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라그렛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병원 측과의 마찰은 충분히 예상했으나 생각보다도 더 강경했다. 라그렛은 피로와 스트레스를 등에 업고 병실로 들어왔다. 혹여나 편안한 잠에 방해라도 될까 문을 살살 닫는 건 잊지 않았다. 이윽고 긴 한숨. 라그렛은 으레 병실에는 하나쯤 있기 마련인, 불편하기 짝이 없는 보호자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시간 여 이어진 말다툼 덕분에 심신이 모두 지쳐버렸다. 여전히 불쾌함에 찌푸려져 있는 제 미간을 두어번 꾹꾹 눌렀다. 지크프리트가 깨어나자마자 보는 건 제 얼굴이었으면 했고, 굳이 웃는 표정이 아니더라도 평소 때와 같은 표정을 보았으면 했다. 그러하니 지쳤다고 찡그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까. 혹시 지금 당장이라도 깨어날 지, 누가 알까. 라그렛은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맨손을 맞잡았다. 장갑을 끼고 있던 평소의 손보다 더 차다. 그대로 반대쪽 손으로까지 그 손을 잡아, 제 온기를 전했다. 이러면 금세 따뜻해질 터다. 지크프리트의 체온은 보통의 사람보다 찬 편이긴 했지만 라그렛은 항상 묘한 따스함을 느끼곤 했다. 비록 의식이 없는 지금이라고 해도 그걸 느낄 수는 있다. 허리를 숙여 잔상처와 물어 뜯은 흔적이 남은 손에 제 이마를 대었다가, 한 손을 놓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밝은 금색 눈동자가 제법 무겁게 잠겼다.
시침도, 분침도, 초침도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계처럼 지크프리트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눈치챈 건 멈춘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고, 머지 않아 소식이 들려왔다. 저와 그의 관계를 완전히 밝혀버린 것에 대해 후회가 깊었는데 그때만은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연습 경기 도중의 잠깐 쉬는 시간이었다. 당장 가봐야 하는 상황에 구구절절하게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니. 지금까지도 옆에 있어주라는 말 외에 별 말이 없는 것에 조금은, 사실은 꽤 많이 감사하고 있다. 두 번 씩이나 자신을 받아준 몬트로즈 맥파이즈에는 어째 항상 폐만 끼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원채 자신은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서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 약속하는 건 솔직히 불가능했다. 그러니 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퇴출 당한다고 해도 할 말 없으니 받아들일 생각이기도 했다.
아무튼 소식을 듣자마자 멋대로 뛰쳐나와 곧바로 성 뭉고 병원으로 직행해 보게 된 지크프리트의 상태는 솔직히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좋았다거나 나쁘지 않았다거나 하면 시계가 멈춰버릴 이유도 없고, 의식 불명일 이유도 없었다. 항상 각오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일이긴 했지만 막상 눈 앞에 벌어지니 숨이 턱 막혔다. 당장은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그냥 자고 있는 거라 생각하기로 하니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바로 지크프리트를 끌어안아버렸다. 체온이 느껴졌다. 재와 먼지 따위에 엉망이 된 머리칼을 쓸어주고 바라보다가 다시금 끌어안았다. 폭발에 휘말렸다고 했나. 더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솔직히 어디 하나 불구가 되거나 아예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벼운 화상과 긁히고 찢겨서 생긴 상처 정도는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말 할 수 없었다. 숨이 붙어있다면 그거로 됐다고 여겼다. 살아만 있다면 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거로 족했다.
응급 처치는 저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었으니 치료사들이 하는 걸 물끄럼 보기만 했다. 치유를 위해 쓰이는 잎과 꽃을 가지지만 그 가지에선 죽음의 냄새가 난다지. 제 지팡이는 그런 역설을 지닌 산사나무였고, 과거에는 후자를 두려워했으나 지금은 전자를 믿었다. 정식 치료사만큼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실력이라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제 지팡이를 신뢰했다. 응급 처치가 끝나자마자 치료사들을 쫓아내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물끄럼 내려다보았다. 벌써 십수년을 함께 한 지팡이를 꺼내 흉터가 남지 않도록 지워내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으나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잠시도 쉬지 않으니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그걸 끝내고나니 마침 병원 측에서 부르기에 다녀온 것이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다 그렇듯 아무리 병원이라고 해도 윗선은 꽉 막혀 있었다. 정식 치료사도 아닌 이가 직접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서니, 일단 입원을 받아준 병원 측에서는 잘못되기라도 할까 겁이 난 모양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라그렛이 설득을 들어줄 사람도 아니었으니. 어찌저찌 책임은 저가 다 지기로 하고 멋대로 대화를 끝내고 온 차였다.
지크프리트는 남이 제 몸에 손을 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싫어했다. 저와 끔찍하게 닮은 점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무리 중상에 의식 불명이라 해도 치료사가 손을 대는 걸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싫어하는 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왕이면 자신이 직접 하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다. 네가 안다면 왜 그랬냐고 잔소리를 할까. 화를 내진 않을 게 분명했다. 선배한테는 화 안 낸다고 말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기에. 지크프리트는 저와의 약속은 항상 꼭 지키는 청년이었다. 그러니, 네가 내게 화를 낼 리가 없지. 라그렛은 여전히 지크프리트의 손을 잡은 채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잔소리는 별로였다. 물론 지금이라면 그 잔소리조차 기쁘게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가 그리움도 사실이다. 지금처럼 지크프리트의 손을 양 손으로 잡고 그 손에 이마를 댄 채 기도라도 하듯─물론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무신론자였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거나. 조금 지칠 즈음에는 사람을 불러 가져온 책을 읽었다.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지나갔으나 여전히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의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 * *
라그렛은 눈을 떴다. 하루를 꼬박 밤을 새고, 지크프리트가 누워있는 병실 침대로 기어들어가 그를 품에 안고 쪽잠을 잤다. 좁은 1인용 침대에서 성인 남성 둘이 자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으나 둘 다 얇은 체형이라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 오래 자지도 못했지만. 길게 기지개를 켜곤 여전히 눈을 감은 채인 지크프리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감은 눈 위에 느리게 입을 맞췄다. 그래도 처음보다야 온기가 진해졌다. 그게 퍽 마음에 들어, 라그렛은 작게 웃고 말았다. 제 생각보다 더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오래 지나지 않아 눈을 뜰 터다. 그때를 위해 되려 지크프리트가 저를 걱정하지 않도록 제 상태는 멀쩡해야 했다. 먹는 거야 아무 것도 먹고 있지 않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몇 십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쪽잠은 계속 자기로 했다. 걱정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저를 바라볼 때에는 항상 편했으면 한다.
침대를 다시 말끔하게 정리해주고 라그렛은 덮어둔 책을 집어들었다. 벌써 세 권이 끝나간다. 더 가져오라고 시켜야 할까. 안그래도 어쩌다 그런 일에 휘말린 건지 따로 조사를 맡긴 뒤였다. 소식이 들려올 때 함께 시키면 되겠지. 책장 하나를 넘길 때마다 하나의 생각이 지나간다. 지크프리트에 대한 것이나, 깨어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나, 그를 이렇게 만든 원인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것이나. 그런 중요하면서 사소하기도 한 것들을 생각했다.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갔다. 들려온 초침 소리가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째깍거리는 소리는 익숙했으나 동시에 낯설었다. 라그렛은 다시금 책을 덮어두고 고개를 들었다. 반사적으로 병실 안의 시계를 찾았다. 네 면의 벽을 모두 둘러본 후에야 깨달았다. 지크프리트가 의식을 찾음과 동시에 다시 흘러갈, 제 손목의 시계 초침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른 시계는 모두 치워버렸다는 걸. 라그렛은 옷소매를 걷었다. 제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시계가, 째깍째깍. 평소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이내 앞으로 평생토록 하나 뿐일 제 연인을 보았다. 눈을 뜨면 웃어주기로 했는데. 가늘게 뜨인 채 저를 바라보는 선홍빛을 마주하고 나니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으려나. 저가 알 수는 없었으나. 깜빡깜빡. 이제는 정말 평소처럼 저를 바라보고 있다. 라그렛은 한참을 말 없이 지크프리트를 마주했다. 라그렛이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를 세다가 놓쳐버렸을 무렵, 문득 지크프리트가 웃었다. 그마저도 평소와 하나 다를 바가 없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기어코 울지는 않았다.
"손 잡아줘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손을 잡았다. 익숙한 온기가 좋았다. 저를 보고 있는 선홍색 눈동자도, 좋았다. 들려오는 목소리 또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제야 라그렛은 웃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너무 늦게 일어난 거 아니냐고 타박했다. 지크프리트도 비슷하게 받아주었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말들이 오가고 잡은 손을 당겨 끌어안았다. 다행이라 웅얼거리니 뒷머리를 가만가만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결국 또 눈물이 터질 뻔 하고, 또 얼만큼의 눈물을 삼켜내고. "이제 이렇게 마음 고생 시킬 일 없을 거예요." 걱정했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한다거나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맘 고생을 하지 않았다는 말 또한, 필요치 않음을 안다.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뺨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일상적인 일이었으나 그만큼 그리웠다.
"마음 고생 같은 건 별로 안 했는데."
단지 지금처럼 시선을 마주하지 못 하는 게, 조금 그랬어. 힘들다는 말은 입에 담지 않기로 했다. 눈을 깜빡이던 지크프리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한 걱정은 저 혼자 다했다며 웅얼거렸다. 똑같이 웃어주니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구태여 힘들었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걸 지크프리트도 알고 있을 터다. 캐묻지 않는다거나 걱정스러운 티를 내지 않는 건 저를 위해서겠지. 동시에 서로를 위해서기도 했다. 라그렛 또한 괜히 힘을 줘 손을 잡았다. 문득 장난스러운 물음이 이어졌다.
"다시 마주한 느낌이 어때요?"
라그렛은 잠시 몸을 움직여 아까 지크프리트가 해주었던 것처럼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잡고 있는 손을 끌어와 제 뺨에 대게 했다. 고개를 기울이고, 미소지었다. 울고 싶다고 말 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그마저도 부족했다.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오늘도 예뻐. 멋있고, 잘생겼고."
평소에 이런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있던가. 그렇지만 마주 미소하는 연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항상 그런 감상이 떠오르곤 했다. 입 밖에 내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해서도 있었지만, 사랑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낯간지러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앞으로는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자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간질간질한 감각에는 여전히 약했다. 몇 년이나 이어온 연애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제 뺨에 올려둔 손이 살살 움직여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간지럽다 키득거려도 멈추지 않았다. 사실 기분이 좋아서 멈추게 할 생각도 딱히 없었다.
"역시 선배는 꿈보단 실물이 훨씬 더 잘생겼어요."
내 꿈을 꾸었냐고 키득거릴 차에 지크프리트가 똑같이 덧붙였다. 라그렛이 한 말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었다. 듣는 것이야 익숙했으나. 가만히 그런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던 라그렛은 그의 어깨를 당겨 입을 맞춰버렸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걸 각오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닥치고 나니 생각보다 더 힘들었음을 인정했다. 허나 여전히 일을 관두라거나 하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장난스레 몇 번 뱉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 쯤이야 지크프리트도 잘 알고 있을 터고, 그래서 그냥 넘기곤 했던 적이 여러번이다. 저가 진심으로 위험하니 관두어 달라 말하면 그걸 단칼에 거절하지는 못 할 사람이라는 걸 안다. 실은, 제 경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말 하지 못 하는 게 아니라 말 하지 않는 것에 더 가까울 수도 있었다. 그를 사랑하기에 그만큼 존중하는 것이기도 했고, 지크프리트가 오러가 될 수 있도록 지도해준 사람 중에는 분명히 자신이 끼어있었다. 이제와서 관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또. 그의 신념을 안다. 저를 사랑한다는 감정으로 그 신념을 한 번 굽혀주었음도 안다. 그래서 앞으로는 굽히지 않았으면 했다. 그걸 위해서라도, 또한 그것에 어울리는 것도. 오러는 끔찍할 정도로 지크프리트 위버에게 어울렸고 어느 시점부터 라그렛은 오러라고 하면 그밖에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관두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사실은 더 컸다. 제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보다도 어쩌면 더. 제법 길게 이어진 입맞춤을 끝내기 위해 라그렛은 슬 지크프리트를 밀어냈다. 그러자 되려 지크프리트가 저를 끌어왔다. 이마를 맞대고, 키득거렸다. 당연해서 들을 필요도 없었어요? 입맞춤은 하고 싶어서 한 것이기도 했지만, 입을 막기 위해서 한 것이기도 해서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자연스레 끌어안는 손길에 몸을 맡기고 라그렛은 슬 지크프리트에게 기댔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욕심이 많았고, 이기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는 말이 있었다.
"지크."
"네, 선배."
"한동안은 쉬어."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고, 중얼거렸다.
"……며칠 정도는 내 곁에 있어줘."
그래줄거지, 하는 되물음은 필요치 않을 터라 굳이 하지는 않았다. 미소는 지우지 않았지만 문득 슬퍼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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