그렛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의 어깨를 감싸주고 있는 손을 움직이고 몸을 숙여 지크프리트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었다. 계속해서 한참의 침묵. 제 목도리까지 둘러주고 나서야 라그렛은 입을 열었다.

  "꽤 오래 있을 거니까 조금 자도 돼. 들어갈 때 깨울게."
  "꼭 자야 해요?"
  "시험 보고 와서 피곤할 거 아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배도 그렇잖아요, 하는 대꾸는 가볍게 무시당했다. 잠시 입술을 삐죽거리던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자는 척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귓가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이 자꾸만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화끈거리는 느낌이 손과 닿은 귀부터 시작해 얼굴까지 번져갔으나 시선은 느껴지지 않으니 들키진 않았을 것이다. 지크프리트는 한 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풀었다. 근 1년, 잘 때만 되면 항상 이 손길이 느껴지곤 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등을 쓸어내리거나, 토닥이거나.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상냥한 축에는 들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나 그때만은 묘하리만치 상냥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 이 사람이 마냥 좋았다. 바로 옆의 라그렛은 전혀 모르겠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손길에 조금씩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5년이었다. 지크프리트 위버와 함께 한 시간은. 그중 4년은 솔직히 허투루 보냈다. 잘 대해주지도 않았고, 빈말도 딱히 하지 않았다. 쉽게 할 수 있는 쓰다듬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벽이 허물어진 건 1년 사이의 일이었다. 평소와 같았으나 동시에 너무나도 달랐다. 지크프리트는 첫 1년과 반년 정도를 빼놓고는 항상 저를 잘 따라왔다. 그런 아이에게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뒤늦게 깨달은 건데, 지크프리트는 제게 있어서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앞으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만큼 사랑받으며 자랐으면 한다. 15살은 아직 자랄 날이 많이 남은 나이니까. 집을 나오고 나서의 1년, 4년 동안 주지 못했던 애정과 사랑을 그 시간 동안 한꺼번에 주었다. 표현이나 방식은 서툴었지만 전해졌으면 한다. 제대로 보내지 못 한 4년의 시간을 아까워해 1년 동안 애를 썼을 정도로 하염없이, 거짓이나 꾸밈 하나도 없이 진심으로 아꼈다고. 떠나고 사라졌음에 저를 원망하더라도 그것 하나 만큼은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답지 않게 감상적인 이유를 알고 있다. 새벽으로 가까워지는 시간의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도 더 큰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잠시 눈을 감은 채 호숫가 저편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던 라그렛은 느리게 눈을 떴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보였다. 그러고 나니 질질 끌어온 생각 정리는 얼추 끝났다. 두어시간은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한 시간 남짓으로 제법 적게 걸린 걸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고개를 슥 돌리니 제 어깨에 기댄 채 곤히 잠들어있는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색색, 하는 숨소리가 그제야 귓가를 간질였다. 작게 웃어버리고는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깨우는 것 대신 제 망토를 걸쳐주었다. 그대로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들었다. 한참이나 지크프리트를 내려다보던 라그렛은 고개를 숙여 금빛 머리칼에 두어번 입술을 부볐다. 이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호그와트 성으로, 그리핀도르 기숙사로 돌아갔다.


  7.


  "잘 어울려."
  "거짓말이죠."

  저를 흘겨보는 지크프리트에 라그렛은 작게 키득거렸다. 아무래도 영 불편한 모양인지 낑낑거리는 모양새가 자그마한 강아지같아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빈말 잘 안 하는 거 알잖아. 그리 덧붙이니 입을 삐죽거렸다. 그 반응에 결국 라그렛은 한 번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법 살벌하게 노려보는 선홍색 시선에 금방 그칠 수밖에 없었지만서도. 그래도 여전히 라그렛의 입술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뭐가 불만인지 지크프리트는 자꾸만 틱틱거렸으나 그런 반응을 모조리 다 무시하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와 맞잡고 있는 오른손 대신 왼손을 뻗었다. 조금 느슨하게 매여진 넥타이에 손이 닿고, 느릿하게 풀어냈다. 그리고 제 손으로 다시 매주었다. 이런 부분은 아직 서툴기만 한 것 같아서, 챙겨줘야 할 부분만 자꾸 보이곤 했다. 이제 곧, 저는 졸업인데. 큰일이라고 작게 중얼거리자 그걸 또 들었는지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그렛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두어번 도리질 할 뿐이었다.

  "……근데 진짜 잘 어울려요?"
  "자꾸 그렇게 캐물을 거야?"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머쓱한 듯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평소처럼 웃어보였다. 빈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인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잘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 둘 중에 꼽으라면 후자에 가까웠긴 했지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탓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애초에 15살은 정장을 차려 입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 아닌가. 차라리 넥타이 말고 보타이를 매줄 걸 그랬나. 속으로 웃었다. 문득 지크프리트가 지금의 저보다도 더 큰 이후에 입은 모습이 보고싶어진다. 라그렛은 괜히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잔뜩 헤짚어놓고는 연회장 벽에 기댔다. 아직 제대로 프롬이 시작한 건 아니었다. 저와 지크프리트를 포함해 벌써부터 많이들 연회장에 들어와있긴 했지만서도. 작년의 무도회가 문득 생각나고 만다. 블랙로즈로서 참여해 순혈 가문 자제들의 간을 봤던, 하나의 사교장이라 생각했던 때다. 지금은 조금 달랐다. 항상 정장에 달아놓곤 했던 검은 장미를 떼어버리고, 라그렛으로서 지크프리트의 손을 잡고 왔다. 그래서일까. 예전의 이런 자리들을 떠올리면 괜시리 숨이 턱 막혔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라그렛은 맞잡고 있는 손을 당겨 지크프리트를 바로 옆으로 끌어왔다.

  "어디 안 좋아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안 좋다기보다는 그저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만 잔뜩 떠오를 뿐이었기에.

  "곧 시작이네."
  "응. 괜히 긴장되네요."

  잘 할 수 있을 거야. 어느 날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뱉어내며 라그렛은 고개를 숙여 지크프리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크프리트는 붉은 기가 감도는 뺨 아래로 두어번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네, 하고 짧은 대답을 뱉어냈다. 슬며시 웃으며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라그렛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잘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멋진 파트너를 원해서 지크프리트를 데려온 게 아니었다. 지크프리트 위버가 해주었으면 해서. 원하는 사람이 이 후배 뿐이었기에 데려온 거였다. 그러니, 전혀 상관 없었다. 오늘을 위해 오래, 그리고 열심히 준비한 건 사실이지만은.

  "지크."
  "네, 선배."
  "아무데도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그것만 하면 돼."

  이 말의 의미를 네가 알까. 아마 겉으로 드러나는 뜻으로밖에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허나 그거면 충분했다. 더이상은 바라지도 않았고, 바라면 안 됐다. 속뜻을 알아듣지 못했으면 한다.
  지크프리트의 대답과 동시에 폭죽이 터졌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건 둘 모두였고, 라그렛은 얼얼한 제 귀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빨랐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지크프리트의 귀도 제 손바닥으로 몇 번 부벼주었다. 연회장 가득 조용히 깔려 있던 음악의 소리가 커졌다. 졸업 프롬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잡생각이 많아진다. 정말 졸업이구나, 하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라그렛은 애써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모두 쫓아버리고 물끄럼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 또한 멀뚱멀뚱 라그렛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잊은 게 생각났다. 라그렛은 주섬주섬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장미였다. 검은색이 아니라 붉은색. 생화로 만들어진 코르사주 두 개. 하나는 제 가슴 위에 달았고, 남은 하나는 자연스레 뻗어졌다. 장난스레 귓가에 꽂을 듯 하다가 느릿하게 저와 같은 위치에 꽂아주었다. 붉은색 장미. 이건 정말로 빈 말 하나 없이 지크프리트 위버에게 잘 어울렸다.

  "그럼 이제 춤 신청을 부탁해도 될까?"

  이런 말을 하게 하는 것부터 감점인데. 속으로 키득거리며 구태여 입에 담았다. 지크프리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손이 잡혔다. 기분 나쁜 감각도, 이러저런 잡생각들도.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씻겨 사라져갔다.


  9.


  1972년 6월, 셋째주. 졸업식.

  "선배, 빨리 안 가면 늦어요!"

  라그렛은 제 팔을 잡아 끄는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졸업식이 그렇게 달갑지도 않은 주제에. 라그렛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가 졸업하는 게 싫다고 했던, 어느 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실 들은 이후부터 종종 계속 떠오르곤 했다. 그때마다 속으로 나도 졸업하기 싫다고 대답했으나,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다. "금방 갈테니 먼저 가있어." 지크프리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문 밖으로 나서면서까지 자꾸만 저를 돌아보았다. 5년은 절대로 짧은 시간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아쉽겠지. 라그렛은 끝끝내 입 밖으로까지 한숨을 푹 쉬고는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나가면 정말로 끝이다. 7년 동안 정든 기숙사에 작별을 고하는 거다. 분명 처음에는 끔찍하게 여길 정도로 싫어했는데, 결국 사랑해버리고 말았다. 제 집이나 다름 없는 장소였다. 그리핀도르는. 당연히 슬퍼지고 말았으나 애써 그 감각을 지워냈다. 대신 침대 밑에 차곡차곡 쌓아 숨겨놓은 교과서들을 꺼냈다. 총 2년 분이었다. 6학년과 7학년. 비록 어제까지 밤을 꼬박 새야하긴 했으나 다 하긴 다 했다. 제법 만족스러웠다. 지크프리트의 짐 옆에 그것들을 다시 쌓아두었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양피지와 깃펜을 꺼냈다. 교과서 한 권 한 권, 맨 앞 장마다 정성스레 싸인 마냥 해놓았던 것을 다시금 양피지 위에 써놓았다.

  ─Dear Sieg, From Rag.

  양피지를 뒤집어, 뒷장에는.

  ─너무 걱정하지 마.

  양피지는 앞장으로 뒤집혀 쌓여진 교과서들 위에 올려졌다. 라그렛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는 두고 떠날 수 있다. 친애하는 지크프리트 위버. 네가 원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쓰지 못 한 말을 대신 속으로 읊조렸다.


  10.


  꽃다발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구태여 오르치데우스로 만들어선 제 품에 안겨주었다. 그런 후배였다. 지크프리트 위버는.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직접 만들어줘서. 라그렛은 꽃들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향을 맡았다. 붉은색 장미. 장미는 좋아하지 않게 되긴 했으나 그래도 네가 가진 붉은색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다. 좋아할 수밖에…….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멀어지고 있는 호그와트를 바라보았다. 속으로까지 재미있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나. 픽 웃어버리고 라그렛은 꽃다발을 세게 끌어안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잘해주지 말 걸,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도 잘해주었을 것이다. 정을 기울였을 것이다. 나의 미련. 나의……. 언젠가부터 웃음기는 싹 사라져 있었다. 대신 울음을 삼켰다. 그때 속으로마저 숨겼던 단어를 입모양으로만 읊조렸다. 또다시 울음을 삼키고, 작은 목소리로 토해냈다.

  잠시동안, 혹은 꽤 오래, 바라진 않지만 어쩌면 평생. 안녕, 내가 사랑해버린 아이야.


  8.


  졸업식 전날. 라그렛은 깊게 잠들어있는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해야 할 일은 마쳤고, 이제는 정말 마음의 준비만이 남았다. 하지만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무리였다.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정리 할 수 없다. 제 마음 속에서 떠나보낼 수 없다. 두고가기 싫었다. 미련이라 포장했지만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렴풋 눈치채고 있었다. 드러내지 못할 뿐이었고, 완전한 자각조차 두려울 뿐이었다. 그리핀도르의 색이자 네 눈을 닮은 붉은색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거짓말이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욕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곧 청년이 될 터지만, 욕심이 많다는 게 변할 리는 없었다. 감정은 꾹꾹 눌러 자신조차 모르도록 마음 속 깊은 곳에 담아둘테니, 내가 지금 행하는 일은 용서해주기를. 속으로 읊조리고는 조심스레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잠시 맞닿았던 입술을 천천히 떼어내며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디 용서해줘, 지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