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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인연의 증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한낮의 따스한 햇볕을 느껴본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네일은 정자세로 누운 채 한참이나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곗바늘이 째깍, 하고 3 쪽으로 약간 움직였다. 새벽에 비교적 일찍 잠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의 하루의 반을 잠으로 보냈다고 할 만 했다. 한 번도 깨어나지 않고. 네일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오래 누워만 있었기 때문일까, 영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편하게 자본 것도, 그 와중에 한 번도 깨지 않은 것도 드문 일이었더랬다. 이내 네일은 픽 웃고는 짧게 마른세수를 했다.


  많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지금 나. 문득 깨닫게 됐다.


  네일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올려둔 안경을 손에 쥐고, 캘린더 또한 집어 들었다. 안경은 쓰고 캘린더는 무릎 위에 올려둬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손을 뻗어 캘린더의 제일 앞으로 넘기자 2015년의 9월이 나왔다. 2015년은 참 이상한 해였다. 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살기로 마음먹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도 생겼다. …정말로, 정말로 이상하고 또 이상한 일인데. 그마저도 기쁘고 행복해서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낯설지만 좋은 느낌. 캘린더 한 장을 넘기니 10월이 나왔다. 네일은 제 심장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심장이 뛰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한참을 더 넘겨서 다시금 2016년의 7월.

  며칠 전은 제 생일이었다. 졸업 직후 따로 집을 구해 나와 살게 됐다는 걸 전하면서, 갑작스레 생긴 정적을 틈 타 넌지시 7월 6일. 이라고 말했던 것은 일종의 변덕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고, “내 생일.” 하고 덧붙여 말하자 웃음을 터뜨렸었다. 그 웃음의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떠들썩한 생일은 아니었으나 인생 최고의 생일을 보냈다고 말 할 수 있었다.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나도 행복했으므로.

  그렇게 생일을 지나 18살이 되었다. 18살은 네일에게 있어서 조금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나이였다. 딱 이 나이 때에 형이 자신을 감싸다가 어머니와 함께 죽었다.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형이 살아야했을 인생을 대신 살 것이라 마음먹고, 오로지 형만을 좇아 살았었다. 중간에 기분 나쁜 열등감으로 변질되었을 정도로 집착했다. 18살……. 그래서 이 나이를 넘어 살지는 못 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아니, 생각해왔었다. 과거형을 쓰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앞으로는 온전히 저만의 삶을 살아갈 터다. 어떤 형태로든 연인의 곁에서. 스무 살이 넘어도, 한창 아름답고 꽃다울 나이를 넘어도, 수명이 다해 죽을 그 때까지도.


  네일은 침대에서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켰다. 갑자기 하고 싶은 게 생겼다. 혼자 외출하는 건 산책을 빼면 오랜만이 될 듯싶다. 마법 세계는 별로고, 아마도 머글 세계 쪽으로 가야겠지. 무작정 필요한 곳을 찾아갈 생각이라, 시간은 최대한 많이 필요했다. 네일은 욕실로 쏙 들어갔다. 닫힌 문 틈 사이로 작게 물줄기 소리가 새어나갔다.


* * *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고,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네일이 찾아낸 곳은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방이었다. 다이애건 앨리나 호그스미드 쪽으로 갔으면 시계방쯤이야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았겠으나, 마법사가 운영하는 시계방은 곤란했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모르는 영국 한복판의 시내 여기저기를 헤짚고 다녔던 것이다. 네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계방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 하고 울리며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안으로 들어오자 약간 진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닥 좋아하는 류의 냄새는 아니었다.


  “어서오세요.”


  맞이해준 건 인상이 좋은 여인이었다. 네일은 작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고, 가까이 가 유리장 안에 있는 시계들을 물끄럼 쳐다보았다. 향수 냄새가 조금 더 진하게 났다. 아무래도 이 여인이 사용하는 향수의 냄새인 모양이었다. 한참 시계들을 둘러보던 네일은 저가 잘못 찾아온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내부의 모습, 그리고 진열되어있는 시계들에 네일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을 무슨 의미로 읽었는지 여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세요?”

  “……회중시계 제작을 맡기려고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과학이 아닌 마법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야 아날로그식의 시계를 사용하지, 머글 세계에서는 전자식 시계를 사용할 것 아닌가. 머글 세계에서 시계 제작을 맡길 거라면 마법 세계의 상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시계방이 아닌, 전문적인 시계 공방을 찾았어야 했다. 흘끔 보니 그녀 또한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로 유리장 위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뻘쭘한 상황에 마른세수라도 하고 싶어졌다.

  네일이 다른 곳을 알아보겠다며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즈음, 문득 그녀는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작을 할 만한 공방으로는 안 보이는 데도요?”

  “안쪽에 작긴 해도 공방이 있긴 있답니다. 수리용으로 쓰는 공간이긴 한데, 제가 제작은 할 줄 모르거든요. 대신 부탁드릴 만 한 분이 계셔요.”


  대신 가격이 조금 많이 나올 거예요. 엷게 웃으며 그녀는 저가 서 있던 유리장의 건너편, 더 안쪽으로 네일을 안내했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확실히 공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공간이 나왔다. “아무래도 회중시계 같은 걸 찾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보니 제작은 배워놓지 않았거든요. 원래 여기,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그 때는 주문 제작 의뢰도 받으셨던 거로 기억한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양해를 구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참 밝은 여자다, 싶다. 처음 보는 손님에게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다 늘어놓고.

  네일은 눈을 돌려 작은 공방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낡은 쇠 냄새는 적어도 그녀에게서 나는 진한 향수 냄새보다는 나았다.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시계 부품들과 도구들을 둘러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네일에게 말을 붙여왔다. 아무래도 좋은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지금 바로 갈 테니 손님 잘 붙잡아두라고 하시네요.”


  그녀가 빙긋 웃자 네일도 어색하게나마 따라서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작은 의자 두 개를 더 가져와, 세 개가 된 의자들 중 하나에 앉았다. “생각해놓은 디자인은 있으세요?” 네일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의자 두 개 중 하나에 따라 앉았다.


  그리하여 그 여름, 네일은 약 이주일 동안 내내 먼 듯 멀지 않은 머글 세계의 시계방으로 매일 같이 찾아갔다. 디자인 협의나 주문은 첫날 방문 때 다 끝내놓았으나, 세부적인 디자인에 있어서 주문자에게 직접 보여주며 조정하는 편이 완성도에 있어서 더 좋다는 말 때문이었다. 물론 제작 과정부터 완성까지 제 눈에 다 담아두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고. 시계 안쪽에 새겨질 이름을 직접 쓰기 위해서, 이따금 은판에 글씨를 새기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는 사람이라 뺀질나게 들르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진한 향수 냄새를 두르고 다니는 그 여인과 종종 사담을 나누기도 했다. 제작을 맡아준 그녀의 어머니 또한 종종 그 대화에 낄 때가 있었으나, 제작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이야기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지 말이 없었기에 보통은 둘만의 대화였다. 물론 사적인 이야기까지는 네일이 딱 잘라서 끌고 가지 않았고, 보통은 제작하는 시계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하나는 누구 주려는 거예요? 역시 애인?”


  이런 이야기들 말이다. 네일은 그 물음에 드물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방을 찾은 네일은 억지로 웃거나 애써 웃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부드럽게 웃는 건 처음 보는 일이라 그녀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여보였더랬다.


* * *


  얼마만에 보는 거더라. 엘리후는 네일의 팔을 끌어당겨 그를 제 품에 안았다. 네일은 딱히 바르작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연인에게 제 몸을 맡겼다. 이렇게 저를 뒤에서 끌어안을 때면 귓가에서 미약하게 들리는 숨소리가 있어서, 묘할 정도로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으나 그래서 좋았다. 엘리후는 허리를 숙여 네일의 뒷목에 가만히 코를 묻었다. 아주 옅게, 눈치 채지도 못 할 정도의 낯선 향기가 났다. 네일에게선 찾아 볼 수 없었던, 동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향기가. 향수 냄새였다.


  “네일.”

  “응?”

  “요새 누구 만나고 다녀?”


  그 말을 듣는 순간 네일은 심장이 덜컹 할 뻔 했다. 아니, 확실하게 덜컹 했다. 엄연히 따지자면 만나고 다닌다기 보다는 시계 제작을 위해 만나는 것뿐이었으나, 어쨌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어?” 하며 얼빠진 소리만 낼 뿐 딱히 답을 내놓지 않고 있는 네일의 뒤통수만 물끄럼 바라보며 엘리후는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바로 닿는 네일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두어번 부비자 어쩐지 낯선 향기가 더 진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주아주 미약하고 딱히 유쾌하지는 않은, 그런 감각. 네일에게는 정말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류의 향기였기에 그가 쓰는 향수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던 네일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할까. 선물은 조금 서프라이즈로 주고 싶은데. 그럼 어쩌지. 엘리후에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할 자신은 전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후는 손을 뻗어 네일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입술을 깨무는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야속해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내가 괜히 이상한 생각 하게 될 것 같은데. 여자 향수 냄새가 나. 너한테서.”

  “그런 거 아냐.”


  그런 말을 들어버리니 저마저 괜히 불안해지지 않나. 저가 갖고 싶어져서 제작을 의뢰한 거기도 했지만 동시에 선물해주고 싶어서─동시에 회중시계 정도는 커플로 맞춰서 갖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나, 아니. 정확히는 맞춰서 가지고 있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연인을 위해서도 있는데, 괜한 오해가 생기는 건 싫었다. 네일이 시선을 저 쪽으로 돌리며 단호하게 말하자 엘리후는 푸스스 웃었다.


  “알아.”


  그 대답까지 듣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네일은 제 팔을 들어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시계방이 향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던 게 생각났다. 처음이야 거슬렸지, 지금은 적응 됐다보니 생각을 하질 못 했다. 그 냄새로 가득 찬 공간에 있는데다가, 향수를 쓰는 당사자와 매일같이 만나고 있으니 냄새가 안 배기가 더 힘들었을 터다. 그렇다고 그리 강하게 나는 것도 아닌데. 알아차린 걸 보니 제 연인이 대단하기도 하고, 그만큼 저에 대해 모든 것에 있어서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이야기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엘리후는 네일의 고개를 잡아 돌리고 제 고개도 슬쩍 틀어 입술을 맞대었다. 혀를 내밀자 닫혀있던 입술이 부드럽게 열리고, 그 안의 혀를 끄집어내 제 혀와 얽히게 했다. 일부러 타액이 섞이는 소리를 노골적으로 내자, 네일이 귀 끝까지 붉히는 게 보여서 엘리후는 속으로 쿡쿡 웃어버렸다. 이내 작게 뜨고 있던 눈까지 감고, 키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받아들이는 것마저 서툴러서, 가만히 있다가도 적극적으로 응해보려고 혀를 얽는 시늉을 하는 게 마냥 귀여워보였더랬다. 그 시늉이 저가 하는 키스와 상당히 많이 닮아있기에 더더욱.

  숨이 막힐 즈음이 되어서야 엘리후는 입술을 떼어냄과 동시에 여전히 잡고 있던 네일의 고개도 놓아주었다. 그제야 네일은 슬며시 몸을 돌려 엘리후의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엘리후 또한 마찬가지로 네일의 허리에 팔을 둘러 마주 안았다. 향수 냄새. 의식하고 나니 쓸 데 없이 더 선명하게 느껴져선, 엘리후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역시 안 되겠다.”


  어, 하는 사이에 네일은 뒤쪽의 소파로 밀려 반 강제로 눕게 됐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네일과 가만히 눈을 맞추며, 엘리후는 빙긋 웃어보였다. 채 1년을 채우지 못 한 연애 기간, 확실히 이런 쪽으로 눈치가 키워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모양이다.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었고, 사실 이대로도 귀여우니 마음에 들었지만.

  엘리후는 고개를 숙여 툭 튀어나온 목젖에 짧게 입을 맞추고, 그대로 내려가 목 언저리에 입술을 대었다. 입을 벌려 약하게 물고 빨아들이자 붉은 자국이 남음과 함께 네일이 몸을 떨었다. 제 머리채를 잡으며 밀어내는 손을 맞잡아 내리며, 엘리후는 고개를 들어 네일과 눈을 맞췄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몸은 오로지 제 손으로만 온전히. 이렇게 숨김없이 이리 솔직하게 떨린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행여나 남의 손길이 닿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남의 손이 닿는다는 것부터 불쾌한 일이었고, 그래서 하는 일종의 영역표시 같은 것이었다. 불필요할 정도의 짓궂음을 보이는 행위이기도 했다.


  “네가 실수한 거니까, 불만은 없지?”

  “……으.”


  대답 대신 작게 신음하며 네일은 잡히지 않은 한 쪽 팔로 제 얼굴을 가려버렸다. 물론 순순히 그렇게 둘 엘리후는 아니어서, 금방 그 팔을 치우고 다시 눈을 맞추며 웃어보였다. 이내 다시금 제 목에 얼굴을 묻고 흔적을 남겨가는 걸 보며 네일은 살짝 눈을 감았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게 연인의 머리칼을 잡고, 움직이는 데에는 방해되지 않도록 약하게 쓰다듬었다. 목 언저리에 닿는 혀와 숨은 그 자체로도 노골적이어서, 단순한 심술이 아니라 섹스의 전초전이라는 것쯤이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음대로 하라지. 속으로 중얼거리고 네일은 맞잡고 있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 * *


  그리하여 10월을 며칠 정도 앞둔 9월의 끝자락. 거슬리는 곳 없이 깔끔하게 마감 처리까지 끝난 한 쌍의 시계를 네일은 집까지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손을 뻗어 겉면을 쓸어내리자, 세밀하게 새겨진 그림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하나에는 여름날의 해바라기가, 다른 하나에는 겨울날의 나무가. 딱히 별 이유는 없으나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았다. 시침의 끝에는 각각 푸른색 보석과 붉은색 보석을 작게 하나씩 박아놓았다. 분침의 끝에는 그보다도 더 작은, 반대색의 보석을 박아놓았고. 그리고 뚜껑의 안쪽, 오로지 서로만이 볼 수 있을 공간. 그곳에는.



2015. 10. 15

Elihu Alfieri

Neil Claes



  제 손으로 직접 그리 새겼다. 그 작업까지 마치고 나자, 정말로 완성되었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깔끔하게 새겨진 이름까지 손끝으로 쓸어보고, 네일은 두 시계의 뚜껑을 덮었다. 제 것은 겨울의 나무가 그려진 것.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어두고, 다른 하나는 상자에 다시 잘 넣어놓았다. 언제쯤 주는 게 좋을까. 작년에 챙겨주지 못 했던 생일에? 너무 많이 남았는걸. 그 전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참지. 네일은 속으로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결국 오래는 기다리지 못하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불현듯 예감이 들었다. 1년이 되는 그 날에, 주게 되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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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라그



  "지크─"


  나른한 목소리로 부르며 끌어안는 손길에서 술냄새가 잔뜩 풍겼다. 지크프리트는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제게 늘어지는 몸을 당겨 안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만 헤실거리는 건 평소의 웃음과는 조금 달랐으나 그마저도 사랑스럽긴 했다. 단지 문제가 하나 있다면 바로 그 몸에서 풍기는 술냄새였다. 라그렛은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평균 이상이라 말할 수 있었는데, 표정이 풀리고 몸이 무거울 정도로 취한 걸 보니 오늘은 꽤나 많이 걸친 모양이었다. 라그렛이 술자리를 피하기 힘든 포지션임은 명백했다. 라그렛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며, 지크프리트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리조리 잘만 빠져나오곤 했는데, 오늘 상태는 이렇다. 크게 차이는 없긴 하나 그래도 저보다 큰 키로 자꾸만 안겨오는 라그렛의 등을 토닥여주며 지크프리트는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빠져나오지 못 할 만한 상황이었겠지. 허나 그런 자리에서 이정도로 술을 마실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분위기를 많이 탄다고 해도. 그렇다면 마실만한 이유가 있었나? 토닥이던 손길을 점차 쓸어내리는 형태로 바꾸며 지크프리트는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으응."


  대답 대신 작은 칭얼거림과 함께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결국 캐묻는 걸 포기하고 침대까지 겨우겨우 이끌어 오니, 제대로 눕혀주기도 전에 라그렛이 먼저 풀썩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원래도 취기가 돌면 뭔가 주절주절 이야기하다가 금방 졸음에 시달리는 사람이었더랬다. 그럼 그 자리에선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하는 생각에 닿았으나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애써 머릿속에서 상상을 지워냈다. 알아서 했겠지 싶다. 이제와서 딱히 숨길 것도 없는 게 사실이고. 시트 위에 얌전히 놓여져 있는 손이 잡히자 라그렛은 옅게 미소지었다. 아무리 취해 있어도 익숙한 손의 감촉은 잊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쳐내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잡은 손을 올려 가볍게 라그렛의 손등에 입맞췄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몸을 기울이고, 빈 손으로 라그렛의 앞머리를 가만가만 쓸어주다 감은 눈 위를 가려주었다.


  "자요. 졸린 것 같은데."

  "으으응… 싫어."


  문득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라그렛이 몸을 일으켰다.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던 지크프리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허리께에 부비적거린다. 작은 웃음 소리를 내며 결국 지크프리트는 제 무릎을 그에게 내주었다. 자기 싫어─ 하고 웅얼거리는 소리는 명백한 어리광이다. 뭐가 그렇게 싫냐고 장난스레 물으려던 말을 목 뒤로 집어넣으며 지크프리트는 다시금 라그렛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천천히, 부드럽게. 이내 한참이나 감겨있던 눈이 뜨였다. 평소보다 탁하긴 해도 미약하게나마 빛을 품고 있는 샛노란 눈동자가 물끄럼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선홍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내 라그렛은 여전히 잡고 있는 오른손 대신 왼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목에 걸쳤다. 그대로 당기자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짧은 입맞춤이 이어지고, 입술이 떼어지자 라그렛은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여운을 즐기다가, 문득 든 의문을 품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오늘 늦는다며."

  "나보다 선배가 더 늦었어요."

  "집에 와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구나."


  조금 더 일찍 올걸. 중얼거리는 입술 대신 이마에 한 번 더 쪽, 하고. 그러고 나서야 지크프리트는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래봤자 고개는 푹 숙여져 빤히 라그렛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안 잘거예요?"

  "보고싶었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소 뜬금없는 말이 뱉어졌다. 지크프리트는 두어번 눈을 깜빡이다가, 나두요. 하고 짧게 대답했다. 이어서 보고싶었어요, 하고 덧붙였다. 만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이 뭐가 그리 길다고 이리 애틋하게 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라그렛은 가끔씩 이리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그러는 라그렛 본인도 바보같다고 생각하고는 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표현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나.


  "너 늦는다고 해서 술자리 나간건데."

  "응, 그랬구나."

  "재미도 없고… 자꾸만 보고싶은 거야. 근데 보고 싶다고 말 할 네가 옆에 없잖아."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그래서 보고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마다 한 잔씩 마셨는데."


  ─그래서, 이 모양 이 꼴. 저가 생각하기에도 웃긴지 그리 말을 마치며 라그렛은 작게 웃음 소리를 흘렸다. 지크프리트는 손을 뻗어 라그렛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손을 제 손으로 감싸며 라그렛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가만히 고정시킨 채 손바닥에 볼을 부볐다. 술기운 때문인지, 닿아있는 손 때문인지. 자꾸만 기분이 좋아서. 표정에서 미소가 떨어지질 않았다. 옛날 생각나. 문득 중얼거린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대답이 떨어지지 않자 라그렛은 저 혼자 말을 이어나갔다. 옛날에도 이렇게 볼 쓰다듬어줬잖아. 같이 술 마셨을 때요? 응. 감겨 있던 눈이 다시금 뜨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네가 만져주는 건 좋네. 결국 기분이 좋은 이유는 닿아있는 손 때문이라는 거다. 사실 당연한 거라,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라그렛은 지크프리트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어깨를 잡고 당겨 아까보다도 더 깊게 입맞췄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금방 떨어져나갔지만. 이내 가늘게 뜨인 눈으로 라그렛은 빤히 지크프리트를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크프리트 또한 눈을 뜨고, 눈이 마주친다. 취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잠 마저 다 깨버린 모양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묘하게 흐리멍텅하던 노란 눈동자와 평소때와 전혀 다를 바 없이 돌아와있었다. 한참 눈을 마주하다가 라그렛은 툭, 지크프리트와 이마를 맞댔다. 이내 작게 소근거렸다. 


  "술냄새 나는 키스는 별로야?"

  "글쎄요."


  능청스레 대꾸하는 걸 보며 라그렛은 그냥 픽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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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하얀 밤

  “입 벌려야지, 네일.”


  입을 꾹 다물고 저를 꿈뻑꿈뻑 눈을 저에게로 향할 뿐, 미동조차 않는 네일을 보며 엘리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네일이 고집을 부리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제 연인 앞에서면 제 고집은 존재하지도 않는 마냥 행동하는 게 그였고, 부리더라도 아주 잠깐 그런 눈치를 보였다가 금세 거둬버리곤 했는데. 이리 나온다면 쉽사리 꺾여줄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그의 볼을 몇 번 쓸어내린 후에도 반응이 없자, 엘리후는 스프를 뜬 수저를 그릇 위에 올려두었다. 수저와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그제야 네일은 입을 열어, 입술 틈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런 거로 저까지 억지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부려서 강제로 먹여봤자 피차 서로 마음이 상할 게 분명했으므로.

  사실은 그런 걸 떠나, 분명히 저를 향해있지만 시선은 맞추지 않는─정확히는 못하는─ 눈동자에 조금 씁쓸해졌고 동시에 서운해졌다. 네일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제대로 발병하기 전에 발견했더라면. 네일 본인보다도 더 먼저 알아차리게 되어서, 며칠이라도 더 일찍 제대로 검사를 받게 했으면. 달라졌을 것만 같아서. 그 정도의 자책감이 마음속에 있었다. 엘리후는 손을 뻗어 네일의 볼을 쓰다듬었다. 서운함의 이유는, 이렇게 될 때까지도 저에게 숨기려 했다는 것이었다. 제 손에 볼을 부벼오는 네일을 바라보며 엘리후는 반대쪽 손으로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작은 동물을 어루만지듯 연인의 볼을 간질였다.


  “하루 종일 굶었을 거 아냐. 조금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아?”

  “괜찮아.”


  집 안에 다른 뭔가가 있으면 신경이 쓰인다며, 집요정조차 하나 두지 않았기에 직접 만든 스프였다. 그래봤자 네일이 마지못해 말해주는 대로 물을 끓이고, 봉지를 뜯어 안의 가루를 물 안에 부어 만든 아주 간단한 조리였으나. 볼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올려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붉은색 눈동자는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탁하고 흐렸다. 아무리 안경 뒤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대로 눈이 멀어버리면 어쩌지. 하며 저를 붙잡고 울던 1년 전 즈음의 일이 생각나버리고 만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렇다면 언제까지고 옆에 붙잡아둘 수 있겠다며. 가졌던 다소 이기적인 생각이 아주 잠깐 동안만 이어졌을 정도로 그 때의 네일은 아주 서럽게 울었더랬다. 애초에 몸을 섞을 때 빼고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우는 모습이라, 저도 모르게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이대로 평생 널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싫어, 라고……. 실명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결국 저 때문이라는 것은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 켠을 괜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글쎄, 결국 저도 네일이 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싫었다.


  “기껏 내가 한건데도?”

  “…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래도 하는 방법 가르쳐줬으면서.”


  풀 죽은 목소리로 말을 붙이자 이번에는 네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못해 슬쩍 입을 벌리는 모습에 엘리후는 옅게 미소를 띠었다. 수저에 적당한 양의 스프를 떠 가까이 가져다대자 네일은 눈을 감았다. 빛 한 점 없을 눈을 가까이서 보게 하고 싶진 않았다. 감고 있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말에 뜨고 있는 것이긴 했으나. 네일은 벌려진 입술 틈새로 흘려 넣어진 스프를 목 뒤로 넘겼다. 다 식어서 미지근해진 스프는 솔직히 별로 맛은 없었다. 인스턴트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아무래도 연인이 물을 잘못 맞춘 탓도 없지 않아 있을 듯했다.

  ……어떻든 좋았다. 괜한 쑥스러움에 계속 싫다고 거부하긴 했으나, 그래도. 네일은 자연스레 입을 다시 벌렸다. 스프를 뜨며 그릇과 수저가 부딪히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그 이후로 몇 번이나 반복됐다. 드물게 대화 하나 없는 식사 시간이었다.


* * *



  그 날, 네일은 이례적으로 엘리후에게 제 집 문을 직접 열어주지 않았다. 물론 열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열어주지 못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떻게 문 앞까지 걸어가 문을 열어주겠는가. 그래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어오라는 말로 답했다. 일찍이 엘리후에게 제 집 열쇠를 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엘리후는 어째선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네일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숨어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누워 있다가 일어났는지 네일은 어정쩡한 포즈로 소파에 걸터앉아 있고, 항상 가지런히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책은 소파 밑에 떨어져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네일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이 모습과 그 눈이 뜻하는 건 단 하나뿐이라서. 엘리후는 꼼지락거리는 연인의 손을 잡아주며 부드럽게 제 품 안에 그를 안았다. 테이블 위에 반 이상 내용물이 남아있는 찻잔은 여느 때처럼 오후의 티타임을 갖던 도중 눈이 멀어버렸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어서와, 엘리.”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던 네일이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 엘리후는 꾹 침묵만 유지했다.



* * *



  그리하여 잠깐의 실랑이와 이후에 이어진 정적 끝에 식사 시간은 마무리됐고, 엘리후는 조심조심 네일을 방으로 이끌어 침대에 앉혔다. 침대 헤드에 기대게까지 하고 나서야 저 또한 그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네일은 자연스럽게 엘리후의 어깨에 기대었다. 책을 볼 때가 아니면 혼자라도 재잘재잘 떠들곤 하는 게 네일이었는데,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부쩍 말수가 적어지곤 했다. 대신 손을 잡거나 기대거나 끌어안거나. 보이지 않는 대신 닿는 것으로 채우려는 경향을 보였다. 좋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자?”

  “아니. 깨어있어.”

  “말이 없길래.”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어리광을 부리듯 고개를 움직여 부비고, 네일은 시트 위에 가지런히 얹어져있던 손으로 주변을 짚어 제 쪽에 놓여져 있는 엘리후의 손을 찾아냈다. 엘리후는 슬며시 그 손을 피하고는 항상 끼고 있는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저가 먼저 네일의 손등에 제 손을 올려 겹쳐 잡았다. 네일은 잠시 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가만히 두었다. 시야가 차단되면 다른 감각은 더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잡힌 손의 온기가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만은 좋았다. 오로지 그것만은.

  네일은 검지 손가락을 올려 엘리후의 손등을 살살 간질였다. 3년의 연애 끝에 네일이 배운 건 무언의 표현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키스가 하고 싶을 땐 지금처럼 손등을 간지럽힌다던가, 그런.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항상 엘리후가 알아주었기에 뭣 모르던 열일곱 때에는 그가 독심술이라도 익히고 있진 않은지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었다. 금방 자신이 파악하기 너무나도 쉬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버렸지만 말이다. 오로지 연인의 앞에서 만으로 한정된 일이었다.

  가볍게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남은 감촉이 따스했다. 그저 닿은 것뿐임에도 이리 온기가 생긴다는 게 신기했다. 연애 3년차인 지금까지도 말이다. 나름대로, 아직은 풋사랑이다.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어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마냥 감고 있는 게 어색한지 작게 뜨고 있는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빛이 없는 새빨간 눈동자는 섬뜩할 만도 한데, 연인의 것이라고 딱히 그런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안쓰러움과 약간의 불안감, 그리고 소유욕. 이럴 때면 꼭 제 것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와 닿았다. 항상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기대도 될 때 전혀 기대오지 않던 네일이 이리 제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으니. 그런 긍정적인 면도 있어서,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끝내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평소에도 좀 기대주면 얼마나 좋을까.


  “…있지, 엘리.”

  “얘기해.”


  네일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정적은 나쁘지 않았기에 엘리후는 군말 없이 항상 기다려주곤 했다. 종종 재촉할 때도 있었으나. 쑥스러운 말이나 부끄러운 말. 그의 속에 있는 진심을 꺼내기 위한 시간. 해가 지날수록 그 시간은 짧아져갔고, 언젠가는 이런 정적 없이도 속내를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기다림 쯤이야.

  사실 언젠가는 이런 정적 없이도, 라는 생각은 네일 쪽에서도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말이지. 손등을 간지럽히다 깍지를 껴버린 손에 묘하게 힘이 들어갔다. 엘리후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애석히도 이번에는 그가 듣기 좋아하는 류의 말은 아닐 것이다. 글쎄, 뭐.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입을 열기 직전에 했다.


  “이렇게 되면… 온통 세상이 새하얘져. 깜깜한 게 아니라 새하얀 색 뿐이야.”

  “……그래.”

  “눈을 감으면 까만데, 뜨면 하얘. 신기하지?”

  “잘 상상은 안 되지만.”


  ─그런데 말이지. 느릿하게 운을 뗀 네일이 기대있던 몸을 돌려 엘리후를 마주했다. 흐릿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건 착각이겠지. 저가 보일 리가 없으니까. 먼저 손을 뻗어 볼을 쓰다듬자 네일의 손이 올라와 그 손을 잡고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연인의 생각을 읽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태도를 취해온 엘리후였지만, 항상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비율을 따지자면 반반 정도일까. 잡고 내린 손을 더 꽉 쥐며 네일이 웅얼거렸다.


  “오른손.”


  반대쪽 손이 엘리후의 볼을 훑고 지나갔다. 볼. 코를 쓰다듬으며 이건 코, 하고 중얼거렸다. 그 다음은 눈가. 반사적으로 감긴 눈 위를 손끝으로 살살 쓸어내리며 네일은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네 눈.”


  그 뒤로도 얼굴 이곳저곳을 만지며 네일은 굳이 그 부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눈에서 손이 떨어진 이후로 엘리후는 가만히 네일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주 드물게도 말이다. 다시 볼. 그제서야 네일은 손을 멈추고 빙긋 웃어보였다. 언뜻 눈의 초점이 돌아온 느낌이었는데, 잘못 봤구나 싶었다. 다시 봤을 때 여전히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으므로.


  “닿아 있으면 눈앞이 새하얘도 보이는 거 있지.”

  “그거야말로 정말 이상한 말인데.”

  “기억 속에는 있으니까.”


  여긴 입술이고……. 입술을 만지는 손에서는 흐릿한 잉크 냄새가 났다. 오로지 네일의 오른손에서만 나는 냄새였다. 동시에 특유의 체향을 구성하는 제일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고. 손목을 잡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 맞추자 네일이 푸스스 웃었다. 꼭 저를 닮은 미소였다. 언제 쏙 빼가지고 간 걸까. 손을 뻗어 네일의 뒷목을 받치기도 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초점 없는 눈에 웃음이 영 나오지 않아 묘하게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키스해줘.”


  저 또한 키스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네일의 뒷목을 손으로 감싸며 당기고, 입술이 닿기 바로 직전. 작게 뜨여진 눈 안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온 건, 이번에는 착각이 아닐 것이다. 키스 직전, 네일은 작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엘리후가 평생 잊지 못할 말을 속삭였다. 입술이 겹쳐지고 나서야 그는 초점이 돌아온 눈을 내리 감았다. 혀와 혀가 부드럽게 얽혔다. 타액을 나누고 숨을 나눴다. 숨이 부족해지면 잠깐 입술을 떼고, 두어 숨을 쉰 후 다시 네일의 입술을 물었다. 네일은 시트 위에 올려져있는 손을 움직여 엘리후의 어깨를 꽉 잡았다. 당기는 힘에 혀뿐만이 아니라 몸도 엉겨 붙었다. 키스만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더웠다.

  오랫동안 맞닿아있던 입술이 끝내 떨어질 즈음, 엘리후는 슬며시 눈을 떴다. 네일은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떨어지지 말아줘, 하고. 그걸 보자마자 엘리후는 다시금 네일의 입술을 제 입술로 덮어버렸다. 숨 같은 건 쉬지 않아도 괜찮았다. 입술을, 제 혀를 감아오는 연인의 혀를. 이대로 숨이 멎어 죽더라도 놓고 싶지 않았다. 작은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네가 보여.


  그렇게 말하는 건 조금 반칙인데. 드물게 저마저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키스를 하며, 엘리후는 네일을 더 당겨 안았다.



  하얗고도 하얀,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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