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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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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loss of eyesight

 주기적으로 눈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야 올해 들어 자주 있었던 일이었다. 아직 익숙해지지는 못했지만. 통증에서 끝난다면 별 문제 없이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네일은 못 견뎌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실명 상태는 제대로 된 원인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었고백색증의 뒤늦은 증상일 것이라는 진단은 받았으나짧으면 몇 분, 길면 하루 종일 이어지기도 하는 나름대로 큰 문제였다. 사실 당장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특별한 상황만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그럴 때면 만성적으로 부족한 잠을 보충하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이대로 영영 보이지 않게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잠을 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매번 실명 상태가 찾아오면 잠을 자야지, 하고 마음을 다졌으나 막상 보이지 않게 되어버리면 어찌 할 수 없는 공포감에 생각이 마비되곤 했다. 종종 연인이 없는, 저 혼자 있는 집 안에서 연인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를 정도로.

  ……너를 다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단지 그 뿐이었다.

  그렇다고 걱정 시키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네일은 철저하게 제 눈 상태에 대한 것을 숨겨버렸다. 평소에는 안경을 끼지 않아도 잘만 보였던 앞이 흐려지고, 안경 없이는 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어버린 단순한 시력 감퇴조차도 말 하지 않았다. 그러니 종종 찾아오곤 하는 실명 상태에 대해서 말을 할 리가. 어차피 안경은 잘 벗지 않으니 시력이 떨어진 걸 들킬 리는 없을 것이라며, 연인이 알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실명 상태만은 원인을 찾아내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날따라 이상하리만치 눈이 아팠다. 알고 있었는데. 왜 일찍 돌려보내지 않았을까. 갑자기 확 뻐근해져오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름과 동시에,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 하얗게 섬광 같은 것이 튀었다. 네일은 이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을 뜨는 게 무서웠다. 네가 보이지 않는 게 내게는 가장 두려운 일인데. 네일은 마른 침을 삼켰다.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사실상 필요 없는 것이었다. 네가 보이지 않으면 나는 무너져버리겠지. 어디까지 무너져 내릴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 네일은 도저히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치울 수가 없었다. 감고 있는 눈조차 뜰 수 없었다. 계속해서 눈을 비비기만 했다.

 

  “네일?”

 

  저를 불러오는 목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분명히 이상하게 보이겠지. 이대로 눈을 뜨더라도 별 문제 없이 보이기를 원했다. 보일거야.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스려봤지만, 손을 떼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드물게 실명 상태가 몇 초 정도로 짧게 지속되지 않는 이상은. ……보이지 않겠지. 아무것도. 순간적으로 숨이 확 막혔다. 걱정시키기 싫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널 볼 수 없게 되는 게 나는 너무,

  엘리후는 네일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내려버렸다. 얼마나 눈을 비벼댔는지 눈가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엘리후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눈가가 쓰라린 것은 네일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걱정 섞인 목소리에도 차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눈이 아파서, 하는 사소한 거짓말조차 나오질 않았다. 당장 눈앞에 네가 있는 건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눈을 뜨면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게 하염없이 무섭기만 해서. 제 눈가를 만져오는 손길을 가만히 느끼며 네일은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막연하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그냥 정말로 갑자기 눈이 아팠던 거로 끝날 수도 있잖아. 아니면 하얗게 튄 게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염없이 자기암시를 걸었다.

물론 그런 기적 따위 일어나지 않았고, 저가 착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엘리.”

 

  숨이 턱 막혔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숨이 막혔다. 네일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제 연인이 있을 만한 곳으로. 서툴게 잡은 곳은 다행히도 팔이었다.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붉은색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엘리, 엘리. 하염없이 이름을 부르며 팔을 잡은 손이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을 잡고 싶은데 보이지가 않으니 제대로 되질 않았다. 네일은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엘리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네일을 바라보았다. 겨우 손을 찾아내 꽉 잡고, 네일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손 좀 잡아줘.”

 

  제 손을 꽉 잡아오는 느낌에 네일은 그나마 마음을 겨우 다스릴 수 있었다. 그래도 자꾸만 숨이 턱턱 막혔다. 손은 잡고 있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을 감고 있는 양 까맣게 암전된 시야는 사실상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냥 다른 거 다 안 보여도 너만 보이면 되는데.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손 또한 떨리고 있었다. 그 손으로 네일은 잡고 있는 손을 힘없이 자꾸만 끌어당겼다. 저 쪽으로, 더 가까이. 보이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도록. 문득 들키게 되더라도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항상 앞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너무 무서웠는데. 이렇게 손이라도 잡을 수 있으니까. 애써 웃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착각이면 어쩌지? 그런 황망한 생각이 들었다. 보이질 않으니 확인할 방도가 없지 않나.

 

  “엘리, 엘리거기 있는 거 맞지?”

  “여기 있잖아. 무슨 일이야.”

  “, 나 좀…….”

 

  꽉 잡고 있는 손을 억지로 뿌리치고 네일은 다시금 그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대로 더 뻗어서, 아까 잡았던 팔을 아플 정도로 꽉 잡고 끌어당기다가 순간 작게 휘청거렸다. 좀 안아달라고, 그 말을 하려고 했다. 순간 말문이 턱 막히지만 않았어도. 어쩌지, 울음이 터질 것 같은데. 앞으로 무너져버렸으나 다행히 엘리후의 품 안이었다. 계속해서 떨리는 손으로 팔을, 손을, 그러다가 옷깃을 꽉 잡으며 네일은 그 품에 제 얼굴을 부볐다. 아까 눈을 비비려고 안경을 미리 벗어놓은 게 다행인 일이었다. 네일은 길게 심호흡했다. 앞에 있는 게 맞아. 엘리, 나 안아줘. 겨우 터져 나온 말과 함께 나온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네일은 저를 끌어안는 팔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정말 이대로 영영 보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언제나처럼 두려움이 온 감각을 지배해버렸다.

 

  “여기 봐, 네일.”

  “싫어…….”

  “고개 들어보라니까.”

 

  고개만 저으며 제 옷깃에 눈물을 닦는 네일을 물끄럼 보다가 엘리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드럽게 턱을 잡아 들어 올리려 해도, 아까 힘이 다 빠졌던 것이 돌아오기라도 했는지 요지부동이었다. 엘리후는 혀를 차며 억지를 부리고 있는 턱을 조금 거칠게 잡아 올렸다. 그리고 저와 시선을 맞추게 했다. 항상 안경 너머로, 종종 맨 눈으로 마주보곤 했던 붉은색 눈동자는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떨리고 있었다. 당장 저를 부르던 목소리와, 저를 잡으려던 손보다도 더 세차게. 그렇게 억지로 맞추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정확히는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엘리후는 발갛게 달아오른 네일의 눈가를 느릿하게 제 손가락으로 쓸어주었다.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는 눈물 또한 닦아주었다.

 

  “엘리, 거기 있는 거 맞지? 안 보여. 안 보인단 말이야…….”

  “여기에 있어. 네 옆에.”

  “가지 마. 옆에 있어줘. , 매번 안 보일 때마다 계속 네 이름을 불렀는데 네가 없어서

 

  두서없이 말을 토해내는 입을 제 입술로 막아버리고 엘리후는 가만가만 네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눈을 감는 법을 잊은 것도 아닐 텐데. 엘리후는 뜨여진 채인 네일의 눈을 조심스럽게 감겨주고, 저 또한 눈을 감아버렸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한 쪽 손은 꼭 잡아주고, 다른 쪽 손으로는 제 옷깃을 잡게 했다. 네일은 이렇게 키스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도무지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본인조차 뭐 때문에 우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눈을 너무 많이 비빈걸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일까. 혹은 네가 옆에 있다는 게 안심이 되어서? 네일은 결국 생각을 포기하고 제 연인에게 몸을 맡길 뿐이었다. 정말 이대로 영영 보이지 않게 되면 어쩌지……. 그 생각만은 차마 지워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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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에버릿 에디트 개인 로그

─ 마니또 로그



소년은 꽃을 좋아했다.

남 자 아이가 꽃을 좋아한다며, 종종 부모님이 핀잔을 주시곤 했으나 에버릿은 그것 만큼은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항상 착한 아들이었고―사실 그것은 착하다기 보다는 순종적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그럴싸했다.― 시키는 것에 군말 없이 따랐던 에버릿에게 있어서 그것은 조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꽃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에버릿은 이 세상 위에서 살아 숨쉬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심지어 저 자신에게도. 에버릿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로지 꽃을 피우기 전의 꽃봉오리와 그 이전의 새싹, 끝끝내 피우고 만 아름다운 꽃. 그런 것들 뿐이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혹은 막연하게 그저 아름다워서? 에버릿은 저에게 던져지는 물음에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했기에. 애초에 남에게 설명을 해 줄 생각도 없었다.

지 하, 슬리데린 기숙사.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그곳은 식물을 키우기에는 그야말로 최악의 장소였다. 그래서일까. 3년을 옆에 두고 잔 화분에서는 단 한 번도 꽃이 피어난 적이 없었다. 그저 자그마한 새싹만이 돋아나고, 한참이 지나면 그 새싹이 죽어버렸다가 다음 해에 똑같이 돋아나는 것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 생명력만은 끈질겨서 에버릿은 도무지 그 화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 화분에 들은 씨앗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기에,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기를 머금은 새싹을 손 끝으로 톡톡 건드리고는 에버릿은 그 화분 옆에 포푸리를 놓아두었다. 마니또가 처음으로 주고 간 선물이었다. 식물도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참 좋을텐데. 포푸리에서는 장미 향기가 났다. 그 향기를 맡고 새싹이 자라 장미를 틔워냈으면 했다. 제법 좋은 냄새가 방 안에 가득 퍼졌다.

에버릿 에디트에게 있어서 꽃은 특별한 존재다.

마 니또가 그것을 알고 첫번째 선물을 꽃이 든 포푸리로 준비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에버릿은 그 선물이면 충분했다. 다른 것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에버릿은 그날따라 노곤했던 몸을 침대에 뉘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로켓을 꺼내, 그것을 열어보았다.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흰색 머리칼을 가진 여성과 검은 머리의 어린 아이. 사진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에버릿은 로켓을 다시 닫았다. Seri & Ever. 로켓의 겉면, 날카롭게 파인 홈은 그런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에버릿은 다시금 로켓을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다. 손을 움직여 베개 맡으로 뻗었으나, 귀마개를 잡았다가 놓아버리곤 이내 손은 가지런히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가 만히 있으면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평소엔 이리 예민한 귀가 아닌데, 꼭 자러 들어오면 이랬다. 마치 잠을 방해하기 위해 무언가의 저주라도 걸린 듯이. 하지만 그런 것을 걸 사람이 에버릿의 주변에 있을 리는 없었기에 그저 체질이 그런 것이겠지, 하며 에버릿은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아무튼.

장미 향기가 마음 속을 가득 채웠다. 어쩐지 오늘은 굳이 귀마개를 하지 않아도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3학년 방학, False Hope



저 녁 식사 시간의 분위기는 가라앉아있었다. 항상 이랬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그나마 나았지만, 아버지가 계시면 에버릿은 도저히 마음 편하게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와 단 둘이 하는 식사라니. 에버릿에게 있어서는 솔직히 최악의 자리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에버릿은 시선을 내리 깐 채로 연신 음식을 입에 집어넣기만 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너무 빨리 먹으면 뭘 그리 급하게 먹느냐 하실 것이고, 느리게 먹으면 너무 느리지 않냐고 핀잔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에버릿은 항상 적당한 것을 찾고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라도 자리에 계셨다면……. 아니. 에버릿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봤자 별반 다를 건 없었을 것이다. 역시 혼자가 제일 편하다.

“휴식이 길었더구나.”

갑 자기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에버릿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조금 뒤늦게 “……예.” 하고 작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말하는 휴식이란,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리건과의 식사. 티모시와의 하루. 본래의 에버릿이었다면 절대 가지지 못했을 시간들이다. 평소였으면 방에 틀어박혀선 당장은 필요하지도 않을 공부를 하고 있었겠지. 에버릿은 괜히 수저를 깔짝거리다가, 이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 버지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에버릿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휴식이 길었다면 그만큼 해야 할 일의 시간을 빼앗겼다는 뜻이다. 이번 방학에 또 꽃밭에 가는 건 무리일 듯싶다. 아쉬운 일이었으나, 충분히 예상했기에 아무렇지도 않다. 정확히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랬다. 에버릿에게 아버지는 이런 존재였다. 불편하지만 거스를 수는 없는 존재. 가족 보다는 엄한 선생님에 가까웠다. 아버지가 저를 대하는 태도 또한 그러했고. 하지만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없는 평범한 가족이었다. 분위기가 조금 차가울 뿐이지. 식사를 마친 에버릿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에버릿을 에버릿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에디트로만 대했다.

“잠시 얘기 좀 할까.”
“…저, 공부가 밀렸으니까. 빨리 끝내주세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건 참 장하구나.”

에 버릿은 흐리게 웃었다. 칭찬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빨리 끝내달라는 뜻이었지. 내리고 있던 시선을 겨우 올려 에버릿은 아버지를 마주했다. 곧 호그와트 4학년이 되는 나이의 아들을 가진 아버지라기엔 심각할 정도로 젊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에버릿은 늦게 태어난 아이였다. 아버지와 에버릿의 나이 차이는 평균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 차이에, 그 반절을 더한 것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젊다. 30대로 보이는 정도의 외관. 에버릿은 전혀 늙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종종 어색해하곤 했다. 아버지와의 첫 기억과 비교해서, 단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마법사들 중에선 종종 이렇게 노화가 진행되지 않거나, 느리게 진행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에버릿의 아버지가 바로 그 케이스였다.

“공부는 잘 되어가고 있니? 어려운 건 없고?”
“네. 그럭저럭 할 만은 해요.”
“친구들이 많이 생긴 것 같던데.”
“…그리 많진 않아요.”

하 지만 네가 자발적으로 누구 집에 가는 것도, 누군가를 초대한 것도 처음이잖니. 아버지가 웃자 에버릿 또한 어색하게나마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에버릿에게 친구의 조건이란 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혹은 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사람. 또는… 굳이 그런 조건이 없더라도 가문끼리 연결지어서 좋은 관계를 맺어놔야 하는 사람. 그 정도에 그쳤으니까. 최근 들어 상당히 물렁해진 기준이었지만. 설마 친구를 만드는 것에도 참견을 하실까, 싶었는데.

“그래. 네게 필요한 친구라면 만들어둬도 괜찮겠지.”

커 다란 손이 저에게 다가오자 에버릿은 이번에는 눈에 띌 정도로 몸을 떨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별로 기분이 좋을 만한 행동이었기에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 이상의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가볍게 에버릿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손을 거두었을 뿐.

“오른손 말이다.”
“……네.”
“제대로 쓰는 연습을 해두는 게 좋을 거다.”

에 버릿은 시선을 떨궈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연습은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 차였다.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을 뿐. 더, 열심히 해야겠네.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는 연습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버릿은 계속 아버지의 눈치만 봤다. 언제쯤 방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걸까.
그 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에버릿이 입을 열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먼저 말을 붙이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에버릿은 항상 제 방에만 있고, 아버지도 보통은 방에 딸린 서재에 계시거나 다른 집안과의 교류를 위해 밖에 계실 때가 많았으니 만날 일이 적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으나. 일방적으로 에버릿이 아버지를 어려워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애완동물… 말인데요. 키워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순간적인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맴돌았다. 에버릿은 약하게 혀를 깨물었다. 말을 잘못 꺼냈다. 역시 말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한참 동안 제 아들을 바라보던 에버릿의 아버지는 느긋하게 미소를 띄웠다.

“당장 꽃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있지 않니?”

순간 에버릿은 숲에 있는 공터의 꽃밭을 들킨 건 아닐까, 하고 겁에 질리고 말았다.

“화분이 두 개로 늘었던데 말이다.”

하 지만 이어진 말에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것을 말씀하시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곳이 들켜버린다면, 분명……. 에버릿은 그곳만은 잃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가꾸고, 자신이 도와서 피워낸 꽃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불태워지거나 훼손되는 건, 바라지 않는다. 저를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말이다. 에버릿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완동물 건은, 역시 안 될 줄 알았다.

“…네. 그렇죠. 더 이상 시간을 빼앗기면 안 되니까. 죄송합니다. 이만 들어가 볼게요.”

애완동물을 만들어오면, 친구들의 애완동물과 친구를 시켜주기로 했는데……. 어쩐지 먹먹해지는 기분이라, 에버릿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 4학년 방학, Alone



감 각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더 큰 자극을 주면 된다. 물론 딱히 본인이 바란 자극은 아니었으나. 참으로 오랜만에 가해진 폭력이었다. 에버릿은 제 오른팔을 꽉 쥐었다. 나름대로 노력은 했는데 말이지. 저를 돕기 위한 폭력인지, 아니면 그저 화가 났기 때문에 쓰는 폭력인지. 이 경우에 있어서 에버릿은 도무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두 개 다이던지. 사람의 적응력이란 굉장해서, 아무리 오랜만이라고 하더라도 통증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고통에 찬 신음 소리 정도는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꾹 참으며 느릿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를 향해있는 무감각한 시선은 애써 무시했다.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어쩐지 착잡해지고 만다.
일 종의 벌이었다.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있게 연습해두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1년 전 방학 때의 일. 하지만 가벼운 물건을 드는 정도에서 그쳤을 뿐, 그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폭력이 들이닥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도 이렇게 되어버렸다. 노력이 부족했구나, 하고……. 본래 여러 친척들이 모여 살았던 저택이 텅 비게 된 이유에는 외동아들의 보호라는 그럴싸한 명목이 있었으나, 사실은 이 폭력 때문이었다. 언제든지 성에 차지 않는다면 훈육을 하기 위해서. 확실히 보는 눈이 많으면 할 수 없을 테니까. 당장 어머니가 계실 때만 해도 그랬다. 몇 살 때부터 이 폭력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오래된 것. 재능의 부족이 이유든, 노력의 부족이 이유든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항상 폭력이 가해졌다. 너무 당연한 일이었기에 반발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폭력을 받아내고 나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곤 했기에. 그러니 이번의 폭력으로 오른팔에 돌아온 감각은 금방 오른팔을 원래처럼 쓸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비록 그 오른팔의 장애 또한 폭력으로 생긴 것이긴 했으나.

“집을 꽤 오래 비우게 될거다.”
“……예.”
“어차피 평소에는 학교에 있으니 별로 상관없겠지만. 최소 다음 방학 때까지도 혼자 있게 될테니, 자기 관리를 더 철저히 하거라.”

아 버지의 부재는 항상 집안일 때문이었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저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까지는.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가 하는 일을 저가 하게 될 것이고, 그때 즈음이면 다 알게 되겠지. 지금의 저는 자세한 집안의 일까지 받아들이기엔 부족했다. 고학년이 되면 조금 더 깊은 일들에 대해 배우겠지. 에버릿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집.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에 그나마의 위안을 받았다. 아버지가 주고 가실 과제는 평소보다 더 많겠지만, 그래도. 시선을 떨구었다. 최소 다음 방학까지. 느릿하게 속으로 두어번 곱씹었다. 불완전한 자유였다.

“돌아왔을 때는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상태였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만들게요.”

대 답을 들은 직후 아버지는 곧장 방에서 나가버렸고, 에버릿은 텅 빈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내 소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만 쉬었다가, 나가서, 밀린 공부를 하고. 이번 방학 때는 개인적인 연락을 열어두어야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아버지에게 설명 드려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자리를 비우신다면 그냥 제멋대로 열어두면 되는 일이다. 해야 할 일이 많겠구나. 몰려오는 잠을 겨우 쫓아내며 에버릿은 오른팔을 더 꽉 잡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통증은 더 심해졌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편이 더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당 장 그날 밤, 아버지는 저택을 떠났다. 방학이 시작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어머니─ 정확히는 양어머니 또한 그런 아버지를 따라 가신 듯했다. 그렇게 에버릿은 저택에 홀로 남았다. 집요정 또한 최소한의 집안일을 할 정도로만 남겨졌다. 아무리 기간이 한정되어있는 불완전한 자유라도 이렇게나마 얻어 본 게 처음이라,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에버릿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개인적으로 사용할 연락을 열어두고, 그 다음에는…….
명 백히 혼자라는 것은 자유를 뜻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길을 잃은 것을 뜻하기도 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그런 말을 들었는데. 에버릿은 도무지 저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숲 안에 숨겨진 정원을 관리하는 것?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일이 필요할텐데.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고 에버릿은 손을 뻗어 검은색 화분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이 아이를 꽃피우는 건 꽤 오래된 목표였다.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또 그 겨울이 지나 여름이 오는 걸 반복한 게 4번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꽃을 본 적이 없는 화분이었다. 씨앗이 죽어버린 것만 아니라면 다행일텐데. 에버릿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그 화분을 창가 쪽으로 더 가깝게 옮겨주었다.

그 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주어진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며 보내는 나날만이 흘러갔다. 로타에게 방문하기로 한 것은 그녀의 사정상 취소되었고, 하워드에게는 집의 위치를 담은 편지를 보내두었다. 루이지나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기도 했고. 해야 할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쳐보니 무언가 허전하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을 더 만들어둘 걸 그랬나. 다음 방학에는 약속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아스트리에게 했던 말―다음 방학 때에는 네가 우리 집에 올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는 것―은 지킬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또 누구를. 깃펜을 잡은 손으로 턱을 괴며 에버릿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게 내가 원하는 걸까. 이게 재밌는 거고, 즐거운 걸까.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런 느긋하고 나른한 시간이 또 며칠 흘러가고, 에버릿은 문득 저택의 지하를 떠올려냈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계단의 끝에는 문이 하나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기억을 되짚으며 에버릿은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기억 그대로의 문을 밀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안은 더더욱 어두웠다. 어차피 저택 안이니 마법을 써도 괜찮겠지. 에버릿은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기본적으로 미성년자가 학교 밖에서 마법을 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규칙임을 에버릿은 알고 있었다. 마법사의 집에서는 어느정도 허용된다는 사실을. 루모스, 하고 작게 중얼거리자 지팡이 끝에 적당하 불빛이 맺혔다. 에버릿은 다시금 나아가기 시작했다.

“흠?”

그 리고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마는 것이다. 에버릿은 지팡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초상화가 여러개.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호기심으로 들어왔던 지하. 문의 안. 말하는 초상화들. 그것들 중 하나가 저에게 말을 붙이려고 할 때, 아버지가 저를 찾아내 끌고 나갔었지. 그때가 폭력의 시작이었음을 기억해냈다. 에버릿은 지팡이를 초상화 쪽으로 갖다 대 그쪽을 비추었다. 그때 눈이 가려졌었기에 초상화 안 사람의 모습은 기억에 없었으나, 어쩐지 그때의 그 초상화가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빛을 비춘 초상화 속의 남자는 느긋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에버릿을 관찰하고 있기도 했다.

“네가 에버릿 알트 에디트. 맞지?”
“…네, 맞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 난 널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그 말에 에버릿은 고개를 갸웃하며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집중되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다른 초상화들도 저를 관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소름 돋는 기분. 그래도 당장 눈 앞,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초상화는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어딘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직 우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구나. 어리니까.”
“……어리진 않아요. 곧 5학년인 걸요.”

초 상화 속 남자는 웃으며 그래, 그래. 하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에버릿은 그것에 기분이 팍 상해서는 미간을 확 찌푸려버렸다. 그런 소년을 관찰하던 초상화의 청년은 이윽고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에버릿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초상화에서 손이라도 나올 수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저를 쓰다듬었을 기세다. 편안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런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지, 그래. 그래서 왔구나? 몇 년 전에는 잔뜩 혼났을테고.”
“정말로 잘 알고 계시네요.”
“너를 지켜보고 너에 대해서 듣는 게 우리의 일이니.”

우리. 그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에버릿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제야 조금씩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초상화가 한 두 개가 아니다. 여러 개. 초상화의 청년이 우리라고 칭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 팡이를 움직여 다른 초상화들도 둘러보았다. 대부분 노인, 혹은 중년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눈앞의 초상화만 아주 젊었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무언가 이유라도 있는 걸까. 어차피 지금의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째서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건지, 자신을 지켜보고 자신에 대해서 듣는 게 그들의 일이라는 건지. 물론 차차 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없는 저택, 딱히 할 것도 없고. 말상대가 있다면야 저야 좋았다.

“자주 오도록 해. 그게 네게도 좋을 거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인데…….”

제 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에버릿은 입으로 그리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눈빛으로 초상화를 쳐다보았다. 이정도만 해도 알아들어줄 것 같아서. 초상화는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던 표정을 지워내고, 다시 처음의 느긋한 미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초상화 속 청년의 입모양과 목소리는 이내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이름, 두 글자를 담아냈다.




─ 5학년 방학, 그 날은 비가 내렸고



“예전엔 정말 그랬단 말이죠.”
“그래. 뭐,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이런 걸 궁금해 하는 건 네가 처음이네.”
“걸쳐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초 상화 속의 청년은 에버릿의 그 말에 고개를 갸웃, 해보였다. 허나 오래 지나지 않아 이해했다는 듯 끄덕인다. 사회적 추세에 있어서 마법 세계의 에디트는 여타 순혈 가문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긴 했으나, 아직 그 구성원들 중에는 혼혈이 분명히 존재했다. 에버릿의 아버지가 그렇듯이. 그렇다면 에버릿 알트 에디트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딱 그의 대에 와서 순수 혈통이 되는 다소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 어릴 적, 혈통에 대한 교육을 받을 때에는 저가 순혈인지 혼혈인지 혼란스러워 했더랬다. 물론 이제 와서는 어떻든 별로 상관없어진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기준상 에버릿은 혼혈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순혈이 맞았고, 앞으로 에디트는 엄연한 순혈 가문으로 입지를 굳혀갈 것이니. 아직도 종종 저를 순혈이라 소개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서 고민에 빠지곤 했으나. 에버릿은 문득 한숨을 푹 내쉬고 덮어놓았던 책을 펼쳤다.
부 모님이 자리를 비운 저택에서의 방학은 사실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저택 안에서 아버지를 마주칠 일은 아주 적었고, 저가 실수를 한다거나 특별히 서로에게 전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은 부르지도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고 하기엔 아주 삭막했으며, 그렇다고 어머니─엄연히 말하자면 양어머니─와 교류가 잦았던 것도 아니었다. 딱 필요한 것만을 주고받는 관계. 그 속에서 에버릿은 자라왔고, 그러니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저 숨통이 트이고, 편해졌다는 정도 뿐. 하나를 더하자면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갈 수 없었던 지하에 내려가, 지금처럼 초상화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는 것. 사실은 그것이 가장 큰 달라진 점이었다. 5학년의 방학에 이른 에버릿은 사실상 방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이렇게 지하에 내려와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꽉 막히지 않은 말상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기에. 물론 저를 시안, 이라고 소개한 청년의 초상화만이 그랬지 다른 초상화들은 얘기하다보면 꽉 막히다 못해 답답할 정도였다. 그래서 에버릿은 항상 시안에게만 말을 걸었다.
방 금 전까지 이어졌던 대화의 주제는 과거의 에디트에 대해서였다. 물론 대화라고 하기에는 에버릿이 묻고, 시안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해준 것에 불과했으나. 꽤나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에버릿에게 해 준 과거의 이야기는 그저 예전에는 머글혼혈 가문이었다, 정도에 불과했는데. 지금에 이르기 위해 에디트의 사람들이 해 온 노력, 받아왔던 차별과 핍박……. 그의 말대로 딱히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초상화 속 시안은 저가 붙어있는 벽에 기댄 채로 책을 읽기 시작한 에버릿을 물끄럼 쳐다보았다.

“참 이상하지? 정말로 피가 순수해지는 것도 아닌데, 몇 대 마법사로만 피가 이어진다고 순수 혈통으로 불린다니. 어찌되었든 계속 위로 가다보면 마법사가 아닌 사람도 존재할거거든.”
“그래도 일종의 기준이니까요.”
“…뭐, 네가 듣기엔 구시대적인 사고일지도 모르겠네. 이제와선 혈통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잖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죠. 아직도 물 밑에서 차별은 존재하니까.”

그 말에 시안은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에버릿은 책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그런 시안을 흘끔 보았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수동적으로 살아온 에버릿을 위한 인생 상담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에는 에버릿이 물어서 해주는 에디트에 대한 이야기가 다였다. 그에 대한 쪽으로 대화가 쏠리려고 하면 항상 말을 피했으며, 그것을 인지한 뒤로는 에버릿도 딱히 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말을 돌리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냥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으니. 그래도 마지막 호기심으로 가계도에서 시안 에디트, 라는 이름을 찾아봤는데 그런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8 월 말, 개학을 이틀 정도 앞둔 무렵. 에디트 저택이 숨겨져 있는 영국 버밍엄에는 비가 내렸다. 에버릿은 비가 내리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비가 오면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꽃밭에 물을 주러 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니까. 물론 그걸 떠나서 빗소리를 좋아하기도 했다. 독서든, 공부든 집중하기에 좋은 소리였다. 초상화들이 있는 지하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하지만 그런 에버릿과 달리 시안은 어쩐지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내려와서는 말도 시키지 않고 가만히 공부만 하고 있던 에버릿이 갑작스레 물었다.

“비가 와서 그래. 초상화 안이 습기 때문에 찝찝해지거든.”
“그런 것도 느껴져요?”
“아아.”

시 안은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엣취, 하고 재채기를 했다. 신기할 노릇이다. 마치 정말로… 초상화 안에서 살아가는 것 같지 않은가. 호그와트에서도 수많은 초상화를 보고 지내지만 언제 봐도 막연히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 느낌을 하나도 감추지 않은 채, 묘하게 눈을 빛내며 저를 쳐다보는 에버릿에 시안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직은 어린 소년. 태어남 자체부터 아버지에게 압박을 받으며 살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밝은 아이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시안은 종종 하곤 했다.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저가 손을 써 소년이 자신의 삶을 살게 하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미 에버릿은 눈도 귀도, 그리고 마음까지 닫아버린 상태였고 아마도 평생 에디트로서. 아버지가 원했던 대로 살게 되겠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그래도 에버릿으로서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 자신에 대해 깨우치게 하는 것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고마워요. 덕분에 변신술 시험 잘 봤어요.”
“다행이네. 너무 오랜만에 남 가르쳐준 거라 잘못 가르쳐줬으면 어쩌지 했거든.”
“실기는 망쳤지만.”

에 버릿은 방학 중에 받은 O.W.L. 성적표를 떠올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약초학 낙제는 하지 않았으니. 솔직히 어느 정도 걱정은 하고 있었던 터라. 지금 실기는 망쳤다고 말하고 있는 변신술도 E였고, 그럭저럭 아버지나 집안에서 만족할 만한 성적을 보이긴 했다. 그러니 적어도 혼나진 않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에디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고득점일 뿐이었다. 실기는 가르쳐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닌걸, 하고 삐죽거리는 시안을 보며 에버릿은 고개만 저었다. 시험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노트에 필기해둔 것을 기계적으로 읽어내려가며 에버릿은 다른 대화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납치 사건 일어나는 거 알아요?”
“난 집안 얘기밖에 몰라.”
“아, 그렇겠네요. 미안해요. 당연한 건데.”

─ 별로 미안하다는 투가 아닌데. 무미건조하게 답하는 에버릿을 보며 시안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에버릿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가 모르는 이야기라면 할 필요도 없다. 흥미를 느낀다면 모를까, 관심 있어 하는 눈치도 아니었고. 물론 이렇게 같이 있다고 해서 항상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었고, 정적만이 유지되는 날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오늘도 그렇게 되겠구나, 싶었다. 별로 어떻든 상관은 없다.
납 치 사건……. 에버릿은 문득 노트의 맨 뒷장으로 넘어가 깃펜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 사건이었다. 저만 아니면 된다며, 그런 생각을 해왔기에. 그런데 어쩐지 당장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얼굴을 보고 있었던 아이들이 납치를 당하는 일이 생기니, 갑자기 확 현실로 와닿아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에버릿은 느릿하게 정리를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이나, 추측들에 대해서. 이런다고 사건이 해결되진 않겠지만. 일종의 자기만족용이었다. 너희 학교 교수님을 믿고 있니? 했던 바토리 초상화의 말을 적어놓고 에버릿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누구를 믿으라는 말인지. 모든 교수님들을 의심하라는 말인지, 아니면……. 일라이저 교수님을 닮았다는 그 사람도 거슬리고, 폴리주스 마법약 얘기도 거슬리고. 생각이 빙빙 돌기만 했다. 역시 당장은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다. 에버릿은 탁, 소리 나게 노트를 덮었다.

뒤 늦게 고개를 들어 본 시안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버릿은 가만히 그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굳게 닫혀 있는 문. 다시금 눈동자를 굴려 시안을 본다. 평소의 미소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그렇게 서로의 시선이 엇갈린지 얼마나 지났을까. 먼저 정적을 깨고 입을 연 쪽은 초상화 속의 시안이었다. “에버릿.”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버릿은 고개를 갸웃한다.

“손님이 온 것 같네. 이만 가봐.”

그 런 것도 알 수 있냐며, 물으려고 했는데. 가보라는 말에 에버릿은 끄덕이기만 했다. 주섬주섬 노트와 깃펜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까지 가서는 작게 꾸벅, 하고 인사한 후에야 에버릿은 지하의 방에서 나갔다. 어차피 내일도 볼텐데 인사가 꼭 필요한가 싶었지만. 아니면 손님맞이가 끝나고 다시 올 수도 있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에버릿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제 마음에 달린 일이었다. 오는 것도, 오지 않는 것도. 그래서 인사를 하건 안 하건 시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옆의 초상화들이 참견을 하긴 했지만. 두 번의 방학 동안 지하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그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시안도 매번 그냥 웃어넘기곤 했다.
그 나저나 올 만한 손님이 있던가. 다른 집안의 사람들이야 당연히 연락을 하고 올 것이고─애초에 아이 한 명만 남은 저택에 뭐하러 오겠냐만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기엔 제 집의 위치를 가르쳐 준 이가 별로 없었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지도 못 할 텐데. 부모님이 일찍 돌아오신 거라면 시안이 손님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터고. 의문만이 증폭되는 가운데, 에버릿은 계단을 모두 올라왔다. 어두운 듯 어둡지 않은 저택의 안. 빗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들려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 에버릿은 저택 문에 살짝 기대어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뒤이은 목소리는 아는 목소리였다. “삼촌이란다, 에버릿.” 마지막으로 들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삼촌의 목소리. 에버릿은 문을 당겨 열었다.

“어서오세요, 삼촌. 오랜만이네요.”
“…에버릿.”

소년은 빤히 제 삼촌을 쳐다보기만 한다. 표정이 별로 좋지는 못했는데, 비가 오기 때문일까. 무슨 볼일이시냐고 물으려 했으나 에버릿이 입을 열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놀라지 말고 들어라.”

─네 아버지가…….

에 버릿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귀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멍했다. 그리고 무언가 다른 소리가 났다. 소년의 근간을 뒤흔드는 소리. 오롯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가 원한 대로. 그의 욕심만을 위해 에디트의 사람으로 자라온 에버릿으로서는 단시간 안에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의 삼촌은 그런 에버릿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한참 동안 침묵했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비냄새가 섞인 공기 그 자체가 숨통을 조여 오는 느낌이라 하면 비슷할까. 에버릿은 숨을 토해냈다.

에 버릿 알트 에디트 16세, 소년은 그렇게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지를 끝낸 순간 숨통이 확 트이며 어쩐지 편안한 느낌을 받아버렸다는 것이다. 부모의 죽음에 그런 것을 느껴버렸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