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은 빗속으로 손을 뻗었다.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핏물이 비에 씻겨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폭우였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는 계속해서 레이븐의 손을 따갑게 때렸다. 허나 청색 눈동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빗물에 젖은 오른손, 기분 나쁜 피는 지워진지 오래였고 피냄새 또한 아릿한 비냄새에 묻혀 사라져갔다. 레이븐의 시선은 여전히 비 속에 방치된 제 오른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습게도, 어떻게 돌아가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텔레포트의 존재를 잊은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돌아가자면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 내리는 비를 보자니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이었다. 비는 그칠 기믹도 보이지 않았고, 레이븐은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닫아놓은 건물의 문. 그것을 열어 재낀다면 과연, 그 안의 피냄새가 축축한 비냄새를 집어 삼킬 수 있을 것인가. 문 너머에 여전히 존재할 피웅덩이와 시신을 레이븐은 떠올렸다. 마지막,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인간을 찔러 죽인 것은 비 속에 방치해 둔 오른손이었다. 아직도 그 감각이 생생했다. 그것으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냐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은 못하겠지만.
차갑게 젖어가던 오른손에 닿던 빗줄기의 느낌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사라졌다. 그것을 레이븐이 인지한 순간 처마 끝, 아슬아슬하게 비를 피하고 있던 머리 위로 우산이 씌워졌다. 그제야 레이븐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인영이 제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 채로 서 있었다. 평소보단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클라우드, 하고 레이븐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 클라우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중 나왔는데."
하늘색 머리카락 아래의 것은 예의 오랜 세월동안 봐 온 능청스러운 미소였다.
*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들 무렵에는 어김없이 창문에 맞아 떨어지는 세찬 빗줄기 소리나 천둥 소리가 들려와서, 결국 정신이 말똥말똥 해지기 쉽상이었다. 한참을 침대 위에서 뒤척이기만 하던 레이븐이 결국 몸을 일으킨 것은 딱 20번째로 잠이 깨버린 때였다. 차라리 비가 오지 않는 지역에 가 있을까, 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너무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정해져 있다는 양. 우뚝 멈춰선 문 앞, 허나 어쩐 일로 자료실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닌데. 그냥 제 방으로 돌아갈까, 하고 발걸음을 떼었다. 정신 차린 순간 이미 발걸음은 클라우드의, 잘 쓰지도 않는 방 앞에 멈추어 서 있었다. 어쩐 일인가, 싶었다. 언제나 업무에 시달리느라 자료실을 제 방 마냥 17년 동안 써온 클라우드가 아니었나. 1년에 몇 번 꼴로만 주인을 맞이하는 방이었다. 레이븐도 그 긴 세월동안 클라우드의 방에 들어가본 적이 얼마 없었다.
"…클라우드?"
내리깐 시선은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방 안에 누군가가 들어온 줄도 모르는듯 했다. 문득 클라우드의 코 위에 대충 걸쳐진 검은색 뿔테안경이 레이븐의 눈에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안경이 클라우드가 고개를 살짝 더 숙임과 동시에 아래로 흘러내렸다. 침대 시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손이 위로 올려졌다. 동시에 레이븐이 성큼성큼 클라우드에게 다가갔다.
"아."
짧은 탄식이 클라우드의 입에서 나왔다. 손목을 잡히고 나서야 고개가 들렸고, 그제야 레이븐의 존재를 눈치챈듯 했다. 어색한 미소가 레이븐의 눈동자에 비춰졌다. 집중력이 더럽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주변에 무감각한 것인지. 전자 쪽에 가깝겠지만은. 제쪽으로 클라우드의 고개가 돌려지자 그제야 레이븐은 잡고있던 손목을 놓았다. 하지만 그대로 클라우드가 보고있던 책을 빼앗아 덮더니, 저 멀찍이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클라우드는 여전히 어색한 미소만 띄운 채 레이븐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레이븐은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클라우드의 위로 올라갔다. 적잖게 당황한듯 클라우드는 거의 벗겨질락 말락하게 걸쳐져 있는 안경을 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그 안경은 금방 레이븐이 제 입으로 벗겨냈다. 벗겨낸 안경을 내려놓고, 레이븐은 물끄러미 클라우드를 내려다 보았다.
"…이런건 어디서 배웠어?"
"글쎄."
얼버무리는 대답에 클라우드는 헛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용건은 뭔데?"
그리고 이번엔 그 질문에 레이븐의 말문이 막혔다. 용건, 이라고 할까. 대꾸 없이 자신만 멀뚱멀뚱 쳐다보는 레이븐에 클라우드는 그를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용건을 언급해오는건 지금 한창 책에 집중 중이었다는 뜻이겠고, 이 시간을 방해 받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겠으며, 별 일 아니라면 지금 당장 돌아가달라는 뜻으로 읽혔다. 레이븐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그 부탁 아닌 부탁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잠이 안와서."
"애도 아니고. 지금 비오고 천둥 친다고..."
"아니야."
단호한 대꾸에 클라우드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묘하게 시선을 피하기 시작한 벽안을 끈질기게 제 눈동자로 쫓았다. 레이븐이 멀리 떨궈버린 시선은 클라우드가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에 가 닿았다. 앞표지가 깔끔한 양장본이었다. 아마도 소설책이겠지. 꼭 전문 서적만 읽을 것 같은 인상이, 책을 잡고 있을 때는 언제나 소설책이었다. 볼 때마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해보면, 또 그리 안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선까지 쫓은 클라우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변을 짚어 레이븐이 벗긴 안경을 찾아 제 손에 쥐었다.
"그럼 있는건 상관 없으니까, 책은 보게 해줄래?"
레이븐은 가벼운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사실 책을 빼앗은 것은 일종의 변덕 같은 것이었다. 오죽 재밌으면 사람 들어오는 것도 모를까, 하는. 이내 레이븐이 제 위에서 내려가자, 클라우드는 팔을 뻗어 책을 집어들었다. 갑작스레 빼앗겼던 터에 어디까지 읽었는지 조차 표시를 못해놔서, 한참을 페이지를 넘기며 뒤적여야 했다. 사락, 사락 하는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어쩐지 듣기 좋았다. 자세를 고쳐 앉은 클라우드 쪽으로 몸을 돌려 누운 채로, 레이븐은 클라우드를 바라보았다. 페이지를 찾은 모양인지 소리가 멎었다. 클라우드는 한 손에 쥐고 있던 안경을 다시 대충 걸쳤다. 눈이 안 좋은 것은 절대로 아닐텐데, 클라우드는 종종 안경을 끼곤 했다. 서류를 볼 때나, 책을 읽을 때나. 그리고 그렇게 안경을 끼고 있을 때면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붉은색 눈동자가 유독이나 눈에 잘 띄었다. 그리고 평소의 것과는 분위기가 굉장히 다르게 느껴지곤 했다. 물론, 지금 또한.
독서에 심취해 있는 클라우드를 관찰하는 것은 꽤나 재밌었다. 이따금 내려간 안경을 손으로 다시 올리곤 했고, 페이지의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괜히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페이지를 반대로 넘길 때는 필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 일 것이다. 가끔씩은 제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 뜯기도 했다. 의외의 면모들이 많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집중을 하고 있을 때 하곤 하는 사소한 습관들을 클라우드에게서도 찾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동안 바라본 적도 얼마 없지 않았나. 클라우드가 책의 끝부분을 만지던 손을 시트 위로 내렸다. 동시에 가지런히 내려져 있던 레이븐의 손과 손이 겹쳐졌고, 한참동안이나 그 채로 손바닥과 손등이 맞닿아 있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안되겠다."
문득 클라우드가 픽 웃더니, 보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아놓고는 탁 소리나게 책을 덮었다. 잘근잘근 입술을 씹다가 괜히 그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으로 안경도 벗었다. 레이븐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클라우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책도, 안경도 가지런히 책상 위에 올려졌다.
"네가 너무 쳐다보니까 집중이 안돼서."
"책임전가 하는거야?"
그제야 클라우드가 레이븐의 손등 위에 올려져 있던 제 손을 떼어냈다. 어쩐지 허전한 기분에 레이븐은 괜히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손의 온기가 떨어지자 마자 찬 공기와 맞닿아서일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은 그것보다도 출처를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더하지만서도. 방을 밝히고 있던 불이 꺼졌다. 눈은 이미 빛에 익숙해져 있었던지라 시야가 깜깜하게 암전됐다. 그것은 클라우드도 마찬가지일테지만, 클라우드는 손을 뻗어 레이븐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묘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레이븐은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눈을 깜빡였다.
"자자, 레이."
"…그렇게 좀 부르지 마."
"싫진 않잖아?"
작게 웃는 소리에 레이븐은 괜히 시선을 옆으로 돌려버렸다. 슬슬 어둠이 익숙해지자 눈 앞에서 마주보고 있는 클라우드가 보였다. 앞머리에 가려진 붉은색 눈동자, 문득 레이븐이 손을 뻗어 클라우드의 앞머리를 치웠다. 제 것과는 정 반대의 색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주하고 있자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남과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 낯선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언제나 누군가를 마주하기 전에 제 손으로 죽였다.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보다 죽인 사람이 몇 배는 더 많았다. 인간 관계 또한 대부분이 일회성이었다. 애초에 레이븐은 사교적인 성격이 되지도 못했으나.
"잘래."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클라우드는 떨어져나가는 손을 보면서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정말로 잘 생각인지 레이븐은 그대로 눈을 지긋이 내리 감았다. 클라우드는 한참이나 그런 레이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답잖게 저를 조목조목 뜯어보던 시선이 생각났다. 꽤 오랜시간 닿아있던 손도. 그 레이븐의 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따뜻해서 무의식적으로 잡을 뻔도 했던 것 같다.
잠이 안온다는 연유로 제멋대로 쳐들어온 레이븐은,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일찍 잠들었다. 고르게 내쉬는 숨결이 묘하게 가까워서, 클라우드도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을리가. 간만에 주어진 휴일도 결국 잠 못자는 밤이 되어버렸으니.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억지로나마 잠을 청하고 있던 클라우드가 눈을 떴다. 제 손을 꽉 잡은 것은 레이븐의 손이었다. 잠결에 잡은 것이겠지. 클라우드는 레이븐에게로 손을 뻗었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미간이 살짝 찌푸러져 있었다. 그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펴주고, 그제야 클라우드는 피식 웃었다.
"잘 자, 레이븐."
이 정도면 잠을 못자더라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클라우드는 레이븐이 먼저 잡아온 손을, 깍지까지 껴서 더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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