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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느와르 AU

느와르 AU / 후반 약 수위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이런 쪽에 엮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름대로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해온 생, 세계의 뒷면에서 벌어지는 일들과는 동떨어진 채 법조계에 몸을 담았다. 그나마 그런 쪽과 연관이 있을만한 뒷돈이 오가는 일은 항상 거절했으며, 비교적 스케일이 작고 흔히 벌어질 만한 일들만을 맡아온 게 처음 얼마 동안의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런 일들이 편했으니까. 더러운 일은 하지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정의관도 존재했고. 능력이 좋다는 평은 머지 않아서 들을 수 있었으며, 그런 것들에 우쭐해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모난 곳 없이. 어찌보면 누군가의 꿈 그대로일지도 모르는 길을 걸었고, 평생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정말로. 지금의 인생을 살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과연 어디서부터 발을 잘못 들였던 걸까. 이런 쪽 일이 다 그렇듯, 한 번 들어서게 되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 말 그대로 '잘못' 엮였다. 가벼운 건인 줄 알고 맡았던 일이 사실은 뒷세계와 연관되어 있었으며, 그들에게 얼굴을 노출시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눈치 챘을 때에는 이미 벗어날 수 없을 곳까지 온 뒤였다. 조금이라도 멍청했다면 눈치채지도 못하고 평소처럼 행동하다가 제거당했을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이쪽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어정쩡하게. 밝은 곳과 어두운 곳 그 사이에서 어두운 쪽에 더 가까운 상태로 아슬아슬함을 유지했다. 그게 사지 멀쩡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비참함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죽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자존심과 양심을 버리고 싶지도 않았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줄타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뒷세계의 눈칫밥을 먹으며 변호사 일을 이어나간지 몇 년. 그 사람을 만난 건 슬슬 지쳐갈 무렵이었다. 정의관이랍시고 지니고 있던 것도 무너져가고, 그 덕에 삶에 대한 의지도 조금씩 꺼져갈 즈음. 솔직히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다. 아무리 막장이어도 법조인과 만날 때만은 깔끔한 게 이쪽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덕분에 걸쳐있긴 해도 어느정도 뒷세계의 일원이면서, 단 한 번도 시체 같은 건 보지 못했다. 처음 본 건 그와의 첫미팅 때였다. 제 발 밑에 숨이 꺼져있는 피투성이의 반 송장─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니 반이지 어쨌든 시체는 시체였다.─을 두고 웃는 낯으로 저를 맞이한 사람. 방 안에 진동하는 피냄새는 역했고, 처음 보는 시체는 끔찍했다. 더군다나 그 남자는 저가 눈 앞에 있는 걸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이미 끝이 난 시체를 세게 발로 차버리기까지 했다. 그걸 보고 아찔해짐과 동시에 의식이 끊긴 건 단 몇 초 정도의 일이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검은색 장갑을 낀 손이 제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튄지도 모르고 있던 피를 닦아내고 나서야 그 손은 거둬졌다. 이런 쪽 일을 할만한 사람은 아닌데. 그리 말하고 슬 웃으며 남자는 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을 불러 시체를 치울 것을 명했고, 방 안의 정리는 생각보다도 더 신속하게 마무리됐다. 사실 차가운 가죽의 감촉이 볼에 닿았을 때, 머릿속에선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과 엮이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돌이킬 수 없는 곳이라는 게, 몸을 담을 곳의 일인지 제 감정적인 일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 되어버렸다. 뭐가 마음에 들었길래 그 '이런 쪽 일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닌' 이를 제 전속으로 삼은 건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 외적으로도 주기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감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지금 와서는 조금 감사하고 있다. 아니, 아주 많이.


  문을 열자마자 제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에 네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엘리후는 평소의 것과는 조금 다른, 난처함을 숨기지 못하는 미소를 띄웠다. 솔직하게 시체나 피는 싫다. 며 제 의사를 밝힌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름대로 신경써주고 있는 지 몸에서 나는 혈향을 숨기기 위해 향이 강한 향수를 씀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가갔을 때 피냄새가 느껴지는 건 언제나였으나. 방 안 전체가 이 꼬라지인 것은 그 이후로는 처음이라는 뜻이다. 네일은 잠시 멈칫했다가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짧은 미팅이라 딱히 앉을 생각은 없었는데, 기어코 엘리후는 일어나선 저가 앉아있는 맞은 편의 의자를 빼주었다. 네일은 테이블 한켠에 튀어있는 피에 시선을 두었다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서류를 아슬아슬하게 걸쳐 핏자국을 가렸다.


  "급하게 치운다고 치운건데."

  "변명 안 해도 됩니다."


  옛날 같았으면 저가 눈치를 보느라 급급했을 터다. 허나 이상하게도, 저가 만나왔던 사람들 중 가장 위험해보이는 사람임에도. 자신이 눈치를 보는 것과 그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 딱 반반의 비율로 이뤄지고 있었다. 엘리후는 두어번 눈을 깜빡이고는 할 말을 찾는 듯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네일은 그의 뒤, 몇 번이나 핏자국을 지워낸 흔적이 있는 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똑바로 쳐다보는 데에는 면역이 없었다. 그의 직업 탓일까. 푸른색 눈동자는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조금 다른 이유도 있긴 했지만, 아무튼.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는 것보다는 다른 곳을 보는 편이 나았다. 정적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네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담을 찾을 시간에 그냥 일 얘기를 하면 뭐든 대화를 할 수 있을텐데. 결국 그와 눈을 맞추며 네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 얘기나 하죠."

  "까칠하긴."


  쿡쿡 웃는 웃음 소리를 무시하며 네일은 그에게 서류 첫 장을 건네주었다. 솔직히 저가 틱틱거릴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방 안의 피냄새 정리를 안 해준 것? 잘못은 제멋대로 미팅을 잡은 저에게도 있었다. 한 시간 후에 가겠습니다. 그 문자를 갑작스레 받았을 그를 생각해보자면 분명히 억울할 터다. 그래서 솔직히 오면서는 변명할 생각만 가득했다. 저 나름대로는 급한 일이라고. 그런데 당장 눈 앞의 엘리후는 추궁할 생각도, 불만을 표출할 생각도 없어보였다. 그저 현장 정리를 채 못 한 것에 대한 난처함만 표할 뿐. 엘리후가 서류를 읽을 동안 네일 또한 사본을 꺼내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에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어쩔 수 없다고 속으로 자위했다.

  본래 사람이 다 그렇지 않은가. 여자도 예쁜 여자에게 호감을 품기 쉬운 것처럼, 남자도 잘생긴 남자에게는 시선이 가기 마련이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그는 잘생겼다. 하는 일과는 다르게 피부는 곱게 자란 도련님 마냥 희고 티 하나 없었고, 행동에서도 매너와 예의가 묻어났다. 분위기로 사람을 압도할 뿐. 그리고, 정말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잘생겼다. 눈부신 금발과 밝은 벽안은 전형적인 미남의 상징이었다. 험한 일을 할 인상은 절대로 아니었다. 물론 그가 직접 험한 일을 하는 건 아니고 보통은 아랫사람을 시킨다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아무튼. 사람 접대하는 일을 하면 아무리 일을 못해도 얼굴로 다 용서받겠다 싶을 정도의 외모였다. 그러니까, 그냥 얼굴 때문에 눈이 가는 거라고. 젠장. 더럽게 잘생겨선.


  "네일?"

  "…다 읽었으면 얘기 시작할까요."

  "오늘따라 더 까칠한데, 착각은 아니죠?"

  "착각입니다."


  그 말을 꼭 무시하고는 엘리후는 생리 해요? 하는 장난 섞인 농을 건네며 사람 기분 나쁘게 웃었다. 네일은 상대 해 줄 생각도 없다는 듯 일 얘기를 시작했다. 시시하긴. 하고 김 새는 소리를 내며 엘리후가 투덜거렸으나, 그마저도 무시해버렸다. 악의를 담은 농담은 아니었다. 허나 네일은 이미 그에게 자꾸만 쏠리는 제 시선에서부터 기분이 상하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인정의 범위를 넘어섰다. 마음 속 깊은 곳의 감정이라는 놈은.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엘리후가 제 입으로 그리 말한 적도 있으니까. 당신은 너무 파악하기 쉬운 사람이야, 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감정을 가지고 놀아지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너무 깊은 곳까지 와버렸다.

  다행인 것 하나. 엘리후는 더이상 장난을 걸거나 토를 달지 않고 일 얘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다행이 아닌 것 하나. 자꾸만 피냄새가 신경쓰인다. 예전처럼 구역질을 참아야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 건 사실이었다. 다행이 아닌 것은 또 하나가 더 있었는데……. 네일은 몇 번이나 제 미간을 꾹꾹 누르고, 서류로 부채질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 항상 눈치를 보면서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왔는데, 엘리후의 앞에서는 그게 조금 힘들었다. 이상한 충동이 자꾸만 들었다. 그런게 있다는 걸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첫만남의 그 때처럼, 잠시 의식이 끊겼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일 얘기가 거의 매듭지어졌을 즈음이었다. 엘리후는 아까처럼 네일? 하고 이름을 부르며 꿈뻑꿈뻑 네일을 쳐다보았고, 네일은 그 부름에 답 조차 하지 않은 채 항상 엘리후의 손을 감싸고 있던 검은색 장갑을 벗겨냈다. 그리고 제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호신용이라며, 나랑 일하면 자기 몸 정도는 혼자 지켜야할 거라며. 손에 꽉 쥐어주며 휘두르는 법을 가르쳐주던 건 솔직히 애들 장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제 몸 하나 지킬 방법을 터득시켜줄 마음은 진심이었는지 사람의 약한 살을 베어내거나 찌를 수는 있게 만들어주었다. 가르쳐준 당사자에게 쓰게 될 줄은 자신도, 그 당사자인 엘리후도 몰랐겠으나. 네일은 날카롭게 벼려진 날을 세워 엘리후의 손등을 베었다. 금방 송글송글 핏방울이 맺히고,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피냄새.


  "…기왕 피냄새를 맡을 거면 당신 거가 나을 것 같아서."


  이윽고 변명. 엘리후는 제 손등에서 나는 피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작게 미소지었다. 힘이 빠진 손에서 스르륵 제 손을 빼낸 엘리후는 제 손등에 입술을 대고 몇 번 핥았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광경이었다. 피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엘리후는 제 입을 떼어내고는 대뜸 손을 네일의 눈 앞에 내밀었다. 피냄새. 네일은 손을 뻗어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게 엘리후의 손목을 잡고, 새어나오는 피를 핥기 시작했다. ……피냄새.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도 역하지 않았다. 그 피의 냄새만은.



* * *



  키득키득 웃으며 제게 다가오는 엘리후를 네일은 몇 걸음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다친 곳은 없어보이니 다행이었다. 저를 감싸고 그가 죽을 뻔 한 그 날 이후로, 비겁했던 고백을 받아들인 이후로. 위험한 일을 하다가 다치진 않을까 전전긍긍해왔다. 그러니까, 지금 같은 일을 걱정했다. 위험할 뻔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찾아, 겨우 찾아내 들어선 공간은 피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연락 그대로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제게 가만히 기대오는 엘리후를 받쳐주며 네일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역한 혈향에 어지럼증을 느꼈다. 싫은 냄새였다. 네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엘리후는 킁킁, 하며 그의 체향을 맡았다. 그러기를 한참. 슬며시 네일을 밀어내고는 제 입술과 그의 입술을 겹쳤다. 시체 사이에서 하는 키스는 최악인 동시에 은근히 로맨틱하지 않냐고, 속으로 연인에게 말을 건네며.


  "직접 이런 데까지 올 정도면 많이 걱정했나봐?"

  "…당연한 얘기를."

  "그랬어, 여보?"

  "……응, 자기야."


  보고는 싶은데 보러갈 기운은 없고, 이런 곳까지 보러 오라고 말하긴 조금 그렇고. 아랫놈에게 살짝 흘려주면 알아서 잘 부풀려 말해 직접 찾아오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 정답이었다. 못내 미안한 건 그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피냄새만 가득한 공간에 그를 들였다는 것과, 그나마 제 몸에서도 남의 피냄새밖에 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정도. 물론 제 피냄새가 났으면 그건 그것대로 그에게 불쾌감을 넘어 아픔을 주는 것이겠지만. 한 번 더 깊게 키스하며 엘리후는 문득 생각난 것을 실천하기 위해 제 목에 손톱을 세웠다. 상처가 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몇 번 긁자 선혈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걸 눈치챘는지 네일은 조금 거칠게 입술을 떼어냈다. 당황스러운 눈치로 저를 보는 네일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곤 속삭였다.


  "기왕 피냄새를 맡을 거면 내 거가 좋다며?"

  "…기억력도 좋아."


  긴 한숨 소리와 함께 네일은 엘리후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유일하게 기분 나쁘지 않은 혈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핥자, 엘리후는 한 손으로는 네일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네일의 허벅지를 자극하듯 쓸어내렸다. 약에 취하기라도 한 마냥 평소보다 예민해진 감각에 네일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허나 피를 빨아마시듯, 제 입만은 엘리후가 직접 긁어 피를 내준 옆목에 고정시킨 채였다. 그대로 피가 더이상 나지 않을 때까지 계속 핥았다. 그러는 사이 엘리후는 네일의 허벅지를 만지던 손을 움직여 벨트를 풀어 바닥으로 떨구고, 버클을 풀어내리고, 노골적으로 제 손이 닿는 범위 안의 네일의 하반신 이곳저곳을 애무했다. 다리 사이에는 제 다리를 끼워넣어 살살 예민한 곳을 건드렸다. 네일은 몸을 떨고 신음 소리를 흘리면서도 상처와 피를 핥았다. 그대로 밀어붙여져 벽에 제 등이 닿고, 피가 멎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으, 아……."

  "금방 기분 좋게 해줄게."

  "흐응…!"


  제 피가 일종의 마약처럼 작용하기라도 하는 걸까. 정말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긴 한데. 아무튼, 이미 정신이 반 쯤 빠져 딱히 거부 의사가 보이지 않는 몸과 제 몸을 밀착시키며 엘리후는 제 바지버클마저 풀어내렸다. 네일은 숨을 크게 내쉬고는 엘리후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엘리, 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는 어느 정도의 희열을 만들었고 살과 살을 맞대자 크게 터져나오는 소리는 만족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냄새로 그득한 공간은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열기와 신음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이미 기분 나쁜 피냄새와 시체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행위를 이어나갈수록 진하게 느껴지는 상대의 체향에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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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200Days

  느릿하게 눈을 뜬 네일은 흐릿한 시야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머리맡을 짚어 안경을 찾아내 썼다. 그러고 저를 끌어안은 채로 여전히 잠들어 있는 연인의 얼굴을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잠이 다 달아났을 즈음, 네일은 살짝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를 조금 넘은 시각. 저녁을 먹고 들어오자마자 피곤에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으니, 두 세 시간 즈음 잔 모양이었다. 옷은 갈아입고 잤어야 했는데. 네일은 손을 뻗어 엘리후의 셔츠 단추를 두어개 즈음 풀어주었다. 불편하지 않도록. 이내 색색 숨을 내쉬며 자고 있는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슬며시 품에서 빠져나갔다. 깨어나면 곤란하니 아주 조심스럽게. 사실 그대로 더 자더라도 별 상관없긴 했으나, 어쩐지 깨어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네일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작진 않았는데 여전히 곤히 잠들어있는 걸 보면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원래도 그리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작게 미소를 띠며 네일은 엘리후의 볼을 약하게 쿡쿡 찔렀다. 구경을 잔뜩 다닐 만한 곳으로 같이 여행을 온 건 처음이라, 너무 들떠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른 낮부터 여기저기 끌고 다녔던 걸 떠올리며 네일은 계속 찌르던 볼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깨는 걸 바라지는 않았기에 금방 손을 거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엘리후가 바르작거리며 작게 소리를 냈으나 깨지는 않은 듯했다.

  딸려있는 발코니의 문을 열자 제법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방금 전 옷을 갈아입으며 대충 의자에 걸쳐놨던 겉옷을 걸치고, 발코니로 나가자 탁 트인 바다가 한 눈에 보였다. 날이 저문 지가 한참이라 모래사장은 한산했다. 밤바다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는 모양인지 느릿하게 산책을 하고 있는 이들을 빼면. 내일은 좀 적당히 돌아다니고, 이 시간에 같이 바닷가를 걸어봐야겠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일은 혹여 방 안으로 들어가는 찬 공기에 그가 감기에라도 걸릴까 싶어 발코니의 문을 닫았다. 그러고 난간에 기대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꽤나 기분이 좋았다. 가끔씩은 따뜻한 바람이 아니라 찬바람인 편이 더 기분 좋기 마련이었다.

  바다는 좋아했으나, 해가 떠 있을 동안에는 전혀 발을 들이지 않았다. 저나 연인이나 사람이 많은 걸 싫어했으면 싫어했지 즐기는 편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제대로 보려면 해가 떠 있을 때, 햇빛에 물이 반짝이는 걸 보아야 하는 게 맞는데. 인파에 밀려 스트레스를 받는 것 보다야 그나마 조용한 곳에서 연인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았다. 이렇게 밤의 바다를 보는 것도 제법 괜찮기도 하고. 일부러 바다가 보이는 곳에 숙소를 구한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혼자 밤바다를 내다보고 있기를 한참. 뒤에서 저를 끌어당기는 팔에 네일은 몸에 힘을 풀고 가볍게 그의 품에 제 몸을 내주었다. 이내 제 어깨에 얼굴을 묻어오고, 몸을 부벼오며 귓가에서 끄응거리는 소리에 네일은 작게 웃고 말았다. 손을 올려 엘리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그 손에도 머리를 부벼왔다. 안고 있으면서도 기대고 있는데, 평소보다도 그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피로의 누적때문인 듯싶었다. 이럴 것 같아서 일부러 깨우지 않은 거였는데.


  “네일─”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자 네일은 응, 응. 하며 애 어르는 듯한 느낌으로 제 허리를 껴안고 있는 손을 잡아 올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 손으로 엘리후는 네일의 입술을 두어번 만지작거렸다. 뭘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기에, 네일은 고개를 돌려 제 어깨에 턱을 걸친 채로 있는 엘리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맞대었다. 그대로 한두 번 부비고 떼어내자, 눈에 나 졸리다. 고 쓰여 있는 주제에 기분은 좋은지 눈앞에서 푸스스 웃어보였다.


  “안 자고 뭐해.”

  “잘 시간은 아니잖아?”


  이내 엘리후는 작게 신음하고는 허리를 펴 기대고 있는 몸을 제대로 하고, 네일을 제 품 안에 더 세게 안았다. “내 품 안에서 잘만 자고 있었으면서.” 귓가에 속삭이며 귀에 입을 맞추고, 또 볼에도 입을 맞추자 네일이 간지러운지 키득거렸다. 허리를 껴안고 있는 두 팔 중 한 팔은 움직여 네일과 손을 맞잡고, 자다 깨서 정리도 하지 않은지라 평소보다도 더 난잡하고 약간 뻗친 채인 네일의 뒷머리에 엘리후는 제 코를 대고 몇 번 부볐다. 희미하게 나는 체취가 기분 좋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또한.


  “그냥. 바깥 구경이 조금 하고 싶어져서.”

  “춥진 않고?”

  “방금 전까진 조금 추웠는데, 지금은 별로.”


  느긋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엘리후는 고개를 내려 네일의 뒷목에도 입을 맞추었다. 여전히 연인의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의 손으로 장난스레 허리를 쓰다듬자, 그 손마저도 잡혀서는 내려졌다. 엘리후는 쿡쿡 웃으며 흘끔 네일을 쳐다보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면 어쩔 줄 몰라하곤 했는데, 이리 변하긴 했어도 제법 귀엽지 않나. 저를 쏘아보다가도 눈이 마주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이는 걸 보며 엘리후는 다시금 네일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영 졸음이 가시질 않았다.


  “나 졸린데, 네일.”

  “들어가서 더 자.”

  “재워줘.”


  너도 더 자고. 하며 괜한 어리광을 부려오자 네일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피곤해서 이러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지만 아직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조금 미안한 일이었다. 제 볼을 간질이고 있는 엘리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네일은 고개를 돌려 그의 정수리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럼 조금만 있다가.”


  불만스러운 시선이 저를 향해왔으나 유쾌하게 무시하고, 네일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햇빛 대신 달빛을 비추고 있는 분위기가 데이트하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았다. 제게 매달려서 칭얼거리고 있는 걸 보니 역시 오늘은 무리겠고, 내일로. 다음 날의 일정 끝에 속으로 끼워두며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내리감았다. 바람이 꽤 차게 느껴졌는지 뒤에서 엘리후가 저를 더 끌어안아왔다. 자기가 추워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추위를 잘 타는 연인을 걱정해준 건지. 둘 다 일지도 모르겠다며 네일은 속으로 계속 피식거렸다.

  계속 제게 부비적거리며 들어가서 더 자자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또 무시하고. 한 번은 어르고 달래며 여기저기에 쪽쪽거리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네일은 갑자기 눈앞의 넓디넓은 하늘에 펑, 하고 터지는 불꽃에 반사적으로 몸을 크게 떨었다. 소리가 꽤 컸는지 한참 네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엘리후 또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까보다 더 큰 불꽃이 터지고, 몇 초의 간격을 두고 그 양 옆으로 조금 작은 불꽃이 터져 하늘을 여러 빛깔로 수놓았다. 어디서 폭죽을 쏘아 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일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눈만 깜빡이며 계속해서 터지는 불꽃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작게 엘리, 하고 제 연인을 불렀다. 엘리후는 눈을 데룩 굴려 네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쁘지.”

  “응.”


  자연스럽게 답하며 엘리후는 네가 더. 하며 작게 덧붙였다. 그걸 들었는지, 못들은 척 하는 건지. 네일은 별 반응을 하지 않았는데, 귀 끝까지 빨개진 걸 보니 들어놓고 못들은 척 하는 것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렇게 알기 쉬워서야. 잔뜩 붉어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엘리후는 그 귓가에 소곤소곤,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네가 더 예뻐.”

  “…수작 부리긴.”


  진짠데. 끝으로 귓가에 웃음소리를 흘리곤 엘리후는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불꽃놀이도 예쁘긴 하지만, 역시 이쪽이 더. 시선은 터지고 있는 불꽃에 여전히 고정된 채로 엘리후는 네일의 볼을 손가락 끝으로 간질였다. 아까처럼 잡아 내리지 않는 걸 보면 분위기에 취한 듯, 그리고 딱히 싫지도 않은가 보다. 네일이 쓰고 있는 안경을 톡, 건드려 내리자 네일은 손을 움직여 안경을 바로 올려 썼다. “장난치지 말고.” 작게 중얼거리며 그제야 엘리후의 손을 꼭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우리도 내일 폭죽 사서 쏴보자.”

  “애도 아니고.”

  “뭐 어때.”

  “흐음. 딱히 폭죽 살 필요는 없지 않아?”


  맞잡고 있는 손을 움직여 네일의 손으로 지팡이를 쥐는 흉내를 내자 네일은 그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폭죽 쏘는 거랑 마법은 조금 다른 맛이 있거든.”

  “쏴본 적은 있어?”

  “……아니.”


  갑자기 풀이 죽는 걸 보며 엘리후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네일은 괜히 그런 엘리후를 쏘아보았고, 그제야 겨우 웃음을 멈추며 엘리후는 다시금 네일의 손을 꽉 맞잡고 자신 쪽으로 움직여 아까 네일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쏴본 적이 없는 것이야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고, 어떻게 하던 별 상관은 없었으나. 장난스레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입을 맞춰가며 엘리후는 조금 늦게 대꾸했다.


  “네가 원한다면 나도 좋아.”

  “응.”


  네일은 평소와는 다르게 밝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새끼손가락까지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자, 네일은 주먹을 꽉 쥐어 더 이상 입 맞추지 못하게 해버렸다. 물론 그런다고 스킨십을 관둘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다른 쪽 손으로 네일의 턱을 잡고 고개를 돌리게 해, 슬며시 입술을 맞대었다. 애들 마냥 맞대고 부비는 게 아니라 그대로 겹치자 자연스럽게 네일은 입술을 벌려주었다. 그 안쪽으로 제 혀를 밀어 넣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네일의 혀와 그대로 얽히게 했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 때문에 혀와 혀가 뒤섞이는 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렸으나. 그대로 꽤 길게 이어진 딥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떼어지자 둘은 숨을 교환하듯 여전히 마주보는 채로 말없이 숨을 골랐다.


  “가끔 보면 다 컸는데도 어린애 같단 말이지.”

  “내 어릴 때 본 적 있는 사람처럼 얘기하네.”

  “열일곱도 충분히 어릴 때라고 생각하는데.”

  “그 땐 너도 열일곱 살이었어.”


  한 마디도 안지며 대꾸해오자 엘리후는 그냥 고개만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네일은 그런 그를 뒤로하고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열일곱. 그 한 해에는 꿈을 꾸는 듯 살았고,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는 행복이라는 게 꿈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실존하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열일곱의 그 날, 엘리후가 고백의 대답 대신 입을 맞추어줬을 때부터 행복은 쭈욱 이어지고 있다며. 다시금 되새기자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와서, 네일은 잡고 있지 않은 손을 올려 제 입가를 가렸다. 어느새 불꽃놀이도 끝나, 깜깜한 밤하늘은 다시금 조용히 가라앉았다.


  “슬슬 들어가자, 엘리.”

  “나 잠 다 깼는데.”


  잡고 있는 손을 놓고, 네일은 뒤돌아 슬쩍 까치발을 들고 엘리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네일은 말을 마치고 바로 지나쳐갔으나, 그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는 없어서. “잠 오게 해줄게, 그럼.” 그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해보며 엘리후는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금세 픽 웃고는 네일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간에 제멋대로란 말이지. 물론 싫진 않았다.

  발코니 문을 닫고 제게로 다가오는 엘리후를 보며 네일은 가만히 제 두 팔을 벌렸다. 엘리후는 그런 네일을 꽉 끌어안고, 그대로 밀어서 뒤로 눕혀버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네일은 아까부터 자꾸만 키득거리며 그런 엘리후의 품에서 작게 바르작거렸다. 거부의 뜻은 절대로 아니고, 오히려 이건 이것대로 보채는 것이라. 엘리후는 슬며시 네일이 걸치고 있는 겉옷을 벗겨내고, 네일 또한 그런 그를 따라 손을 뻗어 하나씩 연인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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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유성우

 엣취, 하는 재채기에 이어서 훌쩍이는 소리까지 들리자 엘리후는 저도 모르게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제 시선은 깡그리 무시하고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엘리후를 한참이나 더 바라보다가, 네일도 하늘 쪽으로 눈을 돌렸다. 변덕스러운 영국 기후를 생각해 보자면,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날씨도 좋은 아주 드문 날이었다. 물론 밤하늘을 보러 나가자고 한 건 그런 것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한 아주 충동적인 말이었으나. 결과가 좋으면 별 상관 없지 않나, 싶다. 방금 전 훌쩍거렸던 것 때문인지 엘리후는 네일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게 바싹 붙게 했다. 네일은 자연스레 연인의 어깨에 기대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몸은 으슬으슬 추웠지만 마음 속만은 따뜻해졌다. 네일은 제 손을 엘리후의 손 위에 살며시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후는 그 손을 빼내어 다시 저가 네일의 손 위에 올리더니, 부드럽게 맞잡았다.


  “담요라도 가져올 걸 그랬지?”


  계속해서 네일이 훌쩍이는 소리에 엘리후는 키득거리며 장난스레 말을 붙였다. 네일은 뚱하니 입술만 삐죽 내밀고 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감기에 걸릴 건 이미 확정인 듯싶은데. 두어번 더 나오는 기침에 네일은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옮기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엘리후가 그 손을 잡고 내려버리자, 조금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고개라도 돌릴까 했으나 그러면 턱을 잡고 저를 보도록 고정시킬 게 뻔해서, 그냥 관두고 그의 어깨에 제 머리를 툭 올리고 눈을 감기만 했다. 어쩐지 힘이 쭉 빠져버렸다. 이렇게 붙어있을 수 있는 건 좋지만.


  “…그럴 걸 그랬네.”


  네일이 뒤늦게 답하자 엘리후는 눈동자만 데룩 굴려 그런 네일을 잠시 보았다. 잠시 동안 시선이 마주치고, 잠시 후 엘리후는 제 어깨에서 네일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밭 위에 앉아있던 터에 옷에 잔뜩 묻은 풀을 대충 털어내며 엘리후는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네일의 볼에 허리를 숙여 짧게 쪽, 하고 입맞춤을 남겼다. 네일은 온기가 닿았다가 떨어진 제 이마를 두어번 문질렀다. 그러다가 스산하게 부는 바람에 살짝 몸을 움츠렸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은 이래서 불편하다. 식사를 잘 안 챙기긴 해도 비실거리진 않고, 면역력이 약한 것도 아닌데도 감기에 쉽게 걸려버리니까. 작게 콜록이고는 네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목이 아파오진 않는 게 다행이었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담요 가져올테니까.”

  “괜찮은데.”


  엘리후는 가볍게 네일의 머리를 쓰다듬듯 톡톡 두드려주곤 발걸음을 옮겼다. 곁에서 사라지니 더 추워져서, 네일은 제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니 밤하늘만 올려다봤다. 별을 보는 건 어릴적부터 좋아했던 일이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취미 아닌 취미 같은 것이었다. 예쁜 남색의 밤하늘에 작게 빛나고 있는 별을 보고 있자면 생각이 깨끗하게 비워지곤 했으므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나 답답할 때에는 항상 이렇게 밤하늘을 보곤 했다. 그걸 알기라도 했던 걸까. 네일이 그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도 천체망원경이었다. 학교까지 가져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은. 그걸 조금 서운하게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고, 네일은 뒤늦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제와서 무엇하나 싶어서 금방 지워버린 생각이었다. 사실 졸업한 후에도 딱히 자주 들여다보진 않았다. 지금까지 들여다본 횟수를 두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콜록임이 조금씩 심해져갈 때 즈음, 제 어깨를 감싸오는 느낌에 네일은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부드럽게 웃는 연인의 얼굴이 보여서 저도 모르게 똑같이 웃어버렸다. 그대로 엘리후는 네일의 뒤에 바짝 붙어 앉아, 그를 품 안에 끌어안고 편하게 기대도록 했다. 네일은 가볍게 그에게 몸을 맡겼다. 꽤 큰 담요를 가져온 모양인지, 담요로 작지는 않은 남자 두 명의 몸을 얼추 다 둥글게 감쌀 수 있었다. 네일은 앉은 듯 누운 듯한 애매한 자세로 제 위에 올려진 담요자락을 더 끌어올렸다. 엘리후는 고개를 숙여 네일의 정수리, 머리카락 여기저기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췄다. 그게 괜히 간질거려서 네일은 푸스스 웃고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네일은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제 가슴팍 위에 놓여져있는 엘리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엘리. 하늘 봐봐.”

  “음?”


  유성우였다.


  책에서야 자주 봤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네일은 작게 입을 벌리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 큰 유성우는 아닌지 별이 긴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건 드문드문하게 보였으나, 그마저도 신기해서. 엘리후 또한 한참동안 아무말 없이 별이 떨어지는 걸 눈에 담기만 했다. 네일은 괜히 아까 잡고 흔들었던 엘리후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담요 속이라 그런가 평소보다도 더 따뜻했다. 항상 끼고 있는 검은색 장갑으로 싸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로 느껴지는, 장갑으로 미채 모두 차단하지 못한 미약한 온기를 언제부턴가 네일은 느낄 수 있게 되었더랬다.

  오늘이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이었던가? 호그와트에서 천문학 수업을 들을 때에는 종종 교수님이 언제 유성우가 떨어질 지 가르쳐주시곤 했었는데, 매번 타이밍을 놓쳐서 보지 못하거나 잘 안 보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계산 방법이야 배웠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졸업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어서 오늘 밤하늘을 보러 나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며, 엘리후를 끌고 나온 충동에 대해서 네일은 괜히 이유를 붙여보았다. 날씨 좋고, 하늘 맑고, 거기다가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 묘하게 로맨틱한걸. 네일은 옅게 미소를 띠었다.


  “유성우를 보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거, 알아? 완전히 미신이긴 하지만.”

  “소원 빌었나보네.”


  네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원 빌었는데?” 엘리후가 되물었으나 네일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괜히 얄미워져 엘리후는 네일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어눌해진 발음으로 아파, 하는 네일에 금방 놓아버리고 그 볼에 입을 맞추어줬지만은. 네일은 엘리후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채로 오히려 저가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넌 소원 빌었어?”

  “빌긴 했는데 말 안 해줄 거야.”


  저도 말해주지 않은 입장에 캐묻기는 좀 그래서, 네일은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뭘 빌었는지 엘리후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제 입으로 내뱉기에는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하는 것 뿐이었다. 아주 당연한 소원이며 항상 바라고 있는 것. 사실 그 또한 비슷한 소원을 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네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지. 엘리후는 가만히 네일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별이 떨어지는 게 멈췄을 즈음, 오른손으로 네일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기에 네일은 살짝 고개를 돌려주었다. 입술과 입술이 짧게 맞닿았다 떨어졌다.


  그러니까, 엘리. 내 소원은 말이지…….


  너랑 이렇게 평생 평화롭고 행복하게 같이 지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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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loss of eyesight

 주기적으로 눈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야 올해 들어 자주 있었던 일이었다. 아직 익숙해지지는 못했지만. 통증에서 끝난다면 별 문제 없이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네일은 못 견뎌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실명 상태는 제대로 된 원인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었고백색증의 뒤늦은 증상일 것이라는 진단은 받았으나짧으면 몇 분, 길면 하루 종일 이어지기도 하는 나름대로 큰 문제였다. 사실 당장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특별한 상황만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그럴 때면 만성적으로 부족한 잠을 보충하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이대로 영영 보이지 않게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잠을 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매번 실명 상태가 찾아오면 잠을 자야지, 하고 마음을 다졌으나 막상 보이지 않게 되어버리면 어찌 할 수 없는 공포감에 생각이 마비되곤 했다. 종종 연인이 없는, 저 혼자 있는 집 안에서 연인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를 정도로.

  ……너를 다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단지 그 뿐이었다.

  그렇다고 걱정 시키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네일은 철저하게 제 눈 상태에 대한 것을 숨겨버렸다. 평소에는 안경을 끼지 않아도 잘만 보였던 앞이 흐려지고, 안경 없이는 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어버린 단순한 시력 감퇴조차도 말 하지 않았다. 그러니 종종 찾아오곤 하는 실명 상태에 대해서 말을 할 리가. 어차피 안경은 잘 벗지 않으니 시력이 떨어진 걸 들킬 리는 없을 것이라며, 연인이 알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실명 상태만은 원인을 찾아내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날따라 이상하리만치 눈이 아팠다. 알고 있었는데. 왜 일찍 돌려보내지 않았을까. 갑자기 확 뻐근해져오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름과 동시에,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 하얗게 섬광 같은 것이 튀었다. 네일은 이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을 뜨는 게 무서웠다. 네가 보이지 않는 게 내게는 가장 두려운 일인데. 네일은 마른 침을 삼켰다.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사실상 필요 없는 것이었다. 네가 보이지 않으면 나는 무너져버리겠지. 어디까지 무너져 내릴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 네일은 도저히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치울 수가 없었다. 감고 있는 눈조차 뜰 수 없었다. 계속해서 눈을 비비기만 했다.

 

  “네일?”

 

  저를 불러오는 목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분명히 이상하게 보이겠지. 이대로 눈을 뜨더라도 별 문제 없이 보이기를 원했다. 보일거야.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스려봤지만, 손을 떼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드물게 실명 상태가 몇 초 정도로 짧게 지속되지 않는 이상은. ……보이지 않겠지. 아무것도. 순간적으로 숨이 확 막혔다. 걱정시키기 싫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널 볼 수 없게 되는 게 나는 너무,

  엘리후는 네일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내려버렸다. 얼마나 눈을 비벼댔는지 눈가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엘리후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눈가가 쓰라린 것은 네일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걱정 섞인 목소리에도 차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눈이 아파서, 하는 사소한 거짓말조차 나오질 않았다. 당장 눈앞에 네가 있는 건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눈을 뜨면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게 하염없이 무섭기만 해서. 제 눈가를 만져오는 손길을 가만히 느끼며 네일은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막연하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그냥 정말로 갑자기 눈이 아팠던 거로 끝날 수도 있잖아. 아니면 하얗게 튄 게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염없이 자기암시를 걸었다.

물론 그런 기적 따위 일어나지 않았고, 저가 착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엘리.”

 

  숨이 턱 막혔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숨이 막혔다. 네일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제 연인이 있을 만한 곳으로. 서툴게 잡은 곳은 다행히도 팔이었다.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붉은색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엘리, 엘리. 하염없이 이름을 부르며 팔을 잡은 손이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을 잡고 싶은데 보이지가 않으니 제대로 되질 않았다. 네일은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엘리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네일을 바라보았다. 겨우 손을 찾아내 꽉 잡고, 네일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손 좀 잡아줘.”

 

  제 손을 꽉 잡아오는 느낌에 네일은 그나마 마음을 겨우 다스릴 수 있었다. 그래도 자꾸만 숨이 턱턱 막혔다. 손은 잡고 있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을 감고 있는 양 까맣게 암전된 시야는 사실상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냥 다른 거 다 안 보여도 너만 보이면 되는데.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손 또한 떨리고 있었다. 그 손으로 네일은 잡고 있는 손을 힘없이 자꾸만 끌어당겼다. 저 쪽으로, 더 가까이. 보이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도록. 문득 들키게 되더라도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항상 앞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너무 무서웠는데. 이렇게 손이라도 잡을 수 있으니까. 애써 웃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착각이면 어쩌지? 그런 황망한 생각이 들었다. 보이질 않으니 확인할 방도가 없지 않나.

 

  “엘리, 엘리거기 있는 거 맞지?”

  “여기 있잖아. 무슨 일이야.”

  “, 나 좀…….”

 

  꽉 잡고 있는 손을 억지로 뿌리치고 네일은 다시금 그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대로 더 뻗어서, 아까 잡았던 팔을 아플 정도로 꽉 잡고 끌어당기다가 순간 작게 휘청거렸다. 좀 안아달라고, 그 말을 하려고 했다. 순간 말문이 턱 막히지만 않았어도. 어쩌지, 울음이 터질 것 같은데. 앞으로 무너져버렸으나 다행히 엘리후의 품 안이었다. 계속해서 떨리는 손으로 팔을, 손을, 그러다가 옷깃을 꽉 잡으며 네일은 그 품에 제 얼굴을 부볐다. 아까 눈을 비비려고 안경을 미리 벗어놓은 게 다행인 일이었다. 네일은 길게 심호흡했다. 앞에 있는 게 맞아. 엘리, 나 안아줘. 겨우 터져 나온 말과 함께 나온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네일은 저를 끌어안는 팔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정말 이대로 영영 보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언제나처럼 두려움이 온 감각을 지배해버렸다.

 

  “여기 봐, 네일.”

  “싫어…….”

  “고개 들어보라니까.”

 

  고개만 저으며 제 옷깃에 눈물을 닦는 네일을 물끄럼 보다가 엘리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드럽게 턱을 잡아 들어 올리려 해도, 아까 힘이 다 빠졌던 것이 돌아오기라도 했는지 요지부동이었다. 엘리후는 혀를 차며 억지를 부리고 있는 턱을 조금 거칠게 잡아 올렸다. 그리고 저와 시선을 맞추게 했다. 항상 안경 너머로, 종종 맨 눈으로 마주보곤 했던 붉은색 눈동자는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떨리고 있었다. 당장 저를 부르던 목소리와, 저를 잡으려던 손보다도 더 세차게. 그렇게 억지로 맞추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정확히는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엘리후는 발갛게 달아오른 네일의 눈가를 느릿하게 제 손가락으로 쓸어주었다.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는 눈물 또한 닦아주었다.

 

  “엘리, 거기 있는 거 맞지? 안 보여. 안 보인단 말이야…….”

  “여기에 있어. 네 옆에.”

  “가지 마. 옆에 있어줘. , 매번 안 보일 때마다 계속 네 이름을 불렀는데 네가 없어서

 

  두서없이 말을 토해내는 입을 제 입술로 막아버리고 엘리후는 가만가만 네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눈을 감는 법을 잊은 것도 아닐 텐데. 엘리후는 뜨여진 채인 네일의 눈을 조심스럽게 감겨주고, 저 또한 눈을 감아버렸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한 쪽 손은 꼭 잡아주고, 다른 쪽 손으로는 제 옷깃을 잡게 했다. 네일은 이렇게 키스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도무지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본인조차 뭐 때문에 우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눈을 너무 많이 비빈걸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일까. 혹은 네가 옆에 있다는 게 안심이 되어서? 네일은 결국 생각을 포기하고 제 연인에게 몸을 맡길 뿐이었다. 정말 이대로 영영 보이지 않게 되면 어쩌지……. 그 생각만은 차마 지워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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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에버릿 에디트 개인 로그

─ 마니또 로그



소년은 꽃을 좋아했다.

남 자 아이가 꽃을 좋아한다며, 종종 부모님이 핀잔을 주시곤 했으나 에버릿은 그것 만큼은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항상 착한 아들이었고―사실 그것은 착하다기 보다는 순종적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그럴싸했다.― 시키는 것에 군말 없이 따랐던 에버릿에게 있어서 그것은 조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꽃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에버릿은 이 세상 위에서 살아 숨쉬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심지어 저 자신에게도. 에버릿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로지 꽃을 피우기 전의 꽃봉오리와 그 이전의 새싹, 끝끝내 피우고 만 아름다운 꽃. 그런 것들 뿐이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혹은 막연하게 그저 아름다워서? 에버릿은 저에게 던져지는 물음에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했기에. 애초에 남에게 설명을 해 줄 생각도 없었다.

지 하, 슬리데린 기숙사.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그곳은 식물을 키우기에는 그야말로 최악의 장소였다. 그래서일까. 3년을 옆에 두고 잔 화분에서는 단 한 번도 꽃이 피어난 적이 없었다. 그저 자그마한 새싹만이 돋아나고, 한참이 지나면 그 새싹이 죽어버렸다가 다음 해에 똑같이 돋아나는 것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 생명력만은 끈질겨서 에버릿은 도무지 그 화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 화분에 들은 씨앗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기에,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기를 머금은 새싹을 손 끝으로 톡톡 건드리고는 에버릿은 그 화분 옆에 포푸리를 놓아두었다. 마니또가 처음으로 주고 간 선물이었다. 식물도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참 좋을텐데. 포푸리에서는 장미 향기가 났다. 그 향기를 맡고 새싹이 자라 장미를 틔워냈으면 했다. 제법 좋은 냄새가 방 안에 가득 퍼졌다.

에버릿 에디트에게 있어서 꽃은 특별한 존재다.

마 니또가 그것을 알고 첫번째 선물을 꽃이 든 포푸리로 준비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에버릿은 그 선물이면 충분했다. 다른 것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에버릿은 그날따라 노곤했던 몸을 침대에 뉘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로켓을 꺼내, 그것을 열어보았다.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흰색 머리칼을 가진 여성과 검은 머리의 어린 아이. 사진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에버릿은 로켓을 다시 닫았다. Seri & Ever. 로켓의 겉면, 날카롭게 파인 홈은 그런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에버릿은 다시금 로켓을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다. 손을 움직여 베개 맡으로 뻗었으나, 귀마개를 잡았다가 놓아버리곤 이내 손은 가지런히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가 만히 있으면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평소엔 이리 예민한 귀가 아닌데, 꼭 자러 들어오면 이랬다. 마치 잠을 방해하기 위해 무언가의 저주라도 걸린 듯이. 하지만 그런 것을 걸 사람이 에버릿의 주변에 있을 리는 없었기에 그저 체질이 그런 것이겠지, 하며 에버릿은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아무튼.

장미 향기가 마음 속을 가득 채웠다. 어쩐지 오늘은 굳이 귀마개를 하지 않아도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3학년 방학, False Hope



저 녁 식사 시간의 분위기는 가라앉아있었다. 항상 이랬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그나마 나았지만, 아버지가 계시면 에버릿은 도저히 마음 편하게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와 단 둘이 하는 식사라니. 에버릿에게 있어서는 솔직히 최악의 자리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에버릿은 시선을 내리 깐 채로 연신 음식을 입에 집어넣기만 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너무 빨리 먹으면 뭘 그리 급하게 먹느냐 하실 것이고, 느리게 먹으면 너무 느리지 않냐고 핀잔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에버릿은 항상 적당한 것을 찾고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라도 자리에 계셨다면……. 아니. 에버릿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봤자 별반 다를 건 없었을 것이다. 역시 혼자가 제일 편하다.

“휴식이 길었더구나.”

갑 자기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에버릿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조금 뒤늦게 “……예.” 하고 작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말하는 휴식이란,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리건과의 식사. 티모시와의 하루. 본래의 에버릿이었다면 절대 가지지 못했을 시간들이다. 평소였으면 방에 틀어박혀선 당장은 필요하지도 않을 공부를 하고 있었겠지. 에버릿은 괜히 수저를 깔짝거리다가, 이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 버지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에버릿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휴식이 길었다면 그만큼 해야 할 일의 시간을 빼앗겼다는 뜻이다. 이번 방학에 또 꽃밭에 가는 건 무리일 듯싶다. 아쉬운 일이었으나, 충분히 예상했기에 아무렇지도 않다. 정확히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랬다. 에버릿에게 아버지는 이런 존재였다. 불편하지만 거스를 수는 없는 존재. 가족 보다는 엄한 선생님에 가까웠다. 아버지가 저를 대하는 태도 또한 그러했고. 하지만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없는 평범한 가족이었다. 분위기가 조금 차가울 뿐이지. 식사를 마친 에버릿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에버릿을 에버릿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에디트로만 대했다.

“잠시 얘기 좀 할까.”
“…저, 공부가 밀렸으니까. 빨리 끝내주세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건 참 장하구나.”

에 버릿은 흐리게 웃었다. 칭찬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빨리 끝내달라는 뜻이었지. 내리고 있던 시선을 겨우 올려 에버릿은 아버지를 마주했다. 곧 호그와트 4학년이 되는 나이의 아들을 가진 아버지라기엔 심각할 정도로 젊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에버릿은 늦게 태어난 아이였다. 아버지와 에버릿의 나이 차이는 평균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 차이에, 그 반절을 더한 것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젊다. 30대로 보이는 정도의 외관. 에버릿은 전혀 늙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종종 어색해하곤 했다. 아버지와의 첫 기억과 비교해서, 단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마법사들 중에선 종종 이렇게 노화가 진행되지 않거나, 느리게 진행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에버릿의 아버지가 바로 그 케이스였다.

“공부는 잘 되어가고 있니? 어려운 건 없고?”
“네. 그럭저럭 할 만은 해요.”
“친구들이 많이 생긴 것 같던데.”
“…그리 많진 않아요.”

하 지만 네가 자발적으로 누구 집에 가는 것도, 누군가를 초대한 것도 처음이잖니. 아버지가 웃자 에버릿 또한 어색하게나마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에버릿에게 친구의 조건이란 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혹은 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사람. 또는… 굳이 그런 조건이 없더라도 가문끼리 연결지어서 좋은 관계를 맺어놔야 하는 사람. 그 정도에 그쳤으니까. 최근 들어 상당히 물렁해진 기준이었지만. 설마 친구를 만드는 것에도 참견을 하실까, 싶었는데.

“그래. 네게 필요한 친구라면 만들어둬도 괜찮겠지.”

커 다란 손이 저에게 다가오자 에버릿은 이번에는 눈에 띌 정도로 몸을 떨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별로 기분이 좋을 만한 행동이었기에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 이상의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가볍게 에버릿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손을 거두었을 뿐.

“오른손 말이다.”
“……네.”
“제대로 쓰는 연습을 해두는 게 좋을 거다.”

에 버릿은 시선을 떨궈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연습은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 차였다.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을 뿐. 더, 열심히 해야겠네.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는 연습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버릿은 계속 아버지의 눈치만 봤다. 언제쯤 방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걸까.
그 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에버릿이 입을 열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먼저 말을 붙이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에버릿은 항상 제 방에만 있고, 아버지도 보통은 방에 딸린 서재에 계시거나 다른 집안과의 교류를 위해 밖에 계실 때가 많았으니 만날 일이 적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으나. 일방적으로 에버릿이 아버지를 어려워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애완동물… 말인데요. 키워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순간적인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맴돌았다. 에버릿은 약하게 혀를 깨물었다. 말을 잘못 꺼냈다. 역시 말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한참 동안 제 아들을 바라보던 에버릿의 아버지는 느긋하게 미소를 띄웠다.

“당장 꽃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있지 않니?”

순간 에버릿은 숲에 있는 공터의 꽃밭을 들킨 건 아닐까, 하고 겁에 질리고 말았다.

“화분이 두 개로 늘었던데 말이다.”

하 지만 이어진 말에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것을 말씀하시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곳이 들켜버린다면, 분명……. 에버릿은 그곳만은 잃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가꾸고, 자신이 도와서 피워낸 꽃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불태워지거나 훼손되는 건, 바라지 않는다. 저를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말이다. 에버릿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완동물 건은, 역시 안 될 줄 알았다.

“…네. 그렇죠. 더 이상 시간을 빼앗기면 안 되니까. 죄송합니다. 이만 들어가 볼게요.”

애완동물을 만들어오면, 친구들의 애완동물과 친구를 시켜주기로 했는데……. 어쩐지 먹먹해지는 기분이라, 에버릿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 4학년 방학, Alone



감 각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더 큰 자극을 주면 된다. 물론 딱히 본인이 바란 자극은 아니었으나. 참으로 오랜만에 가해진 폭력이었다. 에버릿은 제 오른팔을 꽉 쥐었다. 나름대로 노력은 했는데 말이지. 저를 돕기 위한 폭력인지, 아니면 그저 화가 났기 때문에 쓰는 폭력인지. 이 경우에 있어서 에버릿은 도무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두 개 다이던지. 사람의 적응력이란 굉장해서, 아무리 오랜만이라고 하더라도 통증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고통에 찬 신음 소리 정도는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꾹 참으며 느릿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를 향해있는 무감각한 시선은 애써 무시했다.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어쩐지 착잡해지고 만다.
일 종의 벌이었다.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있게 연습해두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1년 전 방학 때의 일. 하지만 가벼운 물건을 드는 정도에서 그쳤을 뿐, 그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폭력이 들이닥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도 이렇게 되어버렸다. 노력이 부족했구나, 하고……. 본래 여러 친척들이 모여 살았던 저택이 텅 비게 된 이유에는 외동아들의 보호라는 그럴싸한 명목이 있었으나, 사실은 이 폭력 때문이었다. 언제든지 성에 차지 않는다면 훈육을 하기 위해서. 확실히 보는 눈이 많으면 할 수 없을 테니까. 당장 어머니가 계실 때만 해도 그랬다. 몇 살 때부터 이 폭력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오래된 것. 재능의 부족이 이유든, 노력의 부족이 이유든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항상 폭력이 가해졌다. 너무 당연한 일이었기에 반발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폭력을 받아내고 나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곤 했기에. 그러니 이번의 폭력으로 오른팔에 돌아온 감각은 금방 오른팔을 원래처럼 쓸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비록 그 오른팔의 장애 또한 폭력으로 생긴 것이긴 했으나.

“집을 꽤 오래 비우게 될거다.”
“……예.”
“어차피 평소에는 학교에 있으니 별로 상관없겠지만. 최소 다음 방학 때까지도 혼자 있게 될테니, 자기 관리를 더 철저히 하거라.”

아 버지의 부재는 항상 집안일 때문이었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저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까지는.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가 하는 일을 저가 하게 될 것이고, 그때 즈음이면 다 알게 되겠지. 지금의 저는 자세한 집안의 일까지 받아들이기엔 부족했다. 고학년이 되면 조금 더 깊은 일들에 대해 배우겠지. 에버릿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집.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에 그나마의 위안을 받았다. 아버지가 주고 가실 과제는 평소보다 더 많겠지만, 그래도. 시선을 떨구었다. 최소 다음 방학까지. 느릿하게 속으로 두어번 곱씹었다. 불완전한 자유였다.

“돌아왔을 때는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상태였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만들게요.”

대 답을 들은 직후 아버지는 곧장 방에서 나가버렸고, 에버릿은 텅 빈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내 소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만 쉬었다가, 나가서, 밀린 공부를 하고. 이번 방학 때는 개인적인 연락을 열어두어야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아버지에게 설명 드려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자리를 비우신다면 그냥 제멋대로 열어두면 되는 일이다. 해야 할 일이 많겠구나. 몰려오는 잠을 겨우 쫓아내며 에버릿은 오른팔을 더 꽉 잡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통증은 더 심해졌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편이 더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당 장 그날 밤, 아버지는 저택을 떠났다. 방학이 시작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어머니─ 정확히는 양어머니 또한 그런 아버지를 따라 가신 듯했다. 그렇게 에버릿은 저택에 홀로 남았다. 집요정 또한 최소한의 집안일을 할 정도로만 남겨졌다. 아무리 기간이 한정되어있는 불완전한 자유라도 이렇게나마 얻어 본 게 처음이라,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에버릿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개인적으로 사용할 연락을 열어두고, 그 다음에는…….
명 백히 혼자라는 것은 자유를 뜻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길을 잃은 것을 뜻하기도 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그런 말을 들었는데. 에버릿은 도무지 저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숲 안에 숨겨진 정원을 관리하는 것?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일이 필요할텐데.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고 에버릿은 손을 뻗어 검은색 화분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이 아이를 꽃피우는 건 꽤 오래된 목표였다.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또 그 겨울이 지나 여름이 오는 걸 반복한 게 4번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꽃을 본 적이 없는 화분이었다. 씨앗이 죽어버린 것만 아니라면 다행일텐데. 에버릿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그 화분을 창가 쪽으로 더 가깝게 옮겨주었다.

그 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주어진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며 보내는 나날만이 흘러갔다. 로타에게 방문하기로 한 것은 그녀의 사정상 취소되었고, 하워드에게는 집의 위치를 담은 편지를 보내두었다. 루이지나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기도 했고. 해야 할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쳐보니 무언가 허전하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을 더 만들어둘 걸 그랬나. 다음 방학에는 약속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아스트리에게 했던 말―다음 방학 때에는 네가 우리 집에 올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는 것―은 지킬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또 누구를. 깃펜을 잡은 손으로 턱을 괴며 에버릿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게 내가 원하는 걸까. 이게 재밌는 거고, 즐거운 걸까.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런 느긋하고 나른한 시간이 또 며칠 흘러가고, 에버릿은 문득 저택의 지하를 떠올려냈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계단의 끝에는 문이 하나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기억을 되짚으며 에버릿은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기억 그대로의 문을 밀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안은 더더욱 어두웠다. 어차피 저택 안이니 마법을 써도 괜찮겠지. 에버릿은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기본적으로 미성년자가 학교 밖에서 마법을 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규칙임을 에버릿은 알고 있었다. 마법사의 집에서는 어느정도 허용된다는 사실을. 루모스, 하고 작게 중얼거리자 지팡이 끝에 적당하 불빛이 맺혔다. 에버릿은 다시금 나아가기 시작했다.

“흠?”

그 리고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마는 것이다. 에버릿은 지팡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초상화가 여러개.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호기심으로 들어왔던 지하. 문의 안. 말하는 초상화들. 그것들 중 하나가 저에게 말을 붙이려고 할 때, 아버지가 저를 찾아내 끌고 나갔었지. 그때가 폭력의 시작이었음을 기억해냈다. 에버릿은 지팡이를 초상화 쪽으로 갖다 대 그쪽을 비추었다. 그때 눈이 가려졌었기에 초상화 안 사람의 모습은 기억에 없었으나, 어쩐지 그때의 그 초상화가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빛을 비춘 초상화 속의 남자는 느긋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에버릿을 관찰하고 있기도 했다.

“네가 에버릿 알트 에디트. 맞지?”
“…네, 맞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 난 널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그 말에 에버릿은 고개를 갸웃하며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집중되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다른 초상화들도 저를 관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소름 돋는 기분. 그래도 당장 눈 앞,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초상화는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어딘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직 우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구나. 어리니까.”
“……어리진 않아요. 곧 5학년인 걸요.”

초 상화 속 남자는 웃으며 그래, 그래. 하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에버릿은 그것에 기분이 팍 상해서는 미간을 확 찌푸려버렸다. 그런 소년을 관찰하던 초상화의 청년은 이윽고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에버릿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초상화에서 손이라도 나올 수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저를 쓰다듬었을 기세다. 편안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런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지, 그래. 그래서 왔구나? 몇 년 전에는 잔뜩 혼났을테고.”
“정말로 잘 알고 계시네요.”
“너를 지켜보고 너에 대해서 듣는 게 우리의 일이니.”

우리. 그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에버릿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제야 조금씩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초상화가 한 두 개가 아니다. 여러 개. 초상화의 청년이 우리라고 칭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 팡이를 움직여 다른 초상화들도 둘러보았다. 대부분 노인, 혹은 중년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눈앞의 초상화만 아주 젊었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무언가 이유라도 있는 걸까. 어차피 지금의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째서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건지, 자신을 지켜보고 자신에 대해서 듣는 게 그들의 일이라는 건지. 물론 차차 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없는 저택, 딱히 할 것도 없고. 말상대가 있다면야 저야 좋았다.

“자주 오도록 해. 그게 네게도 좋을 거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인데…….”

제 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에버릿은 입으로 그리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눈빛으로 초상화를 쳐다보았다. 이정도만 해도 알아들어줄 것 같아서. 초상화는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던 표정을 지워내고, 다시 처음의 느긋한 미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초상화 속 청년의 입모양과 목소리는 이내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이름, 두 글자를 담아냈다.




─ 5학년 방학, 그 날은 비가 내렸고



“예전엔 정말 그랬단 말이죠.”
“그래. 뭐,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이런 걸 궁금해 하는 건 네가 처음이네.”
“걸쳐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초 상화 속의 청년은 에버릿의 그 말에 고개를 갸웃, 해보였다. 허나 오래 지나지 않아 이해했다는 듯 끄덕인다. 사회적 추세에 있어서 마법 세계의 에디트는 여타 순혈 가문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긴 했으나, 아직 그 구성원들 중에는 혼혈이 분명히 존재했다. 에버릿의 아버지가 그렇듯이. 그렇다면 에버릿 알트 에디트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딱 그의 대에 와서 순수 혈통이 되는 다소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 어릴 적, 혈통에 대한 교육을 받을 때에는 저가 순혈인지 혼혈인지 혼란스러워 했더랬다. 물론 이제 와서는 어떻든 별로 상관없어진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기준상 에버릿은 혼혈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순혈이 맞았고, 앞으로 에디트는 엄연한 순혈 가문으로 입지를 굳혀갈 것이니. 아직도 종종 저를 순혈이라 소개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서 고민에 빠지곤 했으나. 에버릿은 문득 한숨을 푹 내쉬고 덮어놓았던 책을 펼쳤다.
부 모님이 자리를 비운 저택에서의 방학은 사실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저택 안에서 아버지를 마주칠 일은 아주 적었고, 저가 실수를 한다거나 특별히 서로에게 전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은 부르지도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고 하기엔 아주 삭막했으며, 그렇다고 어머니─엄연히 말하자면 양어머니─와 교류가 잦았던 것도 아니었다. 딱 필요한 것만을 주고받는 관계. 그 속에서 에버릿은 자라왔고, 그러니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저 숨통이 트이고, 편해졌다는 정도 뿐. 하나를 더하자면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갈 수 없었던 지하에 내려가, 지금처럼 초상화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는 것. 사실은 그것이 가장 큰 달라진 점이었다. 5학년의 방학에 이른 에버릿은 사실상 방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이렇게 지하에 내려와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꽉 막히지 않은 말상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기에. 물론 저를 시안, 이라고 소개한 청년의 초상화만이 그랬지 다른 초상화들은 얘기하다보면 꽉 막히다 못해 답답할 정도였다. 그래서 에버릿은 항상 시안에게만 말을 걸었다.
방 금 전까지 이어졌던 대화의 주제는 과거의 에디트에 대해서였다. 물론 대화라고 하기에는 에버릿이 묻고, 시안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해준 것에 불과했으나. 꽤나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에버릿에게 해 준 과거의 이야기는 그저 예전에는 머글혼혈 가문이었다, 정도에 불과했는데. 지금에 이르기 위해 에디트의 사람들이 해 온 노력, 받아왔던 차별과 핍박……. 그의 말대로 딱히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초상화 속 시안은 저가 붙어있는 벽에 기댄 채로 책을 읽기 시작한 에버릿을 물끄럼 쳐다보았다.

“참 이상하지? 정말로 피가 순수해지는 것도 아닌데, 몇 대 마법사로만 피가 이어진다고 순수 혈통으로 불린다니. 어찌되었든 계속 위로 가다보면 마법사가 아닌 사람도 존재할거거든.”
“그래도 일종의 기준이니까요.”
“…뭐, 네가 듣기엔 구시대적인 사고일지도 모르겠네. 이제와선 혈통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잖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죠. 아직도 물 밑에서 차별은 존재하니까.”

그 말에 시안은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에버릿은 책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그런 시안을 흘끔 보았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수동적으로 살아온 에버릿을 위한 인생 상담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에는 에버릿이 물어서 해주는 에디트에 대한 이야기가 다였다. 그에 대한 쪽으로 대화가 쏠리려고 하면 항상 말을 피했으며, 그것을 인지한 뒤로는 에버릿도 딱히 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말을 돌리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냥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으니. 그래도 마지막 호기심으로 가계도에서 시안 에디트, 라는 이름을 찾아봤는데 그런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8 월 말, 개학을 이틀 정도 앞둔 무렵. 에디트 저택이 숨겨져 있는 영국 버밍엄에는 비가 내렸다. 에버릿은 비가 내리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비가 오면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꽃밭에 물을 주러 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니까. 물론 그걸 떠나서 빗소리를 좋아하기도 했다. 독서든, 공부든 집중하기에 좋은 소리였다. 초상화들이 있는 지하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하지만 그런 에버릿과 달리 시안은 어쩐지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내려와서는 말도 시키지 않고 가만히 공부만 하고 있던 에버릿이 갑작스레 물었다.

“비가 와서 그래. 초상화 안이 습기 때문에 찝찝해지거든.”
“그런 것도 느껴져요?”
“아아.”

시 안은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엣취, 하고 재채기를 했다. 신기할 노릇이다. 마치 정말로… 초상화 안에서 살아가는 것 같지 않은가. 호그와트에서도 수많은 초상화를 보고 지내지만 언제 봐도 막연히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 느낌을 하나도 감추지 않은 채, 묘하게 눈을 빛내며 저를 쳐다보는 에버릿에 시안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직은 어린 소년. 태어남 자체부터 아버지에게 압박을 받으며 살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밝은 아이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시안은 종종 하곤 했다.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저가 손을 써 소년이 자신의 삶을 살게 하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미 에버릿은 눈도 귀도, 그리고 마음까지 닫아버린 상태였고 아마도 평생 에디트로서. 아버지가 원했던 대로 살게 되겠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그래도 에버릿으로서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 자신에 대해 깨우치게 하는 것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고마워요. 덕분에 변신술 시험 잘 봤어요.”
“다행이네. 너무 오랜만에 남 가르쳐준 거라 잘못 가르쳐줬으면 어쩌지 했거든.”
“실기는 망쳤지만.”

에 버릿은 방학 중에 받은 O.W.L. 성적표를 떠올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약초학 낙제는 하지 않았으니. 솔직히 어느 정도 걱정은 하고 있었던 터라. 지금 실기는 망쳤다고 말하고 있는 변신술도 E였고, 그럭저럭 아버지나 집안에서 만족할 만한 성적을 보이긴 했다. 그러니 적어도 혼나진 않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에디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고득점일 뿐이었다. 실기는 가르쳐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닌걸, 하고 삐죽거리는 시안을 보며 에버릿은 고개만 저었다. 시험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노트에 필기해둔 것을 기계적으로 읽어내려가며 에버릿은 다른 대화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납치 사건 일어나는 거 알아요?”
“난 집안 얘기밖에 몰라.”
“아, 그렇겠네요. 미안해요. 당연한 건데.”

─ 별로 미안하다는 투가 아닌데. 무미건조하게 답하는 에버릿을 보며 시안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에버릿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가 모르는 이야기라면 할 필요도 없다. 흥미를 느낀다면 모를까, 관심 있어 하는 눈치도 아니었고. 물론 이렇게 같이 있다고 해서 항상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었고, 정적만이 유지되는 날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오늘도 그렇게 되겠구나, 싶었다. 별로 어떻든 상관은 없다.
납 치 사건……. 에버릿은 문득 노트의 맨 뒷장으로 넘어가 깃펜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 사건이었다. 저만 아니면 된다며, 그런 생각을 해왔기에. 그런데 어쩐지 당장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얼굴을 보고 있었던 아이들이 납치를 당하는 일이 생기니, 갑자기 확 현실로 와닿아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에버릿은 느릿하게 정리를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이나, 추측들에 대해서. 이런다고 사건이 해결되진 않겠지만. 일종의 자기만족용이었다. 너희 학교 교수님을 믿고 있니? 했던 바토리 초상화의 말을 적어놓고 에버릿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누구를 믿으라는 말인지. 모든 교수님들을 의심하라는 말인지, 아니면……. 일라이저 교수님을 닮았다는 그 사람도 거슬리고, 폴리주스 마법약 얘기도 거슬리고. 생각이 빙빙 돌기만 했다. 역시 당장은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다. 에버릿은 탁, 소리 나게 노트를 덮었다.

뒤 늦게 고개를 들어 본 시안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버릿은 가만히 그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굳게 닫혀 있는 문. 다시금 눈동자를 굴려 시안을 본다. 평소의 미소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그렇게 서로의 시선이 엇갈린지 얼마나 지났을까. 먼저 정적을 깨고 입을 연 쪽은 초상화 속의 시안이었다. “에버릿.”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버릿은 고개를 갸웃한다.

“손님이 온 것 같네. 이만 가봐.”

그 런 것도 알 수 있냐며, 물으려고 했는데. 가보라는 말에 에버릿은 끄덕이기만 했다. 주섬주섬 노트와 깃펜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까지 가서는 작게 꾸벅, 하고 인사한 후에야 에버릿은 지하의 방에서 나갔다. 어차피 내일도 볼텐데 인사가 꼭 필요한가 싶었지만. 아니면 손님맞이가 끝나고 다시 올 수도 있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에버릿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제 마음에 달린 일이었다. 오는 것도, 오지 않는 것도. 그래서 인사를 하건 안 하건 시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옆의 초상화들이 참견을 하긴 했지만. 두 번의 방학 동안 지하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그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시안도 매번 그냥 웃어넘기곤 했다.
그 나저나 올 만한 손님이 있던가. 다른 집안의 사람들이야 당연히 연락을 하고 올 것이고─애초에 아이 한 명만 남은 저택에 뭐하러 오겠냐만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기엔 제 집의 위치를 가르쳐 준 이가 별로 없었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지도 못 할 텐데. 부모님이 일찍 돌아오신 거라면 시안이 손님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터고. 의문만이 증폭되는 가운데, 에버릿은 계단을 모두 올라왔다. 어두운 듯 어둡지 않은 저택의 안. 빗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들려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 에버릿은 저택 문에 살짝 기대어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뒤이은 목소리는 아는 목소리였다. “삼촌이란다, 에버릿.” 마지막으로 들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삼촌의 목소리. 에버릿은 문을 당겨 열었다.

“어서오세요, 삼촌. 오랜만이네요.”
“…에버릿.”

소년은 빤히 제 삼촌을 쳐다보기만 한다. 표정이 별로 좋지는 못했는데, 비가 오기 때문일까. 무슨 볼일이시냐고 물으려 했으나 에버릿이 입을 열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놀라지 말고 들어라.”

─네 아버지가…….

에 버릿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귀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멍했다. 그리고 무언가 다른 소리가 났다. 소년의 근간을 뒤흔드는 소리. 오롯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가 원한 대로. 그의 욕심만을 위해 에디트의 사람으로 자라온 에버릿으로서는 단시간 안에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의 삼촌은 그런 에버릿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한참 동안 침묵했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비냄새가 섞인 공기 그 자체가 숨통을 조여 오는 느낌이라 하면 비슷할까. 에버릿은 숨을 토해냈다.

에 버릿 알트 에디트 16세, 소년은 그렇게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지를 끝낸 순간 숨통이 확 트이며 어쩐지 편안한 느낌을 받아버렸다는 것이다. 부모의 죽음에 그런 것을 느껴버렸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네일 클라이스] For me?

http://aseuami.tistory.com/107 이 글에서 이어짐.







  이렇게 불시로 부름을 받는 것이야 흔히 있었던 일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저택의 이 문이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물론 익숙한 것과 편한 것은 조금 다르기 마련이라. 네일은 문을 두드리기 전 낮게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클라이스는 네일에게 있어서 몸도 마음도 불편하게 만드는 장소였고, 그래서 졸업 하자마자 따로 집을 얻어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물론 불편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이유 때문에 나왔겠지만. 딱 최소한의 교류만을 주고받고 있는 관계. 그러니 집안사람들에게 이리 불려와 나누는 대화가 네일에게 달갑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도, 대화의 소재마저도 말이다. 손가락으로 문만 톡톡 건드리던 네일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 들어가도 될까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지는 건 정말로 그 시간이 길기 때문일까, 아니면 체감상의 이유일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할 무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소리도 없이 천천히 열렸다. 바로 정면에서 지팡이를 내려놓고 있는 늙은 남성이 보였다. 현 클라이스의 가주이자,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 저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 그 또한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사람이다. 동시에 가장 불편한 사람이기도 했다.

   순혈 가문의 가주란 다 이런 분위기일까. 17살의 가을,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처음 만났던 에디트의 가주라는 사람도 비슷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쪽은 훨씬 더 젊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겉모습을 떠나서, 저도 모르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기에. 물론 저가 만난 두 사람으로 판단하기엔 조금 섣부른 것이긴 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린 후, 요지부동으로 서있는 네일을 향해 그는 입을 열었다. 네일은 바닥에 딱 붙은 채 떨어질 생각을 않는 발을 애써 움직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 시점부터 네일은 저 문이 다시 열릴 때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 자리를 떠나고픈 마음은 둘째 치고, 연인과의 시간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세상에서 저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시간을 방해 받아버린 꼴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네일은 꽤나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불쾌함을 남에게 티내지 않는 방법이야 옛적에 터득했으니, 별 일을 만들지는 않겠지만은. 얘기 하면서 실수하면 안 돼, 하고 애 어르듯 말했던 연인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라버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실수를 한다기보다는 사고를 칠 것 같은데. 아까 그에게 했던 대답과는 조금 다른 것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일은 항상 앉곤 했던 쪽의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맞은편에 앉고, 당연히 저에게로 향해오는 시선을 네일은 제 시선을 슬쩍 내림으로써 은근슬쩍 피해버렸다.

 

   차라도 내오라고 시켜야겠구나.”

   할아버님이 필요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제 것까지 챙겨주시진 않아도 되고요.”

   네가 그렇다면 됐다. 나도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차라도 한 모금씩 들이키며, 찻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도 있었으나. 정말로 이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불편함을 떠나서, 엘리후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너무 기다리게 하면 삐지거나 감기에 걸려버릴지도 모르니. 삐진 거야 어떻게든 풀어주면 되지만,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건 정말 큰일이잖아. 사실상 지금 이 자리에선 전혀 상관없으나 네일 자신에게는 그 이상으로 상관있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네일은 끊임없이 이 시간이 빠르게 끝나기만을 바랐다. 이제야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이어지는 말이 없자 네일은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그제서야 말이 이어졌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생각보다 사교 모임에 잘 어울리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못 어울릴 성격은 아닌걸요. 이런 자리에 나오게 된지 꽤 되기도 했잖아요.”

   집에서는 별로 어울리지 못했지 않았느냐.”

   그건…….”

 

   순간 쓰고 있던 가면을 떨어트리고야 만다. 네일은 당황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직구로 말 해올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그때도 나름 숨막혀하는 걸 잘 숨기면서 지냈다고 생각했다. 불완전했나. 확실히 어린 시절의 일이긴 하지만. 네일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괜히 제 입술만 약하게 짓씹었다. 그러다가도 금방 그만둬버린다. 입술이 찢어져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저가 못 본 사이에 상처를 만들고 왔다며, 무슨 일이냐고 엘리후가 물어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다. 네일이 끝내 대답을 포기하고 다시금 시선을 피할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유쾌하게 웃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래서 불편할 수밖에 없는 거다. 마른세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나도, 다른 가족들도 알고 있단다. 네게도, 네 아버지에게도 그랬겠지.”

   더 곤란한 이야기가 나와 버리네요. 아버지는 나름대로 노력하셨던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은 노력하지 않았다는 양. 물론 그 뜻이 안에 숨겨져 있긴 했다. 그 주제는 꺼내지 않아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다. 못 읽어낼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그 집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던가, 편하게 있으려고 한다던가, 구성원들이나 집 자체에 어울린다던가. 그런 노력을 일절 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졸업 직후 나오려고 했으니까. 그 집은 저가 사용했던 방 안에 있을 때마저 숨이 막히게 하는 곳이었다.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며 방을 비워뒀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본가에 머물러야 할 때마다 그 방을 쓰긴 했지만. 평생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저가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이상으로 이곳을 불편하게 느낄 사람이 있었고, 저 또한 그를 별로 이곳에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다. 오늘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절대로. 지금이야 제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적인 일이지만, 만약 본가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둘이서 보내온 시간의 반 이상은 함께하지 못했을 터다. 별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상상만으로도 아득해지는 느낌이라서.

 

   그래, 네 가족 이야기는 우리 둘 모두에게 별로 좋은 소재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마.”

 

   진즉에 그래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 분 일 초마저 아깝게 느껴지는 상황이라, 네일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릴 뻔 했다. 인내심은 좋은 편이라 참 다행이다. 살짝 내려간 안경을 바로 올리며 네일은 제 할아버지를 똑바로 마주봤다. 아무리 깍듯이 대해야 하는 사람이고, 예의를 차려서 대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정도의 불쾌함을 표출하는 정도는 허용됐다. 물론 네일에게 있어서는 깍듯함도, 예의도 사실은 별로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의지에 반하는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뒤엎고 나올 자신이 있었다. 클라이스는 가족에 대한 일말의 미련과, 이곳에서 저를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류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라.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네가 이런 모임에 나오게 된지 정말 오래 지나긴 했지. 어때,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있느냐?”

 

   그렇게 불편한 화제가 나오고야 만다. 네일은 이번엔 결국 참아내지 못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마저도 상대가 눈치 채지 못 할 정도로 빠르게 인상을 펴긴 했지만. 네일은 속으로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언젠가 한 번 쯤 분명히 저에게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지금일 줄이야. 물론 이 이야기가 언제 나오든 지금과 같은 기분일 것은 변함이 없을 테지만. 네일은 흘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연인의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뭐라고 답하는 게 좋을까, 엘리. 여기서 더 깊게 이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문득 머리를 들이미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네일은 겨우겨우 표정을 풀었다. 절로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글쎄요딱히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서요.”

   그런 것 치고는 꽤 자주 얘기를 나누는 여성분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데.”

   사람이라도 붙여두셨나 보죠?”

   하하, 너무 날 세우지는 말고.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네 친척들이 말해주었을 뿐이다.”

 

   절로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남이 보기엔 친밀해보이나? 오늘 엘리후가 질투심을 보였던 건 단순히 저가 그걸 유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안 그래도 사이가 가까워보였나. 참 이상한 일이다. 미소를 억지로 걸치고, 불필요할 정도로 격식을 잔뜩 차린 말투와 태도로 일관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나. 자주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러한 이유로 불편하면 불편했지, 절대로 편한 사이는 아니었다. “날을 세운 건 어떤 의미라고 받아들여야 하느냐?” 그 말에 잠시 단어 선택을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네일은 작게 혀를 찬 후 입을 열었다.

 

   그분이랑은 딱히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단 한 번도 없고요. 그냥 어쩌다보니 이런 자리에서 자주 뵐뿐이에요.”

   그렇다면 차라리 잘 되었구나. 내가 봐 둔 사람들이 몇 있다.”

 

   그 정도의 여성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지요. 그렇게 말 할 뻔 한 것을 꾹 참고 네일은 슬쩍 시선을 내렸다. 이럴 때면 역시 확 밝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디까지나 생각으로만 끝날 뿐이었다. 아직은 시기적으로도 부적절했고, 상황적으로도 서로를 난감하게 만들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둘러대는 것이야 굳이 밝히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저 혼자 난감해지는 것쯤이야 네일은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어디까지가 해도 되는 선이고, 해서는 안 되는 선인지. 슬슬 화가 나는 이유에 대해서. 비밀이긴 하지만 저에게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는 연인이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강요받는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불쾌했고, 그렇다면 이 불쾌함을 어느 정도는 표출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켜야할 선은 과연 어디에 그어져 있는가. 그 선을 넘는 것으로 제게 돌아올 여파는 어느 정도고, 그에게 돌아갈 여파는 어느 정도인가. 그 단시간에 머리를 굴리는 것은 꽤나 골이 아픈 일이었으나, 이내 네일은 단어 선택까지 모두 끝마치고 입을 열었다.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이 일에 대해서 감수해야 하는 것이 오로지 저 혼자뿐이라면. 그렇다면 얼마든지. 네일은 일부러 빙긋 웃으며 이 상황에선 무겁게만 느껴지는 말을 아주 가볍게 내뱉었다. 눈앞의 남자가 얼굴을 굳히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 그마저도 제법 유쾌하게 느껴졌다. 그걸 떠나서 말해버렸다는 속시원함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는 굉장히 불쾌하네요. 관심 없는 이유, 이해 하셨죠. 불쾌한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일.”

   이 참에 다 말해두도록 할게요. 이런 자리도 솔직히 불편합니다. 여러 방식으로 챙김 받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참견하지 않아주셨으면 해요.”

 

   이렇게 말해봤자 제 뒤의 성이 떼어질 리는 없다는 것을 네일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떼어낼 생각도 없었고. 저가 쓸 만 한 패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건 어느 면에선 굉장히 슬픈 일이었으나, 동시에 유용했다. 저의 입장과 위치를 알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얼마나의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 이런 자리에서 배워온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원하지 않아도 익힐 수밖에 없었다. 불편한 대화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도. 지금 뱉어낸 말은 상당한 강수였으나, 멀리 내다보면 일찍 해두는 게 훨씬 나은 말이었다.

 

   보내주시던 돈도 이제 안 보내주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이제 제 앞가림 제가 하면서 살아야 하니까요.”

   아니다. 너도 엄연히 클라이스의 아이잖니. 그리 많이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의 잡다한 부분들을 도와주는 것에 대한 보수라고 생각해라.”

 

   이것이 저를 위해 보이는 순수한 호의가 아님을 네일은 알고 있었다. 네일 클라이스. 살아남은 아이. 영웅과 똑같은 호칭을 지닌 소년으로서, 두 번이나 살아남았다는 것은 꽤나 이슈가 될 만한 일이었다. 그러니 저는, 일종의 장식물 취급인 것이다. 집안에서는. 실제로 한동안 마법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클라이스는 저의 존재로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거추장스러운 타이틀은 둘째치고서라도, 마법부에서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교수님들도, 심지어 교장선생님마저 저를 탐냈다. 마법부에서는 원하는 부서의 자리를 주겠다, 교수님들은 저마다 친인척들이 운영하는 가게나 단체의 임원으로 삼아주겠다 등등. 교장선생님은 당연하게도 호그와트 교수직을 권해주었다. 물론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있는지라 모든 것에 거절 의사를 표하고 졸업한 모교였다. 비단 호그와트에서의 성적뿐만이 아니라 타이틀 때문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그 타이틀에 대해서는 좋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결론을 못 내리겠으나. 썩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그저, 아마 평생을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을 뿐.

 

   클라이스를 버리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아직은요.”

 

   네일은 옅게 짓고 있던 미소를 지워버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버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읽힐 말이었기에 그 말은 삼켜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그와 관련된 물음이 되돌아왔다.

 

   버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이로구나. 굳이 지금 남겨두는 이유는 무엇이지?”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기 위해서요.”

   그건 너를 위해서인가?”

 

   이건 꽤 어려운 질문이었다. 바로 답 할 수 없는 이유는, 글쎄. 네일 또한 제대로 알지 못해서였다. 깍지 껴잡은 제 두 손을 가볍게 풀고, 네일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저를 위한 것과 그를 위한 것의 선은 어느 정도인가. 그를 위한 것이 동시에 저를 위한 것이며, 저를 위한 것이 동시에 그를 위한 것이 아닌지. 이렇게 묶여버린 세월도 꽤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그렇게 묶인 게 불편하냐 묻는다면, 불편할 리가 없다고 바로 답할 수 있었다. 이이상의 행복은 없을 텐데. 조금 더 생각을 이어나가던 네일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답을 뱉어냈다. 지금 하는 말이 정답일지는 잘 모르겠으나.

 

   물론 저를 위해서 일거예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뒷감당은 할 자신이 있겠고.”

   하지 않았다면 말하지 않았겠죠.”

   그래, 알았다.”

 

   예상 외로 쉽게 떨어지는 대답에 네일은 조금 얼떨떨해졌으나, 그냥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더 할 말은 없을 것이기에 네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인을 더 기다리게 하기도 뭣하고.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린 뒤였기에. 정말로 감기에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사소한 걱정을 하며 네일은 짧게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는 말을 남기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럼 숨통이 트이겠지. 소중한 시간을 다시 가질 수 있겠지. 그리 생각하니 답답하고 찝찝한 마음은 조금 덜해졌다.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일은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그 녀석 말이다.”

 

   그 말이 들리지만 않았더라면.

 

   ……누구를 말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알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도 데려왔더구나.”

 

   가장 불쾌한 대화 소재를 꼽으라면 이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싫었다. 껄끄럽고 불편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끔찍할 정도로 아끼고 아끼는 연인이라서, 항상 데려오는 걸 망설였다.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 또한 커서. 부러 욕심을 부리면 이렇게 후회할 일이 생기곤 한다. 그렇다고 후회하기에는 같이 보낸 시간은 즐거웠으니. 네일은 딱 문고리를 잡은 손을 이대로 돌려 문을 열고 나가버릴까, 아니면 말을 받아줄까. 꽤 오랜 시간을 대답 없이 고민했더랬다. 물론 결국 선택지는 후자뿐이었지만. 전자를 택했다간 일이 더 귀찮아질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제법 대형 사고를 친 셈인데.

 

   신뢰 하나는 높이 사주마. 물론 그 신뢰가 클수록 배신당했을 때의 아픔도 크겠지.”

 

   네일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안경 뒤의 시선이 제법 싸늘했다. 눈동자는 시릴 정도로 차갑게 식어있었고. 숨기지 못해버린 건 꽤나 드문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숨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숨기지 않은 것이었다. 별로 숨기고 싶지 않은 불쾌함이었기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까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어디가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를 한참 쳐다보며 네일은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내 작게 헛웃음을 토해냈다. 묘한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눈, 그리고 표정으로 응수했다.

 

   참견 하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만.”

   “네가 버리지 않겠다고 한 이상은 내 자유 아니겠느냐. 그리고 딱히 참견은 아니었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 조금이라도 들은 게 잘못이지. 네일은 고개를 휙 돌려버리고 그대로 손을 움직여 문고리를 돌렸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문 밖으로 나가기 전 네일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맘대로 지껄이지 마시죠.”

 

   문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 짜증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일은 안경을 벗고 짧게 마른세수를 했다. 손을 떼어내고 난 후의 시야는 심각할 정도로 흐렸다. 그마저도 짜증을 유발하는 일이라, 네일은 괜히 거칠게 안경을 다시 쓰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 층을, 저택을 빠져나갔다. 한시도 더 붙어있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꽤 오랫동안 오지 않을 생각이다. 부르더라도 한두 번 정도는 가볍게 무시해도 되겠지. 그만한 불쾌함과 짜증을 선사해 주었으니. 모처럼의 자리라서, 조금 더 즐기다 갈까. 하고 말 할 생각이 조금은 있었는데. 그마저도 싹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참, 저가 가끔은 너무나도 바보 같은 것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네일은 픽 웃어버렸다. 정말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네. 잠깐 보았던 무표정은 저를 발견하자마자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마저도 웃음이 나와서. 네일은 한달음에 엘리후에게 다가가 무작정 그를 끌어안고 말았다. 엘리후는 잠시 눈을 크게 뜨고 그런 네일을 바라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고는 등을 두어번 토닥여주었다. 네일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편하다. 당장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갖고 있던 불쾌함과 짜증이 빠른 속도로 씻겨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엘리후는 네일의 등을 몇 번 더 쓸어주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웃으며 말을 건넸다.

 

   무슨 일 있었어?”

   으응. 아니, 아무것도.”

   그럼 어쩐 일로 갑자기 어리광이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어진 말에 네일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조금 떨어져나갔다. 그나마도 금방 다시 꼬옥 끌어안아버렸지만. 잠시라도 떨어져있기 싫다는 듯이. 엘리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만가만 제 품에 부비적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만 했다.

 

   집에 가자, 엘리. 많이 추웠지.”

 

   제 뺨을 감싸오는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엘리후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라면 그 뒤이어 잔기침이 몇 번 나왔다는 것 정도. 저가 그래놓고 우스운지 엘리후는 작게 키득거렸다. 네일 또한 픽 웃어버리며 작게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아주 잠깐 떨어져 있었던 것뿐인데, 마치 1년은 보지 못했다는 양. 잠깐 닿았던 입술이 금방 떨어져나가자, 엘리후는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네일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연인의 목에 감고 있던 팔을 떼어내며 네일은 고개를 기울이며 옅게 미소지어보였다.

 

   가면. 마음대로 해도 좋아, 오늘은.”

   그 말 진심이지?”

 

   허리를 숙여오며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네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한데. 지금 기분이 좋아 보이니 딱히 묻고 싶지는 않았다. 엘리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네일을 빤히 쳐다보다가, 똑같이 가볍게 입술에 쪽 해주고는 옷매무새를 조금 가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손을 잡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네일 또한 순순히 따라 걸음을 맞추었다.


  역시 이름 뒤의 성을 버릴 날이 온다면 역시 나를 위해서 보다는 너를 위해서일 것이리라고. 제 연인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평생 알지 못할 그런 생각을 네일은 문득 했다.

엘리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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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일

  사교성이 부족하다, 보다는 사람을 사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네일에게 있어서는 더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빠르게 피곤해지곤 했다. 저를 알아볼 사람이 많은 집안 행사에서는 더더욱. 게다가 오늘은 저에게 쏟아진 이목들 덕분에 두 배 정도 더 피곤했다. 겨우 축가 연주가 뭐라고. 그러다가도 결혼식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네일은 곧바로 제 방으로 향했다. 좋은 게 딱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꽤 오랜 시간 저를 괴롭혔던 짐 하나를 겨우 덜어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집에 도착한 지금까지도 연인이 제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다. 오늘 자고 갈 모양이구나. 그렇게 또 기분이 좋아져버리고 만다.

  침대에 털썩 앉아선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고 있으니, 자연스레 방까지 따라온 엘리후가 제 옆에 앉았다. 피로가 꽤 많이 쌓였는지 눈이 조금 아팠다. 그렇게 네일이 한참이나 눈만 비비고 있자 엘리후는 손을 뻗어 그런 네일의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눈을 비비던 손이 내려지고, 평소 잘 때가 아닌 이상 잘 벗지 않는지라 보기가 힘든 맨눈이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 눈을 오래 비빈 터에 눈가가 그 색보다는 조금 옅게, 발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엘리후는 그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제 손으로 두어번 눈을 비벼주었다. 종종 약한 감기에 시달리는 것만 빼면 네일은 대체적으로 건강했지만, 항상 걱정스러운 건 눈이었다. 예전에는 안경을 벗고도 시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스물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급격히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의 네일은 안경을 벗으면 조금 떨어진 곳의 저를 볼 때 약하게 인상을 쓰곤 했다. 그러니 계속 눈을 비비는 행동에 걱정이 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졌어.”


  겨우 이정도로 말이지. 엘리후는 픽 웃으며 눈가를 비벼주던 손을 내려 시트 위에 놓여져 있는 네일의 손을 잡아 올렸다. 이내 오늘 수고를 참 많이 했을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다. 네일은 잠시 그걸 보고 있다가 고개를 슬쩍 돌려버렸다. 연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부분부분마다 약한 간질거림이 남았다. 이윽고 반대쪽 손까지 잡아 열 손가락 모두에 키스하고 나서야 엘리후는 네일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시선만 힐끔거리며 저를 보고 있었던 네일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별 저항 없이 기대오는 것이 퍽 사랑스럽다.


  “오늘 고생 많았어.”

  “그만 좀 불렀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네일은 작게 툴툴거렸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마냥 좋기만 했다.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 한참동안 네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엘리후는 다시금 손을 내려 네일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장갑을 벗고 잡아주면 더 좋을 텐데. 자주 하는 생각이었지만, 네일은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좋은 건 똑같으니까. 게다가 다른쪽 손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지금 제 손 위에 놓여져 있는 손에서는 장갑 너머에서까지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맨손으로 잡는 것과는 조금 약하지만 그렇기에 좋은 무언가가 있었다.

  피로가 풀림과 동시에 솔솔 오기 시작하는 잠기운에 네일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후도 피곤할테니 저가 잠들면 저를 눕혀주고 그 옆에 누워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 것이다. 같이 밤을 보내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쉬운 일이지만…….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미 잠기운이 모두 이겨버린 뒤였다. 불편해보이면 갈아입혀주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네일이 잠에 취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


  “날이 갈수록 더 잘 치니까 어쩔 수 없지.”


  피아노 말이야. 늦은 대답이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는지 엘리후는 그리 덧붙였다. 목소리에 조금 잠이 깨버렸다. 네일은 눈을 뜨고 엘리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였다면 그냥 대충 웃고 넘기거나 했을 텐데, 연인의 칭찬이란 기분이 좋은 것이라. 네일은 슬쩍 시선을 내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걸 들킨 건 꽤 예전의 일이고, 그를 위해서 쳐준 적도 여러 번이지만 그래도 뭔가 묘하게 부끄러웠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치는 걸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은 당장 축가를 연주하고 있을 때 깨달은 것이었다.


  “…그만큼 연습을 하니까. 이번에는 당연히 더 많이 해야 했고.”


  네일이 대답을 했으나, 이번에도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내리고 있던 시선을 다시 엘리후에게로 향하니,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히 하는 걸까. 네일이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마주쳤다. 금방 엘리후는 눈웃음을 보였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며 네일은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어렸을 적이라면 저도 모르게 피해버렸겠지만. 그 상태로 먼저 말을 꺼내려고 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대답이 늦는 거냐며. 대화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소 뜬금없는 말로 엘리후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리 물었을 것이다.


 “첫째, 네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평생 이어질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할게.”


  ─? 순간 네일은 말을 잃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엘리후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여전히 웃으며 그런 네일을 마주했다. 상황 파악이 안됐는지, 꽤 오래 눈만 깜빡이며 저를 바라보는 네일에 솔직히 말하자면 웃음이 터질 뻔 했으나. 여전히 잠이 덜 깬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하고 싶은 게 생겨버린 이상은 해야만 했기에, 엘리후는 웃음을 꾹 참았다. 연인의 손에 이끌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결혼식을 보고, 연인이 남을 위해 연주하는 축가를 들으며 문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엘리후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둘째,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너만을 바라볼게.”


  그제야 뒤늦게 엘리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달은 듯 네일은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여전히 웃고 있는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막힌 말문이 도저히 뚫리질 않았다.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면 안 되는 건가. 매번 이렇게 엘리후가 돌발 행동을 할 때마다 네일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곤 했다. ……하기사, 이런건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채로 듣는 게 더 설레긴 하지만. 그래도 야속한 것은 야속한 것이라.


  “셋째, 아무리 지치고 힘든 상황이어도 너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은 절대 하지 않도록 할게.”

  “잠시만.”


  제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네일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엘리후가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네일의 입에 댐으로써 그 이상의 말을 하는 걸 막아버렸다. 이내 “지금은 조용히 듣고 있어야지?”하며 푸스스 웃는 것이다. 네일은 눈을 내려 제 입을 막은 손가락을 잠시 보다가 이내 다시 엘리후를 보았다. 부끄러울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결혼식을 보고 온 뒤라서 그 분위기에 타, 정식은 아니더라도 꺼내보는 서약일터다. 알고 있다. 하지만 마치 정말로 그 자리에서 듣는 기분이라서. 입술에서 손가락이 떨어져나가자 네일은 저도 모르게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다시금 손가락이 닿아와 그것을 풀어주었다. 애써 멍청하게 짓고 있던 표정을 지워내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하여간에, 제멋대로다. 엘리후는 그 웃음을 보고 나서야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싫진 않아.


  “넷째, 항상 널 믿고 네 믿음 또한 저버리지 않을게.”


  싫을 리가 없잖아.


  “다섯째,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오래도록 변치 않고 오로지 너만을 사랑할게.”


  자, 그럼 이제 대답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엘리후는 눈을 떴다. 이내 그는 웃고 있던 표정을 지워내고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손이 뻗어져오고,


  “…네일?”

  “응?”

  “왜 울어.”


  손가락이 부드럽게 눈가를 쓸고 지나갔다. 오히려 네일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울고 있어? 전혀 몰랐다는 눈치로 네일은 빤히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엘리후는 다시금 픽 웃고 만다. 계속해서 네일의 눈가를 쓸어주며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다. 네일은 슬며시 그 손을 밀어내고 제 소매를 눈에 가져다댔다. 정말로 울고 있네. 어쩐지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기 시작한다 했다. 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쳐내며 네일은 옅게 웃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데, 그런데도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왜 우는지 알잖아.”

  “너도 참.”


  어쩔 수 없네, 하는 태도로 엘리후는 네일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설마 울 줄은 몰랐는데. 꽤 당황스러운 반응이라 저마저 놀라고 말았다. 여전히 작게 훌쩍이고 있는 연인의 등을 토닥여주다가 엘리후는 슬며시 드러나 있는 귀에 입을 맞추었다. 이내 등을 토닥이던 손으로 네일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 그 이마에, 콧잔등에, 볼에, 끝으로 입술에까지 가볍게 키스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답은 안 해줄 거야?”

  “……설마.”


  겨우 눈물을 그친 네일은 빙긋 웃으며 작게, 눈 앞의 연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사랑해.”


  언젠가 이런 약식이 아닌, 정식으로 대답할 날을 꿈꾸었다. 그때는 아마 지금보다도 더 울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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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 에디트] Adulthood





  에디트 저택은 영국에 홀로 남은 아이젠이 어느 순간부터 도피처로 선택한 공간이었고, 동시에 혼자임을 각인시켜준 악몽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7학년이 되고나서는 부탁을 받아 공식적으로 지키게 된 곳. 지킨다고 해봤자 이따금 들려 텅 빈 저택을 관리하거나, 영국에서만 해결 할 수 있는 공적인 관계를 처리하는 게 고작이었다. 반강제적으로 부여된 가주라는 이름과 그에 딸려온 의무들. 아무리 영국에 있는 게 아이젠뿐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맡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반대가 있었다. 제대로 해낼 리가 없다며. 허나 그 반발들을 모두 묵살하고 선택된 것은 어찌되었든 영국에 남은 아이젠 시안 에디트였고, 아이젠은 친척들의 걱정과는 달리 뜻밖에 저가 해야 할 일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따금 받아왔던 아버지와 친척들의 편지에 집안일에 대한 걱정의 말이 사라지고, 저에 대한 걱정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할 때 즈음. 전쟁은 끝이 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해의 여름이었다. 아이젠이 아버지의 편지에서 곧 돌아간다는 말을 보게 된 것은.


  그의 일생, 반도 넘는 세월 동안 비어있었던 저택이었다. 에디트가 영국을 떠난 것은 그가 10살 때의 일이었으니. 그래서 사람이 있는 에디트 저택이란 아이젠에게 꽤나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것이었더랬다. 영국 버밍엄의 어느 숲, 이따금 새가 우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던 세월이 10년을 넘고, 또 3년을 넘었다. 오로지 적막만이 가득했던 이 곳이 짐을 옮기는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아이젠과 마찬가지로 이 숲 또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일 터다. 동시에 앞으로 다시금 익숙해져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에디트 저택에 사람이 있건 없건. 그리고 사람이 있는 에디트 저택과 그 소란에 익숙해지지 못하건 익숙해지건. 아이젠이 이 장소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아이젠이 이곳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 할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이제 소년이 아닌 청년이 되어버린 아이젠 에디트는 허리를 숙여 늙은 개를 품에 안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이 자리에 자신이 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물론 멍청한 고민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주라는 이름이 저에게 걸려있었지. 이제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는 아니었다. 어른들의 분위기를 읽을 줄 알았고, 집안 내에서 자신과 관련된 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 정도는 충분히 상상해낼 수 있었다. 자신이 선택 받은 이유는 적어도 저가 알기로는 저만이 영국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였다. 그 이상의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저가 대대로 가주를 해왔던 핏줄에 속해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런 이는 저 뿐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도 있고, 이제는 동생도 있다. 다른 사람들도 있고. 그러니 이제 에디트의 사람들이 영국으로 돌아온 지금, 자신에게는 가주로 남아있을 이유도 명분도 없다. 아이젠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차피 그 여름날에 받았던 편지를 읽었을 때, 충분히 예상하고 각오해온 일이었다.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다. 어울리지도 않고 무겁기만 했던 짐을 없애는 거라 생각하기로 하자며, 아이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젠.”


  저택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이젠은 제이를 보기 위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슬슬 기억 너머에 묻혀가고 있던 목소리. 아이젠은 작게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것 외의 다른 반응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아서. 손으로는 슬슬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기 시작한 제이를 쓰다듬었다. 얌전히 있어야지. 처음 뵙는 거잖아. 두어번 머리를 쓰다듬자 그제야 얌전해졌다. 이럴 때면 어쩐지 제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게 실감되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해지곤 했다. 하기사 나이를 먹은 건 제이 뿐만도 아니었고, 그에 따라 변한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으니 할 말이 없긴 하다. 아이젠은 슬며시 제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조금 놀다가 와.” 작게 속삭이니, 영리한 개는 잠시 꼬리를 흔들며 제 주인을 쳐다보다가 근처의 숲으로 달려갔다. 아이젠은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느새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이젠은 슬쩍 고개를 돌려 남자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남자는 여전히 개가 사라져간 숲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아이젠은 뒤늦게 제 이름을 부른 것에 대한 대답을 하지도 않았고, 굳이 먼저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여러 감정이 섞인, 미묘복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 글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에디트에게 버려졌던 유년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 남자에게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한 때에는 버려진 것이라 여기긴 했어도.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으니. 에디트와 아이젠의 관계가 특히 그랬다. 저를 버린 곳에서 일종의 구원 요청을 받았던 17살의 그 해. 자신의 기분이 어떠했는지, 실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어이없어 했던가, 겸허히 받아들였던가. 그 때의 저는 분명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받아들였다. 과연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지금은 그닥 상관없어져버린 이야기지만.

  남자가 아, 하는 멋쩍은 소리를 내고는 아이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젠은 다시 한 번 입만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변한 것에는 배운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깊은 속내를 숨기는 방법. 여리고 약한 면을 포장하는 방법. 그런 것들. 아이젠 에디트는 느릿하게 입을 연다.


  “많이 늙으셨네요, 아버지.”

  “10년도 더 넘게 지나지 않았니. 너야말로… 많이 변했구나.”

  “13년이나 지났으니까요.”


  10살의 아이젠 에디트와 23살의 아이젠 에디트. 그 간극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제 아비를 아빠라 부르던 소년은 사라졌고, 격식을 차리는 방법을 알게 된 청년만이 그곳에 존재했다. 성장이라 말할 수 있겠으나 동시에 굉장히 씁쓸한 일이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으나. 사람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라며, 처음 변화를 맞이한 이후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도 그 변화에 씁쓸해했던 주제에. 정확히는 본인의 변화보다는 친구들의 변화를 씁쓸하게 여겼다. “사람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다.” 수백 번을 되새기며, 자신의 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친구들의 변화를 묵인했다. 아픈 일이었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니.”

  “그게 먼저인가요.”


  잘 지냈니, 같은 다정한 인사를 기대한 건 아니다. 어차피 편지에서 수도 없이 봐 온 말이었으니까. 잠시라도 아버지를 증오했던 시간은 없었다. 에디트의 모든 이가 저를 낮잡아볼 때에, 유일하게 아버지만은 이전과 다르지 않은 태도로 대해주었으므로. 물론 그 태도에 적지 않은 실망이 담겨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부모자식간의 정이라는 것은 남들의 비아냥거리는 말과 무시하는 시선을 모두 감쌀 수 있을 정도로 큰 존재였다. 앞서 딸 하나가 비슷한 취급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젠의 경우에는 더 익숙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그 ‘딸’의 존재는 그에게도, 아이젠에게도, 혹은 에디트의 모두에게도 일종의 금기가 된 것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일찍이 에디트를 떠난 이였으니, 에디트의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편이 다행인 일이었다.

  아버지가 입에 담은 ‘해야 할 이야기’는 아이젠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가 분명했다. 이유도 명분도 없는 자리를 빼앗아가려고 하는 것이겠지. 당장은 아무렇지 않더라도, 막상 그 짐이 제 어깨에서 사라지고 나면 과연 어떻게 될까. 후련해할까, 서운해할까, 아니면 허전해할까. 적어도 저가 가주로서 지냈던 약 6년의 세월 동안 보다는 상당히 한가해질 것이라는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하는 일도 특별히 없는 입장에서는 조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쓰던 시간조차 이제는 쓰지 않게 될테니까. 비어버린 시간을 과연 무엇으로 채워야 할 것인가. 저에게 남겨질 숙제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제 아비가 머쓱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아이젠은 미소를 조금 더 부드러운 형태로 바꾸었다.


  “고생 많으셨겠어요.”

  “글쎄다.”


  뭣도 없는 아들을 홀로 감싸느라. 그 멀고도 차가운 바다 건너의 나라에서, 당장 제 곁에 있지도 않은 아들을. 그것만으로도 아이젠은 상당히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에디트에서 성에 차지 않는 아이를 없는 사람 취급 하는 것 쯤이야 아주 간단한 일이 아닌가. 아이젠은 반 정도 그 케이스의 사람이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재능 모두가 부족했다.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예술, 음악에도. 그리고 그 물 밑에서 무조건 아주 밝게 빛을 내야하는 마법에도. 모든 것이 어중간했다. 에디트에서 그것은, 일종의 죄로 취급되곤 한다. 그런 이들은 깨닫고 나면 정말로 저가 죄인인 마냥 살아갔다.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당연히 있었으나……. 무력함으로는 쟁취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다. 그 무엇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이만 들어가죠. 친척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잖아요.”

  “……어른이 되었구나.”

  “글쎄요.”


  아버지가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하며 아이젠은 빙긋 웃었다. 어른이 되었을까. 사실 아이젠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길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제 늙은 아비를 이끌고 한창 분주한 저택으로 들어설 뿐이었다.



* * *



  ―그동안 수고 많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당장 아들에게도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이젠 에디트 이전의 가주가 바로 그였다. 그 자체가 에디트였으며, 에디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모두 사람 이하로 취급했던 자. 아이젠은 항상 할아버지의 앞에 설 때면 주눅들곤 했는데, 바이올린을 관둔 이후부터는 할아버지 앞에 설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아이젠이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저의 마지막 공식적인 무대에서였다. 그 때의 차갑디 차가웠던 할아버지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눈이 바로 사람 이하를 보는 눈이었다. 마법 세계에 들어선 이후, 아이젠은 종종 그들이 스큅이라고 부르는 존재에 대해서 듣곤 했다. 그들에게서 일종의 동정심과 함께 동질감을 느꼈다. 바로 그 시선 때문에. 수고 많았다, 는 말에 아이젠은 작게 고개만 주억거렸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여러 가지였으나 동시에 아주 간단했다. 아주 많은 일을 했더구나. 예. 훌륭하게 해냈어.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한데 말이다. 거기서 아이젠은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 서있던 아이젠 에디트는 아주 어릴 적의 소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바이올린을 내리던 그때의 소년. 다시 한 번 그 날의 무대에 서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숨이 막히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여름의 저택. 공기가 차가웠다. 눈동자가 조금 떨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문 밖에는 아버지가 계셨으나, 지금 이 공간에서는 명백히 혼자였다.


  “초상화가 다른 이름을 말했단다.”


  아이젠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웃어야만 했다. 짐을 덜어내는 자리였다. 이제 편해질 수 있는데 무엇이 힘들겠어. 그저 이 장소가 너무나도 두려울 뿐이다. 당장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아이젠은 우는 것과 웃는 것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굉장히 모순적이면서도 이런 상황이 아니면 보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괜찮아. 예상하고 있었잖아. 어떤 말을 들을지, 누구를 마주할지. 그러니까… 괜찮다.

  초상화는 대대로 에디트가 가주를 선택해온 방식이었다. 저가 가주로 선택되었을 때, 친척들이 반발만 했을 뿐 막지 못 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지켜져야만 하는 규칙이 있다. 본가 저택의 지하, 아주 깊숙한 곳에는 초상화 몇 개가 있었다. 말을 할 줄 아는 초상화가. 한 때 살아있었던 이들은 무언가의 이유로 초상화로 남아, 에디트를 지탱했다. 가주를 뽑는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 나름의 협의를 걸쳐 가장 알맞다고 생각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면, 곧 그가 가주가 된다. 초상화가 네 이름을 불렀단다. 7학년의 어느 날, 아버지에게 받았던 편지에 그런 내용이 쓰여 있었던 것을 아이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어찌 잊겠는가. 평생 저에게는 돌아오지 않을 자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초상화가 다른 이름을 말했다는 것은 정말로 바뀌어야 할 때라는 것을 뜻했다.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 내려오라는 의미다. 아이젠은 잠시 찾아온 정적에 생각의 흐름을 맡겼다. 기분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후련함? 서운함? 허전함? 그 무엇도 아니었다. 무덤덤했다. 그저 어서 이 자리에서 떠나버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허나 그 무덤덤함이 오히려 더 아프게 느껴져서, 아이젠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자리는 정녕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자리였나. 그렇다면 역시 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을. 17살의 자신에게 묻고 싶다. 어째서 그 제안을 승낙했느냐고. 그 때의 자신에게 물어봤자 답은 나오지 않겠으나. 정적을 깬 것은 누군가의 말이 아니었다. 아이젠 시안 에디트의 끄덕임이었다.


  “돌아가봐라.”


  마치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 준 것만 같다. 참 고맙네요.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꾹 눌러 담으며 아이젠은 “예.”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초상화가 말 한 다른 이름이 누구일까. 뒤늦게 궁금해졌으나, 이미 물을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새로운 가주라며, 이번에는 그를 마음에 쏙 들어 한 친척들이 아주 성대하게 파티를 열테니까. 그 자리에 참석한다면 자신은 어떤 시선을 받을까. 이전에는 그저 무관심, 혹은 비웃음. 그런 것들 뿐이었는데. 이번에는 조금이나마 연민이 담겨있을까. 어떤 것이든 별로 바라는 류는 아니었으나. 아이젠은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려는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볼 일은 없을 것 같구나.”


  대답하지 않았다.



  문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지만 대신 다른 사람이 있었다. 아이젠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이 아이가, 지금 몇 살이지? 아버지를 13년 동안 보지 못했다는 것은 동생 또한 13년 동안 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저가 10살일 때 동생과 헤어졌다. 그때 동생의 나이는 고작 7살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지금 동생은 스무 살이었다. 성인을 훌쩍 넘어선 나이. 문득 아이젠은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저보다는 작았으나, 그때에는 정말 콩알만 했던 아이가 이렇게 커져있다. 순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동그랗던 꼬마가 꽤나 이목구비가 날카로워져 있다. 저보다도 더할지도 모르겠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동생을 보며 아이젠은 뒤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알아볼 수 있다. 확실하게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안녕, 넬.”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안 좋았는데.”

  “첫 대화를 그런 거로 할 생각인걸까, 동생님.”


  아이오넬은 고개를 젓는다. “안녕, 형.” 형아라고 부르던 호칭이 조금 딱딱해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제법 귀여웠었는데. 적어도 이 아이는 에디트에서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현 듯 다음 가주일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나 그럴 리는 없었다. 그랬더라면 저를 만나러 이렇게 오진 못했겠지. 아마도 아버지에게 들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아이젠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방금 전, 차가운 문고리를 돌렸던 바로 그 손으로. 이제는 조금 따뜻해졌다. 저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시선에 아이젠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형이 어른이 됐어.”


  넷이었던 가족이 둘이 되어버렸다. 한 명은 자살, 한 명은 제 손으로 놓았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아버지와 동생 뿐이었는데, 둘은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어른이 되었다고. 정말로 어른이 되었나보다. 아이젠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른이란 말이지. 평생 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가주 자리에서 내려지자마자 어른이 되었다는 걸 깨닫다니, 참으로 이상하다. 아이젠은 키득거렸다. 그것만은 소년 시절의 그것과 비슷해서, 아이오넬 또한 비슷하게 웃었다. 형제는 분위기가 딴판이었으나 그 웃음 하나만은 닮아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라고, 동생 또한 변했으나 그덕에 아이젠은 어느정도 적응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때에도 저보다 어른스러웠던 동생은 그때보다도 더 차분하고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참으로 대견한 일이다. 누나에 대한 것을 묻지 않을 정도로 훌쩍 커버렸다.


  “짐정리 아직 다 못했지?”

  “응. 형이 여기 있다는 걸 듣고 바로 형을 만나러 왔으니까.”

  “그렇다면 도와줄테니까 어서 끝내러 가자.”


  끄덕이며 앞장서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젠은 속으로 혀를 찼다. 키가 더 컸으면 좋았을텐데. 몸이 약했던 어린 동생의 모습이 겹쳐져, 아이젠은 조금 속이 쓰려졌다. 지금은 괜찮을까. 이내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었다… 라. 계속해서 그 말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어른이 되어서 변한 게 있을까. 아리송했다. 호그와트에 다니던 시절, 졸업도 싫었고 어른이 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졸업은 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결국 해버린 것이었는데. 그 뒤로도 어른은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었다니. 그래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문득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다.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죄인처럼 살아가는, 저와 같은 성을 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저가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자신 또한 당연히 받아들이며 살아갔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이젠은 분명히 그것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힘이 없다면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다. 허나 힘이 있다면. 아이젠은 멈춰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끌어내려졌을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직 제게 남아있음을 아이젠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저는 달랐다. 그 무엇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존재했다. 혹은,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형?”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서일까. 아이오넬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젠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무 생각도 안 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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