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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커플로그 - 45 post

엘리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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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사교성이 부족하다, 보다는 사람을 사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네일에게 있어서는 더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빠르게 피곤해지곤 했다. 저를 알아볼 사람이 많은 집안 행사에서는 더더욱. 게다가 오늘은 저에게 쏟아진 이목들 덕분에 두 배 정도 더 피곤했다. 겨우 축가 연주가 뭐라고. 그러다가도 결혼식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네일은 곧바로 제 방으로 향했다. 좋은 게 딱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꽤 오랜 시간 저를 괴롭혔던 짐 하나를 겨우 덜어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집에 도착한 지금까지도 연인이 제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다. 오늘 자고 갈 모양이구나. 그렇게 또 기분이 좋아져버리고 만다.

  침대에 털썩 앉아선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고 있으니, 자연스레 방까지 따라온 엘리후가 제 옆에 앉았다. 피로가 꽤 많이 쌓였는지 눈이 조금 아팠다. 그렇게 네일이 한참이나 눈만 비비고 있자 엘리후는 손을 뻗어 그런 네일의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눈을 비비던 손이 내려지고, 평소 잘 때가 아닌 이상 잘 벗지 않는지라 보기가 힘든 맨눈이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 눈을 오래 비빈 터에 눈가가 그 색보다는 조금 옅게, 발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엘리후는 그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제 손으로 두어번 눈을 비벼주었다. 종종 약한 감기에 시달리는 것만 빼면 네일은 대체적으로 건강했지만, 항상 걱정스러운 건 눈이었다. 예전에는 안경을 벗고도 시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스물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급격히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의 네일은 안경을 벗으면 조금 떨어진 곳의 저를 볼 때 약하게 인상을 쓰곤 했다. 그러니 계속 눈을 비비는 행동에 걱정이 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졌어.”


  겨우 이정도로 말이지. 엘리후는 픽 웃으며 눈가를 비벼주던 손을 내려 시트 위에 놓여져 있는 네일의 손을 잡아 올렸다. 이내 오늘 수고를 참 많이 했을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다. 네일은 잠시 그걸 보고 있다가 고개를 슬쩍 돌려버렸다. 연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부분부분마다 약한 간질거림이 남았다. 이윽고 반대쪽 손까지 잡아 열 손가락 모두에 키스하고 나서야 엘리후는 네일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시선만 힐끔거리며 저를 보고 있었던 네일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별 저항 없이 기대오는 것이 퍽 사랑스럽다.


  “오늘 고생 많았어.”

  “그만 좀 불렀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네일은 작게 툴툴거렸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마냥 좋기만 했다.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 한참동안 네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엘리후는 다시금 손을 내려 네일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장갑을 벗고 잡아주면 더 좋을 텐데. 자주 하는 생각이었지만, 네일은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좋은 건 똑같으니까. 게다가 다른쪽 손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지금 제 손 위에 놓여져 있는 손에서는 장갑 너머에서까지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맨손으로 잡는 것과는 조금 약하지만 그렇기에 좋은 무언가가 있었다.

  피로가 풀림과 동시에 솔솔 오기 시작하는 잠기운에 네일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후도 피곤할테니 저가 잠들면 저를 눕혀주고 그 옆에 누워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 것이다. 같이 밤을 보내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쉬운 일이지만…….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미 잠기운이 모두 이겨버린 뒤였다. 불편해보이면 갈아입혀주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네일이 잠에 취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


  “날이 갈수록 더 잘 치니까 어쩔 수 없지.”


  피아노 말이야. 늦은 대답이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는지 엘리후는 그리 덧붙였다. 목소리에 조금 잠이 깨버렸다. 네일은 눈을 뜨고 엘리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였다면 그냥 대충 웃고 넘기거나 했을 텐데, 연인의 칭찬이란 기분이 좋은 것이라. 네일은 슬쩍 시선을 내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걸 들킨 건 꽤 예전의 일이고, 그를 위해서 쳐준 적도 여러 번이지만 그래도 뭔가 묘하게 부끄러웠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치는 걸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은 당장 축가를 연주하고 있을 때 깨달은 것이었다.


  “…그만큼 연습을 하니까. 이번에는 당연히 더 많이 해야 했고.”


  네일이 대답을 했으나, 이번에도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내리고 있던 시선을 다시 엘리후에게로 향하니,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히 하는 걸까. 네일이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마주쳤다. 금방 엘리후는 눈웃음을 보였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며 네일은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어렸을 적이라면 저도 모르게 피해버렸겠지만. 그 상태로 먼저 말을 꺼내려고 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대답이 늦는 거냐며. 대화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소 뜬금없는 말로 엘리후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리 물었을 것이다.


 “첫째, 네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평생 이어질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할게.”


  ─? 순간 네일은 말을 잃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엘리후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여전히 웃으며 그런 네일을 마주했다. 상황 파악이 안됐는지, 꽤 오래 눈만 깜빡이며 저를 바라보는 네일에 솔직히 말하자면 웃음이 터질 뻔 했으나. 여전히 잠이 덜 깬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하고 싶은 게 생겨버린 이상은 해야만 했기에, 엘리후는 웃음을 꾹 참았다. 연인의 손에 이끌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결혼식을 보고, 연인이 남을 위해 연주하는 축가를 들으며 문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엘리후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둘째,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너만을 바라볼게.”


  그제야 뒤늦게 엘리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달은 듯 네일은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여전히 웃고 있는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막힌 말문이 도저히 뚫리질 않았다.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면 안 되는 건가. 매번 이렇게 엘리후가 돌발 행동을 할 때마다 네일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곤 했다. ……하기사, 이런건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채로 듣는 게 더 설레긴 하지만. 그래도 야속한 것은 야속한 것이라.


  “셋째, 아무리 지치고 힘든 상황이어도 너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은 절대 하지 않도록 할게.”

  “잠시만.”


  제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네일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엘리후가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네일의 입에 댐으로써 그 이상의 말을 하는 걸 막아버렸다. 이내 “지금은 조용히 듣고 있어야지?”하며 푸스스 웃는 것이다. 네일은 눈을 내려 제 입을 막은 손가락을 잠시 보다가 이내 다시 엘리후를 보았다. 부끄러울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결혼식을 보고 온 뒤라서 그 분위기에 타, 정식은 아니더라도 꺼내보는 서약일터다. 알고 있다. 하지만 마치 정말로 그 자리에서 듣는 기분이라서. 입술에서 손가락이 떨어져나가자 네일은 저도 모르게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다시금 손가락이 닿아와 그것을 풀어주었다. 애써 멍청하게 짓고 있던 표정을 지워내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하여간에, 제멋대로다. 엘리후는 그 웃음을 보고 나서야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싫진 않아.


  “넷째, 항상 널 믿고 네 믿음 또한 저버리지 않을게.”


  싫을 리가 없잖아.


  “다섯째,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오래도록 변치 않고 오로지 너만을 사랑할게.”


  자, 그럼 이제 대답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엘리후는 눈을 떴다. 이내 그는 웃고 있던 표정을 지워내고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손이 뻗어져오고,


  “…네일?”

  “응?”

  “왜 울어.”


  손가락이 부드럽게 눈가를 쓸고 지나갔다. 오히려 네일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울고 있어? 전혀 몰랐다는 눈치로 네일은 빤히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엘리후는 다시금 픽 웃고 만다. 계속해서 네일의 눈가를 쓸어주며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다. 네일은 슬며시 그 손을 밀어내고 제 소매를 눈에 가져다댔다. 정말로 울고 있네. 어쩐지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기 시작한다 했다. 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쳐내며 네일은 옅게 웃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데, 그런데도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왜 우는지 알잖아.”

  “너도 참.”


  어쩔 수 없네, 하는 태도로 엘리후는 네일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설마 울 줄은 몰랐는데. 꽤 당황스러운 반응이라 저마저 놀라고 말았다. 여전히 작게 훌쩍이고 있는 연인의 등을 토닥여주다가 엘리후는 슬며시 드러나 있는 귀에 입을 맞추었다. 이내 등을 토닥이던 손으로 네일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 그 이마에, 콧잔등에, 볼에, 끝으로 입술에까지 가볍게 키스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답은 안 해줄 거야?”

  “……설마.”


  겨우 눈물을 그친 네일은 빙긋 웃으며 작게, 눈 앞의 연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사랑해.”


  언젠가 이런 약식이 아닌, 정식으로 대답할 날을 꿈꾸었다. 그때는 아마 지금보다도 더 울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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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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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그러니까 연애초기... 보고싶다... (의식의흐름)




  입술이 겹쳐지고, 반사적으로 뒤로 뺀 혀를 연인의 혀로 잡혀 억지로 뒤섞여질 때면 네일은 항상 엘리후의 어깨나 손을 꽉 잡곤 했다.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비단 입을 맞추는 행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에. 제 옆에 엘리후가 있다는 것 마저도. 그래도 눈은 감을 수 있게 됐으니 발전했다고 생각하는데. 네일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안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분명히 마지막 기억이 저를 경멸하던 모습이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손이, 입술이, 몸이 닿을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꿈 속에서 살게 된 게 아닌 이상은 몇밤을 자고 깨어났으니 현실이 맞는데. 그만큼 믿기지가 않는다는 뜻이었다. 네가 끝내 나를 죽이기 위해서 내게 사랑을 속삭이며 연기하고 내게 맞춰주는 것이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아, 그만큼 내가 너를 사랑하는구나. 깨닫게 되는 건 제법 기분 좋은 일이다. 물론 정말 그렇다면 조금, 아니 꽤 많이 아프겠지만. 아파하는 것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조금 다르기 마련이니. 당연히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믿고 있는 것에 가깝겠지만.


  입술이 떼어지고 눈을 떴다. 엘리후는 완전히 떨어져나가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일은 저에게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향해있는 그 시선에 결국 다시 눈을 감고야 말았다. 적응이, 되질 않는다. 괜히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근처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힘이 빠진 몸은 별 저항없이 끌려가, 그 품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저에게 팔을 베개 삼아 내준 것도, 옷 위로 닿는 살도, 여전히 잡고 있는 손도. 적응은 되지 않더라도 다 너무 좋는 것들 뿐이라 네일은 두어번 연인의 품에 얼굴을 부볐다. 사랑을 한다는 게 다 이런걸까. 적응이 되지 않고 이상한데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좋고 행복한 것.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거, 평생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몸은 이해하는데 머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네일은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뻗어 가볍게 엘리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엘리후는 방금 전까지 잡고 있던 손으로 네일의 머리를 두어번 헤짚었다. 그러다가 손을 내려, 이마를 손으로 덮는 것이다.


  "어디 아파?"

  "…? 아니. 멀쩡한걸."


  그 말에 네일은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푸른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 본래 이렇게 쑥스럼을 많이 탔던가. 네일은 괜히 그 품에 얼굴을 더 파묻었다. 저는 꽤나 무덤덤한 성격이라고 생각해왔다. 산책을 하면서 그에게 휘둘릴 때마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막연하게 그때부터 시작이었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저를 이렇게 만드는 건 눈 앞에 있는 엘리후 뿐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이렇지 않았는데. 이마저도 적응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이마를 덮고 있던 손이 다시 올라가, 이번에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느낌이 좋다. 네일은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며 얌전히 그 손길에 몸을 맡겼다. 저가 이리 행복해져도 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랑 뭔가 다르길래."

  "되게 오래 본 것처럼 말하네."


  다시금 시선이 마주친다. 그러게. 엘리후는 작게 웃었다. 당장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같이 자는 것도 처음이고. 그러니까 엘리후가 저를 다르다 느낀다면, 정말로 그냥 저가 쑥스럼을 타고 있기 때문이겠지. 굳이 그것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기에 네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같이 자는 거 처음이구나. 그리 인식하고나니 어쩐지 시선이, 손이, 몸이 닿는 곳마다 간질거리는 느낌이라 네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엘리후가 고개를 틀어 입술을 맞대온다. 언제쯤 익숙해질까. 당장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부터 익숙해져야 할 듯 싶은데. 혀를 섞지 않는 가벼운 입맞춤. 끝끝내 속 아주 깊은 곳마저 간질거리기 시작한다. 낯선 감각. 하지만 정말로, 기분은 좋다.


  "…나, 오늘 못잘 것 같아."

  "모처럼 같이 자는건데 못자면 어떻게 해."

  "같이 안 자면 되지 뭐."


  나까지 안재울 생각이냐며, 장난스레 답하는 엘리후를 빤히 쳐다보며 네일은 픽 웃고야 만다. 어차피 저가 안 잘거라면 똑같이 안 자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말마따나 정말로 얼마나 봤다고. 분명히 낯설고 적응이 안 되는데, 묘하게 익숙하다. 앞으로 평생 볼 사람이기에 그렇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엘리후 또한 평생 저를 볼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물음에 빠져든다. 아니라면 큰 일인데. 네일은 두어번 눈을 깜빡이다 다시 그대로 눈을 내리감았다. 나는, 평생 보고 싶은데. 이게 연애 초기의 풋풋한 감정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더라도, 정말로.

  문득 귓가에서 작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저가 잤으면 하는 걸까. 하기사, 연인이 잠을 안 잔다면 걱정되는 것이야 당연한데. 네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그 노랫소리를 들었다. 가사 하나 없는 허밍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마냥 좋았다. 목소리, 좋다. 그러고보니 목소리에 반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딱히 그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냥 모든게 다 좋았다. 애초에 이유를 설명할만한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건. 정말로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걸로 충분한 감정이라고. 그래서 저가 왜 좋은건지, 엘리후에게 묻지 않았다. 막연하게 똑같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오히려 이유가 나온다면 그거로 서운할지도 모르겠다며. 저는, 정말로 다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거니까.

  제목도 알지 못하는 노래가 끝나갈 즈음, 네일은 슬쩍 그 입술에 먼저 입을 맞추었다. 처음이었다. 저가 먼저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노래는 끊어지고, 엘리후는 그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할건지 보려는 생각인듯이. 물론 입맞춤이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서툴게 혀를 넣어보려다 말고, 아까 엘리후가 했던 것처럼 그저 입술을 맞댄 것에서 끝나고야 만다. 아직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처음이구나. 말을 뱉고 난 뒤에야 깨닫고야 만다. 제 마음을 고백할 때에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좋아한다는, 다소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말을 사용했으니까. 알아들어주어서 다행이라고, 고맙다고 생각한다. 엘리후는 제법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 대신 네일을 가볍게 끌어당겨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혀를 뒤섞는 진한 키스로 이어지고, 네일은 엘리후의 손이나 어깨를 잡는 것 대신 그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안았다. 더 가깝게. …차츰 이렇게 익숙해져갈 것이다. 그리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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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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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슬슬 술기운이 도는 것 같기도 하고. 네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조금 띵하다. 멈춰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 제 눈 앞에서 채워지는 잔을 보니, 어쩐지 멈출 수만은 없어서. 네일은 시선을 올려 제 맞은편에 앉은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로,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반 쯤 채워진 술잔을 든 채로. 옅게 띄고 있는 미소는 묘하게 도발적이라, 네일은 그것에 이끌리듯 제 잔을 집어 들었다. 제대로 취하는 것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겠지. 안봐도 뻔했다. 매번 이 번에는 안 넘어가야지, 하고 다짐하고 시작해도 꼭 이리 넘어가게 되어있다. 딱히 져주는 것도 아닌데도. 그냥 제 연인이 저에게 있어서 일종의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럴 때면 하곤 한다. 사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괜찮아?"


그러니까, 이렇게 다정하게 말 걸지 말라고.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리 말하려는 것을 꾹 참고 네일은 괜히 잔에 담긴 술만 목 뒤로 넘겼다. 몇 잔 째더라. 딱히 술이 약하다는 생각은 한 적은 없었는데, 요상하게 엘리후는 이길 수가 없었다. 이쯤되면 자존심의 문제도 있는지라. 항상 나가 떨어져서 끙끙거리는 건 네일 쪽이었고, 그런 네일을 잘 인터셉트해 제마음대로 요리하는 건 엘리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끙끙거릴 때 즈음에는 기억이 거의 날아가버린 뒤라서,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네일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날이 밝으면 평소보다 더한 허리 통증에 시달릴 뿐. 그래서 그냥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만 하는 게 고작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뺨에 손이 닿는다. 항상 끼고 다니던 검은색 장갑을 벗은 손은 제법 차가워서, 몸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식혀주었다. 그게 기분이 좋았다. 네일은 지긋이 눈을 감고 그 손바닥에 뺨을 부볐다. 이번에도 이기는 건 포기다. 엘리후는 느릿하게 반대쪽 손을 뻗어 네일이 들고 있는 잔을 뺏어 들었다. 네일은 저가 술이 약한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나, 엘리후에게는 그냥 마냥 약한 것이기만 해서. 반 즈음 술이 남은 잔 옆에 빈 잔이 놓인다. 네일은 급기야 제 뺨에 닿아있는 엘리후의 손 위에 제 손을 얹기까지 했다. 기분이 좋다.


"…왜 넌 맨날 하나도 안 취하는 건데."

"글쎄."


불만 섞인 말에 작게 키득거리며 엘리후는 네일을 끌어와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대로  제 얼굴을 네일의 얼굴에 가까이 했다. 키스할 듯 말 듯한 거리. 애태우듯, 시선만 가만히 맞출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결국 그런 엘리후를 먼저 끌어당겨 입을 맞춘 건 네일 쪽이었다. 술냄새가 꽤나 심했다. 이정도로 마셨던가? 저에게는 어떻든 별로 상관 없는 일이었으나. 오히려 많이 취한 쪽이 좋았지. 맞댄 입술 사이로 서툴게 밀고 들어오는 혀가 제법 귀여워서, 엘리후는 잠시 네일이 제 마음대로 하게 놔둬보았다. 요령은 하나도 없이 혀가 얽히고, 질척한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술냄새가 더 가까이 확 끼쳐온다. 싫진 않았다.

그리고 슬슬 네일의 혀에 힘이 빠져갈 때 즈음, 엘리후는 네일의 뒷머리를 제 손으로 받치며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숨 쉴 틈 조차 주지 않고 얽혀오는 혀에 네일은 슬슬 정신을 차리고 있기가 힘들었다. 숨이 막히고, 힘이 빠진 손으로 밀어내보지만 그대로 두 손목을 한 손에 잡혀 이도저도 못하게 되어버린다. 하여간에 악취미. 이리 속으로 투덜거릴 정신도 슬슬 빠져만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엘리후는 키스에서마저 애를 태울 생각인지, 진하게 얽던 혀를 풀고 장난스레 제 혀로 네일의 혀를 톡톡 건드리기만 했다. 확 깨물어버릴까. 그런 생각도 했으나, 그럴 깡은 애석히도 부족했다. 결국 엘리후도 슬슬 숨쉬기가 힘들었는지, 그 상태에서 얼마 안 가 입술을 떼어냈다. 가까이에서 서로의 숨을 주고받는다. 네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슬슬 들어갈까."

"뭘 하려고."


긴 한숨소리를 다시금 제 입술로 덮어버리며 엘리후는 네일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네일은 억지로 그 입술을 떼어내며 엘리후를 노려보았다. 들어가자면서. 여기서도 나쁘진 않지 않나.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도저히 무어라 할 수는 없었기에, 네일은 그냥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항상 이런 식이지. 네일은 작게 신음을 뱉어냈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듯, 엘리후는 드러난 목덜미에 제 입술을 묻었다. 묘한 느낌. 술을 먹으면 오히려 감각이 무뎌진다던데, 네일은 오히려 예민해지는 것만 같았다. 붉게 자국이 새겨져나갈 때마다 네일은 몸을 흠칫 떨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뻗어 엘리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퍽 다정스러운 손길은 되지 못했으나.

졸리지가 않네. 졸리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텐데.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으며, 제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러나 금방 손이 턱에 닿아 강제로 다시 엘리후를 바라보게 했고, 네일은 힘없이 이끌려갈 뿐이었다. 뱀같은 손이 등줄기를 훑는다. 네일은 가만히 제 연인에게 기대었다. 간지럽히듯 등을, 허리를, 허벅지를 쓸어내린다. 네일은 저도모르게 키득거렸다. 술기운 때문이다. 술기운 때문에 괜시리 기분이 좋은 거다. 엘리후는 흐흥, 하고 알다가도 모를 소리를 내며 그런 네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취하면 고분고분해진단 말이지."

"…원래도 고분고분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평소보다도 더 말이야."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에 네일은 저도 모르게 힉, 하고 바보같은 소리를 뱉어냈다. 엘리후는 그대로 네일의 두 팔을 꽉 잡고 혀로 네일의 귀를 핥았다. 술때문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잔뜩 붉어져 있는 귀에 혀가 닿을 때마다 네일은 자꾸만 흠칫흠칫 떨었다. 슬슬 오르기 시작하는 열기를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팔을 잡힌 탓에 어떻게 움직일 수도 없었고, 엘리후는 여전히 귀를 집요하게 혀로 괴롭히며 애만 태울 뿐이었다. 이런 건 싫은데. 느릿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을 무렵, 귀가 깨물린다. 네일은 순간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싫어……."

"뭐가?"

"…애태우지 말아줘……."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애원한다. 어느새 흐릿해진 시선과 마주치자, 엘리후는 가만히 네일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슬슬 그 또한 참는 것이 무리가 되어갈 때 즈음,


"빨리 해줘."


재촉하는 목소리.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응? 빨리. 그 목소리가 괜히 귓가에 웅웅 울렸다. 그리 말하는 네일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엘리후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타며 재촉하는 것이야 평소에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그만큼 거의 항상 집요하게도 애를 태웠으니─ 잔뜩 풀린 눈으로 똑바로 저를 쳐다보며 그리 말 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꽉 잡고 있던 네일의 팔을 놓아주었다. 자유가 된 팔은 자연스레 연인의 어깨를 감싼다.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을 찾았다는 듯이. 꽤나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닌가. 술에 취한 네일은 항상 묘하게 적극적이었고, 자극적이었으며, 종종 저마저 정신을 잃을 지경에 빠뜨리곤 했다.


취하지 않는 이유는 술이 아니라 네게 취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지.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엘리후는 다시금 제 연인에게 깊게 입을 맞추었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이 움직여 목에 감겨오는데, 그것마저 퍽 사랑스러워 엘리후는 속으로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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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애초부터 사교 모임은 네일이 가장 기피하는 자리중 하나였다. 글쎄, 대외적인 이미지로는 대부분이 그럴리가 없다. 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네일이 대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실제 그의 성격은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그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는 자리가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사람을 사귀는 일이나 어울리는 일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한마디로 말해서 딱 질색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매번 피할 수 있는 자리는 피해왔다. 피할 수 없는 자리라면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와야 했지만. 클라이스가 주관하는 행사라던지, 정기적인 모임 같은 것에는 불가항력이 작용했다. 굳이 따지자면 외가 쪽에도 그런 것은 있었으나. 본가는 불편했다. 아는 사람도 본가에 많았고, 평소 가까이 지내왔던 것도 본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어릴적부터 불편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 또한 불편해했고, 그 이유는 충분히 알고 있기에 똑같은 이유이겠거니 싶었다. 허나 시간이 꽤 흐른 아직까지도 불편했다. 가족들이 없다고 이름 뒤에 붙은 클라이스가 때어지는 것은 아닌데. 네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 한숨에 반응하듯 제 손을 잡아오는 연인의 손에, 또 금세 기분이 좋아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 오늘은 이전처럼 불편한 자리만은 아니다.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엘리후는 빙긋 웃었고, 네일 또한 비슷하게 웃어보였다. 네일이 이런 자리를 싫어한다는 것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느라 피곤해한다는 것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엘리후였다. 그러니 굳이 한숨의 의미를 묻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있잖아. 미소 뒤에 숨은 말을 네일은 이미 읽어낸 뒤였다. 안그래도, 깨달은 순간 기분이 나아진 차다. 네일은 괜히 그 손을 한 번 꽉 잡았다가 놓았다. 보는 눈이 많은지라. 그래도 연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좋은, 네일은 그런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엘리후를 이런 자리에 데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데려오고 싶지 않아서 데려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항상 같이 오고 싶었지. 비단 비밀 연애 때문만은 아니었다. 엘리후 알피에리, 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내기조차 무서웠던 때가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디멘터즈의 테러로 클라이스가 입은 피해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컸다. 그 디멘터즈의 일원이었다는 과거가 있는 게 다름아닌 엘리후였고. 졸업하자마자 따로 집을 얻어 나온 이유도 그게 대부분을 차지했다. 안그래도 호그와트와 덤스트랭이라는 심각한 원거리 연애를 해왔는데, 졸업 이후 같은 영국에 있으면서까지 만나기 힘들고 싶진 않았더랬다. 아무튼, 저가 어찌저찌 집안에 잘 말하고 여론도 잠잠해진 시기. 그때에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였다. 그러니 더더욱 놓칠 수 없었고. 이런 자리에 같이 있어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아마도, 그 트리위저드 시기의 호그와트에서 있었던 무도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괜시리 떨리기도 했다.


"너무 붙어있으면 티날텐데."

"그런가?"


물론 엘리후에게만 초대장을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아마 이 시기가 네일이 태어난 이래 가장 열심히 남에게 연락을 취한 시기일 것이다. 이제와서는 안부조차 주고받지 않는 호그와트 동급생들에게까지도 보냈으니까. 다행히 생각보다도 더 많이 와주었고, 일종의 위장술은 어찌저찌 잘 풀릴 듯 싶었다. 일단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이니까. 아무리 잠잠해졌다고 해도 여파는 클 것이 당연했다. 남자와 남자인 것도 그랬지만. 일단 과거, 서로에게 지팡이를 겨누었던 사이가 아닌가. 그래서 한동안 둘이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문이 꽤나 일었다. 신기할테지. 저도 아직도 신기한데. 밝힌다면 신문 한 면은 무리더라도 한구석에 정도는 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네일은 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염려일지도 모르겠으나. 굳이 그런식으로 엘리후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타격을 주고 싶진 않았기에, 네일은 사실을 숨기는데에 급급했다. 정작 당사자인 엘리후는 그닥 신경 안쓰는 듯 했지만. "종종 올테니까. 좀 이따가 봐." 네일은 엘리후의 손을 한 번 더 꽉 잡았다가 놓고 멀어져갔다. 굳이 안그래도 될터인데. 연애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괜히 주변에 눈치가 보였다. 이거로 걸리지 않을까, 저거로 걸리지 않을까 하며. 연인이 아니었더라면 별 신경 안썼을 문제들에 모두 신경이 쓰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서도.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금 푹 가라앉았다. 데리고 오면 뭐해. 같이 있을 수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네일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인사를 해야 할 친인척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저는 이리 기분이 상했건만. 인사를 모두 마치고 온 네일은 저도 모르는 여자와 미소까지 띄운 채 대화하고 있는 엘리후를 보며 얼척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누구는 애인 대외적 이미지까지 챙겨주느라 이리 고생하고 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저도 모르게 울컥하여 네일은 손에 들린 와인잔에 담긴 와인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얼떨결에 받은 것이었는데, 진짜 마시게 될줄은. 말술은 아니더라도 주량이 작진 않았다. 그러니 몇 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홧김에 마시는 거라도. …취해버렸을 때의 상황이 좀 공포스럽긴 했지만. 설마 이런 자리에서까지 엘리후에게 매달려 징징거리겠어. 그런 생각도 있었다. 아무튼, 날 두고 저리 혼자 즐거워하고있단 말이지. 네일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저 또한 상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제 연인이 쓸데없을 정도로 사교성이 좋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네일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본인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큰 장점이었으나, 그 애인인 네일에게만은 묘하게 속쓰린 점이었다. 인기가 많은 건 좋은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으나, 역시 속이 쓰린 건 당연하고도 어쩔 수 없다. 마음 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드는 질투심에 네일은 한 번 더 잔에 담은 와인을 들이켰다. 눈 앞에 있는 여성―비슷한 자리에서 여러번 만나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네일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 답할 뿐이었다. 억지로 걸치고 있는 미소. 격식을 잔뜩 차린 말투와 태도. 모든것이 불편했으나, 억지로 사람을 마주하고 있지 않다간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정도로 질투심이 심했던가. 처음 안 사실이다.


느릿하게 취기가 돌았다. 와인을 그 뒤로 몇 잔을 더 마신건지 모르겠다. 짓고 있는 미소에 슬슬 힘이 풀려가며 이야기가 길어질 즈음. 네일은 팔이 잡아당겨지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과 마주하자, 괜히 미소가 더 짙어졌다. 조금만 더 취했더라면 평소 취했을 때처럼 늘어진 목소리로 연인을 불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정도로 취한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엘리후의 표정 때문에 어느정도 취기가 가시기도 했다.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네일은 알 수 있었다. 심기가 건드려졌다는 걸. 네일은 멍청하게 눈만 깜빡이며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몇 초 정도 시선이 겹치고, 엘리후는 네일이 대화하고 있던 여성에게로 눈을 돌렸다.


"친구가 좀 취한 것 같아서. 데려가도 괜찮겠죠, 미스?"

"얼마든지요."


모르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미묘한 살기를. 반 쯤 엘리후에게 끌려가는 형태로 발걸음을 옮기며, 네일은 조심스레 엘리후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실수한건가? 하지만……. 네일은 잠시 엘리후가 다른 이와 살갑게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을 떠올려냈다. 조금 취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수시로 살폈기에 알고 있었다. 속이 쓰렸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엘리후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면 무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자기도 그랬으면서? 오히려 자신이 엘리후에게 화를 내야하는 것 아닌지? 생각이 이리저리 뒤섞여 네일은 속으로 작게 신음했다. 아무래도,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엘리후가 네일을 이끌고 간 곳은 인적이 드문 발코니였다. 대뜸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네일 또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공기가 스산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네일은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잡혀있던 팔이 놓아지고 엘리후가 뒤돌아 저를 바라보는 순간. 먼저 끌어당겨 입을 맞춘 건 네일 쪽이었다. 아직 술기운이 도는 걸지도 모르지. 깊게 이어지는 듯 하다가, 금방 떼어내자 머리가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엘리후의 탓을 하든, 미안하다 사과를 하든. 먼저 나오는 쪽으로 말을 할 생각으로 네일은 입을 열었으나. 그 입은 떼어지고 얼마 지나지않아 다시금 겹쳐졌다. 도망칠 수 없게 턱이 잡혔고, 엘리후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혀를 섞기 전 입천장을 훑고, 치열을 따라 덧그리는 느낌에 네일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어서 혀가 얽혔다. 그 느낌이 오늘따라 더 질척한 건 어째서일지. 잡아먹힐 것만 같아……. 어쩐지 아득해지는 의식을 꽉 붙잡으며 네일은 엘리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어차피 보는 이는 없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질투심 유발 같은 거면 상대를 잘못 골랐어."


입술을 떼어냄과 동시에 엘리후는 네일의 귓가에 그리 속삭였다. 그리고 턱을 잡고 있던 손으로 네일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이윽고 목을 죄고 있던 셔츠의 맨윗단추가 풀리자 네일은 몸을 움츠렸다. 제법 차가운 주변의 공기 때문은 아니었다. 목을 쓸어올리는 은근한 손길 때문이었다. 어쩐지 숨이 막힌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네일은 입술만 여러번 달싹였다. 속삭이던 목소리가 어쩐지 귓가에 아른거려, 한 번 더 소름이 돋았다. 말을 꺼낼 수 있게 된 것은 셔츠 단추가 하나 풀려져나간 때였다.


"너도 그랬잖아."


설마 나는 되고 너는 안돼, 식의 답도 없는 논리를 펼치는 건 아니겠지. 네일은 허리를 살짝 숙인 엘리후를 흘겨보았다. 그 말에 목을 훑던 입술이 멈췄다. 엘리후는 그대로 눈을 치켜떠 네일과 시선을 맞추었다. 술기운 때문에 조금 붉어져있던 얼굴이 더 새빨개져있다. 최근들어 묘하게 적어진, 보기에 즐거운 그 반응이었다. 자신있게 남탓을 해놓고 여전히 뻘뻘거리고 있는 네일을 보며 엘리후는 픽 웃었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에 네일은 그제야 손을 뻗어 엘리후를 조금 밀어냈다. 인적이 드물다고 해도 이런 모습까지 보이면 수습이 힘들어진다. 진하게 키스까지 한 마당에 참으로 새삼스러웠지만은.

엘리후는 손을 뻗어 네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느낌이 좋아, 네일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어쩐지 이대로 기대어 잠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이런 자리에서는 그냥 꼭 붙어있어야겠는걸."

"…그 전에 그냥 안 데려올래."

"왜, 난 좋은걸. 안 어울리게 격식 차리는 너 보는 것도 꽤 즐겁고, 이런 옷 입은 모습도 볼 수 있잖아."


평소엔 둘 다 못 보는걸.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며 엘리후는 저가 풀어내린 네일의 셔츠 단추를 다시 채워주고, 넥타이 매무새도 잘 가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마무리하듯 네일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 떼어냈다. 네일은 괜히 그 볼을 제 손으로 두어번 문질렀다.


"…나도 그건 좋지만."


애초에 넌 뭘 입든 잘생겼는걸. 뒷말은 꾹 삼켰다.


"역시 드레스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또 말도 안되는 얘기 한다."

"난 진심이야, 네일."


엘리후는 키득거리며 슬쩍 내려가 코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네일의 안경을 제 손으로 올려주었다. "그거 입었다간 정말로 신문 한면에 나올지도 모르겠네." 농을 농으로 받아치며 네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악취미. 그리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금 전의 살벌한 기운은 어디가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엘리후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네일의 옆머리를 가만히 넘겨주었다.

안쪽에서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연회장의 안, 노래가 발코니까지 흘러들어왔다. 엘리후는 네일의 손을 가볍게 잡아올려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어때. 춤이라도 한 곡?"

"이런 데에서?"

"뭐 어때. 바람도 안 불고."


술기운이 사라져가자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다. 이크. 네일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엘리후는 어째서, 하는 표정을 지으며 네일을 바라보았다. 아쉬운 기색은 둘 모두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아까 할아버님이 조금 이따 잠깐 보자고 하셨어.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미안. 다음에는 꼭……."

"괜찮아."


어째 권한 나보다 네가 더 아쉬워하는 것 같네. 엘리후는 웃으며 우물거리고 있는 입술에 가볍게 입맞췄다. 자동으로 감겨지는 눈이 꽤나 귀엽다. 슬쩍 손으로 안경을 벗겨내고 더 깊게 키스하며, 네일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괜찮다고 해도 역시 아쉬운 건 아쉬운거다. 네일 만큼 내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작 그때가 되면 또 눈치 보인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래도, 저가 원하는대로 옷을 입고 나온 네일을 보는 것만은 꽤나 기분이 좋은 일이었기에. 애초에 연인을 제 입맛대로 꾸민 걸 누가 싫어하겠는가. 슬그머니 보인 질투심도 금방 들여보낼 수 있었다. 입술을 떼어내며 엘리후는 벗겨낸 안경을 다시 씌워주었다.


"술은 좀 깼고?"

"응."

"얘기하면서 실수하면 안돼."


애 어르는 말투. 네일은 시선을 내리깔며 안 그래, 하고 맞받아칠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미안했다. 기껏 데리고 와놓고 같이 있어주지 못한 것도, 별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힌 것도, 이리 또 자리를 비우게 된 것도. 모든 것이 다. 숨겨도 연인의 눈에만은 숨길 수 없는 것이 있다. 엘리후도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좀 오래 걸릴지도 몰라. 안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그랬다간 우리 여보가 머릿속으로 괜한 상상 하면서 또 질투하느라 제대로 대답 못 할 것 같은걸."

"너 진짜……."


그러면서도 부정은 못하는 모습에 엘리후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네일은 잔뜩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어떤 부분에서 부끄러워하고 있는지는 엘리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엘리후를 쳐다보다가, 그냥 꼭 끌어안고 말았다.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도 있었으나. 비단 그것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염없이 미안한 마음. 영 지워지지가 않았다. 네일은 제 연인의 어깨에 두어번 얼굴을 부비고는 한 번 더 미안해. 하고 작게 사과했다. 엘리후는 대답 대신 네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밖에서 기다릴게."

"응…"


몇 번을 더 토닥여주고 엘리후는 네일을 놓아주었다. 네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나… 금방 다녀올게, 자기야."


그리 말하며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네일은 발코니를 나가버렸다. 바쁜 것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가 더 클 것이다. 뭐가 저리 부끄러운지. 한두번 들은 호칭도 아니고, 한두번 말한 호칭도 아닌데. 엘리후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난간에 등을 기댔다. 불어오는 바람이 꽤나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어쩐지, 그 바람에 맞추어 네일이 자기야. 하고 불렀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 엘리후는 괜히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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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저기."


문득 제 소매를 잡아 끄는 손길에 엘리후는 고개를 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네일은 항상 엘리후를 이런 식으로 불렀다. 본래도 네일은 엘리후의 이름을 안부르는 편이긴 했으나, 지금은 더더욱 입에 담지 않았다. 어색해서일까. 기억까지 잃은 판에 그것을 지적할 생각은 없어서, 엘리후는 별 말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제일 속이 상할 것은 본인이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엘리후가 보는 네일은 달라진 게 없으면서도, 많이 달라졌다. 종종 엘리후가 모르는 낯선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 혹은 원래 이랬는데 자신을 만나고 나서 변한 것인지. 알 방법은 없었지만 말이다. 물어봤자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리 엘리후를 부른 네일은 한참이나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엘리후는 덤덤히 그런 네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푸른색 눈동자는 가만히 붉은색 눈동자를 따라 움직였고, 안경알 뒤의 붉은색 눈동자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피해 도망쳤다. 이윽고 엘리후는 픽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제 소매를 잡고있는 네일의 손을 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품에 안기도록. 몸에 힘을 하나도 주지 않고 있던 네일은 그대로 당겨져 엘리후의 품에 포옥 안기고 말았다. 당황한 듯 고개가 들려져, 뭐하는 짓이냐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지만 엘리후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하려던 말은 뭐야?"


네일은 고개만 몇 번이나 저었다. 먼저 말을 붙인 주제에, 안 하겠다는 건가. 엘리후는 어쩐지 오기가 생겨 그런 네일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옷 너머로 살이 맞닿았다. 기억을 잃은 후의 네일이 좋은점, 그 첫번째. 본래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겨우 이것가지고 끙끙거리며 저를 밀어내려 하는 꼴이 제법 귀여웠다. 엘리후는 빙긋 웃으며 네일의 두 손목을 모아, 제 한 손에 잡아버렸다. 이렇게 하면 밀어내지도 못한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는 네일의 허리를 더 끌어당겨 몸을 밀착시켰다. 저를 바라보는 얼굴이 점점 더 붉게 물드는 것은 언제나 보기 즐거운 일이다. 이내 네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해줄 마음이 생겼어? 그 물음에 네일은 고개를 저었다. 저런.

엘리후의 손이 노골적으로 허리를 쓰다듬기 시작할 즈음, 네일은 입술을 달싹였다. 더이상 얼굴이 새빨개지기도 힘들 것 같다. 엘리후는 슬쩍 고개를 숙여 끝까지 새빨개진 귀를 한 번 느릿하게 핥았다. 히익. 제법 재밌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이가 몇인데 17살 같은 반응을. 귓가에 그리 속삭이니 네일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싫은 건 아니잖아. 네일은 결국 귓가에 진득하게 달라붙어오는 목소리를 피하기 위해 아예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이래서야. 엘리후는 작게 혀를 찼고, 다시금 네일의 허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하면 울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우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일석이조일지도 모르지.


"말…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기억을 잃은 후의 네일이 좋은점, 그 두번째. 꼬박꼬박 저에게 존대를 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동갑인데 말이지. 게다가 동거까지 하는 마당에. 엘리후는 네일의 귓가에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런 네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고, 꽉 잡고 있던 두 손을 풀어주었다. 손목에 조금 자국이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힘을 주고 잡았으니까. 네일은 조금 야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지 않은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티를 그리 냈는데, 조금 넘어가주면 안되는 것인지. 물론 상대에게 그런 것이 통할리가 없다는 사실 쯤이야 아주 한참 전에 알았다. 저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리 행동했을까. 그건 모를 일이지만.


"우리… 그,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사귀는 사이라고 했잖아요."

"그렇지."


네일은 또다시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괜히 제 주머니 속의 커플링이 신경쓰여, 시선 조차 어디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기만 했다. 엘리후는 그런 네일이 마냥 귀엽기만 해 자꾸만 피식피식 웃었다. 그 얘기를 하는 게 그리도 어려웠을까. 1, 2년 전 부터인가. 부쩍 부끄럼 타는 것이 적어진 네일이었기에 그것에 대해서 조금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이리 기억을 잃고 퇴행이라도 한 마냥 행동하니, 네일이 기억을 잃은 게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이럴 때면 저는 그저 마냥 즐거웠기에. 네일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말을 뱉어내듯, 툭 던졌다.


"그럼, 지금은요?"


―음? 엘리후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네일은 두어번 입술을 달싹이다, 지금은요. 하고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지금은요. 엘리후는 그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지금, 지금이라. 장갑에 가려져 있더라도 저는 커플링만은 꼬박꼬박 하고 다녔다. 그런데 네일은 아니었다. 기억을 잃은 후부터는 하지 않았다. 물론, 항상 몸에 지니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지금 네일의 주머니 속에 그것이 들은 것도, 계속해서 네일이 그걸 의식하고 있다는 것도. 저로서는 솔직히 이유 모를 행동이었다. 연인이었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긍정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부정했다면 아예 가지고다니지 않았을 것이고 긍정했다면 끼고 다녔을테지. 그만큼 네일의 행동은 굉장히 애매모호했다. 그래서, 결국은 본인도 제대로 모르겠다. 그거군.

사실 네일은 꽤나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엘리후에게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었다. 도통 어찌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으니까. 어느 날 눈을 뜨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당장 남자랑 한 침대에서 자고 있고. 사이 좋게 하나씩 끼워져있는 커플링에, 동거를 증명하는 집 안. 남자가 말해준, 그와 자신이 몇 년이나 사귀어온 연인 사이라는 사실. 솔직히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남자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기에, 아니. 오히려 좋았기에 더더욱. 이런 사람과 사귀었다니. 행복했겠구나. 첫날에 그런 생각을 바로 했다. 그리고 곧바로 어쩐지 억울해졌다. 그 행복을 모두 잊어버린 것이.

엘리후가 대답 없이 눈만 깜빡이며 저를 바라보자, 네일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아니에요? 그, 연인 사이. 지금은요. 엘리후가 멋대로 한거긴 해도, 일단은 매일 같이 한 침대에서 한 이불 덮고 자고 있고. 종종 같이 씻기도 하고. 데이트… 도 하고. 연인이 아니라고는 말 못할 것 같은데."

"말 잘하네. 더 해봐."

"아, 진짜… 엘리후."


더 해보라니깐. 네일은 그저 제 아랫입술만 꾹 깨물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뭘 더 해보라는 건지. 이미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네일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즈음, 엘리후가 다시금 귓가에 속삭여왔다. 그 목소리에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네일은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싫다는 반응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묻는다면, 절대로 싫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밖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역설적이긴 했지만 기분 좋은 소름끼침이었다.


"고백, 네가 먼저 했었다고 말했지?"


길게 숨을 내쉰다. 네일은 어쩐 일인지 엘리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유가 된 손을 두어번 털어내더니, 제게 아주 가까이 밀착한 엘리후를 밀어내 틈을 만들었다. 얼굴과 얼굴이 가까운 듯 먼 듯, 눈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고. 저도 모르게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고 있던 네일은 한 번 제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리고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엘리후는 기다리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는 네일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나, 엘리후를 좋아해요. 두 번이나 좋아해버렸어요. 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연인 계속 해줘요… 나는,"

"거기까지."


네일의 말을 가볍게 끊고 엘리후는 더 중얼거리려는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굳이 말로 해야하는 것이었나. 물론, 네일이 먼저 다시 말해오기를 기다린 건 사실이다. 엘리후는 손을 움직여 네일의 주머니 속을 뒤졌다. 그렇지. 커플링 여기 있네. 곧바로 입술이 떨어져나가고, 엘리후는 한 손에 반지를 꼭 쥔 채로 반대쪽 손으로 네일의 왼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 약지에,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반지를 껴주었다. 그리고 빙긋 웃어보인다.


"사랑해."

"나, 나두요. 나도 사랑해요."


그리 말하며 네일은 커플링이 끼워진 제 왼손을 바라보았다. 심장 떨려. 엘리후가 키득거리며 웃었고, 그 왼손을 꽉 잡은채로 네일을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어어. 네일은 놀란 표정으로 엘리후를 바라보긴 했으나, 딱히 그 손을 떨쳐내거나 가지 않으려고 버티거나 하지는 않았다. 꺼져있는 방의 불을 키고, 엘리후는 그대로 네일을 눕혀버렸다. 네일의 표정에는 아주 제대로 물음표가 띄워져 있었다. 설마 이런 쪽에서까지 애로 돌아간 건 아니겠지, 싶었지만. 지금까지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리고 지금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대로 엘리후는 네일의 위에 올라탄 채로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정도면 나 칭찬해줘야해. 꽤 오래 참았잖아."

"저, 저기. 엘리후?"


당황한 표정이 스쳐지나갔으나 가볍게 무시하고 엘리후는 네일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부드럽게 입술로 쓸어내리다가, 약하게 깨무니 네일의 몸이 반사적으로 떨렸다. 놀라긴 했지만 거부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엘리후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이 몸도, 꽤나 많이 참지 않았을까. 이전에 얼마나 해댔는데. 꽤나 급한 손길로 단추를 풀어내리고 맨 허리를 쓸어내리니,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파르르 떨렸다.

달칵. 바지 버클이 풀리는 소리에 네일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엘리후의 손목을 꽉 잡았다.


"나,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처음도 아니잖아."

"처음이에요."

"아아, 그렇네."


건성으로 답하자 네일은 조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싫으면 안 할게. 그리 말하니, 또 그것에는 고개를 젓는다. 어쩌라는 것인지.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려갔다. 하라는 뜻이지?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엘리후는 푸스스 웃으며 원래 하려던 것을 했다. 약하게 바지 위로 쓸어내리니 반응이 꽤나 빠르다. 몸은 쌓인 게 맞다니까. 볼에 입을 맞추자 네일은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조금만 애태워볼까. 저도 사정이 급하긴 했으나 이런 즐거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대로 계속 바지는 벗기지 않은 채,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손을 더 안쪽으로.


"엘리……."


애타는 목소리. 목에 감겨오는 팔. 익숙하고도 익숙하며, 지독히도 그리웠던 것. 엘리후는 순간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네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다시 똑바로 했다.


"네일."

"…네?"

"언제까지 연기할 생각이야."


잠시간의 정적. 깬 것은 엘리후의 웃음이었다. 웃음을 터뜨린 엘리후를 네일은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저도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엘리후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줘, 더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어지는 입맞춤. 이번에는 분명하게 긴 것. 혀를 먼저 넣고 얽히게 한 쪽은 네일이었다. 익숙한 듯 서툰 것조차 그리도 그리워했던 것이라, 엘리후는 그냥 네일이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길게 이어진 키스가 끝나고 네일은 엘리후의 이마에 제 이마를 툭, 대었다.


"어떻게 알았어?"

"방금 그건 너무 티났거든. 아니었으면 속아넘어갈 뻔했어. 연기 잘하네."

"누구 애인인데."

"기억, 언제 돌아왔어? 분명히 처음에는 진짜였잖아."

"그래. 사실 돌아오자마자 울 뻔했어. 조금만 더 어렸으면 진짜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방금 전에. 사랑해요, 하니까 마법처럼 돌아오던데."


뭔가 저주라도 걸렸던 게 아닐까. 뚱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다, 네일은 한 쪽 팔을 거두어 엘리후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내 손을 움직여 손 끝으로 엘리후의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노골적인 자극이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급하지 않아?"

"분명히 귀여웠는데."


네일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이내 픽 웃었다. 그리고 입술을 혀로 한 번 슥 느릿하게 핥았다. 허어. 엘리후는 뜻 모를 소리를 내었다. 유혹하고 있네.


"나 많이 쌓였어, 엘리."


너도 그렇잖아. 귀신같이 속삭인다. 사람이 이리 바뀌어도 되는 것인지. 속으로 혀를 차며 엘리후는 한 번 더 진하게 입술을 겹쳐왔다. 이번엔 저가 리드해서. 네일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저도, 참 지독하리만치 그리워했던 것이었다. 키스하면서 능글맞게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어오는 손길 또한. 거두었던 한쪽 팔을 다시 엘리후의 목에 감으니,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가까이서 엘리후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가만 안 둬. 잠시 눈을 떴던 네일은 다시 눈을 감으며, 네 마음대로 해줘. 그리 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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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현렌드

여느때와 같은 오후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추웠고, 이렌드는 평소에 하고 다니던 것보다도 더 두꺼운 목도리를 하고 나왔다. 언제였던가, 동생들이 직접 떠서 주었던 것. 옷걸이에 걸어둔 그것에 시선을 잠깐 두다가, 금방 거두어냈다. 시선은 시계로 옮겨졌다. 퇴근 시간이 얼마 안남은 시점이었다. 이렌드는 당장 눈 앞에 놓여있는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꽤 많이 남았는데. 집에 가져가서 해야 하나. 제 양 미간 사이를 두어번 꾹꾹 누르다, 이렌드는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손이 차가웠다. 집중력이 흐려져서야 깨달은 것인데, 비서실에는 딱히 난방을 틀어놓지 않은 상태였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이렌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해주어야 할 서류가 몇 장인가 있었다. 그것을 챙기고, 시선은 이내 벽에 걸려있는 달력에 닿았다. 12월 24일. 두어번 눈을 깜빡이던 이렌드는 이내 달력에서도 시선을 떼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

.

.


"이거."


제 앞에 내밀어지는 서류 뭉치를 받으며 가현은 흘끔 이렌드를 쳐다보았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인데도 일인가. 하기사, 매번 이랬다. 관계가 변한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진 않았다. 참으로도 독한 워커홀릭이라 항상 생각하지 않았던가. 딱히, 그것에 불만은 없다. 그저 제 몸을 챙기지 않을까봐 그것만 걱정일 뿐. 내일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지 이렌드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받았으니 이제 가봐." 허나 그 말에 어째선지 이렌드는 요지부동이었다. 가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두어번 달싹이던 입술이 살짝 타이밍을 잃고 나서야 열렸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네가 모르는 내 일정도 있던가."

"내일은요."

"딱히."


그럼 됐어요. 그리 말을 끊어버리자, 가현은 책상에 턱을 괸 채로 빤히 이렌드를 쳐다보았다.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는 것은 여전하다. 검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니, 그 소리를 신경쓰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이내 이렌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였으면 그냥 그것으로 말을 하고 말았을텐데. 굳이 이리 뜸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끔 이렌드는 이리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그것이 충분히 그 다운 일이긴 했으나. 탁, 탁.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뜸해질 때 쯤 이렌드는 하지 못하고 있던 말을 뱉어냈다. 했다, 보다는 뱉어냈다에 가까웠다.


"오늘 퇴근 같이 할래요?"


나 조금 일찍 할건데. 가현은 제법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워커 홀릭이 어쩐 일인가, 싶었다. 일을 빨리 끝내기라도 했나? 그나저나 얼굴이 조금 창백한데. 아무래도 오늘도 일하느라 난방 트는 것을 까먹은 모양이었다. 저가 찾아가서 켜주기라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최근. 가현은 잠시 대답 없이 이렌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이렌드는 그제야 얼굴을 조금 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30분 정도면 충분하죠?"

"아마도."

"그럼, 주차장에서 기다릴게요."


.

.

.


그저, 어쩐 일인가 싶다. 딱히 특별한 날도 아니고. 속된 말로는 빨간날일 뿐인데다가, 저랑은 평소에도 맨날 보지 않는가. 그래서 이런 날에는 그리 아끼는 동생들과 보내라고 따로 약속을 잡지 않는 편이었다. 이렌드도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는 듯 토를 달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이렌드가 기념일에 먼저 약속을 잡아온 것은 처음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기념일은 챙기지 않는 편 아니었던가. 챙기더라도 약소한 선물 정도로 끝나곤 했고.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도통 알 수 없는 일이다.


"됐다."


한참을 제 집 TV 앞에서 꼼지락거리던 이렌드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가현이 앉아있는 소파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꺼져 있던 TV를 리모콘으로 키고, 버튼을 몇 번 꾹꾹 눌렀다.


"겨우 TV나 보자고 데려왔어?"

"…딱히 할 게 생각이 안 나서. 밖으로 나갈순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겨우 TV라니. 그냥 TV는 아니거든요."


그래봤자 영화 아닌지. TV 화면에 띄워지는 영화의 시작부분을 보며 가현은 조금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도 이정도가 어딘가.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라 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야 제 탓이니, 저가 무어라 할 처지는 안되었다. 이렌드가 그닥 불만을 가지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이렌드는 어쩐지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는 그대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영화 몇 편이 연속해서 나올 거라는 것이다. 그렇게 설정을 해두었으니까. 나름대로 영화 고르는데에 시간을 많이 썼는데.


─는, 사실 별 쓸모 없는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같이 저녁을 먹은 게 애초에 늦은 시간이었으니. 두편 째의 영화가 반 쯤 지날 때 즈음, 가현은 이미 반 쯤 잠에 취한 채였다. 그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기에 이렌드는 그냥 속으로 픽 웃을 뿐이었고. 참, 여러 의미로 칼같은 사람이다. 이럴 때에는 생체 시계가 조금 고장나도 좋을텐데.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가현의 어깨를 조금 끌어당겨 그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 이렌드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솔직히 이럴게 뻔하지. 그래서 세번째 정도 부터는 제 취향만 가득 묻혀서 영화를 정해놓았더랬다. 그 전에는, 그냥 루즈한 드라마 같은 것들. 그래서 더 졸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도 잠이 오는 기분인데. 이렌드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보니 이제 정말로 크리스마스인데. 이렌드는 잠들어있는 가현에게 툭 기대어, 작게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중얼거렸다. 닿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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