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흐트러진 시트 위에 놓여있던 손이 더듬거리며 연인의 손을 찾았다. 그걸 본 건지 못 본건지 반 쯤 눈이 감겨있는 눈꺼풀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라그렛은 눈 위로 닿는 익숙한 온기를 느끼며 완전히 눈을 감았다. 손은 기어코 찾아내 맞잡았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나른한 공기에 취해, 감은 눈 아래 굳게 다물려있던 입술이 작게 벌어져 한숨이 새어나왔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관계 후의 여운을 제법 길게 느끼는 청년이었다. 그 여운에 몸을 맡기다 스르르 잠드는 때가 많을 정도로. 그 연인인 지크프리트 위버는 그렇게 제 품 안에서 잠든 그가 마냥 귀여워 항상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여느 때와 지금은 조금 달라, 라그렛은 잠들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새어나왔던 한숨 소리는 금세 끄응, 하고 앓는 소리로 변했다.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의 볼을 살살 손등으로 간질였다. 감겼던 눈이 한 쪽만 느리게 뜨이다 이윽고 완전히 뜨였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했다.
"안 자요?"
먼저 입을 연 건 지크프리트였다. 라그렛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 행동에서도 졸린 기운이 풀풀 느껴져 지크프리트는 조금 웃고 말았다. 졸린 눈이 웃음 소리에 샐쭉해져선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이내 라그렛은 어리광을 부리듯 품에서 밍기적거리다 슬 그를 밀어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려 그런 라그렛을 고쳐 안았다. 라그렛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알아 듣지 못 할 말을 웅얼거렸다. 지크프리트는 쪽 소리를 내 입을 맞추며 그 입을 막아버리고, 우물거리던 입술에선 무어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안겨 있으면 더 졸리단 말이야, 같은 말로 추정되었다. 지크프리트는 알아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을 하며 한 번 고쳐안았던 라그렛을 놓아주지 않을 듯이 제법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왜 안 자요. 자자, 선배."
"안 돼."
싫어, 도 아니고 안 돼, 였다. 말과 동시에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해버렸다. 관계의 이름이 변한 이후로, 의식해버리는 것들이 있다. 눈빛이나 시선에서 느껴지는 숨이 막힐 정도의 애정이라던지. 버겁거나 부담스럽진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종종 낯설게 느끼곤 했다. 부드럽게 턱이 잡히는 감촉에 결국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은. 지크프리트는 잔뜩 졸음이 낀 연인의 눈가 끝을 양 엄지 손가락으로 문질거렸다. 라그렛은 기어코 그 손도 밀어내고는 대신 제 손등으로 눈가를 부볐다.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어버렸다.
"옷이라도 입혀줄게요."
"됐어. 귀찮아……."
"감기 걸려요."
"여름인데 뭐."
여름 감기는 바보 아니면 안 걸린데. 영 무심한 투로 덧붙이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껴안았다. 습관적으로 품에 얼굴을 파묻으려다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지크프리트는 입혀주려고 집어들었던 윗옷을 입혀주지도 덮어주지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있다간, 시선이 맞닿자 옷을 대충 놓아두고는 한켠에 밀어둔 이불을 끌어와 라그렛에게 덮어주었다. 장난스레 이불로 돌돌 말아버리는 시늉도 했다. 불만스럽다는 눈빛에 차마 제대로 실행으로 옮기진 못해 어쩐지 아쉬워보였다. 라그렛은 그런 기색을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끌어와 꼬옥 맞잡았다. 장갑을 벗겨서 확인해보면 여러 방식으로 잔뜩 흠집이 나 있던 손은 꽤 전부터 조금씩 상처가 줄어들고 있었다. 라그렛은 그걸 만족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반창고를 붙여줄 일이 줄어들겠네,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 손 위로 입술을 대었다. 가만 바라보고 있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띄워졌다. 조금 볼이 발갛게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일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라그렛은 반대쪽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귀여워, 하고 입모양으로만 말하자 불퉁한 표정이 돌아온다. 라그렛은 나른하게 웃고는 그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지크프리트는 금세 표정을 풀고는 아니거든요, 하고 따라하듯 입술만 움직였다. 다시금 귀엽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왼눈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치워 빤히 바라보았다.
"지크."
"응?"
"잠깐만… 1, 2, 3."
"안 자요?"
먼저 입을 연 건 지크프리트였다. 라그렛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 행동에서도 졸린 기운이 풀풀 느껴져 지크프리트는 조금 웃고 말았다. 졸린 눈이 웃음 소리에 샐쭉해져선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이내 라그렛은 어리광을 부리듯 품에서 밍기적거리다 슬 그를 밀어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려 그런 라그렛을 고쳐 안았다. 라그렛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알아 듣지 못 할 말을 웅얼거렸다. 지크프리트는 쪽 소리를 내 입을 맞추며 그 입을 막아버리고, 우물거리던 입술에선 무어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안겨 있으면 더 졸리단 말이야, 같은 말로 추정되었다. 지크프리트는 알아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을 하며 한 번 고쳐안았던 라그렛을 놓아주지 않을 듯이 제법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왜 안 자요. 자자, 선배."
"안 돼."
싫어, 도 아니고 안 돼, 였다. 말과 동시에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해버렸다. 관계의 이름이 변한 이후로, 의식해버리는 것들이 있다. 눈빛이나 시선에서 느껴지는 숨이 막힐 정도의 애정이라던지. 버겁거나 부담스럽진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종종 낯설게 느끼곤 했다. 부드럽게 턱이 잡히는 감촉에 결국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은. 지크프리트는 잔뜩 졸음이 낀 연인의 눈가 끝을 양 엄지 손가락으로 문질거렸다. 라그렛은 기어코 그 손도 밀어내고는 대신 제 손등으로 눈가를 부볐다.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어버렸다.
"옷이라도 입혀줄게요."
"됐어. 귀찮아……."
"감기 걸려요."
"여름인데 뭐."
여름 감기는 바보 아니면 안 걸린데. 영 무심한 투로 덧붙이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를 껴안았다. 습관적으로 품에 얼굴을 파묻으려다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지크프리트는 입혀주려고 집어들었던 윗옷을 입혀주지도 덮어주지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있다간, 시선이 맞닿자 옷을 대충 놓아두고는 한켠에 밀어둔 이불을 끌어와 라그렛에게 덮어주었다. 장난스레 이불로 돌돌 말아버리는 시늉도 했다. 불만스럽다는 눈빛에 차마 제대로 실행으로 옮기진 못해 어쩐지 아쉬워보였다. 라그렛은 그런 기색을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끌어와 꼬옥 맞잡았다. 장갑을 벗겨서 확인해보면 여러 방식으로 잔뜩 흠집이 나 있던 손은 꽤 전부터 조금씩 상처가 줄어들고 있었다. 라그렛은 그걸 만족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반창고를 붙여줄 일이 줄어들겠네,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 손 위로 입술을 대었다. 가만 바라보고 있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띄워졌다. 조금 볼이 발갛게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일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라그렛은 반대쪽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귀여워, 하고 입모양으로만 말하자 불퉁한 표정이 돌아온다. 라그렛은 나른하게 웃고는 그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지크프리트는 금세 표정을 풀고는 아니거든요, 하고 따라하듯 입술만 움직였다. 다시금 귀엽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왼눈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치워 빤히 바라보았다.
"지크."
"응?"
"잠깐만… 1, 2, 3."
─됐다. 라그렛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지크프리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포개고, 떼어냈다가 다시금 깊게 키스했다. 동그랗게 뜨여진 눈은 제 손으로 감겨주었다. 아직도 마냥 어려보이기만 하는 연인은 여전히 기습적인 스킨십에 약했다.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있었으나. 연인은 자각하고 있을지, 아닐지. 궁금했지만 부러 묻지는 않는 것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제게는 귀엽게 느껴질 터다. 꽤 오래 이어진 키스를 끝내고 입술을 뗀 라그렛은 선홍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이맘 때가 되면 항상 기다리게되는 시간이다. 말을 하는 건 자신이면서도.
"생일 축하해, 지크."
그 말을 들은 지크프리트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사락거리며 라그렛의 옆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다간, 귓바퀴를 따라 살살 쓰다듬거나 귀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살짝 잠겨있는 목소리가 어쩐지 달달하게 느껴진다. 그건 목소리가 담아낸 말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연인의 목소리이기 때문일까. 역시 둘 다인가. 생각들의 나열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라그렛을 제 품 안으로 더 끌어왔다. 그제야 라그렛은 얌전히 안겨오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라그렛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지크프리트는 그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제 것과 같은, 같을 수밖에 없는 체향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숨이 섞여 나른해졌던 공기가 차츰 가라앉았다. 사랑스러운 사람.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지크프리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 때문에 안 자고 버텼어요?"
"중요한거니까."
"아침에 해줘도 되는 걸요."
라그렛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이내 고개를 들고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봐, 잠시간 시선이 닿았다가. 내가 싫어, 하는 말이 굳이 말로 하지 않는데도 그 시선에서 느껴졌다.
"이제 잘거야."
"응. 잘 자요, 선배. 좋은 꿈 꿔."
다시금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들렸다. 이윽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릴 즈음, 지크프리트도 눈을 감았다. 얼마 정도 지나 연인의 체온에 기대어 잠에 빠져들락 말락할 때, 문득 볼에 온기 하나가 사락거리며 닿아왔다. 그 뒤로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웃고 있는 라그렛이 보였다.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당신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꿈에서 만나."
그 말은 단순한 밤인사를 떠나, 자신에게 좋은 꿈이란 너를 만나는 꿈이라는 사실을 뜻하기도 했다.
* * *
방학이 다가오는 1969년의 초여름, 기숙사의 모두가 잠을 청하러 방으로 들어가 텅 비어버린 그리핀도르 휴게실. 시간에 맞지 않게 두 사람이 남아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제법 삭막한 분위기. 곧 5학년이 될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어린 후배를 앞에 앉혀둔 채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앞의 지크프리트 위버는 죄 지은 사람 마냥 움츠러들어선 라그렛의 눈치만 힐끔힐끔 보았다. 라그렛이 자고 있던 지크프리트를 다짜고짜 깨워서 데리고 나온 지 벌써 10분 째. 아무 말도 없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더랬다. 지크프리트는 머릿속으로 저가 혹시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하는 고민을 한참 하고 있었다. 평소 행실 문제일까, 아니면 스터디? 답잖게 맹랑하게 군 걸 뒤늦게 혼내려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까지 닿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쩌겠어. 혼이 난다고 해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터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부쩍 세상 다 끝난 모양새를 하던 당신이었기에. 그게 못내 심술이 났었다.
"너."
드디어 10분 여 만에 첫 마디가 떼어졌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에서 나온 목소리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완전히 화가 난 건 아니라는 뜻이니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크프리트는 움찔하고는 물끄럼 라그렛을 바라보았다. 졸음은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정적. 본래도 사이가 가까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서먹할 일일까. 물론 서먹하게 느끼는 건 일방적으로 쫄고 있는 지크프리트 뿐이었다. 휴게실이 이렇게 춥게 느껴지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며, 할 말이 있다면 빨리 말해달라고―이 말을 꺼내면 더 혼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서도― 재촉하려 할 때 즈음. 라그렛이 입술을 뗐다. 문득, 그도 어쩐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한 것처럼 보였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긴 한숨이 떼어진 입술에서 먼저 새어나오고, 말이 이어졌다.
"요새 나에 대해서 캐고 다닌다며."
"네?"
혼이 나거나 꾸중을 들을 수많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생각했으나 이 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 한 것이었다. 지크프리트는 다소 멍청해보이는 표정으로 라그렛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라그렛은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를 들은 게 한두번은 아닌데, 설마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발뺌할 수밖에 없는걸요. 그런 적이 없으니까……."
탐탁치 않다는 표정이 되돌아온다. 짚이는 게 전혀 없었다. 캐고 다닌다고? 대체 무엇을? 누가 그런 걸 말한 거지? 물음만이 이어졌다. 제법 위협적인 태도에 기가 죽긴 했으나 지크프리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캐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마냥 헤헤 웃으면서 친하다 말할 만한 사이는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가까워졌다.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물어볼 수 있을 정도의 관계는 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마음대로 끝내려 했던 스터디를 다시 시작하게 된 이후로, 그는 티가 날 정도의 친밀함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그런데 왜 제가 선배를 캐고 다니겠어요. 억울함에 목소리 조차 잘 나오지 않아서 더 억울해지고 만다. 그런 지크프리트를 읽어내기라도 했는지 라그렛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몰아세울 생각은 없으니까." 느릿하게 떼어진 말에 아랫 입술을 짓씹던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 하나에 닿아,
"…설마 선배 생일 물어보고 다닌 거요?"
"아, 그렇게 말했던가. 아무튼 캐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혼이 나거나 꾸중을 들을 수많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생각했으나 이 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 한 것이었다. 지크프리트는 다소 멍청해보이는 표정으로 라그렛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라그렛은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를 들은 게 한두번은 아닌데, 설마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발뺌할 수밖에 없는걸요. 그런 적이 없으니까……."
탐탁치 않다는 표정이 되돌아온다. 짚이는 게 전혀 없었다. 캐고 다닌다고? 대체 무엇을? 누가 그런 걸 말한 거지? 물음만이 이어졌다. 제법 위협적인 태도에 기가 죽긴 했으나 지크프리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캐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마냥 헤헤 웃으면서 친하다 말할 만한 사이는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가까워졌다.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물어볼 수 있을 정도의 관계는 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마음대로 끝내려 했던 스터디를 다시 시작하게 된 이후로, 그는 티가 날 정도의 친밀함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그런데 왜 제가 선배를 캐고 다니겠어요. 억울함에 목소리 조차 잘 나오지 않아서 더 억울해지고 만다. 그런 지크프리트를 읽어내기라도 했는지 라그렛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몰아세울 생각은 없으니까." 느릿하게 떼어진 말에 아랫 입술을 짓씹던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 하나에 닿아,
"…설마 선배 생일 물어보고 다닌 거요?"
"아, 그렇게 말했던가. 아무튼 캐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지크프리트는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당사자의 귀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생일 딱 하나만 물어보고 다닌 거기에 설마 그거에 사람을 캐고 다닌다는 말을 붙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애초에 꽤 많은 사람에게 오래 묻고 다녔는데도 알아내지 못 한 정보였다. 나름 그와, 설령 과거형이라 하더라도 친해보였던 사람들에게까지 물었음에도 다들 모른다 이야기했다. 고의로 말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이 넓은 호그와트에 사람 생일 하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니. 제법 비참한 기분을 맛보았던 게 당장 며칠 전의 일이 아니던가. 과할 정도의 비밀주의라고 투덜거리기도 했었다.
뚱한 시선이 지크프리트 위버에게 가닿는다. 그래도 라그렛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제법 풀려 있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몇 번이나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리듯 제 팔을 두드리던 라그렛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그렛 위스트 블랙로즈는 소문이 얼마나 와전되기 쉬운 놈인지 잘 아는 소년이었다. 크리스마스 휴일이 끝나고, 그 겨울 대연회장에서 저가 벌였던 일이 어떤 소문이 되어 돌고 있는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일 자체를 벌이지 않았겠지. 되려 인생의 교훈 같은 것을 얻었다. 무엇에 대해서든 소문은 믿을 만한 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련은 사람을 더 성숙하게 만들고, 성장을 위해서는 아픔이 동반 된다지. 어딘가의 명언 같은 것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음이 사실이었다.
"…그런 건 내게 물어도 됐을텐데."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서요."
라그렛은 작게 혀를 찼다. 호그와트에 다닌 4년,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걸 궁금해 한 사람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가르쳐주지 않은 건 가르쳐줄 필요성을 못느꼈기 때문이다. 가르쳐줄 이유도 없다. 생일이랍시고 요란하게 축하해주는 건 귀찮고, 선물은 받아봤자 낭비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생일 선물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항상 시끌벅적한 그리핀도르식 생일 축하는… 더더욱 받고 싶지 않다. 라그렛은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먼저 말을 꺼내놓고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니. 적어도 화를 낼 만한 일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눈치나 사회성이 0에 수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생일을 알아내려는 행동 뒤에 어떤 감정과 이유가 깔려 있는지는 충분히 알 터다. 당신이 태어난 날을 축하해주고 싶다는, 순수한 호의를 기저에 두었을테지. 눈 앞의 어린 후배 또한. 그런 걸 가지고 혼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얼마 없을 것이다. 아무리 저가 깐깐하고 까칠한 선배라 하더라도 이번 건에 대해 지크프리트를 꾸짖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생일 축하는 깜짝 선물로 해주는 게 더 좋아요. 그리 덧붙인 지크프리트는 우물쭈물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르쳐주기 싫으시면 안 가르쳐주셔도 괜찮아요."
"정말로?"
"……가르쳐주신다면 정말로 좋겠지만요."
이건 그냥 가르쳐 달라는 말이 아닌가. 라그렛은 답잖게 헛웃음을 흘렸다. 떼를 쓰는 방법도 있을 텐데. 지크프리트 위버는 항상 대부분의 화제에 대해서 한 발 빼는 시늉을 하곤 했다. 제게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은. 저가 그렇게 어려울까. 의문의 답은 금방 찾아냈다. 어려울 게 당연하다. 저가 지금까지 눈 앞의 후배를 대해온 방식에 대해 생각하자면 그렇다. 요새 들어 많이 나아지고 있다 해도, 여전히 쌀쌀맞기만 한 선배겠지. 이런 사람을 뭐하러 붙잡고, 어째서 생일 같은 걸 축하해주고 싶어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눈 앞의 아이가 그만큼 상냥하기 때문일까. 모두에게 그런 무분별한 다정함을 베푸는 걸까. 아니면…….
"…생일은 이미 지났어."
그 말에 지크프리트는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도,
"어차피 생일은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그리 말하고는 웃는 거다. 이런 감정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믿고 따랐던 어머니는 절대로 따뜻한 사람은 되지 못했고, 가까이 지낸 친구들─이제는 대부분이 저를 저버린 슬리데린의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핀도르가 불필요할 정도로 활기차고 정이 깊어보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글쎄.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인 것 같았다. 다수가 아닌 한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의 깊이가 이리도 깊고 밝을 수 있었던가. 사람은 누구나 낯선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곤 한다. 동시에 호기심을 갖기도 하고. 지금의 저는 어느 쪽을 더 깊게 갖고 있을지. 애초에 닿고 싶어 하는 건지. 그 날 이후로 몇 달이나 지났건만, 아직 라그렛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알지 못한 채로 안온한 온기에 기댈 것이라 생각한다.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제와서 주위를 둘러보면 겨울을 닮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 봄, 내지 여름의 향취를 가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태어난 날을 떠나서 말이다. 그리핀도르의 아이들은 다 그랬다. 저 혼자서만 겨울에 사는 것 같았다. 따뜻한 계절로 끌어올려지면 어떤 기분일까. 무엇을 보게 될까. 애초에 자신이 있어도 되는 곳인가. 상념이 길어졌다.
"4월 24일."
"……!"
지금 활짝 웃는 너는 확실히 여름이다. 너무나도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잠시 겨울에 있다가 이제는 완연히 여름으로 빠져나온 네게 겨울이 옮아가지는 않을까, 네게. 저가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걱정할─ 걱정하는건가. 아무튼, 그럴 일인가 싶어서 라그렛은 생각을 잘라냈다.
"기뻐요. 기억해둘게요."
"네 생일도 말 해."
"에."
"내 생일만 쏙 듣고 말 생각인가."
지크프리트는 제 볼을 긁적였다. 마치 대단한 건 아니라는 듯이. 내 생일은 대단한 것처럼 취급했으면서? 라그렛은 고개를 기울였다. 알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녀석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이라는 게 다 그렇겠지만은.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독하게도 자존감이 낮은 아이라는 것. 기실 그건 지크프리트 위버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자존감이라면 저도 충분히 난도질되어 있었다. 조각조각 직접 잘라내었다.
"그러고보니 얼마 안 남았네요."
"방학 중인가봐."
"네… 6월 20일이에요."
6월 20일. 속으로 한 번 곱씹었다. 호들갑스러운 파티는 못 하겠군. 집에서 할 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어쩐지 그러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그렛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의 정적이 되돌아왔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있던 라그렛은 문득 지크프리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라그렛의 앞에 섰다. 새삼 정말 작은 아이다. 저가 2학년일 때엔 이렇게 작지 않았던 것 같은데. 라그렛은 무심한 눈을 한 채로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잡아 당겨 제 품에 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크기는 나쁘지 않다. 작년부터 생각한 거였다. 지크프리트는 어버버거리며 그의 품 안에서 낑낑거렸다.
"네가 내 생일을 축하해주겠다면 나도 네 생일에 편지라도 보낼거니까, 받으면 답장해."
"네? 네… 네!"
업어주기야 종종 업어주었지만 안아보는 건 꽤나 오랜만의 일이다. 울고 있는 걸 차마 무시하고 갈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안아주었던 게 벌써 제작년과 작년의 일이라니.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며 라그렛은 눈을 감았다. 그대로 소파에 풀썩 누워버렸다. 사람의 체온이란 참으로 포근한 것이어서, 이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곤 했다. 라그렛은 그런 감각을 제법 좋아했다. 사실 인정하고 있기도 했다. 위로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시간 후에, 지금은 제법 평화로워지긴 했지만 되려 그 평화로움이 우울함을 불러오곤 했다. 안온함에 기대는 것. 아주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부디 그렇기를. 이런 생각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크프리트는 천천히 라그렛의 등을 토닥였다. 라그렛은 딱히 말도 하지 않았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었다.
"나는 파티 같은 귀찮은 거 싫으니까, 내 생일 소문 내고 다니지도 말고."
그 말에는 대답이 없다. 라그렛이 째려보자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라그렛은 불편한 숨을 작게 내쉬었다.
* * *
"생일엔 휴가 좀 달라 그래."
"어떻게 그래요. 일인데."
게다가 무려 선배를 먹여 살리는 일이라구요. 장난스레 키들거리며 지크프리트는 제 연인을 끌어안았다. 라그렛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 누굴 먹여 살려? 이어진 말에 지크프리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몬트로즈 맥파이즈 선수의 연봉은 어느 정도일까. 딱히 물은 적은 없어서 모르는데, 상상 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진 정도라는 것 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내 지크프리트는 생일인데 좀 띄워주지 그래요, 하며 볼멘 소리를 냈다. 그것마저도 라그렛은 웃어 넘겨버렸지만은. 짓궂어, 정말. 지크프리트는 투덜거리며 라그렛의 볼을 간질였다.
"애초에 생일 다 지나서야 집에 온 게 누군데."
"그게 그렇게 서운해요?"
"……그래."
유치하다고 생각하는지 라그렛은 대답 전 조금 머뭇거렸다. 라그렛은 제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볼을 제법 노골적으로 간질이기 시작하는 연인의 손을 피해버렸다.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건 안다. 그저 정말로 서운할 뿐이다. 어린 시절에는 생일 같은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나이를 먹을 수록 이런 거에 집착하게 됐다. 연인의 생일이라 그런 걸수도 있고. 다물려 있던 입술 틈새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삐져있어봤자 뭐하겠어. 손을 피한 게 퍽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지크프리트를 라그렛은 제법 세게 끌어안았다. 그래도 하루가 다 지나가진 않았으니까. 그걸 위안으로 삼기로 한다.
"생일 되자마자 선배가 축하해줬잖아요. 그거로 충분해요, 전."
"같이 있지 않아도?"
그건 좀……. 라그렛은 머쓱하게 웃는 지크프리트의 머리칼을 헤짚어버렸다. 자꾸만 심술부린다며 웅얼거리는 말도 가볍게 무시했다.
"제일 먼저 축하해주는 건… 약속 한 거니까."
"응?"
"아냐, 아무것도."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라그렛은 저가 잔뜩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실제로도 별 거 아닌, 약속 아닌 약속이었다. 딱 저에게만 중요한, 지크프리트 위버는 기억할 지 못 할지도 모르는 약속.
* * *
새 학년이 시작될 9월. 호그와트 행 급행 열차 앞에서 기어코 지크프리트를 찾아낸 라그렛은 제법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정확히는 서운해하는 표정에 가까웠으나, 지크프리트가 느끼기엔 험악함에 가까웠다. 지크프리트는 놀란 눈을 하고 라그렛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저를 찾아온 것도 놀랐지만, 이런 표정을 하니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배……? 겨우겨우 입술을 떼 그를 부르자 라그렛이 제 이마를 짚었다.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거에 대한 자책이 조금 섞여있었다. 대체 나는 왜 서운해하는거지? 기를 쓰고 찾아내놓고 의문에 빠져버린다. 일단 이렇게 찾아내버렸으니 용건은 말해야했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한심하기만 한 용건이라고 해도. 말을 주워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한 행동도 취소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답장 왜 안 했어."
"답장이요…?"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 되돌아왔다. 어쩐지 두달여 전 억울해하던 표정과 겹쳐져, 라그렛은 힘이 탁 풀리고 말았다. 동시에 괜히 짜증도 났다. 이번에는 편지를 보내겠다 말까지 해놓았으니 발뺌할 수도 없을 터다. 그런데도 지크프리트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뭔가 잘못 안 건가? 그렇지만 답장을 받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나름대로 정성껏 생일 축하한다는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부엉이가 물고 가 하늘 너머로 사라지는 것까지 보았는데. 멀뚱거리는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중간에 편지가 유실되기라도…….
아.
"…생일 축하한다고, 편지 보낸다고 했잖아."
힘이 빠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 했을까. 라그렛은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여전히 당황한 표정의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응, 기억하고 있어요.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분명 보냈는데……."
"하루 종일 선배 편지만 기다렸는데, 다른 애들 편지는 와도 선배 편지는 안 오더라구요. 그래서 으음… 까먹으셨나 했어요."
별로 기억할 만한 것도 아니니까. 가볍게 덧붙이는 것 치고는 당시에 제법 속이 상했었다는 게 눈에 보였다. 할 말이 사라지고 만다. 순혈 가문에서 키우는 부엉이가 머글 세계에 편지를 전해줄 리가 없지 않나. 당장 저가 알기에도 그렇게 교육을 시켜놓았다고 들었다. 답잖게 들떠선 그걸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애초에 왜 그렇게 들떠 있었는지. 최근 들어 이해 못 할 행동만 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라그렛은 물끄럼 지크프리트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선지 지크프리트는 웃고 있었다. 억울하게 혼이 날 뻔 했는데 이 녀석은 웃음이 나오는 건가. 그리 물을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이번에는 명백하게 제 잘못이었으므로. 보낸 것은 맞지만 받지는 못했고, 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야하는 데도 까먹고 있었고, 그걸 가지고 멋대로 화를 내려 했다. 제멋대로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부엉이가 실수라도 했나봐요. 슬프다… 그래도 괜찮아요."
"……왜?"
"어쨌든 써서 보내주긴 한 거잖아요. 그거로 충분히 기뻐요."
지크프리트 위버는 자꾸만 라그렛 블랙로즈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답을 못할 때가 많은지, 라그렛은 도무지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도 알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지크프리트는 헤 웃으며 라그렛을 껴안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기뻐할 수가 있나? 어째서? …….
"내년에는 답장을 두 배로 써야겠어요."
"…두 배?"
"선배는 써줬는데, 저는 받질 못해서 답장을 못 썼잖아요. 그러니 올 해 분량까지 합해서 두 배죠."
"그런 수고로운 짓 하지 마."
지크프리트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전혀 수고로운 짓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왜… 이 정도로 잘 해주는 거지.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일에 대해 라그렛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나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마냥 입술만 달싹였다. 마주 안아주지도 못했다. 그냥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서, 겨우겨우 대답만을 입에 담아낼 뿐이었다.
"답장을 두 배로 써야하니까, 내년에도 꼭 보내주세요."
"……그래."
내 불찰이니까.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라그렛은 생각 난 말을 정리도 하지 않고 천천히 목소리에 담아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대책 없이 말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계속 보낼거야. 네 생일을 처음 축하해주는 건 내가 할거니까."
"그, 그렇게까진 안 해주셔도 돼요!"
"됐으니까 말 들어. 매년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참으로 어이 없는 억지였다. 하지만 이런 억지도 너는 기꺼이 받아 줄 것이라고. 그런 묘한 확신이 있었다.
* * *
이후에는 얼굴이 새빨개져선 어쩔 줄도 몰라 했던가. 잠시 어린 지크프리트 위버를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져, 라그렛은 웃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땐 별 것 아닌거로도 뻘뻘거리고 쑥스러워하곤 했는데. 요새의 지크프리트는 너무나도 뻔뻔해졌다. 그런 점도 좋긴 하지만. 그 약속은 실제로도 계속 지켜왔다. 생일 전날에는 항상 꼬박꼬박 집에 불러왔고, 오지 못하는 해에는 편지를 보냈다. 매년 네 생일에 제일 먼저 축하의 말을 전하는 건 나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법 기쁜 일이다. 앞으로도 그럴테고. 라그렛은 슬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가렸다. 그런 약속은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너와는 그런 약속들을 많이 해놓았다. 게다가 약속이라 하기엔 뭣할 정도로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행동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랜 시간 너를 좋아해왔나보다, 나는. 손 끝이 간질거렸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자 사랑하는 선홍빛과 눈이 마주쳤다. 우울감에 빠져 있었던 시절의 네게서도 나는 여름의 향기를 맡았다. 왜냐하면, 나의 여름은 너였으니까. 기나긴 겨울을 끝내고 사랑하는 계절로 접어들게 해준 것은 항상 너였다. 그런 너를 내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나의 여름. 그에 어울리게 여름의 시작에 태어난 아이. 네 존재로 인해 나의 여름도 시작되었다고, 그런 낯 간지러운 말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지만. 항상 네 생일이 되면 여름의 시작을 자각하곤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었다. 네가 생각나서. 더위에 시달리는 건 질색이었지만, 덥다는 핑계로 서늘한 네 체온에 기댈 수 있었던 건 제법 좋아했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왼손을 맞잡았다가, 제 입가로 끌어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은 그대로 미끄러져 약지에 닿고.
"어?"
"바보 같은 소리 내긴. 선물이야."
입술이 닿았던 약지에 반지 하나가 끼워졌다. 심플하면서도 제법 비싸보이는, 얇은 실버링. 라그렛은 순순히 지크프리트의 손을 놓아주었다. 지크프리트는 눈을 깜빡이며 반지 위에 새겨진 이름을 만지작거렸다. 예민한 손 끝에서부터 연인의 이름이 느껴졌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표정이 제법 마음에 들어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는 입을 맞췄다. 평소보다 농도가 더 진한 키스였다. 입술이 떼어지자 지크프리트는 라그렛을 다급하게 끌어 안았다. 생일 선물은 서프라이즈로 주는 게 좋다고, 누구씨가 먼저 한 말인데. 그건 기억하려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라그렛은 느리게 미소지었다.
"…어쩌지."
"응?"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그럼 그냥 좋아하면 돼, 하고 가볍게 말하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였다. 상상 이상으로 더 좋아해줘서 저마저도 기뻐졌다. 정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듯 지크프리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연인을 마냥 귀엽게 바라보던 라그렛은 천천히 입을 열어 제 말을 이어나갔다. 생일 선물이라기보다는 예전부터 주고 싶었다는 둥, 같이 가서 맞추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둥, 손을 자주 잡아서 그런가 네 손 크기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둥……. 한참이나 재잘거리다가 라그렛은 문득 말을 끊었다. 얼마 지나, 사랑하는 선홍빛을 가만 마주하며 말을 붙였다.
"행복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환하게 웃는 연인의 얼굴이 보였다. 사실상 대답은 필요치도 않았다. 정해져 있었으니까. 나는, 그거면 됐어. 더 필요한 게 있을리가. 라그렛은 눈을 내리감으며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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