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커플로그 - 45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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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뒤로 계속 널 찾아온단 말이지."
"응. 밖에 나가면 따라다니기도 하더라."
검지 손가락으로 독수리의 부리를 톡톡, 치며 네일이 대꾸했다. 그럼에도 날개 퍼덕임 하나 없이 얌전히 있는 독수리의 시선은 어쩐지 엘리후에게 고정되어있었다. 네일은 그런 독수리를 보며 신기하다는듯, 날 쳐다보지 않는 건 처음이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깃을 쓰다듬자 그제야 독수리는 시선을 돌려 네일을 쳐다보았다.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엘리후는 흐응, 하고 묘한 소리를 냈다. 기분이 좋아보이기도 하고, 나빠보이기도 하는 그런 표정으로. 이내 엘리후는 팔짱을 풀고 손을 뻗어 네일을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런데, 저거 저렇게 집 안에 들여놔도 괜찮은 거야?"
"안 되려나."
"맹금류잖아. 저거에도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어쩐지, 독수리의 눈동자가 조금 썩은 듯한 느낌은 착각일까. 제 얘기에 반응을 한 것인지, 저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스킨십을 하고 있는 둘을 보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엘리후의 말에 네일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하고, 엘리후는 네일을 뒤에서 끌어안은 그대로 그의 어깨에 제 머리를 툭 올리고 작게 미소지었다. 시선은 똑바로 독수리에게 고정한 상태로. 마치 승리자의 미소인 양. 독수리의 눈이 더 썩어들어갔다. 이런 둘을 알 턱이 없는 네일은 시선을 올린 채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곰곰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급기야 엘리후가 네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어보이자, 독수리는 날카롭게 엘리후를 째려보았다.
"그래도 창문 열어놓으면 자기 맘대로 들어오는 걸."
"추위도 잘 타면서 창문은 뭐하러 열어놔?"
"음… 들어오라고."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걸까."
엘리후가 네일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점점 은근해지고, 네일은 그제서야 그런 엘리후의 손을 내려 꼭 맞잡았다. 너무 노골적으로 쓰다듬었나, 싶어서 엘리후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하지만 밖은 추운 걸. 그래서 들어오면 창문 바로 닫잖아. 지금은 열어놨긴 해도." 네일이 그리 말하며 창문을 가리키자 엘리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네일은 저가 모순점만 잔뜩인 말을 하고 있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조류도 추위를 타는 건 사실이지만."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해."
"…네 애완동물이야?"
"딱히 키우는 건 아니지."
"애초에 독수리를 키운다는 얘기는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일침을 날리면 날릴수록 네일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바뀌어갔다. 저를 몰아내려는 속셈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독수리는 당장이라도 엘리후를 쪼아댈 기세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엘리후는 그 눈빛을 즐기며 네일을 더 꽉 끌어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크기라면 더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그래도 이렇게 자꾸 찾아오니까 신경쓰이는 걸."
"어디 사냥이라도 당해서 죽으면 어쩌려고."
"그걸 대비하려고 보호 마법도 꾸준히 걸어주고 있어."
어쩐지 대화가 빙빙 도는 느낌이라, 엘리후는 혀를 찼다. 책상 위에 서있던 독수리는 위협적이게 날개를 퍼덕였다. 그래봤자 보통 독수리보다 한참 작은 크기라 별로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네일은 그제야 얘 왜 이러지, 하며 독수리에게로 신경을 돌렸다. 네일의 시선이 저에게로 쏠리자 독수리는 퍼덕이는 걸 멈추고 기세등등하게 엘리후를 한번 쳐다보았다가 네일과 시선을 맞추었다.
…이거 못쓰겠는 걸. 속으로 중얼거린 엘리후는 애써 미소를 유지한 채로 네일을 품에서 떼어놓았다가 그대로 돌려 마주 끌어안았다. 이쯤되니 얼척이 없을 지경이었다. 말도 못 하는 새랑 뭘 하고 있는 건지. 동물에게 미움 받는 네일이 조금 가엽긴해서, 언제쯤 괜찮아지려나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네일은 저를 위해서라도 평생 동물에게 미움을 받고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리 생각하며 엘리후는 슬쩍 네일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대로 내려가 콧등에도 입맞추고, 볼에도 입맞추고 나서 입술을 겹쳤다. 가벼운 뽀뽀로 시작하더니 이내 자연스레 열리는 네일의 입술 틈으로 제 혀를 집어넣고 깊게 키스했다. 네일의 어깨를 감싸안고 있던 손이 혀가 얽혀들어갈수록 내려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겹치고 있는 입술 틈새로 옅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네일의 것이었다. 그러자 그 한숨에 반응을 한 것인지, 아니면 눈꼴이 시렸던 것인지. 독수리가 열린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버렸다.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에 뿌듯해하며 엘리후는 그대로 네일을 소파쪽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그러고 입술을 떼어내며 싱긋 웃었다. 꽤 길어진 키스에 네일은 제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숨을 골랐다. 애석히도 엘리후에게는 틈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대로 네일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잘근잘근 깨물었다.
"…엘리……."
"싫어?"
네일은 잠시 엘리후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났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더이상의 말 없이 네일은 제 목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엘리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애 초기ㅣ..........보고십다...
"안녕, 엘리. 잘 보여?"
「…잘 보이고 잘 들리네.」
네일은 즐거운 표정으로 거울 끝을 톡톡 두드렸다. 엘리후는 드물게도 꽤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글쎄, 그 표정때문에 더 즐거운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라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였다. 직접 대면하는 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더라. 속으로 헤아려보다가 맘 아파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제는 보고 싶을 때 부를 수 있으니까. 네일 또한 이런 식으로 기분 좋다는 티를 풀풀 낼 때는 드물어서, 엘리후 또한 얼마 안 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도 놀란 마음은 여전했지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던 네일이 갑자기 이주일 씩이나 연락이 없길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하는 차였다. 네일이 간만에 보내온 편지에는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작은 거울 하나가 동봉되어 있었다. 항상 두서없이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던 편지가 어쩐 일로 침착하길래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하고 괜히 전전긍긍했더랬다. 자세한 이야기는 곧 할 수 있을 거야. 그 뒤에 거울을 들고 자기 이름을 말해보라고, 그렇게 쓰여있었다. 그래서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이름을 불러보니 지금 이 상황이었다. 눈에 띄게 기뻐보이는 네일.
"다행이다. 제대로 안 되면 어쩌나 했어."
「네가 만든 거야?」
"너한테 주는 건데 당연하지. 선물이야."
만드는 데에 꼬박 한 달이나 걸렸다. 생각했던대로 복잡한 마법이 필요해서, 여기저기에서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Teacher's pet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모든 교수님들이 길게 묻지 않고 도와주셨으니 그래도 제법 수월하게 만들었다. 가이드라인도 딱히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혼자서 끙끙댔으면 절대 만들지 못했겠지. 「선물이라기엔 너무 네 흑심이 보이는데.」 토달아오는 목소리에 부정은 할 수 없었다. 저가 보고 싶어서 만든 것이니까. 엘리후도 좋아해줄 것이라 믿긴 했지만. 어쨌든 말만 번지르르하지, 제 욕심을 위한 물건일 뿐이다.
"표정이 왜그래. 별로야?"
그렇기에, 여전히 묘한 표정을 짓고있는 엘리후를 보면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정도 자제하긴 하겠지만 저가 시도때도 안 가리고 불러댈 수도 있으니, 귀찮을 수도 있겠지. 졸업반이니, 엘리후도 분명히 바쁠 터였다. 감안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래도 이런 반응이라면 시무룩해져버린다. 정말로, 최대한 자제할건데.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새삼스럽게, 내 애인이 이런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시무룩해져있던 찰나, 네일은 엘리후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에 들고 있던 거울을 떨어트릴 뻔 했다. 얼굴도 잔뜩 붉어져있겠지, 분명히. 네일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 그래. 그렇지. 틀린 단어를 말 한 것도 아닌데, 왜이렇게 부끄럽고 심장이 뛰는지. 그래……. 맞잖아. 애인, 연인. 다시금 깨달은 것도 아니고 너무 새삼스러운 반응이었다. 엘리후는 그런 네일을 왜 저러지, 하는 표정으로 빤히 보다가 뒤늦게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에 약하군. 속으로 기억해두기로 하며.
"…너무 한 거 아닌지. 아무리 그래도 수석이라고. 전교에서 나보다 성적 좋은, 아니 비슷한 애도 드물텐데."
「물론 그건 알지만.」
귀여운 걸 어떻게 해. 키득거리며 이어지는 말에 네일은 한 번 더 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고마워, 네일. 앞으로 널 귀찮게 할지도 모르겠네.」
"누가 할 소릴."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대답하는 와중에도,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지. 수줍음타는 여자애도 아니고, 이렇게 반응이 나올 때마다 네일은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만큼 좋아한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안심은 되지만. 네일은 괜히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거울을 고쳐 들었다. 성능은 생각 한 것보다 더 괜찮았다. 머글 세계에도 비슷한 물건이 있긴 하지만, 여긴 거기가 아니니까. 그래도 다행히 대체품은 존재하더라. 이렇게라도 얼굴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지금까지처럼 많이 힘들진 않겠지. 얼굴도 보지 못하고, 목소리도 듣지 못하며 편지만 주고받던 시간은 정말로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었다.
"주의사항은 편지봉투 안 쪽에 잘 찾아보면 작은 종이 하나 더 있을 거야. 그거 보면 돼."
「응. 그래도 말이지.」
엘리후는 조심스럽게 거울 위에 제 손을 가져다댔다. 네일은 살짝 고개를 갸웃, 하며 그런 거울 너머의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만지지 못하는 건 조금 슬프네.」
"……그러게."
그 말에 네일 또한 거울 위, 엘리후의 손이 닿아 있는 부분에 손을 댔다. 온기도 느껴지지 않고. 네일은 쓰게 웃었다. 지금은 이거로 만족해야겠지. 몇 번이고 네가 보고싶어서, 호그와트를 뛰쳐나갈 생각도 여러번 했다. 자퇴도 고려해봤고. …그래도 역시 학교는 졸업해야겠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겠지. 얼마간은 이렇게 가끔 보며 볼 때마다 두근거려하는 것도 좋으니까. 부디 너도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엘리후의 손이 한 번 거울 위를 쓸고 지나가고, 그렇게 떨어져나갔다. 네일 또한 손을 떼어냈다.
"언제든 불러도 괜찮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네 수업 중에 부르면 어쩌려고.」
"…그건 좀 난감하겠지만."
「그래. 너도 수업이 있고, 나도 있으니까. 그러니 슬슬 자야지, 네일.」
달래듯 살짝 깔린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오자 네일은 저도 모르게 살짝 얼굴을 붉혔다. 만지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매일매일 만나면 정말로 심장이 터져서 죽지 않을까, 나. 말도 안되는 걱정을 하며 네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한동안 일찍 잔 적이 거의 없었으나. 새벽이 막 시작될 시간, 네일은 거울을 든 채로 침대에 풀썩 누웠다.
"지금 누웠어. 너도 눕지 그래?"
「나는 조금 이따가. 너 자는 거 보고 잘게.」
"일찍 자기."
「그래, 그래.」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 해야 하는데, 이런 건.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엘리후는 픽 웃고 말았다.
「그럼, 잘 자. 네일.」
"너도. 좋은 꿈 꿔."
얼마만에 하는 밤인사인지. 어쩐지 따뜻해지는 느낌이라, 네일은 옅게 미소지었다. 기분 좋게 거울을 덮고 잠을 청하려다, 잊은 말이 있어서 뒤늦게 거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봐, 엘리."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네. 그러며, 웃어보였다. 그리고 어쩐지 부끄러워져 대답도 제대로 듣지 않고 거울을 덮어 베개 옆에 내려두었다. 하지만 어떤 대답이었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아. 제법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엘리후 또한 내일 봐. 하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네일은 거울의 뒷면을 손가락으로 두어번 훑다가, 혹여 저가 자는 도중 잘못 건드려 떨어트리기라도 할까봐. 엘리후의 것에는 전달되는 과정에서 손상이라도 될까 싶어 미리 보호 마법을 걸어두긴 했지만 저의 것에는 걸어두지 않았더랬다. 네일은 지팡이를 꺼내 간단하게 제 거울에 보호 마법을 걸었다. 그제야 안심이 되어, 조심스레 거울을 놓아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내일도, 내일 모레도, 그 다음날도. 얼굴 보고 이야기 할 수 있어. 그것 하나만으로도 한달 꼬박 밤 샌 것 이상을 보상받는 기분이라, 기분이 좋아졌다.
별거 아닌거로 질투해놓고 아닌척하는 엘리 보고싶ㄷㅏ.......
네일은 갑자기 제 손에서 빠져나간 휴대폰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제 휴대폰을 한 손에 든 채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어차피 액정에는 아까까지 저와 주고 받았던 메시지 창밖에 띄워져 있지 않은데, 굳이 가져간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네일은 작게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엘리후는 흘끔 네일의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더럽게 신호가 안 터지는 탓에, 몇 분 정도 답장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답장을 기다리면서 말이지. 어쩐지 휴대폰 한 번 보고 밖을 한 번 보고, 또 다시 휴대폰 한 번 보는 걸 반복하는 네일이 상상되어 엘리후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겉으로는 그냥 즐거운 것처럼 보이겠지만.
얼마 전에 똑같은 기종으로 맞춰 바꾼 휴대폰이었다. 색도 똑같고, 케이스만 달라서 케이스를 빼놓고 있다가 상대의 것을 가지고 간 적도 있었더랬다. 어차피 휴대폰이 바뀌더라도 연락을 못하는 건 아니니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 때 네일이 저를 어떻게 저장해놨는지 봤었는데. 휴대폰을 바꾸기 전에는 평범하게 엘리, 라고 저장해놨던 게 뒤에 꽉 찬 하트 하나가 더 붙어있었더랬다. 그리고 또, 돌려줄 때 "선물 넣어놨으니 꼭 혼자 있을 때 확인해." 하기에 나중에 확인해보니 셀카를 잔뜩 찍어놔 갤러리에 저장해놓은 것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걸 보고 한참이나 웃었었는데. 자신도 해줄 걸 그랬나, 하기도 했고.
"안 줄거야?"
의자를 빼 네일과 마주 앉은 순간까지도 엘리후는 휴대폰을 돌려주지 않았다. 네일이 손을 뻗어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지만 엘리후가 휴대폰을 잡고 있는 손을 높이 들어버려 헛손질만 두어번 하고 관둘 수밖에 없었다. 이내 네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에 장난기는 많아선. 웃으며 다시 손을 내리는 엘리후를 보며 네일은 내 건데. 하고 작게 투덜거렸다. 어차피 엘리후와 만나고 있을 땐 따로 연락 올 곳도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휴대폰을 꺼놓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갖고 있지 않더라도 딱히 달라지는 건 없지만 말이다.
엘리후는 네일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그렇게 맞춰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커플폰이었다. 한 달 정도 되었나. 핸드폰 고리까지 귀여운 거로 맞추고 나니 볼 때마다 제법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성인 남성 둘이 이러고 있는 게 조금 유치한 듯도 싶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사랑하면 유치해 질 수도 있는 법이리라. 엘리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네일의 휴대폰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네일은 그것을 제법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참, 뻔뻔하게 사생활 침해를 한다 싶다. 워낙 깔끔하게 사용하는 휴대폰이라 볼 것도 없을텐데. 연락의 90%는 엘리후였고, 나머지는 아버지나 친척들이었다. 간혹 학교 일로 동기들에게 전화가 올 때도 있었지만 아주 극소수였다. 그정도로 태클을 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얼마나 연락이 한정적이냐면, 엘리후가 처음 커플폰 맞추자고 했을 땐 거절했을 정도였다. 엘리후와 만나기 전에 네일에게 휴대폰이란 그저 알람 혹은 시계, 게임기 이외의 용도는 전혀 아니었기에. 그러니 당연히 연락을 주고받는 대상은 엘리후 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됐다 했더니 꼬치꼬치 이유를 캐묻고, 3일이나 내내 커플폰 맞추자 노래를 불러대니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서 이유를 말해버렸었다. "어차피 너랑 연락하는 거 아니면 쓰지도 않는데 뭐하러 바꿔." 하고.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더 바꾸자고 떼를 쓰기에 결국 몇 년이나 쓴 정든 휴대폰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더랬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이었는데. 엘리후와 처음 만나고, 처음 번호를 저장하고, 틈틈히 메시지를 나누고, 자기 전에 통화를 하고, 그러다가 잠들기도 하고, 모닝콜도 해주고, 같이 사진을 찍고……. 실없는 추억들을 쌓아왔지. 그래서 바꿨음에도 도저히 버릴 수는 없어서, 그 낡은 휴대폰은 서랍 안 깊숙히에 잘 넣어뒀다.
"네일."
엘리후가 뭘 좋아하는 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묻지 않아도 고민 없이 주문을 할 수가 있었다. 주문을 마치고 돌아오자 제 이름을 불러오는 엘리후에 네일은 응? 하고 다소 멍청하게 대꾸했다. 엘리후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엘리후가 대답하지 않자 네일은 "왜 그래." 하고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엘리후의 시선이 휴대폰으로 내려졌고, 네일은 그 행동에 속으로 곰곰히 생각을 시작했다. 뭔가 걸릴만한 게 있나? 딱히 없을텐데. 결국 네일은 앉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엘리후의 옆으로 가 허리를 숙여, 제 연인이 뭘 그리 불만스럽게 보고 있는 지 직접 제 눈으로 확인 했다. 네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꽤 뜻밖의 것이었다. 도대체 뭐때문에 이러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휴대폰 전화번호부였다. 띄워져 있는 화면은.
"……?"
"전화번호부엔 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보니 스크롤까지 내려가게 된 전화번호부를 보여주며 엘리후는 싱긋 웃었다. …이 웃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이전에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던가. 진심으로 기억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엘리후를 바라보던 네일은 지긋이 저를 향하고 있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해버렸다. 마치 죄 지은 사람인 마냥. 그러고 또 한참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비슷한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났다.
「어차피 연락 하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나만 저장해놓는 건 어때.」
「…너무 일침인 거 아냐? 그리고 유치하게 그게 뭐야. 가족이나 친척 정도는 저장하게 해줘.」
「그정도야.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해.」
「애초에 너 이외에는 저장할 일도 없을 걸.」
……이게 약속이었나? 이걸 약속으로 치나? 네일은 제법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금 엘리후를 쳐다보았다. 애초에 저장도 언제 했더라, 이틀인가 3일 전에 한 것이었다. 그것도 그 망할 놈에 조별 과제 때문에. 네일은 끙, 하고 작게 신음했다. 메모장에 따로 저장해둘 걸 그랬나. 물론 그건 더 태클 걸렸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아예 저장을 안 해둘 수도 없는 것이, 모르는 번호로 온 연락은 무시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려서였다. 평소였다면 조도 당연히 엘리후와 짰을 텐데, 학번 순으로 조를 자르면 별 수가 없었다.
"…화났어?"
"글쎄."
엘리후는 괜히 애매하게 대답하고 턱을 괴었다. 얄밉게 네일의 휴대폰을 두어번 흔들어보이며. 네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어 있는 번호 세개를 눈에 새겼다. 부분은 외워놔야 과제에 탈이 없겠지. 그리고 나서 지워버렸다. 네일은 다시금 깔끔해진 전화번호부를 엘리후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이제 됐지." 엘리후는 그저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고. 어쩌다 항상 이렇게 페이스에 휘말리게 된건지 모르겠다.
"진동 울리잖아. 가져와."
제법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엘리후를 보자니 어쩐지 야속해졌다. 네일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알림벨을 화가 난 듯한 손놀림으로 잡아챘다. 그러자 엘리후는 아까의 네일처럼 왜 그러냐 묻다가, 삐졌냐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고. 얼척 없다는 듯 하, 하고 헛웃음 치며 네일은 휙 뒤돌아버렸다. …이리 삐진 척, 화난 척 해봤자 소용 없다는 사실 쯤이야 잘 알고 있었다. 저에게 삐지거나 화날 리가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도 가지고 있나 싶을 정도로, 엘리후에게는 통하질 않았던 것이다. …너무 꿰뚫리고 있나. 네일은 속으로 한 번 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림벨을 카운터에 두고, 받은 음료 두 개를 가져와 네일은 하나를 엘리후에게 내밀었다. 오래 같이 지내서 그런가, 입맛도 똑같아져선 음료도 똑같은 걸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바뀐 것은 자신 쪽이었고. 엘리후는 그것을 받고 테이블 위에 탁 소리나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엘리?"
손목을 잡아 끌어 허리를 숙이게 하더니, 엘리후는 제멋대로 네일의 입술에 슬쩍 제 입술을 겹쳤다. 자칫하면 들고 있던 음료를 떨어트릴 뻔 했다. 부드럽게 입술이 맞물리고, 비교적 빠르게 떨어져 나가며 엘리후는 가볍게 혀로 네일의 입술을 핥았다. 네일은 벙찐 표정으로 그런 엘리후를 바라보다가, 제 손으로 입가를 가려버렸다. 얼굴이 붉어진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그 반응을 즐기듯 엘리후는 쿡쿡 웃었다.
"너 진짜…"
"뭐해. 안 나갈 거야?"
테이블에 올려둔 음료를 들고 엘리후는 반대쪽 손으로 네일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네일은 도저히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채였고, 엘리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저들에게 쏠리는 시선은 그것대로 짜릿하긴 했지만 달갑지만은 않아서, 엘리후는 네일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카페 밖으로 나갔다. 두어걸음 더 걸어, 뒷모습에까지 진득하게 이어진 시선을 다 떼어냈을 때 즈음 엘리후는 입을 열었다.
"여기, 다시는 못 오겠지?"
"…너때매 못살겠다, 진짜."
정말로? 장난스레 되물으며 얼굴을 가까이 해오는 엘리후를 애써 외면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냥 싫다고는 못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지. 모를 엘리후도 아니라서 네일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그저 휙 고개를 돌려버릴 뿐이었다.
왜 고딩네일하면 편의점 알바하면서 닌텐도나 하고있는 것밖에 상상이 안될까...
제 볼에 붙은 반창고에 닿은 시선을 느끼고 네일은 가만히 눈동자만 데룩, 반대쪽으로 굴렸다. 이래서 오늘은 오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한건데. 엘리후는 손을 뻗어 그 반창고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괜히 엄지로 반창고 위를 꾹꾹 눌렀다. 네일은 갑자기 느껴진 아픔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고. 허나 엘리후는 끈질기게도 그 움직임을 따라 다시 반창고에 손가락을 대고, 더 세게 꾹 눌렀다. 어제 다쳤을 때보다 지금 상처 위에 닿아온 압력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인지. 네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엘리후의 그 손을 직접 깍지 껴 잡아 내렸다.
"아파, 엘리."
"아프라고 한 거야."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야속하게 돌아온 말에 네일은 조금 풀이 죽어선 투덜거렸다. 누가 다치고 싶어서 다쳤겠냐며. 엘리후는 반대쪽 손으로 다시금 반창고에 손을 대,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반창고를 떼어보았다. 어제 왔을 때는 없었는데.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상처일 것이란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상처는 꽤 컸다. 단순하게 베인 것이라기엔 깊게 파여 있고, 당장이라도 잘못 건드리면 피가 나올 것처럼 생긴 상처였다. 슬쩍 손가락으로 훑어보니 바로 핏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엘리후는 미간을 찌푸렸고, 네일도 아픈지 미간을 찌푸렸다.
"다치면 말 하라고 했지."
"이정도가 뭐 다친 거라고……."
"네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오자, 네일은 순간 덜컥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슬슬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그런 네일의 시선을 엘리후는 꾸준하게 따라갔고, 이내 아까보다는 좀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여기 봐."
"……응."
그리고 그 목소리에 결국 이끌리듯 눈을 맞출 수밖에 없었더랬다. 그리고 시선은 그대로 고정한 채로 손가락 끝에 묻은 네일의 피를 슬쩍 핥는 엘리후를 보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엘리후는 그 모습에 픽 웃고는 네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아까의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를 유지한 채로 조곤조곤 말했다
"왜 다쳤어?"
"좀 싸웠어."
"누구랑."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한 그대로였지만, 묘하게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말이었다. 네일은 속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니까, 다쳤을 때도 이 장면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는 자신, 나름 상냥하게 계속해서 캐묻는 엘리후. 딱 그대로였다. 그리고 여러번 재생했을 때마다 그 결과는 똑같았으니. 당연히 현실에서도 그럴 예정이었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매번 이런 식이지. 생떼를 부려도 결국 숙이고 들어가는 건 저 쪽이었다. 저도 나름대로 강단있다고 생각하는데, 엘리후의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약해지곤 했다.
"새벽에 손님이랑. 왜, 있잖아. 술 먹고 시비 거는 거. 그런 거였어.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야?"
…분위기가 바뀌었다. 제 말을 따라하는 엘리후에 네일은 식은땀을 흘렸다. 엘리후는 빙긋 웃고는 손가락으로 다시금 길게 상처를 훑었다. 네일은 저도 모르게 으, 하고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만둘 생각은 없는지 엘리후는 계속해서 그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핏방울이 맺히는 거에서 끝나지 않고 그대로 볼을 타고 흐를 때까지. 차마 그 손을 피하거나 떼어낼 수가 없어서, 네일은 따끔거리는 느낌에 눈만 꽉 감을 뿐이었다.
"뭐에 다쳤어. 스친 거라면 하루 반창고 붙인 정도로 피가 다시 날 정도는 아닐텐데."
"…유리조각."
곧이곧대로 말하니 엘리후는 제법 화가 난 듯 했다. 상처가 덧나는 것보다 엘리가 화내는 게 더 무서운 걸.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일은 겨우 엘리후의 손을 잡아 제 상처에서 떼어냈다. 손가락에 묻어 있던 피가 네일의 손에까지 묻고, 거기로 시선을 돌린 엘리후는 작게 혀를 찼다. 상처가 덧나면 안 될테니 연고와 반창고를 제 돈으로 샀다. 직접 계산을 마친 네일은 그런 엘리후를 물끄럼 바라보았다. 상처는 아픈데, 그래도 이런 식으로 반응해주는 건 묘하게도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저가 괜히 괴롭힌 상처 위에 연고를 발라주고, 반창고를 붙여 한 번 꾹 누른 뒤에야 엘리후는 기분이 조금 나아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사이에 계속 네일이 조마조마해 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엘리후의 눈치를 한참이나 살피다가, 네일은 조심스럽게 변명 아닌 변명을 위해 말을 꺼냈다.
"그 새벽에 경찰서도 갔다왔고, 보상도 받았고. 학교에서 싸운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잠을 평소보다 더 못자긴 했지만, 응? 정말 화난 건 아니지?"
어째 조금 횡설수설 한 것 같지만. 가만히 네일의 말을 듣고 있던 엘리후는 낮게 쿡쿡,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상처가 없는 반대쪽 볼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가볍게 입을 맞추기도 하고. CCTV가 있긴 한데, 신경 안쓰기로 했다. 입술을 맞대 오자 네일은 엘리후의 목에 자연스럽게 팔을 감았다. 손님은…… 뭐. 적을 시간대니까.
"그냥 걱정이 되는 거지."
"미안."
혹여나 누가 볼새라, 네일은 슬쩍 엘리후를 밀어내었다. 조금 미안한 눈치로. 물론 그 마음을 모르진 않았기에 엘리후 또한 어느 정도 거리를 둬주었다.
"집에 안 들어가도 돼?"
"늦는다고 말하고 나왔어."
게다가 오늘은 집에 들어가는 걸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엘리후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제 볼에 닿았던 엘리후의 손길을 다시금 느끼듯 그 볼을 제 손으로 쓸어내던 네일은 그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카운터 안 쪽에 대충 늘어놓았던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틈이 날 때마다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려고 잔뜩 가져왔는데, 소용 없게 되어버렸네.
…뭐, 이 편이 더 좋긴 하지만.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옅게 미소지었다.
"미안, 간만에 만나는 건데."
"딱히 미안할 것까진 없는데 말이지."
책 두 권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네일은 제법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의자를 끌어 앉자마자 책상 위로 늘어지고 말았다. 엘리후는 그런 네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읽어야 할 책이 많다면서 겨우 두 권 밖에 가지고 오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찾다 찾다 포기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제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손길이 나쁘진 않은지 네일은 한동안 눈을 감고 가만히 그 손길을 느끼기만 했다. 사실 여러가지로 힘들었던 차였다. 공부도 손에 안 잡히고, 교수님들은 진로 얘기로 귀찮게 하고, 시험이 다가오니 찾아오는 애들은 많고. 해야 할 공부만으로도 골머리 썩고 있는데, 뭐 좀 가르쳐달라 오는 동급생들이나 후배들을 보며 애써 지은 미소 때문에 입가에 경련이 일 것 같은 나날이 계속 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며칠 전부터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걸 포기했더랬다. 혼자 지내는 방 앞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냐고 묻는다면,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좀 덜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쓰다듬던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엘리후를 힐끔 보고는 네일은 옅게 웃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한 번 보니 열밤 푹 잔 것 마냥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런 의미에선 가끔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만……. 네일은 손을 뻗어 엘리후의 볼을 간지럽혔다. 그래도 역시, 보고 있어도 보고싶은 마음인데 가끔 본다면 너무 지쳐버릴지도 모르겠다. 졸업 하면 자주 볼 수 있을까. 호그와트에 7년 동안 다니면서 졸업이라 하면 오히려 조금 무서워지곤 했는데, 이제는 졸업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근처에 집이라도 구해달라 부탁할까. 하나 쯤은 집안에서 거저로 해줄 만 한데.
"바쁘고 피곤하면 안 나왔어도 됐는데."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뒷말을 꾹 삼키고 네일은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사실은 좀 무리해서 나온 거긴 했다. 아무리 주말이라고 해도 외출이 자유로운 학교는 아니었으니까. 여러가지 일로 얻은 프리패스권을 이런 식으로 남용해도 되는 건가, 싶긴 했지만. 애초에 자주 보기 힘든 애인을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면 쓸 곳도 없었다. 학교 안에서야 예전부터 이리저리 잘 피해서 교칙 잘만 어기고 다녔으니까. "하긴, 안 나왔으면 섭섭했겠지." 작게 미소지으며 하는 말에 네일도 픽 웃어버렸다. 보고 싶었어, 라는 말은 너무 상투적이고 당연한 말이기에 생략했다. 과연 보고 싶지 않은 날이 올지. 평생 안 올 것이라고 장담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시험 전에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응원 꼭 받고 싶었거든. 아직 꽤 남긴 했지만."
"6월이라고 했지."
"응. 잘 봐야 할텐데."
엘리후는 속으로 남은 날짜를 꼽아보았다. 몇 번 쯤 더 볼 수 있을까. 운이 안 좋다면 시험 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 싶다. 말 없이 저를 가만히 바라보자 네일은 살짝 고개를 갸웃 했다. 그 행동에 엘리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고. ……뭐, 설령 자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무리가 아닐까. 네일이 공부하는 걸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너도 공부 해야 하지 않겠냐며 네일이 잔소리 할 게 뻔하니. 그런고로 혹여 시간이 되더라도 말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시험을 조금이라도 못보면 제 풀에 제가 속상해할 게 네일이니까.
"잘 봐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사실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너랑 약속한 거 지키는 데…에는 정말 필요 없긴 하겠다. 그래도 잘 보긴 해야 돼."
"그놈에 열등감은 아직도 그러나? 좀 고쳐진 것 같더니."
"그런 것도 있지만."
네일은 의미심장하게 빙긋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찾아야 할 책을 쭉 적어놓은 종이였다. 애매한 답변에 엘리후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리를 피하려는 네일의 팔을 잡아 멈춰 세우고, "뭔데. 말해줘. 궁금하잖아." 하니 네일은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겨우 결심한 듯 슬쩍 시선을 피하며,
"…네 애인인데 그정도도 못하면 내가 나한테 짜증 날 것 같아서. 너한테 어울리는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저가 말해놓고 부끄러운지 네일은 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 말을 들은 엘리후는 푸스스 웃을 뿐이었고. 그리고 가볍게 손목을 끌어당겨 네일과 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네일은 제법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영 불안한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네일의 모습을 즐기다가, 엘리후는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네일을 놓아주었다. 네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런 엘리후를 흘겨볼 뿐이었고.
"띄워주는 건 고마운데, 널 낮추는 건 안 했으면 좋겠네. 지금으로도 충분해, 네일."
"……응."
고마워. 작은 중얼거림까지 듣고 나서야 만족한 듯 엘리후는 다시금 미소지었다. 네일도 살짝 얼굴을 붉힌 채로 웃었고. 그리고 엘리후는 네일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멋대로 가져가 눈으로 한 번 훑고, 반으로 찢어 위의 것을 네일에게 돌려주었다.
"같이 찾는 게 더 빠르겠지? 위에 두 권은 찾은 거 같고, 여기 써있는 건 내가 찾을게."
"굳이 안 그래줘도 되는데…"
"그리고 오늘은 공부 생각 하지 말고 나만 보기. 약속할 수 있지?"
"…애초에 널 두고 다른 걸 생각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당연히 그래야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고 있는 네일을 뒤로하고 엘리후는 책장들 틈새로 들어가버렸다. 네일은 잠시 그런 엘리후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다가, 제 손에 남은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가져가면 안 되는 부분을 가져간 것 같은데. 돌려받아야 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어쩐지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잠시 마른 세수를 하고. 어쩌지, 하다가. 그냥 저도 책을 찾으러 발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변명할 거리나 생각 해놔야겠다.
* * *
"네일."
옆에 놓여지는 책들과 불러오는 목소리. 널부러져 있던 네일은 고개를 들었다. 다 찾고 와서 좀 누워있었더니 저도 모르게 잠들었던 모양이다. 졸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네일에 엘리후는 짙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 툭, 하고 책 한권을 올려 두어번 두드렸다. 윽. 윽. 네일은 반응하듯 소리를 냈다. 그리고 두드려진 부분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엘리후는 잠 좀 깨봐, 하며 그런 네일의 볼을 쿡쿡 찔렀다.
"이거 뭐야?"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엘리후는 들고 있는 책을 네일에게 보여주었다.
《연애의 정석》
"……."
"응? 이거 뭐야, 네일?"
…그래, 이 책이 문제였다. 나중에 빌렸어야 했는데. 변명할 말도 생각해놓지 못했다. 이게 뭐냐니. 그냥 그대로인데. 좀 유치한 생각이긴 했다. 책으로 연애를 배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영 자신이 없고,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어서. 마지막 보루 같은 거였는데. 빌려놓고 엘리후에게는 티도 안 내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들켜버릴 줄이야. 발끝에서부터 오는 부끄러움에 네일은 고개를 휙 돌려 빙글빙글 웃는 엘리후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 반응에 엘리후는 더 즐거워졌는지 책상 위에 놓인 네일의 손을 꼭 맞잡았고.
"대답 안 해줄 거야?"
"…뭐라고 말할 게 있어야지."
"그럼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해해도 되나?"
"모, 몰라."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웃고 있는 엘리후를 한 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맞잡은 손에는 어째선지 힘이 더 들어가고 있고. 아무래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 분명하다. 이어지는 정적은 오히려 더 긴장감만 만들어버려 네일은 애꿎은 제 아랫입술만 꾹 깨물었다. 그리고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웃고 있다. 아주 기분 좋게.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 엘리후를 한 손으로 가볍게 밀어 옆 의자에 걸쳐 눕히고, 그 위에 겹쳐 몸을 숨겼다. 엘리후는 그런 네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듯 했지만, 뭘 할 지 알겠다는 듯 다시 미소를 띄웠다. …못살겠다, 정말. 하기로 마음 먹은 걸 안 할 수도 없고. 네일은 그대로 가볍게 입술을 겹치고 떼어냈다.
"…가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조금 아쉬운데. 더 안 해줄거야?"
"들고 있는 책이나 가져와!"
정말로, 어째선지 도서관 안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네일은 책상 위에 올려진 책들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런 네일의 뒷모습을 보며 엘리후는 쿡쿡, 웃을 뿐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